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21㎢

 인구

 10,084명 (2015년 추산)

 1인당 GDP(PPP)

 $2,500 (2006년 추산)



 - '나우루'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 태평양 한가운데, 적도 바로 아래 위치한 작은 섬나라죠. 그 작은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넓이는 서울 면적의 1/30이고 인구는 한국의 웬만한 읍 하나보다도 적습니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국가이며, 특히 공화국 중에서는 가장 작은 나라로 꼽힙니다(나우루보다 작은 바티칸이나 모나코는 '공화국'이 아니므로). 어찌나 작은지 명시된 수도(首都) 자체가 없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 위치나 크기 등에 비하여, 나우루는 언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는 그 정체가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관광이라든지 국제정치라든지 하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고, '자원으로 흥하고 자원의 고갈과 함께 쫄딱 망한'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원 고갈 이후 인류(혹은 중동의 석유 부국들)의 미래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라입니다.




1. 시작 : 바다새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작은 섬


 - 이곳은 그야말로 태평양에 점점이 흩어진 수많은 섬들 중 작은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섬에는 뭔가 특별한 게 하나 있었으니, 태평양에 서식하는 알바트로스 등의 바다새들이 오랜 기간 이 섬을 오가며 화장실(?)로 썼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이 섬에는 수천 수만 수억(?)년간 바다새의 배설물이 쌓이게 되었는데, 이 배설물은 오랜 시간동안 굳어 인(P) 성분이 많이 함유된 인광석으로 변모하였습니다.


 - 바다새가 만든 인광석만 잔뜩 쌓인 이 섬에는 태평양을 누비던 원주민(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들이 언제부턴가 들어와 정착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살던 작은 마을에 서양 세력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나우루 섬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곳을 찾은 유럽인들은 섬 전체에 지천으로 널린 인광석에 주목하게 됩니다. 인광석은 비료, 폭약, 의약품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에 쓰이는 중요 자원이었거든요.


 - 자원의 보고로 밝혀진 이 섬은 이후 본의아니게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의 손을 떠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초에는 독일 폭격기가 이 섬 일대를 폭격하여 연합군의 시설을 파괴한 일이 있었으며, 얼마 뒤 일본이 이 섬을 점령하여 1945년 항복할 때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은 외부의 전염병이나 강제이주 조치를 겪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섬에 귀환한 원주민은 7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폭격을 당하는 나우루 섬]


 -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국제연합을 대표하여 신탁통치를 하였으며, 1960년대 정부를 구성한 이후 1968년 완전히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우루의 신화가 시작됩니다.




2. 리즈시절 :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


 - 독립 직전인 1967년, 나우루 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 인광석 개발권을 완전히 넘겨받았습니다. 독립 이후 나우루는 국가 차원에서 인광석 개발에 나서 엄청난 이익을 쓸어모았으며, 주민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배불리 먹고 살 만큼 막대한 부를 얻게 됩니다. 1980년대 초 미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갓 넘을 때, 나우루의 1인당 GDP는 2만~3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1980년대 초입니다.


[저게 다 돈입니다 돈!]


 - 인구도 1만 명 남짓으로 많지 않으니 나우루 정부는 인광석 관련 수익을 아예 전국민에게 골고루 분배했고, 신석기시대 나우루 주민은 그야말로 허공에 태워도 남아돌 만큼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웃기게도 정작 나우루 주민은 인광석 채굴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단지 외국인들이 인광석을 채굴하는 대가로 지불한 로얄티만으로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것.


 - 사실 아무도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외국에서 사 오고, 필요한 노동력은 외국인을 불러와서 시키고(심지어 공무원이 외국인이었을 정도!), 술 한 잔 마시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돈이 남아돌 정도였습니다. 세금은 당연히 없고(애초에 그 돈을 누가 줬는데요), 주택, 교육, 병원 또한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지요. 현실 유토피아 심하게는 화장실에서 1달러짜리 지폐로 뒤를 닦을 정도였다는군요.


[물론 돈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이 분은 나우루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다만 당시에도 (주로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나우루의 행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원은 영원한 게 아니니까요. 나름 나우루 정부에서도 이 돈을 가지고 여기저기 투자도 하고, 돈놀이도 하곤 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성공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장의 영광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나우루의 그 누구도 걱정을 하지 않았고, 정부에서는 "자원이 떨어지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보면 되겠지" 정도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그리고......




3. 몰락의 시작 : 인광석이 바닥났다!


 - 우려했던 상황이 1990년대 이후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80% 이상이 채굴된 나우루의 인광석 생산량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정부는 더 이상 인광석 개발로 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부랴부랴 해외에 투자한 자산을 매각하거나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 당장 급한 불을 끄고, 어항을 확장하여 주민들이 새로운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지만 참담하게 실패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나우루 주민들은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기본적인 노동 개념조차 잊어버린 겁니다!


 -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온갖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일하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려서, 빨래나 설거지 등 기본적인 가사조차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움직이거나 하질 않는데다 식품이라곤 죄다 외국산 가공식품 투성이였으니, 90% 이상의 주민이 비만 상태로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론 디바베시 와카(1959-) 現 대통령. 대부분의 주민이 이런 상태]


 - 다급해진 나우루 정부는 전략을 바꾸어, 세계의 검은 돈(부정축재라든지, 범죄조직이라든지......)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조세피난처와 돈세탁 천국으로 변모한 나우루는 세계의 욕을 처먹으면서도 그럭저럭 경제수준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정부는 영국에서 상연된 어느 뮤지컬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고, 런던에서 열린 초연에는 정부 각료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으며, 투자한 돈은 쫄딱 날려먹는 등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 결국 국제사회의 금융 제재를 먹으면서 이 전략도 끝장났고, 나우루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4. 나우루의 현재 : 자원에만 의존한 사회의 최후


 - 이후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대가로, 오스트레일리아로 흘러들어온 난민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우루가 이들을 제대로 먹여살릴 여력이 있는 곳도 아니고, 사실상 난민들을 수용소에 가둬놓다시피하는 수준이라 난민들의 거센 불만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2003년 이후 지금까지 나우루는 잊을 만하면 수용된 난민들의 폭동으로 나라 전체가 난장판이 되는 일을 겪고 있습니다. 대통령 청사가 불탄 적도 있다는군요.


[나우루 섬을 촬영한 항공사진]


 -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인광석 개발이 지속되면서 사실상 인광석 더미나 다름없었던 나우루 섬의 높이는 계속 낮아졌고, 개발이 거의 끝나가는 현 시점에는 해수면과 거의 높이 차이가 없을 만큼 섬의 고도가 낮아져 있습니다. 여기에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져버리니, 나우루는 장기적으로 바다 밑에 통째로 잠겨버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 현재의 나우루는 사실상 국제 사회의 원조로 연명하고, 그 대가로 난민을 수용하거나 국제연합에 한 표를 던져주는 신세입니다. 소수의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민은 실업 상태이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비만과 성인병에 시달리며(당뇨병 환자가 전체의 40%) 제대로 일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나라 주민의 평균 수명은 에이즈나 다른 전염병의 요소가 거의 없는 환경임에도, 58세(남자)/65세(여자)로 상당히 낮은 수준입니다.


 - 나우루의 번영과 몰락은 인류 문명 전체에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자원을 빨아먹으며 번영을 누리는 현재의 인류 문명이, 바로 그 자원이 고갈될 때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우루의 역사는, 현재의 번영에 도취되어 미래의 환경 변화를 대비하지 않을 때 인류는 결국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http://www.nauru.or.kr/

http://skccblog.tistory.com/1070

http://clankorea.com/index.php?document_srl=16368&listStyle=webzine&mid=mission_south_pacific

경향신문 "[지구의 밥상] (1) 태평양의 '콜라 식민지'"

연합뉴스 "태평양 나우루의 호주 난민수용소, 폭동에 초토화"



9. 체제경쟁의 마지막 발악 : 1980년대 '4대 흑역사'


 - 1960~70년대를 거치며 남한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지속한 데 비해, 북한의 경제는 지지부진한 상태였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 쯤 역전된 남북한 경제력은 1980년대 들어서는 북한이 쫓아가기도 어려울 만큼 크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체제경쟁에서 갈수록 밀리게 된 북한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요량으로, 남한을 따라하듯이 거대 규모 사업을 잇따라 벌이지만 하나같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서해갑문]


 - 서해갑문 : 북한은 1960년대 이후 서해안 지역에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농경지로 만들었는데, 역시 우리는 한민족! 문제는 평안남도 서해안에는 대동강 외에 큰 하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대동강 하구 일대는 한반도에서 강수량이 가장 적은 곳 중 하나) 간척지들은 수자원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동강 하구에 둑을 쌓아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나아가서는 대동강의 선박 통행과 대동강 하구의 육상교통에도 보탬을 주려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 본래 계획은 하구의 안쪽에 둑을 쌓는 것이었는데, 이러면 둑의 길이는 짧아지지만 둑 안쪽에 너무 많은 토사가 퇴적된다는 결과가 나와 무산. 이후 현재의 위치가 제안되었고, 둑이 너무 길어진다는 반대의견에도 김일성이 직접 이것을 지지하면서 건설이 결정되었습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1981년 착공하여 1986년 완공하였는데, 본래는 1984년 완공 계획이었던 것이 기간이 질질 늘어나서 무려 두 배나 시간이 더 걸린 것입니다.


 - 그리고 정작 갑문을 짓고 보니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기대와는 달리 남포항의 진입로가 갑문으로 가로막힌데다 물이 고이니 겨울이면 얼어버려서 ㅡㅡ; 남포항의 활용도는 오히려 크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건설된 갑문은 주변 지역의 기후에도 악영향을 주었고, 결정적으로 갑문 자체가 부실공사로 지어지는 바람에 둑의 붕괴를 막기 위한 상시 보수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공병부대 하나가 오로지 서해갑문 보수를 위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ㅡㅡ;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


 -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 남한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자, 열폭한 북한은 몇 차례의 테러사건을 일으키며 올림픽에 대한 불안 여론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합니다. 올림픽에 대한 방해가 여의치 않자 북한은 (주로 사회주의권에서 개최하는) 1989년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하여, 이를 체제 선전에 활용하고자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대회를 개최했습니다(릉라도 5·1경기장 신축, 순안공항 확장, 도심 재개발 등).


 - 물론 대회 자체는 성공적으로 치러졌지만, 뭔가 상업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는(심지어 2만 명을 넘는 참가자에게 북한 방문과 체류 경비를 무료 지원) 체제 속에서 개최 비용은 고스란히 북한의 손해로 남게 되었습니다. 국제적 선전 효과 또한 대회 직후 사회주의권 붕괴로 있으나마나 수준이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수용인원 기준 세계 최대(15만명)의 경기장인 릉라도 5·1경기장 뿐.


 - 이 대회는 북한 사회에도 뜻하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남한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씨의 고급진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언행은 북한 주민들에게 거대한 컬처쇼크가 되었다고 합니다. ㅡㅡ; 더구나 그가 남한으로 돌아가 사형당하지 않은 것이 알려지며 남한 체제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탈북자 중 몇몇은 이 때 북한이 남한에 사실상 패배하였음을 절감했다고 증언하기도.


[류경호텔.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 류경호텔 : 도대체 언제 완공될 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건물...... 1987년 착공하였으며, 완공 목표는 1992년(김일성 탄생 80주년)이었습니다. 층수는 총 105층인데, 105호 돌격대가 건설에 참여한 것을 기념한 것이라는군요. 김정일이 남한의 63빌딩(1985년 완공)을 보고 열폭하여 건설을 지시했다는 설도 있으며, 그래서 건물의 크기는 (첨탑 포함) 330m로 건설 시작 당시에는 아시아 최대, 세계 7위의 고층건물이었습니다.


 - 그런데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하며 북한은 급속도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호텔을 짓던 북한은 공사대금을 체불하기 시작합니다. ㅡㅡ; 결국 건설에 참여하던 해외 기술진이 모두 철수해버리고, 필요한 자재들이 다른 건설사업으로 돌아가면서 1992년 콘크리트 골조만 완성된 상태로 공사가 전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 이후 호텔은 15년간이나 방치되어 북한의 실상을 대표하는 흉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북한은 호텔 따위에 거액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고, 방치된 건물의 안전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2008년에야 이집트 기업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하며 건설이 재개되었지만, 외장공사만 거의 완공된 상태에서 이집트 혁명의 여파로 자본이 철수해버리는 등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의 리즈시절)]


 -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 비날론(비닐론)은 합성섬유의 일종으로, 1939년 교토제국대학 박사 리승기(1905-1996)의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인으로 이공계 박사가 몇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한반도 전체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리승기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국대안 파동 등 연구에 전념할 수 없는 남한의 혼란상에 실망하고 6.25를 틈타 1950년 월북하게 됩니다.


 - 이후 그는 자립경제를 목표로 한 북한 당국의 지원을 받아, 비날론 양산체제 구축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1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함흥)가 건설되며 북한은 옷감 부족에서 상당부분 벗어날 수 있었고, 리승기는 북한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날론 생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석회석을 원료로 하는 비날론 생산공정은 특성상 대량의 물과 전기를 필요로 했고, 이는 북한의 전력이 충분하던 시절에나 유용했다는 점입니다.


 - 1983년 김정일은 경공업 발전의 일환으로 평안남도 순천시에 거대한 화학공장 건설을 지시합니다. 비날론을 중심으로 각종 화학제품을 생산하여 인민의 생활향상을 도모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제대로 가동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비날론이 자립경제의 상징이다보니 북한에서는 기를 쓰고 비날론 생산을 재개하고자 하는데,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결국 복구하지 못하고 사실상 철거된 것으로 보입니다.


 - 이러한 삽질 끝에 북한이 날려먹은 돈은 200억 달러(!!!!) 이상에 달했고, 이 때의 지출은 북한 경제에 치명타를 날리고 말았습니다.




10.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


 - 1990년을 전후로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잇따라 붕괴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북한은 1970년대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데다 이런저런 테러 활동으로 서방세계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었는데, 그나마 이를 메꿔 주었던 사회주의 진영이 사라져버린 것.


 - 더구나 북한 자체의 여력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농업은 생산량 증가를 위한 무리한 개간과 밀식(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것) 때문에 지력(地力)이 소실되며 198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수송을 대부분 담당한 철도는 수송량 증가를 위해 일찍부터 전철화가 진행되었지만, 전기 생산에 문제가 생기면서 철도 운송이 제대로 돌아가질 못하는 역효과만 낳았습니다.


 - 이미 1980년대 가시화된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북한은 합영법(1984년)이나 나진·선봉경제특구(1991년)를 만드는 등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체제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니 성과는 둘째치고 자본이 거의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국가경제가 마비되는 것을 어떤 수로도 막을 수 없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는 이미 배급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와중에, 김일성은 1994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나마 국가 경제에 관심은 있었던, 그래서 다가오는 경제난을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하던 김일성이 사망하기 무섭게 북한은 미증유의 대재난을 겪게 됩니다. 방아쇠는 1995년 여름의 홍수였습니다.


[산비탈을 그대로 개간한 북한의 다락밭. 이런 곳에 폭우가 쏟아진다면??]


 - 물론 폭우는 이전에도 항상 있어왔지만, 당시 북한이 산비탈을 죄다 다락밭으로 개간해버린 데 재앙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없는 산은 많은 비가 내렸을 때 산사태에 매우 취약해집니다. 1995년 북한에 기록적 폭우(이 해에는 남한에도 폭우가 자주 내렸습니다)가 쏟아지면서, 개간된 산간지대의 흙이 쓸려 내려가고 이것이 산비탈의 다락밭과 평야지대의 논밭을 휩쓸었던 것. 이를 시작으로 북한을 유지하던 모든 시스템이 한순간에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 이후의 상황은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그 북한이 외부세계에 원조를 요청할 정도로 북한의 사정은 최악이었고, 북한은 남한과도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시기를 김일성의 유격활동에 빗대어 고난의 행군으로 호칭했고, 북한 당국이 고난의 행군 종결을 공식 선언한 것은 2000년. 즉 최악의 식량난이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사실 재해로 인한 일시적 식량 부족은 외부에서 수입하든지 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한의 식량 생산이 크게 줄기는 했지만, 배급이 전면 중단될 정도로 아예 없는 수준인 건 또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철도를 중심으로 한 수송체계의 붕괴와 연결되면서, 그리고 여기에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북한의 사회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면서 최악의 시너지 효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이 시기 굶어죽은 사람은 30~40만 명에 달합니다(300만 명 이상이라는 설도 있음).


 - 이후의 북한은 이전과는 사실상 다른 사회가 되었습니다. 국가에서 사회보장은 커녕 기본적인 식량조차 배급하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조달해야만 했습니다. 이전부터 암암리에 존재해 왔던 텃밭과 장마당(사설시장)이 이 시기 대대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당국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 어디 그게 되나요?


[장마당 풍경]


 - 이 때를 분기점으로 북한의 밑바닥 경제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화하게 됩니다. 일단 '자유시장'이 확산된 것 부터가 자본주의 요소의 도입을 의미하죠. 물론 어디까지나 북한의 체제는 공식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이기 때문에, 북한의 자본주의 경제는 비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사실상 국가에서도 손을 놓은 분위기.


 -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시장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인 제어(그냥 다 때려잡는 거 말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 반강제로 들어온 북한의 시장경제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로 이어졌습니다. 1997년 김정일은 삼년상 유훈통치를 끝내고 공식적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과 그 이후의 북한은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빈부격차' 거기에 더하여 '부정부패'가 버무려진 오묘(?)한 사회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제정일치 종교국가라고 보는 게 맞을지도.]




참고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737 (조국광복회)

http://www.kinu.or.kr/upload/neoboard/DATA03/17권2호-이상숙1.pdf ("중소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자주외교 비교")

http://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4&koreanChrctr=&dicaryId=24 (군사 · 경제 병진노선)

http://www.rfchosun.org/program_read.php?n=1223 (5·25 교시)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Ihw&articleno=8626548&categoryId=734769&regdt=20130915174839 (혁명가극)



7. 군사적 모험주의와 군사 · 경제 병진노선


 -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북한은 한동안 경제개발에 온 역량을 집중하였고, 군사 부문에는 그다지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는 물론 전쟁으로 북한의 경제 전체가 붕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휴전 이후에도 중국군(중국인민지원군)이 상당 기간 주둔하여 북한의 안보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그리고 이들은 북한의 경제 재건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 하지만 1958년 중국군이 북한에서 모두 철수하고, 중소분쟁 이후 북한이 점차 독자노선을 취하면서 북한 자체의 군사적 수요가 급속히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5% 미만이었던 북한의 국방예산 비율은 1960년대 들어 점차 상승하다가, 1960년대 말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급상승하여 1970년 무렵에는 국가 예산의 31%까지 폭증하게 됩니다.


 - 이를 뒷받침했던 것은 북한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행동을 자제해야 했던 북한은(사실상 북한은 무력 통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강대국의 간섭이 줄어들고 자주노선이 강화되자 말 그대로 날뛰기 시작합니다. 1968년 1월 민족보위성(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31명이 남한으로 침투, 북한산 자락을 거쳐 청와대를 급습하려 시도한 사건이 터졌습니다(통칭 1·21 사건)


["내레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로 유명한 바로 그 사건]


 - 이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1월 23일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임무 수행 중이던 미국 해군 소속 USS 푸에블로함이 북한 해군에게 나포되며 한반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다만 이 사건은 현재는 푸에블로함이 실제로 북한 영해를 침범한 것이라는 게 정설). 사태는 양면전쟁(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수행 중)을 원치 않은 미국 측에서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북한에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지만, 전쟁 직전의 긴장상태에서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과잉투자를 해야 했습니다.


 - 이로 인해 경제개발에 대한 투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1961년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은 기간은 3년이나 늘리고도 1970년까지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군사 · 경제 병진노선'입니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군사 투자를 늘려 경제와 군사력을 동시에 성장시키자는 허무맹랑한 노선이었지만, 이전 북한의 정책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경제를 제쳐두고 군사력에 집중투자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 군사 · 경제 병진노선은 196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제5차 전원회의에 처음 등장하였고, 1966년 북한의 공식적 노선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군사력 증강과 함께 본격화된 북한의 무력 도발은 위의 두 사건 외에도 울진-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미국 공군 EC-121기 격추사건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사건이 1968~69년 사이 발생했습니다.


 - 일각에서는 당시의 북한을 두고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주적 모습을 보였다'며 좋아하십니다만...... 이러한 모습은 북한의 경제, 사회 발전 깊은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이 무렵부터 북한의 경제는 제1경제(민간경제)와 제2경제(군수경제)로 분리되었고, 사실상 대부분의 투자가 제2경제 쪽에 집중되면서 북한 경제의 정체와 쇠퇴가 본격화됩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 여력 감소로 이어지고, 이러한 악순환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8. 김정일의 등장과 후계자 지명


 - 김정일은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출생하였습니다(북한에서는 1942년 백두산 밀영에서 출생하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만, 실제로 김정일은 1941년 출생하였고 당시 김일성 부부는 소련에 있었음). 동복 동생으로 김만일(1944-1947. 수상관저 연못에서 놀다가 익사), 김경희(1946-)가 있습니다.


[김일성 가족의 단란한 한 때]


 - 생모 김정숙은 1949년 출산 도중 태아와 함께 사망하였고(김일성이 바람을 피운 것에 빡쳐서 치료를 거부하였다는 설이 있음 ㅡㅡ;), 김일성은 이후 후처(들?)에게서 여러 자녀를 더 얻었는데 김정일은 자신의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상당히 나빴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정환경(생모는 사망, 계모 및 이복형제와는 사이가 나쁨) 때문에 김정일은 어린 시절에는 상당히 내성적이었고, 이러한 성격은 청소년기 이후에야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 김정일은 1960년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공부는 그닥 잘 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자 김정일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어 김일성이 빡친 나머지 남산고급중학교 러시아어 교사들의 강의력을 일일이 검증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정일은 공부보다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폭주족 음악, 영화, 연극 등의 예술 쪽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훗날 그의 출셋길을 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고급중학교를 졸업한 김정일은 김일성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북한 지도층에게는 소련 유학이 유행이었고, 김정일 역시 소련에 유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조선에도 훌륭한 대학교가 있다"면서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물론 이 시기에도 5만 권의 장서를 읽었다느니 뭐니 선전용 전설들이 난무하지만 그건 생략하고...... 대학 재학 중인 1961년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합니다.


 - 주변인들의 증언을 보면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이미 권력 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67년 갑산파 숙청 당시 영화계에 갑산파의 영향력이 큰 것을 확인한(박금철 찬양 영화가 만들어졌던 것 기억하시나요?) 김일성은, 영화덕후 김정일을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에 임명하여 예술계 정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 때의 활약을 시작으로 김정일은 날아오르게 됩니다.


[남한에도 이름만 유명한 혁명가극 <피바다>]


 - 이 시기 김정일은 자신의 덕력을 십분 활용하여 김일성 신격화의 최선봉에 섰습니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소재로 한 '혁명가극'이라든지,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영화 제작이라든지 등의 문화적 작업을 진두지휘하며, 김정일은 김일성 뿐 아니라 김일성과 항일운동을 함께 한 북한 고위층들의 눈에 들게 됩니다. 1970년대 이후 김일성의 후계 구도가 조금씩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따놓은 점수는 김정일에게 엄청난 무기가 되었습니다.


 - 김정일은 197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1920-), 이복동생 김평일(1954-) 등과 후계구도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습니다. 이 시기 김정일이 자신의 친위대로 만든 게 3대혁명소조입니다. 각계각층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조직은 각 분야의 보수성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사상 투쟁을 벌였는데, 김정일이 모든 권한을 독점한 사실상의 사조직이기도 했습니다.


 - 1972년 김일성의 환갑 잔치에서 "내 아들 중 누가 후계자였으면 좋겠나?"라는 김일성의 말에, 그의 항일유격대 동료였던 최현은 "당연히 장손(김정일)이 맡아야지요"라고 대답했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항일유격대 원로들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밀고 있었던 것. 여기에 김성애(김일성의 후처. 김평일의 생모)의 삽질을 틈타 김정일은 김성애와 이복형제들의 부정행위를 김일성에게 보고했고, 김성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시점에서 사실상 후계구도는 확정되었습니다.


[김평일은 1979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파견된 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후 김정일은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주도했다가 당 내의 거센 반발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김정일을 좌천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오히려 반대파를 숙청하고 김정일을 당 중앙으로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북한의 미래는 김정일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정일은 비로소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후계자임을 확실히 하였고, 1983년에는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가 됩니다.



5. '주체사상'의 형성 : 중소분쟁과 독자노선


 - 시작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은 당 간부들을 상대로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였는데, 이 연설의 요지는 "우리는 다른 어느 혁명도 아닌 조선의 혁명을 하는 것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일체의 사상 사업을 조선 혁명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1955년이면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이며 사회주의권의 분열이 표면화되기도 전이었으니, 이미 이 때부터 북한(적어도 김일성)은 일반적인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독자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소련과 중국의 내정간섭을 경험한 후 본격적으로 자주노선을 천명하기 시작했고, 주체사상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 주체사상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대전제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인간의 의지가 사회 변혁의 중심이라고 역설한 것. 그렇기 때문에, 주체사상에서는 개개 인간의 의지를 유발하는 것 - '사람 사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됩니다. 1958년부터 본격화된 천리마 운동이 바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 간부가 노동현장에 파견되어 군중을 지도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사람 사업을 통하여 군중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감상하는 인민의 삿대질]


 - 다만 '인간의 의지'를 중심에 놓았다는 것으로부터,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측면(생산과 노동)에 중심을 두고 사회를 해석했거든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공산주의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셈입니다. 현재 북한의 체제가 '공산주의지만 공산주의가 아닌'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중국과 소련의 대립이 1960년대 본격화되면서, 북한의 독자노선은 그야말로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북한은 중국-소련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요. 즉 양쪽 모두를 신경써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말 그대로 '줄타기 외교'를 벌이며, 내부적으로는 자주노선을 강화해 나갑니다. 북한은 본래 소련의 영향 하에 건국되었고 이후에도 소련의 영향이 강한 곳이었지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이 미국에 꼬리 내린 것을 계기로 북한은 친중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사진은 1969년 우수리강 일대에서 발생한 양국간 국경분쟁]


 - 하지만 흐루쇼프 실각 후 소련이 다시 스탈린 시절 노선으로 돌아가자, 북한은 다시 소련과의 친선관계를 강화하며 중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 때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후 중국이 문화대혁명 때 북한을 '수정주의자'로 강경 비난하는 등 북중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 두 고래의 등 사이에 끼어 있는 새우 한 마리는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어느 쪽도 섣불리 지지하기 곤란한 처지에서 북한이 선택한 것은 결국 독자노선이었습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자주외교를 표방하며 소련-중국 양측으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챙겼고, 내부적으로는 주체사상을 점차 교조화하게 됩니다.




6. 대숙청 파이날 : 갑산파 숙청과 도서정리사업


 - 김일성 중심의 만주파가 북한의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만주파도 하나로 묶여있던 건 아니었고, 내부에 '갑산파'라는 일단의 파벌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에 협력한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이었으며(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한 '조국광복회' 일원이라고 선전), 주로 개마고원의 갑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갑산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금철(가운데)]


 - 갑산파의 리더 박금철(1912-?)은 보천보 전투 이후인 1938년 혜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했고, 광복 이후 만주파의 일원으로 북한 건국에 참여하였습니다. 갑산파는 8월 종파사건 때도 김일성에게 협력하였고 이후로도 꾸준히 세력을 유지하였지만, 점차 심해지는 김일성 신격화에는 반대하였고 경제개발 문제에서도 김일성과 결을 달리하였습니다(경공업 우선 개발, 국방비 축소, 당 간섭 축소 등).


 - 김일성파와 갑산파의 대립은 1960년대 중반부터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김일성이 조선로동당에 조직지도부(주체사상의 요지를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아시겠지요?)를 신설하고, 조직지도비서에 동생 김영주를 임명하자 갑산파 쪽에서 크게 반발하였고, 박금철을 김일성의 대항마로 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박금철을 찬양하는 선전영화를 만들 정도였다는군요.


 - 당연히 갑산파의 행동은 김일성에게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봉건주의,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유포'했다는 명목으로 박금철 등의 갑산파를 숙청하기에 이릅니다. 박금철은 민족 전통의 혁명사상, 특히 조선 후기 실학에 관심이 많아 당내에 <목민심서> 구독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바로 이것을 구실로 삼았던 것.


 - 김일성을 견제할 마지막 세력이 사라진 북한은, 김일성 신격화에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시작합니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도서정리사업입니다. 갑산파가 숙청된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통칭 '5.25 교시')는 단순히 반대파의 인적 숙청만이 아니라,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 통제를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이 직후부터 전국의 모든 서적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시작되었습니다.


 - 어느 정도였냐면, 북한 내의 모든 책이 말 그대로 페이지 하나, 글자 하나까지 샅샅이 검열 대상이 되어 김일성 신격화에 도움되지 않는 내용을 남김없이 삭제해버리는 수준. 심하게는 과학기술 관련 서적,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까지도 금서로 지정되어 폐기 혹은 수거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를 포기한다!! 물론 삭제 대상인 여러 지식을 생산하는 인텔리 계층은 '혁명화'의 대상이 되어 개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 사실상 모든 지식이 초고속광역삭제된 자리를 채운 것은 (당연히) 김일성 관련 저작과 주체사상. 1970년대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북한의 유일한 사상체계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응? 나 불렀냐?]


 - 황장엽은 주체사상 이론을 정립한 공로로 1970년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한국으로 치면 국회의장)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각설하고, 주체사상 이외의 모든 지식이 '금지'된 이후 북한은 <당의 유일 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현재는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으로 개정)을 제정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을 만나기 싫으니 전문 게재는 생략합니다. 간단하게, 북한 전체 사회가 김일성에게 충성하고 김일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 갑산파 숙청과 도서정리사업을 분기점으로, 북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단적 통제사회로 완전히 변모하였습니다. 물론 이 정도의 극단적 사상 통제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될 턱이 없지요. 이후 1980년대 북한은 인민대학습당(남한의 국립중앙도서관과 동일)을 건립하면서, 도서관에 비치할 책을 모으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주장으로는 여기에 장서가 3천만 권이나 된다지만 글쎄요(미국 국회도서관의 장서가 3천 2백만여 권)?


 - 여담으로, 주체사상은 웃기게도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 아래에서 믿는 자들이 지체가 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든다...... 저기에서 '예수'를 '김일성'으로 바꾸면 그냥 주체사상이거든요. 실제로 김일성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기독교 집안이었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반석'을 번역하면 '베드로')은 열렬한 안식일교회 신자였습니다. 외삼촌 강량욱은 심지어 목사였다는군요.



3. 대숙청 라이즈 : 8월 종파사건


 - 6.25는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휴전'이라는 어중간한 형태로 종결됩니다. 패전 책임을 정적들에게 떠넘기며 위기를 탈출한 김일성은 점차 자기 파벌에게로 권력을 집중시켜 나갑니다. 김일성의 정치적 롤모델은 스탈린이었으며 김일성이 목표하는 정치체제 또한 스탈린과 비슷한 '1인 중심 철권통치'였는데, 문제는 당시 소련에서 스탈린 비판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1인 중심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정세 변화를 등에 업고, 김일성의 만주파와 연안파-소련파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됩니다. 먼저 경제개발 방향에 대한 의견충돌(만주파=중공업 중심, 연안/소련파=경공업 중심)이 있었고, 김일성 1인독재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전쟁 이후 북한 정치의 주도권은 김일성파가 확실하게 잡은 상태였지만, 연안파와 소련파는 각각 중국-소련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 1956년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는, 김일성에게는 자신의 권력 장악을 대외에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대회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국내파) 계열에 대한 숙청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고, '반종파투쟁'이라는 명목으로 김일성에게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1957년)부터 시작될 5개년 경제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중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 당연히 이는 반대파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으며,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에 나선 사이 이들은 반(反)김일성 운동을 전개하고자 소련의 암묵적 지원 하에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는 김일성파에 의하여 일찍 포착당했고, 김일성은 소련 대사에게 이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등 치밀하게 반격을 준비합니다.


 - 1956년 8월 30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마침내 대립이 표면화됩니다. 먼저 발언권을 얻은 김일성파는 상업성과 직업총동맹 등 연안파가 장악한 기관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상업상 윤공흠(연안파)이 발언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입을 열자마자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경제정책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윤공흠의 발언이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김일성파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번지자, 참다 못한 김일성파 사람들은 윤공흠에게 달려들어 그를 억지로 단상에서 끌어내려 버렸습니다.


 -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 과반수는 김일성파였고,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로 상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달은 윤공흠과 서휘(직업총동맹 위원장)는 그 길로 회의장을 나가 중국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후 속개된 회의에서 부주석 최창익(연안파)과 부총리 박창옥(소련파) 등이 발언을 이어갔지만, 이미 장내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김일성파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 결국 회의는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역관광ㅡㅡ;으로 마무리되어,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등 연안-소련파 주요 인사들에 대한 출당과 당직 박탈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김일성도 해외 순방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하여, 권력투쟁은 김일성파의 완승으로 쉽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펑더화이와 김일성 세상에서_제일_어색한_사진]


 - 그런데 이 결과에 소련과 중국이 노발대발하여, 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과 펑더화이(1898-1974)를 단장으로 하는 연합 대표단을 파견해버립니다. 소련 부총리 미코얀과 중국 부총리 펑더화이(심지어 이 사람은 김일성과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가 함께 강림하자, 어떻게든 자신들의 행동을 해명하려던 김일성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최창익에 대한 출당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파는 최창익의 복권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반대파의 주요 인물들(김두봉, 오기섭 등)을 '종파주의자' 명목으로 체포하거나 공직에서 해임하였습니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나자, 김일성에게 하늘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스탈린 사후 심화된 소련과 중국의 대립이 1958년경부터 본격화되면서, 두 나라는 북한의 내정에 관여할 여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 두 나라가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포섭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양국 모두에 줄을 대며 줄타기를 시전하였고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국으로부터는 내정간섭에 대한 사과까지 받아낼 정도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이죠.


 - 결국 연안파와 소련파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은 남김없이 숙청당했고, 소련과 중국은 각각 자기 쪽 파벌의 인사들을 자기 나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김일성의 무쌍난무를 방관하였습니다. 피의 숙청은 1960년경까지 계속되었고, 소련이나 중국으로 망명한 일부 인사 외에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김일성의 반대파와 그 일족을 숙청하고 사회와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 김일성은 이렇게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8월 종파사건'의 전말입니다. 여담으로 이 때 강대국의 내정간섭을 겪은 경험 때문에 김일성은 '주체적 통치'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주체사상의 뿌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4. 전후복구와 천리마운동 : 북한의 짧은 리즈시절


 

[폭격으로 초토화를 넘어 '평탄화'된 원산과 흥남]


 - 6.25 전쟁의 결과, 남북한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특히 북한은 3년간에 걸친 폭격으로 멀쩡한 건물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공군력은 전쟁 내내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사망자도 더 많았으며, 월남 인구가 수백만에 달했기 때문에 북한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반면 전후 복구는 오히려 남한에 비해 빨랐는데, 이는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로 식량 등 소비재 중심으로 원조를 받은 남한과 달리, 북한은 사회주의권 지원 아래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함흥의 경우 거의 통째로 소련과 동독의 지원 아래 재건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독 대통령의 이름을 딴 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사회주의 형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북한 재건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물론 이 과정에서 북한 인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북한은 전쟁 피해의 책임을 교묘하게 미국과 남한에게로 돌려 인민의 재건 의욕을 고취시켰고, 외국의 지원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재건사업에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불과 전후 3년여만에 전쟁 피해의 완전복구를 선언하고, 농업의 협동농장화도 단기간에 완료하기에 이릅니다.


 - 위의 1956년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는 전후복구의 완료를 보고하고, 본격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 '중공업 중심+경공업, 농업 동시발전'이라는, 북한 경제의 기본 방향이 확정되었습니다. 주민 동원체제로 큰 재미를 본 북한은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위하여 전 인민의 총동원체계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천리마 운동입니다.


[천리마 운동 선전 포스터. 너 강제노동]


 - 천리마 운동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당(조선로동당)에서 지도 일꾼을 파견하고, 이들이 군중과 고락을 함께하며 사상 등을 교육하여 군중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유도해내는 것. 즉 경제개발에 있어서 상하간 유기적 협조, '사람 중심의 사업'을 통하여 대중을 경제개발에 동원하고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1960년 2월 평남 강서군 청산리로 직접 현지지도를 떠나,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하며 이러한 원칙을 공식화합니다('청산리 방법'으로 명명).


[청산리에서 현지지도 중인 김일성]


 - 천리마 운동은 실제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북한의 경제 5개년계획은 사실상 천리마 운동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1961년까지 본래의 계획보다 훨씬 큰 실적을 올리게 됩니다. 이 결과 1960년대 초의 북한은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압도하였고, 사상교육의 결과 사회 규범이 잘 확립되어 동네에 도둑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만 해도 김일성 신격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당 기관지 <로동신문>에 독자투고란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 이렇게 북한은 전쟁의 피해를 극복한 것을 넘어,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먼저 한 발 앞서나갔습니다. 당시의 북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960년대를 북한 최고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장밋빛처럼 보인 북한의 발전 뒤에는, 훗날 북한의 몰락을 불러오는 암세포들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으니...... (계속)



 - 현재 시점에서 북한이 확실히 실패한 국가라는 데 반박할 분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알고보면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민주적인 국가였고 지금보다 더 발전할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 여러 분기의 방향이 김일성에게로 집중된 결과 '공화국 아닌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실패한 북한을 낳게 됩니다. 이번에는 북한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북한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북한을 만든 여러 정치세력


[해방시기 북한 지도부 : 왼쪽부터 김두봉, 허헌, 김원봉, 박헌영, 김일성. 뒤쪽 얼굴만 나온 인물은 김달현]


 -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북한은 본래 1인독재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에는 몇 년에 걸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 총집결하였고, 그들이 각각 하나씩의 파벌을 이루어 서로 견제하는 형태의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독립운동 세력 자체의 분화가 심했고, 소련과 중국에 모두 접했다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북한의 정치 지형은 상당히 복잡한 상태로 출발하게 됩니다.


[연설하는 김두봉]


 - 연안파 : 중국 일대에서 활동하던 세력.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쫓겨간 산시성 옌안(연안) 일대에서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김두봉, 김무정 중심의 조선독립동맹과 김원봉과 갈라져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여 '조선의용군'을 결성하였고, 중국공산당과 함께 중일전쟁 게릴라전에 참여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김두봉, 김무정 등은 귀국하여 북한 지도부에 참여하였으며, 상당수는 중국에 남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 국공내전 종전 이후 조선의용군의 잔여 병력은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주축이 됩니다. 이들은 국외 무장투쟁세력 중 가장 큰 규모였고(한국광복군의 몇 배에 달함), 정규전이나 게릴라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귀국한 연안파 세력은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을 결성하고, 이는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의 전신인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습니다.


[박헌영]


 - 국내파 : 말 그대로 일제강점기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 세력입니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약 3년여간 4차례에 걸쳐 대탄압을 당하고도 다시 조직을 재건하는 근성을 ㅡㅡ; 보이지만, 결국 조직이 와해되고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의 권고에 따라 재건을 포기하고 해체하였습니다. 이후 주요 멤버들이 투옥, 망명, 도피생활을 이어가며 지하활동 중심의 운동을 이어갔고, 해방 직전에는 박헌영, 이현상 등을 중심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였습니다.


 -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 중심)와 함께 가장 발빠른 행보를 보였으며, 미군정이 시작되자 합법정당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부분열이 상당히 심했으며, 미군정기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좌파 계열 몇몇 정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합니다. 이후 미군정이 좌파 세력을 점차 불법화하자 활동이 급진화·폭력화되고, 결국 남한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져 박헌영 등 지도부 상당수가 북한으로 건너갑니다.


[꽃미남 김일성. 1946년]


 - 만주파 :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 쪽에서 활동한 항일 게릴라 세력. 만주 쪽 한국인 게릴라와 중국공산당 무장세력, 반일 성향의 독립세력 등이 중국공산당 주도로 1930년대 중반 '동북항일연군'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 게릴라가 친일단체 연루 혐의로 숙청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민생단 사건), 여기서 살아남은 젊은 지휘관들 가운데 김책, 최현 등의 지지를 받은 김일성이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 김일성의 게릴라는 1937년 압록강 최상류 보천보에 침입하여 주재소(파출소) 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전과를 올립니다(보천보 전투). 전투 자체는 별것 없었지만, 국내에 무장독립운동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선전효과가 있었습니다(동아일보는 고의적으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대 초반 사실상 섬멸되어 김일성 등은 소련으로 건너갔고, 이 때 김일성은 그를 눈여겨본 스탈린에 의해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됩니다.


[허가이. 본명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 소련파 : 소련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하였지만, 김일성을 비롯하여 그의 세력에서 행정능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실제로 김일성 중심의 항일게릴라 중에는 문맹도 상당수였다고). 그래서 북한의 행정을 담당하고 김일성의 북한 통치를 지원하기 위하여, 당시 소련에 거주하며 소련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고려인들을 다수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 이들은 허가이, 박창옥, 조기천(시인) 등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소련의 영향 하에 있으며 북한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소련에서 출생하여 자랐고 한반도 내에는 별다른 연고가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북한 내에 정치적 기반은 상당히 취약한 편이었습니다.


[조만식]


 - 非 사회주의 계열 :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대표적. 조선민주당은 평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조만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천도교청우당은 1946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결성하며 북한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중도우파적, 종교적(조만식은 기독교계 인물)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는 기독교, 천도교 신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소련군정은 처음에는 이들의 정치적 활동을 보장하였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종교세력이 이어지기는 어려웠고, 양당의 지도자인 조만식(조선민주당)과 김달현(천도교청우당) 등이 각각 숙청당하면서 이들 정당의 세력은 무력화되었습니다. 이후 두 정당은 조선노동당의 우당(友黨)이 되어, 현재는 조선노동당을 내세우기 귀찮은 사소한 ㅡㅡ; 사안들에 이름 빌려주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2. 대숙청 비긴즈 : 6.25에 대한 책임전가


 - 일단 북한의 지도자는 김일성이었습니다(소련이 그렇게 앉혀놨으니까). 다만 김일성의 세력은 처음에는 북한(조선노동당)의 여러 정파 중 하나일 뿐이었고, 심지어 조선노동당의 첫 번째 지도자는 김일성이 아닌 김두봉이었습니다(물론 이는 김일성이 너무 젊었기 때문에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에 가까움).


 -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하여 무력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ㅡㅡ; 여기에는 국내파의 대표인 박헌영도 적극 찬동하였고(박헌영의 정치적 기반이 본래 남한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임), 이들은 소련으로 달려가서 스탈린에게 전쟁을 허락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야 당시 북한은 소련의 속국에 가까웠으니, 종주국 소련의 지지와 지원 약속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스탈린이 이들에게 퇴짜를 놓습니다. 각각 소련과 미국의 영향 아래 있는 두 세력간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소련-미국 간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련은 도저히 새로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고요? 불과 3~4년 전까지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거의 3000만 명이 죽었습니다. ㅡㅡ; 더구나 스탈린은 아직 소련이 미국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ㅗ"를 날리는 건 당연.


["전쟁? ㅎㅎ X까"]


 - 하지만 생각없는 김일성에게는 국제외교나 냉전 그딴 거 없었습니다. ㅡㅡ; 김일성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스탈린을 졸라댔고, 박헌영이 옆에서 "남한을 침공하면 남한 내 게릴라와 민중이 호응하여, 미국 개입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자 스탈린은 마지못해 전쟁을 승인하게 됩니다. 단 '중국한테 물어보라'는 조건을 달았고, 소련의 직접 지원은 거부합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조선의용군에게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미군 참전'을 전제로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 사실 조선의용군이 합류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소련이나 중국의 지원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보험'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던 38선에서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을 단행하며 민족의 대재앙 6.25가 시작됩니다.


[북한과 소련의 북침 선전을 비판한 유고슬라비아 신문 만평. 코페자]


 - 인민군의 공격은 서울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었고, 3방향으로 침공하여 서울과 그 일대의 국군 주력을 포위섬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시작부터 엇나가기 시작하였으니, 가장 동쪽으로 진격하던 인민군 2군단이 전차 한 대 없던 국군 6사단에 대패하면서 국군 포위섬멸에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심지어 국군이 한강대교를 너무 일찍 날려먹는 X맨 짓을 했음에도!).


 - 결국 동쪽에서 진입하는 게 늦어지면서 인민군의 나머지 부대는 점령한 서울에서 3일간을 허송세월했고, 그동안 박헌영의 장담과는 달리 남한의 후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로당 세력은 사실상 소멸하였고, 때마침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땅을 받은 남한의 농민들은 남한의 붕괴를 지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전쟁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면서, 북한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벌어주는 치명적인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보셨을 지도]


 - 물론 3일 이후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급하게 상륙한 미군 선발부대를 탈탈 털어버리는 전과도 올렸지만, 압록강을 앞에 두고 기세가 한계에 달했고 국군과 UN군의 방어에 가로막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끝도 없는 붕괴가 시작, 김일성과 북한 정부는 평양을 버리고 평안북도(자강도) 강계로 도망쳤으며 국군이 압록강변까지 도달하는 대굴욕을 당합니다.


 - 이때부터 김일성은 전쟁에 승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패전 책임을 다른 세력에 떠넘겨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에 이릅니다. 일단 연안파의 중심 인물인 김무정(2군단장, 민족보위성 부상 등 역임)을, 낙동강 전선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숙청하였습니다. 그가 인민군 내 연안군 파벌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의 숙청을 계기로 연안파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김무정은 얼마 후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여생을 지낸 것으로 추정).


[6.25 당시 대북삐라 중 하나. 그런데_그것이_실제로_일어났습니다.jpgee]


 - 그 다음 타겟은 국내파. 실제로 국내파의 지도자인 박헌영은 김일성과 맞먹는 개전 책임이 있었고(강계에서 박헌영과 김일성이 전쟁 책임을 두고 잉크병을 던지며 개싸움을 벌인 일화는 유명), 김일성이 전쟁 책임을 전가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하였고, 패전 책임을 물어 국내파의 다른 인물인 이승엽(전쟁 중 서울시장에 임명) 등과 함께 처형해 버렸습니다. 국내파는 이로써 사실상 소멸합니다.


 - 소련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소련파의 리더 허가이는 국내파의 박헌영과 이승엽이 체포되자 이들을 적극 변호하였는데 이것이 김일성의 분노를 샀고, 1953년 7월 자신의 사무실에서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북한의 공식 발표는 자살이었지만, 글쎄요(허가이는 소련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그를 암살한 후 외교적 마찰을 의식하여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이 유력)? 가뜩이나 기반이 부족한 소련파는 허가이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 이렇게 자신에게 있던 전쟁 책임을 다른 세력에 떠넘기는 데 성공한 김일성은, 전쟁의 (사실상) 패배에도 자신의 권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일성과 만주파는 조선노동당 내 권력을 착실하게 늘려, 1950년대 중반에는 중앙위원회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미 무력화된 국내파를 제외하고, 연안파와 소련파는 만주파의 독주에 위기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급속한 경제개발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완전히 갈아엎어졌습니다. 이는 전근대적 질서를 해체하고(백정 계층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바로 한국전쟁 때로 여겨집니다. 기존의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백정마을 따위가 사라지면서 누가 백정 출신인지 찾는 게 의미가 없어진 것) 한국을 현대 사회로 이끄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거대 규모의 인구 이동이 이어지면서 엄청난 수의 '이산가족'을 낳게 됩니다.


 - 아직 전통적 가족개념이 온존하던 시절, 역사적 질곡으로 인하여 강제로 떨어져 생사조차 모르게 된 사람들이 마음 속에 큰 한(恨)을 안고 살아가는 건 당연했을 겁니다(아니 이건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당시 정부가 파악하고 있었던 이산가족 추정 수는 1050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1983년은 대한민국 인구가 딱 4000만 명을 돌파한 해입니다.


[중1 사회 교과서엔 이런 게 나옵니다. 저 화살표를 학생들은 그렇구나 하고 지나치지만......]


 - 당연하게도, 전쟁 직후부터 흩어진 가족을 찾자는 시도는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30여 년에 걸친 시도는 별로 성과가 없었는데, 이는 전국민이 함께 접할 수 있는 이른바 '대중매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70년대까지도 TV는 동네에 한두 대쯤 볼까말까한 사치품이었고, 그나마 많이 활용된 신문 역시 한자투성이에 높은 문맹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라디오 역시 전국민을 모으기에는 부족했던 시절.


 - 이러한 한계가 1980년대 들어 해소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컬러TV 방송의 시작과 함께 TV는 전국민에게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이미 1980년대 중반 들어서는 대부분 가정에 들어섭니다(당시 단칸방을 전전하던 갓난아기 시절 블로거의 집에도 TV만큼은 꼭 있었습니다). 아직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라(인터넷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고) 거의 대부분 국민의 주된 매체는 TV였으며, 전국민을 동시에 한 화면에 집중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1. 1983년 6월 30일 : 90분짜리 방송이 270분으로


 - 1983년은 6.25전쟁 휴전 3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 해의 6월 25일에 KBS에서는 아침 프로그램인 <스튜디오 830>(現 <아침마당>의 전신)에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라는 제목의 특별 코너를 방송하였습니다. 이전에도 KBS는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당시 적대관계였던) 소련, 중국 등지를 타겟으로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조금씩 진행하고 있었는데, 6.25 특집으로 국내의 이산가족에 주목하는 특집방송을 기획했던 것.


 - 이렇게 6월 25일 아침에 나온 특집방송은 생각보다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이에 자극받은 KBS의 제작진은 아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황금시간대에 '이산가족 찾기'를 컨텐츠로 하는 별도의 특집방송을 준비하기에 이릅니다(후일담에 따르면 KBS 사장부터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당시 정권과 KBS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런 걸 프로파간다에 써먹을 생각도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렇게 새로운 방송이 준비되고, 6월 30일 6.25주간 특별 프로그램(역시 시대가 시대였으니 6.25 특집을 일주일씩이나......)의 하나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집생방송이 시작됩니다. 방송 시작 시각은 22시 15분, 대략 1시간 30분 정도 방송으로 계획되었고 (반응이 뜨거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므로) 약 1시간 정도 연장방송에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당시는 12시를 좀 넘으면 방송이 거의 끝나던 시절임을 감안합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타이틀 화면]


 - 방송 계기가 계기였던만큼 방송 진행자에는 <스튜디오 830>을 진행하던 이지연 아나운서와 유철종씨(본업은 기업교육훈련 전문가로 전문 방송인은 아니었음)를 선정하고, 전국의 KBS 지국을 연결하여 이원중계를 하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법까지 동원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칩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TV방송의 증가한 파급력과 일천만 이산가족의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 처음에는 약 150여 명의 이산가족을 스튜디오에 모아놓고 전화나 이원중계 등의 방식을 통하여 다른 이산가족과의 연결을 시도하며, 최종적으로는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진행중인 한국적십자사나 치안본부(경찰청) 전자계산소(컴퓨터 데이터를 활용한 찾기 사업을 진행) 등의 사업을 소개하는 구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아니 시작되기도 전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6월 30일 첫 번째 상봉]


 - 우선 출연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신청자들이 몰려듭니다. 결국 150명으로 계획된 선정자 수는 늘어나고 또 늘어나 방송 당일에는 무려 820명이나 되는 이산가족이 작은 스튜디오를 가득 메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스튜디오에 마련된 10여 대의 전화뿐 아니라 KBS의 모든 전화는 거의 마비 수준으로 폭주하기 시작했고, 얼마 뒤 첫 번째 상봉이 이루어지면서 생방송은 삽시간에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방송은 최초 예정된 1시간 30분을 훌쩍 넘기고, 추가적으로 계획된 1시간도 뛰어넘어 거의 새벽 3시 가까이까지 계속됩니다. 몇 시간동안 진행을 계속한데다 다음날 아침 방송도 출연해야 했던 두 진행자는 2시 45분에야 가까스로 방송을 끝냈는데, 꽤 많은 상봉이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출연자 중에서조차 극소수에 불과했던지라 "내일도 특집방송을 이어가겠다"라는 다짐을 하고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 당연하게도 당시 정치적으로 욕을 거하게 먹던 KBS는 이를 이미지 전환의 호재로 생각했고, 다음날인 7월 1일 저녁에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긴급히 편성하게 됩니다.



2. 1983년 7월 1일~2일 : 생방송을 끝낼 수가 없어


 - 조짐은 이미 전날 밤의 방송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800여 명의 방청객 뿐 아니라, 방청객에 선정되지 못한 사람들과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이산가족들이 방송 시작 직후부터 KBS 본사가 있는 여의도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야간 통행금지가 막 해제되었던 시절이라, 방송 시간은 물론 방송이 끝난 이후에도 밤새도록 이산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자 KBS 본사 앞은



 -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이미 1만여 명 이상이 방송국 앞에 운집하였고, KBS가 방송 장소를 더 넓은 공개홀로 옮겼음에도 끝없이 모여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지자, 당시 비어있던 신관 중앙홀을 추가로 열어놓고 방송국 내에서 이원중계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 그렇게 7월 1일 밤에 생방송이 다시 시작되었고, 분위기는 전날을 능가할 정도로 뜨거워서 결국 생방송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이지연, 유철종 두 사람만으로는 당연히 진행이 불가능했고 손석기(손석희와는 다릅니다 손석희와는), 황인우 아나운서 등 KBS 소속의 아나운서들이 긴급히 투입되어 교대로 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방송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보니, 유철종씨의 경우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방송을 이어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ㅡㅡ;


 - KBS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 외에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KBS는 아예 모든 역량을 이산가족 방송에 집중하기 시작, 다음날인 2일부터는 아예 모든 정규방송을 (중간중간의 뉴스 시간 외에는) 사실상 중단해버리고 여기에 '올인'하기로 결정합니다. 방송국 입장에서야 이만한 특종도 없으니까요.


 - 물론 거의 이틀 밤을 꼬박 새버린 진행자들이 계속 방송을 진행하기는 무리였고, 2일 7시 40분까지 진행된 방송은 약 40~50분 가량을 쉬고(뉴스 등의 다른 프로그램이 나갔다고 합니다) 8시 30분부터 다시 이어집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거의 24시간 방송을 하던 때가 아니었고, 낮 시간대의 방송은 주말과 공휴일에만 가능했는데 때마침 1983년 7월 2일이 토요일이었습니다.


 - KBS는 주말 프로그램으로 예정된 편성을 싸그리 갈아엎어버리고, 19시 30분까지 이산가족 방송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시점부터 방송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는데, 진행의 틀이나 큐시트나 정형화된 멘트(정부가 여기에 주목하면서 반공 프로파간다 성격의 내용들이 중간중간 첨가되기는 했습니다. 뭐 그거야 당시 시대가......) 따위는 거의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 여기서 진행자와 카메라가 상봉 장면을 촬영하고 있노라면 등 뒤에서는 또다른 이산가족이 서로를 확인하고 통곡하는 광경이 이어집니다. 방송은 상봉자들의 절규와 다른 이산가족의 절박한 목소리, 그리고 상봉 때마다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방청객의 박수소리가 온통 뒤엉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어떤 출연자는 감정이 북받치다 못해 스튜디오에서 실신하기까지 했는데, 당시 진행자인 김동건(<가요무대> 진행자)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든 채 응급조치를 수행했을 정도.


 - 전날 밤부터 따지면 21시간 이상 계속된 생방송의 시청률은 최대 78%에 달했고, 이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이 함께하는 방송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규방송이 올스톱되었지만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3. 1983년 7월 3일 ~ 11월 14일 : 454시간의 각본 없는 드라마


 - 이쯤 되면 국가적인 주목을 받게 되지요. 1983년은 문어대가리 29만원 전두환 집권기의 한가운데였고, 국민의 반발을 3S와 프로파간다로 메꾸는 데 혈안이 된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프로파간다의 무대로 적극 활용할 것을 결정합니다. 이산가족 찾기 사업이 새마을운동(!) 급의 국민적 사업으로 지정되고, 각 행정구역의 민원실을 중심으로 공권력의 전폭적 지원이 시작됩니다.


 - 가족을 찾고자 하는 이산가족들은 더욱 많이 모여들었고, KBS 앞이 가득 들어차자 바로 근처에 있던 여의도비행장광장(現 여의도공원) 일대가 사람과 포스터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인파는 10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던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워버렸고, 정부에서는 주변에 '만남의 광장'을 따로 조성, 지역별 섹션과 접수자 명부를 비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합니다.


 - 폭주하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된 KBS에서는 이미 7월 1일부터 접수자를 따로 받지 않았고,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종이든 뭐든 총동원하여 찾는 가족의 신상정보를 적어 벽이나 바닥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KBS 앞과 여의도광장은 가족찾기 포스터로 거의 도배되다시피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엄청난 수의 포스터가 붙었지만 남의 포스터 위에 덧붙인다거나 하는 노매너 플레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군요.


[포스터로 도배된 여의도광장]


 - 이틀간 생방송으로 혼돈의 도가니를 맛본 KBS는 7월 중순 이후 방송을 상시편성으로 돌렸고, 대략 비방송 시간대(평일 낮이라든지 한밤중이라든지)와 주말 종일편성으로 생방송이 이어졌습니다. 이 일이 국외에도 알려지면서 해외 교민 중에도 이산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쇄도했고, 교민이 많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직접 방송을 연결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방송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사건이 되었습니다. NHK, BBC 등 당시 세계 유수의 방송사들이 비중있게 이 사건을 다루었고, 미국 ABC의 경우 미국 교민과의 방송연결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90분짜리 특별방송으로 기획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 아니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11월 14일까지 계속됩니다. 이날까지 중간중간 진행된 생방송의 총 방송 시간은 453시간 45분. '단일 주제 최장시간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됩니다.



4. 기막히고 코막히는 사연들



 - 당시 방송을 상징하는 장면 1. 남매지간인 두 사람은 가족이 단체로 월남하였는데, 1·4후퇴 당시 영등포역에서 피난을 위해 기차에 타던 과정에서 헤어졌고 32년간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화면이 다른 가족의 상봉장면을 비추는 사이 뒷쪽에서 갑자기 고함소리와 박수가 터지면서 진행자가 놀라며 달려갔는데, 오빠가 "누이요, 누이!" "아버지 엄마 다 살아있어!" 라며 절규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KBS 만세!!"와 아나운서의 "위험해. 위험해"


 - 출연자가 감정이 북받치는 와중에도 상황 설명을 침착하게 했고, KBS 찬양도 있고 여러모로 프로파간다에 좋은 장면이었는지 두 사람의 상봉은 이후 KBS에서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두고두고 활용하게 됩니다. 


[52분 25초부터]


 - 당시 방송을 상징하는 장면 2. 허현철, 허현옥씨는 전쟁중에 각각 고아원과 이발소 양녀로 들어가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동생 허현옥씨는 자신의 본명도 모른 채 입양 후 이름으로 살다가 방송을 통하여 오빠를 만나 자신의 본명을 알게 된 것(본명을 몰랐기 때문에 이발소에 입양될 당시 상황으로 서로를 확인했는데, 화면상으로 이미 얼굴을 보는 순간 오빠임을 직감했던 모양).


 -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본국에서는 남매의 상봉을 중간에 자르고(워낙 많은 사람을 소개해야 했기 때문) 다른 곳의 사연 소개를 진행했는데, 제작진이 무슨 약을 빨았는지 ㅡㅡ; 화면을 다시 강제로 돌려놓고 두 남매의 상봉장면에 비장한 BGM과 6.25전쟁 영상을 오버랩하는 반공소스 듬뿍 끼얹은 무리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두 남매 역시 이산가족 찾기의 상징이 되었고, KBS의 30년 특집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다보니, 방송과 관계없이 광장에서 서로 상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빠르게는 처음 방청 접수를 하러 왔다가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고, 스튜디오에 방청하러 들어와서 서로를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공개홀로 초대되어 사연을 공유하기도 하였습니다.


 - 워낙 이산가족 자체가 많았다보니, 이 때 여의도와 각지 방송국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사회 유명인사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산가족 중 많은 수는 고향이 북한 쪽인 실향민이기도 했는데, 당시 교대 진행자였던 김동건 아나운서나 중간에 모습을 비춘 유창순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경우 그들 자신이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이산가족과 시청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5. 감동 아래의 그늘


 - 물론 어떤 사건이든 빛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분명 사회 전체를 뒤집은 대사건이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상봉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의도에서, 전국 각지에서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방송에 소개된 53,536명의 사연 중 실제로 가족을 만난 사람은 10,187명에 달했는데, 분명 엄청난 숫자이지만 나머지 4만 명 이상은 끝내 가족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


 -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에 대한 전국민의 관심을 십분 활용합니다. 전국민의 관심을 끌고, 더구나 6.25전쟁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주제인지라 정부에서 반공 프로파간다에 써먹기 아주 좋았거든요. 일단 7월 중순부터 국가적 지원을 실시하고 행정력을 상당부분 동원한 것도 그렇고, 방송이 본궤도에 오른 뒤로부터는 진행자의 멘트나 BGM, 편집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공정신 덧씌우기가 자행되었습니다.


 - 정부의 프로파간다는 공교롭게도 방송 기간 중 벌어진 두 사건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극도로 높였으니, 하나는 9월 1일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였습니다. 둘 다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치를 떨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사건들이었습니다. 남북대결로 찢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는 감동의 순간에, 그들을 찢어지게 만든 대결구도가 다시 덧씌워졌다는 게 지금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


 - 상봉에 성공한 가족들 또한 이후의 스토리가 해피엔딩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수십 년간 떨어져 지내왔고, 그동안 겪은 환경 등의 차이가 극심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죽었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경우도 문제가 되었지요. 결국 30여 년 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고서도 서로간에 불화가 생겨 다시 헤어지거나 연까지 끊어버리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임권택 영화 <길소뜸>이 이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6. 후일담과 소소한 뒷이야기들


 - 이산가족 찾기를 중심으로 1983년 벌어진 사건들을 정부는 프로파간다에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것은 의외로 북한 쪽에 대하여도 상당한 효과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해 1984년에는 남한 쪽이 수해를 입자 북한에서 구호물자를 지원하기도 하였고(물론 이건 정황상 북한의 허세에 가깝습니다), 1985년에는 양측 적십자사가 중심이 되어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진행됩니다.


 - 방송은 11월 14일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찾아 여의도로 모이곤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가족찾기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만남의 광장'을 다음해 여름까지 1년여 간 계속 운영하였고, KBS에서 라디오를 중심으로 기존에 추진하던 이산가족 관련 사업들도 한층 더 탄력을 받았다고 합니다.


 -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상처이지만 묻혀 있던' 이산가족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리는 큰 계기가 됩니다. 1985년 최초의 본격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고, 사회주의권의 중국, 소련 쪽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교민들에 대한 관심도 부쩍 환기되죠. 이러한 분위기는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다시 빛을 보았고, 그 해 8월부터 시작된 정례적인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하여 정점을 찍게 됩니다.


 - 당시 출연자들의 발언은 1980년대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당시 출연자들 중에는 "KBS 만세"나 "대한민국 만세"는 기본이요, 심하게는 "전두환 대통령 만세"를 외친다든지 커다란 태극기를 둘러쓰고 나오는 붉은악마?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에야 그게 자연스러웠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북한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김정일, 김정은 만세를 외치는 것만큼이나 위화감이 드는 장면입니다.


 - 이 사건은 상술했듯이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아직 냉전이 진행중이던 시대라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이 사건에 대한 담화를 하며 북한을 비판하기도 했을 만큼, 이산가족 찾기는 냉전이 낳은 비극의 상징처럼 여겨져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것입니다.


 - 이 방송은 한 명의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2년 전에 방송에 데뷔한 무명 가수였던 설운도는, 자신의 작품을 일부 개작한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노래를 방송 중간중간 부르며 단숨에 주목을 끌게 됩니다(<잃어버린 30년>은 발표 후 최단기간에 히트작이 된 노래라는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운도 뿐 아니라 많은 가수들이 (쉬어가는 시간을 두는 차원에서) 생방송 중간중간에 참여하였고, 이 때의 음악들이 특집 앨범으로도 발매됩니다.


 - 2015년 10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기사 정부와 KBS 측에서 꾸준히 등재를 추진하였고, 당시 생방송을 녹화한 녹화자료들과 이산가족의 접수 신청서 등이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방송 자료가 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을 기록한 영상자료가 등재된 이후 두 번째라고 합니다.



 -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는 현재의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여 '미래에 어떤 재앙이 닥칠 것이다' 라는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연이 인간에게 여러 차례 역습을 가했고, 그 결과 역사적으로 잘 나가던 문명 여럿이 절단나기도 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동네도 한때는 잘 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출처 : 영문 위키피디아 "Ur")


 -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더미 위에 사는 우리들이라 잘 느끼지 못할 뿐이지, 사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이라는 토대 위에서 살아왔고 그 자연의 변화에 따라 숱한 부침을 겪어왔습니다. 개중에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른 것도 있고, 인류문명이 자초한 변화도 있지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1. 메소포타미아 : 관개농업으로 흥한 자 관개농업으로 망하다


 -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스라엘에서 출발하여 시리아-이라크를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도시국가가 형성된 게 기원전 4000년 무렵이라니 대단하죠(고조선의 성립이 좋게 봐줘야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는 걸 감안해봅시다). 메소포타미아라는 이름 자체가 '두 강의 사이'라는 의미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이곳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이라는 두 개의 강이 물을 공급한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 물론 이쪽도(남쪽의 아라비아 사막만큼은 아니지만) 비교적 건조한 기후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토양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사람들은 수로를 만들어 강의 흐름을 농토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관개농업'의 시초입니다. 중요한 물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이 동네는 많은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땅이 될 수 있었지요(건조 지역은 일반적으로 물 문제만 해결되면 농사짓기 좋은 땅인 경우가 많습니다).


[농사짓기 좋은 땅] (출처)


 - 그런데 영원히 잘 나갈 것 같던 이 동네에 문제가 생깁니다. 농사가 점차 잘 되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 근본 원인은 '염류화'였습니다. 강물이나 지하수 등의 민물이라도 아주 약간의 염분은 포함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농사를 위해 관개시설로 물을 끌어오면, (건조 지역이니까) 끌어들인 물은 많은 양이 증발되어 사라집니다. 물론 증발되는 건 H2O 뿐이죠. 원래 물에 포함된 염분은 증발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남게 됩니다.


 -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면 자주 내리는 빗물에 염분이 씻겨 내려가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는 비가 많이 오는 곳이 아니죠. 물을 끌어오면 끌어올수록 염분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계속 쌓여 나갑니다. 10~20년 정도라면 별 탈이 없겠지만, 이러한 과정이 수천 년간 반복된다면? 땅에 염분(염류)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식물이 자라기 어렵게 됩니다(뿌리가 물을 흡수하는 데 문제가 생기던가 그렇습니다. 삼투 작용이죠).


 - 결국 수천 년에 걸쳐 생산력이 서서히 떨어지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력도 서서히 떨어졌다는 이야기. 더구나 이곳은 넓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힘이 약해지면 주변 지역의 침입을 방어하기 굉장히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기는, 북부와 동부에서 밀고들어오는 수많은 이민족의 정복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 물론 두 강이 주는 이점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적어도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비교적 잘 나가는 동네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중심지는 바빌론에서 크테시폰을 거쳐 바그다드로 이어졌고, 모두 당대 손꼽히는 대도시였죠. 물론 사막화가 더욱 진행된 현대에 와서는...... 사담 후세인? ISIL?



2. 화산 한 방에 날아간 미노스 문명


 -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꼽히는 게 '에게 문명' 입니다. 그리스 옆 에게 해의 수많은 섬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대체로 이 지역 사람들은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해상무역으로 먹고 살았으며 그래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가장 빠르게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게 해 최남단의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노스(미노아) 문명이 대표적입니다.


[미노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인 크노소스 궁전]


 - 근대 이후에야 재발견되었고, 따라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2700년경부터 발전하여 천 년 이상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1500년경 미노스 문명은 갑자기 쇠퇴 기미를 보이더니, 불과 수십여 년만에 그리스 본토의 세력에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잘 나가던 해양문명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배경에는, 에게 해 한가운데 있던 한 화산섬이 있었습니다.


 - 지금은 포카리스웨트 절벽 위 하얀 집으로 유명한 관광지 산토리니 섬이 에게 해에 있습니다. 지금이야 평화로운 관광지로만 보이는 섬이지만, 알고보면 이 섬은 화산섬이며 심지어 인류 역사 이래 손꼽히는 대폭발을 일으킨 곳입니다. 기원전 1500년경, 하나의 커다란 화산섬이었던 산토리니에 대규모 화산폭발이 발생하였고, 땅 속에 있던 마그마와 가스, 화산재가 뿜어져나오자 그 빈 자리가 그대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이것을 '칼데라'라고 합니다).


[그 결과 산토리니는 이렇게 여러 개의 섬으로 토막나 버립니다. 섬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바다가 대폭발의 흔적]


 - 일단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진을 동반하게 마련이니, 산토리니 섬의 폭발로 생긴 지진이 크레타 섬을 강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무너진 분화구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가면서 대규모의 해일이 발생, 크레타 섬의 해안을 직격해 버립니다! 당시 지중해 최강이었던 크레타의 해군이 이 해일 한 방에 싸그리 날아가 버렸고, 해안의 도시와 마을에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화산폭발로 날아간 많은 양의 화산재는 공기 중에 떠다니며 햇빛을 차단하고, 그 결과 지구의 평균 기온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실제로 산토리니 폭발과 맞먹는 규모로 추정되는 1815년 탐보라 화산의 폭발에서는, 화산재 때문에 기온이 떨어져 이후 몇 년간 '여름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기후 변화가 발생한 적도 있지요. 산토리니 폭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가뜩이나 큰 피해를 입은 미노스 문명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후 미노스 문명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고, 수십 년간 사회 전반이 혼란에 빠지는 양상을 보이다가 그리스 본토 세력의 침공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해군의 위용을 믿고 수도에 성벽조차 쌓지 않았을 정도라니, 해군이 사라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죠. 이후 크레타 섬은 다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와 터키의 입구에 있다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만 역사에 몇 번 반짝 등장하는 처지가 됩니다.



3. 1℃의 역사 : 기온 변화는 문명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 약 1만여 년 전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빙하기가 끝난 이후로도, 지구의 평균 기온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그 변화라는 게 대략 1~2℃ 미만의 작은 변화였다고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각 지역의 식생이나 서식하는 동물들, 나아가서는 인류문명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쳐 왔지요.


 - 고대 문명이 번성하던 2000~3000년 전쯤에는 전반적으로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온이 높으면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고, 당연히 인류는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문명이 발전하죠.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딴 짓(?)을 하고 싶게 마련이거든요. 이를테면 중국의 황하 유역은 당시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진 온대(내지는 아열대) 기후였고, 황하 근처에서까지 코끼리와 코뿔소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국 상나라 시대의 코끼리 모양 유물. 코끼리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그 모양을 디테일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


 - 물론 그동안에도 기온은 조금씩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평균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 대략 3~4세기 무렵부터입니다. 이는 농업생산력의 저하를 유발했고, 당시 지구의 양대 문명(로마, 중국)은 약속이나 한 듯이 혼란기에 빠지게 되죠.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당시 알려진 세계의 양쪽 끝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온도 변화에 따른 세계적인 변화 요소를 고려해볼 수 있겠습니다.


 - 이후 수백 년간의 암흑기(임과 동시에 평균기온이 낮았던 시기)를 거쳐 9~10세기 무렵에는 평균기온이 상승합니다. 그리고 12세기 무렵부터 다시 평균기온이 떨어지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전 세계에 흑사병+몽골제국 콤보의 시대로 기억됩니다. 이후 잠깐의 조정기를 거쳐(하필 이 때 유럽에서는 르네상스가......) 16세기부터는 그 이름도 유명한 '소빙하기'가 도래합니다(넓게 봐서 12세기부터를 소빙하기로 보는 경우도 있음).


[3000년간 지구의 평균기온 변화 양상] (출처)


 - 소빙하기는 비교적 근래의 일이기도 하고, 비교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단 서쪽에서는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가 끝장나고 대규모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지기 시작하며, 흑사병은 여전히 잊을 만하면 창궐하고,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형성됩니다. 동쪽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섰으며, 한가운데서는 아랍 종족의 국가가 북쪽 이민족의 국가인 오스만 튀르크로 완전히 대체됩니다.


 -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문명의 변화는 (어쩌다보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상으로 벌어졌고, 거기에 기온 변화가 상당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최근에도 (다분히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급격한 기온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것이 인류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 황하 문명의 마지막 유산, 황사경보


 - 늦겨울~늦봄 사이에 블로거는 황사(내지는 미세먼지)로 인해 인생이 고난에 빠집니다.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에게 먼지가 많은 환경이란 아주 최악이거든요. 도대체 저놈의 황사는 어디서부터, 왜 날아드는 걸까요? 과학적인 요인을 따지기 이전에, 동아시아의 황사는 수천 년 전부터 열심히 살아온 중국 문명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 현재 중국의 산시(陝西)성과 간쑤성 동부 일대, 황하 중류가 휘돌아 흐르는 넓은 지역을 '황토고원'으로 칭합니다. 말 그대로 고운 황토가 엄청난 면적에 걸쳐 퍼져 있는 곳으로, 대체로 건조 기후에 속합니다. 지금 이곳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수천 년 전 이곳에 울창한 삼림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죠. 그런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울창한 숲과 비옥한 황토지대, 황하의 물이 합쳐져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과거 숲이 우거져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따라서 고대 중국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황하 중하류 일대였습니다. 상술했지만 기후가 지금보다 따뜻하고 황하 유역에 숲이 우거져 있던 고대에는, 황하 바로 아래까지 코끼리와 코뿔소가 살고 있었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러던 곳이 저 모양이 되어버린 것은, 기후의 변화도 있겠지만 인류의 삼림 파괴가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황하 중류의 삼림 면적 변화. 3000여년 전 / 현재] (출처 : NHK 고대문명 다큐멘터리에서 캡처)


 - 삼림 파괴의 결과 이 지역은 점차 사막화되고, 대규모의 문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초기의 중심지였던 장안(現 시안)과 낙양(뤄양)은 예전의 영광을 잃고, 현재는 중국 전체에서도 낙후된 동네의 지역 중심지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삼림이 사라지면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고운 황토는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 숲이 황토를 잡아주지 못하게 되자, 흙과 모래는 바람이 불면 공기 중으로 쉽게 날아갔고 이는 공기의 흐름을 타고 수천㎞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황사'입니다. 황사는 일종의 퇴적작용을 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호흡기에 해를 끼치며 특히 현대에는 공장 매연의 유해성분이 섞이는데다 반도체 산업처럼 먼지에 민감한 분야가 늘어나면서 피해를 매우 키우고 있죠.


 - 여담으로, 황하 문명이 삼림을 파괴한 결과는 다른 쪽에서도 나타납니다. 황토가 강으로 쓸려들어가면서 황하는 우리가 아는 그 싯누런 흙탕물이 되었고, 강바닥에 흙이 계속 퇴적된 결과 황하는 주변 평야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천정천'이 되고 말았습니다(당연히 홍수에 아주 취약해집니다). 최근에는 수자원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아예 황하의 흐름이 중간중간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 자원문제+환경문제까지 유발하고 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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