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는 흔히 <내가 고자라니>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존인물 심영(1910-1971?)은 일제강점기 유명 배우우이자 친일 연극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로 전향하여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한반도의 연예인들 중에서는 심영처럼 친일/좌익 콤보를 밟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는 고자라니 말고 '진짜' 심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존인물은 적어도 고자는 아니었다는군요]



1. 조선의 슈퍼스타 심영


 - 심영의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입니다. 일단 심영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견이 나뉘어 있는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 서울로 이주하였다는 주장이 있고, 아예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심영이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분명한데, 의정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現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고 합니다(인터넷에서 찾은 정보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


 - 이 무렵 심영은 무용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데, 단순히 무용만 하러 다닌 게 아니라 이런저런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던지 심영은 사회활동 참여를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심영은 한국 최초의 극단(劇團) 중 하나인 '토월회'와 연을 맺게 되는데, 토월회 연구생 신분으로 몇몇 연극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연기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 심영은 1929년 <간난이의 설움>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연극계에 데뷔하였고, 여기서 호평을 받은 그는 다음해 <남경의 거리>의 1막 주인공으로 깜짝 캐스팅된 것을 계기로 스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심영의 연기력은 바다 건너까지 알려져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가히 1930년대 초 심영은 조선 최고의 인기스타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30년대 심영.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잘 생겨 보이긴 합니다. 1937년 12월 2일 동아일보]


 - 다만 1930년대 후반 들어 새로운 대스타 황철(1912-1961)이 등장하며 심영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두 배우는 <춘향전> <단종애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에서 함께 출연하여 인기 경쟁을 벌였는데, 1936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심영과 황철이 각각 홍도 남편(이쪽이 악역), 홍도 오빠('홍도야 울지 마라' 노래에 등장하는 그 오빠)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둘의 인기는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2. 친일에서 좌익으로


 - 인기를 빼앗겨 삐뚤어진 것인지, 심영은 이 무렵부터 친일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1939년 심영은 극단 고협 대표로 취임하였는데 이 극단은 적극적인 친일 성향 단체로, 주로 한다는 일이 농어촌을 순회하며 일본 프로파간다 공연을 한다든지 만주에서 중일전쟁 참전 중인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한다든지 하는 짓이었습니다.


 - 심영은 극작가 박영호, 연출가 나웅 등과 함께 고협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의 서울 불광동 일대에 '고협촌'이라는 연극인 마을을 만들고 집단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협은 1940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연극문화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심영은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는 와중에 일본 프로파간다를 위한 연기 활동에도 다수 참여하였습니다.


 - 1943년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심영은 일어극(日語劇) 부문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고, <너와 나> 등 친일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여 연기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주도하는 고협에서도 <빙하>니 <해당화 피는 섬>이니 하는 일본 프로파간다 연극을 다수 공연하였고, 거기에 심영이 출연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적극적 친일파로 맹활약하던 도중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 기대고 있던 기둥을 잃어버린 심영의 선택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좌익'이었습니다(이전 글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당연히) 극렬한 반공주의 집단이었습니다). 심영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좌익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일제강점기까지도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광대'였던 연예인들이 (친일을 했든 않았든)만인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3. 고자......는 되지 않았지만


 - 어쨌든 심영은 해방 후 좌익 계열 연극단체인 '연극동맹'에서 활동하면서, 이번에는 친일 대신 좌익 성향의 연극을 다수 공연하고 다녔습니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에 심영은 당연히 우익 쪽의 주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1946년 박영호 작 <님>(<야인시대>에도 등장하지만 실존 작품이기도 합니다)을 공연하고 이동하던 도중 김두한 일파에게 습격을 받고 영 좋지 않은 곳이 아니라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심영 피습사건 기사. 1946년 3월 16일 동아일보]


 - 그 때 김두한은 실제로 심영이 입원한 병원에 쳐들어갔고, 그에게 해코지를 하려다가 그의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누그러져 협박만 하고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김두한 본인의 증언으로 100%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이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 <야인시대>의 해당 부분). 심영은 총상에서 회복한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에는 파업 선동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 아마 이쯤 되자 남쪽에서는 더 이상 좌익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는지, 심영은 1947년 말 월북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좌익 활동을 용인하던 미군정이 점차 좌익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남로당 등 많은 좌익 계열 인사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담으로) 심영의 라이벌이었던 황철 역시 좌익 계열 활동을 하다가 1948년 8월, 즉 분단 막판에 월북하였습니다.


 - 월북 이후에도 황철과 함께 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습니다(황철은 전쟁 중 오른팔을 잃었고, 의수를 끼고도 열연을 거듭하여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연극인 등 여러 연예인들을 강제 납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당시 끌려갔다가 탈출한 최은희(1926-)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군복 차림으로 와서 여러 연예인들을 납치해갔다고).


 - 그렇게 요란하게 북한으로 건너간 심영이지만, 최후는 분명치 않습니다. 남로당 숙청 때는 같이 숙청되었다가 어찌어찌 복권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71년 다시 숙청되어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5. 정리 : 연예인의 친일


 - 우리에게 이상한 쪽으로 잘 알려진 심영을 선택하였는데,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문화예술인(특히 연예인)들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노선을, 해방 직후에는 좌익 노선을 택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블로거는 그들의 선택을 '광대'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 일제강점기 이후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인기 연예인들은 사회적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연예인에 열광하면서도 그들을 조선시대까지 천시당하던 '광대' 취급하곤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으레 복잡한 행보를 거듭하기 마련, 많은 수의 연예인들은 권력에 영합하여 입지를 넓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세상에 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런 그들에게 만인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는 하나의 복음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친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해방 이후 좌익에 경도된 것은 이상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심영 뿐 아니라 황철, 문예봉, 신불출 등 당대 인기 연예인 중 많은 수가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월북하여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북한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 사회는 아니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숙청 등으로 쓸쓸하게 퇴장하였습니다.


 - 그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인기 연예인의 친일 행위는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통치 수단이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능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체제에 영합한 연예인들은 각종 공연과 위문행사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당대 일본의 프로파간다를 심는 데 앞장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 연예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근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의 정치적 행보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들이 정치적으로 가진 영향력과 이를 부당한 권력 유지를 위해 악용해 온 과거 때문일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연예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20233#url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388568 (황철 일대기 1부. 중간에 심영과의 라이벌리가 언급되어 있음)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0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6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른 곳과 설명이 좀 다른데 참고용으로 링크)



9. 체제경쟁의 마지막 발악 : 1980년대 '4대 흑역사'


 - 1960~70년대를 거치며 남한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지속한 데 비해, 북한의 경제는 지지부진한 상태였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 쯤 역전된 남북한 경제력은 1980년대 들어서는 북한이 쫓아가기도 어려울 만큼 크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체제경쟁에서 갈수록 밀리게 된 북한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요량으로, 남한을 따라하듯이 거대 규모 사업을 잇따라 벌이지만 하나같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서해갑문]


 - 서해갑문 : 북한은 1960년대 이후 서해안 지역에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농경지로 만들었는데, 역시 우리는 한민족! 문제는 평안남도 서해안에는 대동강 외에 큰 하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대동강 하구 일대는 한반도에서 강수량이 가장 적은 곳 중 하나) 간척지들은 수자원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동강 하구에 둑을 쌓아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나아가서는 대동강의 선박 통행과 대동강 하구의 육상교통에도 보탬을 주려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 본래 계획은 하구의 안쪽에 둑을 쌓는 것이었는데, 이러면 둑의 길이는 짧아지지만 둑 안쪽에 너무 많은 토사가 퇴적된다는 결과가 나와 무산. 이후 현재의 위치가 제안되었고, 둑이 너무 길어진다는 반대의견에도 김일성이 직접 이것을 지지하면서 건설이 결정되었습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1981년 착공하여 1986년 완공하였는데, 본래는 1984년 완공 계획이었던 것이 기간이 질질 늘어나서 무려 두 배나 시간이 더 걸린 것입니다.


 - 그리고 정작 갑문을 짓고 보니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기대와는 달리 남포항의 진입로가 갑문으로 가로막힌데다 물이 고이니 겨울이면 얼어버려서 ㅡㅡ; 남포항의 활용도는 오히려 크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건설된 갑문은 주변 지역의 기후에도 악영향을 주었고, 결정적으로 갑문 자체가 부실공사로 지어지는 바람에 둑의 붕괴를 막기 위한 상시 보수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공병부대 하나가 오로지 서해갑문 보수를 위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ㅡㅡ;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


 -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 남한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자, 열폭한 북한은 몇 차례의 테러사건을 일으키며 올림픽에 대한 불안 여론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합니다. 올림픽에 대한 방해가 여의치 않자 북한은 (주로 사회주의권에서 개최하는) 1989년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하여, 이를 체제 선전에 활용하고자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대회를 개최했습니다(릉라도 5·1경기장 신축, 순안공항 확장, 도심 재개발 등).


 - 물론 대회 자체는 성공적으로 치러졌지만, 뭔가 상업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는(심지어 2만 명을 넘는 참가자에게 북한 방문과 체류 경비를 무료 지원) 체제 속에서 개최 비용은 고스란히 북한의 손해로 남게 되었습니다. 국제적 선전 효과 또한 대회 직후 사회주의권 붕괴로 있으나마나 수준이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수용인원 기준 세계 최대(15만명)의 경기장인 릉라도 5·1경기장 뿐.


 - 이 대회는 북한 사회에도 뜻하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남한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씨의 고급진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언행은 북한 주민들에게 거대한 컬처쇼크가 되었다고 합니다. ㅡㅡ; 더구나 그가 남한으로 돌아가 사형당하지 않은 것이 알려지며 남한 체제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탈북자 중 몇몇은 이 때 북한이 남한에 사실상 패배하였음을 절감했다고 증언하기도.


[류경호텔.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 류경호텔 : 도대체 언제 완공될 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건물...... 1987년 착공하였으며, 완공 목표는 1992년(김일성 탄생 80주년)이었습니다. 층수는 총 105층인데, 105호 돌격대가 건설에 참여한 것을 기념한 것이라는군요. 김정일이 남한의 63빌딩(1985년 완공)을 보고 열폭하여 건설을 지시했다는 설도 있으며, 그래서 건물의 크기는 (첨탑 포함) 330m로 건설 시작 당시에는 아시아 최대, 세계 7위의 고층건물이었습니다.


 - 그런데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하며 북한은 급속도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호텔을 짓던 북한은 공사대금을 체불하기 시작합니다. ㅡㅡ; 결국 건설에 참여하던 해외 기술진이 모두 철수해버리고, 필요한 자재들이 다른 건설사업으로 돌아가면서 1992년 콘크리트 골조만 완성된 상태로 공사가 전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 이후 호텔은 15년간이나 방치되어 북한의 실상을 대표하는 흉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북한은 호텔 따위에 거액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고, 방치된 건물의 안전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2008년에야 이집트 기업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하며 건설이 재개되었지만, 외장공사만 거의 완공된 상태에서 이집트 혁명의 여파로 자본이 철수해버리는 등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의 리즈시절)]


 -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 비날론(비닐론)은 합성섬유의 일종으로, 1939년 교토제국대학 박사 리승기(1905-1996)의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인으로 이공계 박사가 몇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한반도 전체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리승기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국대안 파동 등 연구에 전념할 수 없는 남한의 혼란상에 실망하고 6.25를 틈타 1950년 월북하게 됩니다.


 - 이후 그는 자립경제를 목표로 한 북한 당국의 지원을 받아, 비날론 양산체제 구축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1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함흥)가 건설되며 북한은 옷감 부족에서 상당부분 벗어날 수 있었고, 리승기는 북한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날론 생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석회석을 원료로 하는 비날론 생산공정은 특성상 대량의 물과 전기를 필요로 했고, 이는 북한의 전력이 충분하던 시절에나 유용했다는 점입니다.


 - 1983년 김정일은 경공업 발전의 일환으로 평안남도 순천시에 거대한 화학공장 건설을 지시합니다. 비날론을 중심으로 각종 화학제품을 생산하여 인민의 생활향상을 도모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제대로 가동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비날론이 자립경제의 상징이다보니 북한에서는 기를 쓰고 비날론 생산을 재개하고자 하는데,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결국 복구하지 못하고 사실상 철거된 것으로 보입니다.


 - 이러한 삽질 끝에 북한이 날려먹은 돈은 200억 달러(!!!!) 이상에 달했고, 이 때의 지출은 북한 경제에 치명타를 날리고 말았습니다.




10.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


 - 1990년을 전후로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잇따라 붕괴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북한은 1970년대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데다 이런저런 테러 활동으로 서방세계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었는데, 그나마 이를 메꿔 주었던 사회주의 진영이 사라져버린 것.


 - 더구나 북한 자체의 여력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농업은 생산량 증가를 위한 무리한 개간과 밀식(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것) 때문에 지력(地力)이 소실되며 198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수송을 대부분 담당한 철도는 수송량 증가를 위해 일찍부터 전철화가 진행되었지만, 전기 생산에 문제가 생기면서 철도 운송이 제대로 돌아가질 못하는 역효과만 낳았습니다.


 - 이미 1980년대 가시화된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북한은 합영법(1984년)이나 나진·선봉경제특구(1991년)를 만드는 등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체제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니 성과는 둘째치고 자본이 거의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국가경제가 마비되는 것을 어떤 수로도 막을 수 없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는 이미 배급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와중에, 김일성은 1994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나마 국가 경제에 관심은 있었던, 그래서 다가오는 경제난을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하던 김일성이 사망하기 무섭게 북한은 미증유의 대재난을 겪게 됩니다. 방아쇠는 1995년 여름의 홍수였습니다.


[산비탈을 그대로 개간한 북한의 다락밭. 이런 곳에 폭우가 쏟아진다면??]


 - 물론 폭우는 이전에도 항상 있어왔지만, 당시 북한이 산비탈을 죄다 다락밭으로 개간해버린 데 재앙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없는 산은 많은 비가 내렸을 때 산사태에 매우 취약해집니다. 1995년 북한에 기록적 폭우(이 해에는 남한에도 폭우가 자주 내렸습니다)가 쏟아지면서, 개간된 산간지대의 흙이 쓸려 내려가고 이것이 산비탈의 다락밭과 평야지대의 논밭을 휩쓸었던 것. 이를 시작으로 북한을 유지하던 모든 시스템이 한순간에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 이후의 상황은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그 북한이 외부세계에 원조를 요청할 정도로 북한의 사정은 최악이었고, 북한은 남한과도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시기를 김일성의 유격활동에 빗대어 고난의 행군으로 호칭했고, 북한 당국이 고난의 행군 종결을 공식 선언한 것은 2000년. 즉 최악의 식량난이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사실 재해로 인한 일시적 식량 부족은 외부에서 수입하든지 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한의 식량 생산이 크게 줄기는 했지만, 배급이 전면 중단될 정도로 아예 없는 수준인 건 또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철도를 중심으로 한 수송체계의 붕괴와 연결되면서, 그리고 여기에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북한의 사회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면서 최악의 시너지 효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이 시기 굶어죽은 사람은 30~40만 명에 달합니다(300만 명 이상이라는 설도 있음).


 - 이후의 북한은 이전과는 사실상 다른 사회가 되었습니다. 국가에서 사회보장은 커녕 기본적인 식량조차 배급하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조달해야만 했습니다. 이전부터 암암리에 존재해 왔던 텃밭과 장마당(사설시장)이 이 시기 대대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당국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 어디 그게 되나요?


[장마당 풍경]


 - 이 때를 분기점으로 북한의 밑바닥 경제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화하게 됩니다. 일단 '자유시장'이 확산된 것 부터가 자본주의 요소의 도입을 의미하죠. 물론 어디까지나 북한의 체제는 공식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이기 때문에, 북한의 자본주의 경제는 비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사실상 국가에서도 손을 놓은 분위기.


 -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시장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인 제어(그냥 다 때려잡는 거 말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 반강제로 들어온 북한의 시장경제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로 이어졌습니다. 1997년 김정일은 삼년상 유훈통치를 끝내고 공식적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과 그 이후의 북한은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빈부격차' 거기에 더하여 '부정부패'가 버무려진 오묘(?)한 사회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제정일치 종교국가라고 보는 게 맞을지도.]




참고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737 (조국광복회)

http://www.kinu.or.kr/upload/neoboard/DATA03/17권2호-이상숙1.pdf ("중소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자주외교 비교")

http://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4&koreanChrctr=&dicaryId=24 (군사 · 경제 병진노선)

http://www.rfchosun.org/program_read.php?n=1223 (5·25 교시)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Ihw&articleno=8626548&categoryId=734769&regdt=20130915174839 (혁명가극)



7. 군사적 모험주의와 군사 · 경제 병진노선


 -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북한은 한동안 경제개발에 온 역량을 집중하였고, 군사 부문에는 그다지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는 물론 전쟁으로 북한의 경제 전체가 붕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휴전 이후에도 중국군(중국인민지원군)이 상당 기간 주둔하여 북한의 안보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그리고 이들은 북한의 경제 재건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 하지만 1958년 중국군이 북한에서 모두 철수하고, 중소분쟁 이후 북한이 점차 독자노선을 취하면서 북한 자체의 군사적 수요가 급속히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5% 미만이었던 북한의 국방예산 비율은 1960년대 들어 점차 상승하다가, 1960년대 말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급상승하여 1970년 무렵에는 국가 예산의 31%까지 폭증하게 됩니다.


 - 이를 뒷받침했던 것은 북한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행동을 자제해야 했던 북한은(사실상 북한은 무력 통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강대국의 간섭이 줄어들고 자주노선이 강화되자 말 그대로 날뛰기 시작합니다. 1968년 1월 민족보위성(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31명이 남한으로 침투, 북한산 자락을 거쳐 청와대를 급습하려 시도한 사건이 터졌습니다(통칭 1·21 사건)


["내레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로 유명한 바로 그 사건]


 - 이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1월 23일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임무 수행 중이던 미국 해군 소속 USS 푸에블로함이 북한 해군에게 나포되며 한반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다만 이 사건은 현재는 푸에블로함이 실제로 북한 영해를 침범한 것이라는 게 정설). 사태는 양면전쟁(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수행 중)을 원치 않은 미국 측에서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북한에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지만, 전쟁 직전의 긴장상태에서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과잉투자를 해야 했습니다.


 - 이로 인해 경제개발에 대한 투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1961년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은 기간은 3년이나 늘리고도 1970년까지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군사 · 경제 병진노선'입니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군사 투자를 늘려 경제와 군사력을 동시에 성장시키자는 허무맹랑한 노선이었지만, 이전 북한의 정책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경제를 제쳐두고 군사력에 집중투자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 군사 · 경제 병진노선은 196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제5차 전원회의에 처음 등장하였고, 1966년 북한의 공식적 노선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군사력 증강과 함께 본격화된 북한의 무력 도발은 위의 두 사건 외에도 울진-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미국 공군 EC-121기 격추사건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사건이 1968~69년 사이 발생했습니다.


 - 일각에서는 당시의 북한을 두고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주적 모습을 보였다'며 좋아하십니다만...... 이러한 모습은 북한의 경제, 사회 발전 깊은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이 무렵부터 북한의 경제는 제1경제(민간경제)와 제2경제(군수경제)로 분리되었고, 사실상 대부분의 투자가 제2경제 쪽에 집중되면서 북한 경제의 정체와 쇠퇴가 본격화됩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 여력 감소로 이어지고, 이러한 악순환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8. 김정일의 등장과 후계자 지명


 - 김정일은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출생하였습니다(북한에서는 1942년 백두산 밀영에서 출생하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만, 실제로 김정일은 1941년 출생하였고 당시 김일성 부부는 소련에 있었음). 동복 동생으로 김만일(1944-1947. 수상관저 연못에서 놀다가 익사), 김경희(1946-)가 있습니다.


[김일성 가족의 단란한 한 때]


 - 생모 김정숙은 1949년 출산 도중 태아와 함께 사망하였고(김일성이 바람을 피운 것에 빡쳐서 치료를 거부하였다는 설이 있음 ㅡㅡ;), 김일성은 이후 후처(들?)에게서 여러 자녀를 더 얻었는데 김정일은 자신의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상당히 나빴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정환경(생모는 사망, 계모 및 이복형제와는 사이가 나쁨) 때문에 김정일은 어린 시절에는 상당히 내성적이었고, 이러한 성격은 청소년기 이후에야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 김정일은 1960년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공부는 그닥 잘 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자 김정일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어 김일성이 빡친 나머지 남산고급중학교 러시아어 교사들의 강의력을 일일이 검증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정일은 공부보다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폭주족 음악, 영화, 연극 등의 예술 쪽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훗날 그의 출셋길을 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고급중학교를 졸업한 김정일은 김일성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북한 지도층에게는 소련 유학이 유행이었고, 김정일 역시 소련에 유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조선에도 훌륭한 대학교가 있다"면서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물론 이 시기에도 5만 권의 장서를 읽었다느니 뭐니 선전용 전설들이 난무하지만 그건 생략하고...... 대학 재학 중인 1961년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합니다.


 - 주변인들의 증언을 보면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이미 권력 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67년 갑산파 숙청 당시 영화계에 갑산파의 영향력이 큰 것을 확인한(박금철 찬양 영화가 만들어졌던 것 기억하시나요?) 김일성은, 영화덕후 김정일을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에 임명하여 예술계 정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 때의 활약을 시작으로 김정일은 날아오르게 됩니다.


[남한에도 이름만 유명한 혁명가극 <피바다>]


 - 이 시기 김정일은 자신의 덕력을 십분 활용하여 김일성 신격화의 최선봉에 섰습니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소재로 한 '혁명가극'이라든지,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영화 제작이라든지 등의 문화적 작업을 진두지휘하며, 김정일은 김일성 뿐 아니라 김일성과 항일운동을 함께 한 북한 고위층들의 눈에 들게 됩니다. 1970년대 이후 김일성의 후계 구도가 조금씩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따놓은 점수는 김정일에게 엄청난 무기가 되었습니다.


 - 김정일은 197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1920-), 이복동생 김평일(1954-) 등과 후계구도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습니다. 이 시기 김정일이 자신의 친위대로 만든 게 3대혁명소조입니다. 각계각층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조직은 각 분야의 보수성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사상 투쟁을 벌였는데, 김정일이 모든 권한을 독점한 사실상의 사조직이기도 했습니다.


 - 1972년 김일성의 환갑 잔치에서 "내 아들 중 누가 후계자였으면 좋겠나?"라는 김일성의 말에, 그의 항일유격대 동료였던 최현은 "당연히 장손(김정일)이 맡아야지요"라고 대답했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항일유격대 원로들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밀고 있었던 것. 여기에 김성애(김일성의 후처. 김평일의 생모)의 삽질을 틈타 김정일은 김성애와 이복형제들의 부정행위를 김일성에게 보고했고, 김성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시점에서 사실상 후계구도는 확정되었습니다.


[김평일은 1979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파견된 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후 김정일은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주도했다가 당 내의 거센 반발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김정일을 좌천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오히려 반대파를 숙청하고 김정일을 당 중앙으로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북한의 미래는 김정일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정일은 비로소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후계자임을 확실히 하였고, 1983년에는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가 됩니다.



5. '주체사상'의 형성 : 중소분쟁과 독자노선


 - 시작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은 당 간부들을 상대로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였는데, 이 연설의 요지는 "우리는 다른 어느 혁명도 아닌 조선의 혁명을 하는 것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일체의 사상 사업을 조선 혁명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1955년이면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이며 사회주의권의 분열이 표면화되기도 전이었으니, 이미 이 때부터 북한(적어도 김일성)은 일반적인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독자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소련과 중국의 내정간섭을 경험한 후 본격적으로 자주노선을 천명하기 시작했고, 주체사상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 주체사상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대전제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인간의 의지가 사회 변혁의 중심이라고 역설한 것. 그렇기 때문에, 주체사상에서는 개개 인간의 의지를 유발하는 것 - '사람 사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됩니다. 1958년부터 본격화된 천리마 운동이 바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 간부가 노동현장에 파견되어 군중을 지도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사람 사업을 통하여 군중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감상하는 인민의 삿대질]


 - 다만 '인간의 의지'를 중심에 놓았다는 것으로부터,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측면(생산과 노동)에 중심을 두고 사회를 해석했거든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공산주의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셈입니다. 현재 북한의 체제가 '공산주의지만 공산주의가 아닌'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중국과 소련의 대립이 1960년대 본격화되면서, 북한의 독자노선은 그야말로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북한은 중국-소련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요. 즉 양쪽 모두를 신경써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말 그대로 '줄타기 외교'를 벌이며, 내부적으로는 자주노선을 강화해 나갑니다. 북한은 본래 소련의 영향 하에 건국되었고 이후에도 소련의 영향이 강한 곳이었지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이 미국에 꼬리 내린 것을 계기로 북한은 친중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사진은 1969년 우수리강 일대에서 발생한 양국간 국경분쟁]


 - 하지만 흐루쇼프 실각 후 소련이 다시 스탈린 시절 노선으로 돌아가자, 북한은 다시 소련과의 친선관계를 강화하며 중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 때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후 중국이 문화대혁명 때 북한을 '수정주의자'로 강경 비난하는 등 북중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 두 고래의 등 사이에 끼어 있는 새우 한 마리는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어느 쪽도 섣불리 지지하기 곤란한 처지에서 북한이 선택한 것은 결국 독자노선이었습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자주외교를 표방하며 소련-중국 양측으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챙겼고, 내부적으로는 주체사상을 점차 교조화하게 됩니다.




6. 대숙청 파이날 : 갑산파 숙청과 도서정리사업


 - 김일성 중심의 만주파가 북한의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만주파도 하나로 묶여있던 건 아니었고, 내부에 '갑산파'라는 일단의 파벌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에 협력한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이었으며(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한 '조국광복회' 일원이라고 선전), 주로 개마고원의 갑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갑산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금철(가운데)]


 - 갑산파의 리더 박금철(1912-?)은 보천보 전투 이후인 1938년 혜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했고, 광복 이후 만주파의 일원으로 북한 건국에 참여하였습니다. 갑산파는 8월 종파사건 때도 김일성에게 협력하였고 이후로도 꾸준히 세력을 유지하였지만, 점차 심해지는 김일성 신격화에는 반대하였고 경제개발 문제에서도 김일성과 결을 달리하였습니다(경공업 우선 개발, 국방비 축소, 당 간섭 축소 등).


 - 김일성파와 갑산파의 대립은 1960년대 중반부터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김일성이 조선로동당에 조직지도부(주체사상의 요지를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아시겠지요?)를 신설하고, 조직지도비서에 동생 김영주를 임명하자 갑산파 쪽에서 크게 반발하였고, 박금철을 김일성의 대항마로 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박금철을 찬양하는 선전영화를 만들 정도였다는군요.


 - 당연히 갑산파의 행동은 김일성에게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봉건주의,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유포'했다는 명목으로 박금철 등의 갑산파를 숙청하기에 이릅니다. 박금철은 민족 전통의 혁명사상, 특히 조선 후기 실학에 관심이 많아 당내에 <목민심서> 구독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바로 이것을 구실로 삼았던 것.


 - 김일성을 견제할 마지막 세력이 사라진 북한은, 김일성 신격화에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시작합니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도서정리사업입니다. 갑산파가 숙청된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통칭 '5.25 교시')는 단순히 반대파의 인적 숙청만이 아니라,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 통제를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이 직후부터 전국의 모든 서적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시작되었습니다.


 - 어느 정도였냐면, 북한 내의 모든 책이 말 그대로 페이지 하나, 글자 하나까지 샅샅이 검열 대상이 되어 김일성 신격화에 도움되지 않는 내용을 남김없이 삭제해버리는 수준. 심하게는 과학기술 관련 서적,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까지도 금서로 지정되어 폐기 혹은 수거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를 포기한다!! 물론 삭제 대상인 여러 지식을 생산하는 인텔리 계층은 '혁명화'의 대상이 되어 개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 사실상 모든 지식이 초고속광역삭제된 자리를 채운 것은 (당연히) 김일성 관련 저작과 주체사상. 1970년대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북한의 유일한 사상체계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응? 나 불렀냐?]


 - 황장엽은 주체사상 이론을 정립한 공로로 1970년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한국으로 치면 국회의장)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각설하고, 주체사상 이외의 모든 지식이 '금지'된 이후 북한은 <당의 유일 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현재는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으로 개정)을 제정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을 만나기 싫으니 전문 게재는 생략합니다. 간단하게, 북한 전체 사회가 김일성에게 충성하고 김일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 갑산파 숙청과 도서정리사업을 분기점으로, 북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단적 통제사회로 완전히 변모하였습니다. 물론 이 정도의 극단적 사상 통제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될 턱이 없지요. 이후 1980년대 북한은 인민대학습당(남한의 국립중앙도서관과 동일)을 건립하면서, 도서관에 비치할 책을 모으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주장으로는 여기에 장서가 3천만 권이나 된다지만 글쎄요(미국 국회도서관의 장서가 3천 2백만여 권)?


 - 여담으로, 주체사상은 웃기게도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 아래에서 믿는 자들이 지체가 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든다...... 저기에서 '예수'를 '김일성'으로 바꾸면 그냥 주체사상이거든요. 실제로 김일성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기독교 집안이었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반석'을 번역하면 '베드로')은 열렬한 안식일교회 신자였습니다. 외삼촌 강량욱은 심지어 목사였다는군요.



3. 대숙청 라이즈 : 8월 종파사건


 - 6.25는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휴전'이라는 어중간한 형태로 종결됩니다. 패전 책임을 정적들에게 떠넘기며 위기를 탈출한 김일성은 점차 자기 파벌에게로 권력을 집중시켜 나갑니다. 김일성의 정치적 롤모델은 스탈린이었으며 김일성이 목표하는 정치체제 또한 스탈린과 비슷한 '1인 중심 철권통치'였는데, 문제는 당시 소련에서 스탈린 비판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1인 중심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정세 변화를 등에 업고, 김일성의 만주파와 연안파-소련파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됩니다. 먼저 경제개발 방향에 대한 의견충돌(만주파=중공업 중심, 연안/소련파=경공업 중심)이 있었고, 김일성 1인독재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전쟁 이후 북한 정치의 주도권은 김일성파가 확실하게 잡은 상태였지만, 연안파와 소련파는 각각 중국-소련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 1956년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는, 김일성에게는 자신의 권력 장악을 대외에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대회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국내파) 계열에 대한 숙청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고, '반종파투쟁'이라는 명목으로 김일성에게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1957년)부터 시작될 5개년 경제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중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 당연히 이는 반대파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으며,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에 나선 사이 이들은 반(反)김일성 운동을 전개하고자 소련의 암묵적 지원 하에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는 김일성파에 의하여 일찍 포착당했고, 김일성은 소련 대사에게 이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등 치밀하게 반격을 준비합니다.


 - 1956년 8월 30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마침내 대립이 표면화됩니다. 먼저 발언권을 얻은 김일성파는 상업성과 직업총동맹 등 연안파가 장악한 기관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상업상 윤공흠(연안파)이 발언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입을 열자마자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경제정책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윤공흠의 발언이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김일성파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번지자, 참다 못한 김일성파 사람들은 윤공흠에게 달려들어 그를 억지로 단상에서 끌어내려 버렸습니다.


 -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 과반수는 김일성파였고,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로 상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달은 윤공흠과 서휘(직업총동맹 위원장)는 그 길로 회의장을 나가 중국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후 속개된 회의에서 부주석 최창익(연안파)과 부총리 박창옥(소련파) 등이 발언을 이어갔지만, 이미 장내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김일성파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 결국 회의는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역관광ㅡㅡ;으로 마무리되어,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등 연안-소련파 주요 인사들에 대한 출당과 당직 박탈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김일성도 해외 순방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하여, 권력투쟁은 김일성파의 완승으로 쉽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펑더화이와 김일성 세상에서_제일_어색한_사진]


 - 그런데 이 결과에 소련과 중국이 노발대발하여, 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과 펑더화이(1898-1974)를 단장으로 하는 연합 대표단을 파견해버립니다. 소련 부총리 미코얀과 중국 부총리 펑더화이(심지어 이 사람은 김일성과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가 함께 강림하자, 어떻게든 자신들의 행동을 해명하려던 김일성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최창익에 대한 출당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파는 최창익의 복권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반대파의 주요 인물들(김두봉, 오기섭 등)을 '종파주의자' 명목으로 체포하거나 공직에서 해임하였습니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나자, 김일성에게 하늘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스탈린 사후 심화된 소련과 중국의 대립이 1958년경부터 본격화되면서, 두 나라는 북한의 내정에 관여할 여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 두 나라가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포섭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양국 모두에 줄을 대며 줄타기를 시전하였고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국으로부터는 내정간섭에 대한 사과까지 받아낼 정도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이죠.


 - 결국 연안파와 소련파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은 남김없이 숙청당했고, 소련과 중국은 각각 자기 쪽 파벌의 인사들을 자기 나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김일성의 무쌍난무를 방관하였습니다. 피의 숙청은 1960년경까지 계속되었고, 소련이나 중국으로 망명한 일부 인사 외에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김일성의 반대파와 그 일족을 숙청하고 사회와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 김일성은 이렇게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8월 종파사건'의 전말입니다. 여담으로 이 때 강대국의 내정간섭을 겪은 경험 때문에 김일성은 '주체적 통치'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주체사상의 뿌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4. 전후복구와 천리마운동 : 북한의 짧은 리즈시절


 

[폭격으로 초토화를 넘어 '평탄화'된 원산과 흥남]


 - 6.25 전쟁의 결과, 남북한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특히 북한은 3년간에 걸친 폭격으로 멀쩡한 건물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공군력은 전쟁 내내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사망자도 더 많았으며, 월남 인구가 수백만에 달했기 때문에 북한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반면 전후 복구는 오히려 남한에 비해 빨랐는데, 이는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로 식량 등 소비재 중심으로 원조를 받은 남한과 달리, 북한은 사회주의권 지원 아래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함흥의 경우 거의 통째로 소련과 동독의 지원 아래 재건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독 대통령의 이름을 딴 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사회주의 형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북한 재건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물론 이 과정에서 북한 인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북한은 전쟁 피해의 책임을 교묘하게 미국과 남한에게로 돌려 인민의 재건 의욕을 고취시켰고, 외국의 지원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재건사업에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불과 전후 3년여만에 전쟁 피해의 완전복구를 선언하고, 농업의 협동농장화도 단기간에 완료하기에 이릅니다.


 - 위의 1956년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는 전후복구의 완료를 보고하고, 본격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 '중공업 중심+경공업, 농업 동시발전'이라는, 북한 경제의 기본 방향이 확정되었습니다. 주민 동원체제로 큰 재미를 본 북한은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위하여 전 인민의 총동원체계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천리마 운동입니다.


[천리마 운동 선전 포스터. 너 강제노동]


 - 천리마 운동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당(조선로동당)에서 지도 일꾼을 파견하고, 이들이 군중과 고락을 함께하며 사상 등을 교육하여 군중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유도해내는 것. 즉 경제개발에 있어서 상하간 유기적 협조, '사람 중심의 사업'을 통하여 대중을 경제개발에 동원하고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1960년 2월 평남 강서군 청산리로 직접 현지지도를 떠나,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하며 이러한 원칙을 공식화합니다('청산리 방법'으로 명명).


[청산리에서 현지지도 중인 김일성]


 - 천리마 운동은 실제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북한의 경제 5개년계획은 사실상 천리마 운동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1961년까지 본래의 계획보다 훨씬 큰 실적을 올리게 됩니다. 이 결과 1960년대 초의 북한은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압도하였고, 사상교육의 결과 사회 규범이 잘 확립되어 동네에 도둑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만 해도 김일성 신격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당 기관지 <로동신문>에 독자투고란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 이렇게 북한은 전쟁의 피해를 극복한 것을 넘어,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먼저 한 발 앞서나갔습니다. 당시의 북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960년대를 북한 최고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장밋빛처럼 보인 북한의 발전 뒤에는, 훗날 북한의 몰락을 불러오는 암세포들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으니...... (계속)



 - 현재 시점에서 북한이 확실히 실패한 국가라는 데 반박할 분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알고보면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민주적인 국가였고 지금보다 더 발전할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 여러 분기의 방향이 김일성에게로 집중된 결과 '공화국 아닌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실패한 북한을 낳게 됩니다. 이번에는 북한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북한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북한을 만든 여러 정치세력


[해방시기 북한 지도부 : 왼쪽부터 김두봉, 허헌, 김원봉, 박헌영, 김일성. 뒤쪽 얼굴만 나온 인물은 김달현]


 -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북한은 본래 1인독재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에는 몇 년에 걸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 총집결하였고, 그들이 각각 하나씩의 파벌을 이루어 서로 견제하는 형태의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독립운동 세력 자체의 분화가 심했고, 소련과 중국에 모두 접했다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북한의 정치 지형은 상당히 복잡한 상태로 출발하게 됩니다.


[연설하는 김두봉]


 - 연안파 : 중국 일대에서 활동하던 세력.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쫓겨간 산시성 옌안(연안) 일대에서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김두봉, 김무정 중심의 조선독립동맹과 김원봉과 갈라져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여 '조선의용군'을 결성하였고, 중국공산당과 함께 중일전쟁 게릴라전에 참여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김두봉, 김무정 등은 귀국하여 북한 지도부에 참여하였으며, 상당수는 중국에 남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 국공내전 종전 이후 조선의용군의 잔여 병력은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주축이 됩니다. 이들은 국외 무장투쟁세력 중 가장 큰 규모였고(한국광복군의 몇 배에 달함), 정규전이나 게릴라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귀국한 연안파 세력은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을 결성하고, 이는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의 전신인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습니다.


[박헌영]


 - 국내파 : 말 그대로 일제강점기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 세력입니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약 3년여간 4차례에 걸쳐 대탄압을 당하고도 다시 조직을 재건하는 근성을 ㅡㅡ; 보이지만, 결국 조직이 와해되고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의 권고에 따라 재건을 포기하고 해체하였습니다. 이후 주요 멤버들이 투옥, 망명, 도피생활을 이어가며 지하활동 중심의 운동을 이어갔고, 해방 직전에는 박헌영, 이현상 등을 중심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였습니다.


 -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 중심)와 함께 가장 발빠른 행보를 보였으며, 미군정이 시작되자 합법정당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부분열이 상당히 심했으며, 미군정기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좌파 계열 몇몇 정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합니다. 이후 미군정이 좌파 세력을 점차 불법화하자 활동이 급진화·폭력화되고, 결국 남한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져 박헌영 등 지도부 상당수가 북한으로 건너갑니다.


[꽃미남 김일성. 1946년]


 - 만주파 :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 쪽에서 활동한 항일 게릴라 세력. 만주 쪽 한국인 게릴라와 중국공산당 무장세력, 반일 성향의 독립세력 등이 중국공산당 주도로 1930년대 중반 '동북항일연군'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 게릴라가 친일단체 연루 혐의로 숙청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민생단 사건), 여기서 살아남은 젊은 지휘관들 가운데 김책, 최현 등의 지지를 받은 김일성이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 김일성의 게릴라는 1937년 압록강 최상류 보천보에 침입하여 주재소(파출소) 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전과를 올립니다(보천보 전투). 전투 자체는 별것 없었지만, 국내에 무장독립운동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선전효과가 있었습니다(동아일보는 고의적으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대 초반 사실상 섬멸되어 김일성 등은 소련으로 건너갔고, 이 때 김일성은 그를 눈여겨본 스탈린에 의해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됩니다.


[허가이. 본명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 소련파 : 소련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하였지만, 김일성을 비롯하여 그의 세력에서 행정능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실제로 김일성 중심의 항일게릴라 중에는 문맹도 상당수였다고). 그래서 북한의 행정을 담당하고 김일성의 북한 통치를 지원하기 위하여, 당시 소련에 거주하며 소련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고려인들을 다수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 이들은 허가이, 박창옥, 조기천(시인) 등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소련의 영향 하에 있으며 북한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소련에서 출생하여 자랐고 한반도 내에는 별다른 연고가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북한 내에 정치적 기반은 상당히 취약한 편이었습니다.


[조만식]


 - 非 사회주의 계열 :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대표적. 조선민주당은 평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조만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천도교청우당은 1946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결성하며 북한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중도우파적, 종교적(조만식은 기독교계 인물)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는 기독교, 천도교 신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소련군정은 처음에는 이들의 정치적 활동을 보장하였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종교세력이 이어지기는 어려웠고, 양당의 지도자인 조만식(조선민주당)과 김달현(천도교청우당) 등이 각각 숙청당하면서 이들 정당의 세력은 무력화되었습니다. 이후 두 정당은 조선노동당의 우당(友黨)이 되어, 현재는 조선노동당을 내세우기 귀찮은 사소한 ㅡㅡ; 사안들에 이름 빌려주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2. 대숙청 비긴즈 : 6.25에 대한 책임전가


 - 일단 북한의 지도자는 김일성이었습니다(소련이 그렇게 앉혀놨으니까). 다만 김일성의 세력은 처음에는 북한(조선노동당)의 여러 정파 중 하나일 뿐이었고, 심지어 조선노동당의 첫 번째 지도자는 김일성이 아닌 김두봉이었습니다(물론 이는 김일성이 너무 젊었기 때문에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에 가까움).


 -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하여 무력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ㅡㅡ; 여기에는 국내파의 대표인 박헌영도 적극 찬동하였고(박헌영의 정치적 기반이 본래 남한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임), 이들은 소련으로 달려가서 스탈린에게 전쟁을 허락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야 당시 북한은 소련의 속국에 가까웠으니, 종주국 소련의 지지와 지원 약속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스탈린이 이들에게 퇴짜를 놓습니다. 각각 소련과 미국의 영향 아래 있는 두 세력간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소련-미국 간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련은 도저히 새로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고요? 불과 3~4년 전까지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거의 3000만 명이 죽었습니다. ㅡㅡ; 더구나 스탈린은 아직 소련이 미국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ㅗ"를 날리는 건 당연.


["전쟁? ㅎㅎ X까"]


 - 하지만 생각없는 김일성에게는 국제외교나 냉전 그딴 거 없었습니다. ㅡㅡ; 김일성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스탈린을 졸라댔고, 박헌영이 옆에서 "남한을 침공하면 남한 내 게릴라와 민중이 호응하여, 미국 개입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자 스탈린은 마지못해 전쟁을 승인하게 됩니다. 단 '중국한테 물어보라'는 조건을 달았고, 소련의 직접 지원은 거부합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조선의용군에게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미군 참전'을 전제로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 사실 조선의용군이 합류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소련이나 중국의 지원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보험'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던 38선에서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을 단행하며 민족의 대재앙 6.25가 시작됩니다.


[북한과 소련의 북침 선전을 비판한 유고슬라비아 신문 만평. 코페자]


 - 인민군의 공격은 서울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었고, 3방향으로 침공하여 서울과 그 일대의 국군 주력을 포위섬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시작부터 엇나가기 시작하였으니, 가장 동쪽으로 진격하던 인민군 2군단이 전차 한 대 없던 국군 6사단에 대패하면서 국군 포위섬멸에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심지어 국군이 한강대교를 너무 일찍 날려먹는 X맨 짓을 했음에도!).


 - 결국 동쪽에서 진입하는 게 늦어지면서 인민군의 나머지 부대는 점령한 서울에서 3일간을 허송세월했고, 그동안 박헌영의 장담과는 달리 남한의 후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로당 세력은 사실상 소멸하였고, 때마침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땅을 받은 남한의 농민들은 남한의 붕괴를 지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전쟁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면서, 북한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벌어주는 치명적인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보셨을 지도]


 - 물론 3일 이후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급하게 상륙한 미군 선발부대를 탈탈 털어버리는 전과도 올렸지만, 압록강을 앞에 두고 기세가 한계에 달했고 국군과 UN군의 방어에 가로막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끝도 없는 붕괴가 시작, 김일성과 북한 정부는 평양을 버리고 평안북도(자강도) 강계로 도망쳤으며 국군이 압록강변까지 도달하는 대굴욕을 당합니다.


 - 이때부터 김일성은 전쟁에 승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패전 책임을 다른 세력에 떠넘겨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에 이릅니다. 일단 연안파의 중심 인물인 김무정(2군단장, 민족보위성 부상 등 역임)을, 낙동강 전선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숙청하였습니다. 그가 인민군 내 연안군 파벌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의 숙청을 계기로 연안파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김무정은 얼마 후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여생을 지낸 것으로 추정).


[6.25 당시 대북삐라 중 하나. 그런데_그것이_실제로_일어났습니다.jpgee]


 - 그 다음 타겟은 국내파. 실제로 국내파의 지도자인 박헌영은 김일성과 맞먹는 개전 책임이 있었고(강계에서 박헌영과 김일성이 전쟁 책임을 두고 잉크병을 던지며 개싸움을 벌인 일화는 유명), 김일성이 전쟁 책임을 전가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하였고, 패전 책임을 물어 국내파의 다른 인물인 이승엽(전쟁 중 서울시장에 임명) 등과 함께 처형해 버렸습니다. 국내파는 이로써 사실상 소멸합니다.


 - 소련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소련파의 리더 허가이는 국내파의 박헌영과 이승엽이 체포되자 이들을 적극 변호하였는데 이것이 김일성의 분노를 샀고, 1953년 7월 자신의 사무실에서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북한의 공식 발표는 자살이었지만, 글쎄요(허가이는 소련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그를 암살한 후 외교적 마찰을 의식하여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이 유력)? 가뜩이나 기반이 부족한 소련파는 허가이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 이렇게 자신에게 있던 전쟁 책임을 다른 세력에 떠넘기는 데 성공한 김일성은, 전쟁의 (사실상) 패배에도 자신의 권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일성과 만주파는 조선노동당 내 권력을 착실하게 늘려, 1950년대 중반에는 중앙위원회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미 무력화된 국내파를 제외하고, 연안파와 소련파는 만주파의 독주에 위기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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