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자지(王字之, 1066-1122)는 고려 중기의 문관입니다. 고려 건국 공신이자 해주 왕씨의 시조인 왕유(?-?)의 후손으로, 본래 이름은 소중(紹中)이었고 자지(字之)라는 이름은 나중에 개명한 것입니다. 자는 원장(元長). 무엇으로 불러도 이상하다 일단 그의 부모에 대하여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긴 하지만, 그가 음서를 통하여 관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 또한 고위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왕자지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서리(胥吏)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에 오릅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출세하게 된 계기는 1095년 왕의 외척이자 권신인 이자의(이자겸의 사촌) 암살사건이었는데, 당시 계림공(훗날의 숙종)의 명을 받아 이자의를 제거한 왕국모에게 협력하여 요직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이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자지는 내시(고려시대의 내시는 '환관'이 아닌 일반적인 관직)와 전중시어사 등의 요직을 거쳤고, 예종 때인 1108년에는 병마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바로 이 때 윤관(?-1111) 주도의 동북 9성 침공이 시작되면서 그는 윤관 휘하의 장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고려시대에는 문관이 부대 사령관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문관인 왕자지가 장군으로 출전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총사령관인 윤관 역시 문관이었고, 이전 시대 귀주대첩을 지휘한 강감찬 역시 문관).


 - 이 전쟁에서 왕자지는 실제로 많은 전공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전황은 순조로워서 여진족을 연파하고 순조롭게 9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진족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고려군은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한 번은 왕자지의 부대가 행군 중에 여진족의 기습을 당했는데, 이 때 왕자지는 타던 말을 잃고 화살까지 맞는 등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그를 구원한 인물이 바로 한국사 굴지의 인간흉기 척준경. 그는 여진족 부대를 격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말까지 한 마리 빼앗아 왕자지에게 넘깁니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후 왕자지와 척준경은 절친이 되었다는군요.


 - 이후로도 꾸준히 전투를 치렀지만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기로 하면서 고려군은 다시 천리장성 안쪽으로 철수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왕자지는 꾸준히 승진하여, 1115년에는 이부상서(요즘으로 치면 안전행정부 장관)에 취임하고 같은 해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使)로 송나라에 파견됩니다. 그는 이듬해 고려로 돌아오면서 송나라의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전수받아 돌아오는데,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 그가 전수받은 대성아악은 이후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으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이어집니다.


 - 이후로 그는 동북면 병마사, 호부상서, 이부상서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고, 중서문하성 참지정사를 역임하던 1122년 병으로 개경에서 사망합니다. 예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쉬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예종의 묘정(廟庭)에도 배향(해당 왕의 시대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종묘에 함께 모시는 것)되는 영광을 안......을 뻔했으나 반대 상소가 이어져 결국 배향은 되지 않았습니다. 이름 때문이 아니라 탐욕이 심하고 부정부패했다는 게 이유라고 합니다.


 -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 사람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문묘제례악의 뿌리인 대성아악을 도입한 인물이고, 조선시대엔 문묘 제례가 굉장히 중요했으니 그랬겠죠. 어쨌든 고려시대 정치사나 문화사에서 꽤 무게있는 인물인 데 비해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역시 그 시대가 문학이나 영상으로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었던 게 커 보이는데, 특히 동북 9성 개척은 척준경의 말도 안 되는 무용담도 그렇고 사극 등에서 다룰 만한데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별로 없죠.


 - 거의 유일하게 <푸른바람 척준경>이라는 웹툰이 있었는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스토리가 조금 진행되다가 뜬금없이 연재가 끝나 버렸습니다. ㅡㅡ; 우스갯소리로 척준경의 일대기가 사극화되지 못하는 게 다 왕자지 때문이라고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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