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날 필름이 살짝 끊어지고......ㅡㅡ; 그래도 숙취는 별로 없는 상태로 깨어나서 다시 출발합니다. 역시 술은 섞어서 먹지만 않으면 숙취가 한결 덜하군요. 오늘은 제주도의 서쪽 바닷가를 거의 완주하게 될 겁니다.


 - 제주도의 지형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겠지만, 제주도의 서쪽과 동쪽 해안은 상대적으로 평탄하고 큰 언덕도 별로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기엔 상당히 좋은 환경이죠. 거리 계산에 살짝 착오가 있어서 처음 생각보다는 좀 짧게 달리게 됐지만, 조금만 더 부지런히 달리면 (블로거 같은 약골들도) 애월부터 모슬포까지 서부 해안 전체를 하루 내에 주파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저런 식으로 트럭에 판을 만들어놓은 길거리 까페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숨도 돌릴 겸 경치 구경도 할 겸 음료수 한 잔 마시고 갑니다. 곁가지로 일주일간 고생한 자전거 특별출연.



 - 특이하게도 솟대가 바다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 얼마 후 한림항을 지나갑니다. 해안을 타고 가다보면 역시 크고 작은 포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한림항이나 애월항처럼 읍내에 붙은 항구들은 규모도 크고 확장공사 중인 경우도 많이 있더군요.



 - 한림의 해안에서는 바다 건너 비양도라는 섬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 보면 "바다에서 붉은 물(용암)이 솟아올라 굳어 섬이 만들어졌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비양도라고 보는 견해가 적지 않습니다. 다만 지질학적으로 훨씬 오래 전에 섬이 만들어졌을 거라는 의견도 있어 진위 여부가 확실치는 않습니다. 한번 가보고픈 마음은 있었으나 배가 하루에 달랑 두 번만 있는 관계로 해안에서 지켜보는 정도로만 만족하기로 합니다.



 - 협재해변을 지나서......



 - 한림읍과 한경면의 경계쯤인 월령리 일대에는 넓은 선인장 자생지가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일대에서는 아예 선인장을 작물로 재배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 일주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 일대에 온통 선인장이 깔려있는 인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일주도로를 한창 달리다가 다시 해안쪽으로 빠집니다. 한경면사무소가 있는 신창리 마을길을 지나면 해안도로가 나타납니다.



 - 제주도 해안은 바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풍력발전소가 군데군데 만들어져 있습니다. 거대한 풍차들의 숲(?)을 지나서, 한참 달리다 보면 해안도로가 잠시 끊어집니다. 바다에 바짝 붙어서 봉우리가 하나 있기 때문.



 - 당산봉을 끼고 돌아가면 작은 포구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바다 건너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가는 배를 운행합니다. 그 섬의 이름은 차귀도. 약 1만5천원 정도를 내면 정기적으로 출항하는 차귀도 관광 유람선을 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포구에서는 차귀도 관광 자체보다 그 근처 바다에서 할 수 있는 배낚시가 더 유명하지요. 시간이 좀 남으니 유람선을 타보기로 합니다. 시간은 대략 1시간 반 정도 잡으면 됩니다.



 - 차귀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일단 무언가를 '채취'하면 안 되죠. 돌이라든지, 해산물이라든지. 바닷가 돌에 해초가 잔뜩 있어서 좋다고 달려가는 아주머니들도 계시고 했는데, 불법입니다(그 분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차귀도에는 원래 몇 가구 정도가 거주하는 유인도였다는데, 1970년대에 사람들이 다 떠나고 지금은 무인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집 흔적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유적이라기엔 살짝 모자라지만 앞으로 100년쯤 후엔 또 모르겠죠.


 - 포구로 돌아와서 다시 자전거에 탑니다. 조금 더 달리면 제주시를 벗어나 서귀포시로 들어가게 됩니다.



 - 이곳에서 길을 살짝 헤맸습니다. 얼마전에 일주도로가 넓은 길로 새로 뚫린 모양인데, 네이버 지도에는 옛날 길을 일주도로라고 표시해 놓았더군요. 새 길은 제대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착오를 일으켰고, 결국 예측보다 좀 늦게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3일차 게스트하우스 : 인연 게스트하우스




 - 5월 3일 저녁, 비행기를 타러 김포공항으로 향합니다. 20시 20분 출발 진에어 LJ341편.



 - 그런데 시작부터 지연... ㅡㅡ; 제주공항 쪽 기상문제 때문에 1시간 이상 늦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제주공항 쪽은 이런 게 일상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모양이더군요. 아무튼 제주에 도착, 체크인 끝나는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게스트하우스에 골인할 수 있었습니다.


#1일차 게스트하우스 : 숨 게스트하우스 제주공항점



 - 4일 오전에 체크아웃을 하고 일단 나옵니다. 짐이 쓸데없이 많아서 영 곤란하네요. ㅡㅡ; 갈 길이 멀다고 짐까지 무겁게 할 필요는 없다는 교훈을 얻으며 일단 시내에 있는 삼성혈로 향합니다.



 - 삼성혈은 탐라 건국 신화의 무대입니다. 역사덕후의 여행이라면 역시 그 동네의 기원부터 시작을 해야겠죠. 삼성혈에는 (아마도 용암 관련 지형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구멍이 땅에 나 있는데, 각각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가 이 구멍에서 출현하였다고 합니다. 수렵 생활을 하던 이들은 육지의 벽랑국에서 건너온 세 공주와 각각 혼인하였고, 공주들과 함께 건너온 곡식종자와 가축들을 바탕으로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신화의 내용입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제주를 본관으로 하는 세 성씨 -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 창조신화와 건국신화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제주도라는 곳이 육지와는 다른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세 시조의 혼인과 관련한 유적으로 혼인지와 신방굴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앞으로 제주도를 돌면서 방문하게 될 겁니다.


 - 삼성혈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자전거를 빌리러 이동합니다. 미리 예약을 해 두었으니 수령하기만 하면 됩니다.



 - 제주도 여행 내내 볼 수 있는 특이점이라면, 육지에서 콘크리트나 화강암 정도가 있을법한 공간을 제주도에서는 현무암을 비롯한 화산암이 채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 예약해둔 대여점(OK하이킹)에서 자전거를 빌립니다. 주인 아저씨가 "그래도 장기간 타고 다닐 건데"라는 말과 함께 자전거도 노펑크타이어로 바꿔주시고 비 올 때용 우비와 비닐봉투, 헬멧도 챙겨 주십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들이 으레 그렇듯 상태 자체는 과히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ㅡㅡ; 어차피 튼튼하게 8일간 버티기만 하면 되니, 이 정도라도 어딥니까.


 - 일단 자전거를 타고 갈 첫 행선지는 조금만 올라가면 볼 수 있는 용두암으로 정했습니다. 어차피 해안도로를 타고 가려면 그 쪽으로 가야 하는군요.



 - 이 곳에는 유커들이 참 많이 옵니다. 용두암 뿐만 아니라 이름 한 번쯤 들어봤을법한 유명한 곳은 어디서든 중국어를 서라운드(?)로 들을 수 있지요. 중국인이 어떻고 하는 소리를 하고 싶진 않고, 단지 적당히 조용한 분위기의 여행을 좋아하는 블로거의 입장에서 사람 몰리는 시끄러운 곳이 썩 좋지는 않았다는 정도로만 정리해 두겠습니다. 아무튼 제주 바다와의 첫 만남을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해안도로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 갯벌이 별로 없는 제주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저런 해안 바위에 바닷물을 가둬놓고 물을 증발시키는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했다고 합니다. 바닷물을 가둬놓는 사진과 같은 넓은 바위지형을 '소금빌레'라고 하죠. 용두암에서 애월 방향 해안도로를 타면 제주공항 건너편을 지나가게 되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비행기가 낮게 오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하다 보면 해안도로와 일주도로(1132번 지방도)를 계속 오가면서 다니게 되는데, 블로거는 애월해안도로는 힘이 많이 드니 가급적 이용하지 말고 내륙의 일주도로를 이용하라는 대여점 주인 아저씨의 말씀을 깜빡하는 바람에 첫날부터 상당한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ㅡㅡ; 해안도로 주제에 언덕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블로거가 평소에 자전거 라이딩을 하던 사람도 아닌지라 정말 힘듭니다.



 - 힘들건 말건 경치 하나는 멋집니다.


 - 힘들게 해안도로를 달리며 간신히 오늘의 목적지인 애월읍에 도착합니다.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는 읍내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습니다.


 - 그런데 아무래도 피부가 심각하게 타 버렸습니다. ㅡㅡ; 특히 코와 팔은 거의 새빨갛게 익어서 따끔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날이 덥지 않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게 화근이었던 것 같네요. 그나마 팔은 막판에 토시를 사서 쓰고 다녔는데도 이 정도라니 앞으로 대책을 확실히 세우지 않으면 큰일나겠다 싶습니다.


#2일차 게스트하우스 : 오누 게스트하우스




 - 누구나 여행을 가 보고 싶은 곳 한두 군데쯤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그만큼 다양하게 있겠죠. 나에게 여행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역사 오덕(?)이라서 그런가, 무언가 역사적으로 절절한 사연 한 권쯤 가지고 있을 동네들이 나의 버킷리스트로 남아 있습니다. 오키나와의 고난의 역사, 쿠바의 사회주의로 살아남기, 이집트의 고대와 근현대, 중국 천안문의 어제와 오늘 등등.


 - 한국에서 그런 곳을 꼽으라면 단연 제주도가 될 겁니다. 독자적 창조신화를 가진 '탐라국', 한반도 왕조의 실질적 식민지이자 착취의 보고, 삼별초 최후의 보루, 몽골 제국의 말 목장, 최악의 유배지, 출륙 금지령, 가장 학구적이며 가장 진보적이었던 근대사, 4.3 대학살과 이후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지워야만 했던 핏빛 현대사까지.


 - 이런 곳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여행을 떠나 본 적은 거의 없었던 처지,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는 서글픈 쳇바퀴를 돌리며 살아왔던 나에게 이번 휴식기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막판 시험대비로 바쁘던 중 문득 '제주도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망설임 없이 출발 비행기편을 예매합니다.


 - 네. 정말 아무 계획도 없다시피합니다. 처음엔 언제 돌아올지도 계획이 없었더랍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대책은 세워야겠다 싶어서, 교통수단은 자전거로 정하고, 8일 후에 돌아오는 비행기편을 예매하고 첫 이틀간의 숙소를 예약해둡니다. 8일이라는 시간제한이 있으니 하루에 대강 어디까지 가본다라는 정도 구상도 해 봅니다. 그걸 빼면 정말 아무런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습니다.


 - 뭐 그렇게 대책없이 여행을 가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내가 본 적도 없는 곳으로 가면서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는 건 가능이나 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해안도로를 달리며, 멋진 곳이 있거들랑 잠시 자전거 세워두고 바닷바람과 함께 쉬다가, 또 달리다가, 해가 지거든 멈춰선 동네에서 숙소를 잡고 다른 여행자들과 소소한 파티. 뭐 이런 게 여행의 맛 아닐까 싶었습니다. 물론 돈 문제를 좀 안일하게 생각했다가 좀 불안불안한 상황이 되긴 했지만


 - 묘한 설렘이 휘감아돕니다. 내일 밤 나를 맞이할 제주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 곳에는 어떤 자연과, 어떤 역사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내일의 짐을 준비합니다. 초짜 여행자의 제주여행, 거기서 나는 어떤 것을 남길 수 있을까요.




 - 그럼, 돌아와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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