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를 통하여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친일파라 묶어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그들을 각각의 '인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친일행위를 한 의도와 목표가 제각각이었으니 이를 면밀히 분석해야 제대로 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이규완(1862-1946)처럼 '진심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함께 고민해 봅시다. 어차피 역사에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이규완, 1930년

 

1. 갑신정변의 행동대원

 이규완은 1862년 서울 한성부 교외(뚝섬)에서 종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친이라고 말은 하지만 왕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수백 년 전 임영대군(세종대왕의 4남)까지 무려 15대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별 의미는 없고, 아버지 이기혁 또한 나무를 파는 행상을 하며 여느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형과 누나, 동생 몇 명이 있다는 정도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9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아버지가 곧 재혼하였지만 계모 또한 그가 10대 중반쯤 되었을 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본적지인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사는 숙부 집에 가서 자랐는데, 나름 큰 뜻이 있었던지 한번은 서울로 올라갔다가 박영효(1861-1939)의 행차를 목격하고는 무턱대고 박영효의 집에 쳐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받아줄 리가 없었지만 그는 하인들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이내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습니다. 면식도 없는 귀족집안에 감히 들이대는 배짱을 높이 평가하였는지, 아니면 그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 박영효는 글조차 모르던 이규완이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게 했고 나중에는 유학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박영효

 이규완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불과 한 살이 많았던 박영효는 왕의 사위였으며 최고 명문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그와 친해진 이규완에게도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1883년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2개월간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으며, 돌아온 직후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관비(官費)유학생에 선발,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과 도야마 하사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택견의 명수였는데 이 시절에 서재필에게 개인적으로 무예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1년 뒤 이규완은 하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병조 소속 무관으로 임용되었습니다. 박영효 등 개화파는 이 시기 이미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개화파가 주축이 된 새로운 군사조직을 창설하였습니다. 총대장은 서재필이었으며 이규완 역시 별동대 대장으로 여기에 참여하였습니다. 나름 갑신정변의 주축 중 하나였지만 이 시기 그는 정변 지도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로 영 미덥지 않아 했다네요.

갑신정변의 진앙지 우정총국

 아무튼 1884년 12월, 거사의 날 이규완은 자신의 별동대를 이끌고 정변에 참여합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별궁 점거 및 방화, 요인 암살 등이었는데 특히 우정총국에서 민영익(1860-1914)을 직접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것이 이규완이었다고 합니다(알려져 있듯이 민영익은 호러스 알렌에게 수술과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집니다). 그렇게 정변의 중요 인물로 활약하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으며, 이규완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향합니다. 피신 당시 그는 부상을 입은 서광범과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달렸다고 전해집니다.

 

2. 망명생활과 귀국, 다시 망명(무한반복)

 이규완은 다른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10여 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망명자들은 자객에게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였다고 합니다. 정변 지도자들은 계속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1894년 김옥균 암살을 주도한 이일직이 일본에서 박영효 등을 암살하려 시도하자 이규완은 이를 알아내고 이일직을 체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일직을 감금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와중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진행되고 이규완을 비롯하여 생존한 정변 지도자들이 사면됩니다. 이에 이규완 역시 박영효 등과 함께 귀국한 뒤 3품 경무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동학군과 연계하여 시도하려 한 쿠데타 계획에 대하여 경무관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흥선대원군이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직접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갑신정변 때 이규완이 민영익의 귀를 벤 일은 유명했던지라, 송병준과 이완용은 이규완만 보면 "X알 간수 잘 해야지" 하는 성희롱농담을 지껄이곤 했다는군요.

 고위 관료로 평탄하게 흐를 것 같던 이규완의 삶은 그의 은인 박영효와 함께 다시 폭풍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는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친러 행보를 우려하여 계획한 암살 미수사건(을미사변 한 달 전 발생한 별개 사건)에 참여하였는데, 이 계획이 누설되어 박영효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변복을 하고 함께 몸을 피하였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다음 해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유길준 일파와 일본의 합작으로 정말로 살해당한(을미사변) 뒤 귀국하였지만, 얼마 뒤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건청궁 옥호루

 1898년 그는 조선(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하여 일시 귀국하였고 이후 한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독립협회의 요청을 받고 지원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부의 탄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승만 등 활동가들을 포섭하여 고종 폐위 운동을 획책합니다. 고종 황제를 쫓아내고 박영효를 추대하려는 시도였는데 이는 얼마 뒤 발각되었고 이규완은 체포당한 이승만, 이상재 등을 뒤로 하고 또 ㅡㅡ;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이런저런 고종 폐위 음모를 추진하며 비밀리에 한국을 오가기도 하였지만, 별 성과는 없었고 그 와중에 궐석재판에서 교수형 선고까지 받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박영효, 이준용, 유길준 등 망명자의 사면을 제안할 때 그의 이름도 있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여 신변을 넘기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당하자 그는 고종에게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연히 별 소용은 없었습니다.

 

3. '진심으로' 청렴했던 친일 관료

 그가 최종 귀국한 것은 1907년으로 그 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비로소 사면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통감부의 추천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취임하는데, 처음 그는 "문맹이 관료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양하려 하였지만 글 배웠다며? 통감부의 거듭된 강권에 결국 관찰사 직책과 중추원 찬의 직책을 수락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1918년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겼으며 직책명이 도지사로 바뀐 1924년까지 직을 수행한 뒤 퇴임하였습니다.

함경남도지사 재직 시기 이규완

 그는 전형적인 '자치론' 지지자였는데, 다른 유명한 자치론자들과 비교하면 3 · 1운동 이후가 아니라, 병합 직후부터 꾸준히 이런 주장을 반복하였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기왕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상 조선의 주민들을 동등한 일본인으로 대우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조선인 역시 일본에 대한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일본과 총독부의 방침과 달랐으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총독부에 건의를 날렸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후 민원식, 박중양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적 자치론으로 이어집니다.

 말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규완의 경우 자기 자신이 그야말로 철저히 검약하며 살았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는 그 맥을 달리 합니다. 평소 집에서 빨래를 하고 남은 땟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말고 텃밭에 거름 등으로 활용하게 했고, 평소 어디로 이동하거나 출장을 갈 때도 비용을 절약하고자 기차 3등칸을 타거나 싸구려 주막을 이용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시기에는 어떤 사람이 진수성찬을 차려 접대를 하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며 뒷간에 똥통(!!!)을 지고 가서 거름을 옮겨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 이후 사람들이 그를 거창하게 대접하는 일이 없어졌고, 그 청렴함으로 세간에 이름을 날리기에 이릅니다.

이규완의 사상이 압축된 '일생역행'

 그의 청렴함은 조금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하겠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밑바닥에서 자기 노력으로 출세하고,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도전과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한 그는 조선이 남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를 '게으름'에서 찾았던 것 으로 보입니다. 나태한 민족성 때문에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결과 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노력하여 민족적 역량을 키워야 그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극단적일 만큼 부지런히 살고 근검절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독립운동 중 실력양성론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목표가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자'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규완의 생각은 우리가 부족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노력하자는 데 머물렀고, 그래서 결국 독립론이 아닌 '자치론'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3·1운동 당시에도 그는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고민을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여기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항일운동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했습니다.

 

4. 퇴임 이후, 말년

 1924년 도지사직을 퇴임한 이후 이규완은 더 이상 중요한 공직에는 나서지 않았고, 함경북도지사나 중추원 참의 등의 자리를 제안받기도 하지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청량리와 춘천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운영하였으며, 여러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現 김천고등학교) 설립 자금을 후원하는 등 이런저런 사회사업을 벌여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동양척식회사 고문 자격으로 황해도 봉산·재령 지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 강령 발표 소식.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

 1927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출범한 조선물산장려회의 회장에 추대되어 1년간 재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는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단체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협력했던 이규완이 항일운동 차원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신간회 활동의 한 축이었던 실력양성론이 자신의 신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기꺼이 참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거기에 어쨌든 신간회는 합법단체였으니 관료 출신인 그가 활동을 꺼릴 필요도 크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그는 일관되게 각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바닷가를 간척하여 농지로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개간한 땅의 일부를 자기 아들들에게 경영하도록 넘겨주기도 했는데, 한번은 삼남 이영일(1903-1984. 화가, 교육자로 활동)이 자기 몫으로 받은 야산을 매각하려 하자 강하게 반대하여 팔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이외에는 조선산림협회 이사로 10년 이상 활동하거나 한성시탄(柴炭)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하는 등, 자기 사업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춘천 농장의 사과나무와 차남 이선길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규완에게도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라는 요구가 들어오는데, 친일 관료 출신으로는 조금 특이하게도 그는 이런 쪽에서 일본에 협력하는 것은 최대한 회피하였습니다. 신문에 전쟁 독려 기사를 기고하는 일은 사회사업이 바쁘다는 핑계와 문맹이라는 핑계로 글 배웠다며?(2) 최대한 거절하였고, 방공호를 건설하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행사에 연사 등으로 참여하기는 했는데, 대부분 조선인 참전 병사를 위한 후원회 등 조선인과 직접 관련된 행사에 치중하였다니 나름 일관성은 있었던 셈입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일본 온천에 요양을 다녀오는 등 활동이 뜸해졌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개간 사업에는 계속 관여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는 "우리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말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일관성 甲 그가 사망한 것은 1946년으로 그와 젊어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승만뿐 아니라 김구 역시 자신의 측근을 조문단으로 보내는 등 사회 각계의 추모를 받았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과 항일의 경계, 그리고 의도와 결과의 문제

 여러모로 평가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가 일제강점기 고위급 관료를 역임한 친일부역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진심으로 조선 민족에 애정을 가지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평생 보여준 삶의 모습은 표리부동한 자의 보여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나름 진실된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열심히 노력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꿔보자"는 그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진심이 실제로 민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상술했듯이 이규완의 주장은 실력양성주의 항일운동과도 상당 부분 통하는 데가 있고, 양쪽은 1920년대 말 신간회에서 만나 함께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가의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위 관료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았는지,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주권을 잃었다'는 데 너무 강박적으로 집착하였는지 그의 생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본 아래에서의 자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며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일까요, 아니면 결과일까요? 이규완의 의도가 선했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어떤 식으로든 협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와 결과, 아마도 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이규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블로거,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각자 선택할 문제이겠지요.

 여담 하나. 항일유공자 중 그와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 이규완(1901-1961)이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안성 원곡면 지역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며, 주재소(파출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니 그 활동이 꽤나 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후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여담 둘. 이규완은 갑신정변으로 첫 부인과 이혼한 뒤 일본 망명 중에 이매자(1880-1961?, 초명 나카무라 우메코)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매자는 일본인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스페인 왕족 출신 캐나다인 마가렛 고츠(1855-1928)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인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딸에게 무려 2억 달러나 되는 유산을 상속하였다는 떡밥이 존재합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거액인데 1920년대 당시에는 지금 돈으로 무려 3조 원이나 된다고 하네요. 나름 유언장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실물이 현재 남아 있지는 않으며, 이야기 자체도 확실한 게 없고 수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냥 그런 전설이 있더라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규완 가문의 상속비화. 일요신문 1963년 7월 7일

 

참고자료 : 
 "땟물까지도 아낀 조선 최고의 자린고비 관리 이규완", 대한기계학회 (링크)
 "근면성실한 친일파 이규완 이야기", DVDPrime 프라임차한잔 게시판 (링크)
 "이규완(李圭完)-3.1운동-애국장", 블로그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링크)
 "日帝 함남지사 이규완 가문의 2억 달러 유산, 과장인가 사실인가", 월간조선 (링크)
 "이규완",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한국어 위키백과
 "이규완(1862)",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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