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영(1922-1993)

String Quartet No.1 <Romantic>

 

 

 나운영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초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5세 무렵 아버지에게 양금을 배우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10대 초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17세 때인 1939년에는 가곡 <가려나>(김안서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에 당선될 만큼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김성태(1910-2012)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이듬해(1940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모로이 사부로(1903-1977)를 사사하였고, 1943년 본과를 졸업한 후 연구과에 진학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였습니다. 나운영은 작곡과 함께 첼로를 전공하였는데 귀국 후에는 채동선 현악사중주단과 경성후생악단에서 첼로 주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이 해방된 1945년에는 중앙중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중앙여자전문학교(現 중앙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후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목원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민족음악문화연구회를 창립하고, 민족음악 진흥을 위한 여러 활동에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선토착화(先土着化) 후현대화(後現代化)'라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음악 진흥에 힘쓰면서, 여기에 12음기법 등 현대음악의 여러 요소를 결합하는 여러 시도를 통하여 독창적인 한국의 현대음악을 정립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작품들은 초기에는 한국적 음악을 지향하다가, 중기 이후에는 현대음악에 한국적 요소를 덧붙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운영은 해방 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가, 몇 년 뒤 개신교로 개종하여 남은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종교음악이 많으며, 교회 성가대를 오래 지휘하거나 찬송가 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대한민국의 기독교 음악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반면 불교계의 위촉을 받고 찬불가(讚佛歌)를 작곡한 적도 있다니 종교적으로 심하게 편협한 자세를 갖지는 않은 듯한데, 이러한 이력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뜻하지 않게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의 작품은 관현악, 실내악, 가곡, 종교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13개의 교향곡, 5개의 오페라 및 칸타타, 18개의 예술가곡을 비롯한 다수의 가곡 및 찬송가, 총 12개의 실내악곡 및 피아노곡 등입니다. 현악사중주 1번은 1942년 작곡하여 제국고등음악학교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1952년 초연되었습니다.

 

 

 

@ 참고 :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http://launyung.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운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417)

법보신문 "찬불가 만든 개신교인 나운영의 시련"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497)

한국어 위키백과 "나운영"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9A%B4%EC%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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