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은 남북관계에 있어 시끄러운 일이 상당히 많은 해였습니다. 일단 9월에는 유명한 강릉 잠수함 무장간첩 침투사건이 있었고, 그 이전 8월에는 한총련 연세대 사태가 있었지요(국내정치 사건이긴 하지만 한총련과 남북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하긴 어려우니까). 그 외에 1995년부터 본격화된 북한의 '고난의 행군'은 1996년에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이슈들 사이에 묻혀버린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동년 7월에 발생한 '무함마드 깐수 간첩사건'입니다. 간첩사건이야 잊을 만하면 하나씩 터지던 시절이었지만, 이 사건이 특히 화제가 되었던 건 범인 무함마드 깐수의 정체 때문이었습니다.




1. 무함마드 깐수는 누구인가?


[무함마드 깐수]


 무함마드 깐수는 1946년생으로, 레바논계 필리핀인이며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였습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한국에는 1984년 처음으로 한국에 건너왔고, 연세대학교 어학당을 거쳐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988년에는 간호사로 일하는 한국인 윤모씨와 결혼하였습니다. 전공 분야는 '동서문명 교류사'로 이쪽 분야에서는 한국 내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역사 관련 방송에 출연하거나 신문 기고, 저술활동 등으로 대중적으로도 명성을 쌓아갑니다. 그는 아랍어를 비롯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등등 11개 언어를 할 수 있었다는군요. 언어깡패


 1990년부터는 모교(?)인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조교수로 초빙되었고, 전공 분야인 동서문명 교류사에 대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해갔습니다. 당시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그에 대하여 "된장국을 즐겨 먹을 정도로 한국에 애정이 많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무함마드 깐수는 한국에서 저명한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 그의 정체가 밝혀지다


 1996년 7월 3일, 무함마드 깐수는 갑자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감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세간을 놀라게 할 만했지만 수사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의 정체는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함마드 깐수'가 아니라 조선족 출신 북한인 '정수일'이었던 것입니다.


[정수일]


 정수일은 1934년 중국 지린성 옌지(연길)에서 출생, 연길고급중학을 거쳐 베이징대학 동방학부에 조선족 최초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집트 카이로대학에 중국 국비장학생 1호로 유학하였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주목받은 수재였습니다. 유학 이후에는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는데,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홀대에 실망하고 1962년 아내와 함께 북한으로 이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합니다.


 그는 북한으로 가려는 자신의 결심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직속상관인 외무부장 천이(1901-1972)와 대판 싸우고, 이후 총리인 저우언라이(1898-1976)에게 직접 탄원을 보내어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허가를 받습니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가 이주한 지 얼마 지나 북한에서는 조선족 출신에 대한 숙청이 벌어졌지만 정수일은 저우언라이의 신원보증이 있었던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자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부모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정작 북한에서도 그는 능력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북한에서 그의 학술 활동은 어학 쪽으로 한정되었고 평양외국어대 아랍어과 교수 활동 외에 주당 25시간의 아랍어 방송을 해야 했고, 당시 북한의 일반적인 방침에 따라 주 1~2회 강제적인 육체노동에도 참여하는 등 심한 혹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정수일은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고,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미로염'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조선노동당 대남부서의 주목을 받아 1974년부터 4년여에 걸쳐 남파공작원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가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우선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한 능력, 그리고 그의 외모였다고 합니다. 하긴 누가 봐도 납득할 외모이긴 하다 그는 신분 세탁을 위하여 내전 중이던 레바논으로 이주,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합니다. 이후 튀니지대학과 말레이대학에서 연구원과 교수를 역임하고 1980년대 초 필리핀에서 다시 국적을 변경, '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신분을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3. '간첩' 정수일의 삶



 1984년 한국으로 이주한 정수일은 이후 고정간첩으로서 첩보 활동을 전개했고, 구체적인 정보를 원하는 북한의 요구에 따라 '신상옥-최은희 최근 소재지' '클린턴 방한 문제' '국회의원 총선거 정세분석' 등의 자료들을 북한으로 보냅니다. 그의 위장은 워낙 철저해서 주변 사람들 중 아무도 그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 그의 후처(?)가 증언한 바 그는 무슬림의 관습을 따르거나 잠꼬대를 아랍어로 하는 등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가 간첩일지 모른다는 상상조차 못 했다고 합니다.


 그가 북한에 보낸 자료에는 첩보 뿐만 아니라 그의 전공분야를 중심으로 한 여러 학술자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하며 북한의 인문학 연구가 많이 뒤처져 있음을 절감한 정수일은 북한 학계의 발전에 도움이 될까 하여 다양한 학술자료를 북한에 넘겼는데, 당국에서는 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지 "이따위 쓸데없는 자료 좀 그만 보내라"는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는군요.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며 4차례 밀입북하였고 북한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자료 전송 수단을 팩시밀리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정보당국의 레이더에 걸렸고 결국 1996년 7월 한 호텔에서 팩시밀리를 전송하던 정수일은 당국에 검거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검거될 수도 있었습니다. 1984년 5월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원(\)을 '환'으로 착각하는 등 한국 사정에 어두운 모습을 보이거나, 대화 중에 은근히 드러나는 북한 억양을 보고 의심을 품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 때는 한국의 이슬람계 지도자들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주어 수사조차 받지 않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ㅡㅡ;




4. 전향, 그 이후



 검거된 시점에서 그의 국적은 (공식적으로는) 필리핀이었기 때문에 필리핀인으로서 국외 추방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정수일은 수사과정에서 자신이 '북조선' 국적임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스스로 이 길을 포기합니다. 이후 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는데, 실제로 그가 북한에 넘긴 첩보들은 거의 언론에 공개된 내용뿐이라 중요한 첩보가 거의 없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전향서를 제출한 것이 참작되어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이 선고됩니다.


 물론 그가 쉽게 전향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 처음에 정수일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국에서 결혼한 아내가 그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북한에 이미 아내가 있었던 그는 한국의 아내에게 자신을 잊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한국의 아내는 그를 떠나지 않고 면회와 옥중서신 등을 통해 옥바라지를 계속하여 결국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정수일은 정식으로 전향서를 제출하여 사형을 면하였고,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 2003년에는 특별사면 및 복권을 통하여 학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간 정수일의 학문적 성과에 대하여는 간첩사건을 보도하던 조선일보도 인정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계로 돌아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본래 재직하던 단국대학교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한국의 이슬람 연구에 남긴 업적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일단 한글 표기법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던 이슬람 경전의 명칭을 '쿠란'으로 정리한 것이 이 사람이며, 처용(<처용가>의 주인공)이 이슬람계 도래인이라는 학설을 처음 낸 것도 정수일씨입니다. 단국대학교 시절의 정수일, 아니 깐수 교수는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전설로 남아 있으며(A+ 폭격기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재도 교수들이 수업 때 간첩 사건과 함께 언급하곤 한다고 하는군요.


 정수일씨는 현재 (사)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으며, 간첩 이력이나 고령(2018년 현재 85살) 등의 이유로 예전만큼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2011년에는 50년만에 고향인 중국 옌지를 방문하여 친척들을 만나고 모교인 룡정고급중학(舊 연길고급중학)에도 방문했는데, 이 방문이 모교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어 학교측에서는 그의 사진을 교내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비록 십 년 이상 활동한 고정간첩이었지만 확실하게 전향한 지 오래이고, 남북한을 비교하자면 남쪽에 학자로서 공헌한 바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논란은 현 시점에서는 딱히 없습니다. 중국-북한-남한을 오간 그의 독특한 이력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기도 한데, 고은 시인은 그를 소재로 한 시를 쓴 적이 있고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1940-)씨는 그의 학문적 집념을 정약용에 비유하며 극찬한 바 있습니다.


 여담으로 그가 현재의 아내와 나눈 옥중서신 중에는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11개 언어를 마스터했는지 설명한 글이 있는데, 이게 또 범상치 않습니다.


한국어 : 모어(母語)

일본어 : 유아기 ~ 소학교 때(그가 태어날 당시 만주 일대는 만주국 치하에 있었기 때문)

중국어 : 고등학교 때 →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자연스럽게 마스터

러시아어 : 고등학교 때 → 대학 교재를 통해 습득. 북한 학계의 제1외국어였기 때문에 러시아어 원서를 다량 독파

영어 : 대학 때 습득 → 이집트 유학 때 마스터(이집트는 영국의 옛 식민지)

아랍어 : 전공과목. 10여 년간 아랍어권에서 생활하며 강의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마스터

독일어 : 이집트 유학 때 아랍 고전 연구에 필요해서 주변 도움으로 습득(아마 독일계 연구자들의 자료를 읽어야 했던 듯)

프랑스어 : 알제리 등지에서 근무하며 업무상 습득(알제리와 튀니지는 프랑스의 옛 식민지)

스페인어 : 모로코 근무 시절 호기심으로 공부(아마도 모로코가 스페인과 인접해 있으니까)

페르시아어 : 아랍어와 섞인 게 많아 학문적 호기심으로 공부. 문명교류학 연구를 위해 더 익혀야 할 듯

말레이어 : 말레이대학 교수 시절 습득

필리핀어 : 필리핀 국적 취득을 위해 습득


 ......그냥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2018. 7. 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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