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drich II von HohenzollernFriedrich der Große (1712-1786)

Flute Concerto No.4 in D




 이전에 철학자와 대통령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왕입니다. 그것도 독일과 유럽의 근대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대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8세기 계몽군주의 대표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고 자기 자신이 음악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군주' 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프랑스인 교사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하노버 왕가 출신. 1687-1757)는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 프랑스 귀족 출신의 가정교사를 채용, 프리드리히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가 좋게(?) 말하면 군국주의적이고, 대놓고 말하면 반(反)지성주의자에 매우 폭력적이기까지 한 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어릴 적에 꽃 대신 전쟁용 북을 선택하여 치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결코 유약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군국주의자였던 아버지의 눈에는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자식이 예술이나 문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던지, 프랑스인 교사를 해임하고 음악을 즐기는 아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등 거의 가학적인 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정교육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다는군요.


 이런 식이니 부자지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혼담이 오갔던 것을 기회로 영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장기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당시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지만 사방에서 뜯어말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몇 년 후에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그가 즉위 후 교양과 예술에 탐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이러한 막장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매우 다행히도 그는 그 때까지의 고난에도 미쳐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인간성, 교양을 지켜냈으며 이후 왕으로서 이룩한 일들은 굳이 여기서는 나열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소개할 것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진 그의 음악 사랑과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활동입니다.


 실제로 그는 재위 초기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1747년 프리드리히는 (당시에는 건반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정으로 초청하였는데, 바흐는 왕이 직접 만든 주제 선율을 가지고 3성 푸가를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즉석에서 훌륭하게 해냅니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바흐에게 6성 푸가를 만들어 볼 것을 주문하였고, 바흐는 그 자리에서는 아니고 나중에 따로 완성하여 왕에게 헌정하니 그 유명한 <음악적 헌정>입니다(그런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곡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군요).


 사실 바흐와의 인연은 그의 아들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1714-1788)가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쳄발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가 왕세자였던 시절부터 궁정악단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즉위 후에는 정단원으로 승진하였고, 왕을 위한 작품들도 여럿 작곡하는 등 여러모로 프리드리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다만 후에는 음악적 관점에서 차이를 좀 보였다는데 그 때문인지 1768년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함부르크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즉위하자마자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1704-1759)을 이탈리아로 보내 음악가들을 채용하는 등 궁정음악의 수준을 높이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하임 크반츠(1697-1773) 등 여러 음악가들이 그의 궁정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크반츠는 프리드리히 개인의 플루트 교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단순히 음악의 후원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그의 궁정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왕이 직접 협연한 플루트 협주곡에 대하여 영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음악사학자인 찰스 버니(1726-1814)는 "지금까지 내가 그 어느 애호가들이나 전문 플루트 연주자들에게서 들은 것보다 월등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립서비스 아닌가


 이를 보면 그가 음악가로서 적어도 아마추어의 평균보다는 훨씬 훌륭한 기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음악적 성향으로, 말년이 되어서까지도 젊은 시절의 음악 취향을 그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의 말년에는 궁정에서 철 지난 음악만 줄창 연주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C. P. E. 바흐처럼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음악가 군주' 프리드리히 2세는 높은 음악적 소양으로 자신의 곡을 세상에 남긴 극히 드문 군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자작곡들 또한 그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준은 괜찮지만 철저히 구시대적'인 범작으로 평가받고 있긴 하지만요. 그냥 국왕의 신분으로 후대인이 들어줄 만한 음악을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문헌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 12(2), 한국서양음악회, 2009.

 한국어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바흐(J. S. Bach) 음악의 헌정(A Musical Offering) BWV.1079", 곽근수의 음악이야기(http://sou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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