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년 추계답사 - 1일차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2017년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추계답사 지역은 서울특별시입니다. 서울이 오랜 기간 수도로 기능하였고 답사할 역사적 요소 또한 풍부하긴 하지만, 역사교육과 역사상 과 출범 초기에 한 번 다녀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사례가 없었을 만큼 서울 답사는 준비에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숙소 잡는 문제 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운 좋게도 괜찮은 숙소를 서울 시내에 잡게 되어 성사될 수 있었다는 후문입니다.



 그렇게 2박 3일간의 서울 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전 오랜 기간 서울을 터전으로 살다가 이제는 '답사'하러 방문하는 입장이 되니, 기분이 묘하네요.



 숙소에 짐을 놓아 두고 본격적으로 답사 일정을 진행합니다. 첫 순서는 사직단으로,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이곳은 북신문으로, 현재는 사직단 구역 내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대문은 이게 아니고 다른 쪽에 있습니다(본래의 대문은 현재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직단 내부 구역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실제 사직단의 핵심 구역은 저 앞에 있는 작은 담장과 홍살문 안쪽인데, 이곳은 현재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관람객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담장 너머로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중심에는 단이 두 개 있는데, 각각 사(社, 토지의 신)와 직(稷, 곡식의 신)에게 바치는 제단입니다(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 사직단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되었다가(사직을 끊는다는 의미였다고 하네요) 1980년대 말 복원사업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직단에서 조금 일찍 빠져나와 다음 장소로 향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답사는 조금 특이하게, 조별로 나누어 정해진 시간 내에 대상 장소들을 자유롭게 찾아다니며 관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물론 시간 맞추어 단체관람하는 곳도 있고요).



 다음 장소는 종묘입니다. 표지판에 세계유산이라는 문구가 자랑스럽(?)게 박혀 있네요. 종묘는 매주 토요일을 제외한 날에는 자유관람을 할 수는 없고, 정해진 시각(대략 1시간마다)에 함께 입장하여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단체관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한 시간 뒤에 관람할 것으로 시간이 짜여 있었는데 조금 빨리 움직인 덕에 아슬아슬하게 앞 조와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어 입구로 들어가면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종묘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해설사께서 신신당부하는 사항으로, 입구에서 뻗어 있는 저 돌길의 가운데 부분은 신로(神路)이며 임금조차도 함부로 밟으면 안 되는 부분이니, 관람 시 절대 밟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끔 저기를 밟고 다니는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이를 설명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는군요. ㅡㅡ; 관람 시 주의합시다.



 종묘의 구조는 대략 저렇게 생겼습니다. 가운데 정전의 미친 존재감(?)이 눈에 띄는데, 실제로 정전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길이가 긴 목조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합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해설사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십니다. 여긴 어디에 대한 설명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네요.



 이곳은 재궁(齋宮)으로, 왕과 세자가 제사를 준비하고 목욕재계를 하는 곳입니다. 사진에는 건물 하나만 나와 있는데 실제로는 총 세 채의 건물이 있습니다. 각각 왕이 있는 곳, 세자가 있는 곳, 그리고 목욕을 하는 곳이라는군요.


 그리고 대망의 정전으로 이동합니다. 어찌나 큰지 한 컷에 다 찍기도 어렵습니다. ㅡㅡ; 본래 정전은 저렇게 큰 건물이 아니었지만, 조선왕조가 오래 이어지면서 왕이 죽을 때마다 건물을 증축하여 신위를 새로 모시는 통에 저렇게 긴 모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가 신라만큼 오래 갔으면 종묘 담장을 뚫고 나갔을 듯 다만 조선왕조의 모든 왕이 여기 모셔진 것은 아닌데



 정전에 모실 만큼의 포스(?)가 없는 왕들을 이웃한 영녕전에 모셔 놓았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재위기간이 짧은 왕(정종, 문종, 단종 등), 생전에는 왕이 아니었다가 사후 추존된 왕(덕종, 장조 등)이 여기 해당됩니다. 영친왕(의민황태자) 부부의 신위도 이 곳에 모셔져 있다는군요. 물론 아예 왕 지위를 박탈당하고 복권되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은 여기에도 없습니다.



 블로거는 크고 아름다운 정전보다는 영녕전이 더 좋게 느껴집니다. 뭔가 훨씬 인간미 나고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영녕전까지 관람을 마쳤으면 이제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전체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종묘는 넓은 부지에 비해 건물은 많지 않아서, 곳곳에서 이런 녹지를 볼 수 있습니다.



 종묘를 나오니 점심시간이 되어, 조원들과 함께 근처 칼국수집에 가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까지 시간에 여유가 좀 있어서, 가는 길에 있는 인사동 쌈지길 구경을 하기로 합니다.



 생각해 보니 블로거는 서울에 살던 시절에도 쌈지길에 와 본 적은 없습니다(인사동에는 몇 번 왔지만). 정작 서울을 떠난 이후에 처음으로 와 보게 되네요. 블로거는 여기서 자잘한 물건들을 넣고 다니기 위해 작은 가방을 하나 샀습니다. 가격이 어땠냐고는 묻지 맙시다



 가는 길에 운현궁도 있어서 (답사 일정에는 없지만)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기휴일. ㅡㅡ;



 첫날의 마지막 순서는 국립민속박물관입니다. 쌈지길에서 어떤 가게에 답사자료집을 두고 오는 바람에 중간에 택시를 타고 다시 갔다 오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ㅡㅡ;



 블로거는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하단부는 쓸데없이 위압적으로 지어 놓은데다 위쪽은 목탑 양식(저게 법주사 팔상전을 본따 지었다던가요 아마)을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 들어 그렇습니다. 실제로 건축가들이 뽑은 <해방 이후 최악의 건축물> 목록에도 순위권에 들었을 만큼 논란이 많은 건물입니다.



 심지어 입구 로비에는 저 요상한 조형물을 설치해 놓아 그 위화감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ㅡㅡ; 연꽃 모양인 주제에 색은 시꺼멓고, 심지어 저게 주기적으로 쭈뼛 섰다가 늘어졌다를 반복해서 일종의 공포감까지 줍니다.



 그래도 내부 전시물들은 괜찮습니다. 농경무늬 청동기라든지



 별자리 지도도 있고



 그림이 그려진 병풍도 있으며



 풍물 악기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관람을 마치고 나면 입구 쪽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아까의 그 괴물같은 조형물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까지.



 - 제주도는 마치 '여행자를 위한 신비의 장소'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블로거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도편을 읽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 제주도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죠(정작 여행을 갈 때 저 책을 들고 가지도 않았던 건 함정). 어떻게 기회가 닿아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었고, 예상한 대로(?) 블로거는 제주도의 팬이 되었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그런데 과연 제주도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어당기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여행자의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막연한 동경심에 불과할 따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주도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어쩌면 블로거에게는, 육지와는 다른 제주도의 역사, 그리고 이를 통하여 만들어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매력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제주도는 우선 독자적인 창조신화와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지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는 의미죠. 당장 한반도의 건국신화 중 난생(卵生)설화가 아닌 것은 (단군신화 정도를 제외하면) 탐라 건국신화밖엔 없습니다. 사실 제주도가 한반도의 일부가 된지 1천 년 가까이 지났다면 탐라 건국신화 역시 한반도의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칠 법도 한데, 2015년 현재까지 한국의 교과서는 탐라의 신화와 역사를 철저히 외면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탐라 소멸 이후 제주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성혈 신화는 화산지형과 함께 해 온 탐라인들만의 문화코드)


 - 이후 한반도의 일원으로서 제주도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폭력과 수난의 연속입니다. 제주도의 소유권은 고려, 몽골, 조선, 일본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집니다만 제주도를 지배한 육지의 권력은 하나같이 제주도를 착취와 탄압의 대상으로 다루게 됩니다. 몽골과 고려 정부에 대항했던 삼별초,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삼별초를 이후의 제주도 문화에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후 제주도는 몽골의 식민지가 되어 말 생산지로 변모하였으며, 이후 고려-조선 교체기에 발생한 '목호의 난'은 제주인이 아닌 몽골인 목호(牧胡)들이 벌인 반란입니다.


 - 조선시대 제주도는 본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제주도의 말 목장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거기에 덧붙여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감귤을 매우 먹고 싶어했죠. 제주인들은 목장의 말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야 했고, 운송 과정에서 썩을 경우에 대비하여 계획보다 훨씬 많은 감귤을 생산하여 진상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착취에 주민 이탈이 우려되자, 육지의 권력은 제주도민들에게 번듯한 선박을 생산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예 바다로 나서지도 못하게 한 것이죠.


 - 하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배를 타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서 고기잡이 뗏목 '테우'가 등장합니다. 남자들이 뗏목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어업을 하다 보니 남성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고,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여자가 많은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제주도의 3다에 '여자'가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주도는 결코 평화롭게 한반도의 일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거상 김만덕이 육지로 건너가 금강산 한 번 구경해보는 것을 소원이라 말했던, 그러한 한(恨)을 제주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말기, 제주도는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일본제국은 '옥쇄' 따위를 부르짖으며 본토와 남은 점령지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하는데, 제주도 역시 일본에 의해 철저히 요새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제주도 곳곳의 해안 절벽에는 바닷물의 침식으로 생겼다 보기 어려운 동굴들이 많은데, 이는 대부분 일본군의 비밀 요새로 쓰기 위해 뚫어놓은 것입니다. 이 동굴들을 누구의 노동으로 뚫었을까요? 당연히 제주인들이었겠죠.


 - 그나마 다행히도 제주도는 오키나와처럼 실제 전장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방이 되고 한 숨 채 돌리기도 전에 제주도 역사상 최대의 참사, 4.3 대학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 일제강점기 제주인들 중에는 일본으로 일하러 건너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 당시 일본 내에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고 좌파 성향을 띠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전반적으로 미군정에 협조적이었는데,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벌어진 인명사고를 계기로 경찰과 제주인들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됩니다. 육지의 지배도 매끄럽지 못하던 미군정 쪽에서는 제주도의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경찰이 교체되는데 교체된 인원들이 하필이면 서북청년단......


 - 국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한라산과 중산간마을은 출입이 금지되고 기존의 주민들은 모두 해안으로 소개당했으며,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상당수의 주민들은 오히려 한라산으로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었지만 제주도의 남로당 세력은 단선 반대를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키고,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등 제주도는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 이 와중에 국군의 지휘관은 유재흥(劉載興)으로 교체되고, 유재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전략을 펼쳐 한라산에 숨어들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돌아오고 어느 정도 사태는 수습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악화되어 대규모의 학살이 계속되었고, 이는 1954년 한라산의 입산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 4.3은 제주도에 헤어날 수 없는 상처를 안겼습니다. 4.3으로 인해 찍힌 낙인을 벗고자 제주인들은 한국전쟁 기간에 (전사 비율이 매우 높았던) 해병대에 앞다투어 지원하였고, 제주인들에게 찍힌 낙인을 피하고자 이들은 제주인의 언어를 버리고 한국 표준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노력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여서 현재는 유네스코가 '제주어'를 '사멸 위기 4단계'로 지정할 지경에 이릅니다. 주변에 제주 출신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제주어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블로거는 제주도를 여행하면서도 제주어를 그닥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 섬 특유의 폐쇄성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적 상처가 있다 보니, 제주도는 육지 출신자들에게 알게모르게 배타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는 수백만의 관광객이 드나들며 육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온 지금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여당은 '괸당(친척)'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제주도의 지방정치는 가히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긴 하지만, 제주인들에게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충분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제주도는 이런 곳입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제주도의 역사를 알고 거기에 공감하고 싶어질 겁니다. 아마 블로거만의 감성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남해바다 한가운데 굳게 서 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비바람도, 그 어떤 차별과 착취와 탄압에도 제주도에는 제주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곳에 애정을 갖지 않겠습니까.


 - 결국 블로거는 제주도에 다시 한 번 가게 될 겁니다. 아직 블로거는 중산간지역에도 가 보지 못했고, 한라산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제주도의 사람들과도 충분히 만나보았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제주도는 보면 볼수록 더 넓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조만간, 두 번째 여행기를 올릴 수 있겠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 힘겨워서, 이번 여행기는 이 쯤에서 갈무리하기로 합니다.



 - 배를 채우고 조금 일찍 나옵니다. 자전거가 없으니 무거운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ㅡㅡ;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떨어지고, 산간 지역에는 호우특보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별 생각 없이 제주목 관아를 향합니다(바로 저 '호우특보'가 무슨 의미였는지는 얼마 후 알게 됩니다). 아무래도 짐이 무거우니 택시를 타기로.


 -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도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만, 지금 존재하는 관아 건물들은 모두 1990년대 이후 복원한 것들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입구의 관덕정을 제외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터에는 경찰서와 여러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가(그래서 당시에는 관아지(址)로 불림) 1991년부터 기존의 건물들을 철거하고 장기간의 조사를 통해 관아 복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복원 전에는 관덕정 앞으로 넓은 광장이 있었다는데, 관아가 복원된 지금은 앞에 계단이 놓여있는 등 '광장'이라 부르기엔 살짝 부족한 상태입니다.



 - 복원은 그래도 잘 해 놓은 편이라서, 제주목의 역사를 알려주는 전시실이라든지 다양한 관아 건물들에 대한 설명도 충실하게 해 놓은 편입니다. 다만 모든 건물들을 다 복원한 것은 아니고, 중간중간에 건물 터로만 남아있는 공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곳도 원래 무슨 건물이 있었다는 설명 정도는 되어 있죠.



 - 한쪽 구석에는 특이하게도 근대유물로 분류될 법한 옛 제주시청 건물의 주춧돌을 전시해 두었습니다.



 - 돌아나온 입구에는 '수령 이하 개하마(皆下馬)'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령 이하로는 말에서 내려 들어오라는 이야기일테니, 조금 넓게 해석하면 예의를 차리라는 의미도 될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뭘까요, '수령 이하 개하차(皆下車)' 정도쯤 될런지?



 - 다음으로 민속자연사박물관(독특하게도 민속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하나로 합쳐져 있습니다). 삼성혈 바로 이웃에 있습니다. 여기도 그럭저럭 볼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 이 개복치는 어떻게 돌연사를 할까요? ㅡㅡ;


 - 마지막으로 삼성혈에 다시 가 봅니다.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는 것 외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어쨌든 삼성혈과 이를 향해 고개를 숙인 주변의 나무들은 언제 봐도 신비함을 느끼게 합니다.



 - 삼성혈에서 나와 바로 택시를 잡고, 공항으로 향합니다. 전화는 계속 산간지역 호우경보라고 난리를 치는데, 공항이야 산간에 있지 않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했습니다만 공항에 도착해보니......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비행기가 못 뜬다는데 어쩔 수 있나요. 예약을 내일 오후로 변경하고, 내일 수업을 빠지게 되니 결항확인서도 하나 떼고(사무실 쪽으로 가서 떼어달라면 해 줍니다. 필요하신 분들 참고), 하룻밤을 어디서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인연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더 묵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 다음날,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 쪽 기상 상황이 시원찮아서 또 연착이 됩니다. ㅡㅡ; 제주도는 이런 상황이 일상적이라 주민들은 그저 그러려니 한다고 하는군요. 아무튼 다행히 이번엔 결항이 되진 않았고,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김포공항으로 복귀. 비행기에서 바라본 제주도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사진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 오늘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겁니다. 다리는 아프지만 이제 익숙해질 만하니 끝이 보이네요(물론 자전거 라이딩을 또 하라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제 체력과는 맞지 않는 듯 ㅡㅡ;). 오늘 다시 제주시내에 들어갑니다. 어제 함께 술 한잔 했던 다른 일행들과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오릅니다.


 - 얼마 가지 않아 4.3 유적지가 나타납니다. 4.3 유적지를 따로 알아보거나 했던 건 아닌지라, 해안을 쭉 돌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유적지가 많은데 이곳 북촌리 너븐숭이에는 따로 기념관(일단 공식명칭이라 이렇게 씁니다)이 지어져 있습니다. 북촌리는 4.3 당시 가장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한 곳으로, 소설 <순이 삼촌>의 주요 배경이기도 합니다.



 - 숙연한 마음으로 너븐숭이를 떠나 조천읍으로 향합니다. 조천읍은 1919년 3.1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하나입니다. 어차피 일요일이기도 하고, 교회에 가기로 하였으니 읍내에서 좀 숨을 고르게 되겠습니다. 조천장로교회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짐작컨대 조천읍 3.1운동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 예배가 끝나고, 교회의 어느 분이 점심 먹고 가라시는 걸 어영부영 사양하고 다시 길을 출발합니다. 예전 군복무 시절 외박을 나왔을 땐 예배 후 점심까지 먹고 가곤 했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숫기가 더 없어졌는 모양입니다. ㅡㅡ; 어차피 제주시내가 멀지 않았으니 좀 더 가서 점심을 먹기로.


 - 조천읍을 지나 일주도로를 달리면 어느새 제주시내로 들어와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동네는 삼양동인데, 이곳에는 해변과 선사유적지가 있습니다.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 탐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제주도 역사의 시작부분을 보여주는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략 당시의 움집이나 고상가옥들이 당시의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되어 있습니다.



 - 삼양동해변의 모래는 (제주도의 몇몇 해변들이 그렇듯) 상대적으로 검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주도의 검은 화산암들이 깎여 퇴적된 것이겠죠. 맞은편에서 바라본 모습.



 - 이쯤 오면 아파트가 여럿 세워진 것이 제주시내에 들어왔음을 확연히 알게 해 줍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때우고, 다음 목적지는 국립 제주박물관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제주시내로 완전히 들어온 셈이죠.



 -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차분히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전 시대에 걸쳐 알찬 전시물들이 있는데, 플래시 터뜨리지만 말라고 붙어 있기에 조심스레 사진 몇 장을 남겨 보았습니다(블로거는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 등 유물에 훼손을 주지 않는 선에서 박물관에서의 사진촬영을 허용하자는 입장입니다). 박물관을 돌아다녀 보면 사진 촬영을 완전 금지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플래시 정도만 금지하고 사진 촬영은 터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 제주도는 전통 갓의 가장 중요한 생산지였는데, 이는 전통 갓이 말총(말꼬리털)을 이용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제주도에서는 몽골 점령기 이래로 말을 많이 길렀죠. 실제로 조선시대 제주도 주민들은 말총으로 다양한 모자를 만들어 생계에 보탰다고 합니다.



 -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조금 더 달리면 바로......



 - 다시 처음의 그곳으로 돌아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일주일간의 생고생(?)을 드디어 끝마쳤다는 성취감도 있고, 이제 일상으로의 복귀가 눈앞이라는 섭섭함도 있고, 별로 좋지도 않은 자전거였지만 나름 정이 든 것도 있고요. 수고 많았다는 대여점 사장님의 말을 뒤로 하고 오늘의 숙소로 향합니다.


 - 이 때만 해도 블로거는 내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8일차 게스트하우스 : 예하 게스트하우스 제주시청점 (現 호스텔 린든)




(거의 월간 여행기가 되어가고 있지만 근성으로 이어나갑니다. 어느새 제주도에 다녀온지 세 달이 되어가네요)


 -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단 서둘러 성산일출봉부터 다녀오기로 합니다. 게스트하우스 위치가 좋아서 골목 하나만 빠져나오면 바로 매표소가 있는 입구 길목이 나옵니다. 역시 유명 관광지다보니 주차장에서부터 단체관광객의 파도가 느껴지네요. 주차장에 가득한 관광버스들은 대체로 중국인 여행객들의 것이 아닐까 합니다.



 -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합니다. 매표소-일출봉 사이에는 어느 정도 경사진 초원이 있는데 그 곳에서 말타기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블로거는 돈이 없으니 열심히 올라가는 데 집중합니다. 올라가면서 등 뒤로 내려다보는 성산읍의 풍경도 퍽 멋집니다.



-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성산일출봉 저편을 볼 수 있습니다. 보호 차원에서 분화구 안쪽으로는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해 놓았습니다. 새벽에 가면 유명한 일출 모습을 볼 수도 있겠지만 아쉬운대로 구름이 아스라이 낀 풍경으로 대신하기로 합니다.



 성산일출봉이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지질학적 가치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분화구 중에서도 오랜 기간 바닷물에 깎여나가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화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죠. 그리고 이곳에서 깎여나간 화산 생성물들은 터진목과 신양해변 쪽으로 가 쌓여 지금의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를 육지와 연결시킵니다. 이 또한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독특한 지형입니다. 아무튼 한국어보다도 많이 들리는 중국어를 뒤로 하고 다시 내려옵니다. 성산일출봉에는 화산활동과 침식으로 생긴 이런 특이한 바위들이 많이 있습니다.



 - 내려와서 게스트하우스에 돌아가 짐을 찾고 출발합니다. 오늘은 바삐 움직여야겠습니다. 왜냐고요? 우도를 다녀와야 하니까요. 성산포 항구에서 우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종달리 쪽에서도 탈 수는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성산포 쪽이 배편도 더 자주 있고 편리합니다. 다리가 너무 아픈 관계로 ㅡㅡ; 자전거는 세워두고 다녀오기로 합니다. 가방은 매표창구 쪽에 맡겨 두었습니다.



 - 배는 우도 천진항에 도착합니다. 이게 또 천진항에 서는 게 있고 하우목동항에 서는 게 있으니 헷갈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걸 헷갈리면 나중에 순환버스 탈 때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 천진항에서는 우도 순환버스를 타고 관광지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순서대로 관광지마다 내려서 둘러보고 시간 맞춰서 다음 버스를 타고 다음 관광지로...... 가는 식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다 좋은데 가격이 살짝 세군요. ㅡㅡ; 그래도 나름 기사님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다리가 편하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 첫 행선지는 우도봉입니다. 우도의 최고봉인데 위치는 섬 한쪽 구석에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을 따라서 해식 절벽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절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지형이 무너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문도 있네요. ㅡㅡ;). 꼭대기쯤에는 등대가 있는데, 1906년 처음 설치되었으니 아마도 일본의 한국 침략과 관련이 있겠지요? 실제로 직전인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일본 해군의 초소가 만들어진 바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제주도 동쪽 바다를 통해 들어왔을테니, 이를 감시하기 위해 초소를 만들었겠죠.



 - 우도봉 밑에는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습니다. 우도의 특산물은 땅콩인데, 이를 이용한 땅콩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추천.



 - 다음 세 곳은 모두 해변입니다. 순서대로 검멀레해변, 하고수동해변, 서빈해변입니다. 서빈해변은 바닥에 모래 대신 홍조류의 단괴(團塊)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지형입니다(산호 해변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산호와는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모래가 아니고 색깔도 훨씬 백색에 가깝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이는 바닷물은 말 그대로 에메랄드빛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맑은 빛을 띱니다. 실제로 세계에 단 두어 곳밖에 없다고 하네요. 

주의 : 해변 전체가 천연기념물이니 바닥의 홍조단괴를 퍼오는 따위의 일은 하지 마세요. 벌금 나옵니다.



 - 아까 도착한 게 어느 항구였는지 헷갈리지 말라는 말 기억하시나요? 바로 서빈해변에서 항구로 돌아갈 때 하우목동항 방향과 천진항 방향 버스가 따로 있는데, 잘못하면 버스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네. 블로거가 버스를 잘못 타서 하우목동항으로 가는 바람에 서빈해변까지 다시 걸어와야 했습니다. ㅡㅡ; 어찌어찌 천진항으로 돌아와서 성산포행 배에 올라탑니다. 우도여 안녕~


 - 육지로 돌아와서, 본격적인 라이딩을 시작합니다. 성산포는 서귀포시(옛 남제주군)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서귀포시는 끝납니다. 다시 제주시로 돌아왔군요! 이제 여행의 끝이 머지 않은 듯합니다.



 - 중간에 조금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길에 발견한 해물칼국수집은 '김대중 대통령이 다녀간 맛집'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습니다. ㅡㅡ; 아무튼 음식 맛은 좋군요.



 - 이곳에도 환해장성이 있습니다.



 - 지나가는 길에 어느 포구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표석을 발견합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한 이후 강화도와 태안, 다시 강화도를 거쳐 마지막으로 이곳 제주도에 유배당해 살게 되는데, 이곳 행원리 포구가 바로 광해군이 도착한 곳이었던 것 같군요.



 - 해변도로를 쭉 달리다 보면 순서대로 월정리해변과 김녕해변이 나옵니다. 유명하기로야 김녕해변 쪽이 더 유명하지만, 월정리 쪽도 나름 괜찮습니다. 월정리해변에서는 멀찍이 풍력발전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김녕해변은 다 좋은데 (아마도 모래 유실을 막으려는 것이겠지만) 백사장을 무언가로 덮어놓아서 살짝 아쉬웠습니다. 무언가 기대를 굉장히 많이 하고 가다보니 그 기대엔 살짝 못미치는 정도?



 - 그리고 조금 더 가면 드디어 오늘의 여정이 끝납니다.


#7일차 게스트하우스 : 안녕프로젝트 게스트하우스




 - 날이 밝고, 사람들과 헤어져 길을 떠납니다. 오늘은 그럭저럭 평탄한 여행이 될 예정이라 목표를 조금 길게 잡았습니다. 다리가 계속 아프기는 한데 이젠 적응이 되었는지 그럭저럭 달릴 만 합니다. 수고해주고 있는 자전거를 사진에 담아 보았습니다(이름을 '고물카'라고 지었습니다. ㅡㅡ;).



 - 해안도로를 달립니다. 제주도의 해안도로는 저렇게 돌을 세워 가드레일(?)을 삼아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 한동안은 딱히 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평탄하네요. 해안도로와 일주도로를 오가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남원읍을 지나 표선면으로 들어섭니다. 표선면은 조선시대 정의군(郡)의 중심지였고, 중산간 쪽의 성읍마을에는 당시의 읍성도 남아 있습니다만 역시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기엔 난이도가 높으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 해안도로의 끄트머리에 표선해변과 제주민속촌박물관이 있습니다. 표선해변은 백사장이 상당히 넓습니다.



 - 그리고 바로 이웃의 제주민속촌박물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 바로 근처쯤에 4.3 유적지가 나타납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4.3 사건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지 않고 돌아다녔네요.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길을 멈춥니다.



 - 그리고 오늘의 1차 목적지, 제주민속촌박물관으로 갑니다. 용인 한국민속촌과 비슷하게 사설 박물관이라 입장료가 제법 되는 편이지만(그래도 한국민속촌보단 저렴합니다), 몇 가지 아쉬운 느낌을 빼면 입장료만큼의 가치는 충분히 하는 곳입니다. 입장료를 끊고 남은 돈을 헤아려보니 이젠 돈을 조금 아낄 필요가 있겠군요. ㅡㅡ;



 - 처음 들어가면 한켠에 제주 전통 어선 '테우'가 손님들을 반깁니다. 이런 뗏목 수준의 어선을 이용했던 것은 조선시대 제주도 주민에게 출륙(出陸) 금지령이 내려져 번듯한 선박의 제조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선박을 만들 수 없으니 안전성이 떨어지는 테우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고, 그러다가 폭풍이라도 불면 어민들은 불귀의 객이 되기 일쑤였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제주도는 여자가 많은 섬이 되었다......라는, 아픈 역사의 페이지가 서려 있는 배이기도 합니다.



 - 박물관 곳곳에 제주 전통 가옥들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제로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있어서 볼 거리가 많은데 이쯤 되면 박물관이 너무 넓다라는 문제점에 직면하게 됩니다. ㅡㅡ; 자전거 여행 중이라 다리도 아픈데, 결국 중간부터 관람열차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관람열차는 중간중간 있는 정거장에서 탈 수 있는데, 그리 자주 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어째 탑승하지 말라는 투 같습니다. ㅡㅡ; 어쨌든 관람열차로 상당한 거리를 이동한 후 다시 내려서 마저 관람을 계속합니다. 중간을 빼먹고 나서도 볼 거리들은 군데군데 있는데, 제주 양식으로 낮은 돌담을 두른(방목하는 가축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묘지의 모형이 인상적입니다. 특이하게도 4.3 사건을 비롯하여 제 명에 죽지 못한 이들을 위한 작은 위령비가 함께 서 있습니다.


 

 -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다시 박물관의 출입구가 나옵니다. 민속촌 내에 주막 스타일의 식당가가 있긴 한데, 그냥 표선면으로 나가서 점심을 때우기로 합니다. 냉면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출발.



 - 성산읍 구내로 들어갈 때쯤 바닷가를 따라 웬 돌더미들이 쭉 나타납니다. 자연적으로 쌓인 건 아니고, 고려~조선시대 유적인 환해장성(環海長城)입니다. 삼별초 전쟁 시기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걸쳐 오랜 기간동안 제주도 해안을 둘러 건축한 성인데, 지금은 이 곳을 비롯하여 몇 군데에만 남아 있습니다. 저렇게 돌더미 수준인 경우도 있고,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 해안도로를 계속 달리다가, 온평리쯤에서 방향을 내륙쪽으로 틀었습니다. 일주도로를 건너 조금 더 들어가면 탐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혼인지(婚姻池)와 신방굴(神房窟)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의 세 신인이 벽랑국에서 건너온 공주들과 혼인하기 위해 목욕재계한 곳이 혼인지, 혼례 후 신방을 차린 곳이 신방굴이라고 하지요. 신방굴은 작은 용암동굴인데, 특이하게도 내부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 온 길을 돌아가 다시 해안도로를 달립니다. 조금 더 가면 섭지코지가 나옵니다. '코지'는 곶(串)의 제주어 발음이라고 하지요. 요즘은 한가운데 큰 리조트가 들어서고 유명세 때문에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기대만큼의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더 들어가려다가 자전거나 짐가방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그 주변 경치만 보고 발길을 돌립니다.



  - 그리고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오늘의 목적지인 성산포입니다. 성산포로 들어가면서 잠깐 짚고 넘어갈 곳이 하나 있는데......



 - 성산포 터진목은 화산폭발로 성산일출봉이 형성된 이후 바닷물의 퇴적 작용으로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사주(沙洲)입니다. 제주도 본섬과 성산포를 연결하고 있으며, 20세기 현대적인 도로가 가설되기 이전에는 밀물 때 바닷물에 잠기기도 하여, 완전히 막힌 곳이 아니라는 의미로 '터진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군요.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 곳의 해변은 4.3 당시 이웃 고성리와 오조리 일대 주민 100여 명이 끌려와 학살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 사진의 장소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1940-)가 쓴 제주 기행문의 한 부분이 새겨진 추모비가 있습니다. 


#6일차 게스트하우스 : 산토리니 게스트하우스




 - 밤사이 날이 맑아졌습니다. 간만에 맛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 어제까진 헬멧을 계속 착용하고 다녔는데, 얼굴 상태가 더 이상 햇빛에 노출시키면 안 될 정도라 오늘부터는 헬멧 대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한층 더 안전에 신경쓰며 다니기로 합니다(따라하진 마세요). 아마 오늘까지는 꽤 힘든 코스를 가게 될 겁니다.


 - 중문에서 서귀포로 가는 중간에 강정마을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조금 잊혀진 감이 있지만, 현재도 이곳에서는 군항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고 그에 반대하는 시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구럼비바위를 보고 싶었지만 이미 그쪽 해안은 공사 펜스로 막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 공사장 입구에서는 미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잠시 광경을 지켜보고는 다시 갈 길을 떠납니다. 지나가던 수녀님에게 꾸벅 인사만 드리고 출발.



 - 계속 길을 가다 보니 웬 비석들이 나타나는데, 자세히 보니 이 지역 출신 재일교포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지금까지도 재일교포 중 많은 수가 제주도 출신이거나 제주도 출신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 이 쪽에서도 계속 언덕과 내리막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문득 일주서로가 일주동로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니 서귀포에 거의 당도한 모양입니다.



 - 서귀포 시내에 거의 당도할 때쯤 언덕 밑으로 넓은 농경지가 보입니다. 당시에는 별 생각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저 곳은 '하논'으로 제주도에서 거의 유일한 논농사 지대입니다. 저 일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분화구로, 저런 식으로 주변에 큰 산봉우리가 없이 분화구만 움푹 파여 있는 구조를 '마르'라고 한다는군요. 이곳의 분화구는 넓은 습지로 형성되어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수백 년 전부터 논농사가 이루어져 왔다고 합니다. 다만 농업과 주변 개발 등으로 환경 파괴가 심해서, 근래에는 하논의 자연 상태를 복원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하네요.



 - 드디어 서귀포 시내에 들어섭니다. 여기서 방향을 틀어 천지연폭포 쪽으로 갑니다. 지도로 보면 천지연폭포가 가까이 있는데, 실제로 폭포를 관람하려면 해안으로 쭉 내려간 다음 하류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다만 상류 쪽의 다리에서도 뭔가 보일듯 말듯한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 천지연폭포가 유명 관광지인 것 치고는 진입로가 비교적 비좁은 편입니다. 아무튼 빙 돌아서 폭포 입구에 도착하면 거대한 주차장과 상점가, 입장료 받는 곳이 있습니다. 관리소에 짐을 두고 입장.



 - 천지연폭포 자체도 아름답지만, 입구에서 폭포 사이에 있는 산책로 또한 난대림 사이에 있어서 꽤 즐길 만합니다. 폭포의 아랫쪽에는 과거 작은 수력발전소가 있었는데, 이곳을 자연보호구역으로 만들면서 철거했다고 하는군요. 잠시 폭포를 바라보며 쉬다가, 다시 갈 길을 갑니다.


 - 천지연폭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쭉 가다 보면 맛집거리를 지나치게 됩니다. 점심을 이곳에서 때우고, 오늘의 목적지를 향하여 전진합니다. 아직은 언덕이 계속 이어져 사람 진을 뺍니다. 결국 중간에 나오는 정방폭포는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엄두가 도저히 나질 않아 포기.


 -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가다 보면 쇠소깍이 나옵니다. 계곡물이 바다로 흘러가기 직전에 잠시 고여 연못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군요. 뭘 알고 갔던 게 아니라 바닷가만 보고 가긴 했는데, 바닷가 경치도 꽤 볼만합니다.



 - 사실 쇠소깍은 이것 말고도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는 경치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바윗돌들이 쭉 이어진 모양인데 저 사이로 계곡이 흐릅니다.



- 다시 일주도로를 달립니다. 쇠소깍은 서귀포시 동 지역과 남원읍 사이의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일주도로를 달리자마자 남원읍 표지판이 나옵니다.



  - 이쯤부터는 드디어 길이 좀 평탄해집니다. 이제 숙소까진 그럭저럭 편하게 갈 수 있겠군요.


#5일차 게스트하우스 : 짝 게스트하우스 남원점




 - 석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자전거 일주 중만 아니었다면 아마 여기서 며칠은 더 있었을텐데. 일단 첫 목적지인 모슬포로 향합니다. 이틀간 햇볕에 심하게 익어버린 코와 팔뚝이 제법 따가운데,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햇볕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군요.



 - 일주도로를 타고 모슬포 입구까지 가면 그대로 일주도로를 따라 내륙으로 갈 수도 있고, 해안으로 빠져서 모슬포항과 송악산을 거쳐갈 수 있습니다. 일단 해안으로 갑니다.


 - 원래 계획은 모슬포항 앞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으니 조금 더 가보기로 합니다. 모슬포항에서 조금 더 가면 하모리 해변이 나오는데, 이곳은 최근 모래유실 등의 이유로 지정 해수욕장에서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 제주도에서도 최남단인 이곳 해안을 쭉 따라가다 보면 송악산이 나옵니다. 이곳도 손꼽히는 명소이고 추천받은 바도 있어 올라가보고는 싶은데, 자전거는 둘째치고 짐을 맡겨놓을 곳이 주변에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입맛을 다시며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떠나기로 합니다. 다음번에 다시 와야겠네요.



 - 송악산 바로 밑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마라도 가는 유람선을 탈 수 있습니다. 마라도로 가는 배편은 모슬포항과 이곳 송악산 쪽에서 출발하고, 가파도로 가려면 모슬포항에 가야 합니다. 잠시 고민을 하였지만, 중문까지 가야 하는 오늘 길이 가장 험난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있었으므로 마라도 가는 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니다.


 - 송악산 밑에서 해물자장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립니다. 이쯤부터 빗방울이 애매하게 한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니, 가방에 방수대책을 나름 해 두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산방산과 형제섬을 멀찍이 바라보고 달리는 이곳 해안도로는 제주도 해안도로 중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곳입니다.



 - 그렇게 달리다 보면 산방산이 눈 앞에 다가옵니다. 산방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붙어 있습니다.

"옛날 500 장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제주섬을 만든 설문대할망의 아들들로 주로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아나갔다. 하루는 500 장군의 맏형이 사냥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나머지 허공에다 대고 활시위를 당겨 분을 풀었다. 그런데 그 화살이 하늘을 꿰뚫고 날아가 옥황상제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크게 노한 옥황상제가 홧김에 한라산 정상에 바위 산을 뽑아 던져 버렸는데, 뽑힌 자리에 생긴것이 백록담이고 뽑아던진 암봉이 날아가 사계리 마을 뒤편에 떨어졌는데 이게 바로 산방산이라 한다." (출처 : 위키백과)


 - 산방산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산암 바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산방(山房)'이란 산방산 곳곳에 있는 용암동굴을 의미한다고 하는군요. 아쉽게도 현재는 입산이 통제되어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2022년까지 통제가 계속된다니, 조금 먼 미래를 기약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일단 블로거는 산방산 서쪽을 통과하여 내륙으로 들어갑니다(그나저나 여기서 용머리해안을 빼먹었다는 것을 블로거는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ㅡㅡ;).



 - 여기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화순리 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곳도 나름 가볼 만한 곳이지만 블로거는 굳이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산방산 기슭을 타고 넘는 길이라 올라가기 상당히 빡셉니다. ㅡㅡ; 이 고생을 해가며 굳이 내륙으로 들어온 이유는 바로......



 -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유배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김정희는 1840년 권력투쟁에 휘말려 제주로 유배당한지 몇 년 후 당시 대정읍내에 있던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이곳은 옛 유배지의 모습이 복원되어 있으며(실질적으로 민속박물관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앞에는 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한 '추사관'이라는 이름의 작은 박물관도 있습니다. 세한도의 집 모양을 모티브로 했다는데, 입구가 지하에 있는 것도 특이하고 그 입구로 내려가는 계단 또한 상당히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블로거는 지상에 있는 출구로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거꾸로 관람하고 나와서 입구부터 다시 관람했다는......ㅡㅡ;



 - 추사 유배지 주변으로는 옛 대정읍성이 남아 있습니다. 읍성을 뒤로 하고 다시 일주도로를 타고 갈 길을 갑니다.


 - 여기서부터 서귀포까지는 자전거 하이킹에는 상당한 난코스입니다. 애초에 자전거 대여점에서부터 이 코스가 가장 힘들 거라는 말을 듣고 왔던지라 나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자전거 초짜인 블로거에게는 말 그대로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ㅡㅡ; 안덕계곡 주변을 타고, 말 그대로 계속계속 올라갑니다. 거의 150m 정도를 쉴새없이 올라가야 합니다. ㅡㅡ;


 - 한참을 올라가다가 뒤쪽에서 어느 중년의 라이더가 한 분 올라오십니다. 그냥 지나가려다가 좀 불쌍해 보였는지 블로거를 앞지르지 않고 블로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같이 달리십니다. 나름 인생 이야기도 하고 할 수 있다고 격려도 하면서 힘을 많이 불어주시는데 이미 정신없는 블로거는 (그 분이 싫어서가 아니라) 대화를 하는 것조차 상당히 힘에 겨워서 어떻게든 거리를 두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립니다. ㅡㅡ; 그 분에게는 죄송스럽지만 어쨌든 그 분이 일주도로를 벗어날 때까지 대화는 이어집니다. 어쨌든 덕분에 그나마 힘을 내서 넘었던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 그렇게 최대 난코스를 넘은......줄 알았는데 아직 안 끝났습니다. 중문 들어서도 150m 수준은 아니지만 만만찮은 언덕이 계속 나옵니다. ㅡㅡ; 아무튼 간신히 중문 시내에 들어서고, 숙소는 중문 옆의 대포포구 앞에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빗줄기가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조금 속력을 내야겠습니다.



 - 중문 마을 자체는 살짝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대포포구로 가려면 해안까지 내리막을 타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ㅡㅡ; 마음이 급해지고, 최대한 빨리 간다고 지름길을 급하게 달리다가 결국 살짝 넘어지고 맙니다. 천만 다행으로 자전거도 멀쩡하고, 어디 까진 곳 하나 없었던지라 금새 수습하고 다시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주검이 된 상태로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


#4일차 게스트하우스 : 아하 게스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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