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를 통하여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친일파라 묶어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그들을 각각의 '인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친일행위를 한 의도와 목표가 제각각이었으니 이를 면밀히 분석해야 제대로 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이규완(1862-1946)처럼 '진심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함께 고민해 봅시다. 어차피 역사에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이규완, 1930년

 

1. 갑신정변의 행동대원

 이규완은 1862년 서울 한성부 교외(뚝섬)에서 종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친이라고 말은 하지만 왕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수백 년 전 임영대군(세종대왕의 4남)까지 무려 15대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별 의미는 없고, 아버지 이기혁 또한 나무를 파는 행상을 하며 여느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형과 누나, 동생 몇 명이 있다는 정도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9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아버지가 곧 재혼하였지만 계모 또한 그가 10대 중반쯤 되었을 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본적지인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사는 숙부 집에 가서 자랐는데, 나름 큰 뜻이 있었던지 한번은 서울로 올라갔다가 박영효(1861-1939)의 행차를 목격하고는 무턱대고 박영효의 집에 쳐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받아줄 리가 없었지만 그는 하인들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이내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습니다. 면식도 없는 귀족집안에 감히 들이대는 배짱을 높이 평가하였는지, 아니면 그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 박영효는 글조차 모르던 이규완이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게 했고 나중에는 유학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박영효

 이규완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불과 한 살이 많았던 박영효는 왕의 사위였으며 최고 명문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그와 친해진 이규완에게도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1883년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2개월간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으며, 돌아온 직후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관비(官費)유학생에 선발,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과 도야마 하사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택견의 명수였는데 이 시절에 서재필에게 개인적으로 무예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1년 뒤 이규완은 하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병조 소속 무관으로 임용되었습니다. 박영효 등 개화파는 이 시기 이미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개화파가 주축이 된 새로운 군사조직을 창설하였습니다. 총대장은 서재필이었으며 이규완 역시 별동대 대장으로 여기에 참여하였습니다. 나름 갑신정변의 주축 중 하나였지만 이 시기 그는 정변 지도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로 영 미덥지 않아 했다네요.

갑신정변의 진앙지 우정총국

 아무튼 1884년 12월, 거사의 날 이규완은 자신의 별동대를 이끌고 정변에 참여합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별궁 점거 및 방화, 요인 암살 등이었는데 특히 우정총국에서 민영익(1860-1914)을 직접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것이 이규완이었다고 합니다(알려져 있듯이 민영익은 호러스 알렌에게 수술과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집니다). 그렇게 정변의 중요 인물로 활약하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으며, 이규완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향합니다. 피신 당시 그는 부상을 입은 서광범과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달렸다고 전해집니다.

 

2. 망명생활과 귀국, 다시 망명(무한반복)

 이규완은 다른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10여 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망명자들은 자객에게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였다고 합니다. 정변 지도자들은 계속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1894년 김옥균 암살을 주도한 이일직이 일본에서 박영효 등을 암살하려 시도하자 이규완은 이를 알아내고 이일직을 체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일직을 감금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와중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진행되고 이규완을 비롯하여 생존한 정변 지도자들이 사면됩니다. 이에 이규완 역시 박영효 등과 함께 귀국한 뒤 3품 경무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동학군과 연계하여 시도하려 한 쿠데타 계획에 대하여 경무관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흥선대원군이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직접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갑신정변 때 이규완이 민영익의 귀를 벤 일은 유명했던지라, 송병준과 이완용은 이규완만 보면 "X알 간수 잘 해야지" 하는 성희롱농담을 지껄이곤 했다는군요.

 고위 관료로 평탄하게 흐를 것 같던 이규완의 삶은 그의 은인 박영효와 함께 다시 폭풍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는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친러 행보를 우려하여 계획한 암살 미수사건(을미사변 한 달 전 발생한 별개 사건)에 참여하였는데, 이 계획이 누설되어 박영효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변복을 하고 함께 몸을 피하였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다음 해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유길준 일파와 일본의 합작으로 정말로 살해당한(을미사변) 뒤 귀국하였지만, 얼마 뒤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건청궁 옥호루

 1898년 그는 조선(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하여 일시 귀국하였고 이후 한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독립협회의 요청을 받고 지원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부의 탄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승만 등 활동가들을 포섭하여 고종 폐위 운동을 획책합니다. 고종 황제를 쫓아내고 박영효를 추대하려는 시도였는데 이는 얼마 뒤 발각되었고 이규완은 체포당한 이승만, 이상재 등을 뒤로 하고 또 ㅡㅡ;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이런저런 고종 폐위 음모를 추진하며 비밀리에 한국을 오가기도 하였지만, 별 성과는 없었고 그 와중에 궐석재판에서 교수형 선고까지 받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박영효, 이준용, 유길준 등 망명자의 사면을 제안할 때 그의 이름도 있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여 신변을 넘기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당하자 그는 고종에게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연히 별 소용은 없었습니다.

 

3. '진심으로' 청렴했던 친일 관료

 그가 최종 귀국한 것은 1907년으로 그 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비로소 사면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통감부의 추천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취임하는데, 처음 그는 "문맹이 관료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양하려 하였지만 글 배웠다며? 통감부의 거듭된 강권에 결국 관찰사 직책과 중추원 찬의 직책을 수락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1918년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겼으며 직책명이 도지사로 바뀐 1924년까지 직을 수행한 뒤 퇴임하였습니다.

함경남도지사 재직 시기 이규완

 그는 전형적인 '자치론' 지지자였는데, 다른 유명한 자치론자들과 비교하면 3 · 1운동 이후가 아니라, 병합 직후부터 꾸준히 이런 주장을 반복하였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기왕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상 조선의 주민들을 동등한 일본인으로 대우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조선인 역시 일본에 대한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일본과 총독부의 방침과 달랐으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총독부에 건의를 날렸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후 민원식, 박중양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적 자치론으로 이어집니다.

 말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규완의 경우 자기 자신이 그야말로 철저히 검약하며 살았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는 그 맥을 달리 합니다. 평소 집에서 빨래를 하고 남은 땟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말고 텃밭에 거름 등으로 활용하게 했고, 평소 어디로 이동하거나 출장을 갈 때도 비용을 절약하고자 기차 3등칸을 타거나 싸구려 주막을 이용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시기에는 어떤 사람이 진수성찬을 차려 접대를 하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며 뒷간에 똥통(!!!)을 지고 가서 거름을 옮겨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 이후 사람들이 그를 거창하게 대접하는 일이 없어졌고, 그 청렴함으로 세간에 이름을 날리기에 이릅니다.

이규완의 사상이 압축된 '일생역행'

 그의 청렴함은 조금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하겠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밑바닥에서 자기 노력으로 출세하고,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도전과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한 그는 조선이 남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를 '게으름'에서 찾았던 것 으로 보입니다. 나태한 민족성 때문에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결과 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노력하여 민족적 역량을 키워야 그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극단적일 만큼 부지런히 살고 근검절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독립운동 중 실력양성론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목표가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자'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규완의 생각은 우리가 부족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노력하자는 데 머물렀고, 그래서 결국 독립론이 아닌 '자치론'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3·1운동 당시에도 그는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고민을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여기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항일운동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했습니다.

 

4. 퇴임 이후, 말년

 1924년 도지사직을 퇴임한 이후 이규완은 더 이상 중요한 공직에는 나서지 않았고, 함경북도지사나 중추원 참의 등의 자리를 제안받기도 하지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청량리와 춘천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운영하였으며, 여러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現 김천고등학교) 설립 자금을 후원하는 등 이런저런 사회사업을 벌여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동양척식회사 고문 자격으로 황해도 봉산·재령 지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 강령 발표 소식.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

 1927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출범한 조선물산장려회의 회장에 추대되어 1년간 재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는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단체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협력했던 이규완이 항일운동 차원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신간회 활동의 한 축이었던 실력양성론이 자신의 신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기꺼이 참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거기에 어쨌든 신간회는 합법단체였으니 관료 출신인 그가 활동을 꺼릴 필요도 크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그는 일관되게 각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바닷가를 간척하여 농지로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개간한 땅의 일부를 자기 아들들에게 경영하도록 넘겨주기도 했는데, 한번은 삼남 이영일(1903-1984. 화가, 교육자로 활동)이 자기 몫으로 받은 야산을 매각하려 하자 강하게 반대하여 팔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이외에는 조선산림협회 이사로 10년 이상 활동하거나 한성시탄(柴炭)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하는 등, 자기 사업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춘천 농장의 사과나무와 차남 이선길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규완에게도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라는 요구가 들어오는데, 친일 관료 출신으로는 조금 특이하게도 그는 이런 쪽에서 일본에 협력하는 것은 최대한 회피하였습니다. 신문에 전쟁 독려 기사를 기고하는 일은 사회사업이 바쁘다는 핑계와 문맹이라는 핑계로 글 배웠다며?(2) 최대한 거절하였고, 방공호를 건설하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행사에 연사 등으로 참여하기는 했는데, 대부분 조선인 참전 병사를 위한 후원회 등 조선인과 직접 관련된 행사에 치중하였다니 나름 일관성은 있었던 셈입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일본 온천에 요양을 다녀오는 등 활동이 뜸해졌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개간 사업에는 계속 관여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는 "우리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말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일관성 甲 그가 사망한 것은 1946년으로 그와 젊어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승만뿐 아니라 김구 역시 자신의 측근을 조문단으로 보내는 등 사회 각계의 추모를 받았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과 항일의 경계, 그리고 의도와 결과의 문제

 여러모로 평가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가 일제강점기 고위급 관료를 역임한 친일부역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진심으로 조선 민족에 애정을 가지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평생 보여준 삶의 모습은 표리부동한 자의 보여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나름 진실된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열심히 노력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꿔보자"는 그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진심이 실제로 민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상술했듯이 이규완의 주장은 실력양성주의 항일운동과도 상당 부분 통하는 데가 있고, 양쪽은 1920년대 말 신간회에서 만나 함께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가의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위 관료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았는지,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주권을 잃었다'는 데 너무 강박적으로 집착하였는지 그의 생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본 아래에서의 자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며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일까요, 아니면 결과일까요? 이규완의 의도가 선했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어떤 식으로든 협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와 결과, 아마도 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이규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블로거,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각자 선택할 문제이겠지요.

 여담 하나. 항일유공자 중 그와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 이규완(1901-1961)이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안성 원곡면 지역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며, 주재소(파출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니 그 활동이 꽤나 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후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여담 둘. 이규완은 갑신정변으로 첫 부인과 이혼한 뒤 일본 망명 중에 이매자(1880-1961?, 초명 나카무라 우메코)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매자는 일본인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스페인 왕족 출신 캐나다인 마가렛 고츠(1855-1928)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인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딸에게 무려 2억 달러나 되는 유산을 상속하였다는 떡밥이 존재합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거액인데 1920년대 당시에는 지금 돈으로 무려 3조 원이나 된다고 하네요. 나름 유언장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실물이 현재 남아 있지는 않으며, 이야기 자체도 확실한 게 없고 수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냥 그런 전설이 있더라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규완 가문의 상속비화. 일요신문 1963년 7월 7일

 

참고자료 : 
 "땟물까지도 아낀 조선 최고의 자린고비 관리 이규완", 대한기계학회 (링크)
 "근면성실한 친일파 이규완 이야기", DVDPrime 프라임차한잔 게시판 (링크)
 "이규완(李圭完)-3.1운동-애국장", 블로그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링크)
 "日帝 함남지사 이규완 가문의 2억 달러 유산, 과장인가 사실인가", 월간조선 (링크)
 "이규완",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한국어 위키백과
 "이규완(1862)", 나무위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 겸 소설가 유진오(1906-1987)는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그가 한때 사회주의자였고, 이 경험이 그의 학문 및 사상체계의 기반이며 그가 만든 헌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학문과 문학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한 나라의 헌법을 쌓아올렸으면서도 그의 인생은 항상 억압과 고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를 돌아본다면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들의 모순적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유진오

 

1. 명문가의 자식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유진오는 1906년 한성부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치형(1877-1933)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하다가 멸망 후 퇴직하여 한성은행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유치형은 근대 학문을 공부하였지만 일상에서는 구시대적 관습을 고수하였고, 유진오는 이러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억압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결혼 또한 부모에 의하여 14세 때 해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에서 온 근대문학은 하나의 해방구였으며, 근대적 개인주의를 접하는 창구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現 대학로에 위치했던 경성제국대학


 이 시기의 여러 지식인들처럼 유진오 역시 대단한 수재였는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예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한때 철학과로 전과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였고,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 교수 등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이었는데 이 영향을 받아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

 재학 중 유진오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에 참여하고, 정치적 성향 때문에 일본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졸업은 수석으로 무사히 했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은 구시대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사유체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그 역시 개인과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이상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진오와 교류하던 인물 중에는 경성제대 1년 후배이자 오랜 동료로 해방 후 북한 헌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최용달(1904-1953?)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1929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연구소 조수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낙산구락부(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학문을 통한 사회운동을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는 훗날 남로당의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되는 리강국(1906-1956)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일본 당국에게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1933년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유진오는 이를 마지막으로 실천적 사회운동에서 사실상 발을 빼고, 학문연구의 길에 집중하게 됩니다.

 

2. 사상과 행동의 괴리, 그리고 그로부터의 해방

 유진오는 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경성제대 교수를 목표로 학문에도 매진하고, 재학 중이던 1927년 소설가로 등단한 후에는 틈틈이 작품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처참히 실패하고, 목표하던 경성제대 교수직 역시 한국인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에게 스카웃(?)되어 동료 최용달 등과 함께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수로 직을 옮겼습니다.

 학자로서 유진오가 천착한 분야는 서양 법사상, 법률이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추인 제국대학을 나왔지만, 동시에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개인주의와 단체(전체)주의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 시대를 해석하고,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체계의 기초였지만 동시에 실천적 동기로 작용하지는 못하였고, 이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천성과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모순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이에 대한 고민은 그의 소설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

 그런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앙드레 지드(1869-1951)가 소련에 다녀온 후 1936년 <소련 기행>을 써 소련 체제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처음에 소련을 지지했던 지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이 정작 획일성과 비판정신 결여로 물든 전체주의 사회였다고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는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유진오는 지드의 비판을 접하고 마음 속에 남아있던 고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버리지 못하던 사회주의의 현장이 결국 파시즘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 마르크스를 붙잡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다가왔겠지요. 그는 지드의 전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벌여 좌익 문학계와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9년을 기점으로 결국 친일 노선으로 완전히 전향하고 말았습니다. 이 해 그는 법학 교수를 그만두고 작품활동에 집중하였으며, 동시에 친일 성향 논설을 언론에 발표하거나 친일 문학단체에 참여하는 등 전형적인 친일 부역자 행보를 걷게 됩니다.

 

3. 해방 이후 :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그는 1944년 퇴계원으로 낙향하였다가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로 복귀하였습니다. 당시 유진오는 이미 독보적인 헌법학자로 그 위상을 얻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새로 수립할 국가의 헌법 초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는 그가 만든 초안을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논의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헌법(제헌헌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헌법을 매개로 정치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초대 법제처장에 취임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법령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유진오가 직접 쓴 헌법 초안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그의 사상을 이루는 중요한 한 줄기로 남았습니다. 우익과 좌익의 전체주의를 모두 배격한 그가 헌법의 모델로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었습니다. 이 위에서 유진오는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연구해온 모든 법적 지식과 사상을 쏟아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개헌과 많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대한민국 헌법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 없는 헌법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헌법 제정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진오는 헌법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하였지만, 이것이 좌익 용어가 아니냐는 윤치영(1898-1996)의 반발 때문에 모든 단어를 '국민'으로 바꿔야 했고 그는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합니다. 당시 그는 좌익 전력 때문에 이런저런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관철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정부 전횡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헌법에 반영하려 하였으나,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를 원한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채택되었지요.

 

4. 만년과 죽음

 아무튼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1949년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1952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1965년까지 장기간 재임하였습니다. 총장 재직 당시 고려대학교 운영에 수완을 발휘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1960년 4.19 혁명 때는 4월 18일 국회 앞까지 행진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설득하고, 경찰의 안전 귀가 약속까지 받아 시위대를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귀가 도중 시위대가 깡패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며 혁명의 확산에 본의 아니게 중요한 역할을 한 바도 있습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반대농성을 밤새 지휘하는 유진오(오른쪽 아래). 1969년

 총장 퇴임 이후 유진오는 한동안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는데, 196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윤보선과 단일화하며 사퇴한 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에는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여 3선개헌 반대 운동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1969년 뇌졸중이 발병하여 이듬해 총재직을 사임하고, 1971년에는 국회의원에 불출마하면서 오래 활동하지는 못하고 정계은퇴를 하게 됩니다. 이후로는 병석에서도 유신 반대 운동에 이름을 올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80년 돌연 신군부가 만든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민주화 세력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진오는 6월항쟁 이후 개헌 논의가 진행되던 1987년 8월 사망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오랜 기간 재직하며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그의 빈소를 설치하고 추모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보니 일부 학생과 교수진은 친일 부역을 한데다 전두환 정권에도 원로로 참여한 인물을 추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반발하고, 학내에서 이와 관련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5. 정리 : 우리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처럼 유진오 역시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역사적인 법학자로, 혹은 근대문학에 큰 흔적을 남긴 소설가로 기억할 수도 있고, 적극적 친일부역자 내지 변절자, 전두환 군부 협력자로 기억할 수도 있지요. 사실 그 모든 것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에서는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최대한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진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유진오가 기초한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그가 불과 수 년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스피커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고, 이를 볼 때는 또 몇 해 전까지 그가 사회주의를 신봉한 법사상가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지요. 어쩌면 그 모순이야말로 유진오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였을지 모릅니다. 구시대와 근대의 모순 속에서 성장하여,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 가운데 학업을 잇고, 실천적 사상과 실천하지 않는 현실의 모순 속에 갈등하며 삶을 지낸 것이 그의 일생이었지요. 어쩌면 그의 친일행각은 그 모순을 억지로 지워버린 데서 나온 치명적인 오류였을지도 모릅니다.

유진오 빈소 관련 시위를 다룬 뉴스. 경향신문 1987년 9월 2일

 네. 그를 바라보는 블로거의 시선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친일 부역자를 비판하던 사람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애매한 말만 지껄이고 있을까요? 물론 블로거는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친일인명사전 등의 목록에 오르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업적(?)들을 남긴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헌법 초안이나 친일행각 전후의 모습들을 보면 전혀 모순되는 그 모습들 또한 유진오 자신의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순이야말로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은 아닐까요?

 여담으로, 그의 동문이며 오랜 기간 함께 일한 최용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시골 자작농의 아들로 성장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더 실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유진오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친일로 돌아서던 시기 그는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리게 되지요. 해방 후 그는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고 일찌감치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의 법체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헌영과 남로당계가 몰락할 때 그 역시 사라졌고, 아마도 함께 숙청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참고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사, 2008.
한국교육신문, "⑭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 植民기획 부정한 지식인… 미친놈 취급받으며 불행 감내" (www.hangyo.com/news/article.html?no=898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치형"
한국어 위키백과 "유진오", "앙드레 지드"
나무위키 "유진오", "최용달"

 

 윤리적 기업가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덕분에 유한양행은 지금도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곳도 흑역사랄 것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일한의 동생 유명한(1908-1950)이 기업을 운영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였습니다. 하필이면 형 유일한이 항일운동에 매진하던 때 이 사람은 기업 차원에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것이지요. 말할 필요도 없는 형 유일한,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긴 동생 유특한(1918-1999)과 비교됩니다. 이번에는 형만 못한 아우, 아우만 못한 형이었던 유명한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명한

 

1. 사전 지식 : 유일한과 유한양행

 

 우선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경영하여 큰 성공을 거둔 유일한은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할 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버드나무 모양의 CI를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유한양행 CI

 

 유일한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당시 한국인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한양행이 주력으로 삼은 분야는 의약품 제조 및 유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산 의약품을 수입 판매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자체적인 생산체제도 갖추었는데, 유한양행이 자체 생산한 의약품 1호는 바르는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었다고 하지요. 거의 약장수 수준의 홍보가 판치던 당시 제약업계에서, 유한양행은 제품의 구체적 효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 의견 등을 광고에 실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만주, 베트남 등 해외로도 진출하였습니다.

 

 유일한은 철저한 윤리경영을 추구하여 당시에는 판매가 합법이었던 메스암페타민(히로뽕) 등 마약성 제품의 판매를 철저히 막고,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종업원 주주제를 실시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경영을 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한반도와 미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1942년에는 재미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미육군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공작원으로 비밀리에 입대하여 50이나 된 나이에 고도의 훈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이는 그의 사후 20년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집니다).

 

말년의 유일한

 

 미국에서 유일한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 당국에도 알려졌는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한의 귀국을 불허하였습니다. 사장이 미국에 발이 묶이자 회사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12월 15일 긴급 이사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사람이 당시 부사장으로 일하던 동생 유명한이었습니다. 유명한은 1936년 유한양행 대주주로 처음 경영에 참여하였고 1938년에는 이사, 1940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형이 부재중일 때 회사 운영을 맡고 있었습니다.

 

 

 

2. 유명한의 '덜 유명한' 친일행적

 

 그런데 형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유명한의 행적은 사장을 맡기 전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1941년 8월 그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일본 육군에 1만 원의 자금을 헌금하는 등, 형의 신념과 정 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는 그가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형의 대리인으로 기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며, 유일한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한은 정식으로 사장직에 오르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를 펼쳐나갔습니다. 그가 사장에 선임되고 며칠 뒤, 유한양행은 본사+사장(유명한)+계열사+직원 명의로 총독부에 소위 '애국기'를 헌납하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당시 유한양행이 헌납한 금액은 총 5만 3천 원으로, 조선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헌납한 3만 원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습니다.

 

유한양행의 애국기 헌납을 다룬 기사.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

 

 유명한의 친일 행적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는 유한양행과 계열사들이 <매일신보>에 신년기념 합동 광고를 실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도 소위 '황군'의 무운장구를 빈다든지 신년 맞이 전승(戰勝)을 기원한다든지 하는, 전형적인 일본 제국주의 찬양 광고였습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유원박)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형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유명한이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까요? 블로거가 추정해 보자면 유일한의 당시 행보 때문에 회사가 일본 당국에 탄압을 받았고,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굳이 변호하자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나 군사정권기에 권력과의 유착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이런저런 탄압과 견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유한양행 명의 친일광고. 매일신보 1943년 1월 1일

 

 

 

3. 말년 : 형제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와 회사의 친일행적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설립자 유일한과 막내동생 유특한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유일한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하였고, 유명한 역시 유한제약 이사장과 한국제약협회 2대 회장을 지내는 등 기업가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반민특위에 끌려가지도 않는 등 잘 살았지요.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적산을 불하받아 '고려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기업은 해방 직후 출판업계에 큰 영향을 준 회사였다고 합니다.

 

 이와 별개로 형과 동생은 민족반역자가 되어 자신들의 신념과 회사 경영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했던 형 유일한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유명한이라는 동생은 알아도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일본인은 모른다"라며 사실상 큰동생과 연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막내동생 유특한이 일본 유학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이것조차 나중에 형에게 깊이 사죄했을 정도라고 하니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나머지 형제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특한은 나중에 일부 계열사를 가지고 독립하여 '유유그룹'을 창업하고,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기업인으로 잘 나갔을지는 몰라도 그는 형제들에게 인간적으로 버림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모두 무시당합니다. 그래도 당시 생존해 있던 삼형제의 어머니는 그가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산 다대포에 정착한 유명한은 배를 타고 부산 중심가에 출퇴근하던 중 침몰사고가 발생하여 허무하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형 유일한은 말년에 막내동생 유특한에게 "친일파만 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라는 내용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듯합니다. 동생 자신뿐 아니라 유한양행이라는 회사 전체의 역사에도 큰 흠집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피를 나눈 형제여서 그랬던지, 형 유일한이 동생의 부고에 깊이 안타까워했다는 뒷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4. 정리 : 흑역사도 역사다

 

 형 유일한이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그런지, 동생들은 나름 사회적인 활동이 많았음에도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블로거의 능력과 노력 부족을 탓하시오 그래서 유명한의 행적은 이름과 달리 그리 유명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언론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친일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일생은 형 유일한과 비교하여 그 그늘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비록 그의 행적이 회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역사가 거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단언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회사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친일분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을 만났고, 이들이 위의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 또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습니다. 자신과 회사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적지 않은 나이에 공작원 훈련까지 받아가며 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이야말로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한양행 연혁. (유한양행 홈페이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유한양행에서 유명한과 그 시대의 행적을 철저히 감추고 언급조차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부터 세무조사 등 정치적 탄압을 버티며 성장한 것이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유명한의 주도로 애국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사실이지요. 블로거는 유한양행이 양심적 경영과 사회공헌을 전통으로 하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비록 일부나마 명백한 흑역사를 감추는 데는 약간의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두운 과거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적 기업이라는 전통에 더 어울리고, 설립자 유일한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참고 : 

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www.yuhan.co.kr/Founder/founder_main.html)

뉴스워커, "[광복절 기획] ‘민족기업’ 유한양행이 친일 행위를?…90년 역사 ‘옥에 티’" (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73)

오마이뉴스, "[한국 기업인 열전 7]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4800)

일요신문, "[8·15 특집 기업과 친일] 유한양행 ‘유명한 악몽’" (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96461)

CNB뉴스, "[임정 100년 - 겨레 기업 (2)] 유일한 박사 독립정신 잇는 유한양행·유한킴벌리" (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7516)

정운현,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친일행적' 있다" (web.archive.org/web/20190109013236/storyfunding.daum.net/episode/4740)

한국어 위키백과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나무위키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유한양행"

 

0. 서문

 

 최근 블로거는 사진에 취미를 들이고 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사진과 그 도구인 카메라의 역사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어떻게 시각을 복제하여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고 지구상 수십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남길 수 있게 한 과정은 무엇일까요? 나의 취미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해 왔는지 탐구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카메라와 사진은 근대의 중요한 발명으로 여겨져 왔고 분명 그것이 맞지만, 사진을 만드는 원리 자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든(실용적으로든, 놀이로든) 이를 활용해 왔습니다. 지금하고 똑같네 사진이라는 도구가 단순히 흥미로운 장난감에서 어떻게 인류 사회의 중요한 도구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한 번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저 중 두 개를 팔아치운 건 안자랑)]

 

 

1. 고대와 중세의 '카메라'

 

 필름도 센서도 없던 먼 옛날, 사람들은 암실 벽면에 작은 구멍을 내면 반대편에 바깥의 상(像)이 그림처럼 맺힌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추측하건대 누군가 어두운 방의 벽이나 칸막이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 원리를 알아냈을 것입니다. 이후 사람들은 상자 등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내부에 상이 맺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 번쯤 만들어 보았을 바늘구멍 사진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이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고 하는데 이러한 원리 자체는 아주 오래 전, 고대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유클리드가 버들가지 바구니의 작은 홈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이 비추이는 것을 관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중국의 묵가(墨家)를 창시하였다는 묵자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뒤집어져 보인다"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림을 그리는 원리]

 이러한 원리를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바늘구멍을 통과한 상을 활용할 수 없을지 고민하였고, 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고안해 내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개념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중세 이슬람 제국의 학자 알하젠(965-1040)이 실질적 도구로서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처음으로 개발하였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또한 자신의 그림 작업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레이싱? 카메라 옵스큐라가 그림에 활용되면서 17세기 무렵에 그림의 사실적 묘사력이 대폭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주전자를 든 여인>과 그 물주전자에 비추인 카메라 옵스큐라의 모습]

 또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몇몇 그림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실제 사례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에는 물주전자의 겉면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추정되는 어떤 장치의 모습이 비추어 보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정약용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는 등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었으며, 조선의 화가들도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지 않았겠느냐는 학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필름이나 센서가 없을 뿐 현대의 카메라와 그 원리가 거의 동일합니다. 필름, 센서가 하던 일을 당시에는 화가의 붓과 캔버스가 대신했을 따름입니다.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이 아닌, 상 그 자체를 그림(?)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18세기 감광 원리의 발견 이후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 감광물질의 개발

 

 많은 물질은 빛, 특히 햇빛을 받으면 색이 변합니다. 당장 옷장에 처박혀(?) 있는 옷 중에는 직사광선 아래에서 건조나 보관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강한 햇볕에 말리면 색이 바랜다든지, 소재가 변질된다든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지속적으로 쪼인 책이나 건물 역시 서서히 색이 바래게 되지요. 이처럼 빛은 물질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라면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노출시간이 못해도 월 단위는 되어야 하겠지요), 특정한 물질들은 빛에 반응하여 변형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빛에 짧은 시간만 노출시켜도 충분한 변형이 일어나지요. 흔히 우리가 감광물질이라고 하면 이러한 물질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감광물질을 넓은 판에 칠해 놓고 바늘구멍이나 렌즈를 통과한 상을 맺히게 하면 각 부위에 노출되는 빛의 양 차이에 따라 물질이 변형되는 정도 역시 달라지게 됩니다(초등학교 때 한 번쯤 써보았을 '청사진' 실험을 생각하면 됩니다).

 

[요한 하인리히 슐츠]

 1724년 독일 출신의 과학자 요한 하인리히 슐츠(1687-1744)는 1724년 염화은(AgCl)이 햇빛에 노출되면 검게 변형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화은은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앙금 생성 반응'을 대표하는 백색 물질인데, 이 녀석이 감광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물론 슐츠는 카메라에 큰 관심은 없었던 듯하며 당시는 아직 화가들이 바늘구멍 사진기에 종이를 대고 그림을 그리는 데 만족하는 시절이었으니, 염화은이 카메라에 활용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체로 감광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물질은 할로겐화은(염화은, 요오드화은, 브롬화은 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 필름이나 인화지에도 이들 물질이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이를테면 브롬화은(AgBr)을 이용하여 만든 인화지의 경우 흔히 '브로마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브로마이드라고 부르는 연예인 화보는 처음에 브로마이드 인화지를 이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도면을 인쇄해 놓은 청사진]

 감광물질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됩니다. 이를테면 도면 등을 복제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청사진' 역시, 특수한 화학물질을 칠해 놓은 종이에 도면을 놓고 빛을 쬐어 가려지지 않은 부위에만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의 인쇄 방법이었습니다(청사진은 근래 대형 프린터와 플로터가 발전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옵스큐라에 화가 대신 감광지를 활용하는 시도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는데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1765-1833)의 '헬리오그라피'가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3. 헬리오그라피 : 최초의 필름카메라

 

 니엡스는 프랑스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는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나폴레옹 군대에 투신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군대에서 퇴역한 이후로는 과학 연구와 발명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1807년에는 형과 함께 내연기관의 일종인 '피레올로포르'를 발명하는 등 나름 이런저런 분야에서 업적이 있는데, 역시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면 최초의 필름(?)카메라를 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엡스는 처음에는 당시 기준 신기술이었던 석판 인쇄에 관심이 있었지만 기술이 부족하여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대신 그림을 그리는 도구였던 카메라 옵스큐라로 관심을 옮겼다고 합니다. 그는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상을 본뜨는 방법을 연구했고, 감광물질을 판에 칠하여 상이 거기에 맺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가 사용한 감광물질은 아스팔트의 일종인 '유대 역청'이었는데, 촬영 후 이를 라벤더 오일로 씻어내면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은 씻겨 내려가고 빛에 노출된 부분만 남는 원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하나. 몇 시간에 걸쳐 촬영했기 때문에 햇빛을 받은 방향이 제각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1826(혹은 25)년 만들어진 이 최초의 필름(?)은 '태양의 그림'이라는 뜻의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로 불렸습니다. 이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지만 최초라는 데 의미가 있을 뿐 아직 실용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사진 한 장을 촬영하기 위하여 노출 시간을 최소 몇 시간이나 잡아야 하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광물질로 사용한 유대 역청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당연히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인물사진이나 활동사진으로는 전혀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다른 하나. 플랑드르의 조각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리오그라피 발명 이후로도 니엡스는 사진 기술의 실용화를 위하여 계속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여기에는 미술가인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1787-1851)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다만 니엡스는 형이 내연기관 개발 등에 가산을 탕진하는 등의 이유로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결국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최초로 실용화된 사진기술'의 명예는 상당 부분 다게르와 그의 '다게레오타입'에 돌아가게 되는데, 다게르가 공로를 가로챘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니엡스의 아들과 공동연구를 계속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친일파를 생각할 때 한국인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만,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한국인들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본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중에도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특히 그런 사람이 세계적인 종교의 중요 인물 쯤 되는 거물이라면 여기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살펴볼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는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다진 위인이면서, 그와 동시에 일본에 적극 협력한 친일행위자라는 거대한 어두움을 함께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귀스타브 뮈텔 주교]




1. 뮈텔 선교사 조선에 오다


 뮈텔은 1854년 프랑스 랑그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조선에 온 것은 1881년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면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정식 수교하기 전까지 양측은 적대 관계였고(병인양요 등 무력충돌도 있었다보니)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도 그 때까지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로 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뮈텔은 1885년 본국의 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조선을 잠시 떠났습니다(30세 무렵에 교수로 임용된 것을 보니 능력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1890년 가톨릭 조선대목구(現 서울대교구) 교구장 장 블랑(1844-1890)이 선종(사망)하자 후임으로 그가 임명되었고,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다시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이후 그는 사망하는 1933년까지 무려 43년간 교구장 자리를 지켰고, 이제 막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제를 양성하였고,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 또한 그의 재임기에 지은 것입니다. 독일의 성 베네딕토회에 요청하여 한국에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예를 들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판공성사 제도가 그의 재임기에 정착된 것입니다.


[명동성당]


 그가 재임하는 동안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일대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고(이 때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바뀝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함경도, 간도)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메리놀 외방전교회 관할)가 신설되는 등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부임할 당시 17,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도 1930년대가 되면 서울대목구에서만 50,000~60,000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여러 대목구와 지목구가 분리된 이후의 통계입니다).


 뮈텔 주교는 주교로 임명된 날부터 죽기 며칠 전까지 꾸준히 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와 편지, 각종 사목문서 등을 통틀어 '뮈텔 문서'라 부르며 초기의 한국 가톨릭과 뮈텔 주교 개인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국 가톨릭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와 관련한 사적지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종교지도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겠습니다만......




2. 주교 뮈텔의 그림자 : 민족을 팔아 부흥을 얻다


 한국 가톨릭의 성장 뒤에는 바로 일본 당국과의 지저분한 협력관계가 있었습니다. 뮈텔 주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옹호하고, 심지어 이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일본의 인정과 협조를 얻어냈고, 그 바탕 위에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잘 알려진 사례로 뮈텔과 안중근 사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중근은 부자(父子)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하는데,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 뮈텔은 그와의 모든 우호관계를 단절해 버립니다. 심지어 안중근에게 세례성사를 준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1860-1936) 신부가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겠다고 요청하지만, 일본 당국까지 허락한 사안을 뮈텔은 거부하고 빌렘 신부가 안중근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뮈텔의 입장은 '안중근이 자신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성사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동생 안명근이 그를 찾아 고해성사를 집전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다시 거절하면서 "안명근이 아주 무례했다"고 일기에 써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빌렘 신부는 그의 금지령을 씹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는데, 뮈텔은 정치적 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빌렘에게 2개월 성사 금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에 빌렘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교황청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가 정당한 행위를 했다고 인정하고 징계를 직권으로 철회했습니다. ㅡㅡ;


[안중근을 면회하고 있는 빌렘 신부]


 안중근과 그의 악연은 이뿐만 아니라 안중근이 추진하던 대학 설립에도 반대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 이유란 게 무려 한국인이 학문을 익히면 가톨릭 신앙에 소홀해진다는 말 같지도 않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오죽하면 안중근이 충격을 받아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기까지 했다는군요. 물론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교육사업에 힘쓰긴 했지만 이는 초등교육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는 '교육은 하되 지식인을 양성하는 고등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식민 당국의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유명한 일로는 105인 사건의 결정적 단초가 된 고해성사 밀고 사건이 있습니다.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계획을 두고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에서 계획을 털어놓자, 미리 뮈텔로부터 안중근 집안의 일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빌렘은 뮈텔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고 이를 뮈텔이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안명근 뿐 아니라 그와 연결된 신민회가 풍비박산나고 말았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


 이는 종교지도자가 많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이며,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행동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가톨릭계의 골치를 썩이던 명동성당 진입로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고개(現 충무로) 방향 진입로는 일본인들이 토지를 침범하여 사실상 길이 막혀 있는 상태였고, 성당 측에서는 1906년부터 계속 소송을 걸었지만 번번이 패소해 왔습니다. 이에 뮈텔은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그 대가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1운동에서도 그는 당연히 신학생들에게 시위 참여 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고 참여한 학생들은 여지없이 퇴학 처분을 내렸습니다(이러한 입장은 뮈텔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미참여를 비판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약(?)상은 그의 일기에 꼬박꼬박 기록되어 있어 후세에 그 전말이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3. 종교적 고찰 : 과연 그는 제대로 된 사제로서 자격이 있는가?


 이런 짓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그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닦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가톨릭계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긍정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뮈텔 문서 등 그와 관련한 사료들이 많이 발굴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가 진행된 최근에는 그의 행적이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다수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후술할 고해성사 밀고 논란까지 가면 그가 아예 사제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단 그는 한반도 선교에 일생을 바친 주제에 심각한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의 법정에 출두하면 한국인의 눈에는 '유럽인이 한국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서 대놓고 한국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한 적이 있는가 하면, 한국인 신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만큼 한국인을 아래로 보았습니다. 한국인 사제들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 훗날 부산교구에서 활동하는 사제 김명제(1908-1960)가 그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재임기에 한국인을 위한 많은 사업이 벌어진 것은 맞지만, 여기에는 '우매한 한국인'을 위한 동정적 시각이 강하게 들어있었고 자신들(유럽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보고 벌인 일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안중근과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뮈텔은 오로지 가톨릭 선교에만 몰두해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폭압적 식민지배에 협조함은 물론,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을 우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연루된 가장 큰 떡밥으로 단연 '고해성사 밀고'를 들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제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결코 어디에도 발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겼을 경우 즉각 파문당하거나 이에 준하는 중징계를 받습니다. 물론 안명근이 '이미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앞으로 저지를 범죄'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고해성사의 형태로 고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큰 논란을 자초한 셈입니다.


[뮈텔 주교의 일기는 현재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는 것을 막은 것 또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제의 기본을 망각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빌렘 신부는 비록 105인 사건 당시에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발설한 1차 책임자라는 문제는 있지만 뮈텔의 반(反)한국인 성향에 반발하여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결국 1914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방해한 뮈텔의 이러한 행적들은 그 상당수가 교회법조차 무시한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더 큰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짓거리들을 행한 결과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거의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를 상당히 앞서서 수용하기도 했습니다(다만 이는 일본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교황청에서 직접 이를 수용하도록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후로도 한국 가톨릭은 몇몇 신자들의 개별적 활동을 제외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등장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권력에 협조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당장의 교세를 확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결국 한국인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꾸준히 성장은 하지만 그 정도는 점차 감소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에 밀려 '기독교'라는 명칭 자체를 사실상 개신교에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의 행적은 한국 가톨릭을 위해 좋은 것이었을까요?




4. 정리 : 무엇을 위한 종교여야 하는가?


 뮈텔 주교의 행적은 이러저러하게 연구가 되고 있지만,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은 비교적 근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재임기가 한국 가톨릭의 (사실상)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일 수도 있겠습니다. 뮈텔과는 거의 반대 방향의 사목을 한 김수환 추기경조차도 그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옹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선이 이후의 한국 가톨릭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톨릭은 한국 사회와 문화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동안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외면하였습니다. 1970~8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 등 사회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가진 사제들이 다수 등장하여 활동하고 나면서부터야 가톨릭의 교세가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한국 가톨릭에 끼친 해악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분명 그가 주장했던 중요한 논리는 '정교분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자신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이를 대가로 종교시설 유지에 편의를 얻어내는 모습은 정교분리보다는 차라리 '정교유착'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놓고 다른 이들에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며 정당한 사회참여마저도 막아세웠던 것입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한국 순교자 124인 시복미사. 광화문광장]


 사실 블로거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서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개신교와 이를 막아세웠던 가톨릭의 처지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은 사회문제에 적극적 모습을 보이며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개신교는 정교분리 운운하면서 정작 뒤로는 심한 권력지향성을 드러내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리를 떠나 사회적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종교의 역할이란 사회의 소외당한 자, 탄압받는 자,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교세 확장을 명분으로 탄압받는 한국인의 목소리를 외면한 뮈텔 주교의 행적, 그리고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재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는 과연 제대로 된 종교인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그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느 쪽을 더 옳다고 하실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가톨릭평화신문, 「[특집]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주년④ 안중근과 빌렘 신부, 그 운명적 만남

가톨릭프레스, 「명동성당 길과 바꾼 105인 사건

연합뉴스, 「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통신문> 국내 최초 공개

중앙일보, 「[분수대]뮈텔 주교와 김추기경

한겨레,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 뮈텔 일기

김정환,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 『교회사연구』 3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김정환,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최기영,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 <뮈텔 주교 일기>를 읽다」,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 지금은 거의 사라진 20세기의 직업으로 식자공(植字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직역하면 '글자를 심는 장인'이라는 뜻인데, 인쇄를 위한 활판에 활자를 배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아마 활판에 활자를 심어넣는 것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이 직업은 나름 전문직이었고 꽤 잘 나갔다고도 하는데,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가 대세가 되면서 불과 이삼십 년 사이에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일보의 식자공. 출처]


 - 실제로 식자공이 활약하던 시대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절이었던데다 활자의 특성상 좌우가 뒤집힌 글자를 노상 판독해야 하기 때문에, 식자공으로 일하려면 글을 해독하는 능력은 기본에 고도의 숙련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특히 인쇄 과정이 분초를 다투게 마련인 신문 인쇄에서는 때때로 식자공이 임시 편집자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된 식자공은 비교적 대우가 좋고 인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숙련된 식자공이라도 깨알같이 배열된(심지어 좌우가 뒤바뀐) 수백 수천 자의 한자들을 완벽하게 구별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간간이 오타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 오타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20세기 독재정권 시절 이야기입니다.




1. 대구매일신문의 수난


 - 대구매일신문은 1946년 '남선경제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어 몇 차례의 제호 번경을 거쳐, 현재는 '매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는 대구의 지역신문입니다. 6.25가 발발하여 온 나라가 쑥대밭이던 1950년 8월 29일자 대구매일신문 1면 기사 중, '이(승만)대통령李大統領'이라는 글자가 '이견통령李犬統領'으로 인쇄되는 오타가 나왔습니다. 大(큰 대)와 犬(개 견)의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식자공이 혼동한 것입니다. 설마 의도적인 건 아니었겠지


 - 오타야 아무리 노력해도 간간이 나오기 마련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헷갈린 글자가 '개'를 뜻하는 한자였다는 데서 문제가 커집니다. '대통령'이 '견통령'으로 둔갑했으니, 요즘 말로 표현하면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본의 아니게 욕해버린 겁니다. 요즘이라면야 그냥 짤방 해프닝으로 웃고 넘어가겠지만 당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이 하나의 오타가 추상같은 독재권력의 높으신 분들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 결국 오타 하나 냈다는 이유로 사장이 구속되고 편집주간은 사임했으며, 신문사는 무기정간 조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장 이상조는 2개월 후에야 풀려났지만 신문사 운영을 더 못하고 회사를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후 천주교 쪽에서 신문사를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관련기사. 1955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3면.]


 - 그런데 꼭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대구매일신문은 이승만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55년에는 관제데모 학생 동원을 비판하는 사설이 신문에 실리자, 자유당이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신문사를 때려부수고 여러 직원을 다치게 한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경찰 간부의 망언은 길이 전설이 되었습니다.




2. 후폭풍 : 언론사의 오타 노이로제


 - 이후로도 대통령 오타 사건은 몇 차례나 더 벌어졌습니다. 1953년에는 전북의 삼남일보와 충북의 국민일보(지금의 국민일보가 아님)에서 동일하게 '견통령'이라는 오타를 내서 홍역을 치렀고, 국민일보는 몇 달 뒤 똑같은 오타를 한 번 더 내는 바람에 아예 폐간당하고 말았습니다. ㅡㅡ; 이듬해에는 부산일보에서 '이승만 대령'이라는 오타를 냈는데, 이 때는 욕설은 아니어서인지 주의조치만 받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 다른 오타도 있습니다. 1955년 동아일보는 활자 배치를 실수해서 다른 기사에 들어갈 '괴뢰(꼭두각시)'라는 글자를 '고위층 재가 위해 대기 중'이라는 제목 앞에 붙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괴뢰 고위층'이라는 말이 나온 건데, 괴뢰는 북한에 붙는 수식어였고(흔히 말하는 '북괴') 당시에 고위층이라 하면 이승만의 최측근을 말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역시 난리가 났습니다. 다행히 360부만 발행하고 수정이 됐지만 책임자가 해임되고 신문사는 1개월 정간을 당했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견통령'을 검색하면 이게 의외로 흔한 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ㅡㅡ;]


 - 일이 이렇게 되니 신문사들은 오타, 특히 '대통령' 같은 중요 단어에 대한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실수 한 번에 신문사가 날아가게 생기니 각 신문사들은 아예 '개 견犬' 자를 활자에서 없애버리거나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ㅡㅡ;


 - 이것도 어찌 보면 필화(筆禍), 혹은 문자옥(文字獄)이라 하겠습니다. 글자 하나에 꼬투리를 잡아 지식인을 탄압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인쇄했다면 기분이야 좋지 않겠지만, 이런 사소한 오타에 공권력의 탄압까지 가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일환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오타 하나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마당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대놓고 실을 엄두가 날까요?




3. 요즘에도 오타는 나오지만......


 - 1990년대 이후 인쇄에 컴퓨터가 사용되고 활판이 퇴출되었지만, 요즘의 인쇄물에도 간간이 오타는 나옵니다. 몇 쪽 이상의 긴 글을 써 보았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글 어딘가에 오타가 숨어 있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ㅡㅡ; 어쩌면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일에 대한 인간의 집중도는 떨어뜨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 그래도 요즘에는 그 오타 하나로 누군가가 고초를 치를 일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2012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1면 톱기사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오타(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퇴임)를 냈을 때도 네티즌들의 비웃음과 함께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난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셀프 탄핵 2013년 아시아경제는 '자치단체'를 '자X단체'로 인쇄하는 오타를 내고, 다음날 "19금 바로잡습니다"라는 희대의 정정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ㅡㅡ; [기사보기]


[조선일보의_속내.jpgee 출처]


 - 물론 오타가 자꾸 나온다는 게 언론의 입장에서 바람직할 리는 없습니다.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 차이로 '대통령'이 '개통령'으로 변신하는 식의 의미 전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식자공의 시대에 비해 훨씬 편리해진 작업 환경에서 이런 오타가 나온다는 것, 특히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기사에 툭하면 발견되는 대량의 오타들을 보자면 한국 언론의 최근 수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여담으로 언론의 오타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한국 뿐 아니라 독재정치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나라의 공통된 현상인 것 같습니다. 2011년 인민일보는 당시 총리 원자바오의 이름(溫家寶)을 '溫家室(찜질방이라는 의미가 있음)'으로 찍어 내는 바람에 무려 17명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ㅡㅡ; [로동신문의 오타 검열]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매일신문",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한국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Google 도서검색)

노컷뉴스 "이승만 견통령, 대령… 막 나가는 언론 열전"

머니투데이 "대통령이 '犬통령'..오·탈자 사고 처벌사례 보니"

머니투데이 "사라진 식자공을 기억하라"



 - 우리에게는 흔히 <내가 고자라니>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존인물 심영(1910-1971?)은 일제강점기 유명 배우우이자 친일 연극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로 전향하여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한반도의 연예인들 중에서는 심영처럼 친일/좌익 콤보를 밟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는 고자라니 말고 '진짜' 심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존인물은 적어도 고자는 아니었다는군요]



1. 조선의 슈퍼스타 심영


 - 심영의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입니다. 일단 심영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견이 나뉘어 있는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 서울로 이주하였다는 주장이 있고, 아예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심영이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분명한데, 의정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現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고 합니다(인터넷에서 찾은 정보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


 - 이 무렵 심영은 무용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데, 단순히 무용만 하러 다닌 게 아니라 이런저런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던지 심영은 사회활동 참여를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심영은 한국 최초의 극단(劇團) 중 하나인 '토월회'와 연을 맺게 되는데, 토월회 연구생 신분으로 몇몇 연극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연기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 심영은 1929년 <간난이의 설움>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연극계에 데뷔하였고, 여기서 호평을 받은 그는 다음해 <남경의 거리>의 1막 주인공으로 깜짝 캐스팅된 것을 계기로 스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심영의 연기력은 바다 건너까지 알려져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가히 1930년대 초 심영은 조선 최고의 인기스타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30년대 심영.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잘 생겨 보이긴 합니다. 1937년 12월 2일 동아일보]


 - 다만 1930년대 후반 들어 새로운 대스타 황철(1912-1961)이 등장하며 심영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두 배우는 <춘향전> <단종애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에서 함께 출연하여 인기 경쟁을 벌였는데, 1936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심영과 황철이 각각 홍도 남편(이쪽이 악역), 홍도 오빠('홍도야 울지 마라' 노래에 등장하는 그 오빠)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둘의 인기는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2. 친일에서 좌익으로


 - 인기를 빼앗겨 삐뚤어진 것인지, 심영은 이 무렵부터 친일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1939년 심영은 극단 고협 대표로 취임하였는데 이 극단은 적극적인 친일 성향 단체로, 주로 한다는 일이 농어촌을 순회하며 일본 프로파간다 공연을 한다든지 만주에서 중일전쟁 참전 중인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한다든지 하는 짓이었습니다.


 - 심영은 극작가 박영호, 연출가 나웅 등과 함께 고협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의 서울 불광동 일대에 '고협촌'이라는 연극인 마을을 만들고 집단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협은 1940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연극문화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심영은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는 와중에 일본 프로파간다를 위한 연기 활동에도 다수 참여하였습니다.


 - 1943년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심영은 일어극(日語劇) 부문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고, <너와 나> 등 친일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여 연기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주도하는 고협에서도 <빙하>니 <해당화 피는 섬>이니 하는 일본 프로파간다 연극을 다수 공연하였고, 거기에 심영이 출연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적극적 친일파로 맹활약하던 도중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 기대고 있던 기둥을 잃어버린 심영의 선택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좌익'이었습니다(이전 글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당연히) 극렬한 반공주의 집단이었습니다). 심영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좌익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일제강점기까지도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광대'였던 연예인들이 (친일을 했든 않았든)만인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3. 고자......는 되지 않았지만


 - 어쨌든 심영은 해방 후 좌익 계열 연극단체인 '연극동맹'에서 활동하면서, 이번에는 친일 대신 좌익 성향의 연극을 다수 공연하고 다녔습니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에 심영은 당연히 우익 쪽의 주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1946년 박영호 작 <님>(<야인시대>에도 등장하지만 실존 작품이기도 합니다)을 공연하고 이동하던 도중 김두한 일파에게 습격을 받고 영 좋지 않은 곳이 아니라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심영 피습사건 기사. 1946년 3월 16일 동아일보]


 - 그 때 김두한은 실제로 심영이 입원한 병원에 쳐들어갔고, 그에게 해코지를 하려다가 그의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누그러져 협박만 하고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김두한 본인의 증언으로 100%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이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 <야인시대>의 해당 부분). 심영은 총상에서 회복한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에는 파업 선동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 아마 이쯤 되자 남쪽에서는 더 이상 좌익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는지, 심영은 1947년 말 월북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좌익 활동을 용인하던 미군정이 점차 좌익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남로당 등 많은 좌익 계열 인사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담으로) 심영의 라이벌이었던 황철 역시 좌익 계열 활동을 하다가 1948년 8월, 즉 분단 막판에 월북하였습니다.


 - 월북 이후에도 황철과 함께 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습니다(황철은 전쟁 중 오른팔을 잃었고, 의수를 끼고도 열연을 거듭하여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연극인 등 여러 연예인들을 강제 납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당시 끌려갔다가 탈출한 최은희(1926-)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군복 차림으로 와서 여러 연예인들을 납치해갔다고).


 - 그렇게 요란하게 북한으로 건너간 심영이지만, 최후는 분명치 않습니다. 남로당 숙청 때는 같이 숙청되었다가 어찌어찌 복권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71년 다시 숙청되어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5. 정리 : 연예인의 친일


 - 우리에게 이상한 쪽으로 잘 알려진 심영을 선택하였는데,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문화예술인(특히 연예인)들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노선을, 해방 직후에는 좌익 노선을 택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블로거는 그들의 선택을 '광대'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 일제강점기 이후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인기 연예인들은 사회적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연예인에 열광하면서도 그들을 조선시대까지 천시당하던 '광대' 취급하곤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으레 복잡한 행보를 거듭하기 마련, 많은 수의 연예인들은 권력에 영합하여 입지를 넓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세상에 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런 그들에게 만인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는 하나의 복음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친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해방 이후 좌익에 경도된 것은 이상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심영 뿐 아니라 황철, 문예봉, 신불출 등 당대 인기 연예인 중 많은 수가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월북하여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북한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 사회는 아니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숙청 등으로 쓸쓸하게 퇴장하였습니다.


 - 그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인기 연예인의 친일 행위는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통치 수단이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능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체제에 영합한 연예인들은 각종 공연과 위문행사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당대 일본의 프로파간다를 심는 데 앞장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 연예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근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의 정치적 행보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들이 정치적으로 가진 영향력과 이를 부당한 권력 유지를 위해 악용해 온 과거 때문일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연예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20233#url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388568 (황철 일대기 1부. 중간에 심영과의 라이벌리가 언급되어 있음)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0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6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른 곳과 설명이 좀 다른데 참고용으로 링크)



 - 2017년은 대한민국 국군의 건군 6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타깝게도 국군은 출범 단계에서 옛 일본군 출신자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들에 의해 일본군의 흔적이 상당 부분 이식되어 오늘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첩보 및 보안업무의 중심에는 관동군 첩보부대원으로 근무했던 김창룡(1920-1956)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해방 전후에 걸쳐 있는 김창룡의 활약상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김창룡]




1. 국경의 관동군 첩보원


 - 김창룡의 고향은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요덕 수용소의 그 요덕)입니다. 빨갱이 때려잡은 사람의 출신지로 심히 적절하다 집안은 평범한 빈농(貧農)이었고, 그래서 김창룡 역시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하고 2년제 농잠(농업+양잠)학교를 나왔습니다. 졸업 후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신세를 바꾸어 볼 요량이었는지)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철도부(통칭 '만철')에 지원하여 합격, 역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만철 특급열차 '아시아'호. 당시 만철은 만주지역 철도 뿐만 아니라 군대와 행정조직까지 갖춘 거대한 집단이었습니다]


 - 확실히 그는 머리가 좋고, 또 성실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만철에서 일하던 김창룡은 그의 성실성과 명석함을 눈여겨본 일본인 상관의 추천으로 관동군 헌병대에 입대, 헌병보조원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소련과 국경 일대에서의 첩보활동으로, 이 때부터 그의 기나긴 첩보 인생이 시작됩니다.


 - 헌병교습소에서 첩보요원으로 훈련을 마친 김창룡은 주로 소련 · 중국공산당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였습니다. 1943년에는 중국공산당 소속 왕진리(王近禮)와 그가 이끄는 지하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웠는데, 이는 왕진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2년여간 점원으로 위장근무하며 벌인 첩보 활동의 성과였다고 합니다.


 - 이렇듯 김창룡의 장기는 위장 · 침투와 역공작(逆工作)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철도노동자 감독으로 위장취업하여 첩보를 입수, 공산당 지하조직을 50여 개나 적발해내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일반 병사 신분이었던 김창룡은 일련의 공적으로 1945년 1월 오장(伍長, 하사)으로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 이렇게 관동군의 첩보요원(이건 좋게 표현한 것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밀정')으로 맹활약하던 김창룡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으니,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하고 만주 일대가 소련의 영향 하에 들어온 것입니다.




2.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 당연하게도, 공산당 때려잡던 밀정이 소련 치하에서 무사할 거라는 생각을 하긴 어렵겠지요. 해방 직후 김창룡은 황급히 고향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딸과 결혼했습니다(대충 속내가 무엇인지 냄새가 좀 나지요?). 하지만 만주에 이어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소련군은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던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고, 김창룡은 철원과 영흥에서 보안대에 잇따라 체포되어 사형당할 처지에 놓이지만 두 번 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 더 이상 북쪽에 사는 건 불가능하니, 두 번째 탈출 이후 김창룡은 거지꼴이 다 된 채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그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격렬한 좌우 대립 속에서 공산당 때려잡던 김창룡의 경력은 대단한 스펙(?)이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한동안 백수로 지내던 그는 지인이자 만주군 출신인 박기병(당시 3연대 소대장)을 만나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습니다.


 - 김창룡은 처음에는 일반 사병이었지만, 나름 하사관 출신인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박기병에게 부탁하여 3연대 하사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의 장기인 정보 관련 업무를 하던 김창룡은 역시 만주군 출신인 김백일(1917-1951, 당시 3연대장)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에 1947년 1월 입교, 4월(?!)에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당시는 국군 태동기였고, 장교를 일단 충원부터 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김삼룡과 이주하의 검거 소식. 1950년 4월 1일 동아일보]


 - 임관 이후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군 내에 남아 있던 좌익 계열 장교들을 숙청하는 데 활약하게 된 것입니다. 군대 안팎에 있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계열 인사들을 잇따라 체포하였고(그 중에는 김삼룡(1908-1950), 이주하(1905-1950) 등 남로당 최고위급 인사들도 있음), 여순사건 때는 반란의 진압과 사후처리(라고 해봐야 국군 내 좌익인사 숙청)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로 굳어지면서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김창룡은 급속한 출세를 거듭하여 1948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장교, 1949년에는 방첩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는 활약을 바탕으로 대통령 이승만의 신임까지 얻게 되었고, 많지 않은 나이에 권력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3. 김창룡식 빨갱이 관심법


 - 하지만 김창룡의 '빨갱이 때려잡기'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습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잡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좌익인사라고 자백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어떤 식의 강요일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엄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고통에 못 이긴 사람이 기억나는 아무 지인의 이름이나 내뱉으면 그 사람을 또 잡아다 고문하고......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


 - 한번은 창설 준비중인 공군 소속 장교 대부분(약 40여 명)을 한꺼번에 체포한 적이 있었는데, 깜짝 놀라 그들의 체포 경위를 묻는 김정렬(1917-1992,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불림) 대령에게 "증거는 없지만 앞으로 좌익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ㅡㅡ; 당연히 사방에서 욕을 먹었지만 그럼에도 권력에게는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에 출세에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권력이 그에게 원한 건 무엇일까요? 바로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이 있는데, 당시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는 육군 방첩대 소속 장교였기 때문에 방첩대장 김창룡 또한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김구 살해를 지시한 배후로 널리 의심받았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아 안두희와 함께 별 탈 없이 사태를 넘어갔습니다.


 - 1950년 한국전쟁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일단 그는 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추정되며(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후방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휘했다는 것), 서울 수복 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를 색출 · 처벌하는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창룡은 부산 방첩대장, 평양지구 특무대장을 거쳐 1951년 육군 특무부대(現 기무사령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별을 달았습니다.




4.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권력(이승만이죠 뭘)을 위하여 각종 공안 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조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간첩 및 용공분자 사건이 허위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 ㅡㅡ; 물론 그가 처리한 공안 사건들은 권력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습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빌미가 된 소위 '금정산 공비 사건'을 처리한 것이 바로 김창룡의 특무부대였습니다. 


 - 이외에 1953년 국제간첩사건(이범석계 숙청을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음), 1955년 개천절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실제 암살 시도가 있었던 건 사실이나 사건 경위는 크게 과장되었다는 게 정설) 등 권력과 직접 연관된 공안사건에는 김창룡과 특무부대가 끼지 않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중추에 서게 된 김창룡은 그야말로 권력을 '남용'하게 됩니다.


[이승만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김창룡]


 - 1954년 김창룡은 특무부대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헌병사령관 공국진(-2014)을 해임하려 모종의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정일권(1917-1994) 육군참모총장이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경무대(청와대) 빽을 내세우는 김창룡의 공세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후 공국진이 제2군사령부 참모장에 발령되려 하자 이것도 방해하여 무산되게 만들었고, 당시 제2군사령관 강문봉(1923-1988)까지도 빡치게 만들었습니다.


 - 결국 빡치다 못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을 제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김창룡을 중용하였습니다. 이후 김창룡은 두 장군의 비리를 몰래 캐내는 등 쩔어주는 뒤끝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흥미롭게도 이승만은 김창룡에게는 두 장군의 뒷조사를, 정일권에게는 김창룡의 뒷조사를 지시했다는군요). 여하간 이런 식으로 좌충우돌하며 김창룡은 사방에 적을 만들었습니다.


 - 결국 일이 터졌으니, 1956년 1월 30일 특무부대로 출근하던 김창룡은 탑승한 지프가 잠시 정차한 사이에 허태영(1919-1957) 대령, 이유회(1929-1957) 중사 등의 습격을 받아 총알세례를 받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은 소식을 듣자마자 친히 왕림하시어 그의 유해를 확인했고, 전군 장병의 외출 금지령까지 내려가며 범인을 찾았습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葬)이었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파의 반공주의 신분세탁


 - 김창룡은 일본의 충실한 개로 활약하다가, 일본의 후광이 사라진 뒤에는 반공주의의 선봉으로 변신하여 영광의 시절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는 김창룡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친일파, 특히 군과 경찰 분야의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김창룡은 거기에 관동군 시절의 행보, 그리고 해방 직후 공산주의 세력에게 당한 개인적 고난이 더해져 공산주의에 대한 순수한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그 양상이 공산주의 vs. 자본주의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전 행위를 심판받을 기회를 뛰어넘어버렸고, 오히려 공산주의에 앞장서 싸우는 '반공투사'가 되어 새로운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 권력자들은 반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승만 세력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오히려 김창룡처럼 이를 몇 배로 불리기까지 하였습니다.


 - 물론 애초에 제국주의 일본 자체가 극렬 반공주의 사회였으니 그들에 협력한 사람들이 반공주의자인 것을 이상하게 볼 건 없습니다. 그리고 반공주의 자체도 민주사회에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고, 그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반공주의를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위 '과거 세탁'을 위해 반공주의를 이용한 자들이 한국 내에서 반공의 선봉에 섰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땅의 반공주의자들은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자체를 친북행위로 규정해 왔습니다]


 - 이것이 이후의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쳤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뼈아픈 부분은 일제점기 반민족행위를 규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빨갱이들의 준동' 쯤으로 치부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친일파를 비판하는 게 곧 '반공투사'를 욕하는 것으로 치환되어 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 밀정이자 대한민국의 악질 정치군인 김창룡을 구국의 영웅으로 맹목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 네. 물론 김창룡은 유능한 정보군인이었고, 투철한 반공투사였을 수 있습니다. 그걸 공이라고 하면 그 의견은 존중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과오(일본에 대한 협력, 무고한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를 없이하는 건 결코 아니지요. 이런 식의 흑백논리가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는 뒤틀린 역사인식과 해석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heme.archives.go.kr/next/history/kimcy/mean/mean_01.do (김창룡 저격사건과 김창룡 일대기 요약)

http://egloos.zum.com/nasanha/v/10987122 (산하의 오역)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4869 (경남도민일보 기사)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2154 (김창룡에 대한 긍정적 시각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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