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거의 사라진 20세기의 직업으로 식자공(植字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직역하면 '글자를 심는 장인'이라는 뜻인데, 인쇄를 위한 활판에 활자를 배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아마 활판에 활자를 심어넣는 것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이 직업은 나름 전문직이었고 꽤 잘 나갔다고도 하는데,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가 대세가 되면서 불과 이삼십 년 사이에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일보의 식자공. 출처]


 - 실제로 식자공이 활약하던 시대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절이었던데다 활자의 특성상 좌우가 뒤집힌 글자를 노상 판독해야 하기 때문에, 식자공으로 일하려면 글을 해독하는 능력은 기본에 고도의 숙련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특히 인쇄 과정이 분초를 다투게 마련인 신문 인쇄에서는 때때로 식자공이 임시 편집자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된 식자공은 비교적 대우가 좋고 인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숙련된 식자공이라도 깨알같이 배열된(심지어 좌우가 뒤바뀐) 수백 수천 자의 한자들을 완벽하게 구별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간간이 오타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 오타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20세기 독재정권 시절 이야기입니다.




1. 대구매일신문의 수난


 - 대구매일신문은 1946년 '남선경제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어 몇 차례의 제호 번경을 거쳐, 현재는 '매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는 대구의 지역신문입니다. 6.25가 발발하여 온 나라가 쑥대밭이던 1950년 8월 29일자 대구매일신문 1면 기사 중, '이(승만)대통령李大統領'이라는 글자가 '이견통령李犬統領'으로 인쇄되는 오타가 나왔습니다. 大(큰 대)와 犬(개 견)의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식자공이 혼동한 것입니다. 설마 의도적인 건 아니었겠지


 - 오타야 아무리 노력해도 간간이 나오기 마련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헷갈린 글자가 '개'를 뜻하는 한자였다는 데서 문제가 커집니다. '대통령'이 '견통령'으로 둔갑했으니, 요즘 말로 표현하면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본의 아니게 욕해버린 겁니다. 요즘이라면야 그냥 짤방 해프닝으로 웃고 넘어가겠지만 당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이 하나의 오타가 추상같은 독재권력의 높으신 분들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 결국 오타 하나 냈다는 이유로 사장이 구속되고 편집주간은 사임했으며, 신문사는 무기정간 조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장 이상조는 2개월 후에야 풀려났지만 신문사 운영을 더 못하고 회사를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후 천주교 쪽에서 신문사를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관련기사. 1955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3면.]


 - 그런데 꼭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대구매일신문은 이승만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55년에는 관제데모 학생 동원을 비판하는 사설이 신문에 실리자, 자유당이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신문사를 때려부수고 여러 직원을 다치게 한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경찰 간부의 망언은 길이 전설이 되었습니다.




2. 후폭풍 : 언론사의 오타 노이로제


 - 이후로도 대통령 오타 사건은 몇 차례나 더 벌어졌습니다. 1953년에는 전북의 삼남일보와 충북의 국민일보(지금의 국민일보가 아님)에서 동일하게 '견통령'이라는 오타를 내서 홍역을 치렀고, 국민일보는 몇 달 뒤 똑같은 오타를 한 번 더 내는 바람에 아예 폐간당하고 말았습니다. ㅡㅡ; 이듬해에는 부산일보에서 '이승만 대령'이라는 오타를 냈는데, 이 때는 욕설은 아니어서인지 주의조치만 받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 다른 오타도 있습니다. 1955년 동아일보는 활자 배치를 실수해서 다른 기사에 들어갈 '괴뢰(꼭두각시)'라는 글자를 '고위층 재가 위해 대기 중'이라는 제목 앞에 붙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괴뢰 고위층'이라는 말이 나온 건데, 괴뢰는 북한에 붙는 수식어였고(흔히 말하는 '북괴') 당시에 고위층이라 하면 이승만의 최측근을 말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역시 난리가 났습니다. 다행히 360부만 발행하고 수정이 됐지만 책임자가 해임되고 신문사는 1개월 정간을 당했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견통령'을 검색하면 이게 의외로 흔한 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ㅡㅡ;]


 - 일이 이렇게 되니 신문사들은 오타, 특히 '대통령' 같은 중요 단어에 대한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실수 한 번에 신문사가 날아가게 생기니 각 신문사들은 아예 '개 견犬' 자를 활자에서 없애버리거나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ㅡㅡ;


 - 이것도 어찌 보면 필화(筆禍), 혹은 문자옥(文字獄)이라 하겠습니다. 글자 하나에 꼬투리를 잡아 지식인을 탄압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인쇄했다면 기분이야 좋지 않겠지만, 이런 사소한 오타에 공권력의 탄압까지 가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일환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오타 하나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마당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대놓고 실을 엄두가 날까요?




3. 요즘에도 오타는 나오지만......


 - 1990년대 이후 인쇄에 컴퓨터가 사용되고 활판이 퇴출되었지만, 요즘의 인쇄물에도 간간이 오타는 나옵니다. 몇 쪽 이상의 긴 글을 써 보았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글 어딘가에 오타가 숨어 있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ㅡㅡ; 어쩌면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일에 대한 인간의 집중도는 떨어뜨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 그래도 요즘에는 그 오타 하나로 누군가가 고초를 치를 일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2012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1면 톱기사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오타(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퇴임)를 냈을 때도 네티즌들의 비웃음과 함께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난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셀프 탄핵 2013년 아시아경제는 '자치단체'를 '자X단체'로 인쇄하는 오타를 내고, 다음날 "19금 바로잡습니다"라는 희대의 정정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ㅡㅡ; [기사보기]


[조선일보의_속내.jpgee 출처]


 - 물론 오타가 자꾸 나온다는 게 언론의 입장에서 바람직할 리는 없습니다.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 차이로 '대통령'이 '개통령'으로 변신하는 식의 의미 전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식자공의 시대에 비해 훨씬 편리해진 작업 환경에서 이런 오타가 나온다는 것, 특히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기사에 툭하면 발견되는 대량의 오타들을 보자면 한국 언론의 최근 수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여담으로 언론의 오타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한국 뿐 아니라 독재정치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나라의 공통된 현상인 것 같습니다. 2011년 인민일보는 당시 총리 원자바오의 이름(溫家寶)을 '溫家室(찜질방이라는 의미가 있음)'으로 찍어 내는 바람에 무려 17명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ㅡㅡ; [로동신문의 오타 검열]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매일신문",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한국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Google 도서검색)

노컷뉴스 "이승만 견통령, 대령… 막 나가는 언론 열전"

머니투데이 "대통령이 '犬통령'..오·탈자 사고 처벌사례 보니"

머니투데이 "사라진 식자공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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