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는 마치 '여행자를 위한 신비의 장소'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블로거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도편을 읽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 제주도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죠(정작 여행을 갈 때 저 책을 들고 가지도 않았던 건 함정). 어떻게 기회가 닿아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었고, 예상한 대로(?) 블로거는 제주도의 팬이 되었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그런데 과연 제주도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어당기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여행자의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막연한 동경심에 불과할 따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주도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어쩌면 블로거에게는, 육지와는 다른 제주도의 역사, 그리고 이를 통하여 만들어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매력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제주도는 우선 독자적인 창조신화와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지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는 의미죠. 당장 한반도의 건국신화 중 난생(卵生)설화가 아닌 것은 (단군신화 정도를 제외하면) 탐라 건국신화밖엔 없습니다. 사실 제주도가 한반도의 일부가 된지 1천 년 가까이 지났다면 탐라 건국신화 역시 한반도의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칠 법도 한데, 2015년 현재까지 한국의 교과서는 탐라의 신화와 역사를 철저히 외면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탐라 소멸 이후 제주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성혈 신화는 화산지형과 함께 해 온 탐라인들만의 문화코드)


 - 이후 한반도의 일원으로서 제주도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폭력과 수난의 연속입니다. 제주도의 소유권은 고려, 몽골, 조선, 일본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집니다만 제주도를 지배한 육지의 권력은 하나같이 제주도를 착취와 탄압의 대상으로 다루게 됩니다. 몽골과 고려 정부에 대항했던 삼별초,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삼별초를 이후의 제주도 문화에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후 제주도는 몽골의 식민지가 되어 말 생산지로 변모하였으며, 이후 고려-조선 교체기에 발생한 '목호의 난'은 제주인이 아닌 몽골인 목호(牧胡)들이 벌인 반란입니다.


 - 조선시대 제주도는 본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제주도의 말 목장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거기에 덧붙여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감귤을 매우 먹고 싶어했죠. 제주인들은 목장의 말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야 했고, 운송 과정에서 썩을 경우에 대비하여 계획보다 훨씬 많은 감귤을 생산하여 진상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착취에 주민 이탈이 우려되자, 육지의 권력은 제주도민들에게 번듯한 선박을 생산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예 바다로 나서지도 못하게 한 것이죠.


 - 하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배를 타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서 고기잡이 뗏목 '테우'가 등장합니다. 남자들이 뗏목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어업을 하다 보니 남성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고,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여자가 많은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제주도의 3다에 '여자'가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주도는 결코 평화롭게 한반도의 일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거상 김만덕이 육지로 건너가 금강산 한 번 구경해보는 것을 소원이라 말했던, 그러한 한(恨)을 제주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말기, 제주도는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일본제국은 '옥쇄' 따위를 부르짖으며 본토와 남은 점령지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하는데, 제주도 역시 일본에 의해 철저히 요새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제주도 곳곳의 해안 절벽에는 바닷물의 침식으로 생겼다 보기 어려운 동굴들이 많은데, 이는 대부분 일본군의 비밀 요새로 쓰기 위해 뚫어놓은 것입니다. 이 동굴들을 누구의 노동으로 뚫었을까요? 당연히 제주인들이었겠죠.


 - 그나마 다행히도 제주도는 오키나와처럼 실제 전장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방이 되고 한 숨 채 돌리기도 전에 제주도 역사상 최대의 참사, 4.3 대학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 일제강점기 제주인들 중에는 일본으로 일하러 건너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 당시 일본 내에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고 좌파 성향을 띠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전반적으로 미군정에 협조적이었는데,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벌어진 인명사고를 계기로 경찰과 제주인들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됩니다. 육지의 지배도 매끄럽지 못하던 미군정 쪽에서는 제주도의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경찰이 교체되는데 교체된 인원들이 하필이면 서북청년단......


 - 국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한라산과 중산간마을은 출입이 금지되고 기존의 주민들은 모두 해안으로 소개당했으며,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상당수의 주민들은 오히려 한라산으로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었지만 제주도의 남로당 세력은 단선 반대를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키고,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등 제주도는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 이 와중에 국군의 지휘관은 유재흥(劉載興)으로 교체되고, 유재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전략을 펼쳐 한라산에 숨어들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돌아오고 어느 정도 사태는 수습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악화되어 대규모의 학살이 계속되었고, 이는 1954년 한라산의 입산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 4.3은 제주도에 헤어날 수 없는 상처를 안겼습니다. 4.3으로 인해 찍힌 낙인을 벗고자 제주인들은 한국전쟁 기간에 (전사 비율이 매우 높았던) 해병대에 앞다투어 지원하였고, 제주인들에게 찍힌 낙인을 피하고자 이들은 제주인의 언어를 버리고 한국 표준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노력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여서 현재는 유네스코가 '제주어'를 '사멸 위기 4단계'로 지정할 지경에 이릅니다. 주변에 제주 출신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제주어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블로거는 제주도를 여행하면서도 제주어를 그닥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 섬 특유의 폐쇄성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적 상처가 있다 보니, 제주도는 육지 출신자들에게 알게모르게 배타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는 수백만의 관광객이 드나들며 육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온 지금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여당은 '괸당(친척)'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제주도의 지방정치는 가히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긴 하지만, 제주인들에게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충분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제주도는 이런 곳입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제주도의 역사를 알고 거기에 공감하고 싶어질 겁니다. 아마 블로거만의 감성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남해바다 한가운데 굳게 서 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비바람도, 그 어떤 차별과 착취와 탄압에도 제주도에는 제주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곳에 애정을 갖지 않겠습니까.


 - 결국 블로거는 제주도에 다시 한 번 가게 될 겁니다. 아직 블로거는 중산간지역에도 가 보지 못했고, 한라산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제주도의 사람들과도 충분히 만나보았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제주도는 보면 볼수록 더 넓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조만간, 두 번째 여행기를 올릴 수 있겠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 힘겨워서, 이번 여행기는 이 쯤에서 갈무리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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