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광복절은 지구 반대편에서 진행되는 올림픽과 함께 하는 하루이기도 합니다. 과거 올림픽을 비롯한 운동경기가 국가의 명운을 건 사생결단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지금도 그 잔재 정도는 남아있죠. 정도가 줄어들었을 뿐). 국가는 싹수가 보이는 몇몇 유망주를 일찌감치 가려내어, 그들을 사회와 (거의) 격리시킨 채 운동기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신체와 인생을 소모해가며 무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올리면 그들은 국가의 영웅이 되고, 실패하면 매국노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 소위 '국위선양'이란 것에 보탬이 안 될 것 같으면, 가차없이 내칩니다. 이후 그들의 인생이 어찌 될지는 뭐 알 바 아니죠. 국가에 도움이 되라고 운동기계를 만들어 놨는데, 그 기계의 성능이 시원찮으면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무방합니다(그 기계에 투자한 돈이 아깝긴 하겠지만, 어차피 국가에서 그들에게 큰 돈을 투자했거나 한 건 아니니까요). 심하게 과장된 표현이라는 걸 감안하면, 꽤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체육은 대략 이런 식으로 돌아갔습니다.


 - 스포츠와 국가의 개념을 등치시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죠. 근대 스포츠의 개념이 들어오던 시절(고종이 테니스 치는 모습을 보고 "저 힘든 건 아랫것들이나 시키지"라고 나불대던 시절)부터, 사람들은 운동경기의 승리를 국가(민족)의 승리인 것처럼 인식합니다. 하필 한국은 민족국가의 개념이 들어오자마자 그 국가를 상실했고, 갈 곳을 잃은 민족의식은 그나마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던 스포츠 등의 분야에 집중되었던 겁니다.


[영화 <YMCA 야구단>의 한 장면. 이들은 야구라는 걸 처음 접하자마자 침략자 일본과의 한판대결을 벌여야 했습니다.]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스포츠는 한국인에게 '민족적 자존심'이 되어버립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 당시 한국인이 지배자 일본인을 마음놓고 제낄 수 있었던 건 사실상 스포츠 분야밖에 없었거든요. 어찌 보면 당시의 스포츠라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포기하지 않게 잡아주는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스포츠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한낱 정신승리에 불과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긴 했습니다.


 - 물론 이런 현상은 근대 민족국가를 거친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한 것이긴 하지만, 한국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사정이 겹쳐 한층 더 강하게 발현됩니다. 그리고 이건 현재진행형이죠. 국가, 운동선수, 이를 지켜보는 국민 모두가 운동경기의 승리를 국가의 승리로 치환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과 비슷하게)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운동기계를 육성한 다른 나라에서도 이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확실히 생각나는 건 (결은 다르지만) 브라질의 축구 정도?


 - 어쨌든 국가 차원의 운동기계 육성이 이루어진 결과, 올림픽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매번 국력과 투자량에 비해 말도 안 될 만큼 많은 메달을 획득해왔습니다(그나마 국력이 계속 빠르게 성장하면서 이젠 얼추 비슷해진 것 같긴 합니다). 국가 차원의 정글 서바이벌식 선수 육성, 선수들에게 메달에 대한 기대치를 덧씌우고 여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국적(國賊)쯤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선수들에게 메달에 목숨까지 걸도록 만드는 셈이죠.


 - 이러니 아주 웃기면서도 안타까운 모습을 우리는 목도해야 합니다. 왜 메달(특히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이 인터뷰마다 대국민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요? 그 시점에서 가장 아쉽고 열받는 건, 자신의 기량과 노력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사회적 보상을 얻는 데 실패한) 선수 자신일텐데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올림픽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10m 권총사격에서 5위에 오른 진종오 선수가 왜 국민들에게 죄송해야 하는지 납득시켜 주실 분 계신가요?]


 - 상술했지만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꼭 한국에만 있는 현상인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국제경기에서 온갖 나라의 국기를 볼 일도 없을테고, 시상식에서 울려퍼지는 국가(國歌)를 들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도 없었겠죠. "올림픽대회의 경기는 국가간의 경쟁이 아닌, 개인전 또는 단체전을 통한 선수들간의 경쟁이다."(올림픽 헌장 1장 6조 1항)라는 대원칙이 무색하게도, 근대 올림픽은 태생부터 국가간의 경쟁이 중심이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심지어 고대 올림픽도 마찬가지였죠).


 - 다만 민족국가주의를 창시한 유럽은, 이것 때문에 두 차례나 대전쟁을 치르고 수천만명을 서로 죽이고 나서 이에 대한 반성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운동경기에서 자기네 국기를 들고 흔들긴 하더라도) 국가에서 명운을 걸고 운동기계를 육성하여 올림픽 메달 따먹기에 갈아넣거나 하는 짓은 별로 하지 않죠.


 - 결국 2016년 현재 한국처럼 엘리트체육에 목숨거는 나라는, 스포츠 말고는 딱히 자존심 세울 게 없는 나라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것이 실제 국가의 위상과는 별 관련이 없죠. 북한의 메달 순위는 올림픽 때마다 20~30위권을 오르내리지만, 정말로 북한의 국제적 위상이 그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분 계신가요? 종합하면, 한국은 현재 세계적인 위상에 걸맞지 않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2016년 8월 15일 현재 북한의 메달순위. 설마 북한의 국력이 덴마크나 스웨덴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겠지요?]


 - 한국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아무리 해도 좋게 봐줄 수 없는 다른 이유는, 소위 국가와 민족 뒤에서 이를 악용해 자기 배를 불리는 기생충들의 존재 때문입니다. 굳이 길게 주절거릴 필요는 없겠죠. 빙상연맹의 부패상이야 워낙에 유명하고, 잊을 만하면 터지는 코치진의 성추행 파문은 근본적인 해결이 요원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국위선양'이라는 허울 아래에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생각은 제발 블로거만의 뇌내망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운동선수의 사회성과 기본교양을 도외시하는 것은, 운동선수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로까지 확장됩니다. 엘리트 양성 과정에서 도태된 대부분의 운동선수는 낙하산 없이 비행기 밖으로 내던져진 다이버마냥 아무 준비 없이 사회에 내던져집니다. 반평생 일반인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고,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기초적인 교양과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사회에 던져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건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결국 이런 사람이 자꾸 생긴다는 건 사회 전체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


 - 아까 언급한 올림픽 헌장의 한 구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올림픽대회의 경기는 국가간의 경쟁이 아닌, 개인전 또는 단체전을 통한 선수들간의 경쟁이다." 시상식에 국기가 매달리고 국가가 울려퍼지는 이상 이 원칙이 온전히 실현될 날은 요원하겠지만, 적어도 올림픽에 참여하는, 그리고 스포츠에 자기 인생을 건 모든 선수들이 '국가'의 존재 이전에 온전히 자신의 완성과 만족을 위하여 땀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아가서, 이들에게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과 사회화가 좀 더 충실하게 교육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제는 국가의 위상을 좀 높이겠다고, 국민의 자존심을 잠깐 높여주겠다고 수많은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분명 그들 또한 자기자신을 위하여 살 자격이 충분히 있는,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인데 말입니다.


 - 블로거는 올림픽 경기를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관전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니었다면 블로거는 컬링이라는 운동이 있는지도 몰랐을 테고, 펜싱이라는 게 저렇게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라는 것도 몰랐겠죠. 블로거에게 스포츠의 묘미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운동선수들의 노력에 찬사와 감사를 보내며, 그들이 운동을 통하여, 혹은 그들의 인생 자체를 통하여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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