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은 남북관계에 있어 시끄러운 일이 상당히 많은 해였습니다. 일단 9월에는 유명한 강릉 잠수함 무장간첩 침투사건이 있었고, 그 이전 8월에는 한총련 연세대 사태가 있었지요(국내정치 사건이긴 하지만 한총련과 남북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하긴 어려우니까). 그 외에 1995년부터 본격화된 북한의 '고난의 행군'은 1996년에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이슈들 사이에 묻혀버린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동년 7월에 발생한 '무함마드 깐수 간첩사건'입니다. 간첩사건이야 잊을 만하면 하나씩 터지던 시절이었지만, 이 사건이 특히 화제가 되었던 건 범인 무함마드 깐수의 정체 때문이었습니다.




1. 무함마드 깐수는 누구인가?


[무함마드 깐수]


 무함마드 깐수는 1946년생으로, 레바논계 필리핀인이며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였습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한국에는 1984년 처음으로 한국에 건너왔고, 연세대학교 어학당을 거쳐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988년에는 간호사로 일하는 한국인 윤모씨와 결혼하였습니다. 전공 분야는 '동서문명 교류사'로 이쪽 분야에서는 한국 내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역사 관련 방송에 출연하거나 신문 기고, 저술활동 등으로 대중적으로도 명성을 쌓아갑니다. 그는 아랍어를 비롯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등등 11개 언어를 할 수 있었다는군요. 언어깡패


 1990년부터는 모교(?)인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조교수로 초빙되었고, 전공 분야인 동서문명 교류사에 대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해갔습니다. 당시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그에 대하여 "된장국을 즐겨 먹을 정도로 한국에 애정이 많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무함마드 깐수는 한국에서 저명한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 그의 정체가 밝혀지다


 1996년 7월 3일, 무함마드 깐수는 갑자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감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세간을 놀라게 할 만했지만 수사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의 정체는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함마드 깐수'가 아니라 조선족 출신 북한인 '정수일'이었던 것입니다.


[정수일]


 정수일은 1934년 중국 지린성 옌지(연길)에서 출생, 연길고급중학을 거쳐 베이징대학 동방학부에 조선족 최초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집트 카이로대학에 중국 국비장학생 1호로 유학하였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주목받은 수재였습니다. 유학 이후에는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는데,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홀대에 실망하고 1962년 아내와 함께 북한으로 이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합니다.


 그는 북한으로 가려는 자신의 결심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직속상관인 외무부장 천이(1901-1972)와 대판 싸우고, 이후 총리인 저우언라이(1898-1976)에게 직접 탄원을 보내어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허가를 받습니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가 이주한 지 얼마 지나 북한에서는 조선족 출신에 대한 숙청이 벌어졌지만 정수일은 저우언라이의 신원보증이 있었던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자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부모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정작 북한에서도 그는 능력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북한에서 그의 학술 활동은 어학 쪽으로 한정되었고 평양외국어대 아랍어과 교수 활동 외에 주당 25시간의 아랍어 방송을 해야 했고, 당시 북한의 일반적인 방침에 따라 주 1~2회 강제적인 육체노동에도 참여하는 등 심한 혹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정수일은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고,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미로염'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조선노동당 대남부서의 주목을 받아 1974년부터 4년여에 걸쳐 남파공작원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가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우선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한 능력, 그리고 그의 외모였다고 합니다. 하긴 누가 봐도 납득할 외모이긴 하다 그는 신분 세탁을 위하여 내전 중이던 레바논으로 이주,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합니다. 이후 튀니지대학과 말레이대학에서 연구원과 교수를 역임하고 1980년대 초 필리핀에서 다시 국적을 변경, '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신분을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3. '간첩' 정수일의 삶



 1984년 한국으로 이주한 정수일은 이후 고정간첩으로서 첩보 활동을 전개했고, 구체적인 정보를 원하는 북한의 요구에 따라 '신상옥-최은희 최근 소재지' '클린턴 방한 문제' '국회의원 총선거 정세분석' 등의 자료들을 북한으로 보냅니다. 그의 위장은 워낙 철저해서 주변 사람들 중 아무도 그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 그의 후처(?)가 증언한 바 그는 무슬림의 관습을 따르거나 잠꼬대를 아랍어로 하는 등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가 간첩일지 모른다는 상상조차 못 했다고 합니다.


 그가 북한에 보낸 자료에는 첩보 뿐만 아니라 그의 전공분야를 중심으로 한 여러 학술자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하며 북한의 인문학 연구가 많이 뒤처져 있음을 절감한 정수일은 북한 학계의 발전에 도움이 될까 하여 다양한 학술자료를 북한에 넘겼는데, 당국에서는 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지 "이따위 쓸데없는 자료 좀 그만 보내라"는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는군요.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며 4차례 밀입북하였고 북한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자료 전송 수단을 팩시밀리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정보당국의 레이더에 걸렸고 결국 1996년 7월 한 호텔에서 팩시밀리를 전송하던 정수일은 당국에 검거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검거될 수도 있었습니다. 1984년 5월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원(\)을 '환'으로 착각하는 등 한국 사정에 어두운 모습을 보이거나, 대화 중에 은근히 드러나는 북한 억양을 보고 의심을 품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 때는 한국의 이슬람계 지도자들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주어 수사조차 받지 않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ㅡㅡ;




4. 전향, 그 이후



 검거된 시점에서 그의 국적은 (공식적으로는) 필리핀이었기 때문에 필리핀인으로서 국외 추방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정수일은 수사과정에서 자신이 '북조선' 국적임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스스로 이 길을 포기합니다. 이후 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는데, 실제로 그가 북한에 넘긴 첩보들은 거의 언론에 공개된 내용뿐이라 중요한 첩보가 거의 없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전향서를 제출한 것이 참작되어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이 선고됩니다.


 물론 그가 쉽게 전향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 처음에 정수일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국에서 결혼한 아내가 그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북한에 이미 아내가 있었던 그는 한국의 아내에게 자신을 잊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한국의 아내는 그를 떠나지 않고 면회와 옥중서신 등을 통해 옥바라지를 계속하여 결국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정수일은 정식으로 전향서를 제출하여 사형을 면하였고,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 2003년에는 특별사면 및 복권을 통하여 학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간 정수일의 학문적 성과에 대하여는 간첩사건을 보도하던 조선일보도 인정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계로 돌아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본래 재직하던 단국대학교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한국의 이슬람 연구에 남긴 업적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일단 한글 표기법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던 이슬람 경전의 명칭을 '쿠란'으로 정리한 것이 이 사람이며, 처용(<처용가>의 주인공)이 이슬람계 도래인이라는 학설을 처음 낸 것도 정수일씨입니다. 단국대학교 시절의 정수일, 아니 깐수 교수는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전설로 남아 있으며(A+ 폭격기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재도 교수들이 수업 때 간첩 사건과 함께 언급하곤 한다고 하는군요.


 정수일씨는 현재 (사)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으며, 간첩 이력이나 고령(2018년 현재 85살) 등의 이유로 예전만큼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2011년에는 50년만에 고향인 중국 옌지를 방문하여 친척들을 만나고 모교인 룡정고급중학(舊 연길고급중학)에도 방문했는데, 이 방문이 모교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어 학교측에서는 그의 사진을 교내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비록 십 년 이상 활동한 고정간첩이었지만 확실하게 전향한 지 오래이고, 남북한을 비교하자면 남쪽에 학자로서 공헌한 바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논란은 현 시점에서는 딱히 없습니다. 중국-북한-남한을 오간 그의 독특한 이력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기도 한데, 고은 시인은 그를 소재로 한 시를 쓴 적이 있고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1940-)씨는 그의 학문적 집념을 정약용에 비유하며 극찬한 바 있습니다.


 여담으로 그가 현재의 아내와 나눈 옥중서신 중에는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11개 언어를 마스터했는지 설명한 글이 있는데, 이게 또 범상치 않습니다.


한국어 : 모어(母語)

일본어 : 유아기 ~ 소학교 때(그가 태어날 당시 만주 일대는 만주국 치하에 있었기 때문)

중국어 : 고등학교 때 →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자연스럽게 마스터

러시아어 : 고등학교 때 → 대학 교재를 통해 습득. 북한 학계의 제1외국어였기 때문에 러시아어 원서를 다량 독파

영어 : 대학 때 습득 → 이집트 유학 때 마스터(이집트는 영국의 옛 식민지)

아랍어 : 전공과목. 10여 년간 아랍어권에서 생활하며 강의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마스터

독일어 : 이집트 유학 때 아랍 고전 연구에 필요해서 주변 도움으로 습득(아마 독일계 연구자들의 자료를 읽어야 했던 듯)

프랑스어 : 알제리 등지에서 근무하며 업무상 습득(알제리와 튀니지는 프랑스의 옛 식민지)

스페인어 : 모로코 근무 시절 호기심으로 공부(아마도 모로코가 스페인과 인접해 있으니까)

페르시아어 : 아랍어와 섞인 게 많아 학문적 호기심으로 공부. 문명교류학 연구를 위해 더 익혀야 할 듯

말레이어 : 말레이대학 교수 시절 습득

필리핀어 : 필리핀 국적 취득을 위해 습득


 ......그냥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2018. 7. 18. 수정]




[캡처 : https://tw.election2016.yahoo.com/index.html ]


1. 결과 : 모두의 예상대로


 - 이변은 없었습니다. 선거전 내내 압도적 1위를 지킨 차이잉원은 선거 결과에서도 과반 득표로 여유있게 당선되었습니다. 국민당의 전통적인 텃밭인 동부(화롄, 타이둥)와 접경지역(진먼, 롄장)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차이잉원이 1위를 차지함으로써, 여론이 중국국민당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 쑹추위는 결국 완주했고, 두자릿수 % 득표에 성공하며 나름대로 선전하였지만 후보 입장에서는 많이 아쉬운 결과일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여론조사 2위로 올라설 정도로 바람을 일으켰고, 막판에도 반등에 성공하며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주리룬과도 거의 트리플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로 3위에 그쳤습니다. 특히 쑹추위의 친민당은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비례대표 3석만을 차지하며, 창당 1년 남짓의 시대역량에조차 밀리는 성적표를 받았으니 이래저래 속이 쓰릴 듯하네요.


 - 선거전이 시종 차이잉원 우세로 흘러가긴 했지만, 크고작은 변수는 있었습니다. 차이잉원은 12월 27일 개최된 1차 TV토론에서 양안관계 문제에 대하여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이는 예전부터 지적된 문제), 직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을 일거에 6%나 날려먹었습니다. 차이잉원이 깎아먹은 점수는 고스란히 쑹추위에게 옮겨갔고, 쑹추위는 "경제성장률이 한국보다 1.5% 더 나오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경제공약을 앞세워 747과 비슷해 보이지만 넘어가기로 주리룬을 1% 이내로 추격하였습니다. [1차 TV토론 요약]


 - 그래서 이번에는 일각에서 쑹추위로의 후보단일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막판까지 반등을 유지하기엔 힘에 부쳤는지 선거 결과는 애초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나왔습니다. 여러 변수에도 1, 2후보에게 대부분의 표가 몰린 것은, 양당제가 고착화되고 있는 타이완 정치의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선거가 다가오면서 (언제나 그렇듯) 양안간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 왕훙광(1949-) 퇴역 중장이 "하나의 중국 원칙으로 타이완을 해방할 때가 왔다"며 타이완을 침공할 것을 주장하여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중국 정부가 '양안 평화와 안정의 지속'을 천명한 것과 상반되는데, 양안 긴장을 고조시켜 선거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한국 선거에서 남북관계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봅시다).



2. 직전 변수 : 쯔위 청천백일만지홍기 사건


 -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쯔위는 타이완 출신)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타이완 국기)를 들었던, 따지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 사건은 양안관계라는 근본적 문제에 타이완 총통선거라는 타이밍, 소속사인 JYP의 아쉬운 대처가 겹치며 그야말로 핵폭탄급 이슈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마리텔에 출연한 트와이스의 멤버들은 태극기와 자기 나라의 국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음. 쯔위는 타이완, 나머지 세 명은 일본]


- 처음 문제를 터뜨린 건 타이완의 한 언론으로, "쯔위는 애국자다"라는 취지의 보도였으니 대략 선거 시즌에나 나올법한 '쓰잘데없는 일 침소봉대'하는 수준의 보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런 건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요). 쯔위는 데뷔 당시부터 타이완 쪽에서도 큰 관심을 받아왔고, 애국심이 특히 강조되곤 하는 선거 시즌이다보니 '국기'를 드는 별 소소한 행위 하나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 그런데 여기에 유명 가수 황안(1962-)이 쯔위를 마구 까대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알아주는 친중국 인사로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이중국적 상태로 알려진(물론 여기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별 의미는 없음) 황안은, 쯔위의 행동을 강하게 비난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라"는 개소리 공개 요구를 날렸습니다.


 - 그런데 정작 황안은 한창 연예계에서 활동하던 시절 공개석상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었던 것이 타이완 네티즌에 의해 밝혀지며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인은 단순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도구로써 들었던 것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쯔위의 행동은 도대체 뭐가 다르냐는 것. 이 웃기지도 않은 논란은 이렇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종결되나 싶었지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있는 황안]


 - JYP와 트와이스의 공식 SNS에 중국어 악플이 달리기 시작하더니, 중국 지역방송인 안후이TV에서 춘절 특집방송의 트와이스 출연 계획을 난데없이 취소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내에서 JYP 거부운동까지 벌어지고 방송에서도 잇따라 퇴출 움직임을 보이자(블로거는 여기에 의도적 여론조작이 있음을 강하게 의심하나, 분명한 근거가 있지는 않으므로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JYP는 쯔위가 직접 출연한 동영상 형태로 "쯔위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며 백기투항하고 말았습니다.


 - 이것으로 논란은 종결......되었다면 차라리 다행일텐데, 이것이 양안간 정치문제로 비화한 이상 이렇게 끝날 턱이 없습니다. 이제는 타이완 쪽에서 가만 있을 수가 없지요. 이 사태가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총통선거 후보자들은 저마다 "쯔위를 지지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날렸고, 졸지에 쯔위는 양안갈등을 상징하는 존재로 떠올라 버렸습니다.


 - 이 사태에서는 JYP의 대처 또한 성급하고 미숙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마도 중국에서의 난데없는 여론 악화를 보고 당황했을 JYP는 성급하게 중국 여론에 백기투항하는 길을 택했고, 이 타이밍이 하필 타이완 총통선거와 완벽히 겹치는 바람에 오히려 논란을 더 키웠다는 게 블로거의 평가입니다. 양안간 정세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있었다면 한결 세련된 대처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쨌거나, 졸지에 중국-타이완-JYP 모두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쯔위는 도대체 무슨 죄입니까.


 - 이 논란은 결과적으로 선거에서 타이완 독립론자(즉 차이잉원과 민주진보당, 시대역량 등)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다만 이번 선거전 자체가 처음부터 민주진보당의 압도적 우세로 흘러갔기 때문에, 선거 직전의 이 사건은 민주진보당의 승리를 더 굳혀주는 것 외에 '결과' 자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 여담으로 황안은 쯔위의 항복선언 이후 기고만장하여 날뛰다가 1월 16일 자신의 웨이보 계정을 차단당했다고 합니다. ㅡㅡ;



3. 가능성 있는 대안, 시대역량


 - 총통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입법의원(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진보당의 압승 외에 '시대역량'의 선전이 돋보였습니다. 지난 2014년 입법원 점거농성(해바라기 운동) 주도세력을 중심으로 2015년 1월 결성된 시대역량은, 이번 선거에서 지역구 3석(타이베이 제5선거구, 신베이 제12선거구, 타이중 제3선거구), 비례대표 2석(득표율 6.11%) 당선으로 총 5석을 획득, 단숨에 제3당으로 올라섰습니다.


[주요 정당의 비례대표 득표율. 위로부터 민주진보당-중국국민당-친민당-시대역량-신당-녹색사회민주당연맹-대만단결연맹]


 - 타이완 입법의원 선거에서 5석이란 결코 적은 자릿수가 아닌데, 타이완 입법의원은 2008년 재적 수를 절반으로 줄여 총 113명밖에 되지 않고, 그 중에서도 지역구는 단 73석 뿐입니다. 창당 1년을 맞은 신생정당, 그것도 기존 정치세력과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는 정당이 지역구 73석 중 3석을 획득한 것은 상당한 성과이며, 비례대표 득표율이 생각보다 적게 나왔음에도 시대역량 측에서는 이 선거를 사실상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비교적 아쉬운 모습을 보였는데, 한때 시대역량의 비례대표 후보 6명이 모두 당선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쑹추위의 친민당에 간발의 차이로 밀려나며 2석만을 확보하였습니다. 물론 쑹추위 버프에 정당 역사 자체도 제법 되는 친민당과 비슷한 득표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대역량은 비례대표 쪽에서도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한국과 오버랩되는 타이완 정치지형에서 시대역량은 한국의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진보적인 청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급성장하였으며, 양당제 구도를 깨뜨릴 제3세력의 강력한 후보로 급부상하였다는 것 등. 과연 이들이 더욱 전진하여 타이완 정치지형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낼지, 한국의 제3세력처럼 지리멸렬할지는 앞으로 두고보아야 할 것입니다.



[2015년 11월 여론조사 결과 모음. 차이잉원(녹색) / 주리룬(청색) / 쑹추위(황색)]



1. 차이잉원(민주진보당) - 천젠런(무소속)


[차이잉원(左), 천젠런(右)]


"Light up Taiwan"


 - 차이잉원(1956-)은 現 민주진보당 주석(대표)로, 2012년에 이어 이번이 2번째 총통선거 출마입니다. 조상은 타이완 출신이나 조부와 부친은 대륙(정확히는 '만주국')에 건너가 활동하였고, 일본 패망 후 타이완으로 돌아온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습니다(이러한 경우를 반산(半山)이라 함). 종족적으로는 하카(객가) 계열이라고 합니다.


 - 자동차 수리업을 경영한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고, 대만대학 법학과를 졸업 후 코넬대학교 법학 석사, 런던정치경제대학 법학 박사를 취득하고 27세부터 타이완 국립정치대학과 동오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엘리트. 이후 리덩후이(1923-) 당시 총통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 리덩후이-천수이볜 정권에 걸쳐 대륙위원회 주임(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이 시기 중화민국군과의 관계가 상당히 좋아서 국방장관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동아시아에서 여성이 국방장관에 취임한 사례는 한 번도 없음). 리덩후이와 비슷하게 중국국민당 내 타이완 독립론자였기 때문에 2004년 탈당, 민주진보당으로 적을 옮겼고 이후 범록연맹의 유력 정치인으로 대권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합니다.


 - 2008년 선거에서 참패한 민주진보당의 새로운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후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당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였습니다. 이후 ECFA 체결 논란에서 반대파의 구심점이 되어 입지를 더욱 높였는데,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신베이 시장 후보로 출마했다가 선거 막판 큰 변수가 생기며 중국국민당 주리룬 후보에게 패배하여 기세가 꺾였습니다. 중국국민당 중앙위원 롄성원(前 부총통 롄잔의 아들)에 대한 총격 테러가 발생하며 여론이 중국국민당 쪽으로 쏠렸던 것.


 - 2012년 민주진보당 후보로 총통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마잉주 총통에게 패하여 낙선, 책임을 지고 주석직을 사임하였습니다. 다만 이후 마잉주 정부가 거듭되는 실정으로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면서 그 대항마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2014년에는 당 주석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얼마 뒤 지방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이 '기록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입지가 급상승, 차기 총통후보로 떠오르게 됩니다.


 - 마잉주 정부와 중국국민당이 여러 악재로 국민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이라, 현재의 선거전은 차이잉원의 독주 체제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범람계열의 두 후보가 단일화해도 차이잉원이 의미있을 정도의 차이로 앞서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범람연맹 쪽에서는 단일화 무용론까지 제기되는 실정. 한때 민주진보당 계열의 스밍더가 출마를 시도하여 차이잉원을 긴장시켰으나, 서명 확보에 실패하여 나가리되면서 차이잉원의 위치는 강고하게 굳어졌습니다.


 - 차이잉원은 선거에 대해 매우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양안관계를 비롯하여 여러 쟁점에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아, 비판하는 쪽에서 '공심채(空心菜, 속이 빈 채소)'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지속되는 독주체제 또한 내부적으로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반대파(범람연맹) 지지자의 결집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일단 ECFA는 반대, TPP는 찬성하고 있으며, 양안관계에서는 중도적인(혹은 애매한) 입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됩니다.


 - 후보 개인에 대한 논란이라면 친일파 논란과 동성애자 논란이 있는데, 전자는 만주국에서 활동했던 부친이 친일파라는 주장이며(제법 오래 된 논란이며 차이잉원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한 바 있음), 후자는 현재까지 독신인 차이잉원 후보에게 성적 지향성을 분명히 밝히라는 스밍더 쪽의 망발비난에서 촉발되었습니다. 여기에 차이잉원은 "애인과 사별 후 정치활동에 바빴다"라고 해명하였고, 이후 오히려 성소수자와 진보적 유권자의 지지도가 더 올라갔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 러닝메이트로 처음에는 천쥐(1950-) 가오슝 시장을 지명하려 했다가 성비(남-녀)를 맞춰야 한다는 당내 압력 때문에 나가리되었고, 이후 11월 16일 첸젠런(1951-) 중앙연구원 부원장을 지명하였습니다. 첸젠런은 국가과학위 주임위원(과학기술부 장관)과 위생서장(보건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2003년 SARS 대란 때 상당히 훌륭한 대처를 보여 신망을 얻은 기술관료입니다.


 - 여담으로 선거자금 모금에 '돼지저금통'을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200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의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입니다. 2012년 선거에서도 동일한 전략을 활용한 바 있습니다.


# 한국에 번역 출간된 저서 : <보통사람의 특별한 인생> 라이프맵



2. 주리룬(중국국민당) - 왕루쉬안(무소속)


[주리룬(左), 왕루쉬안(右)]


"One Taiwan"


 - 본래 중국국민당의 총통 후보는 입법원 부원장 훙슈주(1948-)였다가, 여론조사에서 3위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당하자 후보 등록 직전에 후보를 당 주석 주리룬(1961-)으로 전격 교체하였습니다. 사실 처음 총통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 주리룬이었으나 불출마 선언을 했던 바 있는지라, 결국 돌고 돌아 갈 사람에게로 화살이 도착한 셈.


 - 주리룬은 외성인-본성인 혼혈(?)이며, 국립대만대학-뉴욕시립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1998년 입법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한 이후 2001년에는 타오위안 현장(縣長)에 당선 후 재선, 2010년에는 신베이 시장으로 적을 옮겨 출마하였는데 하필 그 차이잉원 후보를 꺾고 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때 상술했던 총격 테러사건의 덕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후 2014년 재선에 성공하였는데, 중국국민당 후보가 모든 직할시에서 낙선할 때 유일하게 당선된 사례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국민당의 마지막 희망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 지방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마잉주 총통이 주석직을 사퇴하자 2015년 1월 새로운 당 주석으로 추대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회담 등 정치적 행보를 착실히 밟아나가며 차이잉원 독주의 유일한 대항마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도 이번 선거는 무리라고 판단하였는지, 총통 선거를 불출마하고, 주석직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선언하며 중국국민당을 멘붕에 빠뜨렸습니다. ㅡㅡ;


 - 중국국민당의 후보는 훙슈주로 결정되었으며, 주리룬은 훙슈주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친민당 쑹추위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자 단일화를 제안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훙슈주의 지지율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고, 결국 쑹추위에게도 밀려 3위로 추락하자 당내에서 후보 교체론이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 당 주석인 주리룬은 이러한 당내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고, 중국국민당은 2015년 10월 훙슈주에 대한 후보 지명을 철회하고 주리룬을 총통 후보로 다시 지명했습니다. 일단 시진핑을 만난 이전의 행보나 그 때의 발언 등으로 보았을 때, 궁극적으로는 양안 통일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훙슈주가 후보시절 지나치게 급진적인 통일론을 주장하여 중국-미국 양측의 어그로를 끌었던지라, 주리룬은 일단 이에 대해 수위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 11월 13일부터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고, 워싱턴타임즈(통일교 소유의 미국 언론)를 통하여 "타이완이 중국에서 분리를 선언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ECFA와 TPP를 동시에 찬성하는 등, 중국국민당의 기존 노선을 충실히 반영하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후보 지명 이후 쑹추위의 지지율 하락과 함께 일단 2위를 탈환하긴 했지만, 어차피 2+3위로도 1위 차이잉원에게 밀리는 실정.


 - 11월 18일 왕루쉬안(1961-) 前 노동위원회 주임위원(노동부 장관)을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왕루쉬안의 장관 시절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개인적 부정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주리룬에게는 오히려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장관 시절 '22000 정책'으로 불리는, 노동자 초임을 22000위안으로 억제하는 기업에 지원책을 제시하는 천하의 개쌍놈 정책을 시행하는 등 타이완 노동자의 소득 감소에 큰 공헌(?)을 했다는 비판에, 군인아파트에 대한 부동산 투기로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의혹이 그것.


 - 일단 왕루쉬안은 기자회견을 통하여 "불법행위는 아니었으나 부동산 투기를 통하여 취한 이득(1380만 위안)은 사회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런다고 여론의 시선이 크게 누그러지지는 않고 있어, 가뜩이나 어려운 주리룬과 중국국민당의 상황에 또 하나의 짐이 되고 있는 실정.



3. 쑹추위(친민당) - 쉬신잉(민국당)


[쑹추위(左), 쉬신잉(右)]

"한 걸음을 내딛은, 함께 이 길을 찾아(跨出這一步, 一起找出路). 변화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改變,從自己開始)."


 - 쑹추위(1942-)는 세 번째로 총통선거에 3수 출마하였습니다. 객가 계열이며 후난 성 출신의 외성인으로, 아버지는 중화민국 군인 출신입니다. 국립정치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정치철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후 모교인 국립정치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행정원 신문국(국정홍보처)으로 적을 옮겨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 이후 1979-1984년에 걸쳐 신문국장(국정홍보처장 혹은 정부 대변인)으로 재임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비판이 많은데, 그가 신문국장으로 재임하던 1980년대 초반은 아직 중국국민당 독재가 유지되고 있었으며(당시는 장징궈 집권기), 이 시기 자행된 반체제 성향 언론에 대한 탄압, 하카어(객가어)와 원주민 언어 사용금지 등 언론탄압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이는 그의 출신과 더불어 본성인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고, 본성인 출신 총통인 리덩후이와의 갈등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 1988년 중국국민당 중앙 상무위원이 되고, 1994년에는 첫 타이완 성장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8년까지 재임하였습니다. 1998년 타이완 성의 행정 기능이 공식적으로 정지되었기 때문에, 쑹추위는 타이완 역사상 유일한 '민선(民選) 타이완 성장'이라는 특이한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중국국민당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게 됩니다.


 - 2000년 총통 선거에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하였으나, 당시 총통이었던 리덩후이는 부총통 롄잔(1936-)을 밀고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심한 반목을 낳았습니다. 쑹추위가 더 경쟁력 있는 후보로 꼽혔음에도 중국국민당 총통 후보는 결국 롄잔으로 결정되었고, 쑹추위는 이에 불복하고 탈당한 후 독자 출마를 선언해 버렸습니다(당시 리덩후이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에 대하여는,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가 역시 본성인 출신인 천수이볜의 당선을 바라며 X맨 짓을 한 것이라는 의혹이 많습니다).


 - 결국 보수-외성인 표가 갈라지는 바람에 총통 자리는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후보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상처뿐인 총통선거 후 무소속이었던 쑹추위는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당(친민당)을 창당하였고, 후보 분열이 지난 총통선거의 패인이라는 게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2004년 총통선거에서는 롄잔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천수이볜이 의문의 테러를 당하는 바람에(자작극 의혹이 있음) 여론이 요동쳤고, 결과는 0.2% 차 패배.


 - 이후의 행보는 상당히 지리멸렬했는데, 2005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는 타이베이에 친민당 조직이 없어서 법적으로 무소속 출마가 되어버리는 촌극을 벌이며 ㅡㅡ; 4% 득표로 낙선, 2012년 총통선거에도 출마하였지만 이번에는 3% 득표를 하며 낙선. 타이완의 양당체제가 고착화되며 친민당 등의 군소정당은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었고, 친민당의 추락과 함께 쑹추위도 자연스레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 그런데 쑹추위는 2012년 다시 대권에 도전하였고, 중국국민당과 훙슈주 후보가 그야말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지지율을 자랑하는 상황에서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주목받으며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출마 선언 때 공개한 TV 광고에서는 흑색선전을 이겨내겠다는 의미로 진흙 범벅이 되는 것을 감수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쑹추위 후보 TV 광고]


 - 출마 선언 이후 중국국민당 추락의 반사이익을 가져가며 지지율 2위로 부상하였고, 출마 선언 직후에는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후보에게 10여 % 차이까지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멘붕에 빠진 중국국민당 측에서는 단일화를 제안하였으나, 단일화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두 보수 후보의 지지율은 사이좋게 떨어져 어느새 둘의 지지율을 합쳐도 차이잉원에게 밀리는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중국국민당에서는 후보를 주리룬으로 교체하였고, 쑹추위는 "단일화 X까"를 선언했습니다.


 - 쑹추위 측에서는 부총통 후보로 쉬신잉(1972-) 민국당 대표를 지명하였습니다. 쉬신잉은 신주현 출신으로, 국립자오퉁대학 토목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신주현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시의회(2005년)와 입법의원(2008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습니다. 2009년 중국국민당에 입당, 2012년에는 입법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중국국민당 중앙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지만 2015년 양당체제 고착을 비판하며 돌연 탈당을 선언하였습니다. 탈당 후에는 민국당을 창당, 주석으로 재임 중입니다.



 - 현재 총통선거에 출마한 후보는 총 세 팀으로, 차이잉원-첸젠런(민주진보당/무소속), 주리룬-왕루쉬안(중국국민당/무소속), 쑹추위-쉬신잉(친민당/민국당)이 후보로 등록하였습니다. 중국국민당의 경우 본래 총통 후보자는 훙슈주(중화민국 입법원 부원장)였으나, 중국국민당과 후보 본인의 지지도가 추락을 거듭하자 10월 17일 전격적으로 후보를 주리룬(신베이 시장, 중국국민당 주석)으로 교체한 바 있습니다.


 - 범람연맹에서 둘, 범록연맹에서 하나 출마한 모양새인데, 본래 범록연맹 쪽에 후보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민주진보당 창당멤버였고 당 주석(대표)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무소속 정치인인 스밍더(1941-)입니다. 2000년 탈당 이후 천수이볜과 대립, 천수이볜 집권 당시 반정부 활동을 전개한 바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민주진보당의 원로급 인사이기 때문에 민주진보당 쪽에서 바짝 긴장하였으나, 타이완의 선거 규정상 무소속 총통후보는 27만명의 추천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에 실패하여 ㅡㅡ; 실제 출마는 무산되었습니다.


 - 현재 선거의 판세는 차이잉원 후보의 독주 아래, 범람연맹의 두 후보(주리룬, 쑹추위)간 단일화 압력이 존재합니다. 쑹추위 후보는 일단 선거전 완주를 공언하고 있으며, 차이잉원의 독주가 가속화되며 '단일화를 해도 패배하는' 분위기가 강해진 이후로는 단일화를 추진할 동력도 비교적 약해진 상황. 다만 쑹추위 측의 지지도가 상당히 하락한 상황이라 막판 단일화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15년 6월~11월 사이의 여론조사 결과 모음. 출처 위에서부터 차이잉원/훙슈주-주리룬/쑹추위]


 - 그 외 소소한 특이점으로, 타이완의 총통선거는 입법의원(국회의원) 총선거와 함께 치러지며, 후보자 등록과 유세 등의 선거 일정 또한 동일합니다. 그리고 후보자 번호를 추첨식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문제되는 '번호 보고 찍기'가 불가능합니다. 이번 총통선거 후보자들은 세 진영 모두 정부후보가 남-녀 조합에 서로 다른 당 후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1. 정세(1) : 양안관계


 - 중국이 타이완을 국력으로 압도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양 진영의 양안관계 인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국민당의 기조는 초기의 '본토수복'노선에서 이제는 양안간 우호관계를 대표하는 정당처럼 인식될 정도가 되었으며 ㅡㅡ; 민주진보당 역시 초기의 강경한 독립주의 노선에서 상당히 후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다만 어느 노선을 걷더라도 경제면에서는 이미 타이완이 중국 대륙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출의 40% 이상을 중국이 담당하고 있을 정도. 이러한 배경에서 2011년 1월 양안간의 (사실상) FTA인 '양안경제협력구조협의(ECFA)'가 발효되었는데, 이에 대한 여론의 역풍이 상당했고 민주진보당이 강하게 반발하여 한국에나 있을 줄 알았던 국회 공성전까지 벌어졌습니다. 2013년에는 서비스-노동분야에 대한 협정이 추가로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한 비준에 반대하여 2014년 대학생들이 입법원에서 점거농성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2010년 입법원 공성전 亂!]


 - 여기에 2014년 홍콩의 우산 혁명 이후 타이완 여론의 대(對)중국 인식이 급격히 악화됩니다. 중화민국이 본토를 수복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니 양안의 통합은 결국 타이완이 중국에 흡수통합 되는 형태일 가능성이 높은데, 여기서 그나마 현실적인 방안인 홍콩식 '일국양제'가 바로 그 홍콩에서 흔들리는 것을 지켜본 여론이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쪽으로 크게 이동했기 때문. 마잉주 총통은 부랴부랴 홍콩의 시위대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중국국민당은 여론의 역풍을 제대로 맞고 말았습니다.



2. 정세(2) : 경제난


 - 1980~1990년대 전성기를 누린 타이완의 경제는 2000년대 이후 심한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는 경제성장률이 큰 폭으로 하락하고, 정부 부채비율 역시 급증하는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는 중. 비록 정부의 금과 외환 보유량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장기화되는 경기 침체는 서민경제에 직격탄을 날려 노동자 임금이 1990년대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하락해 있습니다. 2010년 기준 타이완 대졸자의 평균 초봉은 22624 대만달러, 약 80만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2006년 이후 타이완 경제성장률. 출처]


 - 여기에 꾸준히 이루어져 온 타이완 자본의 중국 진출은 결과적으로 타이완 내 산업체의 중국 이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타이완 내 일자리의 감소로 연결되며 서민경제의 침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서민경제의 침체는 출산율 감소로, 출산률 감소는 잠재성장률의 지속적 감소로 이어지기에 타이완 경제의 앞날은 상당히 어둡다 하겠습니다.


 - 마잉주 정부가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려 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는 타이완 경제의 중국 예속을 심화시킬 뿐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으며, 특히 2차로 협의된 서비스-노동시장의 경우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어 타이완의 일자리가 잠식당할 것이라 하여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2014년 타이완 입법원 점거사태가 바로 이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대학생이 점거를 주도한 것은 청년층이 이 협정에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입법원 점거농성. 출처]


 - 이에 대하여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일단 양대정당의 총통후보가 모두 TPP 가입 추진을 공약하였으며, 단지 중국 측의 반응이 큰 변수가 되는 상황. 중국이 TPP에 참여할 경우 타이완은 자연스레 밀려날 가능성이 높은데, 중국은 TPP에 대항한 새로운 경제협정(RCEP) 체결을 추진 중이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가입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TPP 가입 시 타이완의 공식 국가명이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3. 정부 : 레임덕과 '9총통'


 - 총체적 난국 속에 마잉주 정부는 말 그대로 여론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미 마잉주가 재선에 성공한 직후부터 여론은 좋지 않아서, 2013년 9월 여론조사에서 마잉주 총통의 지지율은 9.2%라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로도 검찰의 국회 도청 사건, ECFA 확대 반대, 홍콩 우산 혁명 등 악재들이 계속 튀어나오면서 추락한 지지율은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9월 여론조사 결과. 출처]


 -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아 2014년에는 민주진보당 측에서 탄핵까지 거론하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하였는데, 마잉주의 모친상 중에 민주진보당 입법의원이 빈소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벌어지면서 ㅡㅡ; 여론의 역풍을 맞는 바람에 마잉주는 한 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론이 크게 변화한 것까지는 아니라서 2014년 11월 지방선거에서는 중국국민당이 참패하였고, 이에 책임을 지고 마잉주는 중국국민당 주석직을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 2015년 2.28 사건 추모식에서는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에게 악수를 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였고(커원저는 2.28 희생자의 후손), 대중에게는 자신의 이름과 지지율을 겹쳐 '9총통(九總統)'이라 불리며 조롱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2015년 11월 7일 전격 성사된 '양안 정상회담'이 반등의 계기가 되었는데, 양측 정상이 국가원수 자격으로 만난 것은 국부천대 이후 최초의 일이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마잉주와 시진핑. 출처]


 - 이 회담에서 두 정상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했는데, 다분히 이번 총통선거를 겨냥한 행보로 보입니다. 일단 정상회담을 기회로 마잉주 정부의 지지율은 19%로 두 배나 ㅡㅡ; 상승했고, 주리룬 후보의 지지율도 소폭이나마 상승했지만 돌아선 여론을 돌려놓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입니다. 정상회담에서 천명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하여도 반응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데, 직후의 여론조사에서는 46.7%가 새 입법의회에서 마잉주의 제안을 기각해야 한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이하 김성근)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안 좋은 쪽으로. 한화가 김성근을 선임할 때만 해도 2015년 한화의 변화할 모습에 대한 기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의외라고 할만하죠. 야알못이라 깊은 분석은 어렵고,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생각하며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 김성근은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야구지도자 중 하나입니다. 김응룡 전 감독 정도만이 비교대상이죠. 그런 그가 2010년대 압도적 최하위팀 한화를 맡을 때, 블로거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해 한화가 어떻게든 분명 발전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단지 첫 해에 5강에 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따져보는 수준이었죠. 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분명 전체적으로 보면 한화는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습니다(이는 그동안의 한화가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김성근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아 버렸습니다. 블로거가 보기에도 현재의 김성근은 분명 한화를 망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 글은 그러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1. 김성근, 전형적인 '한국형' 리더


 - 일단 김성근이라는 캐릭터가 왜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표상으로 대접받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김성근의 스타일은 리더가 목표와 실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아랫사람'들은 거기에 절대적으로 따르면 되는, 전형적인 독재자형 리더십이죠('독재자'라는 단어가 입맛이 쓰지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쓴 것이지 부정적 의미로 쓴 건 아닙니다).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발전신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명한 지도자(독재자)가 방향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강제적인 통제와 더불어)지시하면 사람들이 거기에 충실히 따르는.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현재도 잘 먹힌다는 건 현재의 대통령이 당선된 과정을 보면 명백하고, 그런 사회에서 김성근의 리더십은 가장 이상적인 것임에 분명합니다.

 - 그런데 여기엔 분명한 후과가 따르죠. 독재자형 리더십은 필연적으로 리더를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탄압, 그리고 리더가 옳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을 때의 후유증을 낳습니다. 김성근이 대단히 인간적이고 아랫사람을 잘 챙기는 지도자인 것은 유명하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스타일의 아랫사람에게는 끝없이 매몰차고 가혹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한대화 전 감독의 경우, OB에서 뛰던 시절 질병(A형간염)의 여파로 강훈련을 소화할 몸상태가 아니었음에도 '훈련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김성근의 눈 밖에 나고, 쫓겨나다시피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며 나중에 쌍방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한대화는 김성근의 반대로 은퇴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한 바 있습니다.

 - 김성근 스타일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양으로 질을 커버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2010년대쯤 되어서는 김성근식 훈련의 강도와 분량이 그야말로 독보적이라 할 만하지만, 그런 게 일반적이었던 20세기에도 김성근은 선수를 대단히 많이 '굴리는' 감독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선수들에게 다양한 방식의(나쁘게 말하면 별별 희한한 방식의) 훈련을 시키죠. 빠른 성적향상을 위해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시키고,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훈련법은 감독이 직접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방식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건 다들 짐작하실 겁니다.

 - 그에게 '한국적'이라는 말을 붙인다면,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링크를 참고.


2. 김성근은 리빌딩형 감독이 아니다


  - 2015년의 한화는 철저한 리빌딩이 필요한 팀입니다. 주전급 선수의 뎁스가 처참할 정도로 얇기 때문에(차라리 선수들 다 팔아치우던 시절의 히어로즈가 더 나아 보입니다. 블로거는 넥센 팬), 일단 선수층의 두께를 키우는 일부터가 필요하고 이건 1~2년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넥센이 아직도 이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신다면). 이런 팀에는 선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지도자를 앉혀놓고 한 3~5년쯤은 성적에 연연할 필요가 없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리빌딩이 가능하죠.


 - 김성근은 어떨까요? 분명 김성근은 그동안 이러한 팀들을 맡아 성공적인 육성 능력을 보여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팀들을 맡아 첫 해부터 좋은 성적을 거두었죠. 여기서 '첫 해부터'라는 게 중요. 즉 김성근은 선수를 장기적으로 키우기보다, 단기간에 가능한 한 빨리 선수를 키워낸 다음 그 선수들을 200% 활용하여 최대한의 성적을 거두는 스타일의 감독인 셈입니다. 단기간에 선수를 키워내려면, 결국 훈련의 강도를 최대로 높이는 것밖에 답이 없죠. 김성근 특유의 미친 듯한 훈련량은 상당 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는 선수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오버페이스'가 됩니다. 6개월 이상 계속되는 페넌트레이스 일정에 강훈련, (투수의 경우) 혹사까지 겹치게 되면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체력 및 근력소모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선수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주게 될까요? 김성근을 변명할 여지가 있다면 적어도 그는 선수의 상태에 대한 세심한 관리를 한다는 점인데, 김성근식 관리는 선수를 최대한 혹사한 후 나가떨어질 때쯤 일정한 휴식을 부여하는 방식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신체가 점점 소모되는 것을 온전히 막지는 못합니다(재료과학에서는 '피로파괴'라고 합니다).


 - 위에서 분석해봤듯이 김성근은 '빨리 만들어서 빨리 써먹는' 타입의 감독입니다. 적어도 먼 미래를 우선시하는 감독은 아니죠. 그가 몸담았던 팀이 그가 나간 이후로 하나같이 성적이 추락하는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팀이 아예 망해버린 쌍방울을 빼고)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그랬다는 것은 단순히 프론트나 후임 감독의 삽질이라고만 해석하기엔 곤란할 것입니다. 비록 그가 5년 이상 장기간 재임한 적이 없기 때문에 '김성근이 끝까지 책임을 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후임자를 대단히 난감하게 만드는 감독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3. 선수의 특성을 무시하는 방향제시


 - 김성근식 리더십의 다른 문제는 '선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의 밑에 있는 선수는 일률적으로 '적당히 날씬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김성근의 강훈련을 거쳐가게 되면 누구라도 살이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ㅡㅡ; 최근 프로야구 선수들이 체중을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가 되면서, 살을 지나치게 찌워 문제가 되는 선수들도 제법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선수들을 제외한, 현재 상태로도 별 문제가 없는 선수들까지 강제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는 것.


 - 이번 시즌 양훈의 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경찰청에서 제대하여 올시즌 한화로 복귀한 양훈은 김성근의 지시로 살을 뺐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우수한 피지컬이 무기인 양훈은 살을 뺀 이후 젓가락이 되어 ㅡㅡ; 구위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시즌 초 버려지다시피 넥센으로 트레이드됐죠. 그런 양훈을 받은 넥센은 김성근과 정확히 '반대로' 가게 됩니다. 짧은 기간 동안 무서울 정도의 벌크업을 통하여, 거의 다른 사람 수준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 이후 양훈은 넥센의 새로운 필승조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많은 걸 시사하죠.


 - 혹자는 선수들 개개인에 맞는 다양한 훈련법을 적용하는 감독이지 않냐고 반론을 제기하실텐데, 그건 그것대로 맞습니다.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건 큰 틀에서, '최대한 많은 훈련과 이를 통하여 강인하고 가벼운 몸 만들기'라는 기본 전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감독에게, 위에서 말한 한대화 같은 선수가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당뇨병 환자였던 심성보 정도일텐데, 김성근이 직접 훈련 스케줄을 따로 짜 줄 정도로 신경을 썼다지만 (본인의 태만 때문이건 어쨌건) 좋은 결과는 내지 못했으니 야만없이라 하겠습니다.


4. 투수혹사 문제에 대한 단상


  - 투수의 수명에 대한 김성근의 생각은 전형적인 일본식 마인드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야구에서는 '투수의 팔은 던지면 던질수록 단련된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투수가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니까 매년 고시엔 대회에서 연일 완투를 거듭하는 고교선수가 나와도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고, 선발 투수가 많은 공을 던져 완투하는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는 거죠. 반면 미국은 정 반대로 생각하는데, '투수가 평생 던질 수 있는 공의 개수는 정해져 있다'고 보고 학교야구에서 투수들의 투구수를 철저히 제한합니다. 놀란 라이언이 예찬하는 '롱토스 훈련법'의 경우도 찬반 양론이 거세고, 이를 즐겨 하는 선수들 중 다수가 나중에 구속 저하 증세를 보인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인 쪽으로 여론이 가고 있죠.

 - 이것에 대해 블로거는 뭐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견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일본인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 활약하다가 하나같이 드러눕는 게 과연 우연일까 싶기는 합니다.

 - 한국야구로 돌아와 보죠. 20세기의 야구 감독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김성근 또한 팀의 마운드를 우수한 몇몇 투수들에게 최대한 집중시키는 투수 운용을 합니다. 가깝게는 SK 감독 시절 정우람, 전병두, 박희수 등 몇몇 불펜투수가 수많은 혹사 관련 기록들을 만들어냈던 바 있죠. 여기에 대하여는 항상 '김성근은 철저한 관리 하의 혹사를 한다'라는 변명이 따라붙는데, 글쎄요 저 SK 불펜 3인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5년째 재활, 재활과 복귀를 반복, 마침내 퍼져버린 것으로 의심됨)를 생각하면 그 관리라는 게 도대체 얼마나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한화의 '살려조'에 대한 우려가 많은 건 결코 과한 게 아닙니다.


5. 결론 - 김성근은, 20세기는 끝났다


  - 지금 시점에서 어떤 욕을 먹더라도, 김성근이 20세기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데 이견은 없습니다. 라이벌 김응룡이 커리어 막판에 웃음후보(?)가 되었음에도 10회 우승 감독이라는 금자탑을 아무도 폄하하지 않는 것과 같죠. 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앞으로도 통할 것인가에 대한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 블로거는 김성근에 대하여 '분명 저런 방식이 언젠가는 한계에 다다를텐데 그것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정도의 생각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2015년 이후 한화 감독으로서의 행보가 여기에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일단 (안타깝게도) 김성근은 커리어 막판에 김응룡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오히려 시즌 중반 이후 그의 모습은, 그동안 그의 뻣뻣한 이미지를 보완하던 '최소한의 유연성'마저 집어던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성근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성공신화, 발전의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몇몇 투수들의 팔을 제물로 삼아서.



 - 지난 17일 방콕 도심의 에라완 사원 근방에서 폭탄테러로 인해 (18일 현재) 최소 21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태국 총리는 이번 테러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지지세력 쪽에서 태국의 관광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벌인 테러행위라고 주장하였고, 정부에서는 최근 중국으로 추방된 위구르 독립운동세력의 일원일 수도 있다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합니다. 이번 테러는 방콕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테러사건입니다. 관련기사


- 탁신 전 총리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닌데, 최근의 태국 정치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 탁신의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시위와 쿠데타가 빈발하는 등 그야말로 난장판입니다. 군부의 쿠데타는 태국 현대정치사에서 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며, 이것이 푸미폰 아둔야뎃(1927-, 라마 9세) 현 국왕의 권위와 뒤엉켜 현대 태국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1. Round 1 : 군부 vs 국왕

  - 태국은 1932년까지 절대군주제 국가였습니다. 이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는데, 엉뚱하게도 이런 전환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군부 쿠데타입니다. 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쿠데타(?)였던 당시의 쿠데타를 라마 7세 국왕이 받아들이고 입헌군주제 전환을 인정한 이후 태국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입헌군주제로 이어져 왔습니다.


- 얼마 후 라마 8세가 즉위하였지만 1946년 의문의 총기사고로 급사하자, 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이 왕위를 이어받아 라마 9세가 되었습니다. 비록 왕이 되었다지만 권력은 군부가 틀어쥐고 있었으며, 푸미폰 국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서의 권위를 쌓아나가며 권토중래를 노립니다. 푸미폰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1992년 수찐다 크라쁘라윤이 주도한 쿠데타 때입니다.


 - 수찐다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잠롱 스리무앙(1935-)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대시위가 발생하였고, 군부가 진압 과정에서 총기를 발포해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푸미폰은 자신을 알현하러 온 수찐다를 면전에서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 한 방으로 수찐다 내각은 붕괴하였으며 수찐다 본인은 외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총선거를 통해 사실상 최초의 본격적인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푸미폰 국왕은 그야말로 태국 국민들의 숭배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 이후 십수년간 태국은 그럭저럭 민주적인 입헌군주국가로 잘 나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2월 탁신 친나왓(1949-)이 총리로 취임하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2. Round 2 : 탁신 vs (군부+국왕)

  - 탁신은 타이 굴지의 대기업을 창업한 화교 출신의 기업가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총리가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정책은 태국 역사상 가장 친서민적인 것이었고, 주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납니다. 태국은 발전 과정에서 상당히 심한 빈부격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하층민들이 탁신에 지지를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은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보수파의 양대산맥인 왕실과 군부가 힘을 합쳐 탁신을 권좌에서 축출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스라윳 쭐라논 육군참모총장의 주도로 쿠데타가 발생하고, 푸미폰 국왕이 이를 승인한 것입니다. 이후 군부의 관리 하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흥미롭게도 친 탁신 세력이 승리를 거둡니다.


 - 다만 이 무렵부터 타이의 정치구도는 완전히 둘로 쪼개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하층민이 중심이 된 탁신 지지세력과 왕실-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기득권)세력입니다. 2010년에는 친 기득권 성향인 아파싯 웨차치와(1964-) 총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이에 보수세력도 맞불을 놓으며 거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 2011년에는 탁신의 동생인 잉락 친나왓(1967-)이 총리직에 올랐는데(이것 자체가 탁신 세력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주죠), 그는 탁신에 대한 사면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2013년 다시 대규모 시위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탁신이 하층민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상당한 부패혐의를 받는 등 그리 깨끗하다고는 볼 수 없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탁신 반대세력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또다시 찬성-반대측 사이에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이는 푸미폰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 휴전을 선언하며 진정되나 싶었지만 2014년 5월 잉락 총리가 '권력남용'을 이유로 헌법재판소로부터 총리직 상실 판결을 받으며 다시 폭발합니다.


 - 혼란이 커지는 와중에 5월 20일 난데없이 군부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22일 쁘라윳 짠오차(1954-) 육군참모총장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음을 인정합니다. 이 쿠데타는 푸미폰 국왕에게 승인받으며 태국 역사상 12번째 '성공한 쿠데타'로 기록되었습니다. 쁘라윳은 선거 없이 총리직에 올랐으며, 이후 2015년 현재까지 태국에서는 새로운 총선이 실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태국 정치에 봄날은 오는가

  - 태국의 정치는 과연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타이에서는 1932년 이후 12번의 '성공한 쿠데타'와 7번의 '실패한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를 합쳐 평균하면 대략 4년에 한 번 꼴로 쿠데타가 발생한 셈입니다. 애초에 태국 군부는 정치에 깊숙히 개입해왔고,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마치 끝판왕(?)처럼 등장하여 모든 상황을 종결시키곤 하였습니다.


 - 이는 마치 터키의 정치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다만 터키의 쿠데타는 군부가 세속주의를 대표하며 쿠데타 이후 정치권력을 잡지 않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데 비해(이는 현대 터키의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유산) 태국은 쿠데타 세력이 직접 정치권력을 잡는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 왕실이 있지만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태국의 정치 지형에서 군부와 왕실은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1992년의 쿠데타에서 잘 드러납니다. 국왕이 민주화세력과 힘을 합쳐 군부를 억누르는 구도가 되었죠. 이 결과 국왕은 태국의 수호자라는 절대적 권위를, 민주화세력은 민주정부를 얻게 됩니다.


 - 그런데 민주정치 하에서 탁신으로 등장하는 포퓰리스트(블로거는 이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의 시대가 열리자, 이를 원치 않는 왕실은 이번에는 군부와 손을 잡게 됩니다. 2006년과 2014년의 쿠데타는 다 푸미폰 국왕의 승인을 통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국왕의 승인이 없으면 아무리 강력한 쿠데타라도 한 방에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 다만 최근의 난장판을 단순히 왕실과 군부의 잘못으로만 돌리기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탁신은 현재 태국의 하층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그 자신이 기업가 출신이고 이런저런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는 등 지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탁신에 대한 사면 시도가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태국 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2006년 이후 태국의 보수세력을 지탱하는 것은 푸미폰 국왕 개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지지입니다. 국왕에 대한 모독이 과도할 만큼 금지되어 있다거나, 이러한 지지가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은 있지만 어쨌든 국민들이 그를 거의 신급으로 존경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푸미폰은 다시금 절대권력에 가까운 권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지지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푸미폰 국왕은 이미 나이 90을 바라보면서 각종 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와찌랄롱꼰 왕세자(1952-)는 성격과 사생활 문제, 역시 건강이상 의혹까지 겹쳐 있어 국민들에게 매우 평판이 나쁩니다. 따라서 푸미폰 사후 그의 자녀들이 뒤엉켜 권력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도 있죠. 이래저래 태국 정치의 민주적 정상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참고 : 1 2


 -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평소 세계지리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 한 번 들어봤기 힘들 그런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남부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로, 마다가스카르 섬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며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합니다. 근대 이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당했으며 1960년 독립하였습니다.

 -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매우 특이하게도, 바로 옆 아프리카 대륙이 아니라 거의 지구 반대편인 동남아시아-태평양 쪽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언어인 '말라가시어'는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 등을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 어족'(대만 원주민 언어를 기원으로 하며, 동남아시아 남부와 태평양 일대에서 사용된다)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인도양의 끝에서 끝까지 횡단했을지는 미스테리인데, 이 어족이 반대편으로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나 이스터 섬까지 퍼져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항해술로 충분히 가능은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 라치라카 : 독재와 경제난

 - 아무튼 마다가스카르는 독립 이후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사회주의 성향의 일당 독재국가가 됩니다. 하지만 (역시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잦은 군사 쿠데타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199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 민주 공화국이 됩니다. 1976년부터 장기 집권 중이던 디디에 라치라카(1936~)는 헌법 개정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해먹다가, 1993년 알베르 자피(1927~)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게 됩니다.

 (사진 1 : 디디에 라치라카)


 - 하지만 자피 정권은 라치라카를 압도(?)할 만큼 무능하였고, 사회가 갈수록 난맥상에 빠지는 속에 자피는 탄핵당하고 정치적 혼란 끝에 라치라카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재집권한 라치라카는 외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지만, 얼마 뒤 동아시아 경제 위기(우리의 기억엔 그 이름도 찬란한 IMF...)를 계기로 외국 자본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마다가스카르 경제는 완전히 붕괴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마크 라발로마나나(1949~)였습니다.



 (사진 2 : 마크 라발로마나나)


 - 라발로마나나는 젊은 시절 요구르트 등의 유제품 생산에서 시작하여, 마다가스카르 굴지의 대기업을 설립한 기업가였습니다. 그는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1999년 안타나나리보(마다가스카르의 수도) 시장에 선출되었고, 이 시기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01년 대선에 출마하여 라치라카와 경쟁하게 됩니다(대한민국의 어떤 전직 대통령이 생각나지만 넘어가기로). 투표 결과는 라발로마나나 46%, 라치라카 40%로 규정상 결선투표를 시행해야 했으나, 라발로마나나와 그가 소속된 TIM 당은 선거가 공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자신이 과반 득표를 했다고 주장, 결선투표를 거부하고 자신이 당선되었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 졸지에 마다가스카르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한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여론은 라발로마나나 쪽으로 쏠려 있었고, 헌법재판소 역시 라발로마나나의 손을 들어주고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쯤 되자 궁지에 몰린 라치라카는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던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시도하나, 아무 지지도 받지 못하는 쿠데타는 그야말로 처참히 실패하고, 라치라카 본인은 외국으로 도망치는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 라발로마나나 : 신자유주의 드라이브


 - 라발로마나나는 대통령 취임 이후 강력한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라는 게 신자유주의 성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외국 자본에 대한 전면적 개방, 친 기업적 조세 정책, 대규모 토목 사업, 민영화 등......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정책들을 시행하였고, 이는 빈부 격차의 심화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IMF의 경제 지원이나 외국 자본의 투자를 실제로 얻어내는 등 어쨌거나 경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이 가시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다음 대선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2007년 대통령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한 헌법 개정을 관철시키는 등, 점차 독재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기에 그의 임기 동안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극심해졌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다가스카르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엄한 소리를 해서(어 이거 진짜 누구하고 똑같다;;) 위헌 논란에 휩싸이는 등,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마다가스카르 인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안드리 라조엘리나(1974~)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안타나나리보에서 DJ로 활동하던 그는, 당시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통해 시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오죽하면 거침없다고 해서 별명이 TGV). DJ로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2007년 안타나나리보 시장 선거에 출마한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쪽에서 깜짝 놀라 대항마로 출마시킨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눌러버리고 시장에 당선됩니다.



 (사진 3 : 안드리 라조엘리나)


# 라조엘리나 vs 라발로마나나, 그리고 대우로지스틱스


 - 거칠 것이 없어진 라조엘리나는 자신의 별명을 따 TGV 당을 창당하고, 정부의 언론 통제에 맞서 '비바TV'라는 독립언론을 설립하여 대놓고 라발로마나나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라발로마나나 정부는 안타나나리보에 들어가는 모든 정부 지원을 끊어버리는 무리수를 두었고, 누가 봐도 대놓고 라조엘리나를 억압하는 형세가 되자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민심이 더욱 라조엘리나 쪽으로 쏠리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 이 와중에 마다가스카르 전체를 뒤흔들 초대형 사건이 터지는데, 정부가 한국의 대우로지스틱스(이하 대우)에게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농장 경영을 위해 99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대우가 임대 경영에 대한 대가조차 사실상 거의 지불하지 않는 조건이었고(선금 정도는 있었는데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대우가 임대한 토지는 총 130만㏊에 달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마다가스카르 전체 농경지의 절반을 넘는 규모라고 합니다.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정부에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 이 문제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를 제외하면 언론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오히려 외국 쪽에서 더 큰 사건으로 조명을 받았는데, 신식민주의적 경제 침략이라는 비판과, 엄청난 규모의 농장 개발을 통한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것입니다. 가치 판단은 독자들께 맡기겠지만, 적어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사건이며 한국의 농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문제에 대해 언론이 지나칠 정도로 침묵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습니다.]]


 - 정부는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고, 라조엘리나는 대립의 수위를 더욱 높여갔습니다. 더 나아가 라조엘리나의 비바TV는 아예 정부에 대놓고 BJR(배째라)을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그가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여과 없이 방송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라치라카는 라발로마나나에 대항해 쿠데타까지 일으켰던 인물이니, 정부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 방아쇠가 당겨지다


 - 결국 참다못한 정부는 보안군을 투입하여 방송국을 급습하기에 이릅니다. 일단 프랑스 대사관저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한 라조엘리나는 본격적으로 안타나나리보 시민들에게 정부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는 슈퍼마켓과 친정부 언론사를 습격한 후 대통령궁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통령궁을 지키던 군부대가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에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즉시 사임을 요구하였고, 정부는 라조엘리나를 국가반역죄로 법정에 고발하는 등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 곳곳에서 군부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늘어가는 와중에 극적인 전기가 마련됩니다. 국방장관이 시민에 대한 발포에 항의하여 장관직을 사퇴하고, 군부는 더 이상의 시위 진압을 거부하고 오히려 시위대 쪽으로 돌아서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총구를 돌린 군대는 곧바로 대통령궁을 장악했고,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권한을 군부에 이양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군부는 이 권한을 다시 라조엘리나에게 이양,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가 사라진 마다가스카르의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하고, 곧바로 사태의 도화선이었던 대우와의 계약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사진 4 :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라조엘리나)


@@동영상 링크 - BBC


 - 여기까진 순조로워 보이지만 라조엘리나의 대통령 취임은 상당한 불안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단 마다가스카르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연령 제한이 40세였기 때문에, 34세에 불과한 라조엘리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지만 법정의 판결과 헌법 개정을 통하여 대통령 자리를 인정받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발로마나나 지지파는 극력 반발하였고, 이들의 보이콧 운동으로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50% 투표를 간신히 넘기며 가까스로 통과됩니다. 이 외에도, 어쨌거나 쿠데타라는 과정을 통한 집권이었다보니 세계 여론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질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아프리카 연합은 그의 집권 과정을 문제삼아 마다가스카르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고, 서방세계의 경제지원도 잇따라 끊어지게 됩니다.


# 세 사람의 이전투구泥田鬪狗, 그리고 (아직은) 현재진행형


 - 라조엘리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제이콥 주마의 중재를 받아들여 망명 중인 라발로마나나와 회담을 가졌고, 둘 모두 차기 대선에 불출마하기로 합의를 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난데없이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가 돌아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라조엘리나는 합의를 뒤집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고 말을 바꿔 버립니다. 당연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아내인 랄라오 라발로마나나(1953~)를 내세워 대선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 사태가 점점 개싸움으로 흘러가자, 국제적 여론 또한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특히 마다가스카르를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프랑스는 세 명 모두의 불출마를 강력히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대선 자체를 인정치 않겠다고까지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당국은 세 명의 후보 등록을 모두 불허하였고, 예정보다 미루어진 2013년 12월 마침내 대선이 치루어지게 됩니다. 결선투표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라조엘리나 정부에서 재정장관을 역임한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1958~)가 라발로마나나 계열의 장 루이 로빈슨(1952~)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사진 5 :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나나 현 대통령)


 - 국제사회는 이 선거 결과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내렸는데,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대통령이 라조엘리나 전 대통령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달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해피엔딩......이라 말하고는 싶은데, 아직까진 섣불리 마무리짓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일단 망명 중이던 라발로마나나는 2014년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었는데, 2009년의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라발로마나나 측은 정치보복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중. 한편 라조엘리나 역시 차기 대선에 재출마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하니, 모든 상황의 종결까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ps. :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현 대통령의 풀네임은 'Hery Martial Rakotoarimanana Rajaonarimampianina'로, 현재 세계 국가수반 중 가장 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 사진 출처 : 

위키백과 한국어판 - "안드리 라조엘리나"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마다가스카르 정치위기 사태"

위키백과 영어판 - "Andry Rajoelina" "Marc Ravalomanana" "Hery Rajaonarimampianina" "Didier Ratsiraka"

엔하위키 미러 - "마다가스카르 혁명"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4/01/03/0505000000AKR20140103197300099.HTML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1732196.html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kia&articleno=15852543&categoryId=599183&regdt=20090318004040



최근 일본에서는 한 정치가의 기자회견이 화제입니다. 노노무라 류타로(野々村竜太郎) 효고현 의원의 기자회견인데, 그는 최근 약 300만 엔 정도의 공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 300만 엔은 공무활동비 명목으로, 주로 교통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보고했지만 모 온천에 다녀온 게 100회를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영수증이나 다른 상세한 활동보고도 없어서 논란이 되고 있지요. 이와 관련하여 그는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기자회견에서 노노무라 의원은 괴성을 지르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며 전 일본인의 어이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현 의원이 되었다" "여러분이 날 뽑아줘서 내가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등의 발언을 쏟아냈지만, 정작 공금유용 의혹에 대하여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았고(...) 결국 천하에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죠.


기자회견 영상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한지라 그는 단숨에 일본의 합성 필수요소로 등극하게 되는데...


감동적인 버전


노노무라의 숲


F1 버전


기타 연주(...)


피아노 연주(...)


기타, 바이올린, 피아노 합주 버전(......)


이게 한국에도 알려지고, 한국에서는 그러잖아도 최근에 정치인 필수요소가 등장했던지라...



(...)


실제로 한국에서는 '일본판 고승덕'으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애비메탈(...) 패러디 곡을 올린 뮤지션이 노노무라 의원 영상을 가지고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올리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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