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대기업은 많습니다. 1990년대 재계 1위까지 다투었지만 엄청난 분식회계로 몰락한 대우그룹이나, 자기 한 몸 쓰러져 IMF를 앞당긴 한보와 기아, 분가(分家)들은 여전히 번창하지만 본가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현대그룹, 조금 앞으로 가면 부산의 상징이었지만 전두환의 장난질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도 있지요. 그밖에도 재계에서 한가닥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을 나열하자면 아마 이 지면과 글 쓸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 기업들 가운데 '율산그룹'이라는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은 1970년대 창업하여 불과 3~4년만에 재계 10위권을 넘보는 대기업으로 폭풍 성장하였지만,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너졌지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배경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무튼 잠시나마 대한민국 경제의 '주인공'이었던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간신히 기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했다가 뜬금없이 사라진, 율산그룹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선호 율산그룹 창업자 (출처 에브리뉴스)

 

1. 창업과 폭풍성장 : 겁 없는 20대 청년들의 반란

 창업주 신선호(1947-)씨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중학교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는 서울(경기고등학교)에서 다녔습니다. 아버지 신형식(1901-2003)은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엘리트로, 일제강점기 강원도 평창과 전남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며 농지개혁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녀가 9명(7남2녀)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힘입어 대부분 학자와 기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중 6남인 신선호씨 역시 경기고등학교(평준화 이전)와 서울대학교 응용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엘리트 집안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신형식의 교육방침에 따라 9남매는 모두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선호씨는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고, 처음에는 오퍼상(수출-수입업자를 연결하고 커미션을 받는 일)으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본금 100만 원을 마련한 그는 1975년 6월 자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 몇 명과 함께 '율산실업'을 창업하였습니다. '율산'이라는 이름은 자기 아버지의 호에서 따 왔는데, 이는 동시에 고향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는군요.

율산그룹 경영 당시 신선호 (출처 머니그라운드)

 율산실업의 초기 성장을 이끈 것은 중동지역에 시멘트를 수출하는 무역업이었습니다. 율산은 사업성이 낮아 다른 기업들이 꺼려하는 거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수출 선박을 직접 임대하여 운영하는 식으로 채산성을 높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항만 사정 때문에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헬리콥터와 상륙함까지 동원하여 납기일을 지켰고, 현지 바이어의 신임을 얻은 율산실업은 무역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창업 첫 해, 고작 6개월 남짓 기간 동안 율산실업은 340만 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1975년 대한민국 수출액 총계는 50억 8천만 달러), 같은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수출실적은 해마다 퀀텀(?) 점프를 하여 이듬해(1976년)에는 4,300만 달러, 1977년에는 1억 6,500만 달러를 수출하였으며,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는 율산을 제외하면 현대, 삼성, 대우 등 12개뿐이었으니, 율산은 창업 3년만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이 된 것입니다.

 작은 무역회사로 출발한 율산그룹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업 첫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해운업(금룡해운 인수)과 건설업(동원건설 인수)에도 진출하였고,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중공업, 패션업, 전자, 관광호텔 등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사업분야를 넓혀 나갔습니다. 1979년 당시 율산그룹은 14개의 계열사와 27개 해외지사, 6개의 합작법인을 운영하였으며 직원은 8,000여 명, 자본금은 100억 원에 달했습니다.

 

2. 이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우선 전제할 것은 신선호씨, 그리고 그와 학연으로 이어진 경영진이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율산그룹은 창업 직후부터 다른 기업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이를 성공함으로써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사람들은 초기부터 계속된 성공의 경험이 이들의 사기를 높이고,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무역업'을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출 중심, 아니 수출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경제개발을 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출과 관계된 일을 하는 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퍼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수출라인 하나 잡으면 이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율산그룹

 당시 수출기업이 누리는 금융 차원의 특혜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들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 은행으로 가면 이를 담보로 즉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율은 6% 정도였습니다.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요? 당시 은행 대출금리가 25% 정도였습니다. ㅡㅡ; 심지어 이 대출금은 거의 눈먼 돈에 가까워서 기업들이 실제로 이 돈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든 부동산 투기를 하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특혜지요.

 율산그룹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율산은 1977년 금룡해운을 인수하여 율산해운으로 개편하였는데, 당시 인수자금 10억 원은 서울신탁은행에서 연 9% 이자로 빌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 공식 금리는 25% 이렇게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율산그룹은 단기간에 계열사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대기업들의 사업 확장 방법이기도 했지요.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경영진의 능력이 탁월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중동지역에 시멘트 수출하기'라는 대박 아이템을 잡은 것도 그렇고, 인수한 계열사들을 단기간에 각 분야별로 최상위권 기업으로 성장시킨 업적도 부정하기 어렵지요. 이제 갓 서른이 될까 말까한 율산의 젊은 경영진은 대한민국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율산그룹은 1977년 말 서울종합터미널(現 센트럴시티) 부지를 사들이고 과천 서울대공원 설계도 맡는 등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 율산그룹 공중분해, 왜?

 1978년 여름 발생한 한 사건이 모든 파국의 시작점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해 봄 율산실업이 사우디아라비아 법률상 외국 기업이 할 수 없는 유통업에 관여했다가 적발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에 알려지며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율산그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쫓겨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입니다.

 중동, 그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율산그룹에는 매우 중요한 해외 거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율산그룹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산그룹이 이에 해명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런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기금융회사(단자사)들이 대출자금을 대거 회수하여 그룹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애초에 기업 자체가 은행 빚을 쌓아올려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금융권의 신뢰가 꺾이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거기에 1978년 8월 발표된 부동산 투기 억제조치(8·8조치)가 그룹을 한 번 더 직격하였습니다. 그룹의 주요 돈줄이던 율산건설이 새로 아파트를 분양하였는데, 이 조치 때문에 집이 잘 팔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9월쯤 되면 율산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빠져 주거래은행(서울신탁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만큼 사정이 나빠졌고, 이에 서울신탁은행을 중심으로 시중은행들이 모여 총 70억 원의 구제금융을 퍼주었지만 이 돈은 대부분 단자사 빚을 갚는 데 소진해 버렸습니다.

 해가 바뀌고 1979년 1월에는 실로 괴이한 사건이 터지는데,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을 방문하던 신선호씨가 정부기관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신선호 납치기도사건). 워낙 해괴한 일이라 그 전말을 두고 권력 개입설, 자작극설 ㅡㅡ; 등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후 정부와 금융권의 태도가 율산그룹에 비우호적으로 돌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태도 변화에 납치기도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한데, 혹자는 "신선호씨가 언론에 경위를 설명하면서 괴한들이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하였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이 비서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 추측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서석준(1938-1983)이 재계 인사들에게 "율산은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율산그룹 붕괴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판장의 신선호.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출처 해럴드포토)

 당시 정부와 금융계는 율산그룹에 대해 추가 금융지원(총 90억 원)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납치기도사건 이후 모두 무산되었고, 동앗줄이 끊어진 율산그룹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1979년 4월 3일 신선호씨가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고(율산 사건) 3일 후 율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일괄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해체 당시 율산실업의 부채비율은 2600%, 율산건설은 670%, 율산알미늄은 470%나 되었다니 정치적 개입과 무관하게 기업 자체가 이미 빚 위에 쌓은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4. 후일담

 율산그룹 회장은 공식적으로는 신선호씨가 아니라 그의 장인이자 언론인, 관료, 친일부역자였던 부완혁(1919-1984)이었는데, 그는 <사상계>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오적」 필화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는 등 야당 성향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선호씨의 출신(전남 고흥)이 겹치면서 김대중과의 커넥션 의혹, 호남계 기업에 대한 경계 아니냐는 등 이와 관련한 온갖 의혹과 음모론이 판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 이후 율산그룹의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대기업에 인수되었는데, 이게 그룹 차원의 자금난 때문에 무너진 것이지 계열사들은 나름 알짜기업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이에나 해당 기업들은 인수된 이후에도 나름 잘 나가다가 IMF 전후로 새로운 모기업이 무너지며 함께 사라지거나, 혹은 모기업의 사업 재편으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흡수합병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건설 중인 서울대공원 조감도

 기업 자체는 이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율산그룹이 짧은 기간 동안 벌인 일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공원은 1970년대 말 율산그룹에서 설계 의뢰를 받고 미국 용역회사 PRC와 협력한 계열사를 만들어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건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공원 부지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장막성전'은 해체된 후 2020년 초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모 사이비 종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와도 조금이나마 접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산그룹이 구입한 고속터미널 부지는 그룹 해체 이후로도 오랫동안 신선호씨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각하면서, '터미널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제3자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채권단이 처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ㅡㅡ; 율산그룹이 계획한 20층짜리 복합터미널 계획이 날아가고, 신선호씨 및 그와 함께 남은 직원들은 가건물 상태이던 임시 터미널을 20여 년이나 지킵니다. 우주방어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센트럴시티가 완공되고 신선호씨는 수천억 자산가로 화려하게 재기하였습니다... 몇 년 뒤에 다시 경영권을 넘기기는 하지만요.

센트럴시티는 이후 애경그룹, 통일교를 거쳐 현재는 신세계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센트럴시티 홈페이지)

 

# 참고자료 #
 "102세 율산 신형식 옹 타계", 서울신문(https://www.seoul.co.kr/)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던 율산그룹 신선호, 첫 공판", 해럴드포토(http://photo.heraldcorp.com/)
 "고흥 출신 신선호 前 율산그룹 회장 재기 성공", 아시아뉴스통신(https://www.anewsa.com/)
 "대우 건설 뒤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머니그라운드(http://mground.kr/)
 "[서울 만들기] 43. 과천 서울대공원 조성", 중앙일보(https://news.joins.com/)
 "신선호씨 집안 스토리", 일요신문(https://ilyo.co.kr/)
 "[실록! 한국경제]⑨ “무너진 신화”… 율산(栗山)", 블록미디어(https://www.blockmedia.co.kr/)
 "율산그룹의 드라마틱한 기업 흥망사", KOSME 기업나라(http://nara.kosmes.or.kr/)
 "‘율산 신화’ 신선호 20여년 만의 인터뷰", 일요신문(https://ilyo.co.kr/)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 고교시절 100만원으로 기업 성장", 에브리뉴스(http://www.everynews.co.kr/)
 "[한국경제 비화 ㊶]율산실업 신선호 사건", 조세금융신문(https://tfm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부완혁"
 신세계센트럴시티 홈페이지(http://www.shinsegaecentralcity.com/)
 한국어 위키백과 "율산그룹"
 나무위키 "센트럴시티", "율산그룹"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