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는 6년 반 동안 사용한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고급기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RAM을 추가로 다는 선택을 한 덕분에(당시에 8GB면 작은 건 아니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어떻게든 써 오기는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배그도 최저사양으로 간신히 돌아가는 너무나 느려진 컴퓨터에 속앓이를 하다가, 부품을 하나하나 모아서라도 어떻게든 컴퓨터를 바꾸어야겠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만 컴퓨터를 새로 사려니 내년까지는 공부에 매진해야 하니 굳이 많은 돈 들여서 새 컴퓨터를 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몇몇 중요 부품만 구해서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결정. 컴알못이라 이리저리 알아보고, D모 가격비교 사이트(?)를 열심히 눈팅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목록이 나왔습니다.

 

 1. CPU : Intel Core i3-3220(아이비브릿지) → Intel Core i7-3770(아이비브릿지)

 CPU는 고유 소켓 규격이 있어서, 이게 맞지 않으면 메인보드까지 통째로 갈아야 한다네요. 거기까지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서 같은 소켓 내에서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합니다. 뭐 1년 반만 쓸 것이고, 나름 2코어 4스레드 → 4코어 8스레드가 되는 것이니 빨라지기는 할 겁니다. 해당 세대 CPU는 이제 신품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중고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거 중고가격 방어가 너무 잘 된다는 이야기가......

 

 2. 그래픽카드 : NVIDIA GeForce GT 630 → NVIDIA GeForce GT 1030

 6년 전의 보급형에서 현재의 보급형으로? 사실 저거 주문해 놓고 돈 좀 더 쓸까 순간 후회하긴 했는데, 그래픽카드가 쓸데없이 좋으면 공부 안 하고 게임이나 할 테니까 ㅡㅡ; 라는 기적의 논리로 자기위안을 삼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6년 된 고물보다야 확연히 낫지 않겠어요?

 

 3. RAM : DDR3 4GB×2 → DDR3 8GB×2

 처음에는 8GB짜리 하나만 사서 추가로 끼워 쓸까 했는데, 알고 보니 메인보드에 RAM 슬롯이 2개밖에 없네요 ㅡㅡ; 위 두 개만으로 돈이 은근히 많이 빠져서 일단 이 녀석은 조금 미루기로. DDR3 RAM은 16GB 용량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8GB 2개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정하고 주문을 합니다. 하필이면 연휴 기간과 겹쳐서 며칠 지나서야 택배가 옵니다.

 

 흐음 저 위용 넘치는 자태......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습니다. 컴퓨터 회로는 정전기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별로 조심하지 않긴 했지만 넘어가기로 ㅡㅡ;

이렇게 생겼습니다. 중고 CPU는 은박지에 싸여 배달이 됐는데, 저렇게 하면 정전기가 겉의 은박지에만 흘러서 부품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하네요.

 

 자 이제 컴퓨터의 전원을 분해하고 배를 쨉니다(?).

 오우 저 먼지 ㅡㅡ; 일단 그래픽카드를 먼저 빼고, 그 다음 CPU로 향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CPU에는 쿨러가 달려 있지요.

 

 조심스럽게 쿨러를 뺍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꼽혀 있는지 몰라서 빼는데 고생을 좀 했습니다. ㅡㅡ; 다행히 부셔먹지는 않고...... 쿨러를 제거하니 저 자리에서 6년 반동안 수고한 CPU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쿨러와 CPU 사이에 발라 놓은 써멀구리스는 아주 말라붙었네요. ㅡㅡ; 저 녀석은 둘 사이에 열 전달을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다시 발라 줘야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제거한 쿨러는 다시 써야 하므로, 에어스프레이로 먼지를 제거해 줍니다. 웬만하면 실내에서 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ㅡㅡ;

 

 오른쪽에 고정된 레버를 살짝 빼서 돌리면 CPU를 고정시키는 덮개가 열립니다. 그러고 나서

 

 CPU를 뺍니다. 인텔 CPU는 메인보드 쪽에 핀이 있고 그 위에 CPU가 얹혀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설치할 때는 핀 위에 살짝 얹는다는 느낌으로, 뺄 때는 살짝 들어낸다는 느낌으로 하면 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위험한데 저 핀 하나라도 구부러지면 CPU가 인식이 되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 자리에 위풍당당한 i7-3770을 살짝 얹어 놓고

 

 레버와 덮개를 다시 돌려서 고정시켜 놓습니다. 다행히 핀을 구부러뜨리는 따위의 사고는 없었습니다.

 

 이제 동네 컴퓨터가게에서 바가지(?) 쓰고 구매한 써멀구리스가 나올 차례입니다. 사실 표기법상 '그리스'가 맞지만 저 유럽에 철학과 탈세(?)로 유명한 어떤 나라가 있기 때문에...... 다들 구리스라고 발음들 하시지요. 택배 기다리기 귀찮아서 동네로 갔는데 택배비 or 버스요금 감안해도 이 쪽이 더 비쌌습니다. 그냥 대전 테크노월드 가볼걸......

 

 구리스를 CPU 위에 발라 줍니다. 어차피 쿨러 설치하면 눌려 펴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양을 퍼부을 필요는 없다고 해요~

 

 쿨러를 다시 설치하면 CPU 쪽은 끝납니다. 그래픽카드는 그냥 슬롯에 잘 끼워 넣고 나사못으로 케이스에 고정시키면 되니 훨씬 쉽습니다.

 

 그리고 이제 컴퓨터의 배때지(?)를 다시 봉합합니다. 블로거도 최신 강화유리 케이스 쓰고 싶어요...... 전원과 모니터, 키보드 선을 끼우고 전원을 켭니다.

 

 ?????? 부팅이 되질 않네요. 뭐가 문제지?

 

 인터넷을 뒤져 보니 메인보드 BIOS 업데이트를 먼저 했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뭐 이렇게 복잡해...... 일단 이 컴퓨터에서 쓰는 메인보드 모델은 다음과 같습니다. ASUS니 MSI니 하는 브랜드만 알다가 그 폭스콘이 메인보드도 만들었던 건 처음 알았네요. 차피 대만회사

 다시 원래 부품들로 갈아 끼우고 BIOS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방법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무턱대고 하다 보니 어쩌다 된 것이라, 어떻게 해낸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ㅡㅡ; 아무튼 한참이 지나서야 바이오스 업데이트를 마치고 다시 아까의 순서로 부품을 갈았습니다. 여담으로 원래 CPU를 다시 설치할 때 귀찮아서(어차피 다시 뺄 거니까) 쿨러를 같이 설치하지 않았는데, 잠깐 켜 놓았을 뿐인데 CPU 온도가 95℃를 찍네요. 이래서 쿨러가 필요......

 

 다행히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부팅이 됩니다. 저 위풍당당한 모델명이 보이시나요?

 

 그리고 동봉된 CD를 넣고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설치해 주면 모두 끝납니다. RAM을 아직 바꾸지 않아서 덜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조금 빨라진 게 체감되네요.

 

 지난 6년 반동안 수고한 CPU와 그래픽카드여 이젠 안녕......

 

 '라무네'라는 음료가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의 탄산음료로, 입구가 구슬로 막혀 있는 독특한 형태의 병이 라무네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합니다. 집 앞 편의점을 가 보았다가 음료 코너에 라무네가 몇 개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호기심에 하나 구입해서 마셔 보았습니다.

 

라무네

 

 우선 라무네가 어떤 녀석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지요. 라무네라는 이름은 19세기 중반 일본의 개항기에 영국에서 유입된 레모네이드에서 유래하는데, 일본인 특유의 외래어 줄여부르기 신공(?) 때문에 그 이름이 와전되어 '라무네'가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한, 흔히 알려진 형태의 라무네가 개발되었고 1872년 공식적으로 제조 허가를 얻게 됩니다.

 

 이 시기 채택되어 라무네의 상징이 된 독특한 모습의 유리병은 코드넥 보틀(Codd-neck Bottle)이라고 하는데, 영국인 기술자 하이럼 코드(1838-1887)가 1872년 고안하여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음료수병입니다. 코드넥 보틀은 병 입구 안쪽에 작은 유리구슬이 하나 있어서 음료수 탄산의 압력으로 병 입구를 막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구슬을 힘으로 밀어넣으면 구슬을 밀어올리던 탄산이 빠져나가면서 입구가 열리고 음료수를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이 때 구슬을 밀어넣는 용도로 보통 못 형태로 된 플라스틱 조각이 하나 동봉됩니다.

 

코드넥 보틀의 유리구슬

 

 입구보다 조금 더 큰 이 구슬이 코드넥 보틀의 핵심인데, 구슬이 아예 밑으로 빠지거나 음료수를 마실 때 굴러내려와 입구를 다시 막아버리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병의 상부에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병의 한 부분이 잘록하게 좁아지는데 구슬이 거기 걸쳐져 더 밑으로 빠지지 않고, 그 위쪽에 있는 굴곡은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병을 기울일 때 구슬을 붙잡아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방지합니다.

 

 이전에는 탄산음료의 병 입구를 코르크(!!)로 막는 게 보통이었고, 당연하게도 음료수에 녹아 있던 탄산은 금새 날아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병은 한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왕관 모양의 병뚜껑이 개발되는 등 밀봉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들기도 복잡하고 마시기도 상대적으로 불편한 코드넥 보틀은 자연스럽게 도태됩니다. 다만 라무네의 경우 병 자체가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라무네는 백수십 년의 역사를 거치며 일본을 상징하는 음료의 하나로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 장병들은 함정 내에 화재진압용으로 설치된 이산화탄소 발생 장치를 이용,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하여 라무네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코카콜라 등 다양한 음료수들이 인기를 끌게 되지만 라무네는 다분히 서민적인 음료의 이미지로 남아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고, 1977년에는 일본의 중소기업 관련 법률의 대상이 되어 중소기업에서만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여러 중소기업에서 라무네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식 음료'의 대표처럼 인식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서민적인 이미지와 나이 든 사람들이 즐겨 마신다는 이미지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즐겨 마시는 정도는 아니라고도 합니다. 라무네 특유의 병 여는 방법도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네요. 그래도 요즘에는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로 수출까지 하고 있는데, 덕분에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블로거 역시 일본산 라무네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입한 라무네를 마셔 보겠습니다. 병의 위쪽이 포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구슬을 밀어넣기 위한 플라스틱 못이 있습니다.

 

 뜯는 선을 따라 포장을 잘 뜯으면

 

플라스틱 못과 병의 입구가 드러납니다. 보시다시피 병 입구는 플라스틱으로 덮여 있고, 구슬이 거기를 막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 부분도 그냥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는데, 요즘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놓아 나중에 구슬을 빼거나 병을 재활용할 때 편리하다는군요.

 

 플라스틱 못을 가지고 구슬을 밀어넣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힘이 좀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단단히 막혀 있지 않으면 밀봉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손가락 한두 개로 눌러서는 절대 입구를 열 수가 없을 겁니다. ㅡㅡ; 아예 병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도 손바닥으로 못을 강하게 누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강하게 주면 구슬이 빠지면서 병이 열립니다.

 

 이제 구슬이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적당히 주의하면서 음료수를 마시면 됩니다. 라무네의 맛은 사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사이다의 맛과 별 차이가 없고, 그냥 라무네 자체가 일종의 사이다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일본에는 오리지날인 소다맛 뿐 아니라 와사비맛, 카레맛 등 온갖 해괴한 맛의 라무네가 있다는군요. ㅡㅡ;

 

 저 구슬은 마실 때마다 항상 신경쓰입니다. 생각 없이 그냥 마시면 구슬이 입구를 다시 막아 음료수가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병을 너무 기울이지 않고 한쪽에 있는 홈에 구슬이 걸리게 만드는 등 나름의 스킬을 발휘해야 합니다. 코드넥 보틀이 왜 도태되었는지 납득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라무네 한 병이 뚝딱 비워졌습니다.

 

 라무네를 맛으로 먹기에는 바로 곁에서 저렴하게 판매되는 사이다와 별 차이가 없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음료도 종류가 수두룩하니 딱히 매력이 있는 음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디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의 병과, 일본의 상징 음료라는 역사적(?) 특이성을 생각하면 한 번쯤 구입해 마셔 봐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블로거가 마신 라무네 병에는 "일본에서 시작되어 세계인이 사랑하는 라무네"라고 적혀 있는데, 일본인의 생활사(史)를 접해본다 생각하고 한 병 마셔보는 건 어떨까요?

 


 최근 네이버 블로그에서 대규모 개편을 예고한 것을 계기로 한동안 잘 묻어두었던 고민 - 블로그 플랫폼을 옮겨볼까 하는 생각이 또 튀어나왔습니다. 이런저런 장점에 이끌려 티스토리에 정착하고, 이후 몇 년간 글을 쌓아올려 이제는 그나마 하루에 몇십 명은 안정적으로 방문하는 블로그가 되었습니다(소위 파워블로그 수준이야 아니지만 어차피 그게 목적은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지요). 하지만 잊을 만하면 다른 쪽으로 이전해볼까 여러 번 고민한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네이버니 워드프레스니 하는 곳들로 이전해 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항상 결론은 티스토리 복귀였습니다(이번에도 그럴 것 같고요).


 블로거의 이런 고민이 더 심해진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카카오가 본격적으로 다음의 옛 서비스들을 숙청(?)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대로 잘 나가던 다음 TV팟 같은 서비스들도 날아가는 마당에, 벌써 하향세를 탄 지 오래인 블로그 서비스가 무사할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다음-카카오 병합 이후 카카오의 블로그 혹은 그와 유사한 서비스는 다음 블로그, 티스토리,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신규 런칭한 브런치까지 4개나 되니 카카오 입장에서 어떻게든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거기에 티스토리 운영상의 몇몇 논란 또한 블로거를 비롯한 티스토리 이용자들의 우려를 키우는 데 일조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16년 말 전격 단행된 백업서비스 종료입니다. [당시 블로거의 글] 티스토리가 가진 최대 장점 중 하나로 꼽히는 기능이 사라지는 것이라 논란과 반발이 상당했지요. 이미 당시부터 이 조치가 티스토리 서비스 종료의 시발점이냐, 타 플랫폼으로 이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티스토리 블로그를 백업해서 워드프레스 쪽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냐, 공지된 것처럼 단순히 의미 없어진 기능을 폐지한 것이냐 등등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사실상 티스토리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것이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의식해서였는지 2017년에 티스토리 측에서는 관리페이지를 일부 개편하고 플래시 제거 등 대규모 개편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였지만, 이후 1년간 딱히 추가로 바뀐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주요 경쟁상대라기엔 체급 차이가인 네이버 블로그가 대규모 개편을 예고하면서 티스토리를 검색에서 밀어내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이는 등, 티스토리 이용자들의 불만과 걱정만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사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랬다고 이런 상황이 싫으면 그냥 블로그를 옮기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블로거 역시 이런저런 플랫폼을 찾아보고 실제로 옮기려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도로 티스토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왜였을까요? 아마 가장 큰 건 지금껏 블로그에 쓴 글들을 옮길 자신이 없어서였을 겁니다. 글 수가 많지 않던 과거에도 글을 일일이 옮기는 건 그야말로 다이나믹 노동이고(네이버 블로그의 경우), 백업 기능이 있던 시절에도 워드프레스 쪽으로 글들을 옮기려면 이런저런 귀찮은 작업들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워드프레스는 만드는 것 자체가 일이고 이젠 백업 기능도 어차피 사라졌기 때문에 ㅡㅡ;


 둘째로는 그동안 쌓아온 방문자 수와 구글 애드센스 수입을 포기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하루 50~100명이라는 수치가 물론 파워블로거들에 비하면 하꼬방(?) 수준이지만 내 생각을 소소하게 표현할 창구로서는 충분하지요. 그리고 애드센스 수익이야 별 것이 없지만, 3년 이상 광고를 달아두니 그래도 이제 60$ 이상의 수익이 모였습니다. 이대로 한 2년쯤 더 지나면 누적 수익이 100$를 돌파하여 드디어 돈을 인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ㅡㅡ; 블로그를 옮기면 당연히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요. 특히 워드프레스 쪽으로 간다면 말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플랫폼을 선택하지 못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블로거가 항상 고민하는 네이버 블로그는 다른 건 몰라도 방문자를 유치하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블로거는 처음 네이버로 가려고 했을 때 글 몇 개를 올리니 갑자기 방문자가 하루 500명 이상 몰려오는 경험도 해 봤습니다. 물론 블로그를 만들고 바로 밀어버리기를 반복하니 지금은 글을 써도 그렇게 아니 되지만). 구글 애드센스를 쓸 수는 없지만 어차피 수익을 목표로 운영하는 게 아니니 아쉽지만 상관 없고요.


 그런데 블로거가 느끼는 네이버 블로그의 문제라면 역시 HTML로 블로그를 꾸밀 수 없고(물론 블로거같은 허접 유저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불편한 지점은 있더군요), 위에 언급한 글 옮기기의 불편함은 기본에, 무엇보다 서비스의 미래에 대하여 티스토리와 유사한 우려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네이버는 그나마 최근 개편 예고를 하면서 우려를 불식시키고는 있는데, 그 이전만 해도 네이버 포스트를 밀어주고 블로그는 버린다느니 둘을 합병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그러고 보니 네이버 포스트와 브런치의 포지션이 좀 비슷하기도 하군요. 서비스의 성격은 좀 다르겠지만).


 워드프레스 쪽은 이제는 거의 포기. 직접 원하는 블로그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큰 매력이지만 그 만드는 과정이 (블로거같은 허접들에게는) 복잡하고 한국 스타일에 익숙한 형태의 스킨을 찾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방문자를 끌어모으는 게 너무 어려워서 결국 gg 쳤습니다. 거기에 웹호스팅 서비스를 따로 찾아봐야 하는 것도 문제였고 말입니다. 이글루스는? 글쎄, 딱히 티스토리와 견주어서 뚜렷한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텍스트큐브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쪽은 앞으로 개발이 이어질지 어떨지도 불투명하니 ㅡㅡ;


 자아 결국 이리하여 블로거는 티스토리를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변수가 없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쭉 이어질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 오랫동안 방치플레이(?)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티스토리는 나름대로 매력적인 플랫폼이라는 게 블로거의 생각입니다. 처음에 만들기를 상당히 잘 만든 것도 있고, 초대장 시스템으로 진입문턱을 적당히 둔 것도 돌아보면 괜찮은 운영방식이었고 말입니다(네이버 블로그처럼 홍보에 미친 돈벌이용 블로그로 헬게이트가 열리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불만이나 걱정이 생기면 블로그를 옮겨 볼까 하다가도, 결국 포기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으니 언젠가는 티스토리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티스토리가 사라진다든지), 아직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카카오가 여러 개 난립한 자사의 블로그 서비스를 정리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분들이 단체로 정신나가지 않는 이상 트래픽 총량 한국 10위권에 십수 년간 방대한 콘텐츠를 쌓아올린 티스토리를 어떤 식으로든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고요. 블로거의 입장에서는 그냥 이제 제발 걱정이나 않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제는 확실히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블로거는 몇 달 전 이사를 오면서 수십 년간 모은 테이프들을 다 버렸습니다. 초창기 스타리그 결승전 녹화본이 많았는데), 10~20여 년 전에는 대부분의 집에 비디오테이프 기계가 하나씩은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활용한 홈씨어터와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가 없던 시절 비디오테이프는 집에서 영화를 보게 하고, 필요한 기록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것]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디오테이프는 단 한 가지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연하게도) 역사상 비디오테이프의 규격은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이들 사이의 경쟁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것이 우리 기억에 남은 형태, 즉 VHS 규격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비디오테이프의 규격을 둘러싼 전쟁은 이후에 계속되는 IT업계의 '표준전쟁'의 서막을 연 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 베타맥스 : 먼저 나왔고, 크기가 작으며, 화질도 좋았다


 - VHS 규격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76년이었지만, 이미 그 전에 등장한 비디오테이프 규격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베타맥스(이하 베타)'입니다. 베타는 1년 전인 1975년 소니(네 바로 그 소니)가 개발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막 태동하던 가정용 비디오 시장을 선점하여 표준으로 자리잡고자 하였습니다.


[베타맥스 테이프]


 - 그런데 일은 소니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소니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규격을 개발한 업체들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JVC에서 VHS를 1년 후에 내놓았고, 조금 지난 1980년 필립스와 그룬디히가 공동으로 '비디오2000'이라는 규격을 내놓는 등 다수 기업들이 가정용 비디오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가운데 비디오2000은 여러 모로 품질이 떨어졌고 인기도 없어서 얼마 뒤 시장에서 퇴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은 VHS와 베타의 2파전이 되었습니다.


[VHS 테이프]


 - 기술력의 소니는 당연히 베타가 VHS를 처바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베타는 VHS보다 1년 먼저 나왔고(시장 선점), 테이프의 크기가 작아 기기를 소형화하는 데도 유리했으며(1980~90년대 비디오를 보신 분이라면 크기가 의외로 컸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심지어 화질도 VHS보다 뛰어났거든요. 품질과 시장 선점을 모두 충족한 베타의 승리가 예상될 법도 합니다. 그런데......




2. VHS : 후발주자에 화질도 구리다. 하지만!


[캠코더 비교. 베타 vs. VHS]


 - VHS는 여러 모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테이프도 쓸데없이 컸고, 화질도 (큰 차이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베타보다 구렸지요. 거기에 후발주자라서 베타를 쫓아가야 하는 위치였던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VHS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하지만 결정적인 강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재생 시간이었습니다.


 - 가장 많이 쓰인 규격을 기준으로, VHS의 재생 시간은 2시간으로 베타의 1시간30분보다 길었습니다. 사실 25% 차이라면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차이로 보이는데, 이것이 매우 크게 작용했던 것은 영화의 재생 시간이 일반적으로 2시간 남짓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VHS 테이프는 웬만한 영화를 테이프 1장으로 때울 수 있었는데, 베타는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간단한 비교로, 베타 규격으로는 이보다 1.5~2배 많은 테이프가 필요합니다. 출처]


 - 이 작다면 작은 차이가 시청자의 선택을 갈랐으니, 대부분의 시청자는 (화질을 약간 희생하더라도) 영화 중간에 테이프를 갈아야 하는 귀찮음을 최소화할 수 있는 VHS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어느 정도 점유율을 유지하던 베타는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점유율이 한 자리 수까지 떨어지는 등 급속히 시장에서 밀려났습니다. 소니는 재생 시간을 두 배로 늘린 Beta-II를 뒤늦게 내놓았지만, 이쪽은 베타의 장점인 화질을 희생한 것이고 ㅡㅡ; 대세에 영향을 주지도 못합니다.




3. 사실 숨겨진 요소는 이것이었다?


 - 한편 베타가 경쟁에서 밀려난 데는 소니의 폐쇄적 라이센스 정책이 한몫 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일단 소니는 베타 호환 기기에 대한 라이센스를 굉장히 까다롭게 관리했기 때문에, 베타 관련 기기의 가격이 VHS 쪽보다 상당히 비싸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초기부터 베타는 고급 소비자를 중심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것 자체가 나쁠 건 없지만, 문제는 이것이 대중화에 장애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 뿐만 아니라 소니는 테이프에 담기는 영상에 대하여도 매우 까다로운 규제를 가했습니다. 이를테면 베타 규격의 비디오 복제 기기를 이용하려면 영상에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이것 또한 나쁠 건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대부분의 컨텐츠 제작자들이 베타에 'ㅗ'를 날리고 규제가 별로 없었던 VHS로 몰리게 만들었습니다.


[VHS : 야 너네는 이런 거 없지?ㅋㅋㅋㅋㅋㅋㅋㅋ]


 - 결정적으로 그 컨텐츠 제작자들 중에는 포르노(네 그 포르노 말입니다) 업계가 있었는데, 그 자체로 선정적인 ㅡㅡ; 포르노 비디오가 베타로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이들은 전부 VHS로 갔고 포르노 비디오 시장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사람들 역시 VHS로 몰리게 된 것입니다. 이쯤 되면 베타는 화질만 좋지 볼 영화가 없는 규격이 되었고, 당연히 시청자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4. 결말


 - 결국 1988년 소니는 VHS 규격 기기의 생산을 시작함으로써 이 경쟁에서 사실상 GG를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소비자와 기업체가 몰린 VHS는 이후 기술개발을 통하여 고속 영상검색, Hi-Fi 스테레오 음향 등의 기능을 추가, 기능에서까지 베타를 앞질러 버립니다. 우습게도 소니 또한 VHS 기술 개발에 이런저런 공헌을 했습니다. ㅡㅡ;


 - 물론 소니가 베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고, 베타 규격의 비디오는 이후로도 계속 생산되어 여러 차례 개량도 되고(이를테면 베타캠) 일본이나 남아메리카 쪽에서는 어느 정도 점유율을 늦게까지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방송국의 전문 장비에는 베타 규격이 VHS를 누르고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잡기도 했는데, TV 프로그램의 재생 시간이 보통 1시간30분 이내로 끊어져서 베타의 재생시간이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방송용 베타캠. 출처]


 - 아무튼 베타는 그렇게 틈새시장용으로 간신히 살아남다가 2002년 레코더가 생산 중단, 2015년 테이프가 생산 중단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생각해 보면 의외로 최근까지 생산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VHS는 수십 년간 시장의 지배자로 군림하다가 1990년대 말 DVD라는 새 시대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쇠퇴, 2016년 일본의 마지막 생산업체인 후나이전기가 레코더 생산을 중단하는 등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http://m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200506N038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11/0200000000AKR20151111007700091.HTML?input=1195m

http://news.joins.com/article/20343447



4. 한국의 4대 PC통신망


 - 케텔-하이텔의 성공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PC통신망이 여럿 등장하여 시대를 풍미하였는데, 이 중 가장 큰 규모의 4개 통신망을 일반적으로 '4대 통신망(유니텔을 빼고 3대 통신망으로 부르기도 함)'으로 묶어 부릅니다. 당시 한국의 PC통신 세계를 주도한 게 이 네 곳이었기 때문에, PC통신에 대해 논할 때는 이들만 언급해도 되겠지요.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이텔 자료광장]


 - '최초 그리고 최대' 하이텔 : 앞서 서술했듯 케텔을 전신으로 하는 하이텔은 시장을 선점한데다 한국통신이라는 거대한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시종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이텔에서는 미니텔과 비슷하게 하이텔 접속만 가능한 단말기(2400bps 모뎀을 사용)를 무상 대여하는 정책으로 이용자를 적극 유치하였는데, 이걸 또 제대로 회수하지 않아서 아직 단말기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군요. ㅡㅡ;(블로거도 국딩(초딩) 시절 친구 집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 규모가 가장 큰 만큼 이용자의 커뮤니티(채팅, 게시판, 동호회)도 가장 활발하게 돌아갔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가장 컸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만개한 여러 문화컨텐츠가 PC통신, 그 중에서도 하이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의 시대를 열어젖힌 곳도 하이텔이었고(이우혁, 이영도 등), 게임동호회 개오동('개털 오락 동호회'의 약자)은 초창기 프로게이머의 산실 역할을 했습니다. 안철수씨도 하이텔 유저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최초의 통신망이라는 점 때문에 하이텔의 헤비 유저 중에는 PC통신 경력이 오래된, 비교적 나이 많은 유저가 많은 편이었습니다(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30대 중반 이상은 별로 없었다고 보아야). 이렇다 보니 하이텔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동시기 다른 통신망과 비교해도 비교적 차분하고 중후한 편이었다고 하는군요.


서비스 시작 : 1988년(케텔)

전용 전화번호 : 01410, 01411, 01412, 01432



[천리안 접속화면. <응답하라 1988>에서 살짝 보신 적이 있다면 바로 그 화면입니다]


 - '부르주아 통신망' 천리안 : 한국 최초로 비디오텍스 서비스를 운영한 데이콤(한국데이타통신)은 1985년 자사의 서비스에 '천리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후 데이콤은 여러 시험적인 통신 서비스에 이 이름을 붙여가며 본격적인 서비스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1989년부터 시작된 단말기 보급 사업 이후, 1990년에는 전국으로 서비스를 확대하여 본격적인 PC통신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 그런데 천리안은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한국통신의 전화망을 이용할 수 없었던데다 독과점의 횡포 단말기 및 서비스 이용료가 워낙 비싸서 사용자들이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접근성 문제는 하이텔과 데이콤이 전화망 사용 관련 협약을 맺고, 데이콤 또한 자체적으로 고속 통신망(아 물론 현재의 초고속인터넷을 생각하시면 곤란)을 적극 확충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습니다.


 - 이러한 노력의 결과 천리안은 1990년대 중반쯤에는 하이텔 못지 않은 규모를 가진 대형 통신망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다만 천리안의 비싼 요금제는 여전했고(오랫동안 종량제(물론 전화요금 별도)로 과금하다가 막판에야 정액제 도입),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의 통신망'이란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커뮤니티에 대한 관리가 허술한 편이었고(동호회 설립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소규모 동호회가 난립한다든지), 그래서 커뮤니티가 상당히 지저분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서비스 시작 : 1990년(전국 서비스 시작)

전용 전화번호 : 01420, 01421



[프로게이머의 산실이기도 했던 나우누리 나모모(나우누리 모뎀플레이 모임)]


 - 'Young World' 나우누리 : 나우콤(現 아프리카TV)의 통신망으로, 대표 문용식(1959-)씨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으로 유명합니다. 나우누리는 초기에는 하이텔 전용번호(01410, 01411)나 일반 전화번호와 동일한 자체 접속번호를 써야 하고, 속도 또한 지나칠 정도로 느려 이용자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말에 가서야 01443이라는 전용 번호가 부여되어 어느 정도 문제가 해소됩니다.


 - 그래도 PC통신이 폭발적 성장을 하던 시대에 적절히 등장한지라, 나우누리 또한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하이텔과 천리안에 비해 비교적 이용자의 연령대가 적은 편이었고, (모기업 대표의 성향이 성향이라 그런지) 한총련 등의 운동 단체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그래서 한총련 사태 때 나우콤 본사가 압수수색을 당한 적도 있다고).


 - 나우누리는 특이하게 다른 통신망이 몰락하는 시점에서도 상당 기간 강고한 커뮤니티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항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위 '나우폐인'으로 불린 이들은 '햏자'로 대표되는 초창기 디시인사이드와 함께 한국의 온라인 세계를 양분하였습니다. 비교적 후발주자임에도,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하이텔 다음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 시작 : 1994년

전용 전화번호 : 01443(1990년대 말 개통)



[유니윈 공개자료실]


 - '무서운 후발주자' 유니텔 : 1990년대 초 PC통신이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자, 삼성SDS에서 뒤늦게 뛰어들어 개설한 통신망입니다. 역시 삼성의 자본과 기술력이 들어가니, 4대 통신망 중 가장 후발주자였음에도 상당히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 <접속>에서 유니텔 채팅 서비스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고, 만13세 이하 초등학생에게 이용료를 받지 않는(물론 전화요금 별도 ㅡㅡ;) 파격적인 정책이 겹치며 이용자가 단기간에 급증하였습니다.


 - 특이점으로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이야기'나 '새롬 데이터맨' 등의 텍스트 기반 프로그램이 아닌, GUI 기반의 전용 프로그램 '유니윈'으로 접속하도록 (사실상) 강제했다는 게 있습니다(물론 이야기 등으로도 접속은 가능한데, 꽤 많은 기능을 사용할 수 없었음). 이는 다른 통신망과의 확실한 차별점이 되어 오랫동안 유니텔의 정체성으로 기능했습니다(다른 통신망도 전용 프로그램이 없었던 건 아닌데, 유니텔에 비해서는 확실히 기능이 떨어졌고 일반화되지도 못했음).


 - 무엇보다 역시 유니텔은 블로거가 이용한 통신망이었기 떄문에......ㅡㅡ; 그래서 블로거는 앞 글에 나온, 텍스트 기반 접속프로그램을 사용해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유니텔은 유니윈만 쓰면 됐으니까요. 이러한 바탕 때문에 유니텔은 다른 통신망이 하지 못한 많은 서비스를 할 수 있었는데, 아바타 기반으로 돌아가는 '유니챗'이라든지 일종의 미니홈피와 유사한 서비스도 있었습니다.


서비스 시작 : 1996년

전용 전화번호 : 01433



 - 이외에도 넷츠고, 신비로, 에듀넷(그나마 이쪽은 무료라는 점 때문에 4대 통신망 못지 않게 이용자가 많았음) 등 중소규모 통신망도 여럿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1990년대 후반 PC통신은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4대 통신망은 제각기 수백만 단위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PC통신의 시대는 영원할 줄 알았는데......(계속)



 - 늦은 나이에 대학엘 다시 다니다 보니 나이 어린 동기나 선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대차이를 절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최근에 한 동기와 대화를 하다가 그 친구가 '모뎀'이라는 것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놀란 경험이 있었는데요, 블로거는 PC통신의 시대를 지나온 거의 마지막 세대였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갖고 생각을 하다 보면 소싯적 PC통신 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 글은 PC통신이 세상을 풍미했던, 짧다면 짧은 시대를 추억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추억의 PC통신 접속화면. 블로거는 사실 이 화면에 대한 추억은 그닥 없는데, 그 이유는 후술]



1. PC통신 출현의 배경 : 모뎀과 전화선


 - 'PC통신'이라는 말을 넓게 해석하면 개인용 컴퓨터로 하는 모든 통신 행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터넷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이러면 이야기가 전개가 안 되니 여기서는(그리고 일반적으로도) PC통신의 정의를 '전화선 혹은 전용선을 이용하는, 국내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BBS(게시판) 등의 독자적 서비스' 정도로 한정하기로 합니다.


 - PC통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시 컴퓨터에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58년 미국 항공관제시스템 SAGE(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를 개발하던 IT 기술자들은 미국 전역에 있는 컴퓨터간 연락 기술을 개발할 필요성을 가지고 최초의 모뎀(MODEM, MOdulator-DEModulator)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컴퓨터의 디지털 데이터와 전화선의 아날로그 신호를 서로 변조하여, 전화선으로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도록 하는 장치였습니다.


[벨 103]


 - 이후 1962년 AT&T에서 개발하여 내놓은 보급형(물론 PC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니 대중에게 널리 보급했다는 의미는 아님) 모뎀인 '벨 103A'가 출시되었는데, 당시의 데이터 전송속도는 무려 300bps(초당 전송 가능한 byte)였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1초당 0.3KB입니다. ㅡㅡ; 물론 당시는 지금처럼 데이터량이 많은 시대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로도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의 시대를 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 당연히 초창기의 컴퓨터는 모두 메인프레임이었기 때문에, 컴퓨터 통신을 접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계층도 이를 사용하는 일부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일반 기업과 대학으로 컴퓨터가 확산되면서 일반인들 또한 조금씩 컴퓨터 통신을 접할 수 있게 되고, 1970년대 후반부터 PC의 시대가 열리면서 컴퓨터 통신은 일반인에게 활짝 열리게 됩니다.



2. 태동기 : BBS와 비디오텍스


 - 그럼 이렇게 컴퓨터 통신 기능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단순히 상대 컴퓨터에 접속하여 텍스트로 된 문서를 받아오거나, 혹은 상대에게 보내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후 이러한 문서 전송을 좀 더 쉽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BBS(Bulletin-Board System)입니다. 일종의 '게시판' 서비스입니다.


[세계 최대의 BBS 서비스 중 하나인 Exec-PC BBS]


 - BBS는 호스트(서비스 제공자)가 있어 게시판 공간을 제공하고, 이 호스트의 컴퓨터에 이용자가 자유롭게 접속하여 그 게시판을 사용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오늘날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게시판 기능만 뚝 떼어놓았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당연히 당시에는 전화선과 모뎀을 사용했고, 컴퓨터로 통신을 한다는 것은 상대 컴퓨터가 연결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연결하는 개념이었습니다.


 - 전화는 하나의 전화선에 하나의 통화만 가능하죠. 그런데 BBS에는 전화번호만 알고 있으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여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화선 하나만 가지고는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서비스를 돌리는 호스트는 여러 개의 전화선을 확보하여 동시에 다수의 접속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BBS 서비스는 PC의 보급과 함께 그 영역을 폭발적으로 넓혀갔고,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대략 6만 개의 사설 BBS 서비스가 성업중이었다고 합니다.


 - 다른 한 쪽에서는 '비디오텍스'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각각의 단말기가 멀리 떨어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텍스트나 그래픽으로 된 데이터를 전송받아 이용하는 형태의 서비스입니다. 1960년대 말 처음 등장한 비디오텍스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했기 때문에 시설 예약이나 쇼핑, 금융업무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렇게 컴퓨터 통신은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발전하였고, 모뎀 성능의 발전(규격화와 기술 발달로 통신 속도는 1200, 2400, 4800, 9600bps 등 계속 빨라지고 있었음)과 함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통신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PC의 대중화와 맞물려 다양한 서비스가 종합된 대규모의 컴퓨터 통신 업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좁은 의미의 'PC통신'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3. PC통신의 시대가 열리다


 - 비디오텍스 기반의 대형 PC통신 서비스는 1980년대 초를 전후하여 여러 국가에서 등장하였습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서비스는 1982년 서비스를 시작한 프랑스의 '텔레텔'(이하 '미니텔'. 보통 텔레텔 단말기의 이름을 따서 미니텔이라 호칭)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개발이 진행되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허덕이던 미니텔은, PC통신을 활용해 전화번호부 서비스를 하려는(종이책으로 인쇄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프랑스텔레콤의 지원으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전역에 무차별 보급된 미니텔 단말기]


 - 이는 영국 자본과의 합작도 있었기 때문에 서비스는 양국에서 함께 시작했는데(영국에서는 '프레스텔'이라 부름), 그리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미니텔은 단말기 무료 보급이라는 실로 파격적인 정책과(이는 나중에 한국의 하이텔에서도 비슷하게 따라합니다) 프랑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980년대 말에는 500만 대 이상의 단말기를 보급하는, 말 그대로 폭발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 역시 1980년대 초부터 PC 보급이 시작되면서 사설 BBS 중심으로 조금씩 컴퓨터 통신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1984년 한국데이터통신(데이콤의 전신)에서 전자사서함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기업 차원의 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생활정보DB 등의 서비스가 잇따라 출범했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88년 9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케텔(Ketel)을 서비스하면서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PC통신 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케텔 접속화면. 출처]


 - 케텔은 처음에는 한국데이터통신의 통신망에 얹어 가는 형태였다가 이후 자체 통신망을 갖추고, 서비스도 (모기업이 모기업이니) 뉴스 중심에서 점차 다양한 생활서비스와 게시판 등을 확충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전체 서비스가 무료였다보니 저녁시간대에는 이용자가 폭주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수익구조가 전무하다는 것이었고, 한국경제신문사는 돈 먹는 하마가 되어가던 케텔을 1991년 한국통신(現 KT) 중심 합작사에 매각해 버립니다.


 - 케텔을 인수한 한국통신은 케텔의 명칭을 코텔(KORTEL) → 하이텔로 바꾸고, 이듬해 서비스 유료화를 단행하였습니다. 당시 하이텔의 과금제(가입비 + 월정액료, 전화요금은 당연히 별도)는 당시 서비스되는 유료 PC통신의 일반적인 과금 형태였습니다.케텔을 이용하던 사용자들은 내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촛불시위(!!!)까지 벌여가며 반발했지만,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유료화를 수용했다고 하는군요.


 - 이후 데이콤의 천리안, 나우콤의 나우누리, 삼성SDS의 유니텔 등이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한국에도 PC통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PC통신의 '짧지만 강한' 전성기는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 전후까지 10여 년간 지속됩니다. (계속)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영문 위키피디아

http://www.linxus.co.kr/main/view_post.asp?post_seq_no=7027 (모뎀의 개발과 발전)

구글 도서검색

http://www.mofat.go.kr/webmodule/htsboard/template/read/hbdlegationread.jsp?typeID=15&boardid=11316&seqno=945605&c=TITLE&t=&pagenum=1&tableName=TYPE_LEGATION&pc=&dc=&wc=&lu=&vu=&iu=&du= (프랑스의 미니텔 보급)

http://www.venturesquare.net/531865 (BBS 관련)



[1908년 시카고 컵스 우승 기념 사진]



1. 대한제국이 멸망하였다가(1910) 해방되고(1945)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1948)


2. 박정희(1917-1979), 김일성(1912-1994), 김정일(1941-2011)이 태어나고 죽음


3. 제1차(1914-1918), 제2차(1937/1939-1945) 세계대전 발발


4. 소련이 건국하였다가 해체(1917-1991)


5. 유고슬라비아가 건국하였다가 해체(1918-2006)


6.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핀란드, 아일랜드가 독립


7. 아프리카의 독립국 2개 → 54개


8. 중국 대륙의 국가가 청 → 중화민국(1912) → 중화인민공화국(1949)으로 교체


9. 미국 대통령 19명(시어도어 루스벨트 ~ 버락 오바마)


10. 일본 총리대신 58명(가쓰라 다로 ~ 아베 신조)


11.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군주제가 폐지


12. 스페인의 군주제가 폐지되었다가 부활


13.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 타이 국왕이 태어나고 죽음


14. 오스만 제국 멸망(1922)


15.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채굴 시작(1938)


16. 베이브 루스가 데뷔하고 은퇴(1914-1935)


17. 뉴욕 양키스가 27회 월드시리즈 우승


18.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재입성(재키 로빈슨, 1947)


19. 미국, 여성에 투표권 부여(1920)


20. 명왕성이 발견되고(1930) 행성 목록에서 제외(2006)


21. 핼리 혜성이 2번 찾아옴(1910, 1986)


22.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발명(콜로서스, 1943)


23. 인류가 우주에 인공물을 쏘아보내고(스푸트니크 1호, 1957) 인간을 달까지 보냄(아폴로 11호, 1969)



[그리고 2016년, 그들은 108년만에 다시 우승하였습니다]



 - 경주에서 강진이 발생하여 전국이 시끄럽습니다. 이번에도 많은 곳(그것도 그 중 상당수는 언론)에서 지진의 세기를 말할 때 '규모'와 '진도'를 혼동하여 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규모'와 '진도'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이를 언급할 때는 조금 더 엄격히 분리해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가지 개념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규모 : 객관적인 지진의 Power


 - '규모'는 지진 발생 시에 방출된 힘 자체를 간단한 숫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힘의 크기 하나만을 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수치로 정리하기도 쉽죠. 지진의 규모를 표시하는 척도에는 크게 '릭터 규모('리히터 규모'라고도 하는데 '릭터'가 정확한 표현)'와 '모멘트 규모'가 있습니다.


 - 릭터 규모는 미국의 지질학자 찰스 릭터(1900-1985)가 만든 체계입니다. 릭터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100km 떨어진 지진계에 기록된 최대 진동폭을 기준으로, 진폭이 10배 커질 때마다 수치가 1씩 증가하는 척도를 개발하였습니다. 이 경우 힘의 크기는 진폭의 크기의 2/3제곱만큼 커지기 때문에, 릭터 규모 수치가 1 증가할 때마다 힘의 크기는 대략 31.6배씩, 2 증가할 때마다 대략 1000배씩 증가하게 됩니다.


 - 1930년대 개발된 릭터 규모는 파의 종류(S파냐 P파냐), 지진계와 진원 사이 거리에 따른 변수 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큰 지진에 대하여 정확한 측정이 어렵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릭터 규모 척도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졌고, 1979년 가나모리 히로오(1936-) 등 캘리포니아 공대(칼텍) 연구진에 의해 '모멘트 규모'가 새롭게 고안되었습니다.


 - 실제로 릭터 규모와 모멘트 규모는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혼용되고 있습니다. 대체로 작은 규모 지진에서는 릭터 규모가, 큰 규모의 지진에서는 모멘트 규모가 더 신뢰성이 높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미국 지질조사국의 경우 규모 3.5를 기준으로 그 이상에서는 모멘트 규모를, 그 이하에서는 릭터 규모 등 다른 척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 릭터 규모 기준으로 힘의 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0 - TNT 480g

2.0 - TNT 15kg

3.0 - TNT 480kg

4.0 - TNT 15t

5.0 - TNT 480t

6.0 - TNT 15kt

7.1 - TNT 480kt

8.0 - TNT 15Mt

9.0 - TNT 480Mt

10.0 - TNT 15Gt


 - 이번 경주 지진은 최대 규모 5.8이었으니, 대략 TNT 10kt 정도 크기가 되겠습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TNT 20kt 위력이었으니, 대략 원자폭탄 반 개 정도의 위력이었다고 보면 되겠군요.


 - 규모는 단순히 힘의 크기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소수점 이하로 표시하는 게 가능합니다. 뉴스 등에서 지진의 세기를 소수점 찍어가며 표현했을 경우(예를 들어 이번 경주 지진에서의 5.1이나 5.8같이)에는 '규모'를 쓴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규모의 경우 단순히 지진으로 방출된 힘이 얼마냐 크냐는 것만 따지므로, 이 힘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2. 진도 : 사람이 느끼는 주관적인 피해


 - '진도'라는 다른 개념이 등장합니다. 진도는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위력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진을 느끼는지, 시설이나 실내 물건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같이 사람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한 척도입니다. 이는 사람의 체험과 감각에 기초하므로, 당연히 주관적인 척도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하여는 오히려 더 자세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 진도 척도는 기본적으로 '수정 메르칼리 계급'(MM계급, 12등급)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세계 굴지의 지진대국(?) 일본에서는 이 체계를 쓰지 않고, 자체적인 척도를 따로 만들어 씁니다. 일본 기상청의 진도 계급은 예전에는 8등급(진도 0~7)이었다가, 1996년 진도 5와 6을 각각 5약-5강-6약-6강으로 세분화하여 현재는 10등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역시 잘라파고스...... 한국은 일본 기상청 계급을 사용하다가 2000년부터 MM 계급으로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 지진이 지표에 전달되는 과정에는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원은 지표면에서 얼마나 깊은 곳에 있는지(당연하게도 진원이 깊을수록 지표면은 안전해집니다), 진동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지, 땅은 단단한지 연약지반인지 등등. 그러니까 규모가 큰 지진이라도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을 수 있고, 약한 지진이라도 지표면에서는 큰 피해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진도의 경우 규모와는 별개로 발표하며, 어떤 지역의 진도가 얼마라는 것을 따로따로 나누어 발표합니다(이번 지진의 경우 경주와 대구에서 6, 부산과 울산 등지에서 5였다는군요). 진도는 정확히 1 단위로 표현되기 때문에 소수점 이하 단위가 있을 수 없고, 일반적으로는 로마 숫자로 표기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6, 5가 아니라 VI, V로 표기하는 게 맞지요.


 - MM 계급은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I. 미세한 진동. 특수한 조건에서 극히 소수 느낌.

II. 실내에서 극히 소수 느낌.

III. 실내에서 소수 느낌. 매달린 물체가 약하게 움직임.

IV. 실내에서 다수 느낌. 실외에서는 감지하지 못함.

V. 건물 전체가 흔들림. 물체의 파손, 뒤집힘, 추락. 가벼운 물체의 위치 이동.

VI. 똑바로 걷기 어려움. 약한 건물의 회벽이 떨어지거나 금이 감. 무거운 물체의 이동 또는 뒤집힘.

VII. 서 있기 곤란함. 운전 중에도 지진을 느낌. 회벽이 무너지고 느슨한 적재물과 담장이 무너짐.

VIII. 차량운전 곤란. 일부 건물 붕괴. 사면이나 지표의 균열. 탑·굴뚝 등의 구조물 붕괴.

IX. 견고한 건물의 피해가 심하거나 붕괴. 지표의 균열이 발생하고 지하 파이프관 등의 지하 시설물 파손.

X. 대다수 견고한 건물과 구조물 파괴. 지표균열, 대규모 사태, 아스팔트 균열.

XI. 철로가 심하게 휨. 구조물 거의 파괴. 지하 파이프관 작동 불가능.

XII. 지면이 파도 형태로 움직임. 물체가 공중으로 튀어오름.


 - 경주와 대구가 진도 VI(6)이라면, TV가 넘어지고 담벼락이 쓰러지는 수준의 피해소식이 대강 이해가 되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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