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황족들은 나라의 멸망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개중에는 적극적인 친일분자가 되어 자신들의 나라를 팔아먹는 데 참여한 이들도 있고, 소극적이나마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대체로 이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지 않았으며, 대한제국 멸망에 적어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친일분자로 활약한 대한제국의 황족, 영선군 이준용입니다.


[그림으로만 봐도 위엄돋는 그의 풍채]




1. 영선군, 왕의 조카가 된 남자


 이준용은 1870년 흥친왕 이재면(1845-1912)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서 고종(이재황)의 친형입니다. 즉 이준용은 고종의 친조카가 되는 셈으로, 흥선대원군에게는 적장손이기도 합니다. 친동생 이문용(1882-1901)이 19세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이재면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출생 후 영선군(永宣君)이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이자 측근인 허욱(1827-1883)을 가정교사로 삼아 글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명석하고 뛰어난 자질을 보여 흥선대원군이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이재면이 그리 강단있는 위인이 아니었던 데 비해, 이준용은 상당히 영리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이재면보다도 장손 이준용을 더욱 총애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곁에 있으면서 이준용은 냉혹한 현실정치의 생리에 일찍부터 눈뜰 수 있었는데, 이 시기 고종과 민씨 세력에 의해 권력을 상실한 흥선대원군은 싹수가 보이는 이준용을 고종의 대안으로 점찍게 됩니다. 그러한 주변 환경 속에서 자란 이준용은 1880년 관례(冠禮)를 치르고 정식으로 성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는 1880년대 초 음서를 통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84년 말에는 세자익위사(세자의 호위를 담당) 세마(洗馬, 정9품)에 올랐는데 이는 갑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급진개화파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장손인 이준용을 적극 기용하였던 것입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이준용 역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정변의 직접 참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음서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하급 관직을 전전하던 그는, 1886년 과거시험에 정식으로 급제한 이후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홍문관 정자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이준용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 이듬해(1887년)에는 이미 정3품 당하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는 반(反) 고종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고종 및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대립한 데서 비롯합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 등을 계기로 섭정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친(親) 고종 세력과 적대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왕을 갈아치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영선군 이준용이었습니다. 확실히 자기 편이기도 하고, 인물이 영특하여 아내의 조종을 받거나 할 것 같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고종의 장남이자 궁인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1868-1880)을 밀어주려고 하였지만,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대타로 이준용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그 세력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이준용의 삶은 1880년대 중반부터 격랑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습니다.



2. 나도 왕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1886년,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1859-1916)의 조종으로 첫 번째 쿠데타 시도가 벌어집니다. 위안스카이는 친러정책을 강화하던 고종과 명성황후에 맞서, 고종을 쫓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앉힌 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 자신들이 조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청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켰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만만찮은 야심가라 쿠데타 계획에 호응하려 했지만, 정작 청 본국에서 이를 반대하여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를 알아낸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하여, 오히려 이준용 본인의 처지가 난처해지는 역효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1887년부터 이준용은 3년간 모친상을 치르면서 다양한 세력의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준용을 경계하고 항상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친 이후 그는 성균관, 규장각, 승정원 등의 요직을 거쳐 1892년에는 이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면서 점차 그를 지지하는 친위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운현궁]


 이렇게 되자 이준용은 본격적으로 고종-명성황후의 주된 정적이 되었습니다. 1892년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 이재면-이준용 부자의 집에도 폭탄이 설치되었지만 사전에 발견되어 피해는 없었습니다(이 사건에 대하여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준용은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한번은 길에서 자객을 만났지만 간신히 따돌려 목숨을 구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준용 쪽에서도 가만 있을 수 없지요. 갑오개혁 당시 이준용과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출을 몰래 추진하였지만 일본 측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일본 주도의 개혁에 반발하는 유학자들이나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여 고종을 몰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계획이 탄로나면서 실패합니다. 이 시기 이준용은 대원군파와 척을 진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는 이들을 포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길준 등을 대원군파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하여 이준용은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895년 초 이준용은 개화파 인사 김학우(1862-1894)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명성황후와 개화파 세력은 (차마 흥선대원군을 족칠 수는 없으니) 이준용을 처형하려 했지만,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문이 자행되는 등의 사실이 알려지며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준용은 유배형에 처해지며 목숨만은 건지게 됩니다.


 얼마 뒤 이준용은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투옥당했지만 때마침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일본 측의 도움으로 다시 풀려났습니다. 석방과 동시에 그는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일본 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하였는데, 대체로 이 무렵부터 그가 친일 성향을 띠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좌절된 야망과 말년


 그런데 다음해 아관파천으로 조선 내 친일파가 몰락하면서, 이준용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길로 망명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897년 그는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1899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본국에서는 안경수(1853-1900) 등이 다시 그를 옹립하려는 쿠데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준용의 귀국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조용히 망명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엄귀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등 지속적으로 조선(대한제국) 정치에 관여하려 하였습니다. 당연히 더욱 열받은 고종은 일본에까지 자객을 보내어 이준용을 제거하려 시도하지만, 의외로 이준용 자신의 무력(武力)이 출중했기 때문에 암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ㅡㅡ;


[영친왕과 엄귀비. 고종은 정적인 이준용과 의친왕을 배제하기 위해, 엄귀비 소생인 영친왕을 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고종은 그의 강제송환을 요구했고, 이토는 그 대신에 주요 망명 인사들을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약속하였지만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준용은 이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던 모양이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준용은 여전히 고종을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오를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며 그의 꿈은 사실상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그는 조약 체결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왕 한 번 해보려는 이준용의 야망은 자신이 협력하던 일본에 의해 좌절당한 것입니다(그는 이후로도 1909년 무렵까지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였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결국 이준용은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1909년부터 그는 친일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로 재직했는데, 이곳은 단군신화를 일본 아마테라스 신화에 종속시키는 역사왜곡을 추진한 단체였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준용은 왕족+친일파로서 훈1등 욱일장을 수여받고, 아버지(83만 엔 수령)와는 별도로 거액(16만 8천 엔)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병합 때 이희 공(公)으로 봉해진 이재면이 1912년 사망하자 이준용은 이름을 이준(李埈)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빈소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다른 종친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준용은 자신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체포되어 고문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이준용의 나이는 고작 40대였지만 젊어서부터 갖은 고난과 비만을 겪은지라 그의 건강은 상당히 나빴고, 이후로는 신장병과 심장질환 등에 시달리며 병석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만년에 낳은 딸 이진완(1916-1997) 외에 아들이 없었던 이준용은 1917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차남 이우(1912-1945)를 양자로 들였고, 같은 해 사망하였습니다. 양자 이우는 왕족으로서 일본군 고위 장교가 되었으며, 나름 반일 성향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휘말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우의 아들 중 이청(1936-)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4. 정리 : 대한제국 황족의 운명


 한일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족은 '멸망한 나라의 왕족'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 황실 자체를 아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으로 격하하고, 일본 황실에 다음가는 지위인 '왕공족'으로 대우하였습니다. 물론 더 이상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러한 대접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구(舊) 황족들은 복잡한(하지만 대체로 행복하지 못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고종과 순종은 궁궐에서 반쯤 갇혀 살다 죽었고(고종은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지요), 이재면-이준용 부자처럼 일본에 적극 협력한 부류도 있었지만 이들 역시 병합 이후에는 거액의 은사금과 작위 외에 일본에게서 딱히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고종의 자식들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이나 덕혜옹주(1912-1989)의 경우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덕혜옹주]


  분명한 사실은 이들 황족 중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의친왕 이강과 그의 아들(그리고 이준용의 양자)인 이우 등 몇몇이 반일 성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의친왕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사실상 독립운동과 멀어졌고, 이우는 사실상 볼모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장교 생활을 하다가 히로시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들이 일본 당국의 감시 하에 있는 처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더라도 대한제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던 황족들이 나라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후 딱히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일 턱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고종과 순종 복위(복벽운동)을 추진하는 항일세력이 있었지만, 1919년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사실상 모든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정'으로 대동단결하게 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나마 그들의 지위를 유지해주던 일본의 실드마저 사라지자, 이들은 더 이상 왕족으로서 살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해방된 한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은 수십 대를 거슬러올라가야 핏줄이 이어지는 전주 이씨 이승만이었고, 미국 체류시절 자신을 '프린스 리'로 소개할 만큼 자기 핏줄을 의식했던 이승만은 구 황족에 대한 예우를 대부분 박탈하고 영친왕의 귀국을 가로막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왕이거든


[황족 X까! 이젠 내가 짱이라고!]


 당연하게도 이때까지 살아남은 황족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못했습니다.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거주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고,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에야 병든 몸으로 귀국할 수 있었으며, 덕혜옹주는 어린 시절 강제로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 간 이래 지속적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이혼까지 겪는 등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역시 한참 뒤에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나마 한국에 남아 있었던 의친왕은 노년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 시기 영양실조와 홧병에 시달리다 사망하였습니다.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대한제국 멸망과 한일병합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일단 이들이 세계사의 격변기를 헤쳐나가기에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던 점, 외세의 침략에 기껏해야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며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이준용의 경우처럼 아예 대놓고 친일행위를 일삼은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황족에 대한 이후 한국인들은 준엄한 평가를 내렸고,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영영 되찾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2018. 9. 25. 수정]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지배한 일본의 밑에는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식민지배를 도운 다수의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의 주인인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한국인들을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에 대한 단죄가 해방 후에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부역한 자들은 대부분 해방 후에도 자신들의 노하우를 팔아먹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들 중 '고문귀'로 악명을 떨친 친일경찰 하판락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말년의 하판락]




1. 왕년의 항일학생, 친일경찰로 변신하다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주군 명석면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주제일보통학교(現 진주초등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現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 시절에는 반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진주고보 졸업 직전인 1930년 초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진주에서 발생한 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처분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하판락의 이름이 수록된 진주 학생항일운동 관련 기사]


 1930년 진주고보를 졸업한 하판락은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순사 시험에 응시하여 1934년 합격하였습니다. 사천경찰서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한 그는 1937년에는 부산으로 옮겨 순사로 계속 근무하다가 1939년에는 경상남도 고등경찰과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 경부 시험에 합격하여 순사부장, 경부보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해방을 맞게 됩니다.


 당시 그가 조선인으로 상당히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맡은 주업무가 '항일운동가 색출'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가 재직한 '고등과(고등경찰)'는 반체제인사 탄압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제국주의 일본의 경찰조직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반체제인사란 바로 항일운동가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하판락은 항일운동가 탄압에 고등경찰의 일원으로서 앞장서고, 그 공(?)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판락이 단순히 항일운동가를 탄압한 사실만으로 악명을 얻은 건 아닙니다. 그가 악명을 하늘높이 떨치게 된 것은 그가 항일운동가를 탄압하는 방식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된 항일분자에 대해 비인간적 고문을 자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평생 고치지 못할 장애를 얻었습니다. 이 악행을 바탕으로 하판락은 '고문귀'라는 으시시한 별명을 얻기에 이릅니다.




2. '고문귀'의 활약상


 그가 악명을 떨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말 수십 명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탄압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진주 배돈의원 원장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김준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극히 잔혹한 고문을 자행하였으며 (자신도 조선인인 주제에) 피고문자에게 '조센징' 운운하며 욕설을 일삼아 '내가 동족에게 이런 짓까지 당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저명한 개신교 목사를 밀정으로 포섭한 후, 그를 통하여 항일적인 신자들을 색출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항일운동가 탄압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그가 '고문귀'라는 악명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3년 이른바 '친우회 전단사건' 수사였습니다. 하판락은 당시 친우회 활동가로 검거된 여경수, 이미경, 이광우 등 8명을 수사하면서 극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고문의 결과 3명이 순국하고, 생존한 5명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후 수 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평생 장애를 안고 고생해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고문 방식 중 하나. 상자 안에 수많은 못이 박혀 피고문자를 찌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고문을 당했고 남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간 이광우(1925-2007)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문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동지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화로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몸을 지지는 고문,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갖은 고문이 피고문자에게 가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판락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이 바로 '착혈 고문'입니다.


 역시 이광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그와 함께 체포된 이미경을 고문하면서 원하는 자백이 나오지 않을 경우 그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고 한가득 피를 뽑은 다음, 그의 신체에 그 피를 뿌리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도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주사기로 피를 뽑아서...... 고문귀가 아니라 흡혈귀였네 이러한 고문의 결과 이미경은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명의 항일운동가를 살해하거나 폐인으로 만든 대가로 하판락은 해방되는 순간까지 출세를 거듭하였습니다. 창씨개명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바꾸었는데 이게 조선인 티가 나는 이름이라(한자를 보면 '하판락'을 그냥 일본식으로 살짝 바꾼 것) 다시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바꾸었습니다(당시 창씨개명을 두 차례나 한 드문 사례라고 합니다). 이후로도 해방 한 달 전에는 자기 친구의 형을 체포하여 고문하는 등, 철저히 일본의 개로서 살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3. 해방 후 : 잘 먹고 잘 살며, 최후까지 살아남다


  해방이 되었으니 그간의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겠으나, 한반도 남부에 상륙한 미군의 행정편의주의로 인하여 하판락을 포함한 친일경찰들은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판락은 미군정 하에서 경남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근무하였고, 일본인의 재산(적산) 처리에 관여하며 상당량을 인마이포켓ㅡㅡ;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던 하판락은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된 1949년 초 그에게 고문사당한 여경수의 모친이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하면서 긴급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악행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졌던 터라, 부산에서 체포된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많은 부산시민이 "저 자는 우리가 여기서 당장 죽여버리겠다"며 압송을 반대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지만, 그는 당연히 자신의 고문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하판락(왼쪽)]


 하지만 결국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기소되었던 반민족분자들도 모두 무혐의 혹은 무죄판결로 풀려났습니다. 당연히 하판락도 석방되었는데, 이후 고향인 진주 명석면에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바탕으로 부산 쪽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1956년, 지방의원 선거에 진양군(現 진주시) 제2선거구 후보로 출마하여 자기 가문의 전폭적 지원까지 등에 업고 유세를 펼쳤지만 당연히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한 하판락은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사업가로 변신, 신용금고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며 남은 평생을 떵떵거리며 잘 살았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사무소 신축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노인 복지 사업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사회사업가 행세를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을 가지고 부산광역시에서는 하판락에게 어버이날 표창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ㅡㅡ;


 그렇게 잊혀가던 그의 악행은 그에게 고문을 당한 이광우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훈장을 받으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광우의 훈장 서훈을 전후하여 그를 고문한 자의 이야기도 당연히 함께 언급되었고, 그를 고문한 하판락은 그 죄상이 세간에 다시금 알려지며 여론의 공분을 사게 됩니다. 이에 그는 2000년 대한매일(現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찰 간부 활동을 후회하며,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과한다"라고 같잖은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판락 사망 당시 MBC 뉴스데스크]


 하판락은 2002년 국회 민족정기의원모임에서 친일파 708명을 선정했을 때 유일하게 생존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그 이듬해 천수를 모두 누리고 91세로 뒈졌습니다죽었습니다. 같은 해 말 그의 고향 명석면에서 <명석면사(史)>를 발간할 때 저자 김경현씨가 하판락의 악행을 수록하려 했지만 하씨 문중의 큰 반발을 사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경현씨는 결국 직접 수록은 포기하고 편집후기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하여는 면사편찬위 결의로 삭제함"이라는 멘트를 넣어 간접적으로 하판락의 악행을 명시하였다고 하는군요.




4. 정리 : 하수인들을 앞세우는 지배자의 전략


 흔히 친일경찰의 상징으로 노덕술이 유명하며 그 외에 하판락 정도가 알려진 수준이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일본 치하의 경찰로 근무한 조선인은 제법 많은 수가 있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항일운동 탄압에 앞장서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의 활약상은 때로는 일본인 경찰보다도 훨씬 악랄한 것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민족반역자로서 모두에게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웃기는 사실은 그 친일경찰들 자신도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센징'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돕는 '도구'로써 친일부역자들을 이용했지만, 저들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일부를 자신들의 수족으로 포섭하여 방패막이로 쓰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행태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슨 이점이 있을까요? 일단, 지배자를 향할 피지배자의 분노가 당장 자기 눈앞에 있는 앞잡이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잡이로 선택된 자들은 대부분 양심보다 출세를 앞세우는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들의 주인에게 철저히 충성하여 자리를 보전하고 출세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언제 주인에게 내쳐질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슨 짓이건 서슴지 않게 됩니다.


[역시 일본의 하수인으로 활약한, 어떤 인물에 관한 당시 신문기사]


 그러니까 피지배자의 일부를 앞잡이로 활용하는 전략은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효율성 최고의 전략인 셈입니다. 물론 그 앞잡이가 된 자들을 옹호하거나 동정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저들은 자발적으로 지배자의 앞잡이가 되었고, 자신들의 의지로 괴물이 된 거니까요.


 이렇게 일본의 하수인으로 일한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한 일이다"라며 스스로를 변호하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시에 굶주려가면서까지 일본에 저항하거나 적어도 협력을 거부한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고, 심지어 하판락같은 경우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족을 탄압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해방 후 이런 자들이 단죄받지 않고 평생을 잘 살다 죽은 것이야말로,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민족반역자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배부르며 정의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대대로 고생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과연 누가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엄두를 낼 수 있을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19950&cid=55772&categoryId=55836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9476 (오마이뉴스 기사)

http://www.bjynews.com/default/all_news_body.php?idx=4519&... (바른지역언론연대)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159. 민족반역자 하판락 특집

http://m.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60 (<명석면사> 관련 기사)




[2018. 9. 25. 수정]



 역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한국인치고 이완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완용은 한국인에게 '매국노'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일본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 외에, 이완용의 일생 전반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조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참고가 되자면, 이완용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일생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합니다.


[일단 침 한 번 뱉고 시작할까요?]




1. 입양 로또를 맞은 신동


 이완용은 1858년 6월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現 성남시 분당구)에서 출생하였습니다(역사학자 이병도는 전북 익산 출신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더라' 수준이라 신빙성은 별로 없습니다). 본관은 우봉 이씨로, 고려시대 이래의 명문가이긴 하지만 이완용의 직계는 8대조 이래로 과거 급제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잔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석준(초명 이호석) 역시 간신히 선비 행세나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집안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변에 이름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10세 때 우봉 이씨 가문의 유력자인 이호준(1821-1901)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호준에게는 서자(이윤용)만 있었기 때문에, 이완용은 이호준 집안의 적자(嫡子)로서 입적된 것입니다(요즘 시각으로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랬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이호준과 이석준은 본관만 같지 촌수가 32촌으로 남남이나 마찬가지라 하필 그가 양자로 선택된 것은 의외인데, 아마도 이완용의 재능이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당시 이호준은 판중추부사를 역임 중이었으며, 자신의 딸은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 조성하(1845-1881)와, 서자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각각 혼인시키는 등 조선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몰락 양반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완용이, 최고 귀족 가문의 (호적상) 적장자가 된 것입니다. 당연히 이완용의 삶은 이 때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역시 본래 다른 집안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양아버지가 조선 정계의 거물이었던지라 이완용은 한양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소위 '경화거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의 자제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된 처지에 이복형제도 있었던지라 이완용은 처음에는 말수가 매우 적은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이호준이 양아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해 보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13세 때 집안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였고,이후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들에게 유교 경서를 배웠습니다.


 1882년 이완용은 증광시(增廣試)에 전체 28위로 급제하였고, 처음 임명된 관직은 주서(정7품)였습니다. 사실 과거시험에서 28위라면 급제 순위 중 병과(丙科-3등급)였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후순위였는데, 양아버지 이호준이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과 손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ㅡㅡ; 시작부터 낙하산이라니 




2. '기계같은 자'의 출세 : 능력은 있으나, 양심은 없다


 과거 급제 이후 이완용은 엘리트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습니다. 그는 규장각 대교를 거쳐 외직(지방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군과 관련된 직위)로 발령됐는데, '해방영' 자체가 민씨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편제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민씨 정권과 관련된 인물이 임명되는 자리였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자리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아버지 이호준이 민씨 세력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1880년대 초반 조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애초에 그가 급제한 증광시 자체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ㅡㅡ; 급진개화파니 온건개화파니 수구파니 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중앙 관료가 된 그는 젊은 엘리트면서도 근대니 개화니 하는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화파 관료들과도 딱히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고, 때마침 외직에 나가 있었기도 하여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에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의 영어수업 장면]


 1886년 이완용은 다시 중앙정치로 복귀하였고, 동시에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와 과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완용이 서양 문물을 제대로 접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왕년의 신동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887년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 세자의 교육 책임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 손꼽힐 만큼 빠른 속도였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 광혜원 설립자, 주한미국공사 역임)이 이완용을 두고 '기계같은 자'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기계처럼 철저하게 업무를 해결하는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양심과 줏대가 없는 인간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이완용은 젊어서부터 대단히 권력욕이 강했다고 하며, 아버지 이호준과 함께 그가 정치적 격변을 회피하는 모습이라든지, 이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정치적 변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보신(保身)과 출세에 치중한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옛 주미 조선공사관 건물]


 1887년 이완용은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듬해 초 박정양이 공사에서 해임될 때 함께 해임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와 약속한 외교적 관례를 박정양이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후 이완용은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 요직을 거쳐 1888년 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얼마 뒤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습니다.




3.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


 영어교육을 통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였으며, 미국에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다보니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미국은 '조선을 침략할 위험이 적고, 부강한 국가이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조선 정부는 그래서 미국과의 관계에 대단한 공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에 파견된 이완용은, 미국 현지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대사성, 전환국총판, 외무협판을 거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순탄한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일본이 자신도 살해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음식도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통조림만 먹었을 만큼 고종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친미파 · 친러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로 끝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일명 '춘생문 사건'입니다.

[춘생문으로 추정되는 곳. 이후 문은 철거되었고 現 청와대 춘추관 부지 내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역시 춘생문 사건에 직접 관여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완용 등의 관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성공하였습니다(아관파천).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탔고, 아관파천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만큼 친일파를 숙청하고 새로 구성된 친러파 내각에서 중심 인물이 됩니다.


 새 내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이완용은 정부 관료의 대표격으로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사업을 위하여 출범한 단체였는데, 실제로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우자 이완용은 독립문의 한자 현판 글씨를 직접 쓰는 등 건립 사업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이완용이 쓴 독립문 한자 현판.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 명필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문이 건설되고 고종이 환궁한 이후 터졌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독립협회는 점차 반(反)러시아 성향을 강하게 띠었고, 친러파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와 대립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친러파 관료이면서 독립협회 중심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양쪽 사이에 끼어 난처한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결국 정부와 독립협회의 갈등이 폭발하자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된 직후 이마저도 파직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동시에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당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때 독립협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후 벌어진 독립협회 대탄압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보신甲! 그래도 그가 독립협회 초기에 중심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며 인생 최대의 위기ㅡㅡ;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1901년 양부 이호준이 급사한 이후 고종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완용을 복권시키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당시 임명된 관직은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한직(閑職)이었습니다.




4. 마지막 변신 :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다


 이완용은 1904년 양부의 3년상을 끝낸 이후 190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취임하여 예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이 전쟁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우세로 흘러가자 다급해진 대한제국은 왕년의 친미파 이완용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마지막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하여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한반도를 잡아먹는 것을 용인한 상태였고, 당연히 이완용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의 선택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면 침략자에게 들러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자' 였습니다. 지금껏 출세와 보신에 힘쓰며 친미파와 친러파로 철새마냥 떠돌았던 이완용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분기점으로 완전히 친일파로 갈아타게 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자,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새로운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 양도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는데, 정작 이에 대한 결정권은 대신들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결정권을 가지게 된 대신들을 회유 및 협박하기 시작했고, 이중에는 학부대신 이완용도 있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을 풍자한 만평]


 이미 일본의 침략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이완용은 처음부터 이토에게 협조적으로 나섰고, 이토는 이완용을 전면에 내세워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11월 17일 이토는 조약 체결과 관련한 어전회의를 강제로 열었는데, 처음에는 참석한 8명의 대신 중 다수가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습니다(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만 찬성파). 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는 가운데 이완용은 자신을 만고의 매국노로 만드는 발언을 하여 대신들을 설득했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언제까지나 반대만 할 수는 없다. 외교권 양도 문제는 훗날 대한제국의 역량이 충실해지면 자연스레 반환될 것이며, 조약의 내용에 황실의 안전과 존엄 유지를 보장하는 내용을 추가하면 충분하다."


 결국 이토의 협박과 이완용의 설득에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토는 8명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5명의 동의를 얻어내자 "이것으로 안건은 가결되었다"라고 선언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5명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입니다(반대자 중에서 이하영은 얼마 뒤 조약 찬성파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일단 을사오적에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을사오적의 쌍판때기 얼굴.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같은 날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궁궐 내에서 고종을 협박하는 가운데 '외교권 양도'와 '통감부 설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약(을사조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고 이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정작 을사오적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에 기대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어떻게든 다른 강대국의 호의를 얻어 독립을 지켜보고자 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노력들을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5. 나라판 값으로 얻은 부귀영화


 조약 체결의 일등공신이 이완용이었던만큼 이후 이완용의 출세길은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의정대신, 의정부 참정대신을 거쳐 1907년 6월에는 일본에 의하여 구성된 내각의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서리)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좀 보였는지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 취임을 거부하려 하였지만, 이토 통감의 권유를 받고 결국 취임을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이를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하였고, 얼마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에서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정미칠적).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일본과 사법권 양도 협약을 체결하였고(기유각서), 다음해(1910년)에는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 양국의 병합을 결정하고 한일 병합조약(경술국치)에 총리대신 자격으로 직접 서명하였습니다(경술국적). 그랜드슬램 달성!!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은 조약 내용에 아예 '공로가 있는 한국인에 대한 작위와 은금(恩金) 수여'를 조항으로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백작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15만 엔(원)이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도 받았습니다(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0억~150억원 정도). 다만 그보다 많은 은사금을 받은 자들도 있었는데 바로 대한제국 황족들이었습니다(의친왕과 이재면(고종의 형)의 경우 83만 엔을 수령하였습니다).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나라가 망하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으니 당연히 전국민의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7년 그가 의병장 허위(1855-1908)의 사형을 주장하자 옛 황국협회 관계자들(허위가 황국협회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과 분노한 주민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이는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수습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이완용이 고종 폐위를 주도하자 이번에는 항일단체(동우회) 회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어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완전 잿더미가 되어 이완용은 이복동생 이윤용의 집에 한동안 피신해 있어야 했다고.


[이후 이완용은 1913년 옥인동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친일 관료들을 목표로 한 모든 암살단의 제1호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당시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은 성당 앞에서 인력거에 탑승하던 중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이재명(1887-1910)의 습격을 받고 왼쪽 폐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죽지 않은 것은 인력거꾼 박원문(1865-1909)이 이재명을 제지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외과의사들의 손에 맡겨져 치료를 받고,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관통당한 폐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이완용은 이후 남은 평생을 후유증인 천식과 폐렴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나마 쌤통 체포된 이재명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습니다.


[말년의 이완용]


 일제강점기 이완용은 친일 귀족의 대표 노릇을 하며, 건강 문제를 빼면 순탄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기도 하고,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비난하며 매일신보에 기고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으로 알려져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은사금을 잘 굴려먹었는지 그는 말년에는 137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거부(巨富)가 되었고, 차남 이항구(1881-1945) 역시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6. 죽음과 그 이후


 이재명 의사의 습격 이후 악화된 이완용의 폐병은 결국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1926년 총독부 신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이후 2월 11일 69세를 일기로 뒈졌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2월 13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유명한 비판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당하였지만 다행히 현재까지도 그 원문이 남아 있습니다.


[검열삭제 이전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


 이완용의 무덤은 생전의 그와는 딱히 관계가 별로 없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의 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그의 무덤에 대한 훼손 시도가 끊이지 않아 당국에서 순사를 보내어 따로 지켜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묘를 지켜 줄 공권력이 사라진 해방 이후 이완용의 묘는 온전할 날이 없었고,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의 주도로 그의 묘를 아예 없애고 유골은 발굴하여 화장(火葬)해버렸습니다.


[파헤쳐진 이완용 무덤]


 그의 후손들의 삶은 별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조상이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그것도 매국노의 수괴)인 마당에 후손들이 이 땅에서 얼굴 들고 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완용의 장남(이승구, 1880-1909)은 요절하였는데, 이완용이 자신의 아내(즉 이완용에게는 며느리)와 간통을 하여 부끄러움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완용의 작위를 물려받은 차남 이항구는 해방 전에 사망하였으며 이항구의 아들 중 이병길은 한국전쟁 중 실종, 이병주는 일본에 귀화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가졌던 재산(특히 토지)가 워낙 방대했다보니, 해방 후 흩어진 그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후손들의 시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돌아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1998년에는 서울 북아현동 일대 토지의 반환 소송에서 승소하여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윤형은 돌려받은 땅을 곧바로 처분하여 수십억 원을 벌었고, 이 돈을 그대로 들고 도로 캐나다로 튀어버렸다는군요. ㅡㅡ;


 그의 악명 덕에 오래도록 애먼 피해자들도 속출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이완용과 같은 우봉 이씨 출신이라 이완용의 친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실제로는 촌수로 따져 30촌을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병도 본인이 친일부역자였고, 이완용의 관짝을 구하여 불태웠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언행들이 겹쳐 있기도 합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은 이완용의 아들 중 한 명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도 간간이 욕을 먹는데, 여긴 아예 본관부터가 다릅니다(경주 이씨).


 반대로 이완용의 덕(?)을 본 경우도 있으니, 붕당 대립에 휘말려 역적이 되었던 조선시대의 많은 인물들(남인, 북인, 소론 등)이 1908년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순종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개중에는 진짜 역적이나 간신들도 있고 고종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인물도 있다보니 크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 일종의 소소한 과거사 정리를 한 것 정도로 보입니다.




7. 정리 : '똑똑한 기회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일생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한 이완용, 그의 변신을 살펴보면 그가 철저히 '강자'에게 빌붙는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 그는 대부분 고종이 협력하려는 열강 국가에 붙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고종이 미국에 협조적일 때는 친미파, 고종이 러시아와 손을 잡을 때는 친러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황제)과 노선을 함께하는 이러한 처세가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종이 기댈 곳이 없어져버린 시점에, 이완용은 고종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침략자 일본에 앞장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영화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는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고종의 뒤통수를 친 대가로 얻어낸 것은 '황실의 존재만은 남겨준다'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분명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었고,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하였으며, 정세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낼 줄 아는 식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 능력을 사회를 위해서보다 철저히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해서만 활용했고, 이러한 처세 속에서 그의 능력은 대한제국이라는 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커녕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완용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개인의 능력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양심이 결여된 자에게 지나치게 큰 능력과 권한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오히려 사회를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정부 고위층의 거대한 스캔들로 국가 전체가 뒤집어진 근래의 사태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이완용의 일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고 정당 지도부와 정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과 책무를 일개 사이비 종교인의 딸에게 넙죽 바쳐버린 참상을 보면, 저들의 재능은 도대체 사회와 역사, 심지어 그들 개인을 위해서라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역사는 '양심 없는 능력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블로거는 이분들을 감히 '이완용의 후예들'이라 칭하겠습니다]




참고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2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books.google.co.kr/books?id=PmMzC...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발췌)

http://www.hansung.ac.kr/web/hhistory/44?... (<춘생문 사건의 발생 배경과 영향에 대한 재고>, 김성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9/2009082900337.html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2018. 7. 13. 수정]



 박흥식(1900-1994)은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화신그룹의 창업자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가입니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을 통하여 일본의 백화점 체인과 대등하게 맞짱 뜨는 굴지의 대기업체였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박흥식과 조선총독부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깔려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만개한 정경유착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백화점 왕, 박흥식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박흥식]




1. 쌀집 주인에서 백화점 재벌까지


 박흥식은 1900년(호적상으로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이천 석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반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박제현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이 알려져 있고, 1916년 홧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박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지에 일가를 떠맡게 된 16세의 박흥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남포(남포)에 미곡상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흥식의 상술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박흥식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박흥식은 1920년에는 자본금 5만 원(대략 ×1만~10만 정도를 하면 현재 환율과 대강 맞는다고 합니다)으로 인쇄업을 시작했고, 이후 지물(종이)업, 학용품 등 단기간에 대단한 사업 확장을 이루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곡상은 곡물 수탈과도 연관되어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진남포를 평정(?)한 박흥식은 지금까지의 사업체를 정리한 후 1926년 경성에 레이드입성, 황금정(現 을지로2가)에 '선일지물주식회사'를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박리다매 원칙으로 경성 일대의 종이 소매상과 문구업자, 인쇄업자, 신문사 등을 끌어들였고, 때마침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확대로 교과서와 종이 수요가 급증하면서 선일지물은 불과 1년 남짓만에 경성 종이 수요의 20%를 담당하는 거대 기업체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흥강자의 등장에 기존 일본인 거상들이 적잖은 견제를 하였고,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흥식의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흥식이 주목한 것은 다양한 품목을 다루면서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미쓰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백화점 체인이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박흥식은 1931년 종로2가에 자리한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이를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화(神話)가 시작됩니다.




2. 화신백화점의 신화창조


 박흥식은 거금을 투자하여 화신상회 자리에 지상 7층의 고층건물을 지었습니다(당시에 이 정도면 한반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물). 그런데 화신백화점은 시작부터 거친 경쟁에 내몰려야 했으니, 바로 옆에 최남(역시 한국인 거상이었으며 덕원상회, 요정 국일관 등으로 유명)이 '동아백화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박흥식과 최남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의 달인이었으며, 종로 바닥에서 그야말로 불꽃 튀는 혈전이 펼쳐집니다.


 동아백화점이 개업 첫 날 매상의 1%를 빈민구제사업에 내놓자, 화신백화점은 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으며 맞섭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마케팅 전쟁이 펼쳐졌고, 경성 상업대전(?)의 승자는 결국 화신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출혈경쟁 과정에서 악재가 겹친 동아백화점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은 최남으로부터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쇼핑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화신백화점]


 이제 화신백화점은 미쓰코시-조지야에 대항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경영난과 파업에 시달리던 평양 평안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흥식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국의 잡화상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화신의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사업이었습니다.


 1934년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으로, 쇄도하는 신청자 중 300여 곳을 엄선하여 화신연쇄점 프랜차이즈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신백화점의 거래선을 활용하여 일본 등지의 수입품을 수월하게 조달받고, 고객이 상품을 고르는 견본시장과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업도 대박을 냈고, 거상 박흥식은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와 함께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흥식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35년 1월에는 화신백화점 본점의 두 건물 중 한 쪽(서관)이 큰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통하여 피해액은 거의 보전할 수 있었고, 박흥식은 오히려 서관을 더욱 큰 규모(지하1층, 지상6층)로 재건하여 1937년 11월 오픈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식당가가 있어 부유한 한국인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화신백화점 내부 구성]




3. 조선총독부와의 유착, 그리고 친일


 물론 화신백화점의 급성장은 기본적으로는 박흥식의 경영 수완으로 가능했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박흥식과 일본 지배자들과의 유착관계였습니다. 선일지물을 경영하던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35년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식산은행으로부터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고, 화신백화점 화재사건 때는 '경성 내 소방장비 부족'을 핑계로 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시 사옥으로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며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를 수습한 건 오히려 총독부였습니다. 이러한 특혜가 과연 그냥 가능했을까요? 그래도 이 무렵까지는 박흥식-총독부 사이의 유착이 직접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급속히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제 박흥식이 총독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이런저런 친일부역단체의 중역을 맡거나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주로 예술가나 언론,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것이죠. 조선의 대재벌 박흥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 바로 '자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박흥식은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이하 조선비행기)'를 설립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쩨쩨하게 전투기 값 정도 헌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당연히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적극 지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비행기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공장 부지를 접수하고, 주변 토지까지 강제수용(즉, 강탈)하여 거대한 공장을 구축하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군수공업이었으므로),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강제징용자로 채워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비행기 생산라인은 총독부의 중개로 관동군(만주 일대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비행기(내지는 화신재벌)는 그 보답으로 한반도의 생산물(직물과 해물 등)을 관동군에 헌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시작된 조선비행기는, 박흥식에게는 친일행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노다지 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조선비행기는 본격적인 비행기 생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1945년 5월 테스트 1호기가 완성되어 8월에 시험비행까지 마쳤고, 9월에는 2, 3호기를 만들어 테스트한 후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에 모두가 아시다시피......




4. 해방 이후, 흔들리는 박흥식 신화


 8·15 해방은 일본과의 유착으로 성장한 박흥식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박흥식 본인이야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3~40대의 나이에 한국 최고의 재벌이 된 박흥식은 아직 일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부터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박흥식은 군수기업이었던 조선비행기를 잽싸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장 청산자금을 횡령하거나(5천만 원 중 2천만 원), 미군정에서 주민에게 배급할 물자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수백만 원의 폭리를 취한 혐의로 1946년 기소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ㅡㅡ; 이후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였고, 1947년에는 흥한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박흥식의 친일행위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1947년에는 산하 기업인 흥한피복 노동자들이 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그 주동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쭉 살펴보면 박흥식은 해방 후에도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자신의 탈법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과 기업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매판자본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흥식 체포 뉴스. 경향신문 1949년 1월 11일자]


 어쨌든 혼란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반민족분자 청산을 목표로 특별법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박흥식은 미국행 여권을 가지고 도피하려 하지만 실패, 제1호 검거자라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체포 당시 박흥식은 "서류 정리를 위해 5분만 시간을 달라"고 체포조에 간청해놓고, 뒷문으로 몰래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ㅡㅡ;


 박흥식이 제1호 타겟이 된 것은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정황이 입수되었고, 그가 정치계에 광범위한 인맥(특히 장택상 등 경찰 쪽 인맥)을 가지고 있어 반민특위 활동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반민특위 자체가 와해당하고, 박흥식은 재판에서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같잖은 구형을 받았으며 이조차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탄 화신백화점]


 일단 단죄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흥식의 사업은 갈수록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화신백화점 전체가 불타버렸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어찌어찌 재건했지만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흥식은 본래의 화신백화점 점포를 민간에 대규모로 임대하는 한편, 1955년 백화점 맞은 편에 2층 가건물을 지어 '신신백화점'으로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 신신백화점. 딱 봐도 허접(?)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리창을 넓게 다는 등 꽤 볼만한 건물이었던 모양]


 이렇게 계속 사업이 계속되긴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으로 피폐한 한국에서 대규모의 유통업이 번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충무로 일대의 옛 일본계 백화점을 인수한 새로운 경쟁자들에게도 조금씩 밀리면서 박흥식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박흥식은 말 그대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5. 시대에 뒤처진 매판자본가의 몰락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박흥식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후 풀려났습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놈의 매판자본가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서, 화신그룹 주도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거나(이미 1930년대에 박흥식은 현재의 불광동 일대에 신도시 개발을 추진한 바 있음) 정부의 협조로 거대한 섬유공장을 짓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박흥식의 경영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박흥식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박정희는 박흥식의 1930년대 신도시 개발계획을 접한 후 한강 남쪽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계획하도록 지시했지만, 정작 박흥식이 신나게 계획안을 수립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 사업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ㅡㅡ;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유공업에 뛰어들어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한 박흥식의 도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흥식은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1966년 양주군 도농리(現 남양주시 도농동)에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때 주특기 정경유착을 활용하여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정부도 은행도 박흥식을 외면해버리자 그는 사옥까지 팔아가며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실적부진이 계속되자 박흥식은 견디지 못하고 불과 2년여만에 공장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공장은 1980년대 환경재해와 산업재해의 상징 원진레이온이 됩니다). 흥한화섬이 망할 당시 68세의 박흥식은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지만, 현실은......


 1970년에는 전기전자산업 진출을 목표로 일본의 소니(그 SONY)와 합작으로 '화신소니'를 창업하였지만, 이후 오일쇼크를 맞으며 경영부진에 빠졌고 이를 본 소니가 자본을 빼버리면서 망했습니다. 이렇게 산업계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그룹의 본가인 화신백화점은 차남 박병찬이 맡았지만 거하게 말아먹고 해외도피까지 하는 등 ㅡㅡ;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1980년 화신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화신그룹의 몰락에는 박흥식의 경영철학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통업으로 사업을 이룬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현금박치기 원칙을 고집했고, 이는 유통업 중심의 경영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자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당연하게도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의 초기투자가 필수적이라, 금융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음).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1950~70년대에는 현금은 가만 쥐고 있을수록 가치가 줄어들게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박흥식은 경영 원칙을 바꾸지 못했않았고, 이는 1960년대 이후 산업자본으로의 진출 시도가 잇따라 파탄나면서 그룹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박흥식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광신학원(광신중고등학교 재단)을 장남 박병석씨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박흥식은 일체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며, 자신이 살던 저택을 팔아치운 후 전셋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4년 9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가회동에 있었던 박흥식 자택. 그는 1931년부터 57년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광신학원 재단은 박흥식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년 전 박흥식의 동상을 학교 내에 건립하려다 각계의 비판과 반발을 맞고 철회한 바 있습니다.




6. 정리 : 그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드리운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즉,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기업가였습니다. 분명 그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통재벌을, 그것도 30대의 나이에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거대 유통자본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성과였으니, 박흥식이 당대 최고의 수완을 가진 경영자였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드리우는 분명한 그림자는, 그의 성장이 상당부분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사업 초기부터 박흥식은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사업에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박흥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자발적이든 아니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박흥식은 자신의 친일부역행위가 절대 자발적인 게 아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설령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의 사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자업자득'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형과 아버지의 일생과 대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안겨줍니다.


 박흥식이 처음으로 선보인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는,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그의 수많은 후진들에 의해 만개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적산기업 불하를 시작으로 미군정, 자유당, 군부 등 권력자들과 결탁한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개미지옥에서 승승장구하였고, 이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세계적 규모의 대재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각종 특혜를 얻었고, 나아가서는 권력 그 자체를 돈으로 좌우할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웃기게도 그 정경유착의 원조 박흥식은 정작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출세한 자들의 일반적 결함 - 자신의 성공 공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말로......라는 두 가지를 남기고 역사에서 퇴장하였던 것입니다.


 화신그룹 해체 후 화신백화점 건물은 몇몇 소유자의 손을 거쳐 한보그룹으로 넘어갔고, 종로 일대의 도로확장 계획에 백화점 부지 상당부분이 포함되자 한보그룹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옛 백화점의 모양을 살린 18층짜리 고층 건물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시작된 이후 소유권이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으로 넘어갔고, 골조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건물은 지상 33층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설계가 변경되어 완공, 현재의 종로타워가 되었습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오리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950&ganada=&pageUnit=10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67900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1437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30706463389581




[2018. 5. 23. 수정]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한 자들을 '친일파'라는 한 단어로 묶어버리지만, 실제로 친일파의 범주에 들어가는 수많은 인물들은 '일본에 부역하였다'는 공통점을 빼면 친일행위의 배경이나 사고방식, 전후의 행동과 결과에 제각기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친일행위를 그 자체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되, 친일파들 개개인의 삶을 분석하는 것 또한 병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많은 친일행위자 중 몇 명을 선정,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간단히 짚어보며 친일행위의 배경을 논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윤치호(1864-1945)입니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고 그 누구보다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안목 또한 가졌지만, 현실의 벽 앞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친일파로 전락하고 만 윤치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양면적 삶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윤치호]




1. 희대의 어학천재 윤치호


[ㅎㄷㄷ한 해평 윤씨 가계도]


 윤치호의 출신인 해평 윤씨('해평'은 경북 구미시의 지명) 가문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급성장한 신흥 명문가였습니다. 임진왜란기 인물인 윤두수(1533-1601)의 자손 중, 조선 말기부터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만 따져도 윤웅렬, 윤영렬, 윤치호, 윤치왕, 윤치소, 윤치성, 윤치영, 윤일선, 윤보선, 순정효황후 윤씨 등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지요.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조선일보 방상훈 대표의 처가도 이쪽이며(윤치호의 증손녀와 결혼), 아나운서 윤인구씨도 이 가문 출신입니다(윤치영의 손자).


 불과 3대 남짓만에 격동기 역사적 인물들이 거의 두 자릿수 단위로 쏟아져나왔다는 건 결코 범상한 일은 아닙니다. 해평 윤씨 가문의 이 수많은 인재들은 정치, 군사, 학술, 의료, 경제계 등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흥미롭게도 친일파와 항일운동가, 소극적 부역거부자가 뒤얽혀 있습니다(이를테면, 윤치소는 거부(巨富)이자 친일파였지만 그의 장남 윤보선은 항일운동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1840-1911)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유홍기(1831-?)에게 가르침을 받은 개화파 인물로, 별기군 책임자를 맡는 등 주로 무관(군인) 쪽에서 활동한 관료입니다. 김옥균 등의 동료였으나 갑신정변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아 정치적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고, 이후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대한제국 막판에 친일파로 돌아서 일본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윤웅렬은 뒷배경이 없는 것 치고는 거의 기적적인 출세를 한 인물이지만, 서얼 출신에 무관이라 일평생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장남 윤치호의 재능을 발견한 이후에는 그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고(윤치호는 서자였는데, 윤웅렬은 윤치호를 적자(嫡子)로 만들어주기 위해 나중에 그의 생모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도 하였음), 온건개화파 정치인 어윤중(1848-1896) 밑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어윤중이 정치적 거물이었으니, 인맥을 만들어주려 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1907년경 촬영한 윤웅렬 가족사진. 앞의 꼬꼬마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으로, 윤웅렬이 뒤늦게 재혼하여 낳은 자녀들]


 윤치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는데, 본래 서자였던 그는 기술교육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아버지 윤웅렬이 백방으로 손을 써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인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882년에는 아버지가 임오군란을 피해 잠시 일본에 망명하여(그가 별기군 책임자였기 때문) 윤치호와 함께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근대 교육을 받으면서, 윤치호는 기존 조선의 전통이나 성리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근대사상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과 이를 받아들여 근대화된 일본을 비교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국까의 기질이 여기서부터 한편 유학기간 중 윤치호는 김옥균의 조언으로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가 어학천재임이 이 때 드러났는데, 영어를 고작 4개월간 배우고는 대단한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부럽다


 윤치호는 1883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와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1826-1913)의 통역관으로 일하였고, 4개월 배웠다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영어 능력을 더욱 갈고닦아 진정한 영어마스터의 반열에 오릅니다. 고급 라틴어 계열 어휘라든지, 다른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ㅡㅡ;




2. 정치적 도피유학에 오르다


 잘나가던 시절도 잠시,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은 그의 가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윤웅렬과 윤치호는 모두 급진개화파 인사들과 친한 사이였지만, 정작 정변 참여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일단 둘 모두 갑신정변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정변 계획을 알고서도 입을 닫는 등 어느 쪽이라고 보기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게 됩니다. ㅡㅡ; 어쨌든 양쪽에서 줄타기를 절묘하게 한 덕에, 윤웅렬 부자는 개화파이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윤치호가 급진개화파와 친한 사이라는(실제로도 내심으로는 정변 성공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게 걸릴 수밖에 없었고, 윤치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가 고종의 허락을 받아 도피유학길에 올랐습니다(실제로 고종은 윤치호의 신변에 몇 차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를 상당히 아꼈던 듯). 윤치호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중국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 대만 둥우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습니다.


[상하이 중서서원 건물의 현재 모습. 학교 자체는 둥우대학(東吳大學)으로 개명한 후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하이가 조선과 가깝다 보니 윤치호는 유학지에서도 보수파 자객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유학이고 뭐고 정상적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떨어지자 울분에 잠겨 술과 성(性)을 탐닉하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됩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를 죽이러 간 암살자들은 윤치호가 반 폐인이 된 것을 보고 별로 위협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암살을 포기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ㅡㅡ;


 방황하던 윤치호는 종교에 귀의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의 설득에 감화된 그는 곧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활을 조금씩 고쳐가며 학업과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비참한 상태(특히 청인들의 불결한 위생관념)에 진절머리를 내고, 청과 다를 바 없던 조선을 하루빨리 근대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에모리 대학 유학시절의 윤치호. 우측은 <윤치호 일기> 자필본]


 중서서원에서 학업에 매진하던 윤치호는 1887년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후 다음 해 미국 유학에 올랐습니다(중간에 일본을 경유하면서 김옥균, 박영효와 만났는데, 윤치호는 김옥균이 사실상 정치적 폐인이 되어 여자관계에만 열중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잠깐만 당신은 상하이에서 어땠는데?).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영어와 신학 등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다시 조지아 주의 옥스퍼드 대학교와 에모리 대학교로 옮겨 공부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깊이 다지는 동시에, 그의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체험(하나는 미국의 발전한 정치와 사회, 다른 하나는 극심한 인종차별)을 하게 됩니다. 윤치호는 합리성과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를 조선이 가야 할 이상향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아시아인을 학대하는 미국인(나아가서는 백인)을 증오하며 아시아 중심의 인종주의에 경도되어갔습니다. 자신을 돕는 선교사들까지 은연중 자신을 차별하는 것을 보며, 그는 많은 상처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윤치호와 마애방, 그들의 자녀들. 1902년 촬영]


 모멸감을 견디며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이후, 윤치호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중서서원의 교수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상하이로 건너온 김옥균을 다시 만났는데, 김옥균을 돕는다는 홍종우에 대하여 "스파이일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김옥균이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ㅡㅡ;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윤치호는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첫 번째 부인과는 1885년 이혼).




3. 독립협회에서 경술국치까지


 1895년 초 윤치호는 조선으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집안 전체에 기독교를 전도하고 가문 소속 노비를 전부 해방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정부 관료로 일하며 미국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그 해 10월에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12월에 춘생문 사건(일본의 위협을 피해 고종을 궁 밖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에 간접 연루되어 미국 공사관에 피신하기도 했습니다(아버지 윤웅렬이 가담했기 때문인데, 윤웅렬은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윤치호는 막 미국에서 돌아온 필립 제이슨(서재필)을 만나 조선의 정세를 전하고, 그가 추진한 신문(독립신문) 발간 사업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다만 윤치호는 왕년의 개화파 동지 서재필이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변모하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에는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립 제이슨과 함께 일하던 윤치호는 고종의 명을 받고 민영환의 외교 순방(러시아 황제 즉위식 참석 등)에 수행원으로 동행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 앞줄 두 번째가 윤치호, 세 번째가 민영환]


 윤치호는 러시아와 유럽 각국, 베트남 등을 거쳐 1897년 귀국하였고, 직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습니다. 필립 제이슨, 개화사상가, 정부 관료들이 함께 모여 창립한 독립협회는 이 해 내부 의견충돌로 정부 관료층이 대부분 탈퇴(이들은 대체로 친러파였는데, 독립협회가 반러 성향을 보였기 때문)했고, 이후 잠시간 필립 제이슨이 회장직을 맡았다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의 개화사상가들이 운영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때 독립협회는 절정기에 올라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 등을 잇따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여기서 결의한 내용은 정부 정책에도 상당부분 반영될 수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에서 결의한 상소에 따라 '중추원'이 초기적인 의회 형태로 개편되고, 윤치호는 몇몇 정부 관직을 거쳐 중추원 의원에 선임되었습니다.


[경운궁 대안문(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수파 관료들과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고,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전제군주제를 지향하던 고종은 민권운동을 이끌던 독립협회를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결국 '황국협회'를 사주한 보수파의 폭력, 그리고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강제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는 나름 '민권운동'을 하는 자신들을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따라) 역적으로 매도하며 비난하는 다수 민중의 모습을 보며, 민중을 계몽하여 조선(대한제국)을 합리적인 근대 국가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은 민중을 계몽보다는 '개조'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스스로 근대화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 강제로라도 근대화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윤치호는 정부 관료로 평범하게 활동하였는데 주로 지방 행정직을 전전하였습니다. 강대국의 압박이 계속 심해지는 시국에 윤치호는 미국의 역할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미국 역시 한반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방관하기만 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하자 윤치호는 거리로 뛰쳐나가 체결에 서명한 관료들을 성토하였으나 당연히 소용 없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아내 마애방이 출산 중 사망하는 개인적 불행까지 겹치며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1900년대 후반에는 관료 활동과 병행하여 민족 계몽운동 쪽에서만 간간이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대한자강회라든지, 신민회라든지 하는 단체들에서 활동했고(그나마 신민회의 경우 실질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이름만 걸어놓은 것에 가깝다고도 합니다), 이와 동시에 몇몇 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신돌석 등의 의병장이 한국인의 밀고로 죽거나 체포된 것을 알고 나서는 이 민족은 답이 없다로 일관하게 됩니다. ㅡㅡ;




4. 일제강점기 초기의 행적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윤치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귀족 작위를 거부하고 낙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시 귀족 작위를 받은 아버지 윤웅렬이 1911년 사망하자, 아버지의 작위는 또 별 말 없이 물려받았습니다. ㅡㅡ; 하지만 얼마 뒤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이름만 빌려줬든 어쨌든) 신민회 주요 인사 중 하나였던 윤치호는 도리없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함께 징역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귀족 작위는 박탈됩니다.


[105인 사건 때, 압송되는 관련 인사들]


 처음에는 일본의 전향 요구를 강경하게 거부하던 그였지만, 1915년 결국 친일 전향을 선언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윤치호의 이러한 심경 변화에 대하여는 이런저런 의견이 있는데, 난생 처음 겪는 옥살이를 견디지 못했다는 설, 애초에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던 만큼 계속 일본에 저항하기는 심정적으로 어려웠으리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출옥 후 윤치호는 적극적 친일행위를 하진 않았지만, 독립운동에서도 사실상 손을 떼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여 피지배민족의 독립을 지지하였(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연히 흥분에 휩싸인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윤치호는 윌슨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저건 승전국의 식민지를 위한 발언이 아니다"라며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3·1운동 역시 그는 참여나 협력을 거부하고, 오히려 "청년들을 앞세워 사지로 밀어넣었다"며 민족대표들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래도 3·1운동 때 수많은 사람들(특히 청년들)이 참여한 데 나름대로 큰 인상을 받기는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도 그는 여기에 참여는 거부하지만, 그가 입수한 정보를 일본에 발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언론에 "조선이 자치와 독립을 얻고 싶으면 일본에게 잘 보여서 호의를 사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등, 도대체 뭐가 뭔지 알기 어려운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3·1운동 당시 사진]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체계 자체가 굉장히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희망(의 잔재), 당시의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적 현실주의, 한때 자신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일본에 대한 동경, 그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과 압도적인 힘에 대한 굴종 등, 상반되는 여러 생각들이 애매하게 뒤엉켜 있던 윤치호의 포지션은 독립운동가로도, 적극적 친일파로도 보기 어려운 애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호가 천착한 것은 실력양성과 그에 이어지는 '자치론'이었습니다. 윤치호는 교육과 사회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가망없는 짓'으로 간주하고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1920~30년대 걸쳐 아버지와 가문을 통해 받은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운동과 교육활동을 금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꾸준히 일본 당국의 회유를 받기도 했으나, 윤치호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을지언정 일본과의 적극적인 협력 역시 거부합니다. 여담으로 윤치호는 본래 여성 교육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셋째 아내(백매려, 1890-1943)와 딸들이 자신에게 비판적 언사를 일삼자 여성교육에 대한 회의론자로 돌아섰다고. ㅡㅡ;




5. 마침내 정신줄을 놓은 말년의 윤치호


 1938년 윤치호가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공갈 협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감시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 아니 그렇게 똑똑한 양반이 그런 거 하나 눈치를 못 챘나? 한편 수양동우회 ·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많은 활동가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게 되자, 윤치호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 당국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사실 사촌 윤치영(1898-1996)까지 잡혀간데다 자신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판국이었으니, 자신과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윤치호는 이후 일본의 지배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적극 친일의 세계로 조금씩 빠져들었습니다. ㅡㅡ; 1940년 창씨개명 때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결국 문중회의를 열고 대다수 의견에 따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정합니다(이 때 윤보선 혼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결성되었고, 안창호와 이광수 등이 운영을 주도하였습니다. 1937~38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해체당한 이후,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다수 회원이 친일 쪽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을 계기로 윤치호는 완전히 친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윤치호는 처음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일본의 세계정복, 혹은 미국의 승리)를 놓고 갈등하였고, 미국이 승리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그렇게 잘 맞던 그의 촉이 마지막 한 순간에 어긋났으니, 윤치호는 미국의 승리보다 일본의 승리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최종적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ㅡㅡ;


 이 때 윤치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신줄을 놓은 데 대하여, 혹자는 그가 유학시절 미국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따돌림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상술했듯 유학 시절의 상처 때문에 윤치호는 서양 세계를 '경외'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이런 시각 때문에 그 서양과 일본의 싸움을 냉정한 시각으로 볼 수 없었으리라는 것. 아무튼 윤치호가 적극적 친일파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1943년 11월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윤치호의 학도병 참가 독려 기고문]


 이후 윤치호는 각종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고, 중추원(이 때의 중추원은 총독부의 자문기관 겸 명예직으로, 고위 친일파에게 주어지는 자리) 참의직과 일본 제국의회 의원직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1945년 4월에는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확대와 처우개선(?)을 감사하는 사절단의 대표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이미 그 시점에서 일본이 쫄딱 망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있었을까요?


 그가 어떻게 생각했든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일제강점기 막판 수괴급 친일파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전민족의 A급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윤치호는 사람들의 거센 비판에 맞서 자신을 변명하였고, 속속 귀국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너희들 때문에 해방이 된 줄 아느냐?"라며 독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별다른 탄압을 받진 않았는데, 미군정의 태도(한국을 '점령지'로 간주한 것)에는 또 비판적 입장이었습니다.


[말년의 윤치호]


 물론 그가 아무리 "친일파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떠든다 한들, 30년 넘게 쌓인 사람들의 분노를 무마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친일파의 상징이 되었고, 개성의 자택이 괴한에게 공격당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의 압박과 해방 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1945년 11월 말 윤치호는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쓰러졌고 며칠 후 뇌일혈이 겹쳐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81세). 일각에서는 자살설도 있긴 한데 신빙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의 유언은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였다고 합니다. ㅡㅡ;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셀프디스? 아니면 고도의 자기변명?




6. 정리 : 그의 복잡한 삶을 도대체 어떻게 볼 것인가?


 분명 윤치호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천재이자 지식인 중 하나입니다. 그는 4개월만에 영어를 마스터한 어학천재였으며, 대다수 독립운동 세력의 낭만적 현실 인식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교육과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민족 계몽에 투신한 활동가이기도 했고, 자신의 명망과 지위, 재산을 바탕으로 안창호, 이상재 등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성과 활동력이 결국 '자포자기'로 흘러버리곤 했다는 것이 윤치호의 본질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지만,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손을 놓아버리곤 했던 것입니다. 갑신정변, 독립협회,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을 통틀어 윤치호는 그것들의 실체를 명확히 통찰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제대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상처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 또한 보였습니다. 윤치호가 미국 유학 시절 당한 온갖 차별과 폭력은 평생동안 상처가 되어 그의 사상에 그림자를 남겼고, 그는 자신이 겪은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인생 막판에 '반대 방향의 인종주의'를 선택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윤치호의 삶은 그와 동시대를 지낸 개화기 지식인 일반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끝까지 일본에 저항한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일본에 들러붙은 사람도 있으며, 항일에서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사람, 친일파에서 항일로 돌아선 사람 등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사상과 삶의 여정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화는 해야 할텐데, 정작 내부에서 그럴 동력은 없고, 관료들은 국가의 미래에 별 비전이 없고, 왕실은 교통정리를 할 능력과 의지가 없고, 시간은 없는데 외부의 압박은 갈수록 심해지고, 민중은 근대화 자체에 비협조적이었던 게 당시 한반도의 정세였습니다. 먼저 근대화된 지식인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든 합리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결국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친일파가 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소수는 아예 바다 저 멀리 떠나버리기도 했지요. 분명한 건, 그들은 분명 이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가능성을 사회를 위해 제대로 활용한 경우는 결코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윤치호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어학천재였지만 정작 그 재능을 한국의 언어를 위해서 거의 쓰지 않았고(당시 한국어 어휘가 시원찮다고, 국문으로 쓰던 일기를 영문으로 바꿔버렸을 정도), 세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으면서도 이를 단지 자신의 정신승리와 남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 넣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지식이란,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한국사료총서(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 中 <국역 윤치호 일기>




[2018. 5. 23. 수정]



7. 베트남 전쟁 : 끝없는 수렁에 빠지다


 - 베트남 개입 확대에 반대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얼떨결에 대통령에 취임한 린든 존슨(민주당)은 베트남전 확전을 결정하고, 1964년 통킹 만 사건(하노이 앞바다의 통킹 만에서 미국 함선이 공격당한 사건으로, 현재는 이 사건 자체가 조작 혹은 왜곡일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공군기지 방어를 위해 상륙한 미국 해병대]


 - 미국은 처음에는 남베트남군까지 포함한 압도적 전력차이를 가지고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고,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지는 등 처음에는 미국의 계획대로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곧 미국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특히 전쟁을 끝없는 수렁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남베트남 내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이었습니다.


 - 베트콩은 무성한 정글과 여기저기 파놓은 땅굴 등, 지리적 이점을 총동원하여 미군(과 기타 동맹군)을 괴롭혔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북베트남에서 인적, 물적 지원도 받고 있었던지라 이들을 상대하는 미군과 남베트남군, 동맹군(이하 '미군'으로 통칭)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미군은 고엽제를 대량 살포하여 정글을 초토화하고, 농촌 마을을 폭하는 등 무리수까지 두었지만 전황은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유명한 사진 <소녀의 절규>. 사진 가운데의 판티킴푹(1963-)의 마을은 미국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불탔으며, 판티킴푹은 이후 여러 차례의 대수술로 생존한 후 현재는 


 - 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었습니다. 애초에 미국과 남베트남은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 '2년 후 총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명분에 있어서 북베트남에 크게 밀리는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미국이 극도의 부정부패에 시달리던 남베트남 정부를 도와 전쟁에 개입하고, 남베트남 민중과도 적대하게 되면서 베트남의 민심은 갈수록 베트콩과 북베트남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것.


 - 부족한 명분은 미군의 전쟁 수행에 큰 제약을 가했습니다. 일단 육군은 소수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고(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정글에 만든 '호치민 루트' 또한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정치공작을 통하여 호치민 루트를 묵인하는 캄보디아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정작 혼란을 틈타 공산주의 반군(크메르 루주)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이 더 꼬여버렸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1975년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한 후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 이 때 남베트남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쿠데타가 횡행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고, 대규모 징병을 통해 겉으로는 100만 대군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 속은 시커멓게 썩어 있었습니다. 미국이 지원한 무기들을 남베트남의 장교들은 뒤에서 몰래 팔아먹었고, 나중에는 이러한 무기를 베트콩이 사들였기 때문에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이 사이좋게(?) 미국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촌극까지 벌어졌습니다. ㅡㅡ;




8. 미국의 GG선언, 모래성처럼 무너진 남베트남


 - 더 무너질 것조차 없던 남베트남군은 그렇다 치고, 명분 없는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 역시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탈영이나 군무이탈 같은 문제는 일도 아니었고, 곳곳에서 병사가 상관을 공격(하극상)하는 사건이 빈발하였습니다. 오죽하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프래깅(본 의미는 수류탄을 터뜨려 사고사로 위장한 상관 살해. 흔히 상관 살해를 통칭하는 말로 쓰임)'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


 - 그래도 미국은 대외적(특히 미국 내부적)으로는 자신들이 곧 승리하고 전쟁이 끝날 것이라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선전을 무력화하고, 결국 전쟁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태가 터지니 바로 1968년 초의 '테트(설날) 공세'였습니다. 본래 베트남도 나름 중국문화권이기 때문에 설날을 명절로 치르고,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도 설날(베트남어로 '테트') 전후에는 (남베트남군 한정으로) 암묵적 휴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테트 공세 때, 공격을 개시하는 베트콩 부대]


 -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테트 시기의 풀어진 분위기를 역이용하여, 남베트남 전역의 주요 도시에 베트콩 부대를 침투시켜 대공세를 가하기로 계획합니다. 1968년 1월 30일 새벽, 명절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 침투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남베트남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길게는 일주일 이상 치열한 전투가 계속됩니다. 하지만 원래 예정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이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베트콩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섬멸당하고 말았습니다.


 - 이 공세를 통하여 남베트남의 베트콩 세력이 사실상 일망타진되었으니, 전술적으로는 북베트남의 완패였습니다. 하지만 구정 공세는 북베트남이 건재함을 세계, 특히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고, 참혹한 전투가 TV 등을 통하여 그대로 미국인들에게 전해지면서 미국 내 반전여론이 대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베트콩 부대원이 남베트남군 장교에게 즉결처형당하는 사진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반전여론에 더욱 불을 지폈습니다.


[문제의 그 사진. 왼쪽은 사이공 경찰서장 응우옌응옥루안(1930-1998), 오른쪽은 베트콩 암살부대 소대장 응우옌반럼]


 - 결국 베트남 전쟁 확전을 주도한 존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를 낙선도 아니고 불출마(첫 번째 후보 경선에서 탈탈 털리고 GG)하게 되었고, 본선에서도 '베트남 개입 중단'을 내건 리처드 닉슨(공화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닉슨은 1969년부터 베트남 파병군의 단계적 철군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후의 전쟁은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버티기'에 불과했고, 1973년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 휴전을 약속하고 완전 철군하였습니다(대한민국 국군도 이 때 함께 철군).


 - 이후의 남베트남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사라지자마자 휴전 약속에 "ㅗ"를 날리고 총공세를 시작, 남베트남군은 미국에게서 무기 지원은 받았지만 탄약 등 물자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ㅡㅡ; 지리멸렬을 거듭하였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전황이 결정적으로 악화되자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야반도주, 이 와중에도 쿠데타는 계속되었고, 최후의 순간에 다시 대통령직에 오른 즈엉반민은 북베트남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결국 남베트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사이공 대통령궁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베트남군 전차]




9. 결론 :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 남베트남의 패망 자체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한국 역시 분단 상태이기 때문이겠죠. 오랫동안 한국 정부에서는, 남베트남의 패망을 두고 "전국민이 일치단결하고 반공정신으로 무장하여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으면 남베트남처럼 패망한다"라고 프로파간다를 하였고, 이는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훌륭한(?)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블로거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남베트남이 패망한 것은 남베트남 국민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남베트남 권력자들의 잘못입니까? 남베트남의 다수 민중이 베트콩 게릴라를 지지했던 것은 남베트남 정부가 너무나도 썩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국이 전쟁으로 황폐화되는 때에 권력층은 내부에서 권력투쟁에만 몰두했고, 결국 미국까지 등에 업고도 사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블로거는 농지개혁법이야말로 이승만 최대의 업적이라 감히 단언합니다.]


 - 남베트남의 사례는 오히려 '남한은 왜 북한에 패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좋은 반례이기도 합니다. 남한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농지개혁을 비교적 성공적(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토지를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한 것' 자체가 충분히 성공)으로 수행하였고, 새로 토지를 갖게 된 대다수 농민들은 남한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북한과 싸웠던 것. 국민의 '일치단결'이 중요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열쇠는 오히려 권력 스스로가 쥐고 있는 셈입니다.


 - 블로거는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한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민주적이지도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도 않는,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은 반드시 패망합니다. 일치단결을 핑계로 국민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이것을 경청하는 민주적인 권력이야말로 건강하게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을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ravel.tourism.vn:808/main/publish/view.jsp?menuID=002001002017&type=P (베트남 독립운동)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c1963&logNo=220521897627 (응오딘지엠)

http://gesomoon.com/Ver2/board/view.php?tableName=comm_discuss&bIdx=408793 (틱광둑 소신공양과 쩐레수언)

http://ppss.kr/archives/22141 (베트남 전쟁 관련)


4. 건국해놓고 보니 개판


 - 응오딘지엠이 성공적으로 권좌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남베트남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계속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정권이 바뀌었다보니, 내부적으로 수많은 정치적 파벌(작게는 학연, 지연으로부터 크게는 왕당파도 있는 등등)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응오딘지엠은 이러한 혼란상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족과 측근세력을 정부 요직에 대거 앉혔습니다.


 - 그런데 이래놓고 보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응오딘지엠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고, 새로 등용한 친척이나 측근들도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겁니다(당시 베트남의 기득권인 지주 계층은 프랑스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많았음). 이건 그냥 봐도 문제인데, 하필 베트남이 불교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게 문제를 더 키워버렸습니다. 당시 남베트남의 불교 신자는 전국민의 90%를 넘었습니다.


[호치민(사이공) 노트르담 성당]


 - 이렇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독재와 부정부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민중이 원하던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반대 속에 흐지부지되었고, 이승만이 이거 하나는 정말 잘 한 겁니다...... 나름 미국의 지원이 상당히 많았지만 이것이 대다수의 민중에게 제대로 분배될 턱이 없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남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막대한 토지와 이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도강 중인 베트콩 부대]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 내의 베트민 지지세력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을 형성하여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은 착취와 부정부패에 지칠 대로 지친 다수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베트남 정부를 끊임 없이 괴롭혔습니다. 이런 썩은 국가의 군대도 제정신이 박혀있을 리 없어서, 남베트남군은 무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반정부 게릴라 하나 제대로 상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5. 틱광둑의 소신공양과 쩐레수언의 패드립


 - 이런 지옥도가 몇 년 이상 흐르면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국내 각계 각층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 성향 정부 하에서 불교기(旗) 게양조차 금지당할 정도의 탄압과 차별을 당해온 불교계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당연히 정부는 수십 명의 사망자까지 내며 강경진압을 일삼았습니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장면(칼라를 첨가한 흑백사진). 잔인한 장면일 수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의 저명한 고승 틱광둑(1897-1963)이 소신공양(분신)을 감행하며 남베트남의 참상이 전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1963년 6월 11일, 승려들의 침묵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틱광둑은 다른 승려들의 협조로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하였습니다. 이는 사진과 영상을 통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세계인은 '반공의 선봉장'이 아니라 '독재와 부패의 지옥'을 목도하였습니다.


[쩐레수언]


 - 물론 응오딘지엠 정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며, 특히 응오딘지엠의 제수(동생 응오딘뉴의 아내. 통칭 '마담 뉴')이며 부정부패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쩐레수언(1924-2011)이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붓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도 과격한 언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쩐레수언은,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에 남을 패드립을 시전하였습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불교 지도자들이 한 게 대체 뭐가 있나요? 그들이 한 거라곤 승려 한 명을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실제로 한 말





 - 이 발언은 남베트남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분노를 당연히 샀고, 어떻게든 응오딘지엠을 밀어주려 했던 미국은 마지막 인내심마저 접고 응오딘지엠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6. 대 쿠데타 시대가 열리다


 - 몇 달 지나지 않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군의 즈엉반민(1916-2001) 장군은 미국의 묵인 하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미국으로 망명시킬 계획이었지만, 정작 응오딘지엠 본인은 망명을 거부하고 대통령궁에서 동생 응오딘뉴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정작 패드립의 주인공 쩐레수언은 유유히 미국으로 도망).


 - 이것으로 남베트남의 혼란이 종식......될 리가 있나. 이때부터 남베트남은 허구헌날 벌어지는 쿠데타로 더욱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쿠데타의 주역 즈엉반민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동료 응우옌칸(1927-2013)의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가,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가 그나마 좀 오래 집권했다가, 베트남 전쟁 막판에 다시 쿠데타로 쫓겨나고...... 웃기게도 이 혼란상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은 첫 쿠데타를 일으킨 즈엉반민이었습니다. ㅡㅡ;


[그나마 오랫동안 권력을 지킨 응우옌반티에우]


 - 이렇게 쿠데타가 빈발하던 시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는 게 이 상황의 막장성을 더합니다. 미국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시작하였고, 남베트남군에도 많은 지원을 퍼주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라고 준 거였는데, 남베트남군은 전쟁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쿠데타를 일으키기 바빴으니 제대로 전쟁 수행이 될 턱이 없었습니다. ㅡㅡ;


 - 그나마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대부분 응우옌반티에우 집권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응우옌반티에우 역시 별로 유능한 인물은 되지 못했고, 지속되는 부정부패와 남베트남군의 거듭된 삽질을 어떻게 개선하지는 못했습니다. 전쟁 막판에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글쎄요 그들이 딱히 누굴 욕할 처지가...... (계속)



1. 배경 : 식민지 베트남과 독립운동

 - 베트남은 1857년부터 정확히 30년에 걸쳐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후 기존 왕조(응우옌(阮) 왕조)는 '존속'은 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가 전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한 방에 날아간 이후, 사실상 관리 불능 상태가 된 인도차이나 반도를 낼름 집어먹은 건 다름아닌 일본 제국.

[사이공에 입성하는 일본군]


 - 일본은 처음에는 군대 주둔과 관련 시설 이용권 확보에서 시작하여 1945년 3월에는 프랑스 총독부를 완전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명목상' 황제인 응우옌푹티엔(바오다이保大, 1913-1997)을 역시 '명목상' 황제로 앉혀 베트남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국 동남아시아판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대규모 식량 수탈을 자행했고, 여기에 연합군 공격으로 인한 교통난까지 겹쳐 1945년 초에는 200만여 명이 굶어죽는 대기근까지 발생했습니다.

 - 당연히 프랑스 식민 시기에도, 일본 식민 시기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존의 식민제국 프랑스가 일본에게 굴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은 사기탱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호찌민(1890-1969) 이 주도하는 베트남독립동맹회(베트민(월맹))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일본과 프랑스의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확장한 베트은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무섭게 전국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 하지만 해방도 잠시, 중국(중화민국)군과 프랑스군(프랑스군 진주 이전에는 영국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베트남에 들어왔습니다. 일단 베트민, 중국, 프랑스는 1946년 초 베트남 독립 문제에 관해 합의를 보았으나, 여기에 대한 의견차이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재개되면서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됩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당연하게도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프랑스가 압도적이었는데, 여기에 대항하여 베트민은 철저히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며 농촌과 지방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민에 의해 쫓겨나 외국으로 도망친 바오다이를 다시 불러와, 남부 최대도시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부를 만들었습니다. 

 - 그런데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공세력의 맹주로 떠오른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도 사회주의 세력의 손에 떨어진 마당에, 사회주의 성향의 베트민이 베트남을 장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이에 사회주의권의 소련-중국은 베트민을 지원하여, 전쟁은 점차 국제전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프랑스군은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1953년 들어 베트민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진격할 태세였습니다. 이에 프랑스군은 라오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거점을 건설하고, 이곳에서 베트민군과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디엔비엔푸는 험준한 산악지대 가운데 분지 지형이었기 때문에, 베트민군이 들어올 길이 제한되었습니다(라고 프랑스군은 생각했습니다).

[디엔비엔푸의 대략적 위치]


 - 이는 육상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데다 산악지대를 베트민군이 확보하면 프랑스군이 그대로 포위되는 위험한 전략이었지만, 주변 지형이 워낙 험준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응우옌잡(1911-2013)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대포 등의 중화기를 부품 단위로 분해, 인력과 자전거 등을 이용하여 산 위까지 실어날라 다시 조립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근성을 선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 산 위에서의 포격에 물자수송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하필 그 산은 정글이 우거진 곳이기까지 해서 공습으로 베트민군을 쫓아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비행장까지 점령당하자 프랑스군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1만 6천 명 중 1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항복했습니다. 베트민군은 포로를 상당히 가혹하게 대우해서, 최종적으로 풀려난 프랑스군 포로는 3천여 명에 불과했다는군요(다만 베트민에서는 프랑스군의 베트남인 학살을 들먹이며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디엔비엔푸에 입성하는 보응우옌잡]


 - 결국 북부는 완전히 베트민의 손에 들어왔고, 프랑스군은 GG를 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1954년 제네바 합의(한국전쟁 정전 문제가 논의된 그 회의)에서 프랑스군 완전 철수, 2년간 한시적 정전선 설정 이후 1956년 총선거로 통일정부 수립 등의 내용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사라진 무대에,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3. 남북분단과 베트남 공화국 건립

 - 일단 2년 후 총선거가 실시되면 베트민이 정권을 잡을 것은 거의 확실했고, 이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나리오였습니다. 정전선으로 결정된 북위 17도 이남에는 일단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이 (미국의 후원 하에) 다시 들어섰고, 베트남국과 미국은 합의 내용 중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응오딘지엠]


 - 다만 바오다이는 사실상 바지황제(?)였고, 미국이 밀어준 실세는 총리에 임명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1901-1963)이었습니다. 응오딘지엠은 이전에도 바오다이 정부의 각료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항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본 패전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미국 등지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총리 응오딘지엠은 1년 후인 1955년, 국민투표를 주도하여 바오다이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 자세히 보면 뭔가 냄새가 나지요? 실제로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적극 밀어주었고, 그의 '선거 쿠데타'와 대통령 취임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바오다이 정부가 자신들의 목적(동남아시아 공산화 저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우익 성향 인사이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커리어를 많이 쌓은(항일운동 등) 응오딘지엠에게 권좌를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국민투표에 참여하는 응오딘지엠]


 - 여기까지는 미국의 의도대로, 나름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베트남 공화국(이하 남베트남)이 수립되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공화국 또한 남북 총선거를 거부하였고(아무리 그래도 총선거를 하면 남쪽이 이기기 어려우므로), 베트남의 남북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남베트남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였고 다른 하나는 응오딘지엠의 '종교'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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