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기업가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덕분에 유한양행은 지금도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곳도 흑역사랄 것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일한의 동생 유명한(1908-1950)이 기업을 운영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였습니다. 하필이면 형 유일한이 항일운동에 매진하던 때 이 사람은 기업 차원에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것이지요. 말할 필요도 없는 형 유일한,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긴 동생 유특한(1918-1999)과 비교됩니다. 이번에는 형만 못한 아우, 아우만 못한 형이었던 유명한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명한

 

1. 사전 지식 : 유일한과 유한양행

 

 우선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경영하여 큰 성공을 거둔 유일한은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할 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버드나무 모양의 CI를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유한양행 CI

 

 유일한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당시 한국인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한양행이 주력으로 삼은 분야는 의약품 제조 및 유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산 의약품을 수입 판매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자체적인 생산체제도 갖추었는데, 유한양행이 자체 생산한 의약품 1호는 바르는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었다고 하지요. 거의 약장수 수준의 홍보가 판치던 당시 제약업계에서, 유한양행은 제품의 구체적 효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 의견 등을 광고에 실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만주, 베트남 등 해외로도 진출하였습니다.

 

 유일한은 철저한 윤리경영을 추구하여 당시에는 판매가 합법이었던 메스암페타민(히로뽕) 등 마약성 제품의 판매를 철저히 막고,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종업원 주주제를 실시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경영을 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한반도와 미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1942년에는 재미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미육군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공작원으로 비밀리에 입대하여 50이나 된 나이에 고도의 훈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이는 그의 사후 20년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집니다).

 

말년의 유일한

 

 미국에서 유일한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 당국에도 알려졌는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한의 귀국을 불허하였습니다. 사장이 미국에 발이 묶이자 회사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12월 15일 긴급 이사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사람이 당시 부사장으로 일하던 동생 유명한이었습니다. 유명한은 1936년 유한양행 대주주로 처음 경영에 참여하였고 1938년에는 이사, 1940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형이 부재중일 때 회사 운영을 맡고 있었습니다.

 

 

 

2. 유명한의 '덜 유명한' 친일행적

 

 그런데 형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유명한의 행적은 사장을 맡기 전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1941년 8월 그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일본 육군에 1만 원의 자금을 헌금하는 등, 형의 신념과 정 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는 그가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형의 대리인으로 기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며, 유일한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한은 정식으로 사장직에 오르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를 펼쳐나갔습니다. 그가 사장에 선임되고 며칠 뒤, 유한양행은 본사+사장(유명한)+계열사+직원 명의로 총독부에 소위 '애국기'를 헌납하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당시 유한양행이 헌납한 금액은 총 5만 3천 원으로, 조선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헌납한 3만 원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습니다.

 

유한양행의 애국기 헌납을 다룬 기사.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

 

 유명한의 친일 행적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는 유한양행과 계열사들이 <매일신보>에 신년기념 합동 광고를 실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도 소위 '황군'의 무운장구를 빈다든지 신년 맞이 전승(戰勝)을 기원한다든지 하는, 전형적인 일본 제국주의 찬양 광고였습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유원박)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형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유명한이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까요? 블로거가 추정해 보자면 유일한의 당시 행보 때문에 회사가 일본 당국에 탄압을 받았고,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굳이 변호하자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나 군사정권기에 권력과의 유착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이런저런 탄압과 견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유한양행 명의 친일광고. 매일신보 1943년 1월 1일

 

 

 

3. 말년 : 형제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와 회사의 친일행적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설립자 유일한과 막내동생 유특한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유일한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하였고, 유명한 역시 유한제약 이사장과 한국제약협회 2대 회장을 지내는 등 기업가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반민특위에 끌려가지도 않는 등 잘 살았지요.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적산을 불하받아 '고려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기업은 해방 직후 출판업계에 큰 영향을 준 회사였다고 합니다.

 

 이와 별개로 형과 동생은 민족반역자가 되어 자신들의 신념과 회사 경영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했던 형 유일한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유명한이라는 동생은 알아도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일본인은 모른다"라며 사실상 큰동생과 연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막내동생 유특한이 일본 유학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이것조차 나중에 형에게 깊이 사죄했을 정도라고 하니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나머지 형제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특한은 나중에 일부 계열사를 가지고 독립하여 '유유그룹'을 창업하고,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기업인으로 잘 나갔을지는 몰라도 그는 형제들에게 인간적으로 버림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모두 무시당합니다. 그래도 당시 생존해 있던 삼형제의 어머니는 그가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산 다대포에 정착한 유명한은 배를 타고 부산 중심가에 출퇴근하던 중 침몰사고가 발생하여 허무하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형 유일한은 말년에 막내동생 유특한에게 "친일파만 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라는 내용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듯합니다. 동생 자신뿐 아니라 유한양행이라는 회사 전체의 역사에도 큰 흠집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피를 나눈 형제여서 그랬던지, 형 유일한이 동생의 부고에 깊이 안타까워했다는 뒷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4. 정리 : 흑역사도 역사다

 

 형 유일한이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그런지, 동생들은 나름 사회적인 활동이 많았음에도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블로거의 능력과 노력 부족을 탓하시오 그래서 유명한의 행적은 이름과 달리 그리 유명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언론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친일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일생은 형 유일한과 비교하여 그 그늘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비록 그의 행적이 회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역사가 거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단언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회사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친일분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을 만났고, 이들이 위의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 또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습니다. 자신과 회사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적지 않은 나이에 공작원 훈련까지 받아가며 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이야말로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한양행 연혁. (유한양행 홈페이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유한양행에서 유명한과 그 시대의 행적을 철저히 감추고 언급조차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부터 세무조사 등 정치적 탄압을 버티며 성장한 것이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유명한의 주도로 애국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사실이지요. 블로거는 유한양행이 양심적 경영과 사회공헌을 전통으로 하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비록 일부나마 명백한 흑역사를 감추는 데는 약간의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두운 과거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적 기업이라는 전통에 더 어울리고, 설립자 유일한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참고 : 

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www.yuhan.co.kr/Founder/founder_main.html)

뉴스워커, "[광복절 기획] ‘민족기업’ 유한양행이 친일 행위를?…90년 역사 ‘옥에 티’" (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73)

오마이뉴스, "[한국 기업인 열전 7]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4800)

일요신문, "[8·15 특집 기업과 친일] 유한양행 ‘유명한 악몽’" (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96461)

CNB뉴스, "[임정 100년 - 겨레 기업 (2)] 유일한 박사 독립정신 잇는 유한양행·유한킴벌리" (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7516)

정운현,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친일행적' 있다" (web.archive.org/web/20190109013236/storyfunding.daum.net/episode/4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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