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Opera <Le Devin du Village> (1752)

루소, 1750년

 계몽주의 철학의 상징, 자유의지에 기반한 사회계약론과 교육론 등 수많은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시대의 민주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대철학자 루소는 학술활동과 동시에 음악가로도 제법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작가나 철학자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작곡가로도 상당한 명성을 날렸으며, 바로크에서 고전파로 음악 사조가 넘어가는 과도기에 음악에 관한 다양한 논쟁과 이론 정립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역시 정치적 문제로 아들을 떠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소는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간 루소는 엄격한 규율과 복종이 강제되는 작업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6세 때 가출을 하게 되는데, 한동안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바랑(Warens) 남작부인의 후원을 받게 됩니다. 루소의 재능을 알아보았는지 바랑 부인은 그에게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으며, 10여 살 연상의 남작부인을 '엄마'라고 부르던 루소는 이후 그녀의 정부(情夫)가 됩니다.

 바랑 부인의 지원으로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사색할 수 있었던 루소가 가장 열정적으로 빠져든 분야가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적 열정을 알아본 바랑 부인은 그를 성가대 학교의 악장인 르 메트르에게 보내어 음악 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본인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샹베리(Chambéry)에 있었던 남작부인의 저택에서 함께 음악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루소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한 이 시절은 바랑 부인이 애인을 갈아치우면서 파탄났고, 잠시 방황하던 루소는 1740년 파리로 이주하여 당대의 유명 철학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루소는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악보를 고안하여 1742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습니다. 이 악보는 숫자를 사용하여 음높이나 셈여림 등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는데, 정작 아카데미에서는 큰 비판만 받고 그대로 묻혀 버렸습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음악가였던 장 필립 라모(1683-1764)는 "참신한 아이디어이지만 음높이와 길이 등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연주자들이 바로 연주로 옮기기 까다롭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가로서 루소의 도전은 한 번의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루소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작곡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1740년대부터 이런저런 작품을 발표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1752년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루소 본인이 직접 대본과 곡을 모두 쓴 이 작품은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이라는 패러디물이 유럽 곳곳에서 인기를 끌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었습니다(이 패러디물을 기반으로 어린 모차르트가 자신의 초기 오페라 중 하나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에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심하게 긴장한 나머지 그는 사정사정해서 알현을 취소하고 말았다는군요.

 이외에도 디드로 <백과전서>에서 음악 관련 부분 집필을 맡는 등 음악철학이나 이론 쪽에서도 활동하던 그는 1750년대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부퐁 논쟁'의 중심인물로 활약하게 됩니다. 발단은 페르골레시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가 1752년 파리에서 초연된 것이었는데, 장바티스트 륄리(1632-1687)로 대표되는 웅장한 프랑스 오페라와 달리 가벼운 주제와 서정적 멜로디를 특징으로 한 이탈리아식 '오페라 부파(프랑스어로는 '부퐁') 프랑스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에 계몽주의자와 백과전서파 등 새로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프랑스 오페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 선두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계몽사상가이면서 동시에 같은 해 인기 오페라를 발표한 작곡가였던 루소였습니다. 루소의 포문은 당시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라모에게 향했는데,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에 대하여 그는 화성이 너무 거창하다고 혹평하며 "마치 끊어지지 않는 소음 같다"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음악에서 자유로운 선율을 중시했던 루소에게는 근대 화성학의 기초를 세웠을 만큼 화성적인 음악을 중시한 라모와 음악적 측면에서 대척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이 논쟁은 점차 확대되어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 간의 대립, 나아가서는 이를 지지하는 신흥 지식계층과 왕족, 귀족 및 일반 청중간의 대립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양측 지지자간 결투까지 벌어질 정도로 과열된 이 논쟁은 정작 한쪽 중심인물이었던 라모가 1764년 사망하면서 허무하게 생물학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 논쟁의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으며, 그 선두에 있었던 작품이 바로 루소의 <마을의 예언자>였습니다.

 루소의 대표곡 <마을의 예언자>는 서로 연인 관계인 두 양치기가 오해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것을, 마을의 점쟁이가 노력하여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는 내용의 단막극인데, 단촐하며 일상적인 줄거리가 당시 루소의 음악적 입장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 속에는(영상 50:43~)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 및 기독교 찬송가 <주여 복을 비옵나니> 등 여러 노래에 채용된 유명한 멜로디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서울경제 <[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때늦은 음악열정' 귓가에 들리는듯>
경상일보 <[구천의 음악이야기(201)]오페라 작곡가 루소(Jean-Jacques Rousseau)>
아츠앤컬처 <환갑을 앞둔 철학자는 열두 살 신동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블로그 <음악사가 있는 고전 음악 박물관>
한국어 위키백과 "부퐁 논쟁", "장필리프 라모", "장바티스트 륄리", "오페라 코미크(장르)"
영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Le devin du village"
프랑스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나무위키 "장 자크 루소"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84

 

 

Muzio Clementi (1752-1832)
Piano Concerto in C major WoO12

 

무치오 클레멘티. 1794년

 무치오 클레멘티는 우리에게는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소나티네 앨범>에 많은 곡이 수록된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고 높은 실력을 요구하는 다수의 작품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동시대에 활약한 모차르트와 함께 피아노 연주자로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으며 모차르트와 연주 대결을 펼친 적도 있지요. 특히 피아노 연주법 뿐 아니라 악기 개량에도 직접 관여하는 등, 당대 피아노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클레멘티는 이탈리아(당시 교황령)의 로마에서 출생하였고, 은 세공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카펠마이스터(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던 친척 안토니오 바로니(1738-1792)에게 음악 수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9세 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3세 때는 오라토리오와 미사곡을 작곡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습니다. 14세가 되는 1766년 클레멘티는 다마소의 산 로렌초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영국인 귀족 피터 벡포드(1740-1811)가 로마를 방문했다가 클레멘티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국에 있는 자신의 장원에서 연주를 하는 대가로 숙식과 교육비를 후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클레멘티는 약 7년간 벡포드의 장원에 거주하며 음악 수업에 힘썼고, 1770년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첫 대중 연주회를 개최하여 음악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벡포드의 후원 계약이 종료된 이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하프시코드 연주자와 극장 지휘자 등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 그는 1780년 무렵이 되면 영국을 넘어 유럽에 널리 알려진 정상급 음악가가 됩니다.

 클레멘티는 1780년부터 3년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연주 활동을 벌였는데, 빈에 체류하던 1781년 말 그 유명한 연주 배틀(?)이 벌어집니다. 음악가들을 적극 후원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는 빈에서 건반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던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를 초청하여, 각각 자신의 작품을 기반으로 즉흥 연주를 펼치도록 공개 경연을 개최하였습니다(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황제는 현명하게도(?) 무승부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경연 후 클레멘티는 모차르트를 호평하였는데, 모차르트는 클레멘티를 "실력은 뛰어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며 깠다고 하네요. ㅡㅡ; 아마도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중시하던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기교적이며 정형화된 연주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차르트가 클레멘티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오페라 <마술 피리> 서곡에 클레멘티의 피아노 협주곡의 모티브를 차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베토벤은 클레멘티를 매우 존경했고 그의 작품도 자주 연주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연주 여행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간 클레멘티는 음악가로서 활동과 함께 음악교육에도 힘썼으며, 존 밥티스트 크라머(1771-1858), 존 필드(1782-1837) 등 유명 음악가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1798년에는 악보 출판회사를 인수하였고 이후 피아노 제조업에도 진출하여 사업가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출판사는 베토벤 작품의 영국 내 독점계약을 체결하여 다수 작품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베토벤 작품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데 업적을 세웠지만 그의 악보를 일부 수정하는 등 손을 대어 뒷말이 좀 있기도 합니다.

 음악사(史)에서 클레멘티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근대적인 피아노 연주법을 확립한 것으로, 이에 "피아노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피아노를 직접 만들었기도 하고 그는 모차르트 등과 함께 당시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Gradus Ad Parnassum』이라는 피아노 연습곡의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베토벤, 체르니, 쇼팽 등 19세기를 풍미한 수많은 피아노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과 연주기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C장조는 1796년 작곡되었으며, 2년 전 출판한 피아노 소나타 Op.33 No.3을 협주곡으로 개작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영문 위키피디아 "Muzio Clemeti", "List of compositions by Muzio Clementi"
나무위키 "무치오 클레멘티"
https://blog.naver.com/chaos719kr/60048559988
"[클래식&차한잔] 무치오 클레멘티 소나티네", 조세금융신문(https://www.tfmedia.co.kr/), 2021. 10. 8.

 

Eugène Ysaÿe (1858-1931)
Sonata for Solo Violin Op.27 No.2

이자이, 1883년

 외젠 이자이는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입니다(한국에서 이름 표기가 중구난방인데, 프랑스식으로 '외젠 이자이'가 맞다고 하므로 일단 이에 따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사이 가장 뛰어난 연주자 중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바이올린곡들을 남긴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음악과 연관이 깊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자이가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것은 5세 때로,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악기를 가르쳤는데 2년 뒤에는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할 만큼 기량이 성장하였습니다. 다만 음악원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였는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자기 아버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거나 거리 연주자로 나서는 등 독자적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역시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거장 앙리 비외탕(1820-1881)이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그의 연주를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브뤼셀 음악원에 입학하도록 추천하였습니다. 음악원에 입학한 이자이는 비외탕과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 등 대가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음악원 졸업 후 이자이는 벤야민 빌제 비어홀 오케스트라(現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연주 경험을 쌓은 그는 안톤 루빈스타인 등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27세 때는 파리 콩세르 콜론에서 솔로 연주자로 데뷔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모교인 브뤼셀 음악원에 교수로 임용되어 교육활동에도 나섰는데 루이스 퍼신저(1887-1966),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등의 거장들이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연주자로도 계속 활동하여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특이점이라면 드뷔시, 프랑크, 생상 등 유럽의 수많은 대작곡가들이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가 작곡자의 의도를 훌륭하게 해석하여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반대로 이자이 자신도 수많은 바이올린곡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들을 동료 연주자들에게 헌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와중에도 건강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는데,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 그는 나중에는 연주보다는 작곡, 지휘, 교육 등의 활동에 더 치중하였고, 말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이 더욱 심해져 1931년 왼쪽 발을 절단하는 수술까지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회복하지 못했고 같은 해 사망한 뒤 브뤼셀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사후 1937부터 그를 기념하여 '이자이 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이름을 바꾸어(영국 여왕과는 무관하며, 벨기에 왕비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경연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자이의 연주 스타일은 뛰어난 연주 테크닉에 기반한 정확한 연주였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위에 언급했듯이 수많은 작곡가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작품들 또한 자기 실력에 바탕해서 그런지 어렵고 난해한 곡들이 많다고 하며,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은 이자이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를 접하고 감명받아 만들었으며, 특히 2번의 첫 두 마디는 무반주 파르티타 3번의 도입부에서 따 왔습니다. 6개의 작품은 각각 당시의 명 연주자 6명에게 헌정하였는데 2번은 자크 티보(1880-1953)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참고자료
 "외젠 이자이",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sound.or.kr/bbs/view.php?id=music3&no=767)
 김미정,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 2번> (1923)에 관한 분석 및 연주법 연구」 (dspace.ewha.ac.kr/handle/2015.oak/213515)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작곡자 의도 완벽 해석… ‘헌정받기의 대가’ 이자이", 동아일보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509/84267346/1)
 "Eugène Ysaÿe", "Violin Sonata No. 2 (Ysaÿe)", 영문 위키피디아
 "외젠 이자이", 나무위키

 

나운영(1922-1993)

String Quartet No.1 <Romantic>

 

 

 나운영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초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5세 무렵 아버지에게 양금을 배우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10대 초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17세 때인 1939년에는 가곡 <가려나>(김안서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에 당선될 만큼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김성태(1910-2012)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이듬해(1940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모로이 사부로(1903-1977)를 사사하였고, 1943년 본과를 졸업한 후 연구과에 진학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였습니다. 나운영은 작곡과 함께 첼로를 전공하였는데 귀국 후에는 채동선 현악사중주단과 경성후생악단에서 첼로 주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이 해방된 1945년에는 중앙중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중앙여자전문학교(現 중앙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후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목원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민족음악문화연구회를 창립하고, 민족음악 진흥을 위한 여러 활동에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선토착화(先土着化) 후현대화(後現代化)'라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음악 진흥에 힘쓰면서, 여기에 12음기법 등 현대음악의 여러 요소를 결합하는 여러 시도를 통하여 독창적인 한국의 현대음악을 정립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작품들은 초기에는 한국적 음악을 지향하다가, 중기 이후에는 현대음악에 한국적 요소를 덧붙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운영은 해방 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가, 몇 년 뒤 개신교로 개종하여 남은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종교음악이 많으며, 교회 성가대를 오래 지휘하거나 찬송가 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대한민국의 기독교 음악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반면 불교계의 위촉을 받고 찬불가(讚佛歌)를 작곡한 적도 있다니 종교적으로 심하게 편협한 자세를 갖지는 않은 듯한데, 이러한 이력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뜻하지 않게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의 작품은 관현악, 실내악, 가곡, 종교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13개의 교향곡, 5개의 오페라 및 칸타타, 18개의 예술가곡을 비롯한 다수의 가곡 및 찬송가, 총 12개의 실내악곡 및 피아노곡 등입니다. 현악사중주 1번은 1942년 작곡하여 제국고등음악학교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1952년 초연되었습니다.

 

 

 

@ 참고 :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http://launyung.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운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417)

법보신문 "찬불가 만든 개신교인 나운영의 시련"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497)

한국어 위키백과 "나운영"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9A%B4%EC%98%81)

 

 

Boris Pasternak (1890-1960)

Piano Sonata in b minor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때 음악가 지망생이었고 심지어 꽤 재능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요. 철학자, 대통령, 왕을 언급하였으니 이번에는 대문호의 음악세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1862-1945)는 유대계 출신으로 톨스토이와 레닌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을 만큼 러시아에서 꽤 저명한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역시 유대계 피아니스트 로자 카우프만(1867-1939)였습니다. 부모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상당히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모는 일찍이 톨스토이의 사상운동에 동조하였고, 그의 집에는 톨스토이 뿐 아니라 릴케, 라흐마니노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장 환경 속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가 처음 지망했던 길은 문학이 아닌 음악이었는데, 이는 물론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의 이웃에 살았던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영향 역시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재능도 있었던지 그는 1904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약 6년 정도 음악을 전공하였고 이 때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습니다(여담으로 그의 아버지는 스크리아빈의 초상을 그려 준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1910년 그는 돌연 모스크바 음악원을 자퇴하였고, 이후 다시는 음악가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갑자기 음악을 그만두었는지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소심한 그의 성격과 연관이 있었지 않나 추측됩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자작곡을 스승 스크리아빈에게 들려주는 것도 어려워하였으며 스승이 보기에 별 쓰잘 데 없는 부분까지 고민하고 걱정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당시 그는 스크리아빈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점차 그의 자신감을 잃게 만들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음악을 그만둔 파스테르나크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에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유학하여 헤르만 코헨(1842-1918) 등에게서 신칸트주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유학을 한 것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것마저 포기하고 이듬해 귀국,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숱한 정치적 논란과 압박 속에서 세계적인 대문호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고, 당시 사상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음악을 공부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그의 음악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스크리아빈의 그것과 비슷한 신비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1909년 만들어진 피아노 소나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Friedrich II von HohenzollernFriedrich der Große (1712-1786)

Flute Concerto No.4 in D




 이전에 철학자와 대통령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왕입니다. 그것도 독일과 유럽의 근대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대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8세기 계몽군주의 대표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고 자기 자신이 음악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군주' 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프랑스인 교사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하노버 왕가 출신. 1687-1757)는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 프랑스 귀족 출신의 가정교사를 채용, 프리드리히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가 좋게(?) 말하면 군국주의적이고, 대놓고 말하면 반(反)지성주의자에 매우 폭력적이기까지 한 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어릴 적에 꽃 대신 전쟁용 북을 선택하여 치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결코 유약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군국주의자였던 아버지의 눈에는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자식이 예술이나 문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던지, 프랑스인 교사를 해임하고 음악을 즐기는 아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등 거의 가학적인 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정교육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다는군요.


 이런 식이니 부자지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혼담이 오갔던 것을 기회로 영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장기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당시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지만 사방에서 뜯어말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몇 년 후에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그가 즉위 후 교양과 예술에 탐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이러한 막장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매우 다행히도 그는 그 때까지의 고난에도 미쳐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인간성, 교양을 지켜냈으며 이후 왕으로서 이룩한 일들은 굳이 여기서는 나열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소개할 것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진 그의 음악 사랑과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활동입니다.


 실제로 그는 재위 초기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1747년 프리드리히는 (당시에는 건반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정으로 초청하였는데, 바흐는 왕이 직접 만든 주제 선율을 가지고 3성 푸가를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즉석에서 훌륭하게 해냅니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바흐에게 6성 푸가를 만들어 볼 것을 주문하였고, 바흐는 그 자리에서는 아니고 나중에 따로 완성하여 왕에게 헌정하니 그 유명한 <음악적 헌정>입니다(그런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곡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군요).


 사실 바흐와의 인연은 그의 아들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1714-1788)가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쳄발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가 왕세자였던 시절부터 궁정악단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즉위 후에는 정단원으로 승진하였고, 왕을 위한 작품들도 여럿 작곡하는 등 여러모로 프리드리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다만 후에는 음악적 관점에서 차이를 좀 보였다는데 그 때문인지 1768년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함부르크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즉위하자마자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1704-1759)을 이탈리아로 보내 음악가들을 채용하는 등 궁정음악의 수준을 높이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하임 크반츠(1697-1773) 등 여러 음악가들이 그의 궁정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크반츠는 프리드리히 개인의 플루트 교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단순히 음악의 후원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그의 궁정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왕이 직접 협연한 플루트 협주곡에 대하여 영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음악사학자인 찰스 버니(1726-1814)는 "지금까지 내가 그 어느 애호가들이나 전문 플루트 연주자들에게서 들은 것보다 월등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립서비스 아닌가


 이를 보면 그가 음악가로서 적어도 아마추어의 평균보다는 훨씬 훌륭한 기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음악적 성향으로, 말년이 되어서까지도 젊은 시절의 음악 취향을 그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의 말년에는 궁정에서 철 지난 음악만 줄창 연주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C. P. E. 바흐처럼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음악가 군주' 프리드리히 2세는 높은 음악적 소양으로 자신의 곡을 세상에 남긴 극히 드문 군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자작곡들 또한 그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준은 괜찮지만 철저히 구시대적'인 범작으로 평가받고 있긴 하지만요. 그냥 국왕의 신분으로 후대인이 들어줄 만한 음악을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문헌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 12(2), 한국서양음악회, 2009.

 한국어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바흐(J. S. Bach) 음악의 헌정(A Musical Offering) BWV.1079", 곽근수의 음악이야기(http://sound.or.kr/)

 



Gregorio Allegri (1582-1652)

<Miserere mei, Deus>



[알레그리]


 알레그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전환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력을 로마에서 활동하며 주로 가톨릭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동생 도메니코 알레그리(1585-1629) 역시 음악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9살 때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서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 경력을 시작하였고, 1600년부터 1607년까지는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나니노(1560-1623)에게 음악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페르모의 성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부터 작곡가로 다수의 모테트와 성가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로마 밖에서 음악 경력을 쌓던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주목을 받아, 1630년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의 콘트랄토로 부임하여 평생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미제레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그의 음악은 르네상스 - 바로크 사이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데, 대체로 교회음악은 이전 시대 팔레스트리나(1525-1594)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기악음악 쪽에서는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진보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의 구절에서 유래한 성가로, 각각 5성부, 4성부로 된 두 합창단이 함께 부르는(그러니까 총 9성부) 노래입니다. 1638년경 부활주간의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후 시스티나 성당의 '테네브레(부활주간에 시행하는 일종의 촛불 예배)'에서 반드시 연주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음이 하이 C음까지 올라가는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이면서 신비로운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황청에서는 이 작품을 교황청 내에서만 전수하며, 다른 곳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악보를 반출하는 등의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저작권 지키는 방법이 무지막지하기도 하지 그래서 이 작품은 그 작품성에 비하여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는데, 1770년 로마를 방문한 모차르트가 예배에서 이 곡을 단 두 번 듣고 모두 암기하여 악보로 재현해 냈다는 것으로 후세의 우리에게까지 잘 알려지게 됩니다. 다만 이전에도 다른 필사본 자체는 바깥으로 나돌아다녔다고 하며, 나중에는 교황청의 금지령도 해제되어 정식 출판도 되었다는군요.




참고 : 

영문 위키백과, 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나무위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한겨레)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소름' 돋는 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경향신문)




Anton Stepanovich Arensky (1861-1906)

Piano Trio No. 1 in d Op. 32



[아렌스키. 1895년]


 아렌스키는 러시아 노브고르드에서 출생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입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는데 아버지는 의사 겸 첼리스트에,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적 환경 아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그는 9살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18세 때인 187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사사하였습니다.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자신의 오페라를 작곡할 때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82년 아렌스키는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놀랍게도 바로 다음 해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교수님은 22살! 이곳에서 그는 차이콥스키를 만났고 그의 인정을 받아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무렵부터 그는 잦은 폭음을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건강과 수명을 갉아먹게 됩니다. 그는 1895년까지 교수로 재임하며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등 많은 음악가를 가르쳤는데 스크랴빈과는 훗날 음악적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1895년 교수직을 사임한 아렌스키는 밀리 발라키레프의 뒤를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예배당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여 1901년 사임하고, 이후로는 작곡가로서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콜중독과 무절제한 생활의 결과 결핵에 걸려 있었고, 결국 이 때문에 1906년 핀란드 페르크예르비(現 러시아 카렐리야 지방의 키릴로프스코예)에 있는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름 러시아 음악사에서는 이름 있는 작곡가이기 때문인지 1987년 소련은 남극의 한 빙하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아렌스키 빙하"). 알렉산더 섬의 베토벤 반도의 보케리니 inlet에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차이콥스키와 쇼팽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차이콥스키의 영향이 커서 <차이콥스키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적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3개의 오페라와 2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많은 수가 있지만 대체로 피아노곡을 비롯한 실내악곡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피아노 삼중주 1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1894년 완성되었습니다.




참고 : 

영문 위키백과, 러시아어 위키백과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1] [2]

http://classictong.com/artist/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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