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체제경쟁의 마지막 발악 : 1980년대 '4대 흑역사'


 - 1960~70년대를 거치며 남한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지속한 데 비해, 북한의 경제는 지지부진한 상태였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 쯤 역전된 남북한 경제력은 1980년대 들어서는 북한이 쫓아가기도 어려울 만큼 크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체제경쟁에서 갈수록 밀리게 된 북한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요량으로, 남한을 따라하듯이 거대 규모 사업을 잇따라 벌이지만 하나같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서해갑문]


 - 서해갑문 : 북한은 1960년대 이후 서해안 지역에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농경지로 만들었는데, 역시 우리는 한민족! 문제는 평안남도 서해안에는 대동강 외에 큰 하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대동강 하구 일대는 한반도에서 강수량이 가장 적은 곳 중 하나) 간척지들은 수자원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동강 하구에 둑을 쌓아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나아가서는 대동강의 선박 통행과 대동강 하구의 육상교통에도 보탬을 주려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 본래 계획은 하구의 안쪽에 둑을 쌓는 것이었는데, 이러면 둑의 길이는 짧아지지만 둑 안쪽에 너무 많은 토사가 퇴적된다는 결과가 나와 무산. 이후 현재의 위치가 제안되었고, 둑이 너무 길어진다는 반대의견에도 김일성이 직접 이것을 지지하면서 건설이 결정되었습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1981년 착공하여 1986년 완공하였는데, 본래는 1984년 완공 계획이었던 것이 기간이 질질 늘어나서 무려 두 배나 시간이 더 걸린 것입니다.


 - 그리고 정작 갑문을 짓고 보니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기대와는 달리 남포항의 진입로가 갑문으로 가로막힌데다 물이 고이니 겨울이면 얼어버려서 ㅡㅡ; 남포항의 활용도는 오히려 크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건설된 갑문은 주변 지역의 기후에도 악영향을 주었고, 결정적으로 갑문 자체가 부실공사로 지어지는 바람에 둑의 붕괴를 막기 위한 상시 보수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공병부대 하나가 오로지 서해갑문 보수를 위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ㅡㅡ;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


 -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 남한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자, 열폭한 북한은 몇 차례의 테러사건을 일으키며 올림픽에 대한 불안 여론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합니다. 올림픽에 대한 방해가 여의치 않자 북한은 (주로 사회주의권에서 개최하는) 1989년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하여, 이를 체제 선전에 활용하고자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대회를 개최했습니다(릉라도 5·1경기장 신축, 순안공항 확장, 도심 재개발 등).


 - 물론 대회 자체는 성공적으로 치러졌지만, 뭔가 상업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는(심지어 2만 명을 넘는 참가자에게 북한 방문과 체류 경비를 무료 지원) 체제 속에서 개최 비용은 고스란히 북한의 손해로 남게 되었습니다. 국제적 선전 효과 또한 대회 직후 사회주의권 붕괴로 있으나마나 수준이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수용인원 기준 세계 최대(15만명)의 경기장인 릉라도 5·1경기장 뿐.


 - 이 대회는 북한 사회에도 뜻하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남한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씨의 고급진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언행은 북한 주민들에게 거대한 컬처쇼크가 되었다고 합니다. ㅡㅡ; 더구나 그가 남한으로 돌아가 사형당하지 않은 것이 알려지며 남한 체제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탈북자 중 몇몇은 이 때 북한이 남한에 사실상 패배하였음을 절감했다고 증언하기도.


[류경호텔.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 류경호텔 : 도대체 언제 완공될 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건물...... 1987년 착공하였으며, 완공 목표는 1992년(김일성 탄생 80주년)이었습니다. 층수는 총 105층인데, 105호 돌격대가 건설에 참여한 것을 기념한 것이라는군요. 김정일이 남한의 63빌딩(1985년 완공)을 보고 열폭하여 건설을 지시했다는 설도 있으며, 그래서 건물의 크기는 (첨탑 포함) 330m로 건설 시작 당시에는 아시아 최대, 세계 7위의 고층건물이었습니다.


 - 그런데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하며 북한은 급속도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호텔을 짓던 북한은 공사대금을 체불하기 시작합니다. ㅡㅡ; 결국 건설에 참여하던 해외 기술진이 모두 철수해버리고, 필요한 자재들이 다른 건설사업으로 돌아가면서 1992년 콘크리트 골조만 완성된 상태로 공사가 전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 이후 호텔은 15년간이나 방치되어 북한의 실상을 대표하는 흉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북한은 호텔 따위에 거액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고, 방치된 건물의 안전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2008년에야 이집트 기업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하며 건설이 재개되었지만, 외장공사만 거의 완공된 상태에서 이집트 혁명의 여파로 자본이 철수해버리는 등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의 리즈시절)]


 -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 비날론(비닐론)은 합성섬유의 일종으로, 1939년 교토제국대학 박사 리승기(1905-1996)의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인으로 이공계 박사가 몇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한반도 전체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리승기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국대안 파동 등 연구에 전념할 수 없는 남한의 혼란상에 실망하고 6.25를 틈타 1950년 월북하게 됩니다.


 - 이후 그는 자립경제를 목표로 한 북한 당국의 지원을 받아, 비날론 양산체제 구축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1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함흥)가 건설되며 북한은 옷감 부족에서 상당부분 벗어날 수 있었고, 리승기는 북한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날론 생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석회석을 원료로 하는 비날론 생산공정은 특성상 대량의 물과 전기를 필요로 했고, 이는 북한의 전력이 충분하던 시절에나 유용했다는 점입니다.


 - 1983년 김정일은 경공업 발전의 일환으로 평안남도 순천시에 거대한 화학공장 건설을 지시합니다. 비날론을 중심으로 각종 화학제품을 생산하여 인민의 생활향상을 도모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제대로 가동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비날론이 자립경제의 상징이다보니 북한에서는 기를 쓰고 비날론 생산을 재개하고자 하는데,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결국 복구하지 못하고 사실상 철거된 것으로 보입니다.


 - 이러한 삽질 끝에 북한이 날려먹은 돈은 200억 달러(!!!!) 이상에 달했고, 이 때의 지출은 북한 경제에 치명타를 날리고 말았습니다.




10.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


 - 1990년을 전후로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잇따라 붕괴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북한은 1970년대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데다 이런저런 테러 활동으로 서방세계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었는데, 그나마 이를 메꿔 주었던 사회주의 진영이 사라져버린 것.


 - 더구나 북한 자체의 여력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농업은 생산량 증가를 위한 무리한 개간과 밀식(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것) 때문에 지력(地力)이 소실되며 198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수송을 대부분 담당한 철도는 수송량 증가를 위해 일찍부터 전철화가 진행되었지만, 전기 생산에 문제가 생기면서 철도 운송이 제대로 돌아가질 못하는 역효과만 낳았습니다.


 - 이미 1980년대 가시화된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북한은 합영법(1984년)이나 나진·선봉경제특구(1991년)를 만드는 등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체제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니 성과는 둘째치고 자본이 거의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국가경제가 마비되는 것을 어떤 수로도 막을 수 없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는 이미 배급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와중에, 김일성은 1994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나마 국가 경제에 관심은 있었던, 그래서 다가오는 경제난을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하던 김일성이 사망하기 무섭게 북한은 미증유의 대재난을 겪게 됩니다. 방아쇠는 1995년 여름의 홍수였습니다.


[산비탈을 그대로 개간한 북한의 다락밭. 이런 곳에 폭우가 쏟아진다면??]


 - 물론 폭우는 이전에도 항상 있어왔지만, 당시 북한이 산비탈을 죄다 다락밭으로 개간해버린 데 재앙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없는 산은 많은 비가 내렸을 때 산사태에 매우 취약해집니다. 1995년 북한에 기록적 폭우(이 해에는 남한에도 폭우가 자주 내렸습니다)가 쏟아지면서, 개간된 산간지대의 흙이 쓸려 내려가고 이것이 산비탈의 다락밭과 평야지대의 논밭을 휩쓸었던 것. 이를 시작으로 북한을 유지하던 모든 시스템이 한순간에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 이후의 상황은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그 북한이 외부세계에 원조를 요청할 정도로 북한의 사정은 최악이었고, 북한은 남한과도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시기를 김일성의 유격활동에 빗대어 고난의 행군으로 호칭했고, 북한 당국이 고난의 행군 종결을 공식 선언한 것은 2000년. 즉 최악의 식량난이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사실 재해로 인한 일시적 식량 부족은 외부에서 수입하든지 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한의 식량 생산이 크게 줄기는 했지만, 배급이 전면 중단될 정도로 아예 없는 수준인 건 또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철도를 중심으로 한 수송체계의 붕괴와 연결되면서, 그리고 여기에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북한의 사회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면서 최악의 시너지 효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이 시기 굶어죽은 사람은 30~40만 명에 달합니다(300만 명 이상이라는 설도 있음).


 - 이후의 북한은 이전과는 사실상 다른 사회가 되었습니다. 국가에서 사회보장은 커녕 기본적인 식량조차 배급하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조달해야만 했습니다. 이전부터 암암리에 존재해 왔던 텃밭과 장마당(사설시장)이 이 시기 대대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당국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 어디 그게 되나요?


[장마당 풍경]


 - 이 때를 분기점으로 북한의 밑바닥 경제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화하게 됩니다. 일단 '자유시장'이 확산된 것 부터가 자본주의 요소의 도입을 의미하죠. 물론 어디까지나 북한의 체제는 공식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이기 때문에, 북한의 자본주의 경제는 비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사실상 국가에서도 손을 놓은 분위기.


 -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시장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인 제어(그냥 다 때려잡는 거 말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 반강제로 들어온 북한의 시장경제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로 이어졌습니다. 1997년 김정일은 삼년상 유훈통치를 끝내고 공식적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과 그 이후의 북한은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빈부격차' 거기에 더하여 '부정부패'가 버무려진 오묘(?)한 사회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제정일치 종교국가라고 보는 게 맞을지도.]




참고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737 (조국광복회)

http://www.kinu.or.kr/upload/neoboard/DATA03/17권2호-이상숙1.pdf ("중소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자주외교 비교")

http://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4&koreanChrctr=&dicaryId=24 (군사 · 경제 병진노선)

http://www.rfchosun.org/program_read.php?n=1223 (5·25 교시)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Ihw&articleno=8626548&categoryId=734769&regdt=20130915174839 (혁명가극)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