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문

 

 최근 블로거는 사진에 취미를 들이고 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사진과 그 도구인 카메라의 역사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어떻게 시각을 복제하여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고 지구상 수십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남길 수 있게 한 과정은 무엇일까요? 나의 취미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해 왔는지 탐구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카메라와 사진은 근대의 중요한 발명으로 여겨져 왔고 분명 그것이 맞지만, 사진을 만드는 원리 자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든(실용적으로든, 놀이로든) 이를 활용해 왔습니다. 지금하고 똑같네 사진이라는 도구가 단순히 흥미로운 장난감에서 어떻게 인류 사회의 중요한 도구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한 번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저 중 두 개를 팔아치운 건 안자랑)]

 

 

1. 고대와 중세의 '카메라'

 

 필름도 센서도 없던 먼 옛날, 사람들은 암실 벽면에 작은 구멍을 내면 반대편에 바깥의 상(像)이 그림처럼 맺힌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추측하건대 누군가 어두운 방의 벽이나 칸막이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 원리를 알아냈을 것입니다. 이후 사람들은 상자 등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내부에 상이 맺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 번쯤 만들어 보았을 바늘구멍 사진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이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고 하는데 이러한 원리 자체는 아주 오래 전, 고대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유클리드가 버들가지 바구니의 작은 홈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이 비추이는 것을 관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중국의 묵가(墨家)를 창시하였다는 묵자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뒤집어져 보인다"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림을 그리는 원리]

 이러한 원리를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바늘구멍을 통과한 상을 활용할 수 없을지 고민하였고, 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고안해 내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개념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중세 이슬람 제국의 학자 알하젠(965-1040)이 실질적 도구로서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처음으로 개발하였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또한 자신의 그림 작업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레이싱? 카메라 옵스큐라가 그림에 활용되면서 17세기 무렵에 그림의 사실적 묘사력이 대폭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주전자를 든 여인>과 그 물주전자에 비추인 카메라 옵스큐라의 모습]

 또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몇몇 그림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실제 사례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에는 물주전자의 겉면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추정되는 어떤 장치의 모습이 비추어 보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정약용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는 등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었으며, 조선의 화가들도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지 않았겠느냐는 학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필름이나 센서가 없을 뿐 현대의 카메라와 그 원리가 거의 동일합니다. 필름, 센서가 하던 일을 당시에는 화가의 붓과 캔버스가 대신했을 따름입니다.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이 아닌, 상 그 자체를 그림(?)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18세기 감광 원리의 발견 이후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 감광물질의 개발

 

 많은 물질은 빛, 특히 햇빛을 받으면 색이 변합니다. 당장 옷장에 처박혀(?) 있는 옷 중에는 직사광선 아래에서 건조나 보관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강한 햇볕에 말리면 색이 바랜다든지, 소재가 변질된다든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지속적으로 쪼인 책이나 건물 역시 서서히 색이 바래게 되지요. 이처럼 빛은 물질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라면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노출시간이 못해도 월 단위는 되어야 하겠지요), 특정한 물질들은 빛에 반응하여 변형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빛에 짧은 시간만 노출시켜도 충분한 변형이 일어나지요. 흔히 우리가 감광물질이라고 하면 이러한 물질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감광물질을 넓은 판에 칠해 놓고 바늘구멍이나 렌즈를 통과한 상을 맺히게 하면 각 부위에 노출되는 빛의 양 차이에 따라 물질이 변형되는 정도 역시 달라지게 됩니다(초등학교 때 한 번쯤 써보았을 '청사진' 실험을 생각하면 됩니다).

 

[요한 하인리히 슐츠]

 1724년 독일 출신의 과학자 요한 하인리히 슐츠(1687-1744)는 1724년 염화은(AgCl)이 햇빛에 노출되면 검게 변형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화은은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앙금 생성 반응'을 대표하는 백색 물질인데, 이 녀석이 감광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물론 슐츠는 카메라에 큰 관심은 없었던 듯하며 당시는 아직 화가들이 바늘구멍 사진기에 종이를 대고 그림을 그리는 데 만족하는 시절이었으니, 염화은이 카메라에 활용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체로 감광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물질은 할로겐화은(염화은, 요오드화은, 브롬화은 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 필름이나 인화지에도 이들 물질이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이를테면 브롬화은(AgBr)을 이용하여 만든 인화지의 경우 흔히 '브로마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브로마이드라고 부르는 연예인 화보는 처음에 브로마이드 인화지를 이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도면을 인쇄해 놓은 청사진]

 감광물질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됩니다. 이를테면 도면 등을 복제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청사진' 역시, 특수한 화학물질을 칠해 놓은 종이에 도면을 놓고 빛을 쬐어 가려지지 않은 부위에만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의 인쇄 방법이었습니다(청사진은 근래 대형 프린터와 플로터가 발전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옵스큐라에 화가 대신 감광지를 활용하는 시도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는데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1765-1833)의 '헬리오그라피'가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3. 헬리오그라피 : 최초의 필름카메라

 

 니엡스는 프랑스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는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나폴레옹 군대에 투신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군대에서 퇴역한 이후로는 과학 연구와 발명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1807년에는 형과 함께 내연기관의 일종인 '피레올로포르'를 발명하는 등 나름 이런저런 분야에서 업적이 있는데, 역시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면 최초의 필름(?)카메라를 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엡스는 처음에는 당시 기준 신기술이었던 석판 인쇄에 관심이 있었지만 기술이 부족하여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대신 그림을 그리는 도구였던 카메라 옵스큐라로 관심을 옮겼다고 합니다. 그는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상을 본뜨는 방법을 연구했고, 감광물질을 판에 칠하여 상이 거기에 맺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가 사용한 감광물질은 아스팔트의 일종인 '유대 역청'이었는데, 촬영 후 이를 라벤더 오일로 씻어내면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은 씻겨 내려가고 빛에 노출된 부분만 남는 원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하나. 몇 시간에 걸쳐 촬영했기 때문에 햇빛을 받은 방향이 제각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1826(혹은 25)년 만들어진 이 최초의 필름(?)은 '태양의 그림'이라는 뜻의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로 불렸습니다. 이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지만 최초라는 데 의미가 있을 뿐 아직 실용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사진 한 장을 촬영하기 위하여 노출 시간을 최소 몇 시간이나 잡아야 하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광물질로 사용한 유대 역청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당연히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인물사진이나 활동사진으로는 전혀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다른 하나. 플랑드르의 조각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리오그라피 발명 이후로도 니엡스는 사진 기술의 실용화를 위하여 계속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여기에는 미술가인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1787-1851)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다만 니엡스는 형이 내연기관 개발 등에 가산을 탕진하는 등의 이유로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결국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최초로 실용화된 사진기술'의 명예는 상당 부분 다게르와 그의 '다게레오타입'에 돌아가게 되는데, 다게르가 공로를 가로챘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니엡스의 아들과 공동연구를 계속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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