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Opera <Le Devin du Village> (1752)

루소, 1750년

 계몽주의 철학의 상징, 자유의지에 기반한 사회계약론과 교육론 등 수많은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시대의 민주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대철학자 루소는 학술활동과 동시에 음악가로도 제법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작가나 철학자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작곡가로도 상당한 명성을 날렸으며, 바로크에서 고전파로 음악 사조가 넘어가는 과도기에 음악에 관한 다양한 논쟁과 이론 정립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역시 정치적 문제로 아들을 떠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소는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간 루소는 엄격한 규율과 복종이 강제되는 작업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6세 때 가출을 하게 되는데, 한동안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바랑(Warens) 남작부인의 후원을 받게 됩니다. 루소의 재능을 알아보았는지 바랑 부인은 그에게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으며, 10여 살 연상의 남작부인을 '엄마'라고 부르던 루소는 이후 그녀의 정부(情夫)가 됩니다.

 바랑 부인의 지원으로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사색할 수 있었던 루소가 가장 열정적으로 빠져든 분야가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적 열정을 알아본 바랑 부인은 그를 성가대 학교의 악장인 르 메트르에게 보내어 음악 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본인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샹베리(Chambéry)에 있었던 남작부인의 저택에서 함께 음악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루소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한 이 시절은 바랑 부인이 애인을 갈아치우면서 파탄났고, 잠시 방황하던 루소는 1740년 파리로 이주하여 당대의 유명 철학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루소는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악보를 고안하여 1742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습니다. 이 악보는 숫자를 사용하여 음높이나 셈여림 등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는데, 정작 아카데미에서는 큰 비판만 받고 그대로 묻혀 버렸습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음악가였던 장 필립 라모(1683-1764)는 "참신한 아이디어이지만 음높이와 길이 등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연주자들이 바로 연주로 옮기기 까다롭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가로서 루소의 도전은 한 번의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루소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작곡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1740년대부터 이런저런 작품을 발표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1752년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루소 본인이 직접 대본과 곡을 모두 쓴 이 작품은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이라는 패러디물이 유럽 곳곳에서 인기를 끌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었습니다(이 패러디물을 기반으로 어린 모차르트가 자신의 초기 오페라 중 하나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에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심하게 긴장한 나머지 그는 사정사정해서 알현을 취소하고 말았다는군요.

 이외에도 디드로 <백과전서>에서 음악 관련 부분 집필을 맡는 등 음악철학이나 이론 쪽에서도 활동하던 그는 1750년대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부퐁 논쟁'의 중심인물로 활약하게 됩니다. 발단은 페르골레시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가 1752년 파리에서 초연된 것이었는데, 장바티스트 륄리(1632-1687)로 대표되는 웅장한 프랑스 오페라와 달리 가벼운 주제와 서정적 멜로디를 특징으로 한 이탈리아식 '오페라 부파(프랑스어로는 '부퐁') 프랑스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에 계몽주의자와 백과전서파 등 새로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프랑스 오페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 선두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계몽사상가이면서 동시에 같은 해 인기 오페라를 발표한 작곡가였던 루소였습니다. 루소의 포문은 당시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라모에게 향했는데,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에 대하여 그는 화성이 너무 거창하다고 혹평하며 "마치 끊어지지 않는 소음 같다"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음악에서 자유로운 선율을 중시했던 루소에게는 근대 화성학의 기초를 세웠을 만큼 화성적인 음악을 중시한 라모와 음악적 측면에서 대척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이 논쟁은 점차 확대되어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 간의 대립, 나아가서는 이를 지지하는 신흥 지식계층과 왕족, 귀족 및 일반 청중간의 대립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양측 지지자간 결투까지 벌어질 정도로 과열된 이 논쟁은 정작 한쪽 중심인물이었던 라모가 1764년 사망하면서 허무하게 생물학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 논쟁의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으며, 그 선두에 있었던 작품이 바로 루소의 <마을의 예언자>였습니다.

 루소의 대표곡 <마을의 예언자>는 서로 연인 관계인 두 양치기가 오해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것을, 마을의 점쟁이가 노력하여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는 내용의 단막극인데, 단촐하며 일상적인 줄거리가 당시 루소의 음악적 입장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 속에는(영상 50:43~)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 및 기독교 찬송가 <주여 복을 비옵나니> 등 여러 노래에 채용된 유명한 멜로디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서울경제 <[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때늦은 음악열정' 귓가에 들리는듯>
경상일보 <[구천의 음악이야기(201)]오페라 작곡가 루소(Jean-Jacques Rousseau)>
아츠앤컬처 <환갑을 앞둔 철학자는 열두 살 신동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블로그 <음악사가 있는 고전 음악 박물관>
한국어 위키백과 "부퐁 논쟁", "장필리프 라모", "장바티스트 륄리", "오페라 코미크(장르)"
영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Le devin du village"
프랑스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나무위키 "장 자크 루소"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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