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의 착취자가 사라지면 그래도 무언가 나아질 거라며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누가 그들을 착취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임은 머지 않아 드러납니다. 일단 본섬 외의 주민들에게 징수하던 인두세는 류큐 처분 이후에도 190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됩니다. 새로운 착취자인 일본 정부는, 수백 년간 유지된 주요 수입원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 한편 본섬과 주변 지역을 막론하고 실시된 것이 바로 가혹할 정도의 동화정책, 아니 '문화 말살' 정책입니다. 전통적인 류큐 언어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그 자리에 표준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합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이 이루어졌고,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을 비롯한 류큐 왕국의 흔적은 방치되고 파괴되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식 성씨로의 '창씨개명'을 강요당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지요? 이로부터 수십 년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에게는 식민 지배의 연습장이었던 셈입니다.


 - 명목상 일본 내 행정구역, 실질적 식민지, 오키나와의 여러 섬과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은 어김없이 불어닥칩니다.


 - 미국에게 강력한 선빵(진주만 공습)을 한 방 날린 일본군은 잠시간 잘 나가는 듯 보였지만, 본격적인 전쟁모드로 돌입한 미군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며 태평양 절반을 차지한 판도를 급속도로 잃어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시피하던 일본 군부는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 이후로 일본의 지상과제는 '어떠한 피해도 감수하고 천황(과 지배계급)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는 상관없이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고, 연합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최대한 꺾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 이를 위하여 일본군은 본토와 주변의 주요 점령지를 온통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갔고, 몇 년간 일본군을 '사냥'해오던 연합군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피해가 커질지언정 승패에는 변동이 없었고,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된 곳이 바로 오키나와 본섬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은 이미 일본군과 주민의 강제동원으로 섬 전체(특히 인구가 밀집한 남부지역)가 요새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일본군과 주민들은 섬 곳곳에 파놓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었고 해안 방어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던지라, 매우 순조롭게 상륙할 수 있었던 연합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이 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는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느니 자결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이들을 일회용 자살병기로 써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임산부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연합군에게 자살돌격하도록 한다거나......


 - 일본의 철저한 세뇌교육은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연합군에 항복했다간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살해당한다'는 인식을 심어놓았고,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항복할래야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섬 곳곳에서 학살 뿐만 아니라 집단 자살도 예사로 벌어집니다. 주민들은 연합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없게 되면 '명예롭게 죽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습니다.


 - 연합군은 곳곳에 산재한 참호와 동굴을 점령하기 위해 화염방사기와 독한 연막탄까지 동원해야 했고, 결국 일본군의 모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거의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1만2천명, 일본군 사망자는 6만5천명(미국측 추산),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는 12만명(일본측 추산)에 달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3~40만명 정도였습니다.


 - 다수의 일본군과 자신들의 식민지를 희생하는 대가로 일본은 그들의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예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에 질려 다음 계획이었던 본토 침공 작전을 사실상 포기했고, 이는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대체됩니다. 20만명의 사망자와 이를 능가하는 방사능 피폭자를 더한 끝에 일본은 항복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상당수의 지배계급)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인구의 1/3이 사망한 오키나와는 그대로 미국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 섬 전체를 미군 기지로 만들어갔습니다. 일본군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제 미군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미군 전투기의 비행 소음을 매일같이 듣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미군기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한반도와 베트남을 폭격하는 비행기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악마의 비행기가 날아오는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고, 이 말을 듣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우리는 악마가 되기 싫다'며 마찬가지로 치를 떨었습니다.


 -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따라 다시 일본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우측통행이 좌측통행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섬의 미군기지만큼은 떠나는 일 없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위 '오키나와 반환'이란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그저 지배자가 바뀐 것, 아니 어쩌면 지배자가 둘이 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속)



 면적

 2,276.49 ㎢

 인구

 1,416,587 명 (2013. 10. 1.) 

 현청소재지

 나하 시 


 - 오키나와(沖縄) 현은 일본 남부의 류큐(流球) 제도의 섬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지역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섬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있으며,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여 북쪽으로 올라오는 태풍의 주요 통과지점이기도 합니다(아마 여름철 태풍예보에서 "지금 태풍의 위치는 오키나와 남동쪽~"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본 본토와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외에서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라는 데서 짐작이 가능하지만, 오키나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가가 공식적으로는 1879년, 비공식적으로는 1609년까지 존속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그 이전 시대에 3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류큐 섬이 쇼(尙) 씨가 지배하는 추잔(中山)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성립되었고, 초기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 16세기경에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 하지만 그 전성기는 별로 길지 못해서, 16세기 후반 명,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이 동아시아 무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 일본 본토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의 군대가 침략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일본(정확히는 사쓰마 번)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다만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중국으로의 조공이 막혀 곤란에 처해 있던 일본은, 역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류큐를 이용하여 중국과 간접적으로 조공 무역을 할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산 사치품은 일본 지배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고, 일본은 류큐가 조공을 통해 사치품을 확보하면 이를 가로채는 방법으로 수요를 해결했습니다.


 - 류큐의 이점은 또 있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중에서 사탕수수 농업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확보하면 설탕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설탕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류큐를 직접 통제하는 사쓰마 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이 유신시대 사쓰마가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 류큐는 일본의 사탕수수+사치품 셔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 본토의 착취와 무역 금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빠진 류큐 왕조는 결국 '세금'을 통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류큐 왕조는 류큐 본섬 이외 주변의 다른 섬들(북부의 아마미 제도는 아예 사쓰마 번에 편입당했으니 빼고)를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되죠. 다단계 착취......쯤 되려나?


 - 이들 섬들(야에야마라든지, 구메지마라든지 하는 지역)에 류큐 왕조는 '인두세'를 매깁니다. 즉 사람 수대로 세금을 매긴 것인데, 이 세금이 가혹했던데다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까지 인두세가 매겨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세금이 매겨지는 사람의 머릿수를 줄여가며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불필요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세금을 줄인 거죠.


 - 이런 '독립국이지만 독립국이 아닌' 상태가 이백 년 이상 지속되다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드라이브를 밟고 있던 일본이 이 틀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수준을 목표로 하던 일본은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지역의 식민 지배를 꿈꾸게 되었고, 그 테스트 무대로 이미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를 선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명목상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일본은 두 단계에 걸쳐 류큐를 멸망시킵니다. 이를 '류큐 처분'이라 합니다.


 - 1차 류큐 처분은 1872년, 류큐를 일본의 일개 번(藩, 영주가 통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격하시키고, 류큐 왕을 '류큐번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얼마 후 타이완 섬에서 류큐 주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에서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출병시켰는데, 중국에서 타이완 침공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류큐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 번을 폐지하고 (잠시 가고시마 현에 편입했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2차 류큐 처분입니다.


 - 당시 류큐 처분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는데, 이전에 함포외교를 통해 류큐를 강제개항시킨 바 있는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 전(前) 대통령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이를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정작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류큐의 일본 편입은 어영부영 확고한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 흥미롭게도, 류큐 처분에 대하여 류큐 본섬 이외의 지역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상술했다시피 류큐 왕조에서 강요하는 '인두세'가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이들의 노력이란 세금 명세서나 다름없는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 임산부를 죽인다거나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배자가 바뀌는 것을 환영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은 합니다. 적어도 인두세를 낼 필요는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 과연 이들의 작은 소망은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오키나와의 끔찍한 역사가 이제 시작에 불과했음은, 시간이 지나며 명백해지게 됩니다......(계속)



 -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의 결과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내전을 수습하고 이후 스탈린 지배체제에서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떠오른 이후, 소련은 핀란드를 비롯해 혁명기에 '상실'한 옛 제국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 1930년대 후반 이후 가속화된 나치 독일의 폭주가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처음에는 적대 관계였지만(나치 독일은 반공국가), 세력 확대에 대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이 조약에서는 동부 유럽의 분할에 대한 합의가 들어있었습니다.


 - 소련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자 서둘러 조약에 명시된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손을 잡았지만, 분명 서로를 장래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유리한 고지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이 동유럽 쪽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하기 무섭게 소련 역시 자신들의 몫을 뜯어먹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죠.


 - 그렇게 소련은 폴란드 동부(현재의 벨라루스 일대)와 발트 3국을 무력 점령합니다. 이 지역은 러시아 혁명 이후 신생 소련을 떠나 독립한 곳입니다. 이 지역을 점령한 소련의 다음 타겟은, 역시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영토였던 핀란드였습니다.


 - 장차 독일이 북유럽 쪽으로 침공해 올 가능성에 대비해서라도 소련은 핀란드 지역을 점령해 둘 필요가 있었죠. 소련은 먼저 발트 3국에서 한 것처럼, 군사력을 등에 업은 굴욕적 방위 조약(영토 할양, 발트 해 연안 항구들의 조차 등)을 핀란드에 요구하지만 핀란드는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 이로써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되었고, 침공의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은 국경 지대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에게 발포했다고 주장하며(이는 훗날 날조된 것으로 판명) 1939년 11월 29일 외교 관계를 단절, 곧바로 그 다음날 23개 사단, 46만 명의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으니 이것이 바로 '겨울 전쟁'입니다.


 - 소련군은 단숨에 핀란드의 방어선인 '만네르하임 선'까지 밀어부쳤고, 점령지의 한 마을에서 오토 빌레 쿠시넨을 수장으로 하는 괴뢰 정부를 수립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신속하게 밟아나갑니다. 하지만 스탈린과 소련이 간과한 사실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대숙청'의 여파였습니다.


 - 1930년대 내내 소련을 뒤흔든 대숙청은 소련 군부에서는 상당히 늦게서야 시작되었지만, 그 상처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크게 남았습니다. '종심 이론'의 창시자인 투하쳅스키 원수(그는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과 악연이 있어 사이가 나빴음)를 비롯하여, 소련의 군사 이론을 주도하던 고위 장교들이 대부분 숙청당한 것입니다.


 - 이후 소련군은 고급 지휘관이 대거 사라지면서, 위관급 연대장이나 영관급 군단장이 등장하는 참상(?)을 곳곳에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신진급 장교들에게 충분한 경험과 지도력을 쌓게 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1939년 소련군의 현실이었습니다. 거기에 대숙청의 여파로 지휘관들은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작전 수행조차 할 엄두를 내기 싫었고, 이는 소련군 대졸전 전설의 씨앗이 됩니다.


 - 전쟁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수오무살미 전투입니다. 수오무살미는 핀란드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소련군 입장에서는 핀란드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여 분단시키려는 계획의 초입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었죠. 1939년 12월 7일, 이 곳을 점령하기 위해 소련군 2개 사단(제44소총병사단, 제163소총병사단.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1개 전차여단이 추가로 기입되어 있음)이 진격을 시작합니다.


[사진 1 : 수오무살미]


 - 그런데 핀란드 중북부의 겨울은 말 그대로 혹한이었고, 여기에 폭설까지 겹치며 소련군의 진격을 방해합니다. 수오무살미로 진격하던 2개 사단은 수오무살미까지 전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라테 길(Raate Road)'이라 불리는 얼어붙은 도로 위에 발이 묶여버리게 됩니다. 도로상에 길게 늘어선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매복해 있던 핀란드군 제9보병사단이었습니다.


 - 스키부대가 주축이 된 핀란드군은 소련군 대열의 사이사이를 끊고, 그곳에 도로 장애물 등을 설치하여 서로간의 연락을 차단해버립니다. 소련군 2개 사단은 어느새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쪼개져 도로상에 고립되어 버렸고, 핀란드군은 그 소규모 부대들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치 장작을 쪼개듯 했다는 뜻에서 '모티(장작) 전술'이라 부릅니다.


[사진 2 : 당시의 전투 상황도. 소련군의 진형이 조각조각 끊어지고 있음]


 - 전투는 해를 넘겨서까지 계속 이어졌고, 모든 전투가 종료된 것인 1940년 1월 8일. 살아남은 소수의 소련군은 무기고 장비고 다 내버린 채, 동쪽의 얼어붙은 호수를 맨몸으로 건너 도망쳐야 했습니다. 핀란드군 1개 사단(1만 1천여 명)으로 소련군 2개 사단(5만여 명)을 섬멸한 '수오무살미 전투'는 겨울 전쟁 중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소련 입장에서는 악몽과도 같은) 전투로 남아 있습니다.


 - 이 참사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희생양부터 찾기 바빴는데, 제44사단장은 현장에서 총살당했으며, 이외 수십 명의 고위 장교들도 교체되었습니다. 당시 총사령관은 적백내전의 명장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는데, 수십 년간 변화한 전쟁 양상에는 무지했던 그를 스탈린이 질책하자 "유능한 장교들을 네가 다 죽여버렸잖아!"라며 패기 넘치는 항의를 날립니다(보로실로프가 스탈린과 절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 실제로 이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숙청당하지 않았음).


 - 다만 이후에는 소련군에서 몇 남지 않은 유능한 장교인 세묜 티모셴코를 전장에 보내어 작전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그의 주도로 소련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결국 핀란드의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합니다. 견디지 못한 핀란드는 결국 항복하였고, 소련은 처음 요구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조약을 핀란드에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원래의 목표였던 핀란드 전체 점령은 실패했고, 국제적 여론은 참담할 정도로 악화되어 소련은 국제연맹에서 축출당하는 굴욕까지 당합니다. 이것보다도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온갖 추태들로 인해 소련군은 '오합지졸'이란 인상을 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었으며 이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자신감을 얻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 전쟁에 대한 핀란드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핀란드는 단지 '잃은 것들을 되찾기 위해' 독일과 동맹, 소련이 얻어터지는 틈을 타 카렐리야 지협을 비롯해 소련이 점령한 지역들을 곧바로 되찾아버립니다. 하지만 딱히 독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던 핀란드는 얼마 후 진격을 멈추었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과 협상을 통해 국가를 보전할 수는 있었습니다. 물론 점령한 땅은 다시 상실하였고 이 지역은 소련 패망 후 지금까지 러시아 영토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 사진 출처 : 

『독소 전쟁사』 글렌츠/하우스, 열린책들

한국어 위키백과 "겨울 전쟁"

영문 위키피디아 "Battle of Suomussalmi"



 - 다들 아시다시피 1930년대 이후 급격하게 미쳐돌아가기 시작한 일본은, 무리한 팽창정책이 화를 불러와 1940년대에 이르면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라는 양면전쟁의 구도 속에 스스로 빠져들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국력은 유럽의 웬만한 국가와 1:1로 붙어도 이기기 힘들 정도였음에도, 그야말로 폭주하듯이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거대국가에 선제공격을 가한 일본은 각각 초반에는 그나마 좀 앞서나가는 듯하다가 이내 압도적 국력차에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한 데는 고질병이었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알력다툼이 한몫 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일본 육군-해군 간 반목은, 당시 독립된 군체계가 아니었던 항공전력을 따로 구성하여 운영하고 육군이 항공모함잠수함 부대를 운영한다거나, 타 군의 전략을 스파이를 통해 '알아내야' 했을 정도...... 육군 주도의 중일전쟁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자, 이를 의식한 해군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게 태평양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여기엔 미국이 적극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 일본 측의 오판이 겹쳐 있기도 했습니다.


 -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항모전단이 궤멸당한 이후, 비행기의 자폭공격을 골자로 한 특공작전이 발동됩니다(이것이 바로 '카미카제'). 물론 이미 해상이든 항공이든 미군에 압도당하게 된 일본군으로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긴 했지만, 이러한 자폭공격은 결국 그나마 남은 전력과 숙련된 군인들마저 무의미하게 소모한 결과 일본이 더 빨리 망하는 데 기여할 뿐이었죠.


 - 비행기만으로는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아예 자폭 그 자체를 목적으로, 그것도 여러 종류의 병기를 개발하게 되는데...


 #1. MXY-7 "오카"



 - 기존의 비행기들이 아까웠는지 일본군은 자폭용 비행기를 개발합니다. 아니, 비행기라고 보기도 좀 그렇습니다. 사진만 봐도 잘 날게 생기진 않았는데, 이 비행기(?)는 혼자 이륙하지도 못하고, 빈약한 로켓엔진 하나만 달랑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날아다닐까요? 공격기나 폭격기 등을 모기(母機)로 삼아 함께 이륙하고, 목표에 가까워지면 떨어져 로켓엔진을 가동하며 엔진이 꺼진 이후로는 활공을 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대략의 운용 형태)


 - 이것만 해도 심각한데, 자폭공격이 그나마 성공하기라도 하려면 일단 모기가 격추당하지 않고 목적지에 접근하고, 모기에서 떨어진 오카가 격추되지 않고, 동력조차 꺼진 이후에는 신의 조종능력으로 목표에 정확히 갖다박아야 합니다. 과연 공격에 성공할 수는 있을까요?...... 실제로 '오카'는 총 10여 회 출격에 모기와 오카의 승무원을 합하여 400여 명 이상이 전사했고, 전과는 미군 구축함 1척 격침에 그칩니다. 아무튼 탄두 자체의 위력은 대단했으니, 미군은 여러 의미를 담아 오카를 '바카(바보) 밤'이라고 불렀다는군요.


 #2. 가이텐



 - 공중으로는 부족했는지 수중에서도 자폭병기가 개발됩니다. 가이텐의 모체인 '93식 어뢰'는 일본이 그나마 기술적으로 앞서 있던 '산소어뢰'입니다. 그런데 산소어뢰 자체가 전쟁 후반에는 사장된 기술체계였고 이 무식한 크기를 자랑하는 어뢰 또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바로 이것을 개량하여 조종실(!!!)을 만들어 놓은 것.


 - 가이텐은 본래 자폭병기는 아닐 예정이었는데, 일정 거리까지 접근하면 진로를 고정시키고 조종사가 탈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부의 높으신 분들은 위력을 키우라고 요구했고, 가뜩이나 큰 어뢰가 더 커지면서 가이텐은 끝까지 조종을 하지 않으면 똑바로 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결국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기존의 설계고 뭐고 자폭병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산소어뢰가 사장된 것은 특유의 민감한 성질을 비롯한 이런저런 문제 때문이었는데, 특히 이놈은 오래 추진하면 유독가스가 발생하여 조종사를 질식(!!)시키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장거리 주행은 어림도 없었고, 목표에 가까이 접근에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기에 억지로 달아놓은 조종실은 지나치게 비좁았고, 조종 자체도 무진장 어려웠다고......


 - 어쨌든 1944년 말부터 가이텐은 실전에 투입되어 함선 4척 격침, 2척 대파(大破)라는 눈물나는 전과를 올립니다. 가이텐은 한자로 '回天'이 되며 '국면을 좋게 전환시킴'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그냥 조종사를 하늘로 돌려보내버리(?)는 병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3. 신요



 - 이것은 자폭용 보트입니다. 모터보트에 대량의 폭약을 싣고 돌진하는 일종의 '화공선'이었는데, 문제는 <삼국지연의> 정도에서나 나오던 화공선이 20세기 한복판에 등장했다는 것.


 - 아무래도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치 않다보니 무려 6,000여 대가 만들어졌는데, 누가 made by 일본군 아니랄까봐......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일단 작은 보트에 300kg이나 되는 폭약을 달아놓았으니, 파괴력은 좋겠지만 기동성에는 쥐약이었고 무게중심도 맞지 않아 조종하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합니다.


 - 수천 대나 만들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전과가 알려진 것은 없고, 연합군의 상륙전에서 일부 활용된 적이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일본군은 자폭용 잠수함 '카이류(海龍)', 인간 기뢰 '후쿠류(伏龍)' 따위의 다양한 자폭병기를 개발했지만 (다행히도) 이것들은 실전에 활용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이 외에도 대전차 죽창(!!)이니 인간지뢰(!!!)니 하는,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자폭병기들은 정작 본전치기조차 하지 못한 채 일본의 명줄을 재촉하는 역할이나 하게 됩니다.


 - 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자폭특공을 매우 즐겨 지시한 도미나가 교지(1892-1960)입니다. 62회에 걸쳐 특공을 명령하여 약 400여 대의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날려먹은 그는 정작 위기 상황에서 적전도주를 감행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꼴통으로 유명한 일본군 수뇌부도 이것까진 봐주지 못하겠던지 그를 만주 관동군 장교로 좌천시켜버렸을 정도. 그에 비하면 실제 자폭공격에 투입된 이들의 모습은 차라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대일본제국 카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작전이다. 자살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전제주의 국가다운 발상이다. 이런 짓으로 반짝 효과를 볼 수야 있겠지만, 패전을 막을 수는 없겠지." - 특공대원 우메하라 유지. 전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