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ハイサイおじさん(하이사이 오지상)>은 오키나와 출신 싱어송라이터 키나 쇼키치(喜納昌吉)의 데뷔작으로, 1977년 발표 이후 일본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며 '우치나(오키나와) 팝'의 선두주자로 인정받게 된 노래입니다. 오키나와 전통음악 특유의 '류큐 5음계(도-미-파-솔-시)'를 사용하고 있으며, 표제의 의미는 '안녕하세요('하이사이'는 오키나와 어 인사말) 아저씨' 정도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 전체적으로 흥겨운 곡조를 띤 이 노래는 어느 소년과 아저씨가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자는 이 노래에 얽힌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오키나와 출신인 작자의 집 옆에는 오키나와 전투 때 충격을 받고 정신 이상이 된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정신 착란을 일으켜 자신의 어린 딸을 목졸라 죽이고 그 시신을 냄비에 넣어 요리를 하고 있었더랍니다.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면서 마을 전체가 뒤집어졌고, 그 아주머니는 어딘가로 끌려갔으며(아마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아주머니의 남편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정신 이상이 되어버렸다고 하지요.

 - 이후 그 남편은 옆집에 계속 살면서 작자의 집에 술을 얻어먹으러 오곤 했는데, 딱한 사연을 알고 있던 작자의 집안에서 그 남편을 잘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가사는 이 때 소년이었던 작자 자신과 술을 얻어먹으러 온 그 옆집 아저씨와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그저 흥겹고 신나기만 한 이 노래에는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트라우마, 그리고 이를 잊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던 지금까지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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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夜(ゆうび)ぬ三合ビン小(ぐゎ) 残(ぬく)とんな
残(ぬく)とら我(わ)んに 分(わ)きらんな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三合ビンぬあたいし 我(わ)んにんかい
残(ぬく)とんで言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三合ビンし不足(ふずく)やみせぇーら
一升(いっす)ビン我(わ)んに 呉(くぃ)みせー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夕べの三合ビンは残っとるかぁ~?
残っとったらワレに分けてくれんか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三合ビンの量をワシに
残っとるか聞いとんのかい。えィ小僧

小僧:
あのなぁ、おじさん。三合ビンで不足ちゅうなら
一升ビンをワレくれるとでも言うんなぁ~ 

2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とぅしぐる)なたくと 妻(とぅむ)小(ぐゎ)ふさぬ
うんじゅが汝(いやー)ん子(ぐわ)や  呉(くぃ)みそうらに
ありー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童(わらばー)ぬ くさぶっくいて
妻(とぅむ)小(ぐゎ)とめ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二十や余て三十過ぎて
白髪(しらぎ)かみてから 妻(とぅむ)とめゆ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だで女房が欲しいんだけど
おじさんの娘をくれないかい?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小僧の癖しやがって
女房を娶ろうってか、えィ小僧

小僧:
それならおじさん。二十三十過ぎて
白髪になって女房を娶れってか。

3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カンパチ まぎさよい
みーみじカンパチ 台湾はぎ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頭(ちぶる)んはぎとし 出来やーど
我(わ)ったー元祖(ぐゎんすん)ん むる出来やー
あんせおじさん 我(わ)んにん整形しみやーい
あまくまカンパチ 植(い)い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ハゲはデッカイねぇ
ミミズハゲだど 台湾ハゲ~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禿とるもんは出来がええのよ。
うちの先祖もものすごう出来が良い。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ワレも整形してみるわ
あっちこっち、ハゲをこさえてやろうかよ

4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ヒジ小(ぐゎ)ぬ をかさよい
天井(てぃんじょ)ぬいぇんちゅぬ ヒジどやる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ヒジヒジ笑ゆしが
ヒジ小(ぐゎ)ぬあしがる むてゆんど
あんせんおじさん 我(わ)んにん負きらん明日(あちゃー)から
いぇんちゅぬヒジ小(ぐゎ) 立て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の髭っておかしいわ。
天井ネズミの髭みたいやな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前は髭を笑うけど、
髭があるからモテるんよ。

小僧:
あのなおじさん。ワレも負けとれん明日からは
ネズミ髭でも生やしょうわい。

5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日ぬ女郎(じゅり)小(ぐゎ)ぬ 香(か)ばさよい
うんじゅん一度 めんそーれー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辻、中島、渡地とぅ
おじさんやあまぬ 株主ど
あんせんおじさん毎日(めーなち)あまにくまとして
(※)
我(わ)んねー貧乏(ひんすー)や たきちきゆみ 

※我んねちゅらーさよーがりゆさ(わたしゃはきれいに痩せるわね)
 汝やちゅらーくよーがりゆさ  (おまえさんきれーに痩せられるさ)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ゆんべのお女郎はかぐわしかぁ~。
あんたも一度はやっかいになったら?。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じさんは辻、中島、渡地(遊郭地)の大旦那よ。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毎日遊郭にいりびたり
ワレも貧乏なってみようか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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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궁금하신 분께서는 이곳의 댓글을 참고하세요.##

 - 이 노래는 오키나와 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시엔 야구 대회에서 오키나와 지역 학교의 응원단이 줄곧 이 노래를 응원가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키나와 지역은 1972년 다시 일본 영토로 바뀌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현재, 오키나와는 순조롭게 일본의 일부로 녹아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 2010년대에 와서도 오키나와 현이 일본의 많은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도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주일미군 문제에 있어서 오키나와 섬이 계속 독박을 쓰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딱히 나아진 것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 오키나와 인의 자기 정체성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본인임을 인정하지만(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오키나와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상당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들은 방송에서 기미가요(일본의 국가(國歌))를 부르지 않으며 간혹 부르는 사람은 오키나와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現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비록 당세는 크지 않지만) '류큐 독립당'이 활동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주민이 오키나와 독립을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일본 반환 이후 오키나와 지역의 핵심 과제는 미군기지의 이전 문제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현 전체 면적의 19%를 차지하는 미군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할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고, 일본 정부는 이를 묵살하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간신히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정권은 다시 자민당에게 넘어갔고, 모든 것은 다시 원위치로......


 - 결국 자민당 소속인 현지사(한국으로 치면 도지사)가 일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지를 현 내부로 이전할 것을 추진하자,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의 지사 선거에서 반대파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후보를 상당히 큰 표차로 선출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이 문제는 현지사에게 그리 큰 권한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중.


 - 미군 기지가 현내로 이전할 경우 후보지는 오키나와 섬 중부의 헤노코 해변인데, 이 곳에서는 기지 이전 반대시위가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위측에서는 아예 반대시위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서, '헤노코 시위현장 방문 코스'라든지 '반대구호 부착을 조건으로 한 무료 카누 체험'이라든지 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고...... 헤노코의 투쟁은 현재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는 뒷이야기 또한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정치적 여론이나 지형에 있어서 오키나와 현 내에서도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섬 지역간의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앞에서 말한 '인두세' 등의 역사적 문제,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본섬 외에는 대량학살이 발생한 곳이 없었다는 사정이 더해져 두 지역간의 정치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섬을 제외한 곳에서는 현재도 자민당이 강세이며, 오키나와 전투에 대하여도 일본 본토에 상당히 우호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새역모>의 극우 성향 교과서를 채택한 곳이 있을 정도.


 - 이것만 해도 오키나와의 사정은 상당히 복잡한데, 최근에는 조어도(센카쿠 열도) 문제와 관련하여 난데없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주장은 오키나와 주민들조차도 철저히 무시할 정도로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중국이 내세우는 이유라는 게 류큐 왕국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번속국(藩屬國)이었다는 것이니 오키나와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오히려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이 논리가 발전하면 과거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던 주변의 모든 국가에 대한 정치적 압력 행사로 이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곳에 사람이 사는 이상 계속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에 주민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라는 두 글자가 새겨질 날은 과연 언제쯤에나 찾아올까요.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 현재의 착취자가 사라지면 그래도 무언가 나아질 거라며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누가 그들을 착취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임은 머지 않아 드러납니다. 일단 본섬 외의 주민들에게 징수하던 인두세는 류큐 처분 이후에도 190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됩니다. 새로운 착취자인 일본 정부는, 수백 년간 유지된 주요 수입원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 한편 본섬과 주변 지역을 막론하고 실시된 것이 바로 가혹할 정도의 동화정책, 아니 '문화 말살' 정책입니다. 전통적인 류큐 언어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그 자리에 표준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합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이 이루어졌고,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을 비롯한 류큐 왕국의 흔적은 방치되고 파괴되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식 성씨로의 '창씨개명'을 강요당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지요? 이로부터 수십 년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에게는 식민 지배의 연습장이었던 셈입니다.


 - 명목상 일본 내 행정구역, 실질적 식민지, 오키나와의 여러 섬과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은 어김없이 불어닥칩니다.


 - 미국에게 강력한 선빵(진주만 공습)을 한 방 날린 일본군은 잠시간 잘 나가는 듯 보였지만, 본격적인 전쟁모드로 돌입한 미군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며 태평양 절반을 차지한 판도를 급속도로 잃어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시피하던 일본 군부는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 이후로 일본의 지상과제는 '어떠한 피해도 감수하고 천황(과 지배계급)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는 상관없이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고, 연합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최대한 꺾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 이를 위하여 일본군은 본토와 주변의 주요 점령지를 온통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갔고, 몇 년간 일본군을 '사냥'해오던 연합군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피해가 커질지언정 승패에는 변동이 없었고,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된 곳이 바로 오키나와 본섬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은 이미 일본군과 주민의 강제동원으로 섬 전체(특히 인구가 밀집한 남부지역)가 요새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일본군과 주민들은 섬 곳곳에 파놓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었고 해안 방어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던지라, 매우 순조롭게 상륙할 수 있었던 연합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이 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는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느니 자결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이들을 일회용 자살병기로 써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임산부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연합군에게 자살돌격하도록 한다거나......


 - 일본의 철저한 세뇌교육은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연합군에 항복했다간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살해당한다'는 인식을 심어놓았고,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항복할래야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섬 곳곳에서 학살 뿐만 아니라 집단 자살도 예사로 벌어집니다. 주민들은 연합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없게 되면 '명예롭게 죽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습니다.


 - 연합군은 곳곳에 산재한 참호와 동굴을 점령하기 위해 화염방사기와 독한 연막탄까지 동원해야 했고, 결국 일본군의 모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거의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1만2천명, 일본군 사망자는 6만5천명(미국측 추산),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는 12만명(일본측 추산)에 달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3~40만명 정도였습니다.


 - 다수의 일본군과 자신들의 식민지를 희생하는 대가로 일본은 그들의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예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에 질려 다음 계획이었던 본토 침공 작전을 사실상 포기했고, 이는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대체됩니다. 20만명의 사망자와 이를 능가하는 방사능 피폭자를 더한 끝에 일본은 항복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상당수의 지배계급)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인구의 1/3이 사망한 오키나와는 그대로 미국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 섬 전체를 미군 기지로 만들어갔습니다. 일본군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제 미군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미군 전투기의 비행 소음을 매일같이 듣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미군기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한반도와 베트남을 폭격하는 비행기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악마의 비행기가 날아오는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고, 이 말을 듣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우리는 악마가 되기 싫다'며 마찬가지로 치를 떨었습니다.


 -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따라 다시 일본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우측통행이 좌측통행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섬의 미군기지만큼은 떠나는 일 없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위 '오키나와 반환'이란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그저 지배자가 바뀐 것, 아니 어쩌면 지배자가 둘이 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속)



 면적

 2,276.49 ㎢

 인구

 1,416,587 명 (2013. 10. 1.) 

 현청소재지

 나하 시 


 - 오키나와(沖縄) 현은 일본 남부의 류큐(流球) 제도의 섬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지역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섬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있으며,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여 북쪽으로 올라오는 태풍의 주요 통과지점이기도 합니다(아마 여름철 태풍예보에서 "지금 태풍의 위치는 오키나와 남동쪽~"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본 본토와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외에서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라는 데서 짐작이 가능하지만, 오키나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가가 공식적으로는 1879년, 비공식적으로는 1609년까지 존속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그 이전 시대에 3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류큐 섬이 쇼(尙) 씨가 지배하는 추잔(中山)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성립되었고, 초기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 16세기경에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 하지만 그 전성기는 별로 길지 못해서, 16세기 후반 명,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이 동아시아 무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 일본 본토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의 군대가 침략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일본(정확히는 사쓰마 번)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다만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중국으로의 조공이 막혀 곤란에 처해 있던 일본은, 역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류큐를 이용하여 중국과 간접적으로 조공 무역을 할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산 사치품은 일본 지배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고, 일본은 류큐가 조공을 통해 사치품을 확보하면 이를 가로채는 방법으로 수요를 해결했습니다.


 - 류큐의 이점은 또 있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중에서 사탕수수 농업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확보하면 설탕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설탕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류큐를 직접 통제하는 사쓰마 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이 유신시대 사쓰마가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 류큐는 일본의 사탕수수+사치품 셔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 본토의 착취와 무역 금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빠진 류큐 왕조는 결국 '세금'을 통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류큐 왕조는 류큐 본섬 이외 주변의 다른 섬들(북부의 아마미 제도는 아예 사쓰마 번에 편입당했으니 빼고)를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되죠. 다단계 착취......쯤 되려나?


 - 이들 섬들(야에야마라든지, 구메지마라든지 하는 지역)에 류큐 왕조는 '인두세'를 매깁니다. 즉 사람 수대로 세금을 매긴 것인데, 이 세금이 가혹했던데다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까지 인두세가 매겨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세금이 매겨지는 사람의 머릿수를 줄여가며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불필요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세금을 줄인 거죠.


 - 이런 '독립국이지만 독립국이 아닌' 상태가 이백 년 이상 지속되다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드라이브를 밟고 있던 일본이 이 틀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수준을 목표로 하던 일본은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지역의 식민 지배를 꿈꾸게 되었고, 그 테스트 무대로 이미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를 선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명목상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일본은 두 단계에 걸쳐 류큐를 멸망시킵니다. 이를 '류큐 처분'이라 합니다.


 - 1차 류큐 처분은 1872년, 류큐를 일본의 일개 번(藩, 영주가 통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격하시키고, 류큐 왕을 '류큐번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얼마 후 타이완 섬에서 류큐 주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에서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출병시켰는데, 중국에서 타이완 침공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류큐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 번을 폐지하고 (잠시 가고시마 현에 편입했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2차 류큐 처분입니다.


 - 당시 류큐 처분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는데, 이전에 함포외교를 통해 류큐를 강제개항시킨 바 있는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 전(前) 대통령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이를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정작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류큐의 일본 편입은 어영부영 확고한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 흥미롭게도, 류큐 처분에 대하여 류큐 본섬 이외의 지역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상술했다시피 류큐 왕조에서 강요하는 '인두세'가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이들의 노력이란 세금 명세서나 다름없는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 임산부를 죽인다거나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배자가 바뀌는 것을 환영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은 합니다. 적어도 인두세를 낼 필요는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 과연 이들의 작은 소망은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오키나와의 끔찍한 역사가 이제 시작에 불과했음은, 시간이 지나며 명백해지게 됩니다......(계속)



 -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평소 세계지리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 한 번 들어봤기 힘들 그런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남부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로, 마다가스카르 섬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며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합니다. 근대 이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당했으며 1960년 독립하였습니다.

 -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매우 특이하게도, 바로 옆 아프리카 대륙이 아니라 거의 지구 반대편인 동남아시아-태평양 쪽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언어인 '말라가시어'는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 등을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 어족'(대만 원주민 언어를 기원으로 하며, 동남아시아 남부와 태평양 일대에서 사용된다)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인도양의 끝에서 끝까지 횡단했을지는 미스테리인데, 이 어족이 반대편으로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나 이스터 섬까지 퍼져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항해술로 충분히 가능은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 라치라카 : 독재와 경제난

 - 아무튼 마다가스카르는 독립 이후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사회주의 성향의 일당 독재국가가 됩니다. 하지만 (역시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잦은 군사 쿠데타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199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 민주 공화국이 됩니다. 1976년부터 장기 집권 중이던 디디에 라치라카(1936~)는 헌법 개정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해먹다가, 1993년 알베르 자피(1927~)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게 됩니다.

 (사진 1 : 디디에 라치라카)


 - 하지만 자피 정권은 라치라카를 압도(?)할 만큼 무능하였고, 사회가 갈수록 난맥상에 빠지는 속에 자피는 탄핵당하고 정치적 혼란 끝에 라치라카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재집권한 라치라카는 외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지만, 얼마 뒤 동아시아 경제 위기(우리의 기억엔 그 이름도 찬란한 IMF...)를 계기로 외국 자본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마다가스카르 경제는 완전히 붕괴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마크 라발로마나나(1949~)였습니다.



 (사진 2 : 마크 라발로마나나)


 - 라발로마나나는 젊은 시절 요구르트 등의 유제품 생산에서 시작하여, 마다가스카르 굴지의 대기업을 설립한 기업가였습니다. 그는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1999년 안타나나리보(마다가스카르의 수도) 시장에 선출되었고, 이 시기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01년 대선에 출마하여 라치라카와 경쟁하게 됩니다(대한민국의 어떤 전직 대통령이 생각나지만 넘어가기로). 투표 결과는 라발로마나나 46%, 라치라카 40%로 규정상 결선투표를 시행해야 했으나, 라발로마나나와 그가 소속된 TIM 당은 선거가 공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자신이 과반 득표를 했다고 주장, 결선투표를 거부하고 자신이 당선되었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 졸지에 마다가스카르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한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여론은 라발로마나나 쪽으로 쏠려 있었고, 헌법재판소 역시 라발로마나나의 손을 들어주고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쯤 되자 궁지에 몰린 라치라카는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던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시도하나, 아무 지지도 받지 못하는 쿠데타는 그야말로 처참히 실패하고, 라치라카 본인은 외국으로 도망치는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 라발로마나나 : 신자유주의 드라이브


 - 라발로마나나는 대통령 취임 이후 강력한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라는 게 신자유주의 성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외국 자본에 대한 전면적 개방, 친 기업적 조세 정책, 대규모 토목 사업, 민영화 등......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정책들을 시행하였고, 이는 빈부 격차의 심화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IMF의 경제 지원이나 외국 자본의 투자를 실제로 얻어내는 등 어쨌거나 경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이 가시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다음 대선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2007년 대통령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한 헌법 개정을 관철시키는 등, 점차 독재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기에 그의 임기 동안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극심해졌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다가스카르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엄한 소리를 해서(어 이거 진짜 누구하고 똑같다;;) 위헌 논란에 휩싸이는 등,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마다가스카르 인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안드리 라조엘리나(1974~)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안타나나리보에서 DJ로 활동하던 그는, 당시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통해 시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오죽하면 거침없다고 해서 별명이 TGV). DJ로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2007년 안타나나리보 시장 선거에 출마한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쪽에서 깜짝 놀라 대항마로 출마시킨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눌러버리고 시장에 당선됩니다.



 (사진 3 : 안드리 라조엘리나)


# 라조엘리나 vs 라발로마나나, 그리고 대우로지스틱스


 - 거칠 것이 없어진 라조엘리나는 자신의 별명을 따 TGV 당을 창당하고, 정부의 언론 통제에 맞서 '비바TV'라는 독립언론을 설립하여 대놓고 라발로마나나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라발로마나나 정부는 안타나나리보에 들어가는 모든 정부 지원을 끊어버리는 무리수를 두었고, 누가 봐도 대놓고 라조엘리나를 억압하는 형세가 되자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민심이 더욱 라조엘리나 쪽으로 쏠리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 이 와중에 마다가스카르 전체를 뒤흔들 초대형 사건이 터지는데, 정부가 한국의 대우로지스틱스(이하 대우)에게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농장 경영을 위해 99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대우가 임대 경영에 대한 대가조차 사실상 거의 지불하지 않는 조건이었고(선금 정도는 있었는데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대우가 임대한 토지는 총 130만㏊에 달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마다가스카르 전체 농경지의 절반을 넘는 규모라고 합니다.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정부에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 이 문제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를 제외하면 언론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오히려 외국 쪽에서 더 큰 사건으로 조명을 받았는데, 신식민주의적 경제 침략이라는 비판과, 엄청난 규모의 농장 개발을 통한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것입니다. 가치 판단은 독자들께 맡기겠지만, 적어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사건이며 한국의 농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문제에 대해 언론이 지나칠 정도로 침묵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습니다.]]


 - 정부는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고, 라조엘리나는 대립의 수위를 더욱 높여갔습니다. 더 나아가 라조엘리나의 비바TV는 아예 정부에 대놓고 BJR(배째라)을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그가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여과 없이 방송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라치라카는 라발로마나나에 대항해 쿠데타까지 일으켰던 인물이니, 정부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 방아쇠가 당겨지다


 - 결국 참다못한 정부는 보안군을 투입하여 방송국을 급습하기에 이릅니다. 일단 프랑스 대사관저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한 라조엘리나는 본격적으로 안타나나리보 시민들에게 정부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는 슈퍼마켓과 친정부 언론사를 습격한 후 대통령궁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통령궁을 지키던 군부대가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에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즉시 사임을 요구하였고, 정부는 라조엘리나를 국가반역죄로 법정에 고발하는 등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 곳곳에서 군부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늘어가는 와중에 극적인 전기가 마련됩니다. 국방장관이 시민에 대한 발포에 항의하여 장관직을 사퇴하고, 군부는 더 이상의 시위 진압을 거부하고 오히려 시위대 쪽으로 돌아서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총구를 돌린 군대는 곧바로 대통령궁을 장악했고,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권한을 군부에 이양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군부는 이 권한을 다시 라조엘리나에게 이양,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가 사라진 마다가스카르의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하고, 곧바로 사태의 도화선이었던 대우와의 계약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사진 4 :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라조엘리나)


@@동영상 링크 - BBC


 - 여기까진 순조로워 보이지만 라조엘리나의 대통령 취임은 상당한 불안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단 마다가스카르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연령 제한이 40세였기 때문에, 34세에 불과한 라조엘리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지만 법정의 판결과 헌법 개정을 통하여 대통령 자리를 인정받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발로마나나 지지파는 극력 반발하였고, 이들의 보이콧 운동으로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50% 투표를 간신히 넘기며 가까스로 통과됩니다. 이 외에도, 어쨌거나 쿠데타라는 과정을 통한 집권이었다보니 세계 여론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질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아프리카 연합은 그의 집권 과정을 문제삼아 마다가스카르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고, 서방세계의 경제지원도 잇따라 끊어지게 됩니다.


# 세 사람의 이전투구泥田鬪狗, 그리고 (아직은) 현재진행형


 - 라조엘리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제이콥 주마의 중재를 받아들여 망명 중인 라발로마나나와 회담을 가졌고, 둘 모두 차기 대선에 불출마하기로 합의를 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난데없이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가 돌아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라조엘리나는 합의를 뒤집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고 말을 바꿔 버립니다. 당연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아내인 랄라오 라발로마나나(1953~)를 내세워 대선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 사태가 점점 개싸움으로 흘러가자, 국제적 여론 또한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특히 마다가스카르를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프랑스는 세 명 모두의 불출마를 강력히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대선 자체를 인정치 않겠다고까지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당국은 세 명의 후보 등록을 모두 불허하였고, 예정보다 미루어진 2013년 12월 마침내 대선이 치루어지게 됩니다. 결선투표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라조엘리나 정부에서 재정장관을 역임한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1958~)가 라발로마나나 계열의 장 루이 로빈슨(1952~)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사진 5 :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나나 현 대통령)


 - 국제사회는 이 선거 결과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내렸는데,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대통령이 라조엘리나 전 대통령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달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해피엔딩......이라 말하고는 싶은데, 아직까진 섣불리 마무리짓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일단 망명 중이던 라발로마나나는 2014년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었는데, 2009년의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라발로마나나 측은 정치보복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중. 한편 라조엘리나 역시 차기 대선에 재출마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하니, 모든 상황의 종결까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ps. :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현 대통령의 풀네임은 'Hery Martial Rakotoarimanana Rajaonarimampianina'로, 현재 세계 국가수반 중 가장 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 사진 출처 : 

위키백과 한국어판 - "안드리 라조엘리나"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마다가스카르 정치위기 사태"

위키백과 영어판 - "Andry Rajoelina" "Marc Ravalomanana" "Hery Rajaonarimampianina" "Didier Ratsiraka"

엔하위키 미러 - "마다가스카르 혁명"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4/01/03/0505000000AKR20140103197300099.HTML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1732196.html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kia&articleno=15852543&categoryId=599183&regdt=20090318004040




 - 누구나 여행을 가 보고 싶은 곳 한두 군데쯤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그만큼 다양하게 있겠죠. 나에게 여행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역사 오덕(?)이라서 그런가, 무언가 역사적으로 절절한 사연 한 권쯤 가지고 있을 동네들이 나의 버킷리스트로 남아 있습니다. 오키나와의 고난의 역사, 쿠바의 사회주의로 살아남기, 이집트의 고대와 근현대, 중국 천안문의 어제와 오늘 등등.


 - 한국에서 그런 곳을 꼽으라면 단연 제주도가 될 겁니다. 독자적 창조신화를 가진 '탐라국', 한반도 왕조의 실질적 식민지이자 착취의 보고, 삼별초 최후의 보루, 몽골 제국의 말 목장, 최악의 유배지, 출륙 금지령, 가장 학구적이며 가장 진보적이었던 근대사, 4.3 대학살과 이후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지워야만 했던 핏빛 현대사까지.


 - 이런 곳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여행을 떠나 본 적은 거의 없었던 처지,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는 서글픈 쳇바퀴를 돌리며 살아왔던 나에게 이번 휴식기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막판 시험대비로 바쁘던 중 문득 '제주도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망설임 없이 출발 비행기편을 예매합니다.


 - 네. 정말 아무 계획도 없다시피합니다. 처음엔 언제 돌아올지도 계획이 없었더랍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대책은 세워야겠다 싶어서, 교통수단은 자전거로 정하고, 8일 후에 돌아오는 비행기편을 예매하고 첫 이틀간의 숙소를 예약해둡니다. 8일이라는 시간제한이 있으니 하루에 대강 어디까지 가본다라는 정도 구상도 해 봅니다. 그걸 빼면 정말 아무런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습니다.


 - 뭐 그렇게 대책없이 여행을 가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내가 본 적도 없는 곳으로 가면서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는 건 가능이나 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해안도로를 달리며, 멋진 곳이 있거들랑 잠시 자전거 세워두고 바닷바람과 함께 쉬다가, 또 달리다가, 해가 지거든 멈춰선 동네에서 숙소를 잡고 다른 여행자들과 소소한 파티. 뭐 이런 게 여행의 맛 아닐까 싶었습니다. 물론 돈 문제를 좀 안일하게 생각했다가 좀 불안불안한 상황이 되긴 했지만


 - 묘한 설렘이 휘감아돕니다. 내일 밤 나를 맞이할 제주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 곳에는 어떤 자연과, 어떤 역사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내일의 짐을 준비합니다. 초짜 여행자의 제주여행, 거기서 나는 어떤 것을 남길 수 있을까요.




 - 그럼, 돌아와서 다시 만나요!



 - 과연 2편이 나올 지 알 수 없는 <나의 고전게임답사기> 첫 게임은 대항해시대 2로 정했습니다. 그동안 몇몇 캐릭터의 엔딩을 본 기억은 있지만 모든 캐릭터를 마스터해 본 적이 없던지라 이번에는 모든 캐릭터의 스토리엔딩을 목표로 플레이하기로 합니다. 공략이랄 건 별로 없고, 스토리 위주로 글이 진행됩니다.





 장르 

 복합 (전략 + RPG)

 개발사

 코에이

 발매연도

 1993년


대항해시대 2 : 알 베자스 - (1) 아 장사하자


 - 게임을 시작하면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메뉴 선택 화면이 달랑 뜹니다(대항해시대 2의 음악은 칸노 요코 작품). Start new game으로 들어가서 캐릭터 선택 화면을 띄우고(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의 소속 국가 위치에 있음), 캐릭터를 선택합니다. 블로거는 첫 번째로 알 베자스를 선택하였습니다.



 - 시작 이후 이스탄불의 조선소로 가면, 그의 친구 사림이 웬 배 한 척을 수리해 두었다고 말합니다.



 - 이 배를 기반으로 무역을 시작하자고 무턱대고 주장하는 사림, 하지만 알에게는 장사 밑천은 고사하고 배의 수리비조차 없죠. 이 배로 장사를 해서 나중에 수리비를 갚겠다고 말하는 알에게 조선소 사장 曰



 - 그 대신 수리비를 10배로 내놓으라는 사장의 바가지요구를 알은 덥석 받아들입니다. 이후 장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온 이스탄불 시내를 쏘다니는 알과 사림, 가까스로 몇 군데의 호구사람들에게 수익률 1000%10배로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돈을 빌립니다.



 - 그렇게 밑천을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장사에 뛰어듭시다. 극초기 무역루트는 융단(이스탄불)-미술품(아테네) 거래가 그저 진리. 처음에는 저 비싼 사치품들을 많이 구입할 수 없으니 상관없지만, 돈이 모이고 대량 구매가 가능해지면 조그만 라티나의 용량은 대번에 부족해집니다. 돈을 모아서 나오나 지벡, 카락 등의 중대형 선박으로 교체해줍니다. 가급적이면 돈이 웬만큼 모일 때까지는 돈을 갚지 말고 채권자들의 독촉(?)에 "조금만 기다려달라"MB?는 대답으로 일관하도록 합시다.



 - 교역소 직원은 돈도 빌려주지 않더니 교역을 하러 들어올 때마다 특유의 비아냥으로 우리의 속을 긁습니다. 두고보자


 - 어느 정도 돈이 모였다면 우리의 호구들에게 수익률 1000%를 안겨주러 갑시다. 항구 관리인에게 돈을 갚으면 뜬금없이 웬 걸인모험가 한 명이 나타나 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 나중에 플레이하게 될 '피에트로 콘티'의 등장. 그에게 돈을 빌려주고(그래서 웬만큼 돈을 모은 다음에 갚자고 했던 것), 나머지 고갱님들에게도 돈을 갚으러 갑니다. 주점의 라디아는 능력있어보여 좋다며 어장관리이스탄불에 올 때마다 들러달라고 합니다.



 - 마침내 수리비를 받아낸 조선소 사장은 이런저런 잡지식을 알려줍니다.



 - 은행 직원에게 돈을 갚을 때는 뜻밖의 손님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셜록은행장. 그는 알에게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면서,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남기고 갑니다.



 - 사실 알이 바다로 나선 또 하나의 이유는 고아시절 헤어진 자신의 동생 사파를 찾는 것. 알은 주점의 정보통 라디아를 통해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직 아무런 성과도 없습니다.



 - 이 쯤 되면 슬슬 황제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여타 캐릭터와는 달리 알은 스토리 진행을 위해 작위의 획득이 반드시 필요하니 곧장 궁전으로 갑시다.



 - 당시 오스만 제국 황제는 슐레이만(쉴레이만) 1세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1520~1566년 사이에 황제였으니 나름 고증을 잘 맞춘 셈이죠. 알을 호출한 그는 알에게 칙명을 내립니다. 동맹항을 만들라거나 특산품을 구해오라는 요구인데 이번에는 동맹항을 만들어 오라고 하네요. 동맹항 2개라면 멀리 갈 것 없이 아테네와 바로 밑 간디아에 투자를 걸면 쉽습니다. 투자를 한 후 돌아오면 황제가 작위를 내립니다.



 - 이제 알은 귀족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스탄불 사람들의 태도가 싹 달라지죠(그들은 평민이니까). 특히 그동안 보는 족족 알을 갈구던 교역소 직원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의 결과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내전을 수습하고 이후 스탈린 지배체제에서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떠오른 이후, 소련은 핀란드를 비롯해 혁명기에 '상실'한 옛 제국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 1930년대 후반 이후 가속화된 나치 독일의 폭주가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처음에는 적대 관계였지만(나치 독일은 반공국가), 세력 확대에 대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이 조약에서는 동부 유럽의 분할에 대한 합의가 들어있었습니다.


 - 소련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자 서둘러 조약에 명시된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손을 잡았지만, 분명 서로를 장래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유리한 고지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이 동유럽 쪽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하기 무섭게 소련 역시 자신들의 몫을 뜯어먹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죠.


 - 그렇게 소련은 폴란드 동부(현재의 벨라루스 일대)와 발트 3국을 무력 점령합니다. 이 지역은 러시아 혁명 이후 신생 소련을 떠나 독립한 곳입니다. 이 지역을 점령한 소련의 다음 타겟은, 역시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영토였던 핀란드였습니다.


 - 장차 독일이 북유럽 쪽으로 침공해 올 가능성에 대비해서라도 소련은 핀란드 지역을 점령해 둘 필요가 있었죠. 소련은 먼저 발트 3국에서 한 것처럼, 군사력을 등에 업은 굴욕적 방위 조약(영토 할양, 발트 해 연안 항구들의 조차 등)을 핀란드에 요구하지만 핀란드는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 이로써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되었고, 침공의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은 국경 지대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에게 발포했다고 주장하며(이는 훗날 날조된 것으로 판명) 1939년 11월 29일 외교 관계를 단절, 곧바로 그 다음날 23개 사단, 46만 명의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으니 이것이 바로 '겨울 전쟁'입니다.


 - 소련군은 단숨에 핀란드의 방어선인 '만네르하임 선'까지 밀어부쳤고, 점령지의 한 마을에서 오토 빌레 쿠시넨을 수장으로 하는 괴뢰 정부를 수립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신속하게 밟아나갑니다. 하지만 스탈린과 소련이 간과한 사실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대숙청'의 여파였습니다.


 - 1930년대 내내 소련을 뒤흔든 대숙청은 소련 군부에서는 상당히 늦게서야 시작되었지만, 그 상처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크게 남았습니다. '종심 이론'의 창시자인 투하쳅스키 원수(그는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과 악연이 있어 사이가 나빴음)를 비롯하여, 소련의 군사 이론을 주도하던 고위 장교들이 대부분 숙청당한 것입니다.


 - 이후 소련군은 고급 지휘관이 대거 사라지면서, 위관급 연대장이나 영관급 군단장이 등장하는 참상(?)을 곳곳에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신진급 장교들에게 충분한 경험과 지도력을 쌓게 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1939년 소련군의 현실이었습니다. 거기에 대숙청의 여파로 지휘관들은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작전 수행조차 할 엄두를 내기 싫었고, 이는 소련군 대졸전 전설의 씨앗이 됩니다.


 - 전쟁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수오무살미 전투입니다. 수오무살미는 핀란드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소련군 입장에서는 핀란드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여 분단시키려는 계획의 초입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었죠. 1939년 12월 7일, 이 곳을 점령하기 위해 소련군 2개 사단(제44소총병사단, 제163소총병사단.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1개 전차여단이 추가로 기입되어 있음)이 진격을 시작합니다.


[사진 1 : 수오무살미]


 - 그런데 핀란드 중북부의 겨울은 말 그대로 혹한이었고, 여기에 폭설까지 겹치며 소련군의 진격을 방해합니다. 수오무살미로 진격하던 2개 사단은 수오무살미까지 전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라테 길(Raate Road)'이라 불리는 얼어붙은 도로 위에 발이 묶여버리게 됩니다. 도로상에 길게 늘어선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매복해 있던 핀란드군 제9보병사단이었습니다.


 - 스키부대가 주축이 된 핀란드군은 소련군 대열의 사이사이를 끊고, 그곳에 도로 장애물 등을 설치하여 서로간의 연락을 차단해버립니다. 소련군 2개 사단은 어느새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쪼개져 도로상에 고립되어 버렸고, 핀란드군은 그 소규모 부대들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치 장작을 쪼개듯 했다는 뜻에서 '모티(장작) 전술'이라 부릅니다.


[사진 2 : 당시의 전투 상황도. 소련군의 진형이 조각조각 끊어지고 있음]


 - 전투는 해를 넘겨서까지 계속 이어졌고, 모든 전투가 종료된 것인 1940년 1월 8일. 살아남은 소수의 소련군은 무기고 장비고 다 내버린 채, 동쪽의 얼어붙은 호수를 맨몸으로 건너 도망쳐야 했습니다. 핀란드군 1개 사단(1만 1천여 명)으로 소련군 2개 사단(5만여 명)을 섬멸한 '수오무살미 전투'는 겨울 전쟁 중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소련 입장에서는 악몽과도 같은) 전투로 남아 있습니다.


 - 이 참사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희생양부터 찾기 바빴는데, 제44사단장은 현장에서 총살당했으며, 이외 수십 명의 고위 장교들도 교체되었습니다. 당시 총사령관은 적백내전의 명장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는데, 수십 년간 변화한 전쟁 양상에는 무지했던 그를 스탈린이 질책하자 "유능한 장교들을 네가 다 죽여버렸잖아!"라며 패기 넘치는 항의를 날립니다(보로실로프가 스탈린과 절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 실제로 이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숙청당하지 않았음).


 - 다만 이후에는 소련군에서 몇 남지 않은 유능한 장교인 세묜 티모셴코를 전장에 보내어 작전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그의 주도로 소련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결국 핀란드의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합니다. 견디지 못한 핀란드는 결국 항복하였고, 소련은 처음 요구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조약을 핀란드에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원래의 목표였던 핀란드 전체 점령은 실패했고, 국제적 여론은 참담할 정도로 악화되어 소련은 국제연맹에서 축출당하는 굴욕까지 당합니다. 이것보다도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온갖 추태들로 인해 소련군은 '오합지졸'이란 인상을 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었으며 이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자신감을 얻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 전쟁에 대한 핀란드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핀란드는 단지 '잃은 것들을 되찾기 위해' 독일과 동맹, 소련이 얻어터지는 틈을 타 카렐리야 지협을 비롯해 소련이 점령한 지역들을 곧바로 되찾아버립니다. 하지만 딱히 독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던 핀란드는 얼마 후 진격을 멈추었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과 협상을 통해 국가를 보전할 수는 있었습니다. 물론 점령한 땅은 다시 상실하였고 이 지역은 소련 패망 후 지금까지 러시아 영토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 사진 출처 : 

『독소 전쟁사』 글렌츠/하우스, 열린책들

한국어 위키백과 "겨울 전쟁"

영문 위키피디아 "Battle of Suomussal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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