- 최근 영화 <밀정>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통칭 '황옥 경부 폭탄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일본 경찰에서 경부로 일하던 황옥(1887-?, <밀정> 이정출의 모티프)이 있었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정말 친일파가 맞았는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의 정체는 소위 '위장 친일파'의 존재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데, 그의 일생을 논하며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지요.


[간신히 찾아낸 황옥의 사진. 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호외]



1. 의열단에 뛰어든 일본 경찰


 - 황옥의 이명(異名)은 황만동(黃晩東)이며, 188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에 특채로 임용, 일본 경찰의 일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대단히 높은 계급인 경부(현재의 경감)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황옥은 고등계에서 근무하였으며, 고등계가 주로 독립운동가 등의 정치범을 다루는 부서였음을 생각하면 그가 일본 권력의 개로 활약하여 출세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그런 그가 독립운동과 연을 맺게 된 것은 1920년,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김시현(1883-1966)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이 때 황옥은 김시현의 설득을 받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황옥은 계속 일본 경찰로 근무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주로 의열단 단원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김시현]


 - 그는 의열단 단원이며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웠던 김상옥(1890-1923)이 경찰의 수사망에 포위당할 처지가 되자, 이를 김상옥에게 몰래 알려 상하이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의열단 단원인 김지섭(1884-1928)이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되자 몸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김시현이 1921년 극동인민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황옥은 50원(현재 환율로 수백만 원)을 여비로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운명의 1923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온 한반도를 발칵 뒤집어 놓자 황옥은 김상옥의 배후 세력을 색출할 임무를 받아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습니다. 1923년 2월 중국 톈진에 도착한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의열단 단장 김원봉(1898-1958?)을 만나고,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동할 것을 서약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는 국내 주요 시설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국내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2.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황옥은 김시현 등의 의열단 단원들과 함께 다른 짐으로 위장한 폭탄들을 들고 경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함께 임무를 맡은 단원 중 김재진이 일본에 매수되어 계획을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황옥과 김시현을 포함한 9명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직접 관련자 중 김원봉과 김지섭 정도만 체포되지 않았는데, 황옥은 이들의 피신을 도운 후 자신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 현직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온 세상이 뒤집어졌고, 이들에 대한 재판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판이 해를 넘겨 진행되는 와중에 피고석에 선 황옥은 충격적인 진술을 하게 됩니다.


 - "나의 처지를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일망타진한다면 상관들도 나의 역량을 인정하고 경시(현재의 경정)로 승진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본래는 폭탄을 경성까지 오도록 한 이후 체포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일찍 발각되는 바람에 나까지 범인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황옥 재판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1923년 8월 9일]


 - 당연히 여론은 난리가 났고, 뒤통수의 대가 황옥은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이후 1925년 황옥은 건강 문제(장결핵, 폐렴 등)로 형집행정지 석방되었으며, 1928년 다시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 출옥하였습니다. 그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하 폭탄사건)'으로 불렀습니다.



3.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요?


 - 출옥 이후 해방 때까지 황옥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김시현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봤을 때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법정에서의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계속 인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4년에는 동료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폭탄을 옮길 수 있었던 것도 체포 전 황옥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하지만 그를 말 그대로 '밀정'으로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데, 일단 자신의 진술이 그러했고 그의 상관이었던 시로가미 유키치(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역시 "나의 재가를 받고 작전의 일환으로 벌인 일"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황옥의 정체성이 일본 밀정 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지섭의 사진과 거사 관련 기사. 1924년 4월 25일 동아일보]


 -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태도를 보면 그게 맞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체포된 김지섭은, 변호를 맡은 후세 다쓰지(1880-1953)와 대화하던 중 "황옥은 결코 밀정이 아니다"라며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옥을 직접 만난 김원봉 역시 그를 "경기도 소속 경찰이었으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불행하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이는 사실인지 불명).


 - 황옥은 해방 이후 <조선독립운동사>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반민특위 활동에서는 증인으로 출석, 동료 친일경찰의 범행을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과거사 정리 관련 활동을 하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당했고, 얼마 뒤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선전방송에 출연한 이후의 삶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4. 정리 : '위장 친일파' 논란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


 - 대체로 학계에서는 친일파로 행세하면서 뒤로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소위 '위장 친일파'들이 다수 실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정체를 절대 밝혀서는 안 되는 특성상 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후세에 알려진 것은 그들이 친일파의 이름으로 가졌던 공식적인 지위, 그리고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주변인의 증언 정도 뿐입니다.


 - 황옥 또한 비슷해서, 그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폭탄사건에 관한 재판기록이나 그 주변인의 단편적인 증언(의열단원들, 동료 경찰 등) 말고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해서, 황옥의 실체를 소상히 밝히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지요. 그나마 황옥 자신이라도 계속 있었다면 언젠가는 진실을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한국전쟁 때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ㅡㅡ;


 - 실상 이는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의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이유가 커 보입니다. 해방 직후 친일분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밝혀내고 심판했다면, 친일파인 척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행적 또한 필연적으로 소상히 밝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는 해방 직후였으니, 이를 검증할 자료 또한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그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 버리는 바람에 이들의 실체를 밝히기 너무나도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아예, 명백한 친일파였던 이들을 '알고보니 위장 친일파였네'라며 호도하는 데 악용되기까지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ㅡㅡ; 요즘에는 이 때문에 위장 친일파에 대한 논의가 더 어려워진 측면도 있습니다. 이게 어떤 쪽으로 악용될 지 모르니까요.


 - 처음으로 돌아가서, 황옥은 정말 친일 밀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위장 독립운동가였을까요? 현재는 여기에 아무도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합니다. 글쎄요, 하늘에 있을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면 혹시나 알 수 있을런지. 이들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사를 제때 정리하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노릇입니다.


 - 여담으로 그와 함께한 독립운동가들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합니다. 김지섭은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복역 중 옥사, 김원봉은 해방 후 왕년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후 빡쳐서 월북했다가 숙청, 김시현은 대한민국에서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이승만의 횡포에 역시 빡쳐서 암살 기도를 했다가 실패, 다시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0977125

http://news.mt.co.kr/newsPrint.html?no=2015081314472814366&type=1&gubn=undefined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2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media.daum.net/m/channel/view/media/20150815060507538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42809



1.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1)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 아직까지 전문가들과 학생들의 전유물이던 비디오게임이 일반 대중에게 급속히 전파된 시발점은 1972년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를 피해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주한 전기공학자 랠프 헨리 베어(1922-2014)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군수업체 샌더스 어소시에이츠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던 1966년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던 중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꼭 대형 컴퓨터로만 게임을 즐겨야 하나? 기기를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서 가정용 TV에 연결해서 플레이할 수는 없을까?"


 - 메모광(?)이었던 그는 이를 잊지 않고, 2년 정도 틈틈이 작업하여 그럴 듯한 기계를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이 기계의 겉면은 나무 무늬 테이프로 포장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브라운 박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프로토타입까지 만들어진 이 기계는 그의 직장인 샌더스 사에서는 출시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사정 끝에 TV 제조업체인 마그나복스와 계약을 하여 1972년 10월에야 정식 출시되었습니다. 출시 당시 명칭은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 이 기계는 사실 아주 단순해서, TV 화면에 몇 개의 점을 띄워놓고 이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정도의 기능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해당 게임에 맞는 셀로판지를 TV에 붙이고 그것에 맞추어 점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ㅡㅡ; 그래도 선으로 연결된 조종기라든지, 게임의 종류를 바꾸는 일종의 카트리지(사실 이 때는 단순히 회로의 연결을 조작하는 스위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트리지라기엔 애매하지만) 개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개발자인 베어 본인이 화면에 대고 쏘는 광선총을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는 정작 그렇게 큰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가격이 $100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비싼 편이었기도 하고(1970년대 초입니다), 마그나복스 대리점에서만 판매하는 바람에 많은 소비자들은 이 게임기가 마그나복스 TV 전용 기기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도 첫 해 10만 대, 최종 33만 대가 팔려나가며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제시하였습니다. 한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플레이하는 모습]



2.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2) 최초로 성공한 아케이드 게임기


 - 1편 끝에 잠깐 등장한 놀런 부슈넬, <스페이스워!>를 보고 흥분했던 이 사람은 1971년 이 게임의 아류작인 <컴퓨터 스페이스>를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기)은 그럭저럭 주목을 받아서 2500대 정도가 팔려나갔는데, 개발 및 생산비용이 만만찮게 들어서 최종적으로는 적자를 냈다고 합니다.


 - 그래도 이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판단한 부슈넬은 뛰어난 엔지니어인 앨런 알콘(1948-) 등을 끌어들여 아타리(Atari)를 창업하였습니다. 아타리는 바둑용어 '단수(單手)'의 일본식 용어로, 바둑팬이기도 했던 부슈넬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는군요. 그 부슈넬이 알콘을 부추겨(큰 계약건이라고 구라(?)를 쳤다고 함) 1972년 말 2인용 탁구 게임을 개발하였으니 그 이름은 <(Pong)>입니다.


 - 아직 시작 단계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 부슈넬은 일단 자신과 친분이 있던 어느 선술집에 기기를 설치하고 운영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술집 사장이 "기기가 고장났다"고 알려와서 달려갔더니, 기기가 고장난 게 아니라 동전이 가득 들어차 동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에 확신을 얻은 부슈넬 일당(?)은 이 게임기를 대량생산하여 팔기 시작했고, 공전절후의 히트를 쳤습니다.


[퐁]


 - 이 게임기는 동전을 넣고 플레이하는 형태였고, 그래서 비슷한 형태의 게임기(하지만 비디오게임은 아닌)를 운영하던 '아케이드(오락실)'에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퐁>의 성공에 자극받아 이후 수많은 게임기들이 나왔고, 핀볼 등 컴퓨터 없는 게임기들이 있던 아케이드는 머지않아 비디오게임 일색으로 변신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퐁>을 가정용 게임기로도 출시하여 역시 대히트를 쳤습니다.


 - 그런데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와 부슈넬에게 느닷없이 태클이 날아왔으니, 마그나복스와 베어가 특허 위반으로 소송을 걸어왔습니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에 <퐁>과 비슷한 탁구(?) 게임이 있었고, 나중에 출시된 <퐁>이 자기들 게임을 베꼈다는 거죠. 이 소송전은 결국 아타리가 이들에게 돈을 주는 조건으로 합의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특허 관련 소송으로 오디세이 게임기 판매 수익보다 더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ㅡㅡ;



3. 1970년대 후반 : 게임 '산업'이 열리다


 - 오디세이와 <퐁>은 그 때까지 축적된 가능성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아타리 뿐만 아니라 미드웨이, 콜레코, 마텔 등 많은 기업들이 비디오게임에 돈을 투자하고, 들어오는 돈과 인력에 비례하여 게임 분야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1976년에는 페어차일드 사에서 '채널 F'라는 가정용 게임기를 출시하였는데, 최초로 '프로그램'이 내장된 카트리지(흔히 말하는 게임팩)를 쓰는 게임기였습니다.


 - 한편 1977년에는 아타리에서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 통칭 '아타리 2600(이하 2600)'을 출시하였습니다(2600이란 당시 컴퓨터 해커 사이에서 상징성 있는 숫자인데, 아마 여기서 따온 명칭으로 추정). 8비트급 CPU에 128바이트 RAM을 장착한 위엄 넘치는 물건이었던 2600은 처음에는 흥행이 시원찮았지만, 이후 급성장하여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릅니다.


[(左)아타리 2600, (右)2600용 게임 <핏폴> 플레이 화면]


 - 이렇게 게임들이 잇따라 흥행하고 대자본이 몰려들면서, 비디오게임은 단숨에 거액을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더 많은 자본과 더 많은 인력을 끌어모았고, 시장은 끝없이 커져갔습니다(다만 이것은 거품이었다는 것이 몇 년 후에 밝혀집니다). 1977년에 출시되어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개막한 애플 II 또한 게임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당연히 PC에서도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 미국에서의 열기는 다른 지역으로도 번졌고, 특히 당시 전자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일본에서는 타이토, 닌텐도, 남코 등 많은 기업이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78년에는 타이토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하면서, 일본은 미국에 버금가는 게임 대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일본 내에서 이 게임의 인기는 엄청나서 일본 내에 동전 품귀현상이 발생하고, 동전 수거를 크레인 달린 트럭으로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ㅡㅡ;


 - 이렇게 시장이 급성장하는데, 정작 시장의 선두주자인 아타리는 그에 걸맞는 투자를 받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부슈넬은 자본이 충분한 대기업의 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1976년 회사를 워너브라더스에 28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그 산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앙의 씨앗이 될 줄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몰랐겠지요.



4. 아타리 쇼크 : 초고대문명의 멸망


 - 문제는 워너와 아타리의 분위기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아타리는 설립자인 부슈넬부터가 히피 출신이었고, 히피 아니면 오타쿠(?)가 모인 기업이다보니 회사 내에서 대마초를 피우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심히 화기애매(?)한 가축적(?)인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ㅡㅡ; (당시 아타리의 직원 중에는 히피짓을 하던 때의 스티브 잡스도 있었다고) 당연히 이런 분위기를 새 주인이 된 워너가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 결국 2600의 초기 판매부진을 빌미로, 워너는 1978년 부슈넬을 해고하고 레이 카사르(1928-)를 새로운 CEO로 앉혔습니다. 이 양반은 나름 베테랑 경영인이라 회사의 급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2600 버전으로 출시하는 등의 노력으로, 초기 판매가 부진하던 2600을 시장의 1인자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카사르는 게임 개발자들의 성향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회사의 영광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새기지 못하게 하는 방침에 불만을 품고, 아타리의 한 개발자는 1979년 말 출시된 <어드벤처>라는 게임에 '특정 방식으로 플레이하면' 자기 이름이 나오도록 몰래 만들어 넣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스터 에그'의 시초]


 - 아타리의 분위기는 기껏 개발한 게임이 대히트를 쳐도 보너스는 커녕 크레딧에 개발자 이름 넣는 것 하나 허용되지 않을 만큼 경직되어 버렸고, 이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익숙한 개발자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항의하러 찾아간 개발자들에게 카사르가 '타월 디자이너' 운운하며 엿을 날렸다는 일화는 유명).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개발자들은 하나 둘 회사를 떠나갔고, 이들은 대부분 액티비전과 일렉트로닉 아츠(EA)에 모여 '서드파티'라는 개념의 게임회사를 만들었습니다(설명은 후술).


 - 유능한 개발자들이 사라진 아타리는 저질 게임을 양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들 뿐만 아니라, 1980년을 전후하여 나온 게임들은 몇몇 명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양에 비해 질이 크게 떨어졌고, 심지어는 그 조악한 그래픽에도 불구하고 19금 포르노 게임들이 마구잡이로 출시되기까지 했습니다(2600용으로 나온 포르노 게임을 '아타리 포르노'라 부르기도 합니다). 시장은 초 호황이었지만, 밑둥부터 썩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 거기에 1980년 전후 벌어진 2차 오일쇼크로 경제불황이 찾아오자 그동안 잔뜩 끼어 있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게임계의 최전성기라던 1982년, 아타리는 4분기 실적 예측을 이전보다 낮춰 잡았고 이는 곧바로 워너를 비롯한 게임회사들의 주가 폭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때부터 본격화된 시장의 축소에 위기의식을 느낀 아타리와 워너는 부랴부랴 스티븐 스필버그와 계약, 당시 최고의 영화 <E.T.>를 게임으로 만들어 출시하는데......


[AVGN의 <E.T.> 리뷰. AVGN 영상의 특성상 온갖 욕설이 난무하니 주의]


 - 이런 걸 게임이라고 내놨습니다. ㅡㅡ; 애초에 개발자들에게 주어진 개발 시간은 단 5주. 좋은 게임이 나올리가. ㅡㅡ;; 오죽하면 그 카사르마저도 "이건 무리"라고 반대했다지만, 워너 경영진은 달랑 저 시간을 주고서는 개발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날림으로 나온 게임의 운명이란 뻔했습니다. FXck!! 재고가 엄청나게 남았고, 아타리는 남은 카트리지를 모두 애리조나의 사막 한가운데 묻어버리는 위엄 넘치는 짓을 하였습니다. ㅡㅡ;;;


 - 결국 거품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던 게임 시장은 이 한 방을 맞고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음 해인 1983년에는 판매량에서는 선전했지만, 이는 가격을 거의 1/10까지 떨어뜨리는 무시무시한 덤핑의 결과물로 회사들이 거두는 수익은 크게 줄었습니다. 결국 이를 버티다 못한 대기업들은 잇따라 게임 시장에서 철수해버렸고, 거기에 빌붙어 게임을 만들던 중소 개발사들은 대부분 파산, 액티비전과 EA 등 PC 게임으로 갈아탄 극소수 회사만 살아남았습니다.


[미국 비디오게임 시장 규모를 나타낸 그래프. 출처]


 - 그리고 아타리는 1982년 말 2600의 후속작으로 아타리 5200을 출시하지만 폭망했고(컨트롤러의 감도가 개판이었다고 합니다), 적자가 계속되자 결국 워너마저 아타리를 매각하고 게임 시장에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비디오게임 시장 자체가 붕괴했고, 특히 가정용 게임 시장은 1985년 무렵에는 전성기(그래봤자 1982년)의 2%까지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비디오게임 산업은 한때의 광풍으로 끝났습니다. 아니, 끝난 줄 알았습니다. (계속)



###게임회사 분류에 관한 보충설명###

 1) 퍼스트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직접 만든 게임. 당연히 게임기 제조사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ex. 슈퍼마리오 시리즈)

 2) 세컨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자회사나 다른 게임 개발사에 하청을 주어 만든 게임. 시장에 나올 때는 게임기 제조사의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말 그대로 하청.

 3) 서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와 무관한 게임 개발사가 그 게임기에서 돌아가도록 자체적으로 만든 게임. 게임 개발사의 이름을 붙여 출시됩니다. 다만 게임기 제조사에서 '이 게임기용으로 게임을 출시해도 좋다'는 라이센스를 게임 개발사에 걸어놓을 수는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딴지라디오)> 中 42. "기본교양 게임사의 잉해" / 43. "기본교양 콘솔사의 잉해"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503754 (놀런 부슈넬과 아타리의 일대기)

http://thisisgame.com/webzine/series/nboard/212/?series=113&n=57382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http://vgsales.wikia.com/wiki/Video_game_industry (게임 시장 관련 데이터)

Google 도서 검색 (1) (2)



 -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은 한국인에게 정치에 대한 권한을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하죠.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문을 열어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수작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실현되기도 전에 끝납니다. 그런데 굳게 닫힌 문을 뚫고 일본 의회에 입성한 한국인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박춘금(1891-1973)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기적적인 출세를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춘금]



1. 물 건너간 조폭, 정치에 맛들이다


 - 박춘금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빈민층이라 학력이랄 건 딱히 없었고,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 정도를 배운 게 학업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나이 14세 때 러일전쟁이 터지자 한반도 전체는 사실상 일본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고, 박춘금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밑으로 들어가 급사(심부름꾼)로 일했습니다. 여기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익힌 그는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 광부 등 육체노동을 전전하게 됩니다.


 - 그런데 이 사람은 폭력배 기질을 타고났는지, 이후 폭력조직에 몸담고 나고야에서 조선인회장에 취임하는 등 거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무렵 박춘금은 그의 인생 길을 활짝 열어 줄 인연을 얻게 되는데, 극우 사상가인 도야마 미츠루(1855-1944)와 교류하게 된 것입니다. 도야마는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비밀결사(사실상 폭력조직) 흑룡희의 막후 실세이기도 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일본 극우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도 평가됩니다.


[도야마 미츠루. 그가 배후조종한 폭력집단은 이후 현대 야쿠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 그와 교류하면서부터 박춘금은 본격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1920년에는 이기동(1885-1952) 등과 함께 도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규합한 상구회(相救會, 이후 상애회(相愛會)로 개편)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는데, 이는 겉으로는 사회사업 단체였지만 실제로는 폭력조직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한국인 노동자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뒤에서는 일본인 자본가를 도와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에 앞장섰습니다.


 - 1923년 관동대지진에 이어 대규모의 한국인 학살이 벌어지자 상애회는 시체 처리와 한국인 색출(!!) 등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하였고(이들이 한국인임을 잊지 맙시다), 이후 당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박춘금은 상애회 조직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1924년에는 한국에도 지부 개념으로 '노동상애회'를 조직한 후 친일조직인 '각파유지연맹'에 동참하였습니다.


 - 이를 두고 동아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극딜을 퍼부었는데, 이에 박춘금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정(요릿집)으로 초대한 후 납치, 폭행 및 협박하는 위엄 넘치는 테러행위로 보답했습니다. ㅡㅡ; (이후 이 사건의 전말을 놓고 동아일보에서 난리가 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생략) 이후 노동상애회는 일본에서 하던 짓 그대로, 하의도 소작쟁의 등 한국인의 저항운동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데 협력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2. 정치깡패, 제국의회 입성!


 - 박춘금을 '정치깡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조직 활동이 철저히 정치적이었으며 일본 정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만드는 등 정치와 밀착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박춘금과 상애회의 맹활약이 일본의 지배층을 꺼뻑 죽게 만들기에 충분했는지,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 정계에 합류하였고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 당선되기에 이릅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한국인 중의원이었습니다.


[당선 확정 후 환호하는 박춘금과 지지자들]


 - 이후 박춘금은 제국의회 중의원으로 4년간 활동하다가 1936년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절치부심(?)하여 1940년과 1942년 선거에서는 다시 당선되었습니다. 중의원 내에서 그가 목소리를 낸 것은 주로 조선인 참정권이나 조선 내 일본군 증원과 같은, '한국에 대한 차별 완화' 쪽이었습니다(이에 대한 비판은 앞 글들에서 많이 언급했으니 생략).


 - 그러니까 그는 제국의회 내 유일한 한국인으로 (딴에는)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한 셈인데, 실상 이것은 한국을 일본에 완전히 편입시키는, 독립운동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제국의회 내에서 유일한 한국인이다보니, 박춘금의 활동과 발언들은 다른 중의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 나름 사회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이 됐으니 예전처럼 대놓고 깡패질은 못 할 테고, 대신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광산 경영 등 이권사업에 손을 대며 자신의 뱃속을 실컷 채워나갔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이 전쟁체제에 들어가자,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국강연을 여는 등 군국주의의 충실한 스피커 노릇을 다하게 됩니다. "학도병이 사오천 명쯤 죽어서 2500만 민중이 잘 된다면 더 좋을 게 없지 않은가" 따위의 망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 1945년 초 박춘금은 친일단체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이사에 취임하고, 얼마 뒤에는 또 다른 친일단체 '대의당'을 조직하였습니다. 해방 직전인 7월 24일 대의당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 조문기(1927-2008), 강윤국(1926-2009), 유만수(1923-1975)가 설치한 폭탄이 터지며 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항일 사건으로 '부민관 폭탄 의거'라 불립니다.


[사건이 발생한 경성부민관(現 서울시의회 건물)]


 - 이 사건을 전후하여 총독부에서는 반일인사 30만여 명을 체포,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박춘금은 데인 게 있으니까 여기에 적극 동조하였습니다. 부민관 사건을 계기로 8월 8일부터 반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고, 이들의 운명은 경각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3. 해방 이후


 - 일주일 후에 덜컥 해방이 되었고, 체포당한 인사들이 일제히 풀려났습니다. 이 와중에 박춘금은 잽싸게 우디르 태세를 전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거액을 헌납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ㅗ" 뿐이었습니다. ㅡㅡ; 한국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눈치챈 박춘금은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가만 놓아 줄 이유가 없지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발족한 반민특위는 해외로 도피한 친일분자들도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GHQ와 맥아더에게 박춘금을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반민특위는 얼마 뒤 와해되었고, 박춘금은 한국으로 끌려가는 일 없이 일본에 그대로 눌러앉게 됩니다.


[박춘금의 일시 귀국을 다룬 기사. 1962년 5월 27일 경향신문]


 - 이후 그는 일본에서 재일교포 유지 노릇을 하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통칭 민단) 창설에 관여하여 고문을 맡기도 했고, 조국통일촉진협의회니 일한문화협회니 하는 사회단체를 조직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놓지 않았습니다. 1962년에는 아세아상사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돌연 한국을 방문하여 며칠간 고향(밀양)에 체류하였는데, 한일회담 문제로 시끄럽던 시기라 악질 친일파인 그의 방문이 큰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 이후 1973년 사망하였고, 그의 유해는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의 아버지 묘소 곁에 묻혔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1992년 일한문화협회에서 그의 무덤에 송덕비(!!!!)를 건립하면서 박춘금의 이름이 다시 세간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고향 밀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쇄도했고, 결국 2002년 송덕비는 철거, 그의 무덤은 파묘하기에 이릅니다.


[박춘금의 무덤과 송덕비 앞에서 벌어진 항의 시위]



4. 정리 : 정치깡패는 답이 없다


 - 블로거의 생각에, 그의 일생을 정리하려면 '친일파'보다는 '정치깡패'에 중점을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의 삶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정치깡패들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박춘금은 자신이 가진 힘을 가지고 기득권층을 위하여 피지배민을 착취하고 억압하였고, 나아가서는 이 활약(?) 바탕으로 자기 자신이 기득권의 일원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 그에게 있어서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은,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일본 정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을 탄압하는 한국인'으로써 일본의 식민 지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니까요. 이를 좀 스케일 크게 벌임으로써 일본인 부럽지 않은 권력자까지 될 수 있었던 셈인데, 그런 그가 해방 후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고향을 찾았던 것이 또 웃기는 노릇입니다.


 - 박춘금이 몸담았던 일본의 암흑세계는 이후 야쿠자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의 큰 사회문제로 각종 이권사업과 정치에 관여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특히 시작이 그랬던지라 이들은 일본 우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해방(일본 입장에서는 패전) 이후 일본의 좌익·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테러에도 앞장서게 됩니다. 이 야쿠자 조직에는 많은 수의 재일교포가 참여해 왔습니다(이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어려웠기 때문).


[민단 중앙본부가 위치한 도쿄 한국중앙회관]

 - 박춘금은 해방 이후 재일교포 사회에도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북분단 이후 재일교포 사회 역시 조총련(좌익, 친북)과 민단(우익, 친남)으로 갈라졌는데, 우익 측 민단에는 박춘금 등 정치깡패 출신자들과 현직 야쿠자까지 대거 참여하여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야쿠자 중요 인물인 양원석(야나가와 지로, 1923-1991)의 경우 민단에서 야쿠자를 몰아내려 노력하던 지부장 김용환을 대놓고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 이들이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 때문에' 폭력배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폭력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더구나 그 폭력을 그 차별의 주체인 강자를 위하여, 약자를 향하여 발산했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들 뿐 아니라, 세계 대부분 지역의 폭력집단이 공통적으로 가진 성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느 사회에서든지 조직폭력배는 척결해야 할 암덩어리 이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협객? 의리? 그딴 거 없습니다. 정말로.]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2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3121 (경남도민일보 특집기사)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iBzz&fldid=EnMW&datanum=30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151 (흑룡회 관련)

https://www.minjok.or.kr/archives/76257 (동아일보 사주 폭행사건)



 - 지금까지 다루었던 많은 인물들은, 대부분 당대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식과 경륜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혹은 비뚤어진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왜곡하고 악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악질 친일파로 비판받는 자들 중에는 진심으로 일본의 침략이 한국에 좋을 것으로 믿었던 순진한, 아니 멍청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동학 지도자 중 하나였더 이용구(1868-1912)의 일생이 좋은 표본이 될 것입니다.


[그의 위엄 돋는 콧수염을 보라!]



1. 동학군의 행동대장 이상옥


 - 이용구는 1868년 경상도 상주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로 근근이 생계를 잇다가 19세 때는 청주로, 20세 때는 충주로 옮겨 살았습니다. 초명은 우필(愚弼)이었고, 뒤에는 상옥(祥玉), 만식(萬植)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 가난한 농민으로 자라난 그의 인생은 나이 23세 때,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하면서 크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동학 입교 후 그는 당시 동학 교주 최시형(1827-1898)의 밑에서 수학(修學)할 기회를 얻었고, 훗날 3대 교주가 되는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고족제자(高足弟子. 학식, 품행 등이 뛰어난 제자)로 동학의 중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질 무렵, 이용구는 호서지방(충청도)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남접과 북접의 세력권. 화살표는 1차 봉기 때의 진로]


 - 북접은 전라도 쪽 남접에 비하여 온건한 성향이었고, 1차 봉기 때는 아예 농민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북접 쪽에 있었던 최시형은 현실정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것을 원했고, 그래서 정치성이 강한 남접의 봉기를 지지하지 않았음). 하지만 1차 봉기의 여파로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고, 특히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남접 쪽에서 2차 봉기가 터졌습니다.


 - 이 때도 최시형, 이용구 등 북접의 지도부는 정부와의 타협을 주장하였지만, 남접군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격파하자 마침내 동학군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손병희와 이용구(당시 이름은 이상옥) 등이 이끄는 북접군은 전라도에서 올라온 남접군과 합류하고, 충청도의 중심지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습니다. 이용구, 아니 이상옥은 충주와 청주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을 격파하고, 이후 공주로 진격하는 손병희 군대의 우익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우금치에 있는 동학농민군 위령탑]


 - 하지만 공주 근처 우금치에서 동학의 주력군은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참패하였으며, 다른 전선에서도 잇따라 밀리며 동학군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용구의 부대는 논산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섬멸되고, 이용구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로 간신히 포위를 뚫고 충주로 도망쳐 몸을 숨겼습니다.



2. 일본 물 먹고 오더니 좀 이상해졌다


 - 이후 이용구는 수년간 가족을 데리고 피난 생활을 해야 했는데, 먼저 그의 아내가 체포되어 수감된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이용구 역시 1898년 체포당하기에 이릅니다. 얼마 뒤 최시형도 체포되었고, 최시형은 결국 처형당했는데 이용구는 어찌어찌하여 죽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 한편 최시형 사후 3대 교주가 된 인물이 바로 손병희였는데, 그는 계속 탄압이 이어지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동학의 포교와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세계 돌아가는 정세도 익힐 겸) 등 몇몇 지도자들과 함께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용구 역시 손병희를 따라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이용구는 얼마 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먼저 귀국, 지하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온 이용구의 행보가 어딘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할 무렵 이용구는 국내의 동학교도를 규합하여 '진보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보회는 송병준(1857-1925) 등이 이끌던 듣보잡 단체에 흡수통합되었는데, 그 단체의 이름은 일진회(一進會).


[일진회 회원들의 단체사진. 1908년]


 - 비록 진보회가 흡수당하는 형태였지만, 인원은 진보회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일진회는 단숨에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통합 일진회의 지도자로 떠오른 이용구는 러일전쟁 중 일본 지지를 선언하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일진회는 회원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의선 철도 건설(본래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으려고 하였으나, 만주 쪽으로 가려는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김)에 노역을 하도록 했습니다.


 - 당연히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이용구의 이러한 행보를 보고 경악하였고(동학이 원래 극렬 반외세 성향임을 생각합시다), 이용구의 행보를 적극 제지하려 하였지만 이용구가 이를 들을 턱이 없었습니다. 결국 일진회가 을사조약 지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계기로, 손병희는 직접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였으며 이용구와 그를 따르던 62명의 신자를 제명하였습니다.


 - 이에 이용구는 깨갱......할 리가 있나요. 제명당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라는 신흥종교를 만들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물론 출신이 출신인지라 시천교는 실제로는 동학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두 종교가 양립한 상황에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서로간에 전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ㅡㅡ;



3.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 이후 이용구는 정식으로 회장 자리에 올라 일진회를 이끌었는데, 실제로는 우치다 료헤이(1874-1937) 등 일본인 고문들이 단체를 배후조종하고 있었습니다. 통감부 설치 이후 사실상 통감부 산하의 어용조직처럼 되어버린 일진회는 이후 일본 침략의 앞잡이로 맹활약(?)했는데, 두드러진 분야는 성명문, 유세, 강연 등 친일 여론을 조장하는 프로파간다 활동이었습니다.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훗날의 다이쇼 덴노)의 한국 방문 때 일진회가 세운 환영 아치]


 - 당연히 일진회의 행보는 모두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특히 이 시기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은 너나할 것 없이 일진회 회원들을 우선 타겟으로 삼아 공격하였습니다. 1907~1908년 사이 1년여간 의병의 공격으로 사살된 일진회 회원만 9천여 명에 달했다고. ㅡㅡ;


 - 물론 이미 일본에 먹히다시피 한 일진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급기야 1909년 말부터는 소위 '합방청원서'를 잇따라 발표하며 한국-일본 간 병합을 청원(!!!)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일진회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일진회 내부에서도 탈퇴자가 속출할 만큼 많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정부 내에서도 일진회 수괴인 송병준과 이용구를 처형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 여기저기서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송병준과 이용구는 몸을 피하여 일본 군경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 와중에도 일진회 산하 조직들을 동원하여 합방청원을 지지하도록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무렵 일진회는 '100만 회원'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제 회원은 기껏해야 10만 명 미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는 4천 명 남짓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경찰추산 vs. 주최측추산?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이좋(?)게 찍은 사진. 우측이 이용구]


 - 당시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 총리 가쓰라 타로(1848-1913)에게 '합방 청원운동 비용과 합방 후 간도 이주비용'으로 야반도주? 300만 엔(현재 환율로 1000억 원을 넘습니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가쓰라는 "300만이 아니라 3000만 엔이라도 지원해줄 것"이라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병합이 실현된 이후, 일진회에 대한 일본의 대답은 "ㅗ"였습니다. ㅡㅡ;


 - 병합 직후 일본 당국은 모든 한국인 단체를 강제해산하였고, 거기에는 일진회 등 친일단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해체와 함께 일진회에 지급된 보상금은 300만은 커녕 고작 15만 엔에 불과했으며, 10만 회원이라 치면 1인당 1.5엔에 불과한 ㅡㅡ;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심한 충격을 받은 이용구는 결국 몸져누웠고, 그 길로 병세가 악화되어 1912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4. 도대체 왜 그랬을까 : 그는 순진, 아니 멍청했다


 - 이용구는 죽기 얼마 전 문병을 온 우치다에게 "우리는 참 멍청한 짓을 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속았던 건 아닐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스스로 '속았다'고 생각했던 건 물론 일진회의 협력에 뒤통수를 날린 일본의 행동이 일차적인 이유였겠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는 어려운 속사정도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이용구는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아시아주의(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인종이 단결하여 백인 세력에 맞서자는, 일종의 동아시아판 인종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 우치다를 만났을 때 이용구가 제시한 한일병합의 형태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유사한 '이중제국'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일종의 '동군연합'으로, 헝가리는 국방, 재정, 외교를 제외한 분야에서 자치권을 보유]


 - 즉 일본의 덴노가 전체를 다스리는 공동의 황제이되, 한국과 일본은 독자성을 유지하고 서로간에 평등한 병합을 하자는 이야기. 물론 이 말을 들은 우치다 등의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이에 적극 동감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병합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한국이 일본의 일개 식민지로 전락하는 형태였습니다. 애초에 아시아주의 자체가 이 무렵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 병합 직후 일진회가 별 대가도 받지 못하고 해체당하는 모습을 겪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속아서 살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고, 전국민에게 매국노 소리를 들어가며 벌였던 자신의 활동이 모두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절감한 이용구는 말 그대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차는 떠나갔는데요.



5. 정리 : 우리가 멍청해서는 안 되는 이유


 - 이용구는 분명 대단한 역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농민이 거대한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는 그에 걸맞는 통찰력을 갖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미 일본 내에서도 변질되어버린 아시아주의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으며 그 이상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중제국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 이 정도의 지도력을 갖추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 이렇게 멍청해 놓으면, 당연히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이용구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든 그와 그가 이끄는 일진회의 활동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 말 그대로 길을 닦아주는 꼴이었으며, 그들은 만고의 매국노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 물론 그 멍청함이란 이용구에게 어떠한 변명도 되지 못합니다. 그의 이상은 이미 뜬구름 잡는 구시대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본의 침략으로 이미 한국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는 일본의 침략에 협력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말 몰라서 그랬든, 아니면 알고도 그랬든간에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어디까지나 이용구 자신에게 있습니다.


 - 이러니 그가 나중에 "내가 속았다"라고 아무리 울분을 토한들 소용이 없지요. 우리는 그를 한심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불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가 속은 게 맞다 치더라도, 그것은 누군가에게 속은 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일생에 대하여 '멍청함으로 만고에 죄를 지은 매국노'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속았다고 해서, 여기에 그의 이름이 빠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angchil.egloos.com/958648

http://blog.ohmynews.com/jeongwh59/tag/%EC%9D%B4%EC%9A%A9%EA%B5%AC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530&index_id=cp05300109&content_id=cp053001090001&search_left_menu=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45/read/22293702 (이용구의 이중제국 제안)



 - '헬조선'이라는 말이 중요한 화두가 될 정도로 요즘 한국인들에게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 중 일부는 아예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뭘 해도 안될 열등종족'으로 비하하며 소위 '선진적'인 다른 사회를 찬양하는 극단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요즘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한국인은 답이 없다'로 일관한 신념형 친일파, 박중양(1872?-1959)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중양. 1900년경]



1. 근성으로 출세한 가난뱅이


 - 박중양의 출신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아버지 박정호는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지주 집 마름 노릇으로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출신이 이렇다 보니 그의 초년은 분명히 알려진 게 별로 없는데, 일단 출생년도가 1872년인지 1874년인지 분명치 않고, 심지어 그가 반남 박씨인지 밀양 박씨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ㅡㅡ; 초명은 박원근이었고, '중양'은 성인이 된 후 개명한 것입니다.


 - 초년의 박중양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출세욕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처음 실시된 일본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지만 여러 차례 낙방하였습니다. 그는 급진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을 존경하였는데,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 일파가 죽거나 망명하고 결국 김옥균이 암살까지 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김옥균씨 조난사건>.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유학생 선발에 계속 도전하면서, 박중양은 서울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런저런 기회를 타진하였습니다. 이후 1896년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거기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드디어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약 7년간 일본에 국비장학생으로 유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비유학생인데도 생활비는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는지, 유학기간 내내 그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는군요.


 - 박중양은 우선 기독교 목사인 혼다 요이츠(1848-1912)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그가 운영하던 아오야마학원(現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중학부로 진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토는 그에게 경찰, 행정 쪽으로 집중해 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


 - 그렇게 그저 가난한 유학생1에 불과했던 박중양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아내가 바다에 빠져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하필 거기 있던 박중양이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그를 구했던 것. 자기 아내를 살려주고 그에 대한 사례와 선물도 일절 사양한 박중양의 태도에 이토는 꺼뻑 죽었다고 합니다. ㅡㅡ; 이후 박중양은 이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박중양 또한 (의외로) 한국인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이토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2. '한국인은 답이 없다'


 - 그런데 이 시기 고종 황제와 대립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와 관련하여, 박중양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혹시 박영효의 일파가 아닌가' 의심하는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학비와 자객을 동시에 선사하는 고국의 모습에 진절머리를 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점차 키워가게 됩니다.


 - 일본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이토의 조언을 따라) 경찰과 행정 업무 쪽이었습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박중양은 도쿄 부기학교에서 금융 업무를 전공하였고, 동시에 도쿄 경시청(경찰청)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분야를 깊이 공부하게 됩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매우 성실해서 다른 유학생들이 흔히 빠지는 유흥과 잡기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식 성을 쓰며 일본의 엘리트 계층과 활발한 교유를 했다고 합니다.


 - 1903년 귀국하여 곧바로 관리서(管理署) 주사(主事)로 임용되었지만, 개혁세력을 적극 등용해야 한다는 자신의 상소가 황제에게 올라가지도 못하는 일을 겪은 후 바로 관직을 박차고 나와버렸습니다. 다음 해 러일전쟁이 터지자, 박중양은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취직(?)하여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활동하였습니다. 유학시절과 일본군 종군시절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친절함에 매료되었고 ㅡㅡ; 이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 1904년 11월 농상공부 주사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상소가  외면당하자 자청하여 대구로 내려가 한국인 관료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박중양은 상대적으로 일본 편을 들거나 중립적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였고, 일본인들의 신뢰와 호의를 얻게 됩니다. 1905년 2월에는 잠시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에 임명되는데,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유명한 촉석루를 제외한)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는 위업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ㅡㅡ; 지방관으로 가서 반달리즘이라니


[진주성은 해방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됩니다]


 - 이후 6월에는 의친왕 이강을 대표로 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때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난 박중양은 "한국은 도저히 답이 없으니, 미국 유학이나 하고 싶은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이토는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관직에 있을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수행원 임무가 끝난 이후 도쿄에 남아 다시 유학하고, 다음 해 귀국하였습니다.


 - 귀국한 박중양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임용되었고, 이후 그는 이토와 통감부를 뒷배경으로 쾌속승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06년 7월 대구 판관으로 파견된 박중양은 그 길로 대구군수로 임명되었으며, 취임하자마자 대구군청 신축부터 강행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대구군수 재임기에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구읍성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위업을 세웠습니다. ㅡㅡ; 성곽 해체 전문가


[당시 대구 동쪽 성벽을 허문 자리에 개설한 도로가 그 유명한 대구 동성로]


 - 그래도 이때까지는 나름 생각은 있었는지, 을사조약과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이후 평안남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북도 관찰사(도지사)를 역임하였으며 한일병합 직전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한일병합 당시에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국민이 충성할 의무는 없다"며, 슬퍼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라



3. 일제강점기의 활약(?)상


[박중양의 친필 휘호]


 - 병합 이후로도 박중양은 지방과 중앙을 오가며 관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10년대 후반과 1930년대 두 번에 걸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1940년대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충청남도, 황해도(2회), 충청북도 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 관료로서 활동도 두드러집니다.


 - 3·1운동 때는 자제단(시위 중단을 설득, 종용하며 적극 참여자를 신고하는 일을 하였던 친일 성향 단체)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경성(서울)과 대구 지역 자제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박중양 개인은 한국인 노점상을 괴롭히던 일본인을 아끼던 지팡이로 두들겨 팬다든지, 일본인들 앞에서 대놓고 비판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딱히 한국인으로서라기보단 '조선인도 똑같이 일본 신민이 되었는데 왜 사람 차별하는가'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 1923~25년 사이 충북도지사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이런저런 스캔들을 일으켜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4년 속리산을 유람하던 중 비 내리는 진흙탕 길(現 말티재)에서 진종일 고생한 박중양은, 빡친 나머지 보은군수에게 대대적인 신작로 공사를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공사 과정에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을 해야 했고, 심지어 농번기에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토목기사와 순사를 집단폭행하는 등 소요사태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박중양이 지시한 도로공사와 농민 소요 기사.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


 - 그해 말에는 더 큰 스캔들을 일으켰으니, 속리산의 산사(山寺)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 귀빈을 대동하고 술자리를 가진 후 취중에 여승 한 명과 성관계를 하고, 그 여승이 며칠 후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권력자의 성추문'이라는 특성상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다가, 다음해가 되어서야 동아일보 등의 폭로로 세간에 알려졌고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박중양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처벌은 받지 않았다


 - 이런 대형 스캔들을 연달아 일으키고도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위해 유용한 인물이었으니, 이후로도 박중양은 중추원과 지방행정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박중양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얼핏 보기엔 좋은 취지같지만 일본 중의원에 조선인 쿼터를 허용해달라는 등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같은 시기 유행한 자치론과도 통합니다).


 - 당연하게도, 193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걸고 활동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습니다. 1944년에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로 참여하였고, 1945년 초에는 조선인 몫으로 할당된 일본 귀족원 의원 7명(박중양, 윤치호 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1942년에도 선임되었으나 본인이 거부). 당시 일본은 중의원(하원) 임기가 만료되면 다음 선거에서 조선인 몫으로 23명을 선출하도록 할 생각이었다는군요. 소원이 이루어졌다! 정말로??



4. 해방 이후 : 나는 떳떳하다. 너희들이 노답일 뿐


 -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후 박중양은 윤치호 등과 함께 감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는데, 그 직후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 소식을 듣고 '일본도 머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는 해방 직전인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피고용인들을 약간의 퇴직금과 함께 내보내고, 해방 직후 자신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습니다. 그는 이 재산을 경성 근처의 양로원과 보육원에 무기명 기부한 후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 당연히 그는 친일 반민족분자의 수괴로 지목되어 가는 곳마다 욕설과 드잡이, 심하면 투석(投石)까지 당하곤 했는데, 그는 시종일관 당당했고 "나는 민족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에 더하여 "조선시대보다 일제강점기가 훨씬 살기 좋았으며, 일본은 한국을 착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가 여기에 또한 독립은 미국의 은총으로 우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운동가라고 어깨에 힘 주는 사람들은 전부 위선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1945년 말 박중양은 미군정 간부들과 이승만 등을 만나,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데 친일행위자를 왜 처벌하려 드는가? 난 어차피 위선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 처단하려거든 나를 처단하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한국인이 과연 독립할 자격이나 있는 놈들인지 모르겠다고 조롱한 적도 있다는군요. ㅡㅡ;


[반민특위에 출두하는 박중양]


 - 당연히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 수감되었는데 당시 그를 조사한 수사관은 "다른 기회주의 친일파와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만 한국인이지 생각과 행동은 그냥 일본인 그 자체였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재판에서도 자신의 주장과 조롱을 굽히지 않았고, 애국지사연하며 부정하게 산 놈들보다 자신은 훨씬 떳떳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평생 관료로 살면서도 부정축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된 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부모의 묘소를 대구 오봉산(現 침산공원)으로 이장한 뒤 자신도 그곳에 은거하며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1957년 신년에는 이승만더러 "미군 없으면 도망이나 칠 놈"이라며 조롱하는 등 개X끼 vs. X발놈 당시의 정부통령을 싸잡아 욕하다가 명예훼손으로 입건된 적도 있었고, 정부는 주둥이를 멈추지 않는 박중양을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그는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완강하게 버티며 정신병원 수감을 거부하였습니다. ㅡㅡ;



5. 정리 : '국개론'은 지극히 위험하다


 - 실로 뭐라 판단하기 어려운 박중양의 일생을 훑어보았습니다. 박중양은 자기 민족이 쓰레기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앞서 살펴본 기회주의자들과는 다른 '확신범'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에 도달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보다 영민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친일과는 엄연히 다르면서도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얼핏 보면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윤치호와 비교해도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윤치호의 사상이 '한국인은 현상태로는 답이 없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라도 근대로 발전해보자'였다면, 박중양의 그것은 '한국인은 뭘 해도 답이 없으니 그냥 일본인이 되어버리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못하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윤치호와 다르게, 박중양의 행적은 (심지어 그게 한국인에게 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철저히 '일본인으로서의 한국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 여기까지 보고 나서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살짝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한국 사회의 침체와 혼란이 장기화되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국은 더 이상 답이 없다" "한국인은 썩어빠진 놈들" "한남충을 재기하자" "노무현 운X하盧?" 등등 극단적인 담론이 창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거, 곰곰이 생각해 보면 100년 전 박중양이 내린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박중양이 결국 어떤 인생을 살았나 생각하면, 이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라면, 박중양도 윤치호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건설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들의 의지를 꺾은 것은 자신의 이상과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한 절망감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피와 땀을 흘리며,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절망은 '너무 성급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 박중양과 윤치호가 뭐라 생각했든, 한국이 강대국에 의해 독립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한국인은 노답"이라며 욕설과 한탄을 멈추지 않는 분들께 (거기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이 말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두 해 노력한다고 역사는 전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든다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역사는 결국 전진합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1014289 ('산하의 오역')



 -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가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수년 전 큰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애국가의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는 윤치호 역시 민족반역자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를 친일파들이 만들었다는 게 논란의 핵심. 당시에는 국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현재는 흐지부지 넘어가게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국민이 알지만 동시에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안익태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안익태]



1. 숭실학교의 유망주, 유학길에 오르다


 - 안익태는 1906년 12월 평양에서 7형제 중 셋째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객주(위탁판매, 중개 등을 하는 중간상인)업을 하였다고 하며, 그의 바로 앞 형인 안익조(1903-1950)는 일제강점기 의사와 군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안익조 또한 안익태처럼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며, 일본군 장교(군의관)로 복무한 이력 덕분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형제가 사이좋게 친일행위


 - 안익태는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고등보통학교(해방 이전에는 숭실학교가 평양에 소재)에 재학하였는데, 여기서 서양음악을 배우면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음악 외에 특이한 이력으로는 숭실학교 야구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숭실중학의 4번타자로 전조선야구대회까지 출전했다니 운동선수로도 꽤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922년 10월 17일 동아일보에 실린 야구대회 기사. 선수명단에 안익태의 이름이 있습니다]


 - 이후 안익태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흔히 1921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확실한 것은 아닌데 상술했듯이 1922년 야구대회에 숭실학교 대표로 출전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現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 음악특기자 자격으로 입학하였고, 1926년에는 구니타치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하였습니다.


 - 안익태는 구니타치 학교를 졸업한 1930년 미국으로 유학, 신시내티 음악원과 커티스 음악원 등에서 첼로와 지휘를 전공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유명 지휘자인 레오폴드 스토콥스키(1882-1977)와 교류하였고, 스토콥스키의 도움으로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지는 등 음악가로 본격적인 데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인교회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지휘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2. 유럽 진출과 활동


 - 안익태가 처음 유럽 땅을 밟은 것은 1936년이었습니다. 이 때 그는 파울 힌데미트(1895-1963),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 등을 만나 교류하고, 바인가르트너의 도움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아 유럽 무대에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아일랜드에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안익태. 1940년]


 - 이 때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건 빨라도 1941년 이후이고, 그나마도 후술할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연관이 있다는 것. 일단 확실한 것은 1938년부터 3년간 헝가리 리스트 음악원에서 코다이 졸탄(1882-1967) 등에게 작곡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 안익태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경우, 미국과 유럽을 오가던 1936~37년 사이에 작곡되었고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애국가의 그 선율은 그 이전인 1935년 미국에서 구상하였고(애국가 작곡 시기는 표절 논란과도 관련이 있어 중요), 6.25 전쟁 이후 마지막 부분이 추가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한국 환상곡> 전곡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인데, 자세한 논란은 후술합니다.


 - 지금이야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안익태의 주요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휘였고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에 걸쳐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시기의 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3.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


 - 2006년 유럽에 유학하여 음악학을 공부하던 송병욱씨는 1942년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환상곡>을 지휘한 동영상을 소개하며, 안익태의 친일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이미 2000년경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적은 있었는데, 당시 단순히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영상'으로 알려진 게 사실은 만주국 기념 음악회였음을 밝혀낸 것입니다.


[안익태의 <만주국 환상곡> 지휘 장면]


 - 더 나아가서 <만주국 환상곡>의 음악이 <한국 환상곡>과 상당 부분(특히 6.25 이후 추가된 부분) 일치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음악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고, 거센 논란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도 안익태의 해방 전 유럽 활동은 그 세부적인 내용이 잘 밝혀져 있지 않았는데, 이를 파헤쳐 보니 대부분 친일 행적이었다는 것입니다.


 -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게 속속 드러납니다. 일단 안익태는 유럽 활동 내내 일본식 이름인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하였으며, 흔히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면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고 막연히 알려진 것도 대부분 <에텐라쿠>나 <교쿠토(극동)> 등 프로파간다성 작품들을 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심지어 1941년에는 명치절(메이지 덴노 생일) 축하 음악회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연주한 것까지 새로 알려졌습니다. ㅡㅡ;


 - 이 과정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초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유럽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통설과는 달리, 실제 안익태를 도운 것은 주로 '일본-독일협회'의 지원이었고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도 오히려 이 단체의 주선을 통해서였다는 것.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단순히 한두 번 만났을 때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들은 게 크게 부풀려졌을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에하라 고이치의 기고문]


 - 2015년에는 안익태의 후원자로 알려진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의 글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1952년 일본 음악잡지에 기고한 <안익태 군의 편모>라는 글에는 안익태의 이런저런 친일 행적과,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도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안익태 본인이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간판을 이용하여 유럽 각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4. 마요르카에서의 말년


 - 어쨌거나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1944년 파리에서의 지휘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범으로 몰릴 위험을 피하고자(안익태는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독일에서의 친일 활동이란 곧 나치에 협력하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도피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 이후 1946년에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고, 같은 해 스페인인 롤리타 탈라베라(1915-2009)와 결혼, 스페인 국적을 취득합니다. 이후로는 마요르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스위스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객원 지휘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한국 환상곡>의 완성된 버전을 공연한 바 있습니다.


[1960년대 초, 5.16 '혁명' 기념식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 해방 이후 안익태가 처음 한국을 찾은 것은 1955년인데, 하필이면 대통령 이승만의 생일 기념 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후 고국에 뭔가 봉사하고 싶었는지 잠깐, 친일파였잖아 군사정부와의 협조로 1962년부터 3년간 서울 국제음악제를 주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악제는 이후 재정난과 국내 음악계와의 마찰 등의 사유로 이어지지 못했고, 여기에 안익태는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결국 얼마 뒤 안익태는 간경화증 진단을 받았고, 1965년 7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이후 더 이상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달 뒤인 9월, 안익태는 간경화가 악화되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병원에서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5. 정리 : 사후의 논란과 애국가 문제


 - 그의 사후 <한국 환상곡>은 한국의 역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며,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꾸준히 연주되는 레퍼토리였습니다. 애초에 그의 생전인 1940년대에 <한국 환상곡>의 일부인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안익태와 애국가는 심지어 안익태 본인의 생전부터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일단 1960년대 처음 불거진 애국가 표절 논란입니다.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연구로는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안익태의 유럽 방문 전이었고, 유럽 지역의 노래를 일일이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표절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게 유력합니다.


[애국가 표절 논란의 주인공인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정말 비슷하게 들리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 표절 논란은 이렇게 흐지부지됐지만, 2000년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애국가는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친일파의 곡을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쓸 수 있는가'라는 것. 뿐만 아니라 애국가 저작권 문제도 제기되면서 그야말로 '노래 하나에 전국이 들끓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단 저작권 문제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롤리타 안이 쿨하게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되었고, 애국가 교체 논란도 현재는 어느 정도 잦아든 것으로 보입니다.


 - 어쩌면 안익태의 일생은, 왕족이나 엘리트 관료의 삶보다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볼 때, 그의 친일 행적은 유럽에서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적극 이용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물론 그가 서양음악 불모지에서 대단한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음악가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와 함께 그 재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는 교훈을,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ahneaktai.or.kr/?page_id=62 (안익태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osen.mt.co.kr/article/G1109303001 (야구선수 안익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15474 (송병욱씨 인터뷰)

http://weekly.donga.com/List/3/all/11/78800/1 (친일논란 관련 주간동아 기사)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102808201102638&mobile=Y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1)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75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2)



0. 서문

 - 게임의 역사를 논하기에 앞서, '게임'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게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출처 : 한컴사전]


 - 즉 엄밀히 말하면, 게임은 '누군가와 승패를 겨루거나' '혼자 혹은 여럿이 즐기며' '일정한 규칙을 가진' 놀이를 통칭합니다. 어릴 적 즐기던 팽이치기나 땅따먹기도 게임이요, 혼자서 즐기지만 일정한 규칙이 있는 낱말맞추기 퍼즐이나 직소, 네모로직같은 것도 게임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게임이란 단어는 그러한 넓은 의미보다 소위 '비디오게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화면 등을 통하여 출력되는 정보를 보면서, 프로그램에 설정된 규칙에 따라 플레이를 진행하는 그러한 형태의 게임 말입니다. 최초의 컴퓨터가 발명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류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꾼 컴퓨터는 인류의 놀이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비디오게임의 역사는 컴퓨터의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합니다. 지극히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필요에 따라 발명된 컴퓨터가, 그 자체로는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용도로 쓰인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유희'라는 것 자체가, 자원을 쓸데없이 낭비함으로써 정서적 만족과 쾌락을 얻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게 무의미하다는 건 절대 아니지요. 이러한 행위는 인간에게 상상력을 더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는 훨씬 더 생산적인 자연의 입장에서는 파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때로는 게임을 현실로 구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버티드 헤어핀(와일드 마우스) 롤러코스터'는 본래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게임이 흥행한 이후 실제로 건설되어 중국에 실물이 존재.]


 - 이제 우리는 인류 유희의 역사에 전례없는 대격변을 불러일으킨 비디오게임의 발자취를 짚어나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비디오게임이 인류의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비디오게임을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고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큰 의미 없는) 최초의 게임들 

 - 최초의 컴퓨터는 '컴퓨터'의 정의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콜로서스(1943)와 에니악(1946)을 들고 있습니다(콜로서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에 군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공개가 늦었고, 오랫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들은 일차적으로는 군용(미사일의 탄도 계산이라든지), 나아가서는 과학과 수학 계산용으로 쓰였습니다. 


 - 사용 목적이 그러했고, 크기 자체도 워낙 거대했다보니(에니악의 경우 전원을 올리면 주변 동네들의 가로등이 깜빡거릴 정도로 전력 소모가 심했다고) 컴퓨터는 정부기관이나 국책 연구기관 등에 극소수만 존재했고, 당연히 이를 접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적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이것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아가서는 이를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목적의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최초의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이 출현하게 됩니다.


[OXO]


 - '최초의 게임'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 다양한 게임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음극관 놀이장치(1947)나 튜로챔프(1948, 체스 시뮬레이션) 등이 언급되지만 이들은 실제 프로그램으로 완성된 건 아닙니다. 실제로 완성되어 실행된 게임으로는 '틱택토'를 구현한 <OXO>(1950)과 '님'을 구현한 <님로드>(1952)를 최초로 꼽는데, 이들은 모두 기존의 보드게임을 프로그램화한 것입니다. 둘 다 연구 및 홍보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게임의 역사에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 1958년에는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의 물리학자 윌리엄 히긴보덤(1910-1994)이 <테니스 포 투>라는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연구나 홍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유희'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게임으로 평가됩니다. 오실로스코프(병원에서 심장 박동 표시하는 그런 장치) 화면상에서 일종의 테니스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만들어졌는데, 히긴보덤은 어디까지나 '손님들이 가지고 놀며 즐기는' 목적으로 이를 만들었고 그 존재는 한참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테니스 포 투> 플레이 화면]


 - 지금까지 언급한 최초의 게임들은, '최초'라는 것 이외에 역사에 중요하게 언급될 요소가 딱히 없습니다. 이들은 당시 컴퓨터를 접할 수 있는 극소수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거나 내부적으로만 활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그래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후의 게임들에게도 별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니, 그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면 크게 의미있는 존재라고 보기 어렵겠지요.


 -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의 시작점, 진정한 의미의 '최초'는 과연 무엇일까요? 조금 더 지나서, 1962년으로 가 보겠습니다.




2. 진정한 최초 : <Spacewar!>


 - 1948년 발명된 트랜지스터는 극초기 진공관 컴퓨터보다 훨씬 작은(그래봐야 방 하나에 꽉 차는 수준이었지만)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고, 반대로 성능은 크게 향상되어 좀 더 다양한 용도로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1950년대 말부터는 이보다 더 작은(물론 그래봐야 장롱짝 크기는 되는) 컴퓨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1959년 출시된 PDP(프로그램 데이터 프로세서)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PDP-1]


 - 최초 모델인 PDP-1은 입력을 키보드로 하는 최초(!!)의 컴퓨터였고(이전의 컴퓨터는 천공카드와 종이테이프를 사용), 이것이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들어온 것은 1961년이었습니다. 당시 MIT의 학생들은 이 컴퓨터를 가지고 다양한 일들을 했는데, 그 학생들 중에 스티브 러셀(1937-)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 러셀은 '화면에 그래픽을 띄우고, 이를 보면서 컴퓨터를 가지고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주변 학우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1890-1965)의 우주 SF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우주선끼리 서로 쏘아 맞추는 형태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러셀은 매우 게으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ㅡㅡ; 주변 친구들이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고 의욕을 북돋워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 그렇게 완성된 게임은, 처음에는 그저 우주선 두 대가 미사일(로 간주되는 점)을 발사하여 서로를 맞추는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러셀 일당(?)이 이 게임을 완성하고, 사람들(시대가 시대였으니, 그들 모두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와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게임에 여러 요소가 추가되기 시작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이 "이런 게 있으면 더 재미있겠는데?"라며 직접 프로그램을 수정했던 것.


[<스페이스워!> 플레이]


 - 누군가는 우주공간을 연상케 하는 배경을 추가하여, 게임에 사실성을 더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화면 가운데 별을 놓아서, 거기에 가까이 가면 중력의 영향을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위기를 피하기 위해 우주선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동 위치가 랜덤이라 때로는 별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별에 부딪혀 터질 수도 있었습니다.


 - 게임은 1960~70년대 컴퓨터의 확산과 함께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고, 10년을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살이 붙게 됩니다(개중에는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버전, 동전을 넣고 플레이할 수 있는 버전도 있었습니다!). 이 게임의 이름은 <스페이스워!>. 그저 재미로, 아무 경제적 대가 없이 만들어졌으며 프로그램 코드 역시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오픈소스' 게임이라는 타이틀도 추가로 붙습니다.


 - <스페이스워>는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용도로 쓸 수 있음을 모두에게 알렸고, 이에 컴퓨터 좀 다룬다는 사람들은 컴퓨터의 발전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의 게임을 연구하고 개발하고자 잉여력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유타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놀런 부슈넬(1943-)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계속)




참고 :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딴지라디오)> 中 42. "기본교양 게임사의 잉해"



 -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력한 자들은 해방 이후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그랬다" "모두가 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등등의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곤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친일파 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제대로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협력 사실 자체를 반성하지 않고 정당화 · 합리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공개적으로 참회한 사람들도 있긴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쪽이 당연한 것인데도, 공개적으로 반성을 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슬픈 현실이겠지요. 이번 글에서는 일본에 굴복하여 협력하였지만, 해방 이후 "나의 사지를 찢어달라"며 대중 앞에서 잘못을 뉘우친 최린(1878-1958)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최린]



1. 민족대표 33인, 천도교의 지도자


 - 최린은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고, (당연하게도) 어릴 때는 한학을 배우다가 한양으로 이주한 후에는 개화파 청년들과 어울리며 근대 학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의 하급 관료로 일했는데, 이 무렵 개화파 망명자들과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일심회'어디선가 들어보셨다면 그것과는 다른 단체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일본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 이후 1904년에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본격적인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 제1중학을 거쳐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차별적 행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퇴학당하거나 체포당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최린은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1861-1922)와 교류하였고, 이를 계기로 1909년 귀국 후 천도교에 정식 입교하였습니다.


 - 최린이 귀국한 시기는 대한제국 멸망 직전이었고, 최린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는 등 국권 수호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병합 이후에는 주로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는데, 천도교계 재단이 운영하는 보성고등보통학교(現 보성고등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전경. 1917년. 출처]


 - 1910년대 후반부터 주로 해외 교민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이 잇따랐고, 이것이 일본의 통제를 뚫고 국내에 전해지면서 국내에 남아있던 지도자들도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 천도교계의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은 은밀히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였고, 여기에 불교, 기독교(개신교)계가 합세하면서 소위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됩니다.


 - 이들은 독립선언서 작성을 최남선에게 맡기고, 때마침 고종이 사망하자 고종의 장례일(인산일)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인쇄소가 친일경찰 신철(?-1919)에게 발각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신철이 독립선언서를 보고도 그냥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최린은 급히 신철을 만나 설득하였고, 신철은 그 설득을 받아들여 입을 다물고 신의주로 출장을 떠나버립니다.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일은 이틀 앞당겨져 3월 1일이 되었고, 그 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들 아시겠지요? 민족대표들은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를 파고다(탑골)공원에서 요릿집 태화관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한편 최린의 설득을 받아들인 신철은 3·1운동 발발 이후 이를 은폐하였음이 발각되었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기 직전 음독자살하였습니다.



2. 민족대표에서 민족반역자로


 -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체포된 최린은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얼마 전에 출소하였습니다. 그 무렵 손병희가 (수감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최린은 천도교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수감생활 도중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1920년대 이후 최린은 다분히 개량주의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 한편 손병희 사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게 되었는데, 최린은 천도교청년당을 중심으로 한 신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이후 천도교 교단이 봉합과 재분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최린은 1929년 천도교 도령(교령)에 취임하여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이미 개량주의와 자치론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의 그는 조금씩 친일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 한편 최린은 1927~28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외교 활동을 수행하였는데, 이 와중 프랑스 파리에서 여류화가 나혜석(1896-1948)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혜석은 일본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김우영(1886-1958)과 결혼한 상태였으니, 빼도박도 못할 불륜이지요. 결국 둘의 행각이 김우영에게 발각되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혼하였고, 불륜의 다른 한 쪽 당사자인 최린은 정작 나혜석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역대급 스캔들의 세 등장인물. 왼쪽부터 나혜석, 김우영, 최린]


 - 이에 나혜석은 '정조 유린죄' 명목으로 최린을 법원에 고소하였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소송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혜석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파격적인 성평등론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소송은 결국 나혜석의 패소로 끝났지만, 이미 최린은 멀쩡한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범으로 사회의 조롱과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 개인사로 큰 곤욕을 치른 이후, 최린은 본격적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1933년 무렵부터 최린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1934년에는 일본의 회유를 받아들여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됩니다. 같은 해 천도교 신파 지도자들과 함께 '시중회'를 결성하였으나 이는 말만 종교단체이지 실질적으로 친일단체였습니다. 


[최린이 매일신보(1940년 2월 11일자)에 기고한 글. 내선일체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다]


 - 이후 해방 때까지 최린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니 '조선임전보국단'이니 하는 일본 관제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고, 각종 강연회와 언론 기고 활동을 벌이는 등 A급 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양심(?)이 남아있었던지 당시 성북동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왕년의 동지 한용운(1879-1944)의 딸에게 생활비를 건네주었지만, 한용운이 이를 알자마자 "더러운 돈은 필요없다"며 내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3. 해방 후의 참회 - "광화문 앞에서 내 사지를 찢어달라"


 - 한반도가 해방을 맞자 최린은 다른 민족반역자들과 함께 거국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그가 천도교 지도자였기 때문에 천도교 내부에서 강한 비판이 일었고, 교단 내부에서는 최린이 민족반역자로서 갖은 죄를 범했으니 책임을 통감하고 은퇴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최린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빡친 교단에서는 최린을 천도교에서 영구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ㅡㅡ;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최린(우측). 좌측은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 그렇게 욕을 먹으며 그냥저냥 살아가던 최린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특위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면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재판 때 다음과 같은 최후변론을 남겼습니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한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내가 반민족 행위에 대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내 사지를 소에 매달아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형을 집행해 달라. 그렇게 하여 민족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 사실 이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는 다른 민족반역자들이 재판에서 보인 뻔뻔스러운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반민특위는 다들 아시다시피 온갖 난리 끝에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최린은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끝에 1949년 4월 병보석으로 석방됩니다. 당연히 처벌은 없었지요.


 - 이후 건강 문제도 있고 하여 최린은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1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린은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당했고, 북한에서 대남 선전기관에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고, 북한 체제에 협력을 거부하였으니 대충 짐작이...... 1958년 사망한 것만 확인되어 있습니다. 1962년 남한에서 최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 하였으나, 친일행위가 너무 명백하여 ㅡㅡ; 무산된 바 있습니다.



4. 정리 : 결국 반성한 자는 소수였다


 - 나혜석은 최린과의 불륜과 소송전 이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고, 파격적인 여성해방운동을 벌였지만 사회적인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협력도 거부한 나혜석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해방 직후 무연고자 병동에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반면 그의 남편이었던 김우영이나 불륜 상대였던 최린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해방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참 얄궂은 운명입니다.


 - 사실 최린이 해방 후에 진심으로 반민족행위를 반성했다지만, 블로거는 최린의 참회를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반민특위 재판에서 자신의 죄상을 자복하기 전 최린은 천도교계의 비판에 정면으로 반발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바도 있습니다.


 -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최린은 자신의 죄를 입으로 시인하고 자신을 벌할 것을 '공개적'으로 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민족반역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어쩔 수 없는 것' 또는 '민족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 "우리를 정죄하는 자들은 다 빨갱이들"이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서기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린의 '소박한' 참회조차도 확실히 눈에 띄기는 합니다.


 - 슬프게도, 이러한 참회를 한 사람조차도 최린을 비롯해 몇몇밖에 없었다는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방법조차도 사라지는 바람에, 왕년의 민족반역자들은 이후 반공투사니 기업인이니 교육자니 하는 미명으로 그대로 사회 기득권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유증은 그들이 대부분 사망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3·1운동 직전에 벌어진 최린과 신철의 일화입니다.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였지만 후년에는 친일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최린, 친일경찰의 대선배로 한국인 탄압에 앞장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신철. 최린은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 모두 이름을 올렸고, 그곳에 신철의 이름은 없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http://egloos.zum.com/history21/v/971195 (최린과 신철)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21/2015042104138.html (최린과 나혜석) 댓글은 보지 않기를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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