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2,276.49 ㎢

 인구

 1,416,587 명 (2013. 10. 1.) 

 현청소재지

 나하 시 


 - 오키나와(沖縄) 현은 일본 남부의 류큐(流球) 제도의 섬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지역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섬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있으며,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여 북쪽으로 올라오는 태풍의 주요 통과지점이기도 합니다(아마 여름철 태풍예보에서 "지금 태풍의 위치는 오키나와 남동쪽~"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본 본토와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외에서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라는 데서 짐작이 가능하지만, 오키나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가가 공식적으로는 1879년, 비공식적으로는 1609년까지 존속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그 이전 시대에 3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류큐 섬이 쇼(尙) 씨가 지배하는 추잔(中山)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성립되었고, 초기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 16세기경에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 하지만 그 전성기는 별로 길지 못해서, 16세기 후반 명,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이 동아시아 무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 일본 본토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의 군대가 침략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일본(정확히는 사쓰마 번)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다만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중국으로의 조공이 막혀 곤란에 처해 있던 일본은, 역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류큐를 이용하여 중국과 간접적으로 조공 무역을 할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산 사치품은 일본 지배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고, 일본은 류큐가 조공을 통해 사치품을 확보하면 이를 가로채는 방법으로 수요를 해결했습니다.


 - 류큐의 이점은 또 있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중에서 사탕수수 농업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확보하면 설탕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설탕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류큐를 직접 통제하는 사쓰마 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이 유신시대 사쓰마가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 류큐는 일본의 사탕수수+사치품 셔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 본토의 착취와 무역 금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빠진 류큐 왕조는 결국 '세금'을 통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류큐 왕조는 류큐 본섬 이외 주변의 다른 섬들(북부의 아마미 제도는 아예 사쓰마 번에 편입당했으니 빼고)를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되죠. 다단계 착취......쯤 되려나?


 - 이들 섬들(야에야마라든지, 구메지마라든지 하는 지역)에 류큐 왕조는 '인두세'를 매깁니다. 즉 사람 수대로 세금을 매긴 것인데, 이 세금이 가혹했던데다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까지 인두세가 매겨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세금이 매겨지는 사람의 머릿수를 줄여가며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불필요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세금을 줄인 거죠.


 - 이런 '독립국이지만 독립국이 아닌' 상태가 이백 년 이상 지속되다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드라이브를 밟고 있던 일본이 이 틀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수준을 목표로 하던 일본은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지역의 식민 지배를 꿈꾸게 되었고, 그 테스트 무대로 이미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를 선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명목상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일본은 두 단계에 걸쳐 류큐를 멸망시킵니다. 이를 '류큐 처분'이라 합니다.


 - 1차 류큐 처분은 1872년, 류큐를 일본의 일개 번(藩, 영주가 통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격하시키고, 류큐 왕을 '류큐번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얼마 후 타이완 섬에서 류큐 주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에서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출병시켰는데, 중국에서 타이완 침공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류큐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 번을 폐지하고 (잠시 가고시마 현에 편입했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2차 류큐 처분입니다.


 - 당시 류큐 처분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는데, 이전에 함포외교를 통해 류큐를 강제개항시킨 바 있는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 전(前) 대통령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이를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정작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류큐의 일본 편입은 어영부영 확고한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 흥미롭게도, 류큐 처분에 대하여 류큐 본섬 이외의 지역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상술했다시피 류큐 왕조에서 강요하는 '인두세'가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이들의 노력이란 세금 명세서나 다름없는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 임산부를 죽인다거나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배자가 바뀌는 것을 환영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은 합니다. 적어도 인두세를 낼 필요는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 과연 이들의 작은 소망은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오키나와의 끔찍한 역사가 이제 시작에 불과했음은, 시간이 지나며 명백해지게 됩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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