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장소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

 일자

 2019. 2. 12.


 역사를 전공하는 이에게 신채호(1880-1936)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흔히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끌어 간 인물 중 하나이며, 또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세수를 할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강직함을 상징하는 몇몇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역시 흔히 그렇듯 이 이상의 인간 신채호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사람들의 관심도 적은 듯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신채호는 단순히 저런 몇 줄로 정리될 만큼 단순한 삶을 살아간 인물은 아닙니다. 계몽운동가, 언론인, 사학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아나키즘 혁명가에 이르는 그의 일생은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거대한 불의(不義)와, 때로는 자기 자신과 평생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살았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신채호는 충청도 회덕현, 현재의 대전광역시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생가 터는 현재 신채호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하여 오늘은 신채호 생가를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이곳은 대전광역시에서도 가장 외진 지역에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만약 버스를 이용하고 싶다면 대전서남부터미널이나 산성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32번 버스(서남부터미널 ↔ 백암리)를 타고 도리뫼 정류장에서 내리면 됩니다. 시간을 잘못 맞추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서, 버스가 들어온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표지판이 나옵니다.



 사실 표지판 이전에 버스정류장 근처에서부터 웬 기와집 하나가 보여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신채호 홍보관이고 실제 복원한 생가는 안내판을 참고하여 조금 더 걸어들어가야 나옵니다.



 사실 이곳에 무언가 '볼거리'가 많다고 보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신채호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생가라고 해봐야 그냥 평범한 초가삼간이고, 그 외에는 신채호 동상과 작은 홍보관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신채호의 '숨결'을 느끼러 간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생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신채호 생전의 건물은 아니고, 세월의 바람에 사라진 것을 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기록에는 1992년 발굴조사를 시행한 후 지역 주민들의 고증 등을 참고하여 현재의 초가집을 재건했다고 하는군요. 신채호가 건국훈장을 수훈한 독립운동가였던지라 국가보훈처에서도 나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표지판도 박아 놓았습니다. 표지판에 붙은 스티커가 떨어져 덜렁거리던데 관리 좀


 신채호가 이곳에서 거주한 것은 대략 8세 무렵까지로, 본래는 할아버지의 처가(안동 권씨)가 있던 마을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사헌부 장령을 역임한 고위관료였지만 낙향하여 지금의 청주 귀래리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 신광식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며 가세도 기울어 이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것입니다. 신채호는 8세 때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였고, 이후에는 집안의 고향인 청주 귀래리로 이주하여 학문을 닦았습니다.



 복원한 생가 앞에 있는 안내판. 신채호의 일생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가집의 안채에는 '단재정사(丹齋精舍)'라는 소박(?)한 현판을 붙여 놓았습니다. 방 안에 전시된 인형은 아마도 신채호의 어머니가 길쌈하는 모습을 모티브로 한 듯합니다.



 안채의 다른 방에는 어린 시절의 신채호를 재현해 놓은 인형이 있고, 그 앞으로는 어린 신채호의 몇몇 일화와 그가 어릴 적 지었다는 한시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고, 20대 중반에 성균관 박사(요즘식으로는 교수)를 역임했을 정도로 학식도 출중했으며, 한 번은 집에 불이 나 책이 소실되자 그 책의 내용을 토씨까지 통째로 암기하여(!!!) 그대로 복원해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천재였습니다.



 복원한 생가는 아담하지만 나름 고즈넉하니 편안한 분위기를 줍니다. 안채 옆켠에는 곳간도 복원되어 있습니다.



 생가를 나오면 그 옆켠에 서 있는 신채호 동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본래 거창한 '모뉴멘트'를 아주 싫어합니다만, 이곳에 있는 동상은 쓸데없이 거창하지는 않으면서 나름 방문자들에게 신채호를 마주할 수 있도록 잘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라 싫지많은 않군요. 왼쪽 건립기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넘어가기로 잠시 모자를 벗어 신채호의 위대한 일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처음 들어올 때 보였던 기와건물인 단재 홍보관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역시 홍보관이라고 뭐 거창한 볼거리가 있지는 않습니다. 딱히 신채호 관련 유물들이 있다기보다는 신채호의 삶의 과정을 설명한 글과 미니어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신채호라는 인물을 알고 싶다면 홍보관을 찬찬히 둘러보며 글을 음미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단체예약을 하면 해설사의 설명도 함께 들을 수 있다고 하네요.



 신채호의 일생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말년에 아나키즘(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고 아나키즘 혁명가로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그에게 아나키즘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아나키즘이 억압적인 지배권력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아나키즘이 그때까지의 독립운동과 단절된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아마 이회영(1867-1932)과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블로거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그의 문구라면 역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조선상고사』 첫머리의 일갈입니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나와 상대(나 아닌 놈)가 싸우는 것' 쯤으로 이해해 버리면 심히 곤란합니다. ㅡㅡ; 신채호는 주관적 존재(아. '나'는 주관적이므로)와 그렇지 않은 존재(비아)를 전제하고(이는 상대적인 개념. 비아 역시 스스로는 '나'일 것이므로) 각각의 '나'가 외부(비아)의 자극에 반응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인류사회를 변혁해 온 그 거대한 흐름이 바로 역사의 본질이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홍보관 입구에는 간단한 운영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홍보관은 월요일을 제외한 주6일 개관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홍보관을 제외한 생가 자체는 이외 시간에도 둘러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홍보관을 나오면서 처음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 명의 작은 역사학도에게 있어 신채호란 어떤 의미일까요? 분명 신채호 역시 인간이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는 이런저런 비판이 따라붙습니다. 역사학자 신채호가 주장한 여러 학설들은 시대가 지나며 여러 후학들에 의하여 대부분 논파되었고,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의 독립운동은 분명 위대한 것이었지만 한켠에서 그는 (관점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도 맹렬한 비판으로 임시정부 활동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말년의 아나키스트 활동은 아예 무시되거나 단편적으로만 언급되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그 비판적 시각들은 일정 부분 타당하지만, 그것으로 인간 신채호의 위대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블로거의 생각입니다. 그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가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 특히 독립군과 의열운동 등의 무장투쟁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민족'의 각성이 필요했던 시대에 역사를 통하여 '한민족'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한 그의 업적을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요?


 슬프게도 그의 역사학적 업적이 많은 후손들에게 오해 또는 곡해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채호는 실증주의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기에 만주벌판을 헤집으며 고구려의 흔적을 찾고 과거 사실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시도했던, 어떤 의미로는 철두철미한 '실증주의자'였습니다(단지 참고할 사료가 아직 너무 부족했고 그가 민족의식 고취의 방편으로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렇게 치열하게 쌓아올린 그의 역사관이 역사를 빙자한 소설이나 쓰는 유사역사가들이나 역사를 이용수단으로 삼는 정치꾼의 말장난에 오용되고 있는 현실, 저승의 신채호가 바라보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참고자료

 - 한글 위키백과 "신채호"

 - 나무위키 "신채호"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위키문헌)

 - 신채호, 『신채호 수필선집』, CommunicationBooks, 2017. (구글 도서)

 - 신복룡,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7(1),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답사장소

 화성 당성

 일자

 2018. 9. 23.




 새로 이사한 본가 인근에 유적지가 있어,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다녀오기로 하였습니다. 사적 제217호이며 역사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당성(당항성)입니다.



 당성, 즉 당항성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유서 깊은 곳이며,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지만 한강 유역의 주인이 바뀌면서 이곳의 주인도 차례대로 바뀌어 왔습니다. 특히 신라는 한강 유역을 뒤통수를 쳐서 차지한 이후 이곳을 통하여 중국과 교류하였고 이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통상의 중요성 때문에 이곳에는 통일신라 후기 당성진이 설치되었으며 서남해안의 청해진과 함께 중요한 해군 기지였습니다.


 당성은 고려시대에도 그 역할을 다하였고, 조선 초기에도 성을 쌓고 보수한 흔적이 발견되어 이 무렵까지는 계속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대의 행정구역은 본래 당성군이었으며, 고려 말~조선 초기에 남양군의 일부가 된 이후 일제강점기 수원군(現 화성시)에 통폐합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당성은 산성이기는 하지만 산 자체가 그리 높지는 않기 때문에 접근성은 크게 나쁘지 않습니다. 입구에는 작은 주차장도 설치되어 있고, 행정당국에서 조금이나마 신경은 쓰고 있는지 올라가는 길도 그럭저럭 꾸며져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콘크리트 포장된 시골길을 조금 올라오면 당성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나옵니다. 입구에는 나름 거창(?)하게 세워 놓은 당성 사적비와



 당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약도를 보면 당성은 1차성과 2차성이 있는 모양입니다.



 나름 관리소도 있기는 한데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모두 순찰 중이라는 표지판만 붙어 있었습니다. 평소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군요. ㅡㅡ;



 낮은 산이라고는 해도 나름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거라 등산을 조금은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실제로 당성을 돌면서 등산객을 몇 명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당성은 전형적인 포곡식(골짜기를 둘러싸 성을 쌓은 형태) 산성이라 이렇게 한 쪽 성벽이 골짜기 아래까지 낮게 내려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올라가는 길은 2차성 동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오른쪽 계단을 따라 성벽을 쭉 돌게 될 겁니다(물론 반대로 돌아도 무방). 중간중간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기는 한데, 성벽이 무너질 위험이 있는 곳에 접근하지 말라는 의미라 그런 곳만 피하여 돌면 됩니다.



 사실 여기서 산꼭대기까지 바로 올라가는 형태라 이 부분에서는 조금 힘이 듭니다. 그래도 일대에 높은 산이 별로 없어서 경치 구경하는 재미는 있군요.



 그렇게 산꼭대기 근처까지 올라가면 꽤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성벽 바깥으로 멀찍이 서해 바다가 거의 3면에 가깝게 펼쳐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 들어 많은 곳을 간척했기 때문에 바다가 꽤 멀리 보이긴 하지만, 아마 조선시대 이전에는 정말로 3면이 바다였을 것 같습니다. 왜 이곳에 산성을 지었는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성은 바다에 접하지 않은 한쪽(동쪽)으로만 평지와 맞닿은 구조이기 때문에, 바다 쪽으로 오는 적을 막기에도 용이했을 것입니다.



 산꼭대기 근처에서는 1차성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안내판의 설명을 보며 생각하자면 본래 삼국시대에는 1차성이 있었고, 이곳이 무역도시로 커지면서 성이 너무 비좁으니 권역을 크게 확장하여 2차성을 쌓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차성은 테뫼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능선을 돌다 보면 저렇게 성벽이 번듯하게 서 있는 부분도 볼 수 있는데, 현대에 문화재 보수 차원에서 다시 쌓은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정상 부근에는 망해루라는 이름의 건물 터가 있습니다. 처음 지은 것은 삼국시대지만 고려 말기에 다시 건축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당성 망해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언급되며 고려 말 성리학자인 이색(1328-1396)은 <망해루기>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누각을 지어 사신 등의 귀빈을 맞이하는 장소로 썼다고 합니다. 귀빈을 이런 높은 곳까지 올라오게 하다니



 당성은 근대 들어서 버려졌다가 1990년대 이후 발굴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를 통하여 삼국시대의 그 '당항성'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발굴 작업은 지금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을 따라 계속 걸어갑니다.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사진 왼쪽으로는 저 멀리 시화호가 펼쳐져 있습니다. 저쪽 평지도 간척으로 만들어진 땅이니, 본래는 대부분 바다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이곳은 북문 터입니다. 저기 쑥 들어간 곳이 보이시나요? 물론 지금은 문짝도 없고 길도 문을 통과하는 방향으로는 나 있지 않기 때문에, 유적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처음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이쯤부터는 골짜기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는 길입니다.



 골짜기 쪽으로 내려와 위를 바라본 모습입니다.



 골짜기 아래, 그러니까 본래 당성 내부 중심지였던 곳에는 성에서 사용할 물을 담아 놓는 집수시설의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뭐 이런 비탈에 다 살았겠나 싶긴 하지만, 당성의 전성기에는 성 안에 대장간도 있고 귀빈 접대시설도 있는 등 나름 큰 도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하네요.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당성 입구에는 당성 발굴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과 사진들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 설명을 보면 이곳이 신라까지 이어진 비단길의 주 경로였다고 언급되는데, 실제로 요즘에는 비단길이 중국을 넘어 신라 경주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경우가 많으니 충분히 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당성을 그냥 가볍게 관광지로 생각하기에는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름 정비는 해 놓았다지만 여기저기 접근금지 표지판이 난잡하게 서 있고, 성벽을 도는 길 외에는 자연 상태의 수풀이 그대로 있거나 대충 잘라서 쌓아 놓은 폐허 투성이입니다. ㅡㅡ; 하지만 역사, 특히 삼국시대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꼭 와볼 만한 곳입니다. 삼국시대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당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최근까지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조금 더 깔끔하게 정비된 당성 유적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답사장소

 대전계족산성

 일자

 2018. 7. 25.




 계절학기도 끝났고, 집에만 있기 그래서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대전 주변지역 답사를 틈틈이 다녀 보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로 선정된 장소는 대전 북동부에 있는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입니다.



 일단 사전 정보부터 알아보도록 하지요. 계족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졌으며, 백제가 신라의 공격에서 웅진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 일대에 쌓은 몇몇 산성 중 하나라고 합니다. 백제 때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백제의 토기가 다량 출토되었기 때문인데 동시에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도 나온 바 있어 이곳이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도 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은 불과 100년 전 동학농민군이 근거지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계족산성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테뫼식(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둘러 쌓은 형태)이지만 동시에 포곡식(내부에 골짜기를 끼고 있는 형태) 산성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전 일대에 있는 산성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지만, 현재는 성벽의 많은 부분이 무너지고 유실되어 이를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 중이라는군요. 자, 그러면 계족산성으로 출발해 볼까요?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몇 가지 있는데, 블로거는 장동 쪽에서 올라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일단 회덕동에서 장동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를 탑니다(배차간격이 기니까 시간을 잘 맞춰서 움직이세요).



 버스 시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장동산림욕장' 정류장에서 내립니다. 그러니까 장동산림욕장 길을 따라 계족산성으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장동산림욕장으로 들어갑니다. 안팎으로 대전 일대 유명 주류회사의 회장이 등산을 하다가 어쩌고저쩌고 하여 이 산림욕장을 정비했다는 식의 홍보물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실제로 산림욕장 길 한켠에는 황토흙길을 만들어 놓아 맨발로 등산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요. 사실 산림욕장 길을 따라가는 것은 상당히 돌아서 가는 길인데, 길이 상당히 잘 조성되어 있고 경사도 (상대적으로) 가파르지 않은 편이라 이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걷는 내내 날벌레들이 엄청나게 꼬여서 나중에는 왼손에 손수건을 쥐고 쉴새없이 휘두르며 가야 했습니다. ㅡㅡ;



 중간에 있는 야외무대 한켠에 계족산성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블로거가 길을 못 찾은 것인지 조금 올라가니 거의 야생의 수풀길이 나타나서 ㅡㅡ; 다시 내려와 산림욕장 길을 따라가기로 합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산림욕장을 벗어나 본격 등산로로 가야 합니다. 여기까지 2km 넘는 길을 와서, 이제 400m 남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어마어마한 계단들과 반야생의 수풀길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왜 블로거는 여기가 등산로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까요? ㅡㅡ; 그나마 조금씩 해가 넘어가는 저녁 가까운 시간이라 망정이지, 대낮이었으면 정말 탈진해도 할 말 없었을 겁니다. 저질체력



 땀을 뻘뻘 흘리며 다 올라왔지만 아직 조금 더 가야 합니다. 원래는 저 정면 쪽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모양인데 보수공사 때문에 폐쇄하고,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이곳은 산성의 서문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설치된 계단을 후덜거리며 올라 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서문에는 본래 현수교 형태의 문이 있었고, 필요할 때만 문을 내려 통로로 썼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름 국가 지정 사적지라 내부 안내표지판은 잘 되어 있습니다. 산성은 대략 이렇게 생겼고, 블로거가 들어온 곳은 빨간 점이 있는 곳입니다.



 내부에서 바라본 서문 터 모습.




 산성 내부 곳곳에 작은 평지들이 있는데, 이런 곳들에는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게도(?)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아직 보수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곳 근처의 성벽에는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쪽을 보수하느라 길을 막아놓았던 것 아닌가 싶군요.



 가장 높은 곳에서 성벽을 바라봅니다. 이 성벽을 보면 농담이 아니라 기갑부대가 몰려와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런 급경사 위에 성벽까지 쌓여 있으면 도대체 누가 기어올라와서 성을 점령할 수 있을까요? ㅡㅡ;



 이쯤 되니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기로 합니다. 나름 산 위에 올라왔다보니(다만 이곳이 계족산 정상은 아닙니다. 정상은 다른 곳에 위치) 경치가 정말 좋네요. 미세먼지가 좀 많았는지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대전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산들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흘렀던 땀을 식혀 줍니다.



 저 아래쪽으로도 찾아볼 유적들이 있지만 힘들어서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ㅡㅡ;



 이곳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신호를 보내는 곳답게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있네요.



 이곳은 남문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쪽으로도 통로가 나 있고, 지도를 살펴봤을 때 이쪽으로 나가서 능선을 따라가면 계족산 정상으로 갈 수 있고 다른 쪽으로는 비래동 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완전 등산로인 것 같아 그냥 왔던 길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ㅡㅡ;



 계족산성의 높이는 해발 423m인데 맞은편에 있는 계족산 정상과 거의 높이가 비슷합니다.



 이제 조금씩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합니다. 성 내부에 있는 오솔길 주변으로 꽃들이 꽤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대전시내 뿐만 아니라 반대쪽으로 눈을 돌리면 드넓은 대청호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등산을 별로 즐기지 않는데, 여기 올라와서 바람을 쐬며 경치를 둘러보자니 사람들이 왜 등산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내려가야겠지요? 다시 서문 쪽에 설치된 계단을 통하여 내려갑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정말 방어력 하나는 최고일 것 같은 지형입니다.



 올라왔던 길로 벌레에 시달리며 내려오니, 입구에 도착할 쯤 해가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달이 밝게 떠서 한 컷.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8 춘계답사 - 2일차

일시 : 2018. 3. 22. ~ 23.

답사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아침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합니다. 오늘도 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첫 번째 답사지는 충주읍성입니다. 물론 성 자체는 일제강점기에 헐려 남아있지 않지만, 그 내부의 관청 건물 중 몇 채가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재작년 쯤 올라온 기사에 따르면 읍성에 쓰인 돌들이 잇따라 발견된 것을 계기로 충주의 몇몇 시민단체에서 읍성 복원을 추진한다고 하는군요. [기사보기]



 이곳은 충주의 동헌(東軒. 관아의 중심 건물)으로 쓰인 '청녕헌'입니다(한자 발음상 '청령헌'이라고도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870년 화재 이후 다시 건축한 것으로, 특이하게도 해방 후까지 계속 쓰여 중원군(現 충주시의 읍면 지역) 군청이 되었다가, 1983년 청사를 이전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관아의 정문입니다. 답사일행이 다른 문으로 출입했기 때문에 확인을 미처 못 하였는데, 이 문은 관아 안쪽으로는 '중원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바깥쪽에는 '충청감영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는 한때 충청감영(요즘식으로 말하면 충청도청)이 소재하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의 절반 이상은 충청감영이 공주에 있었고 이전에는 청주에도 감영이 있었다니 그 기간은 길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는 충주 일대 행정구역이 강등과 승격을 정신없이 반복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충청도가 이름을 바꾼 역사(충청도, 충공도, 청홍도, 공홍도, 공충도......)를 보면 화려하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ㅡㅡ;



 관아라고는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많지 않아서, 동헌인 청녕헌과 아래에 소개할 제금당, 산고수청각 정도 뿐입니다. 덕분에 충주 관아에는 이렇게 빈 터가 많이 있습니다.



 관아 한켠에는 수령이 500년을 넘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습니다. 나름 보호수라서 그런지 사방에 철로 된 기둥으로 받쳐 놓았습니다. 아마 이곳 충주 관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나무겠지요?



 또 하나 독특한 유적(?)이라면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충주 또한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여럿 있고, 그들이 잡혀 와 심문을 당한 곳이 이곳 관아였기 때문에 이곳에 비석을 세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남아 있는 다른 두 건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곳은 '제금당'으로, 충주에 왕실 손님이 방문했을 때 일종의 영빈관(?)으로 쓰인 건물이라고 합니다. 청녕헌이 중원군청으로 쓰이던 당시에는 중원군수 집무실로 쓰였고, 군청 이전 후 청녕헌과 함께 원상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조금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으니 이곳은 '산고수청각'으로, 제금당에 귀빈이 방문했을 때 일종의 비서실 역할을 수행한 곳입니다. 여담으로 이 두 건물에는 청녕헌과는 달리 단청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교수님에게 이유를 묻자 교수님은 옛 건물을 복원할 때 '멋있어 보여서' 고증을 제대로 않고 무식하게 단청을 칠하는 경우가 자주 있으니 너무 신경쓰지는 말라고 전제를 깔고 ㅡㅡ; 만약 고증이 제대로 된 거라면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라 단청을 칠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중원루 곁에 있는 '축성사적비'는 1869년 충주읍성을 개축한 이후 세운 기념비입니다. 이제는 읍성은 없고 사적비만 ㅡㅡ;



 충주 관아는 이쯤 하고 다음 답사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 흔적이 발견된 조동리 선사유적지입니다. 이곳은 1990년 9월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강변의 퇴적층이 깎여나가는 바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이 홍수는 당시 광명시에 살던 블로거의 기억에도 얼핏 남아 있는데, 블로거의 집은 피해가 없었지만 살던 아파트 1층이 흙탕물 바다가 었습니다).



 이곳 유적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면 단연 붉은색 굽잔토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붉은간토기의 일종으로, 모양으로 봤을 때 실용 목적보다는 제사 등의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이 녀석은 복제품으로,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다가 최근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그래서 박물관 내에는 진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녀석이 조동리 유적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보니



 그걸 본딴답시고 뒤켠에는 이런 무식한 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ㅡㅡ;



 박물관 내에는 조동리에서 출토된 유물 뿐 아니라 충청도 일대에서 나온 다양한 선사시대 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진품은 아니고 복제품들입니다. 진품들은 아마 그 동네에 있든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든지 하겠지요?



 조동리 유적지 현장은 대충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집터로 쓰였을 법한 구덩이들이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토기의 형태가 한강-금강 유역 스타일과 남해안 쪽 스타일 모두 존재하는 등 두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충주의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기할 만한 또 한 가지는 바로 탄화된 곡물들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는 농경생활을 한 흔적인데 이 씨앗들은 한국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고 합니다.



 ??? 그 곁에 웬 뜬금없는 전시실이 하나 있는데, 1970년대를 장식한 '통일벼'를 개발한 농학자 허문회(1927-2010)의 기념실입니다. 허문회 박사가 충주 출신이고, 때마침 조동리 유적에서 탄화된 곡물 흔적도 발견되고 했으니 겸사겸사 공간을 만든 모양입니다. 통일벼는 '보리밥보다 맛없다'는 악평도 들었고 병충해에 약하다는 결함도 있었지만, 어쨌든 월등한 생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쌀 자급자족에 큰 공헌을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후로는 상술할 문제점(특히 병충해) 때문에 일반 농가에서는 더 이상 재배하지 않지요. 요즘이야 그렇게 생산량에 목숨 걸 이유가 없기도 하고



 다음 답사지로 이동하는 길에 점심을 먹었습니다. 잠시 여유시간이 생겨 바로 앞에 있는 남한강변으로 나와 보았습니다.



 다음 답사지는 청룡사지입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구체적 연도나 창건자는 불명),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사라진 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존재합니다.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협조한 보각국사 혼수(1320-1392)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입적하였고, 태조의 명으로 절이 크게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이 절은 조선 후기까지 건재하다가 폐사지가 되었는데, 한 전설에 따르면 조선 말 민씨 일족의 한 유력자가 바로 근처에 묘를 쓴 이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몰래 절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ㅡㅡ; 하지만 이후 그 무덤은 벌초하러 가는 사람마다 목숨을 잃곤 했기 때문에 결국 다른 곳으로 이장해 버렸다고. ㅡㅡ;



 이곳은 골짜기 한참 안쪽에 있기 때문에 주차장에서 내려 등산(?)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밑에 나올 마지막 답사지보다야



 절의 다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현재는 보각국사 승탑과 관련 유물들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승탑 본체는 국보로, 앞의 석등과 뒤 비석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승탑은 나름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는데도 상당히 크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당시 보각국사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승탑 뒤에는 보각국사탑비가 서 있습니다. 글은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 권근(1352-1409)이 지었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보통 탑 윗부분에 얹어놓는 장식물이 없고, 가장자리를 사선으로 깎아낸 것이 독특한 모습입니다.



 사실 승탑 외에는 볼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ㅡㅡ; 다시 길을 내려오면서 다른 소소한 유물들을 관람하기로 합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보각국사 승탑보다는 조금 밋밋(?)한 승탑이 있는데, 위에 둥글게 생긴 녀석은 어제 충주박물관에서 본 것과 비슷하지만 훠얼씬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석종(鐘)형 승탑은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양식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나친 화려함을 삼가는 분위기 + 불교를 억제하는 사회였던 것과 관련이 있겠지요?



 내려가는 길에는 비석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위전비'로 청룡사 창건과 관리 등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도들이 논밭을 기증한 내역을 기록한 것입니다. 숙종 때 만들어졌고 당시 사찰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자 이제 산을 내려와서 이번에는 강으로 가 봅시다. 조선시대 물류 중심지로 번영했던 목계나루입니다. 이곳 건너편에는 경상도 쪽에서 죽령과 조령을 넘어온 세곡(稅穀)을 임시 저장하던 '가흥창'이 있었고, 가흥창에 저장된 곡식은 목계나루에서 배에 실어 남한강을 따라 서울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간 상선들도 오가고, 큰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기 마련이지요.



 이곳은 '목계별신제'와 관련한 설명을 듣기 위해 들른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마을마다 이런저런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목계나루처럼 큰 시장이 있는 곳에서는 무당패 등등을 초빙하여 여러 날 동안 일종의 지역축제 형태로 개최했다고 합니다. 이는 신앙적인 의미도 물론 있지만 (제사를 열면 사람들이 모이니까) 상권 활성화라는 의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하고 똑같네 사진의 '부흥당'은 제사를 지내는 서낭당의 역할을 한 곳인데, 본래의 부흥당은 인근 부흥산이라는 곳에 있고 이것은 근래에 신축한 것입니다. 옆에는 부흥당의 유래를 기록한 비석도 서 있습니다. 목계별신제는 명맥이 끊겼다가 문화행사로 부활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 그리고 다른 곳을 둘러보는데...... 없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ㅡㅡ; 사실 목계나루는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잘나갔지만 일대에 신작로와 철도(충북선)가 뚫려 치명타를 입었고, 바로 옆에 다리(목계교)가 개통하며 그나마 있던 나룻배도 사라졌으며, 1970년대 마을이 큰 수해를 입은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옛 영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도로 너머 작은 마을만 남아 옛 영광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마을 입구에는 '목계나루터'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는데, 저 '터'라는 글자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경종대왕 태실입니다. 이곳도 가는 길이 꽤 험해서 한참동안 거름 냄새를 만끽하며 시골길을 걸어간 이후



 또다시 등산을 해야 합니다. ㅡㅡ;



 어쨌든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면 요런 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경종의 태(胎)를 안치한 태실입니다. 아기가 출생할 때 함께 나오는 태는 한국에서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서(태아가 태를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맞는 말) 아주 중요하게 여겼으며, 왕실 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태만큼은 아주 소중히 담아 관리했다고 합니다(심지어 이걸 말렸다가 약으로도 썼다는군요). 특이 왕이 될 사람의 태는 명당 중의 명당을 엄선하여 따로 돌방을 만들어 보관했는데, 태는 사람의 운명과 직결되고 특히 왕의 운명은 국가 전체의 운명과도 결부되니 가능한 한 좋은 대접을 했던 겁니다.



 이곳에는 비석이 두 개 서 있습니다. 하나는 '강희 27년(1688년)'과 '원자아기씨'가 쓰여 있는 비석이고



 다른 하나는 '옹정 4년(1726년)'과 '경종대왕'이 적혀 있는 비석입니다. 찾아보건대 첫 번째 비석은 경종 출생 직후 태실을 이곳에 처음 만들 때 세운 것이고, 경종 사후 영조 2년에 태실을 현재의 형태로 정비하였는데 그 때 세운 비석인 듯 합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여러 왕과 왕족들의 태실이 관리 명목으로 대부분 서울 근처 서삼릉 일대로 옮겨진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경종 태실도 강제이전했다가 1976년 원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경종의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는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는군요.



 태실은 일반적으로 '음택풍수'의 명당인 '돌혈'에 위치합니다. 지형이 상당히 독특한데, 앞으로는 훤히 뚫려있고(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시야가 닿는 곳에 집 한 채 있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옆과 뒤쪽으로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실이 있는 이 언덕은 그 산들과 동떨어져 외따로 우뚝 솟아 있어서 아주 특이한 풍광을 만듭니다. 이제 해가 기우는 걸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산을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옵니다. 고작 이틀 지났는데 한 일주일은 된 것 같습니다. ㅡㅡ;




 이것이 입학 후 세 번째 정기답사인데, 다른 답사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1학년 때 다녀온 공주-부여(이건 글이 없으니 찾지 마세요)와 서울의 경우에는 다들 한 나라의 수도였던 적이 있고, 당연히 기록이나 유적,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는 역사 또한 이런 곳들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지요. 이런 곳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런 유적과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만 사람이 살았던 건 당연히 아닙니다. 충주는 한 나라의 수도가 된 적이 딱히 없었을 뿐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언제나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입니다. 당연히 이들이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는 이번 답사로도 확인한 바이지만 그것들 중 상당수는 교과서 등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무학대사는 알아도 보각국사는 잘 모르고, 우륵이 가야금 탄 이야기는 알아도 그와 함께 충주에 왔을 신라와 가야의 이주민들은 잘 모릅니다. 조동리의 굽잔토기는 먼 타지로 나가 관람객을 맞다가 최근에야 돌아왔고, 물류의 중심지였던 목계나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교과서에 나온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역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흔적을 다루는 게 역사라면 사람이 살았고 살고 있는 모든 지역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이곳에서 블로거가 계속 느꼈던 것은 (탄금대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답사지들이 나름 역사공부에 손가락(?)쯤 담궈 보았다는 블로거에게도 제법 생소한 것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끝)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8 춘계답사 - 1일차

일시 : 2018. 3. 22. ~ 23.

답사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이번 답사 지역은 충청북도 충주시 일대입니다. 처음에는 충주라고 해서 거기에 뭐 그리 찾아볼 게 많이 있나 싶기도 했는데, 충주는 어느 큰 나라의 수도였던 적이 없었을 뿐 한국사 전체를 두고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어쩌면 요즘이 충주의 최대 침체기라고 볼 수 있을지도), 생각보다 역사적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출발 전날에 뜬금없이 날이 추워져서 다들 걱정을 하였는데(더구나 충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도시 중 하나), 다행히 출발일에 날이 조금 풀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충주로 출발. 처음 도착한 곳은 충주박물관입니다.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답사 당시에는 1관은 내부공사중이었기 때문에 2관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2관과 야외전시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습니다. 야외전시관에는 다양한 석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블로거의 눈을 끈 것은 아주 작은 크기의 승탑이었습니다. 종 모양으로 아주 단순 간결하게 생긴 이런 형태의 승탑은 조선시대에 유행한 형태라고 합니다.



 충주박물관 2관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큰 박물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알찬 유물 구성을 보여줍니다.



 충주에서 나온 유물은 아니지만 단양 신라 적성비의 모형도 이 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고, 충주의 역사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유물이라 모형이나마 전시를 해 둔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영정(아마 현대에 와서 그려졌을)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충주박물관은 특이하게도 국가에서 설립한 것이 아니라, 충주시민이 기증한 유물들을 중심으로 전시관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박물관으로 승격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곳은 국립박물관이 아닌데, 몇몇 장소에 국립박물관 승격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블로거가 생각하는 박물관의 핵심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바로 근처에 우뚝 솟아 있는 탑평리 7층석탑, 통칭 '중앙탑'입니다.



 중앙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진, 신라 최대 높이의 탑입니다. 당시 충주는 신라 국토의 중앙으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국토의 남북에서 같은 보폭을 가진 사람이 걸어와 마주친 곳에 지었다고 하여 '중앙'탑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탑신 위 꼭대기(상륜부)에는 상륜부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노반'이 있는데, 저렇게 노반이 2층으로 겹쳐 있는 것은 신라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래 탑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혹은 그런 상징을 가진 곳)이라 탑이 있는 곳에는 절이 함께 있는 게 당연한데, 탑평리 7층석탑에는 특이하게도 근처에 이렇다 할 절터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배경에는 이런저런 설(단순한 기념탑이라거나, 신라 전국토가 하나의 사찰이라는 개념이었다거나)이 있지만 모두 확실치는 않습니다. 일단 탑 근처에서 이런저런 발굴 작업은 계속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답사란 이런 게 좀 아쉬운데, 한 곳당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뭔가 감상할라치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찾아갈 곳은 충주 고구려비가 있는 곳인데, 5세기경 고구려가 충주를 점령하고 만든 충주 고구려비는 비석이 발견된 장소에 번듯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하는데 이는 발견 당시 충주시의 영역이 충주시+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비석만 덜렁 있으면 재미없으니 고구려와 관련된 이런저런 것들도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 원본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어디 한 번 읽어 보아라



 이것이 바로 충주 고구려비입니다. 일설에는 마을의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ㅡㅡ; 말도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무근이고, 근래까지 마을의 선돌(수호신 역할을 하는 돌) 노릇을 하며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비석에서 글자를 새긴 흔적을 발견하고, 고구려가 세운 비석으로 밝혀진 것은 1979년입니다. 이 비석이 서 있던 곳은 선돌에서 이름을 따서 '입석마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애로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비석의 글자가 전반적으로 마모가 심해서, 정확한 해독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디 한 번 읽어 보아라(2) 그나마 저 정도는 양호한 편이고 사진에 나오지 않은 다른 면의 탁본은 거의 TV 노이즈 화면 수준이라 글자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ㅡㅡ;



 충주 고구려비는 이쯤 보아두고 다음 장소인 누암리 고분군으로 이동합니다. '루암리'라니 두음법칙 무시 보소



 딱히 왕릉같은 건 없을 것 같은 동네에 큰 규모의 무덤이 이렇게 무더기로 있다는 것이 신기한데, 충주는 신라 진흥왕이 점령한 후 소경(小京)을 처음 설치했고 당시 경주의 귀족들과 가야 유민 일부가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고분군은 당시 이주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언덕을 따라 무덤들을 짓는 건 대체로 신라보다는 가야 스타일에 가깝다는군요.



 무덤들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어서 빙 둘러볼 수 있습니다. 거의 공동묘지 수준으로 무덤이 많습니다. ㅡㅡ; 사실 이것이 다가 아닌 것이 누암리 고분군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이곳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는 우륵과 신립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탄금대입니다. 좀 멀찍이 있는 주차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걸어가면



 신립 장군 순절비가 있는 작은 누각이 나옵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고니시 유키나가 대장)과 조선군(대장 신립)이 전투를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와 전술 착오 등의 이유로 신립을 비롯한 조선군이 말 그대로 전멸당한 곳으로 유멍합니다. 이곳에서 발표와 설명을 듣고,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 열두대를 관람하기로 합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우륵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석에는 가야 출신으로 가야금과 노래들을 만들고, 신라 사람들에게 이를 전파한 우륵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쓰여 있습니다. 우륵에 대하여는 비석과 전설 외에는 남아있는 흔적이 많이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군요.



 한참을 낑낑거리며 올라가서, 이번엔 한참을 내려가 마침내 열두대에 도착했습니다. 열두대는 신립 장군이 몸을 던져 자결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열두대'라는 명칭의 유래에는 신립 장군이 열두 번 패배한 끝에 절망하여 투신하였다는 설, 전투 도중 열두 번이나 올라와 전황을 확인했다는 설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합니다. 이곳의 절벽 위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고



 아래는 가파른 절벽 아래 남한강이 흐릅니다. 열두대 위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풍경은 정말 끝내줍니다. 미세먼지가 좀 많은 것 같은데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절망 끝에 몸을 던지는 신립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쨌거나 답사인원들은 이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더랬습니다.



 열두대를 지나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도중에 '탄금대기'라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1954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막 끝났을 때인데 그럼에도 이런 비석을 세웠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소박한 기념비를 지나면 이번에는 쓰잘데 없이 거대한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신립장군과 팔천 영령 충혼비'인가 뭔가하는 거창한 이름인데 팔천 영령들이 저승에서 이걸 보고 한숨이나 쉬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심지어 그 곁에는 다른 비석이 하나 더 있고, 아래에는 인공 반지하(?) 방에 '호국영령위패실'이라는 어마어마한 방이 있습니다. 거대한 철문이 육중하게 닫혀 있는 게 참 의미심장합니다. 위패실 위에는 또 다른 바벨탑기념탑이 서 있고, 그 뒷면에 무슨 상이용사회니 장병보훈회니 하는 이름이 당당히 새겨져 있는데 그냥 사진은 올리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탄금대를 한 바퀴 돌아왔습니다. 약도에서 보이다시피 탄금대의 보행로는 한 바퀴 빙 둘러서 돌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날의 답사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숙소에 돌아가 저녁식사와 이후 일정을 진행했습니다. (계속)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 추계답사 - 3일차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둘쨋날 뒷풀이는 한강공원에서 맥주로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덕분에 2일차보다는 한결 개운하게 답사를 시작할 수 있겠군요!



 마지막날 3일차의 첫 번째 답사지는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갑니다.



 돈화문으로 들어가서 우선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데, 특이하게도 경복궁과 다르게 돈화문-인정문-인정전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두 번을 꺾어 들어가야 합니다. 평지에 네모 반듯한 구획으로 만들어진 경복궁에 비하여 창덕궁은 비교적 자유로운 건물 배치를 하고 있는데, 일대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만은 못해도 상당한 위엄이 흐르는 웅장한 건물입니다.



 인정전의 내부는 의외로 어느 정도 서양식 분위기도 나고, 특이하게 전등도 달려 있는데 이는 나중에 일부러 단 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순종 때인 1908년에 인테리어를 개조한 것이라고 하네요.



 인정전 옆에는 선정전이 있는데, 이곳은 편전(왕의 평상시 집무실)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종종 왕과 왕비의 장례를 치를 때 신주를 모셔 놓는 공간(혼전魂殿)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복도는 그런 이유 때문에 나중에 덧붙은 것입니다. 다른 특이점으로 선원전 지붕의 기와는 특이하게도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사용한 청기와인데 이는 광해군 시기에 처음 깔았다고 합니다.



 선정전 옆에 있는 희정당은 왕의 생활공간으로 쓰인 곳인데, 선정전이 비좁은데다 왕의 장례 용도로 쓰인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임시 편전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블로거는 건물 전면의 구조가 독특해서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정전과 희정당 뒤편에는 왕후가 생활한 대조전이 있습니다. 입구인 선평문을 넘어가면



 대조전 건물이 나옵니다.



 대조전 역시 실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으로 꾸며 놓았는데, 가구 등의 디자인을 봤을 때 여기도 대한제국 시기쯤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과 대한제국의 최첨단 CCTV 물론 이건 현대에 관리용으로 달아 놓은 것이겠지요. 덧붙이자면 인정전 같은 큰 전각의 내부에는 로봇청소기도 돌아다닙니다. ㅡㅡ;



 이곳은 대조전의 일부인 청향각인데, 전각 옆에 붙은 굴뚝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곳 뿐만 아니라 서울의 조선 궁궐을 돌아다니면 저렇게 수수하면서도 예쁘게 쌓아올린 굴뚝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조전을 나와 희정당 옆을 지나치면 세자가 거처했던 성정각이 나옵니다. 블로거가 사진을 거의 찍지 않은 관계로 여기는 그냥 안내간판으로 대체하겠습니다. ㅡㅡ;



 그리고 창덕궁의 한 쪽 구석에는 낙선재가 있습니다. 숙종 때부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해 헌종 시기 크게 중건된 이곳은, 다른 무엇보다도 조선 궁궐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사람이 거주한 곳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공간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한 의친왕과 이방자, 덕혜옹주가 모두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바깥에서 본 낙선재의 풍경. 낙선재의 건물들은 단청을 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전각들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아마도 건물의 위상과 역할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추정되긴 한데, 한참 나중에 교수님에게 물었을 때 교수님은 현대에 문화재를 복원 · 수리하면서 단청이 있고 없고 여부를 제대로 고증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그냥 참고만 해두라고 하셨습니다. ㅡㅡ;



 낙선재 곁으로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사진 왼쪽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오른쪽은 창경궁과 연결된 통로인 함양문입니다. 창덕궁 후원은 종묘와 비슷하게 정해진 시간에 모여 입장하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게 되는데, 정해진 답사 일정에 맞추기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바로 창경궁으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함양문을 통과하면 가장 먼저 창경궁 통명전이 일행을 맞이합니다. 통명전은 왕후의 침전으로 쓰였습니다. 주변으로는 이외에도 몇몇 전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곳이 창경궁의 내전 영역이라고 하는군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고 '창경원'이라는 이름의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전락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세기 말엽에야 동물원을 이전하고(이 때 창경원의 대타로 설치된 동물원이 바로 서울대공원 동물원) 본래 모습을 복원하고 있지만 아직은 비어 있는 공간이 많습니다.



 그런 연유로 궁궐 내부에서는 이런저런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답사 당시에는 정전인 명정전 앞에서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왕의 집무실인 문정전은 명정전과 바로 옆-뒤를 맞대고 바짝 붙어 있습니다. 창경궁은 본래 궁궐이 아니었던 곳에 이런저런 건물들을 덧붙여 궁궐로 만든 곳이라 역시 내부 구조가 상당히 독특하다고 합니다.



 아직 한창 복원 중이라 볼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비어 있는 건물터를 노니는 재미도 있겠지만 창경궁은 이 정도만 보고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뒤쪽으로 들어왔으니 정문(홍화문)으로 나가게 되겠지요? 명정전에서 홍화문으로 이어진 길목에 작은 개울(궁궐 내부에 낸 인공하천으로 '금천'이라고 합니다)과 다리가 있는데, 각각 '옥천'과 '옥천교'라고 부릅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길에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시간이 조금 남는 김에 이곳을 짧게 관람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뜰에는 서울에 있다가 철거된 이런저런 건축물들의 잔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하게 생긴 이놈은 박정희 정권 때 지어진 '콘크리트제' 광화문의 부재로, 현재는 철거하고 원래의 재료를 활용하여 다시 지은 것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도 이런저런 전시물들이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옛 서울을 재현한 모형들도 있고



 다양한 유물들도 있습니다. 짐바브웨 달러의 100년 선배가 여기에 ㅡㅡ;



 아무래도 현대의 서울 또한 기억할 게 많다 보니 현대 유물도 많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포크레인은 뭔가 예술작품으로 만든 것 같은데 인상적이어서 한 컷.



 2층에는 블로거가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전시물이 있는데, 서울 전체의 건물들과 지형을 모형화하여 전시한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서울의 웬만한 건물들은 다 있는데 심지어 블로거가 몇 년 전 자취를 하던 다세대주택도 있더군요.



 이렇게 역사박물관을 떠나갑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옛 경희궁 터의 일부에 서 있는데 경희궁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철거된 이후 시가지가 들어서 지금은 복원하기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종로 쪽으로 이동 중. 광화문사거리 앞에는 빌딩숲 가운데 웬 기와건물이 하나 있는데,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는 '기념비각'입니다. 어릴 적 이걸 처음 보고 이게 그 보신각인가 하고 종을 암만 찾아봐도 없어 실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ㅡㅡ;



 광화문~종로 일대에는 이런 것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서울의 중심가였다보니 땅을 파면 옛 건물의 흔적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이곳은 종로타워. 예전에 화신백화점이 있던 곳입니다. 화신백화점의 역사와 이곳에 종로타워가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은 이 글을 참조.



 광화문광장 곁으로 공사장 같은 곳이 있는데, 옛 의정부 구역을 발굴조사하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이번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경복궁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박물관에서 본 그 콘크리트 말고, 제대로 된 재료로 복원한 광화문입니다.



 역시 경복궁은 다른 궁궐과도 차원이 다를 만큼 관람객이 많습니다. ㅡㅡ;



 정전인 근정전의 모습입니다. 이쯤이면 뭐 경복궁 구경 반 사람 구경 반이로군요.



 이곳은 수정전입니다. 이러저러한 용도 변화를 겪었는데 초기에는 집현전 건물로 쓰인 적도 있고, 조선 말에는 군국기무처가 이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특이하게 수정전 앞에서는 이런저런 공연을 하는 모양인데 이 날에는 무슨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계실 그 건물 경회루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전통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지요.



 경복궁의 각 전각 사이를 넘나드는 문은 아무리 작아도 웬만하면 이름이 꼭 붙어 있습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각각 왕과 왕비의 침실로 쓰였습니다.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안내표지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이라고 묶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흠경각과 함원전은 경복궁에서도 상당히 용도가 독특한 공간입니다. 흠경각에는 장영실이 만든 시계인 '옥루'가 설치되었고, 그 일대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천문 관측기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곁의 함원전은 불교 관련 행사가 열린 곳이라는데 조선이 유교 국가였음을 생각하면 궁궐 내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게 상당히 독특하지요? 물론 태조나 세종, 세조 등 조선의 국왕 중에서도 불교를 존중한 사례는 꽤 있으니 말입니다.



 자경전은 대비의 처소입니다. 왕이 죽으면 왕비는 대비로 격상되면서 교태전을 새 왕비에게 넘겨주고 이곳으로 옵니다.



 경복궁 역시 어딘가에서는 항상 공사 중입니다. 열심히 복구 중이긴 하지만 경복궁은 그 자체가 워낙 넓다보니 ㅡㅡ;



 함화당, 집경당을 위시한 흥복전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저 두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어느새 경복궁의 가장 깊은 곳까지 왔습니다. 이 집옥재는 딱 보기에도 아주 독특하게 생긴 건물인데, 벽돌을 사용하여 뭔가 중국적인 분위기도 나고, 하여튼 묘한 느낌을 줍니다. 이곳은 지금도 일반인을 위한 특강 같은 것들을 위해 활용이 되고 있으며, 블로거가 갔을 때도 무슨 강연을 한다고 그랬던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막아 놓았습니다.



 이곳은 건청궁인데, 특이하게 궁궐 내에 있음에도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비슷하게 지어졌으며 역시 단청이 없습니다. 고종이 왕실 사비로 건축하여 명성황후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입니다. 이곳을 나가면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읍읍읍



 다시 들어와서, 이번에는 태원전으로 이동합니다. 이곳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어서 찾아오는 관람객이 별로 없습니다. 답사 온 일행 중에서도 이곳까지 구경하러 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더군요.



 태원전은 왕의 장례를 위해 쓰인 공간입니다. 사진에 복도가 보이시지요?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고 일본군과 미군, 국군까지 번갈아가며 주둔하였다가 이들이 모두 철수한 2000년대 이후에야 다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경복궁 끝까지 갔으니 다시 돌아올 일만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풍기대는 저 위에 깃발을 설치하여 풍향과 풍속을 측정하는, 일종의 기상관측 기구였습니다.



 이제 입구로 거의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옆으로 빠져서 아까 보지 않았던 동궁(東宮) 구역을 잠시 돌아보기로 합니다. 동궁은 세자가 거처했던 공간으로, 현재는 자선당을 비롯한 몇몇 전각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제 경복궁의 전각들은 거의 둘러본 것 같습니다. 이제 대전으로 돌아올 일만 남았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서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을 잠시 둘러보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광화문 옆에 붙어 있고, 과거 국립중앙박물관의 임시 청사로 쓰기도 했습니다. 고궁박물관 답게 왕실 관련 물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협생문을 지나면 이제 모든 답사가 종료됩니다. 


 이번 서울 답사를 두고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답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은 수백 년 이상, 그리고 현재도 한국의 중심이며 당연히 역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서울의 역사적 흔적은 근대 이후 도시개발의 와중에도 상당 부분 보존되어 있고, 이를 돌아보는 데 2박 3일로도 턱없이 부족함을 절감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서울 답사가 어렵다고 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은 정말로 한국사를 이해하기 위해 꼭 돌아보아야 할 공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한정된 답사 기간만으로 서울의 역사를 보았다고 하기엔 부끄럽겠지만 그 조그만 한 구석이라도 목도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조금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실 아쉬움보다는 빨리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답사 인원들은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각자 다음을 기약하며......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년 추계답사 - 2일차 (2)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갈 길이 바쁩니다. 도중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도 잠시 들러서 관람을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근처에는 과거 서울에서 운행한 전차가 하나 전시되어 있습니다.



 길을 건너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웬 흰색 탑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곳입니다.



 아마 저 사진을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보신 분들도 있겠네요. 당연히 저 탑 하나만 달랑 있었던 건 아니고, 원래 이곳에는 꽤 큰 건물이 있었고 탑은 그 한켠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때 나머지는 다 박살나고 저 탑만 달랑 남아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러시아 공사관은 아관파천의 주무대입니다.



 여기서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정동거리인데, 이곳에는 옛 이화학당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그 옆으로는 이화여고 건물이 있는데 거기까지 갈 일은 없지요).



 이곳은 작은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나름 이화학당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만큼 들러서 관람할 만은 한 곳입니다. 참고로 여기는 처음 왔을 때는 입구가 반대편에 있어서 어디인지 헷갈립니다. ㅡㅡ;



 그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중명전. 이곳은 본래 덕수궁의 일부였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덕수궁 권역이 난도질당하고 쪼그라들면서 ㅡㅡ; 현재는 덕수궁 권역 밖으로 밀려난 건물입니다. 본래는 황제의 개인 도서관이었고,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로는 한동안 고종의 편전(집무실)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명전의 모습. 현재는 덕수궁과 떨어져 외롭게 놓여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에 있던 여러 서양식 건축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곳이 한동안 황제의 집무공간으로 쓰였다 보니 본의아니게 역사적 대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아래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명전의 전시는 대부분 을사늑약을 중심으로 짜여 있습니다.



 내부에는 이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인쇄해놓은 종이들과 거기에 대한제국 어새(御璽)를 찍어볼 수 있는 체험코너가 있습니다. 물론 이 친서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실제 고종 황제의 어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쯤에서 나와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역시 정동거리는 볼 게 많은데, 중간에 있는 정동제일교회 역시 역사적으로 볼 거리가 됩니다만 무슨 공사를 하는지 밖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조금 더 걸으면 시청광장이 나옵니다. 생각하면 블로거는 1년 전만 해도 이곳으로 출퇴근과 통학을 매일같이 했는데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있는 그 많은 역사들을 그냥 지나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이제 시청광장 반대편으로 가면 요런 곳이 있는데,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현재 환구단으로 가는 출입구는 저기 있는 저 문이 아니라 그 오른쪽에 있는 샛길입니다. 어째 블로거의 기억에는 저 문 앞에서 재능교육 노동자들이 매일같이 시위를 하던 게 기억나네요. 저기가 재능교육 본사 바로 앞이다보니......



 샛길로 들어가면 환구단 가는 길이 친절......한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약도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약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환구단의 '황궁우'가 나옵니다. 환구단은 원구단이라고도 하며 본래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공간에 여러 건축물이 있었지만(본래 환구단의 본단은 황궁우 앞에 따로 있었음), 대한제국 멸망 이후 황궁우와 석고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철거되고 그곳에 호텔(現 조선호텔)이 지어집니다.



 황궁우 곁에 있는 석고단의 모습.



 이제 조별관람을 해야 하는 장소들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명동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중간에 봐야 할 게 또 있지요. 현재 신세계백화점 건물로 쓰이는 옛 미쓰코시백화점 건물과 그 옆에 있는 옛 조선저축은행(現 SC제일은행) 건물, 그리고 사진 이편에 있어 나오지 않은 옛 조선은행(한국은행) 건물입니다. 이곳은 밖에서 건물만 둘러보고 지나가기로 합니다.



 명동에서 점심식사. 다들 하루종일 걷느라 배가 고픈 김에 돈 좀 들여서 한식부페에 갔습니다.



 이제는 걷지 말고 전철을 통하여 이동합니다. 명동에서 4호선 전철을 타면 국립중앙박물관(이촌역)으로 바로 갈 수 있지요.



 이곳은 다시 단체관람(이래봐야 박물관 내에서는 또 자유관람이지만). 블로거는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데, 뭐 이거야 개인 취향의 문제인가 싶어 그러려니 합니다.



 역시 시작은 구석기시대부터 -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는 돌덩이 양쪽을 깨뜨려 만든 것으로, 당시 세계 구석기시대 연구에 큰 영향을 준 대발견이었습니다. 당시 전곡리에 애인과 함께 휴가를 나온 주한미군이 강변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죠. 역시 연애는 좋은 것이다



 예전에 배로 쓰였을 나무조각도 있는데, 블로거의 짧은 식견에는 저걸 보고 어떻게 배의 흔적임을 알았을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빗살무늬토기야 뭐 모르시는 분 없으실 테고



 그리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농경무늬 청동기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저 크지 않은 공간에 농사짓는 사람의 모습 등 당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치



 호우명 그릇은 신라 경주에서 발굴된 주제(?)에 광개토대왕의 호칭이 새겨져 있어 주목을 끌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게 발견된 신라 무덤 '호우총'은 1946년 발굴되어 한국인이 직접 발굴한 최초의 유적입니다.



 신라 금관이야 당연히 빼놓을 수 없지요. 신라의 금관은 나뭇가지를 둘러 꽂아놓은 듯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북아시아(시베리아) 샤머니즘 문화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의 샤먼들이 나뭇가지를 꽂은 모자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의식을 거행하거든요.



 가운데의 로비에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우뚝하니 서 있습니다. 경천사는 본래 개성에 있었던 절인데,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 궁내대신이 한국을 방문했다가 이걸 보고 해체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했고 ㅡㅡ; 이게 알려져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다시 한국으로 반환하여 경복궁 내에 재건해 놓은 것을 여기로 옮겼다는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려 이전의 유물 중에는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발해의 건축물에 쓰인 기와 중 하나. 크고 아름답습니다.



 아주 도발적인 자세와 큰머리 때문에 블로거의 눈길을 끌었던 불상.



 어느새 조선시대로 넘어왔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관람객을 반깁니다. 조선시대의 어진은 남아있는 게 몇 없는데, 한국전쟁 직후 부산에 보관 중이던 어진을 포함한 많은 문화재들이 큰 화재로 대거 소실되었기 때문입니다. ㅡㅡ; 전북 전주에 있는 경기전에서도 조선시대 어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음악 취미 있는 사람이 이걸 빼먹을 수 없지요. 편경은 당시에 국악기의 음을 조율하는 기준악기였는데, 세종대왕은 편경의 소리를 듣고 아주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절대음감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못하는 게 뭐냐 당신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초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로, 자세히 보면 당시까지 한국인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세계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한중일 외에는 아주 조그맣게 압축되어 '이런 게 있다' 수준이긴 하지만 ㅡㅡ;



 코끼리 모양 도자기......라고는 한데 아무래도 코끼리를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충 이야기만 듣고 상상으로 만든 녀석 같습니다. 뭐 한반도에는 예나 지금이나 코끼리가 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요~~~~~!!



 이제는 웬만큼 알려져 있지만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 목판을 불태우고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다는 말은 명백한 개소리입니다. 무엇보다도 대동여지도 목판이 다수 남아 있기 때문에 ㅡㅡ;



 백자는 참 간결한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척화비와 당시의 조선 대포. 자주적인 모습이었긴 하지만 당시 저 대포로는 서양의 철갑선에 제대로 흠집 하나 내기 어려웠다는 근본적 한계도 있었습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불교유물을 집중적으로 모아 놓은 전시관도 있습니다. 불상도 있고



 벽면에는 거대한 불화(佛畵)도 걸려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외국의 유물도 일부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약탈을 해 온 건 아닐테니 문제될 건 없겠지요. 인도와 동남아시아 쪽 유물도



 중국의 유물도



 일본의 유물도 있습니다.



 드넓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구름이 은은하게 낀 하늘이 예뻐 보이네요. 이것으로 2일차 일정도 모두 끝났고 블로거의 전화기에 있는 만보계는 이 날 하루 24,000걸음을 찍었습니다. ㅡㅡ;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년 추계답사 - 2일차 (1)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첫날 뒷풀이에서 뭐에 홀렸는지 술을 들이붓고 ㅡㅡ; 다음날 아침에 간신히 깨어 답사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서울의 아침 하늘을 오랜만에 보려니 기분이 묘하네요. 첫 번째 행선지는 덕수궁 단체관람입니다.



 덕수궁의 본래 명칭은 '경운궁'으로,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거처하면서 왕궁이 되었습니다. 광해군 때 이후로는 궁궐이란 이름만 붙었지 별 볼 일 없는 곳이었고,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온 고종이 이곳으로 돌아와 거처하면서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왜 하필 이곳이었냐고요? 덕수궁은 바로 근처에 외국 공사관들이 많이 있어서, 유사시에 몸을 피하거나 외국 외교관들과 교류하는 데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입니다. 본래 이 건물은 경복궁 근정전처럼 2층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1904년 덕수궁을 홀라당 태워먹은 큰 화재 이후 재건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당시 대한제국의 사정이 좋지도 않았는데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다시 짓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중화전은 건물 내부로 들어가서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용상 뿐만 아니라 건물 내부 구조나 장식들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중화전에 관한 간략한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마 덕수궁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물일 석조전으로 가 보겠습니다.



 석조전은 1910년 완공되었고, 말년의 고종이 생활하다가 고종의 승하 이후로는 박물관과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내부가 상당히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009년부터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했고, 2014년 완료되어 현재는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석조전 정면의 지붕 쪽에는 가운데 꽃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오얏꽃 문양입니다. 왜 오얏꽃이냐면 李(오얏 리)씨니까......



 석조전 앞으로는 연못과 실물인지 모형인지 모를 앙부일구가 놓여 있습니다.



 석조전 1층은 예약 관람을 해야 하고, 인원 수도 제한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지하층에 역사관이 마련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데, 이쪽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다른 쪽으로 돌아가면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공간이 크지는 않지만 나름 볼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대한제국 군악대에 관한 영상을 한쪽에서 틀어주는데, 나름 군악대 출신인 블로거가 지나칠 수 없지요.



 대한제국 여권에 관한 설명인데 이 옆에는 당시의 방식으로 여권을 인쇄하고 도장까지 찍을 수 있는 체험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석조전의 역사와 복원 과정을 설명해 놓은 공간도 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중화전 앞쪽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저 때 블로거를 포함하여 답사 인원들이 집단으로 뭐가 씌었는지 정관헌 쪽을 보고 온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나중에 말을 좀 들었습니다. ㅡㅡ;



 중화전이 정전이니만큼 그 앞에는 문무 관료들이 품계별로 도열하는 공간도 있습니다.



 덕수궁 관람은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조별로 흩어져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관람을 해야 하는데 블로거의 조는 서대문형무소에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입구에 도착.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처음 건설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와 독재권력을 거치며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며 확장에 확장을 거듭, 거대한 규모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서울구치소는 경기도로 이전하였고, 이후 일종의 기념관+박물관으로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입구는 이렇게 한켠에 조그맣게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가면 눈앞에 전시관 건물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이곳은 형무소 시절에는 본청으로 쓰였던 건물입니다.



 한창 때의 형무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현재의 역사관은 예전 형무소 건물 중 일부만 남겨 놓은 것).



 이곳을 관람하면서 상기하게 되는 것은, 서대문형무소는 단순히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독재시대에도 동일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구한말 항일의병장에 대한 판결문. 일본어로 쓰여 있는 게 보이시나요?



 이것은 수감자의 허리에 묶은 족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시관 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 벽에 있는 사진 하나하나는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을 기록한 관리카드로, 수감자의 이름과 신상정보, 수감일자, 사진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벽으로 다가가 저걸 하나하나 살펴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집니다.



 계속 관람을 진행하지요. 전시관에는 사형장 지하에 마련된 시신수습실 모형이 있는데, 실제 사형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취조실은 사람 모형을 가져다 놓아 실감나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건 당시 일본군 헌병들이 들고 다닌 태(몽둥이)인 것 같습니다. 1910년대 한반도의 치안은 일본군 헌병이 담당했고, 그들은 즉결처분권태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인을 말 그대로 두들겨패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하지요.



 취조 중 저질러진 고문에 관한 것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계속 자행된 일입니다.



 여기까지 관람하고 '중앙사'로 이동합니다. 중앙사는 옥사와 연결되어 수감자들을 감시 관리한 곳입니다.



 간부들이 차고 다녔다는 칼입니다. 권위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다니 역시 일본답네요.



 중앙사는 말 그대로 '파놉티콘'을 현실화해 놓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가운데 한 명만 있으면 모든 옥사를 한꺼번에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옥사 내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볼 수도 있습니다.



 수감자들은 상호간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필요할 때는 별별 기발한 방법을 다 활용했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벽을 두드려 (아마도 모스부호처럼?) 의사소통을 하는 '타벽통보법'이라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용변 배출구'라고 합니다. ㅡㅡ;



 옥사의 다른 방에는 이곳에 수감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 시기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하거나 고초를 겪은 재일교포들의 사례도 있고



 이곳에 수감된 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에 대한 소개도 되어 있습니다.



 옥사 관람은 여기까지 하고 '공작사'로 이동합니다. 이곳은 수감자들이 노역을 하는 곳이었는데, 물론 노역 자체는 현재 징역을 사는 사람들도 하는 것이지만 이게 조금만 삐딱해지면 그야말로 노동착취가 되지요. 북한 : ????



 이쯤에서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습니다(서대문형무소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도 그만큼 볼 게 많습니다). 이곳은 빨래터로 활용된 사각연못인데, 초기에는 옆의 공작사처럼 수감자들이 노역을 하는 공장이 있었다는군요. 왼쪽 위로 올라가면 한센병 환자들이 수감된 '한센병사'가 있는데 여기는 시간이 없어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형무소 건물에 걸린 대형 태극기는 어딘가에서 많이들 보셨을 장면 같네요.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사형장을 지나칠 수는 없지요. 한국은 현재 실질적 사형 폐지국가이지만 형무소가 운영될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형장 내부의 모습. 가운데의 공간에서 사형수가 교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 앞의 의자와 테이블은 아마 사형 집행 전에 유언을 남긴다든지 하는 절차가 이루어진 공간이겠지요? 이곳은 안에 들어갈 수는 없고 밖에서 관람을 해야 합니다.



 사형장에서 나와 이동하는 길. 이곳도 본래는 옥사였다는데 지금은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이렇게 길 주변으로 벽돌만 남아 있습니다. 벽돌에 '京(서울 경)'자 마크가 찍혀 있는데 이곳(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만들어진 벽돌에 찍힌 낙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상당히 독특한 공간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요?



 이곳의 명칭은 '격벽장'으로, 수감자들이 정기적으로 운동(Sports)을 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도 수감자들이 서로 얼굴 마주치지 못하도록 각 공간을 벽으로 막아 놓고, 공간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가운데에서 간수가 모두를 동시에 감시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역시 파놉티콘의 위엄이란......ㅡㅡ;



 이제 나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 외에도 더 관람할 곳이 남아 있습니다만 일정상 장소를 이동해야 하는 게 단체 답사의 한계라면 한계인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나가는 길에 해체되어 밖에 놓여 있는 형무소 건축물 부재들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동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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