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대기업은 많습니다. 1990년대 재계 1위까지 다투었지만 엄청난 분식회계로 몰락한 대우그룹이나, 자기 한 몸 쓰러져 IMF를 앞당긴 한보와 기아, 분가(分家)들은 여전히 번창하지만 본가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현대그룹, 조금 앞으로 가면 부산의 상징이었지만 전두환의 장난질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도 있지요. 그밖에도 재계에서 한가닥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을 나열하자면 아마 이 지면과 글 쓸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 기업들 가운데 '율산그룹'이라는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은 1970년대 창업하여 불과 3~4년만에 재계 10위권을 넘보는 대기업으로 폭풍 성장하였지만,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너졌지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배경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무튼 잠시나마 대한민국 경제의 '주인공'이었던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간신히 기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했다가 뜬금없이 사라진, 율산그룹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선호 율산그룹 창업자 (출처 에브리뉴스)

 

1. 창업과 폭풍성장 : 겁 없는 20대 청년들의 반란

 창업주 신선호(1947-)씨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중학교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는 서울(경기고등학교)에서 다녔습니다. 아버지 신형식(1901-2003)은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엘리트로, 일제강점기 강원도 평창과 전남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며 농지개혁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녀가 9명(7남2녀)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힘입어 대부분 학자와 기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중 6남인 신선호씨 역시 경기고등학교(평준화 이전)와 서울대학교 응용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엘리트 집안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신형식의 교육방침에 따라 9남매는 모두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선호씨는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고, 처음에는 오퍼상(수출-수입업자를 연결하고 커미션을 받는 일)으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본금 100만 원을 마련한 그는 1975년 6월 자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 몇 명과 함께 '율산실업'을 창업하였습니다. '율산'이라는 이름은 자기 아버지의 호에서 따 왔는데, 이는 동시에 고향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는군요.

율산그룹 경영 당시 신선호 (출처 머니그라운드)

 율산실업의 초기 성장을 이끈 것은 중동지역에 시멘트를 수출하는 무역업이었습니다. 율산은 사업성이 낮아 다른 기업들이 꺼려하는 거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수출 선박을 직접 임대하여 운영하는 식으로 채산성을 높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항만 사정 때문에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헬리콥터와 상륙함까지 동원하여 납기일을 지켰고, 현지 바이어의 신임을 얻은 율산실업은 무역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창업 첫 해, 고작 6개월 남짓 기간 동안 율산실업은 340만 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1975년 대한민국 수출액 총계는 50억 8천만 달러), 같은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수출실적은 해마다 퀀텀(?) 점프를 하여 이듬해(1976년)에는 4,300만 달러, 1977년에는 1억 6,500만 달러를 수출하였으며,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는 율산을 제외하면 현대, 삼성, 대우 등 12개뿐이었으니, 율산은 창업 3년만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이 된 것입니다.

 작은 무역회사로 출발한 율산그룹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업 첫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해운업(금룡해운 인수)과 건설업(동원건설 인수)에도 진출하였고,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중공업, 패션업, 전자, 관광호텔 등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사업분야를 넓혀 나갔습니다. 1979년 당시 율산그룹은 14개의 계열사와 27개 해외지사, 6개의 합작법인을 운영하였으며 직원은 8,000여 명, 자본금은 100억 원에 달했습니다.

 

2. 이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우선 전제할 것은 신선호씨, 그리고 그와 학연으로 이어진 경영진이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율산그룹은 창업 직후부터 다른 기업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이를 성공함으로써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사람들은 초기부터 계속된 성공의 경험이 이들의 사기를 높이고,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무역업'을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출 중심, 아니 수출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경제개발을 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출과 관계된 일을 하는 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퍼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수출라인 하나 잡으면 이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율산그룹

 당시 수출기업이 누리는 금융 차원의 특혜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들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 은행으로 가면 이를 담보로 즉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율은 6% 정도였습니다.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요? 당시 은행 대출금리가 25% 정도였습니다. ㅡㅡ; 심지어 이 대출금은 거의 눈먼 돈에 가까워서 기업들이 실제로 이 돈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든 부동산 투기를 하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특혜지요.

 율산그룹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율산은 1977년 금룡해운을 인수하여 율산해운으로 개편하였는데, 당시 인수자금 10억 원은 서울신탁은행에서 연 9% 이자로 빌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 공식 금리는 25% 이렇게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율산그룹은 단기간에 계열사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대기업들의 사업 확장 방법이기도 했지요.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경영진의 능력이 탁월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중동지역에 시멘트 수출하기'라는 대박 아이템을 잡은 것도 그렇고, 인수한 계열사들을 단기간에 각 분야별로 최상위권 기업으로 성장시킨 업적도 부정하기 어렵지요. 이제 갓 서른이 될까 말까한 율산의 젊은 경영진은 대한민국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율산그룹은 1977년 말 서울종합터미널(現 센트럴시티) 부지를 사들이고 과천 서울대공원 설계도 맡는 등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 율산그룹 공중분해, 왜?

 1978년 여름 발생한 한 사건이 모든 파국의 시작점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해 봄 율산실업이 사우디아라비아 법률상 외국 기업이 할 수 없는 유통업에 관여했다가 적발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에 알려지며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율산그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쫓겨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입니다.

 중동, 그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율산그룹에는 매우 중요한 해외 거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율산그룹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산그룹이 이에 해명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런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기금융회사(단자사)들이 대출자금을 대거 회수하여 그룹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애초에 기업 자체가 은행 빚을 쌓아올려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금융권의 신뢰가 꺾이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거기에 1978년 8월 발표된 부동산 투기 억제조치(8·8조치)가 그룹을 한 번 더 직격하였습니다. 그룹의 주요 돈줄이던 율산건설이 새로 아파트를 분양하였는데, 이 조치 때문에 집이 잘 팔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9월쯤 되면 율산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빠져 주거래은행(서울신탁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만큼 사정이 나빠졌고, 이에 서울신탁은행을 중심으로 시중은행들이 모여 총 70억 원의 구제금융을 퍼주었지만 이 돈은 대부분 단자사 빚을 갚는 데 소진해 버렸습니다.

 해가 바뀌고 1979년 1월에는 실로 괴이한 사건이 터지는데,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을 방문하던 신선호씨가 정부기관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신선호 납치기도사건). 워낙 해괴한 일이라 그 전말을 두고 권력 개입설, 자작극설 ㅡㅡ; 등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후 정부와 금융권의 태도가 율산그룹에 비우호적으로 돌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태도 변화에 납치기도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한데, 혹자는 "신선호씨가 언론에 경위를 설명하면서 괴한들이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하였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이 비서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 추측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서석준(1938-1983)이 재계 인사들에게 "율산은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율산그룹 붕괴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판장의 신선호.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출처 해럴드포토)

 당시 정부와 금융계는 율산그룹에 대해 추가 금융지원(총 90억 원)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납치기도사건 이후 모두 무산되었고, 동앗줄이 끊어진 율산그룹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1979년 4월 3일 신선호씨가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고(율산 사건) 3일 후 율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일괄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해체 당시 율산실업의 부채비율은 2600%, 율산건설은 670%, 율산알미늄은 470%나 되었다니 정치적 개입과 무관하게 기업 자체가 이미 빚 위에 쌓은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4. 후일담

 율산그룹 회장은 공식적으로는 신선호씨가 아니라 그의 장인이자 언론인, 관료, 친일부역자였던 부완혁(1919-1984)이었는데, 그는 <사상계>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오적」 필화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는 등 야당 성향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선호씨의 출신(전남 고흥)이 겹치면서 김대중과의 커넥션 의혹, 호남계 기업에 대한 경계 아니냐는 등 이와 관련한 온갖 의혹과 음모론이 판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 이후 율산그룹의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대기업에 인수되었는데, 이게 그룹 차원의 자금난 때문에 무너진 것이지 계열사들은 나름 알짜기업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이에나 해당 기업들은 인수된 이후에도 나름 잘 나가다가 IMF 전후로 새로운 모기업이 무너지며 함께 사라지거나, 혹은 모기업의 사업 재편으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흡수합병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건설 중인 서울대공원 조감도

 기업 자체는 이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율산그룹이 짧은 기간 동안 벌인 일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공원은 1970년대 말 율산그룹에서 설계 의뢰를 받고 미국 용역회사 PRC와 협력한 계열사를 만들어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건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공원 부지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장막성전'은 해체된 후 2020년 초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모 사이비 종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와도 조금이나마 접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산그룹이 구입한 고속터미널 부지는 그룹 해체 이후로도 오랫동안 신선호씨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각하면서, '터미널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제3자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채권단이 처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ㅡㅡ; 율산그룹이 계획한 20층짜리 복합터미널 계획이 날아가고, 신선호씨 및 그와 함께 남은 직원들은 가건물 상태이던 임시 터미널을 20여 년이나 지킵니다. 우주방어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센트럴시티가 완공되고 신선호씨는 수천억 자산가로 화려하게 재기하였습니다... 몇 년 뒤에 다시 경영권을 넘기기는 하지만요.

센트럴시티는 이후 애경그룹, 통일교를 거쳐 현재는 신세계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센트럴시티 홈페이지)

 

# 참고자료 #
 "102세 율산 신형식 옹 타계", 서울신문(https://www.seoul.co.kr/)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던 율산그룹 신선호, 첫 공판", 해럴드포토(http://photo.heraldcorp.com/)
 "고흥 출신 신선호 前 율산그룹 회장 재기 성공", 아시아뉴스통신(https://www.anewsa.com/)
 "대우 건설 뒤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머니그라운드(http://mground.kr/)
 "[서울 만들기] 43. 과천 서울대공원 조성", 중앙일보(https://news.joins.com/)
 "신선호씨 집안 스토리", 일요신문(https://ilyo.co.kr/)
 "[실록! 한국경제]⑨ “무너진 신화”… 율산(栗山)", 블록미디어(https://www.blockmedia.co.kr/)
 "율산그룹의 드라마틱한 기업 흥망사", KOSME 기업나라(http://nara.kosmes.or.kr/)
 "‘율산 신화’ 신선호 20여년 만의 인터뷰", 일요신문(https://ilyo.co.kr/)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 고교시절 100만원으로 기업 성장", 에브리뉴스(http://www.everynews.co.kr/)
 "[한국경제 비화 ㊶]율산실업 신선호 사건", 조세금융신문(https://tfm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부완혁"
 신세계센트럴시티 홈페이지(http://www.shinsegaecentralcity.com/)
 한국어 위키백과 "율산그룹"
 나무위키 "센트럴시티", "율산그룹"

 


4. 송유근은 왜 이렇게 되었나 : 육성전략의 대실패


 우선 송유근씨가 어릴 적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에 대하여 고민해 봅시다. 송씨가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6세 때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입니다.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은 정보기술 분야의 가장 기초적인 자격증 중 하나로, 2017년경 시험 난이도가 상승하여 요즘엔 조금 다르지만 그 이전에는 합격하기 정말 쉬운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관련 전공자는 공부가 거의 필요 없을 수준에, 비전공자라도 짧으면 며칠 준비해서 붙을 수도 있는 시험이라고 하는군요.


 특히 문항이 문제은행식으로 출제되고, 2016년 이전에는 실기시험도 객관식(!)으로 출제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난이도를 짐작할 만 합니다. 이러다 보니 군인들이 포상휴가를 노리고 상당히 많이 준비하는 자격증이기도 하고(준비에 드는 노력이 적기 때문에), 나이 어린 사람들이 도전하여 합격하는 사례도 종종 있는 모양입니다. 당장 송씨가 합격한 그 해에 7세 아동이 이 시험에 합격한 다른 사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사]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필기시험 문제 예시]


 난이도보다 주목할 지점은 그 공부 방식인데, 블로거가 찾아본 바 이 시험은 기출문제를 열심히 풀어보는 데서 상당 부분 성패가 갈립니다. 즉 기출문제를 최대한 많이 암기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송씨가 가진 '재능'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송유근씨는 뛰어난 '암기력'을 어릴 적부터 소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훗날 사람들에 의하여 분석된 그의 어릴 적 모습을 보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송씨가 방송에 나와서 어려운 미적분이나 물리학 법칙을 술술 풀어내는 모습은 얼핏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이는 그 수식이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암기'해서 칠판에 베껴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발군의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과학적 사고에 필요한 이해력이나 창의력 등에 있어서는 다른 어린이들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물론 또래 평균보다는 높았을 가능성이 높지만요).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실 뛰어난 암기능력은 오히려 한국의 제도권 교육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아마 송씨가 초등학교에 제대로 입학하여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모두 밟았다면 시험점수가 매우 우수한 '우등생'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트 영재들이 밟는 과정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순탄한 코스를 밟아 소위 명문대 진학은 무난하게 했을 겁니다. 물론 그래서야 지금처럼 유명인사가 될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서야 차라리 이런 평범한 삶이 낫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 '발명품'은 한 기업의 제품을 그냥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송씨는 저 기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는 하고 있었을지]


 송씨에게 닥친 비극은 바로 주변 사람들(특히 그의 부모)이 송씨의 '재능'을 잘못 분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수식을 잘 외우고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 위대한 과학자의 덕목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송씨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상적인 경로를 거부하고, 자꾸만 송씨에게 부재한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길로 그를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 길에 그런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몰랐던 건 물론이고 말입니다.


 그 결과 송씨는 정상적 교육과정을 통하여 일반적 능력을 기를 기회를 싸그리 날려먹었고, 그렇다고 진정한 창의적 사고력을 기를 기회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8년 '성인'이 된 송씨는 사회인이 가져야 할 사고능력과 덕목을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채, 그저 온갖 지식의 파편들만 녹음기마냥 읊어대는 깡통으로 자라났던 것입니다.




5. 송유근을 둘러싼 여론과 언론의 뒤틀린 시선


 여기서 단순히 '영재가 될 수도 있었던 한 어린이를 잘못 육성'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송유근이라는 개인의 문제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를 대하는 사회의 자세가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블로거가 글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이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짚고 싶은 문제는 그를 일종의 '연예인'으로 만든 언론의 작태입니다. 송씨가 처음 정보 관련 자격증을 획득하고 그 부모가 자식을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설치던 때는 2004년 무렵이지만 이 시기에는 그냥 '그런 아이가 있다' 정도로만 가볍게 언급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송씨가 갑자기 전국민의 관심을 받고 천재소년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2005년 <인간극장> 출연이었습니다. 당시 방송 제작진은 실제로는 별 것 없던 송씨를 무지막지하게 '포장'하여 '천재소년'이라는 하나의 '상품'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방송에서 송씨를 어떻게 포장했는지 잘 보여 주는 사진 하나. 사진에서 등장하는 수식은 이차방정식 x^2-12x+36=0 인데, 생판 틀린 풀이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이후 송씨는 이곳저곳 방송에 불려다니며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방송국과 언론사는 그에게 쏠린 대중의 시선을 통하여 쏠쏠하게 돈을 벌었겠지요? 사실 언론의 입장에서는 송씨가 진짜 천재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의 이미지와 실제 삶이 어떻게 다른지 상관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송씨는 철저하게 '천재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부모는 이를 인지하고 이용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정말 자기 아들이 천재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둘 모두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럼 이를 접하는 대중은 왜 그에게 열광하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을까요? 사실 송씨가 방송에 나온 것과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은 학계나 교육계에서는 꽤 많이 언급되어왔고, 그가 통상적 교육과정을 계속 건너뛰는 것에 대하여도 많은 우려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우려가 대중에게 전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를 접해봐야 대중은 "제도권 교육이 천재를 죽이려 든다"라며 기존 교육계에 비난을 퍼붓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뿌리깊은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의 교육과정을 성인이 되기까지 밟아왔지만 정작 그 교육과정과 체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분석하려면 글이 하나 더 필요하겠지만 -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한국의 교육체제가 마치 절대악인 것마냥 취급하는 사고가 알게 모르게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송씨에 대한 기존 교육계의 우려가 '꼰대들의 꼰대질' 이상으로 인식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이러한 인식을 지금껏 해소하지 못한 교육계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그와 별개로 교육계의 지적이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송씨 문제에 있어서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말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송씨가 군입대를 하게 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송씨를 천재소년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황우석씨는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을 교묘히 활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대중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입니다. 대중은 송씨에 대한 언론의 '허술한' 포장조차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니 상대성 이론이니 하는, '뭔 소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어려워 보이는' 소리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무 말이나 떠드니 똑똑한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상술했듯이 사람들이 그의 허상을 파악할 수 있는 식자(識者)들을 무턱대고 배척한 것에는, 어려운 이야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송씨를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비뚤어진 애국심(?)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에는 그가 세상을 호령하는 천재가 되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위인전 감성'이 숨어 있습니다. 차라리 종교에 가까운 이 심리 때문에, 여론은 송씨를 비판하거나 걱정하는 목소리를 마치 반사회적 망동인 것처럼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뜨던' 시기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황우석 사태와도 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글쎄, 10년 넘게 지난 지금은 뭔가 좀 다를까요?




6. 정리 : 다시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송유근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송유근씨 본인입니다. 사회에 도움이 될 유능한 인재가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주변 사람들과 대중의 비뚤어진 의도와 욕심 때문에 자라나지 못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인식하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는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미지 메이킹은 그가 어렸을 때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지적 능력이 필요한 대학원 단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결국 뭐든지 빨랐던 그는 남들보다도 더 시간을 소모하고도 박사학위 하나 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우리 사회 전체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이 사태에는 자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는 언론의 돈벌이 전략과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낚이는 대중들,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과학에 대한 무지, 지성에 대한 반감, 그리고 비뚤어진 애국심까지 온갖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송유근씨의 문제는 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전세계적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유럽에서는 극단주의 정당이 세를 불리고 있으며,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잘 이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어떤지는 차치하고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송유근씨와 같은 '만들어진 천재'들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의 반성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천재를 '만들고' '소비하는' 행태는 사회 전반에 반(反)지성주의를 뿌리깊게 만들고, 이는 한 사회의 과학적 역량을 고갈시킬 뿐 아니라 인문학적 사고 또한 부진하게 만듭니다. 이미 문제는 현실화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공계 대학원이 텅텅 비어가고 인문학적 사유 또한 하지 않는 사회, 어쩌면 지금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한때 '천재소년'으로 세간에 잘 알려졌던 송유근(20)씨가 결국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사] 송유근씨는 2018년 6월 소속 학교인 UST에서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받았으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의 사유로 불합격하고, 졸업연한을 초과하여 결국 학위를 따지 못한 채 학교를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고, 3년 전 논문 표절 사건으로 크게 시끄럽기도 했던 터라 언론 기사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송유근씨는 논문 표절 사건으로 사실상 학자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매우 의심스럽기에 크게 신경쓸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여전히 이 사람을 천재로 떠받드는 사회 일반의 여론이 적지 않은 것 같아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송유근씨는 어떻게 천재가 '되었고' 어떻게 망가졌을까요? 한때 천재라 불리던 소년의 인생을 말아먹은 모든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송유근]




1. 이것부터 고민해 보자 : 도대체 천재란 게 뭔데?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천재라는 말은 상당히 남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어릴 적 천재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분 계신가요? ㅡㅡ; 물론 그 용례 중 대부분은 그리 진지하지 않은 의미로 하는 말이겠지만, 자기 자식을 천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과도한 기대로 자녀를 짓누르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 단어가 어느 정도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천재'일까요? 임마누엘 칸트는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능력"이 곧 천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순수예술에 관한 말이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말은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일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블로거가 철학에 조예가 없으므로 더 이상은 깊이 들어가지 않겠지만 ㅡㅡ; 분명한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고, 이를 정리하여 규칙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천재'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따지고 보면 이 사람도 천재]


 칸트의 설명을 따른다면, 천재로 불리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될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내고, 이를 완성된 형태로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다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주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풀어내고, 남들이 1문제를 풀 시간에 서너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중에서도 칸트의 정의에 부합하는 천재는 당연히 있겠지만, 단순히 '언젠가 할 것을 조금 일찍 하는' 것을 칸트가 정의하는 '천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적인 천재들을 생각해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 뉴턴, 가우스, 모차르트, 피카소, 아인슈타인 등등 자기 분야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천재로 평가되는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사조나 법칙을 창조하고 이를 후대에까지 관철시킨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수가 남들보다 빨리 성장했고 우리의 고정관념 속 '천재'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천재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산을 했다는 폰노이만 쯤 되면야 인정해 드리지요. 물론 그 역시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니 칸트의 정의에 따른 천재인 것 맞습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천재 소리를 듣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묻혀버리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할 경지에 아주 이른 나이에 도달했지만, 결국 그 경지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들도 다 그만큼(혹은 그보다 더 높은)의 경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기껏해야 남들만큼 잘하는 평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천재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릴 적부터 천재로 불리던 송유근씨는 어떨까요? 과연 그는 천재가 맞았는지,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어쩌다 급전직하하고 말았는지 짧게나마 살펴봅시다.




2. 송유근 인생 초기 : 그는 과연 '천재'였는가?


 이젠 이것도 과거형으로 불러야 하겠지요. 어린 시절의 송유근씨는 과연 우리가 말했던 그 말대로 '천재'였을까요? 그가 천재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정보처리기사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다거나, 고등학생~대학생이나 손댈 법한 어려운 수학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가 TV 등 언론을 타면서(블로거가 검색하기로는 <인생극장>이라고 합니다. 분명 블로거가 봤던 것 같은데 오래되어 기억이 잘) 그는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천재소년'이 되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하고 쓴 걸까요?]


 실제로 그는 초등학교를 초고속으로 졸업하고(6세 때 행정소송까지 하며 6학년으로 입학, 졸업)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몇 달만에 광속 패스, 2005년에는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인하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합니다. 1학년 1학기 때 평점 3.8/4.5를 받는 등 블로거가 딱 한 번 받아본 점수를 대학교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얼마 뒤 "획일적이고 주입식인 대학교육에 흥미를 잃었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독자연구를 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이후 2008년 3월 서울시립대학교 양자컴퓨팅 분야 연구조교로 선임되고, 12월에는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석박사 통합 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잠깐, 그러면 학사 학위는? 2009년 초에 학점은행제로 땄다고 하네요. 아무튼 11세 때 학사 학위를 따고 대학원까지 들어갔으니 정말 '천재적'인 소년으로 보일 법 합니다. 그러면 그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천재였던 걸까요?


[형들은_이런_거_있어?.jpgee 그래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우선 한 가지 생각해 볼 지점은 송유근씨가 과학영재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교육과정을 거의 하나도 밟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송씨는 영재올림피아드를 비롯하여 이 땅의 영재들이 경쟁하는 다양한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일반적인 교육기관은 커녕 과학고 등 과학영재를 위한 전문적 교육기관조차 거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역시 조금 다니다가 자퇴하였으며 앞에 언급한 학점조차 다른 학생들과 별개로 평가를 한 결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송유근씨와 그의 부모가 계속 주장한 대로 한국의 제도권 교육은 과학적 창의력을 길러주는 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의 교육과정을 충실히 거치고 다양한 학문적 업적들을 남긴 수많은 영재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출신의 인물 중 과학분야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벤자민 휘소 리(이휘소, 1935-1977)는 당시 제도권 교육의 정점인 경기중학교(현재의 중고등학교 통합)와 서울대 공대(물리학과 전과가 불가능하여 중퇴)를 나왔습니다. 심지어 제도권에 영재교육 개념 자체가 없던 1950년대에!


[이휘소]


 또한 송씨가 주목받던 어린 시절에도 그의 천재성(?)에 의문을 제기할 기회들은 있었으니, 그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 자신의 발명품이라고 소개한 물건이 사실 부모가 빌려 온 한 중소기업의 장비였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사]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 보자면 "그렇다면 지금껏 보여 온 천재의 이미지도 부모가 만들어 온 허상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신기하게도 이 사건은 별 반향 없이 묻혔고 송씨는 계속 천재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계에서는 송씨에 대해 우려의 시선들이 있었지만 '국민 천재소년'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에 대하여 대놓고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언론과 부모가 계속 '천재성을 죽이는 제도권 교육' 프레임을 쌓아가는 마당에 제도권 학계에서 그에 대한 비판은 곧 제도권의 천재 죽이기로 비추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학계 사람들은 대체로 그냥 입을 닫고 "논문 나올 때 두고보자"라는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 천재의 몰락 : 알고보니 껍데기였을 뿐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2015년 송씨가 Astrophysical Journal(ApJ)에 투고한 논문이 표절 판정을 받고 게재 취소 처분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다 쓰려면 글이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 블로거가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으니 [링크]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과거 황우석 연구조작 사건과 진행과정이 조금 비슷한데 디시인사이드 과학 관련 갤러리에서 논란이 불거진 점(물론 이 사건은 일베저장소에서 처음 말이 나왔다고는 합니다만),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여론의 뭇매를 맞다가 한 방에 사태가 반전되었다는 점 등등.


 아무튼 이 사건으로 송씨는 천재소년으로 불리던 그간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었고, 이 논문을 바탕으로 취득하려던 박사 학위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때와 달리 이 사건은 논란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신속하게 사태가 종료되어 황우석 사건처럼 사회가 분열되어 개싸움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다 보니 역으로 이 사건의 경과나 그 의미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도 그를 천재소년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ㅡㅡ;


[응 학위 못 준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2016년 arXiv(코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출판 전 논문 등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사이트)에 송씨가 올린 논문이 또다시 표절 논란에 휩싸인 것입니다. [기사] [최초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송씨와 관련된 연구보고서에 뜬금없이 그의 부모가 연구원으로 등재되어 있다거나, 보고서들이 온통 Ctrl+CV로 점철되어 있다거나[참조] 하는 등 이후로도 그에 대한 논란은 계속됐습니다. 아마 송씨는 물갤을 철천지원수로 여길 듯하다


 기껏 게재한 논문이 잇따라 표절로 드러나고 그 여파로 모든 지도교수가 날아가는 등등, 연구자로서 그는 그야말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나마 SCI급이나 그에 준하는 학술지에 어찌어찌 논문을 내긴 했던 모양이지만, UST에서 받은 논문 심사에서 심사관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 하는 등 기본조차 안 된 모습을 보이며 결국 박사학위를 받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학교와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이 결국 기한초과로 학위 취득에 실패하다니, 어딘가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졸업한다고는_하지_않았다.fact]


 박사 학위는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만들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부여됩니다. 그러니 (다른 논문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베낀다는 건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겁니다. 물론 한국의 대학원에서는 그 상상도 못할 일이 꽤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긴 합니다만 문도리코라든지 문도리코라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국민의 주목을 받아온 학생이 철저한 검증의 대상이 될 논문을 그렇게 복붙 수준으로 베껴서 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이쯤 되고 나서는 그가 어린 시절에 TV에서 보여준 문제풀이나 공식 유도같은 자료들도 죄다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체로 '저건 식 자체를 외워서 외운 그대로 쓴 것이지 문제를 이해하고 푼 것이 전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송씨는 어린 시절에도 뭔가를 기억하는 암기력만 뛰어났지, 그게 뭔 소리인지 이해하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모르는 블로거가 보기에도 저건 그냥 여러 변수들을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돌려가며 장난친 것으로 보입니다. 블로거가 예전에 저러다가 문제 많이 틀렸는데]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TV같은 데 나와서 어려운 수학 문제 몇 개쯤 베껴쓰는 푸는 것, 그리고 지도교수 논문을 그대로 오려붙여서 논문이랍시고 내는 것 외에는 무언가 결과를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보면 송씨가 과연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완료할 역량과 의지가 있기는 한가 싶기까지 합니다. 학자 인생에 평생 따라다닐 학위논문조차 지도교수의 것을 복붙하는 지경이래서야, 어디 그가 자기 머리로 논문은 커녕 번듯한 레포트 한 장이라도 제대로 쓸 능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요?


(계속)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결과야 모두 예상한 대로 나왔고 말입니다(하긴 그것보다도 민주당이 더 싹쓸이를 하긴 했네요). 뭐 전체적인 결과에 대해서야 너무 뻔한 이야기가 나올테니 관두고, 그냥 블로거 개인적으로 흥미있었던 몇몇 동네만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1. 이번 선거 최대 격전지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간발의 차로 당선자가 결정된 곳은 강원도 평창군수입니다. 득표율 50:50에 표차가 단 24표가 나왔습니다. 2위 후보는 아마 두 달은 잠을 못 이룰 듯. ㅡㅡ; 사실 강원도는 도지사는 몰라도 시장-군수는 대부분 보수계열 정당 후보들이 석권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평창올림픽 성공 개최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왕년의 최대 격전지



 강원도 고성군수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현직 군수를 떨어뜨리고 당선되었습니다. 이 곳은 사실 많은 이들에게 유명한데 과거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바로 이 사건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ㅡㅡ; 두 후보는 이후 지방선거에서 리벤지(?) 매치를 치렀는데 황종국 후보가 한 번 더 승리하였고, 황종국씨가 시장 재직 중 별세한 이후에는 윤승근 후보가 당선되어 현직 군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하나 넘어서 군수직을 계속 하나 했더니, 또다른 산이 나타나 버렸네요. ㅡㅡ;




3. 이부망천의 최후




 얼마 전 자유한국당 대변인 정태옥씨의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발언으로 폭탄을 맞은 두 지역입니다. 뭐 서울에서 망해서 인근 위성도시로 이사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블로거가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거에 나서는 정당의 중요 인물이 이런 식으로 대놓고 지역비하를 하는 건 그냥 그 지역에서 선거 포기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지요. 당연하겠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수도권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격차가 났습니다.




4. 박정희 본진 털리다



 사실 이번 선거의 숨은 주인공은 바로 이곳일지도 모릅니다. 박정희의 고향이자 이전 시장이 "박정희=반인반신" 드립이나 치던, 박정희 숭배의 끝판왕 구미시장 자리가 더불어민주당에 넘어왔습니다. 민주당 계열에서 후보조차 잘 못 내던 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민주당 기초단체장이 배출된 것도 그렇고, 그 자리가 하필이면 박정희의 고향 구미라는 게 더 의미심장하네요. 보수 계열 후보가 난립했던 것, 구미시가 전자산업 중심의 도시라 청장년층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은 것 등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5. 어쨌거나 당선!



 이번에는 옆동네 상주시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크게 이슈가 없는 동네에 왜 왔을까요? 바로 1위 득표율 때문입니다. 보시는 대로 1위와 4위의 득표차가 10%도 나지 않습니다. ㅡㅡ; 여기도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TK에서도 자유한국당 후보들의 득표율이 예전보다 많이 낮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겠습니다.




6. 서울 유일의 자유한국당 구청장



 서울은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를 해서 제4회 지방선거의 리버스 버전이 되나 싶었지만 유일하게 서초구만 자유한국당이 지켜냈습니다. 딱히 이 지역이 보수라서라기보다 현직 구청장이 인근 강남구에 비해 크게 안 좋은 쪽으로 이슈가 되지도 않았고, 선거 공보물 등 선거운동도 잘 한 측면이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덕분에 자유한국당 역시 간신히 고개를 들 껀수가 하나 생기긴 했습니다. 현실은 TK자민련




7. 녹색당에도 털린 자유한국당



 제주지사 선거는 예상대로 원희룡씨가 당선되었지만, 자유한국당 후보가 녹색당 후보에게도 밀리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ㅡㅡ; 이번 제주도 녹색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꽤 높은 득표율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제주도라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8.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울 노원병 재보궐선거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 버렸습니다.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 자유한국당 vs. 안티자유한국당



 경북 김천 재보궐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자유한국당이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이 무소속 최대원 후보는 반(反) 자유한국당 연합후보로 민주당 쪽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출마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마터면 민주당 혹은 민주당이 지지하는 후보들에게 재보선 모든 지역구를 다 털릴 뻔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0. 정리


 라고 할 게 있을까요? 이번 선거에서는 아무튼 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대부분이 예상했고, 결국 그 정도가 문제일 뿐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으니 말입니다. 이재명씨나 김경수씨가 개인적, 정치적 온갖 논란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무난하게 당선된 것을 보면 여론 일반이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에 어떤 입장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바른미래당은 반짝 떴다가 사라진 수많은 제3정당들의 뒤를 따를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고, 민주평화당은 역시 호남 자유선진당 노릇이나 좀 하다가 말겠지요. 정의당은 정당득표율은 좀 나온 것 같지만 고질적인 인재부족을 어떻게든 해결 못하면 여전히 답이 없을 겁니다. 그냥 앞으로 4년간 이 사람들이 뭔 짓을 하는지나 잘 감시해 봅시다.



 - 1.


 '선언'이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무엇일까요? 사실 선언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그냥 말만 한 거니까요. 그것이 무슨 계약이나 판결, 조약처럼 강제력 또는 법적 효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언의 의미를 논하려면 결국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가지고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미독립선언서는 한반도가 결국 해방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고, 군사독재 시대 발표된 많은 선언문들은 결국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에 그 빛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번 판문점 선언 또한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좀 더 멀리 간다면 7·4 남북공동성명부터 시작해서 6·15, 10·4에 이르기까지 통일 문제와 관련한 모든 선언문들은, 결과적으로 남북이 통일되어야 역사적으로 그 의의를 평가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선언에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겠지요. 지금까지는 그러한 선언들이 제대로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 모양이었던 거니까요.




 - 2.


 그러니 앞으로 이 선언의 내용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겠는가를 따져 보아야 할텐데, 아직 확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야 없지만 이전 선언에 비해 훨씬 여건이 좋고 실현 가능성이 크기는 한 것 같습니다(물론 블로거의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이번 회담은 '북미정상회담'과 한 트랙으로 가는 이벤트이고, 또한 한 쪽 당사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임기를 4년 이상 남겨 두고 있습니다. 북미관계라는 변수, 반북세력으로의 정권교체라는 변수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북한 쪽에서 이전과 다르게 매우 즉각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실험장을 확실히 폐쇄할테니 그걸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이야기나, 몇 년 전에 바꾸어 놓은 북한식 표준시를 다시 원래 기준으로 돌려놓겠다는 이야기나 이전의 북한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물론 이것이 '정치'인 만큼 이것이 진심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고, 적어도 북한 쪽에서 "우리 지금 진지하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것 또한 이번 선언의 신뢰도를 높여 주는 건 물론이고 말이지요.




 - 3.


 이번 선언문에 비핵화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계속 언급이 되었듯이 비핵화 문제에 있어 남북정상회담은 북미정상회담의 전초전 성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북핵이 '외교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되었건 비핵화 안건은 북미정상회담에서 다루어야 하고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겁니다(이 점에 있어서는 플레잉 카...... 아니 트럼프가 장사꾼 답게 협상 하나는 통 크게 한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므로 판문점 선언에서 언급된 비핵화 이야기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어떤 기준으로 이야기를 할지 '가이드라인'을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정도 주제와 무게를 가진 회담에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의를 하지 않았을 턱이 없으니, 이번 선언의 내용에 미국의 의중이 들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기본적으로 핵을 완전히 없앤다는 전제 하에 북한과 미국의 딜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될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군요.




 - 4.


 이번 선언 단독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종전선언' 추진 부분입니다. 다만 이것은 아마 남북한만의 합의로 해결되기는 어렵겠지요. 1953년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이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협정문에 서명한 당사자는 북한, 중국, UN군(사실상 미국) 측으로, 심지어 대한민국은 여기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ㅡㅡ; 다들 아시다시피 이는 당시의 대통령인 저승...... 아니 이승만이 여기에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전 이야기는 남북미중 4자회담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지요(뭐 이래 놓고 미국과 중국이 그냥 남북에 일임해버리면 또 모르지만). 무엇보다 종전선언이란 곧 기존 정전협정의 폐기를 의미하고, 이는 평화협정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되면 또 외교적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보다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한국전쟁의 최종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주변국들 - 특히 전쟁과 휴전협정의 직접 당사자였던 미국과 중국의 입장은 어떻게 할지, 군축 문제는 어찌 할지, 서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등등등등.


 그래도 전쟁이 완전히 끝난 상황이라는 게 상상할수록 흥미로워지기는 합니다. 우선 (옛 동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양측간에 제한적이나마 왕래가 가능해질 것이고, 그리 되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사실상 완전 해결됩니다. 수시로 창구를 열어 놓고,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그간 말로만 나왔던 북한 철로를 통한 대륙간 물류수송, 러시아에서 한반도로 오는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등도 실현될 겁니다. 러시아 싱글벙글 무엇보다도 더 이상 휴전선에 육군 병력을 몰빵할 이유가 사라지고, 휴전선(일단 이름이 바뀌겠군요)의 경비는 일반 국경 수준으로 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양측 군대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기겠지요.




 - 5.


 정치는 결국 '쇼'입니다. 특히 대중매체가 극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정치라면 더욱 그렇지요. 홍XX씨가 이번 회담을 '위장 평화쇼'라고 주장하는 건 충분히 제시 가능한 의견입니다만 그건 애초에 정치라는 게 그렇다는 걸 무시한, 유아적인 논리에 입각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말대로라면 이번 회담은 그 목적을 백배 달성한 겁니다. 이 분 정치 오래 하신 분 맞나요? 그대로 종신대표를 하시기를 기원합니...... 에......




 - 6.


 김정은씨는 갑자기 왜 태도를 돌변했을까요? 이건 블로거가 전문가도 아니고 정확히 알 수야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이 사람 생각에 북한이 언제까지나 은둔 상태로 있을 수도 없고 핵을 더 이상 크게 키울 수도 없는데(이 이상 핵개발을 더 하려면 이제 메가톤 단위의 핵무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걸 실험하려면 만탑산이 아니라 개마고원이 날아갑니다), 미국의 현 황상대통령을 봤을 때 장사꾼 출신이고 통 크게 쇼부(?)를 칠 수 있는 사람이니 적당히 판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핵을 외교카드로 제대로 쓰고 버리자......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의문인 건 김정은씨가 과연 저렇게까지 나와도 괜찮은가 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이 정도까지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분명 북한 내부의 체제 유지 프로세스에도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전쟁과 반미라는 두 가지 명분이 한꺼번에 날아가니까요. 그런데 북한에도 분명 냉전체제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들이 있고(남한에도 있듯이), 이들이 북한 지배계층을 점유하고 있는 만큼 예상되는 반발을 과연 제어할 수 있겠는가 의문이 조금 듭니다. 어쩌면 김정은씨는 그동안 이런 식으로 나올 준비를 하기 위해 위협요소들을 대숙청으로 착실히 제거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김정은씨를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어 일단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2016년 실업률. 출처 : 통계청 <2016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


 - 2017년 1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6년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3.7%로 전년 대비 0.1% 증가하였습니다. 사실 실업률 3%대라면 굉장히 양호한 것으로, 일시적 취업준비나 이직 등의 요소를 감안하면 거의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상황이 영 다른 것 같습니다.


 - 분명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못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통계는 우리 사회가 아주 양호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실업률 통계가 우리의 체감과 다르게 나오고 있는지,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1. 실업률 산출의 진실 : 이 사람이 실업자가 아니라고요?


 - 일단 단어 정의부터 해 봅시다. 실업이란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지만 일을 하지 않는(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실업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을 할 능력이 있고(즉 어디 중대한 장애가 있다거나 하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즉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통틀어 경제활동인구라고 합니다. 실업자란 어디까지나 경제활동인구 중 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기엔 실업자이지만, 경제활동인구로 잡히지 않아 실업률 통계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X라게 많습니다. ㅡㅡ;


 - 우선 학생은 경제활동인구에서 제외됩니다. 공부를 하고 있으니,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란 고등학교나 대학교 등 정규 교육기관에 재학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입시학원이나 취업(공무원, 고시 등)준비학원 등에 다니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학원에서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수험생은 돈 한 푼 벌지 않지만 실업자가 아니게 됩니다. 물론 학원에 다니지 않고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할 경우에도 경제활동인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 그리고 그냥 쉬었을 경우에도 제외됩니다. 군 입대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 일을 그만두고 이직하기까지 빈 시간이 있을 경우, 아예 취업을 포기해버린 동네 백수 등등 우리가 보기에는 놀고먹(?)는 실업자이지만, 국가에서는 이들을 실업자로 보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연로한 사람들도 빠집니다(일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 전업주부 중에서도 취업을 하고 싶으면서 못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역시 일률적으로 비경제활동인구가 됩니다.




2. 실질적 실업률 : 한국은 실업률이 매우 높은 국가이다!


 - 즉 실업률 통계가 체감과 다른 것은 우리가 보는 '실업자'와 국가에서 보는 '실업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백수'들이 모두 실업자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상의) 실업자들을 합치면 실제 실업률은 얼마나 높아질까요?


[2016년 비경제활동인구 활동상태별 현황. 출처 : 상동]


 - 간단하게 통계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단 저기서 '기타' 항목의 인원(교육기관 외 취업준비, 진학준비, 군입대대기, 순수백수 등)은 거의 포함된다고 보겠습니다(+2,359,000명). '재학·수강 등' 항목에서 정규교육기관 재학생(2016년 기준 대학+전문대학 2,782,000명. 참고)을 제외하고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1,214,000명). '가사', '육아' 및 '연로' 항목의 경우 명확한 기준을 잡기 어려우니, 여기서는 일단 제외하겠습니다.


 - 이걸 가지고 계산을 해 보겠습니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실업자 수(2016년 1,012,000명) ÷ 경제활동인구(2016년 27,247,000명) 로 계산됩니다. 여기에 위에서 구한 '사실상 실업자'들은 분모와 분자 모두에 더해야 합니다(경제활동인구가 아니므로).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실질적 실업률'은 단순히 계산해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1,012,000+2,359,000+1,214,000 ÷ 27,247,000+2,359,000+1,214,000 × 100

     = 14.88(%)


 - 그렇습니다. 몇 가지 요소를 빼고도 실제 실업률은 15% 가까이 나옵니다! 이쯤 되면 통계적으로 실업률이 엄청나게 높아 보이는 미국이나 유럽 각국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꿀리지 않습니다. ㅡㅡ; 물론 그 쪽에서도 우리처럼 누락되는 '사실상 실업자'들이 다수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2016년 취업자 수 및 고용률. 출처 : 상동]


 - 이번에는 통계를 뒤집어서, 고용률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고용률이 결코 높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용률은 OECD 평균보다 대체로 약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여성 전업주부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음을 감안해야겠지만(한국의 남녀 고용률 격차는 OECD 내 1위를 달립니다), 결국 그 빈 자리를 누군가 채울 것임을 감안하면 큰 변수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통계대로라면 한국은 실업률과 고용률이 모두 낮은 희한한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3. 정리 :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의 위험성


 - 본래 실업률 통계는 경기 동향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 중 하나지만, 이런 식으로 통계가 체감과 동떨어져서야 어디에도 써먹기 어려운 의미 없는 자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함부로 음모론스러운 이야기를 하지야 않겠지만, 중요한 참고가 되어야 할 자료가 이런 상태라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가 사회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실업률 통계만 보면 현재의 한국 경제는 역사상 최대 호황기라는 1990년대 초중반(당시 실업률은 2% 초반대였습니다)에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경제가 적어도 상당한 호황이라는 소리인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마 별로 없지 싶습니다.


 - 이런 자료를 가지고 정부에서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세울 수 있을까요? 미국만 보아도 실업률 추이는 미국 경제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데이터이며, 실업률 변화는 경제정책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까지 큰 영향을 주곤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실업률 통계는 그 어느 곳에도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통계는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통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거의 유일한 용도가 있다면, 실업률이 낮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불만을 잠깐 동안 잠재우는 역할 정도일까요? 이는 통계의 거대한 함정에 빠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줍니다. 통계를 통하여 세상을 본다는 것은 곧 그 통계에 의해 세뇌당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의미니까요. 우리가 생각 없이 접하는 통계를 좀 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 :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3/1/index.board (통계청 고용/노동 관련 통계)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 (한국지표체계 고등학교 유형별 현황)

http://37start.tistory.com/595 (대학생 수 통계 출처)

http://oecd.mofa.go.kr/webmodule/htsboard/te... (OECD 실업률 동향)


 - 티스토리가 블로그 백업 서비스 종료를 선언하였습니다. [공지] 물론 함께 종료를 선언한 서비스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만, 블로거가 거의 쓰는 일이 없었던 트랙백과 API 서비스와는 달리 백업 서비스의 경우 티스토리 전체의 명운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 일단 티스토리 운영측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이미 데이터 복원 기능이 없어진 지 오래인데, 굳이 복원도 불가능한 백업 기능을 남겨둘 이유가 없다.' 일견 합당한 생각입니다.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현재의 백업 기능은 블로그 복원에는 무용지물이 된 데다 블로거들이 타 플랫폼으로 이주하는 데 악용(티스토리의 입장에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니, 백업 기능을 차단하여 티스토리 블로거의 감소를 최대한 어렵게 만들어 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되기는 합니다.


 -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제법 많다는 점입니다. 우선 카카오는 다음과 합병한 이후 지속적으로 옛 다음 시절의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카카오의 이름으로 간판을 바꾸어 왔습니다. 카카오톡과 겹치는 마이피플이 사라진 것을 비롯하여, 다음 지도는 카카오맵으로 흡수, TV팟은 카카오TV에 흡수통합되어 사라질 예정으로 있는 등등.


 - 다음이 티스토리 인수 이전부터 운영하던 다음블로그는, 서비스는 지속중이지만 사실상 관리를 포기한 상태로 수 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티스토리의 중요 서비스가 폐지되는 것이 티스토리 자체의 단계적 폐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 특히 백업 기능의 폐지는 티스토리가 타 서비스형 블로그(특히, 네이버 블로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이점 하나를 없애는 것을 의미하기에, 티스토리 블로거들의 우려와 반발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입니다. 일단 블로거가 생각하는 티스토리의 차별점이라면


1. 디자인이나 운영의 높은 자유도

2. 강력한 백업 기능

3. 업로드 시각을 과거시점으로 설정 가능


등이 있겠습니다만, 3번은 이미 올해 봄에 사라졌지요(심지어 제대로 예고도 하지 않고 갑자기 기능을 없애서, 많은 유저들의 반발을 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실상 저 세 가지가 사람들을 네이버에서 티스토리로 끌고 오는 원동력이었는데, 이미 하나가 없어지고 남은 둘 중 하나도 곧 폐지한다니 블로거의 입장에서는 어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 거기에 카카오의 서비스 중에서 이미 블로그를 대신할 수 있는 '브런치'가 존재한다는 것도 걱정을 키웁니다. 물론 브런치를 기존의 블로그 서비스와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기존 블로그의 역할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카카오는 역할이 겹칠 경우 과거 다음의 서비스들을 미련없이 내쳐버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 왔습니다.


 - 물론 '블로그'라는 콘텐츠의 특성상, 카카오가 무턱대고 티스토리를 닫는 것은 자폭행위에 가깝습니다. 한국 2위의 블로그 서비스, 수많은 양질의 블로거들이 십여 년간 쌓아올린 데이터의 축적량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서비스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활용가치가 충분하지요. 다음이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을 뿐


 - 브런치가 얼마나 흥하고 있는지는 (사용을 하고 있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축적된 데이터의 양에서 티스토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티스토리를 날린다? 자폭도 이런 자폭이 없지요. 카카오 경영진이 제정신이라면, 이걸 제대로 활용하지 않을망정 그대로 날려먹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최근 카카오의 사업확장이 지지부진한 것을 생각하면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그나마 출구전략이 될 만한 것이라면 티스토리의 명칭이 카카오XX로 바뀌거나 카카오스토리(+다음블로그)와 합병하고, 전체적인 틀은 셋 중 가장 잘 검증된 티스토리의 체제 중심으로 가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블로거가 카카오의 내부사정을 모르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군요.


 - 결론적으로 블로거는 티스토리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만큼 허약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백업 기능이 사라지는 이상, 만약에 대비하여 플랜 B를 세워둘 필요는 있어보입니다. 아마도 많은 티스토리 블로거들이 설치형 블로그(워드프레스라든지)로 이전하는 것을 고려하실테고, 블로거도 일단은 티스토리 폐쇄 대비용으로 설치형 블로그를 함께 돌려볼 생각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에 대비하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습니다마는.



 - 2016년 광복절은 지구 반대편에서 진행되는 올림픽과 함께 하는 하루이기도 합니다. 과거 올림픽을 비롯한 운동경기가 국가의 명운을 건 사생결단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지금도 그 잔재 정도는 남아있죠. 정도가 줄어들었을 뿐). 국가는 싹수가 보이는 몇몇 유망주를 일찌감치 가려내어, 그들을 사회와 (거의) 격리시킨 채 운동기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신체와 인생을 소모해가며 무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올리면 그들은 국가의 영웅이 되고, 실패하면 매국노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 소위 '국위선양'이란 것에 보탬이 안 될 것 같으면, 가차없이 내칩니다. 이후 그들의 인생이 어찌 될지는 뭐 알 바 아니죠. 국가에 도움이 되라고 운동기계를 만들어 놨는데, 그 기계의 성능이 시원찮으면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무방합니다(그 기계에 투자한 돈이 아깝긴 하겠지만, 어차피 국가에서 그들에게 큰 돈을 투자했거나 한 건 아니니까요). 심하게 과장된 표현이라는 걸 감안하면, 꽤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체육은 대략 이런 식으로 돌아갔습니다.


 - 스포츠와 국가의 개념을 등치시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죠. 근대 스포츠의 개념이 들어오던 시절(고종이 테니스 치는 모습을 보고 "저 힘든 건 아랫것들이나 시키지"라고 나불대던 시절)부터, 사람들은 운동경기의 승리를 국가(민족)의 승리인 것처럼 인식합니다. 하필 한국은 민족국가의 개념이 들어오자마자 그 국가를 상실했고, 갈 곳을 잃은 민족의식은 그나마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던 스포츠 등의 분야에 집중되었던 겁니다.


[영화 <YMCA 야구단>의 한 장면. 이들은 야구라는 걸 처음 접하자마자 침략자 일본과의 한판대결을 벌여야 했습니다.]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스포츠는 한국인에게 '민족적 자존심'이 되어버립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 당시 한국인이 지배자 일본인을 마음놓고 제낄 수 있었던 건 사실상 스포츠 분야밖에 없었거든요. 어찌 보면 당시의 스포츠라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포기하지 않게 잡아주는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스포츠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한낱 정신승리에 불과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긴 했습니다.


 - 물론 이런 현상은 근대 민족국가를 거친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한 것이긴 하지만, 한국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사정이 겹쳐 한층 더 강하게 발현됩니다. 그리고 이건 현재진행형이죠. 국가, 운동선수, 이를 지켜보는 국민 모두가 운동경기의 승리를 국가의 승리로 치환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과 비슷하게)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운동기계를 육성한 다른 나라에서도 이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확실히 생각나는 건 (결은 다르지만) 브라질의 축구 정도?


 - 어쨌든 국가 차원의 운동기계 육성이 이루어진 결과, 올림픽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매번 국력과 투자량에 비해 말도 안 될 만큼 많은 메달을 획득해왔습니다(그나마 국력이 계속 빠르게 성장하면서 이젠 얼추 비슷해진 것 같긴 합니다). 국가 차원의 정글 서바이벌식 선수 육성, 선수들에게 메달에 대한 기대치를 덧씌우고 여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국적(國賊)쯤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선수들에게 메달에 목숨까지 걸도록 만드는 셈이죠.


 - 이러니 아주 웃기면서도 안타까운 모습을 우리는 목도해야 합니다. 왜 메달(특히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이 인터뷰마다 대국민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요? 그 시점에서 가장 아쉽고 열받는 건, 자신의 기량과 노력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사회적 보상을 얻는 데 실패한) 선수 자신일텐데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올림픽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10m 권총사격에서 5위에 오른 진종오 선수가 왜 국민들에게 죄송해야 하는지 납득시켜 주실 분 계신가요?]


 - 상술했지만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꼭 한국에만 있는 현상인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국제경기에서 온갖 나라의 국기를 볼 일도 없을테고, 시상식에서 울려퍼지는 국가(國歌)를 들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도 없었겠죠. "올림픽대회의 경기는 국가간의 경쟁이 아닌, 개인전 또는 단체전을 통한 선수들간의 경쟁이다."(올림픽 헌장 1장 6조 1항)라는 대원칙이 무색하게도, 근대 올림픽은 태생부터 국가간의 경쟁이 중심이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심지어 고대 올림픽도 마찬가지였죠).


 - 다만 민족국가주의를 창시한 유럽은, 이것 때문에 두 차례나 대전쟁을 치르고 수천만명을 서로 죽이고 나서 이에 대한 반성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운동경기에서 자기네 국기를 들고 흔들긴 하더라도) 국가에서 명운을 걸고 운동기계를 육성하여 올림픽 메달 따먹기에 갈아넣거나 하는 짓은 별로 하지 않죠.


 - 결국 2016년 현재 한국처럼 엘리트체육에 목숨거는 나라는, 스포츠 말고는 딱히 자존심 세울 게 없는 나라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것이 실제 국가의 위상과는 별 관련이 없죠. 북한의 메달 순위는 올림픽 때마다 20~30위권을 오르내리지만, 정말로 북한의 국제적 위상이 그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분 계신가요? 종합하면, 한국은 현재 세계적인 위상에 걸맞지 않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2016년 8월 15일 현재 북한의 메달순위. 설마 북한의 국력이 덴마크나 스웨덴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겠지요?]


 - 한국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아무리 해도 좋게 봐줄 수 없는 다른 이유는, 소위 국가와 민족 뒤에서 이를 악용해 자기 배를 불리는 기생충들의 존재 때문입니다. 굳이 길게 주절거릴 필요는 없겠죠. 빙상연맹의 부패상이야 워낙에 유명하고, 잊을 만하면 터지는 코치진의 성추행 파문은 근본적인 해결이 요원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국위선양'이라는 허울 아래에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생각은 제발 블로거만의 뇌내망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운동선수의 사회성과 기본교양을 도외시하는 것은, 운동선수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로까지 확장됩니다. 엘리트 양성 과정에서 도태된 대부분의 운동선수는 낙하산 없이 비행기 밖으로 내던져진 다이버마냥 아무 준비 없이 사회에 내던져집니다. 반평생 일반인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고,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기초적인 교양과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사회에 던져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건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결국 이런 사람이 자꾸 생긴다는 건 사회 전체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


 - 아까 언급한 올림픽 헌장의 한 구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올림픽대회의 경기는 국가간의 경쟁이 아닌, 개인전 또는 단체전을 통한 선수들간의 경쟁이다." 시상식에 국기가 매달리고 국가가 울려퍼지는 이상 이 원칙이 온전히 실현될 날은 요원하겠지만, 적어도 올림픽에 참여하는, 그리고 스포츠에 자기 인생을 건 모든 선수들이 '국가'의 존재 이전에 온전히 자신의 완성과 만족을 위하여 땀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아가서, 이들에게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과 사회화가 좀 더 충실하게 교육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제는 국가의 위상을 좀 높이겠다고, 국민의 자존심을 잠깐 높여주겠다고 수많은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분명 그들 또한 자기자신을 위하여 살 자격이 충분히 있는,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인데 말입니다.


 - 블로거는 올림픽 경기를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관전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니었다면 블로거는 컬링이라는 운동이 있는지도 몰랐을 테고, 펜싱이라는 게 저렇게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라는 것도 몰랐겠죠. 블로거에게 스포츠의 묘미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운동선수들의 노력에 찬사와 감사를 보내며, 그들이 운동을 통하여, 혹은 그들의 인생 자체를 통하여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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