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terich Buxtehude (1637?-1707)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비올을 연주하는 북스테후데. 생전의 그를 그린 유일한 그림]


 - 북스테후데는 17세기 북부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특히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의 초년에 대하여는 기록이 부족한데(그래서 출생년도가 불분명) 일단 출생지는 스웨덴(당시에는 덴마크령)의 헬싱보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오르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헬싱보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던 북스테후데는 1668년 뤼베크로 이주하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는 당시 크고 아름다운 대형 오르간과 소형 오르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츠 툰더(1614-1667)의 후임자로 부임한 그는 툰더 시절에 시작된 '저녁 음악회(Abendmusik)'를 발전시켜 큰 인기를 끌었고, 오르간 연주자로도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 그런데 이 자리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으니 전임자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ㅡㅡ; 북스테후데 역시 부임 이후 툰더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7명의 딸을 낳았다니 금슬은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후 북스테후데는 남은 평생을 뤼베크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많은 제자를 두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 음악가들과도 교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요한 파헬벨(1653-1706, 카논 변주곡의 원작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 수십 년이 지나 그가 노년이 되자 후임자 선정이 이슈가 되었는데, 이 무렵 헨델(마테존과 함께)과 바흐가 각각 1703년과 1705년에 그를 방문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특히 바흐는 자신이 일하던 아른슈타트의 교회에서 4주간 휴가를 얻어 400km나 떨어진 뤼베크로 왔는데, 북스테후데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복귀를 늦추고 4달 동안이나 머무르며 그와 교류하였습니다.


 - 북스테후데는 헨델과 바흐의 재능을 알아봤는지 후임자 자리와 함께 자신의 큰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는데, 큰딸을 본 두 사람은 하나같이 제안을 거절하고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ㅡㅡ; 음...... 결국 그는 큰딸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얼마 뒤 요한 쉬페르데커(1679-1732)가 큰딸과 결혼하면서 그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 당시의 음악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북스테후데 역시 다양한 장르에 수많은 곡을 썼는데,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300여 곡 정도가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50곡 정도입니다. 그나마 후대의 작곡가들(바흐 등)이 그의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이 정도라도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종교 음악이며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간결한 형식이 특징입니다. 파사칼리아 d단조는 그가 쓴 유일한 파사칼리아입니다.




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Скря́бин (1872-1915)

Symphonic Poem(Symphony No. 4) <The Poem of Ecstasy> Op. 54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스크랴빈은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자입니다. 어머니 또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스크랴빈을 낳고 얼마 뒤 사망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숙모에게 양육되었습니다. 숙모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였으며 그는 숙모를 통해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었습니다. 1882년 10대에 접어든 스크랴빈은 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여 1889년까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몸이 작고 약했기 때문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 일단 유년학교 시절에도 스크랴빈은 음악교육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원 연주회에 참여할 정도였다는군요. 결국 그는 군사유년학교를 그만두고 1888년 음악원에 정식 입학하여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 안톤 알렌스키(1861-1906)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 스크랴빈은 피아노 연주자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음악원 시절 라이벌인 요제프 레빈(1874-1944)을 의식한 나머지 과도한 연습을 하다가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합니다(다행히 회복됨). 1892년 피아노과 졸업 학위를 딴 그는 작곡과 학위도 따려고 했지만 작곡 스승인 알렌스키와 작품 스타일 관련 문제로 갈등하였고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졸업하게 됩니다.


 - 1894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얼마 뒤 음악 관련 기획자인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3)을 만나 그의 지원 하에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돌며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897년에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였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 다시 정착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습니다.


 -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스크랴빈은 1904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는데, 하필 이 때 타티아나 슐뢰저라는 사람과 바람이 나서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아내와는 이혼하고 <법열의 시> 뉴욕 초연이 취소되는 등의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작곡 활동에 전념하였고, 19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쇼팽 등의 낭만파 경향을 이어받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급속히 변화하여, 다분히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후기 음악은 불협화음을 과감히 활용하는 등 아주 몽환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후년에는 음악과 색채의 결합을 시도하여 1910년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 초연 때는 아예 '색광(色光) 피아노'라는 특수한 장치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을 돌며 연주와 작곡을 계속하던 스크랴빈은, 1915년 어느 날 윗입술에 생긴 작은 종기(혹은 뾰루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세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번져 ㅡㅡ;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법열의 시>는 1907~1908년 사이 작곡되었고, 간혹 교향곡(4번)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이 신비주의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작곡가는 같은 제목으로 신비주의적 내용의 긴 시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Paul Dukas (1865-1935)

Symphony in C




 - 폴 뒤카스는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로, 드뷔시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실제로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길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파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고,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동생을 출산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아주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고, 14세 때 병에서 회복하는 동안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881년 16세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조르주 마티아스(1826-1910)에게 피아노를, 테오도르 뒤부아(1837-1924)에게 화성학을, 에르네스트 기로(1837-1892)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당시 함께 공부한 학생 중 클로드 드뷔시가 있었고, 두 사람은 이를 계기로 평생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 음악원에서 뒤카스는 나름 주목받는 학생으로 음악원 내부 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1888년 로마 대상 콩쿠르에서는 대상 수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실망한 그는 이듬해 음악원을 자퇴한 후 작곡가 겸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첫 평론은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한 <니벨룽겐의 반지> 공연의 리뷰였다고 합니다.


 - 작곡가로서는 1892년 초연된 <폴리우크트> 서곡이 본격적인 데뷔작이었는데, 그는 이후 많은 작품을 쓴 모양이지만 워낙 완벽주의자라 많은 곡을 그냥 폐기했고, 세상에 알려진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빡세게 비평했던 모양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은 분명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가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음을 후세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 그의 작품세계는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독일 고전 스타일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프랑스의 음악 정신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라모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간주곡, 종곡>(1903)이 있으며, 유일한 교향곡 C장조는 1896년 작곡되어 이듬해 1월 폴 비달(1863-1931)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총 3악장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Henryk Wieniawski (1835-1880)

Violin Concerto No. 2 in d Op. 22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음악가로, 생전에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유명하였습니다. 파가니니 사후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 앙리 비외탕(1820-1881), 요제프 요하임(1831-1907) 등과 함께 19세기 중후반을 수놓은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하나로, 작곡가로서는 다수의 바이올린 곡을 남겼습니다.


 -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의 루블린에서 출생한 비에니아프스키는 여느 대음악가들이 그렇듯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843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였는데, 그가 프랑스인도 아니었고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그의 재능을 확인한 음악원에서 특별히 입학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졸업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하였는데, 그의 동생이자 피아니스트인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1837-1912)와 함께 하기도 했다는군요.


 - 1847년에는 첫 작품인 <Grand Caprice Fantastique>을 작곡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12세...... 이후로도 그는 연주와 작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활동이 주였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작품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1860년 그는 이사벨라 햄프턴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부모가 그의 결혼을 반대하자 <Légende>(Op. 17)라는 작품을 써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 그 무렵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 1872년까지 10여 년간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러시아 음악 협회의 일원으로 오케스트라와 현악사중주 등의 연주활동과 바이올린 교육 등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1872년부터 2년간은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고, 1875년에는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비외탕의 후임으로 선임되는 등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각지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 하지만 이 때부터 건강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는데, 심할 때는 연주회를 중단해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1879년에는 러시아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진행하던 도중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오데사의 병원에 입원했고, 차이콥스키의 후원자로 유명한 나데주다 폰 메크(1831-1894)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친구들 등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그는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생전 그는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바이올린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떨쳤고, 그에 걸맞(?)게 그의 바이올린 곡들은 대부분 그 난이도로 악명이 높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1856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초연은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루어졌고, 1879년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자 역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연주 :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98. 지휘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Franz Lehar (1870-1948)

Waltz <Gold und Silber> Op. 79


 - 프란츠 레하르는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헝가리계 작곡가로, 헝가리식 이름은 '레하르 페렌츠(Lehár Ferenc)'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코마롬에서 출생하였고, 헝가리계인 아버지는 군악대에서 지휘자로 근무했습니다. 프라하 음악원에서 안토닌 베네비츠(1833-1926)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이 때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만나 작곡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받았지만 당시 음악원 규정상 연주와 작곡을 함께 전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규정에 따르면서 작곡을 독학해야 했습니다.


 - 1888년 음악원 졸업 후 레하르는 아버지의 악단에 부지휘자로 합류하여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년 후에는 최연소로 정식 밴드마스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육군 쪽에서 활동하던 그는 중간에 잠시 해군으로 옮겼고, 이 때 첫 번째 오페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육군으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 1905년 초연한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유쾌한 미망인)>가 큰 호평을 받으며 레하르는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그는 비엔나로 거처를 옮겼고, 오페레타 작곡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레하르는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비엔나의 오페레타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고, 큰 명성과 그에 걸맞는 부를 함께 거머쥐게 됩니다. 이 시기 그는 오페레타 뿐 아니라 왈츠, 교향곡 등의 기악곡 또한 다수 작곡하였습니다.


 - 승승장구하던 레하르도 1930~40년대를 풍미한 나치의 격동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출신이 헝가리계였고 심지어 부인은 개종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의 핍박을 받을 처지였지만, 히틀러가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ㅡㅡ; 그는 일단 나치의 탄압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치에 협력하는 모습은 보여야 했기 때문에 그는 히틀러 50세 생일 기념 음악회를 주도한다거나 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 그 와중에 그는 자기 주변에 있던 유대계 인사들을 인종청소로부터 보호하고자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치의 인종청소가 강화되자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 취리히에 머물게 됩니다. 그는 금방 비엔나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지만 망명지에서 자기 아내가 사망하고 유대계 친구들이 학살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 비엔나 복귀를 포기하고 종전 후 잘츠부르크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 <금과 은>은 1902년 작곡되었으며, 메테르니히 공주가 주최한 '금과 은' 무도회의 음악으로 위촉받아 만들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일족의 전통을 따르라는 주문에 레하르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더해 작품을 썼고, 많은 인기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말년의 레하르는 "새로 왈츠를 쓰게 된다면 '금과 은' 정도는 어림도 없으니 <우라늄과 원자폭탄> 이라고 이름을 붙여 볼까?"라는 개드립 농담을 한 적이 있다는군요.



Ivo Josipović (1957-)

<Samba da Camera>



 - 요시포비치는 크로아티아의 작곡가, 법학자 겸 정치인ㅡㅡ;입니다. 작곡가나 법학자로서의 업적도 볼만하지만, 특히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의 중요 인물이었고, 현재는 '전진 크로아티아'당을 이끌고 있습니다.


 - 요시포비치는 1957년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現 크로아티아 수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축구선수로 활동한 적도 있다고 하며,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자그레브의 2차 음악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함께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였는데, 그와 함께 자그레브 음악학원에도 등록하여 음악 수업을 계속 받았습니다. 진정한 복수전공


 - 그는 1985년 형법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1994년에는 범죄과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84년부터는 모교에서 강사로 활동을 시작, 이후 법학부 교수로 선임되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ㅡㅡ; 1983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작곡한 <삼바 다 카메라>가 1985년 유럽방송연합 상을 수상하면서 작곡가로서도 인정받게 됩니다.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자그레브 음악학교의 강사 또한 역임하였습니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 당신은


 - 정치 활동은 1980년 크로아티아 공산당(당시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자치공화국'이었음을 감안합시다)에 입당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990년 전후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시기에 요시포비치는 공산당을 '사회민주당'으로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사회민주당의 첫 번째 법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 그는 너무 바빠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작곡가와 법학자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였습니다.


 - 이후 2003년 그는 당시 총리였던 이비차 라찬(1944-2007)의 권유로 정계에 복귀하였고, 국회의원과 사회민주당 부대표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2010년에는 사회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 요시포비치는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사이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사과하였고, 집권 초기에는 지지율 88%를 찍는 등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집권 내내 계속된 경제난 등 악재가 겹쳐 집권 말기에는 인기를 상당히 잃었고, 2014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크로아티아 민주동맹 소속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1968-)에게 근소하게 패배, 대통령 임기를 마쳤습니다. 퇴임 이후에는 '전진 크로아티아'라는 중도좌파 성향의 당을 창당하고, 자유인민당과 연합하여 총선에 후보도 내 봤지만 역시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에 패배하였습니다.이후로는 전진 크로아티아 당 대표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여담으로 그는 대통령 재직 말기인 2014년 태권도 명예9단을 수여받은 적도 있습니다. ㅡㅡ; 이는 요시포비치 자신이 태권도를 잘 해서라기보다, 크로아티아가 동유럽에서 태권도 인기가 가장 높은 편이고 세계랭킹 상위권 선수들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순남 (1917-1983?)

<산유화>



 - 이번에는 한국인 작곡가를 다루어 보겠습니다(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히려 한국인 작곡가들을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순남은 다수의 가곡과 한국 최초의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를 쓴 대작곡가이지만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에 북한을 선택하고, 북한에서도 정치적 숙청과 복권을 거듭하며 그 존재 자체가 묻혀 버린 비운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 김순남은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낙원상가?? 어릴 적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며, 1932년 경성사범학교(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 연주나 취주악단 지휘 등 음악적 활동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졸업 후 몇 년간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3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다음 해 도쿄 고등음악학원 작곡부에 입학하였습니다.


 - 도쿄에서 김순남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하라 타로(1904-1988)가 있는데,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음악가로 김순남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재학 중 그는 일본 현대작곡가연맹의 창작 발표회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출품하였는데, 당시 출품작인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작법을 사용하여 보수적인 일본 음악계에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 1942년 귀국 후 김순남은 '조선음악협회'에 음악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관제 단체였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좌익 성향의 비밀 조직인 '성연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니, 그가 딱히 친일부역자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해방 전까지 그는 버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첨단을 달리는 작곡가들의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꽤 전위적인 곡을 썼습니다.


 -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고 그의 작품도 사회 참여적인 색채를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해방의 노래> <농민가> 등 소위 '해방가요'를 다수 작곡하여 인기를 끌었고, '조선음악건설본부'에 가입하였지만 이 단체가 좌익-우익 및 친일-민족 대립으로 쪼개진 후에는 좌익계와 민족계가 합세한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 이 시기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1번, 합창 교향곡 <태양 없는 땅> 등 본격적인 관현악곡 또한 작곡하였는데, 각각 한국 최초의 작품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보는 전하지 않습니다. 김순남은 좌익 인사였음에도 그의 재능은 미군정 쪽에서 주목할 정도였고, 문화 담당 장교인 엘리 하이모비츠는 그에게 미국 유학을 주선하려고도 했지만 본인과 미군정 양쪽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이 시작되자, 김순남은 아내와 외동딸을 놔둔 채 다른 인사들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작곡 활동도 계속 이어갔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오페라 <인민유격대>는 한반도에서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입니다.


 -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 김순남은 소련으로 유학하여,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을 사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전 직후인 1953년 그는 돌연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고, 주변인들은 여러 유학생 중 그 혼자만 소환되는 것을 의심하였지만 본인은 별 생각 없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옥죄는 고난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 그가 소환된 것은 실제로 그가 남로당 쪽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박헌영과 친분이 두터웠음), 남로당을 숙청하면서 그를 엮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강한 사상 비판을 당하고, 1958년에는 창작에 관한 권한을 모두 박탈당하고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의 주물공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64년이 되어서야 다시 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창작 권리를 회복한 김순남은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뒤 폐결핵이 발병하면서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생활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투병이 길어지면서 그는 북한 사회에서 조금씩 잊혀졌고, 결국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1983년 경 신포에서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는 남한에서는 소위 빨갱이였고, 북한에서는 숙청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커녕 존재 자체가 오랫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1980년대 말 좌익 음악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조금씩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남한에 남은 외동딸 김세원(1945-, 성우로 활동)씨가 자료를 수집하여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김희조(1920-2001), 백남준 등의 거장들도 김순남에게서 음악을 배우거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 하지만 교향곡과 협주곡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면이 있어서 김순남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나마 현재 알려진 것들은 주로 가곡과 해방가요들이며, 그 중에서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산유화>의 경우 조수미 등의 유명 성악가들이 녹음한 바 있어 일반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유명합니다.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Stabat Mater>



 -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바이올린 및 오르간 연주자입니다. 바로크-고전파 전환기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명곡들을 남겼지만, 아주 젊은 나이(26세!)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드라기'인데, 조상의 출신지인 페르골라에서 따와서 '페르골레시'로 불린 게 굳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 페르골레시는 중부 이탈리아의 제시(안코나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가난했고 한쪽 다리를 저는 등 건강도 좋지 않았다는데,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지역 영주의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25년 그는 나폴리로 유학하여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치스코 페오(1691-1761)를 사사하였습니다.


 - 1731년 음악원을 졸업한 페르골레시는 작곡가로 활동하여 일찍부터 많은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나폴리 귀족 악단에 들어가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은 1733년 발표한 단막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였는데, 본래 다른 오페라의 일부였던 이 작품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기틀을 잡은 명작으로 평가됩니다.


 - 오페라의 성공을 바탕으로 1734년에는 나폴리 예배당에 악장 대리로 취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폐결핵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고, 이듬해부터 병이 크게 악화되어 의사의 권유에 따라 1736년 2월 타지로 요양을 떠났지만 차도가 없이 한 달 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사망한 해에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이 <스타바트 마테르>(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애가(哀歌))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웅장함보다는 섬세함, 그리고 풍부한 멜로디와 화성이 장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는 죽은 지도 20여 년이나 지난 후 난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으니, 대표작 <마님이 된 하녀>가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을 때 장 자크 루소(1712-1778)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 - 이탈리아 오페라를 놓고 벌어진 소위 '부퐁 논쟁'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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