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 전쟁의 장기화


 - 1937년 말 일본군의 대규모 상륙전으로 상하이가 함락되고 난징이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의 중국 국민정부는 긴급 회의를 열고 행정부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와 군사령부는 우한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도 나름 '수도'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난징에는 탕셩즈가 남아 방어작전을 총괄하였지만 그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막판에 우한으로 도망쳐오고 말았습니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앞의 글 참조)


 - 우한(우창, 한양, 한커우 시가 1927년 통합)은 양쯔강 중하류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자 군수산업의 중심지로,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중국 정부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면서도 군사 부문은 우한에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3개월이면 충분하다던 호언장담이 잘못임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최대 요충지인 우한을 점령하면 중국에게 결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한커우 지역을 향하여 진격하는 일본군 전차부대]


 - 결국 1938년 4월 1일부로 일본은 본국과 식민지에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병력을 추가 편성하여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일본군은 40만 가까운 대병력을 우한 공략에 투입했고, 히로히토 덴노는 독가스의 사용을 허가하였습니다. 이런데도 히로히토가 전범이 아니라고? 결국 버티지 못한 중국군은 10월 17일 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철수했고, 10월 27일 우한의 세 지역은 모두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특이하게도 여기서는 일본군 특유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데 실패하면서 일본군의 계획은 또다시 어긋났습니다. 1938년 11월 장제스는 전쟁의 첫 단계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징병령을 발동하고 각지 군벌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등 장기항전 태세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예상보다 훨씬 굳건하게 버티었고, 이 시점에서 일본은 완전히 수렁에 빠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2.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


 - 이미 전쟁을 중지하기에도 너무 멀리 가버린 일본은, 중국군과 중국 민중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먹여 전반적인 사기를 꺾고자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중국 임시수도인 충칭에 화력을 집중하였는데, 우한이 점령되기도 한참 전인 1938년 2월부터 이미 일본군 폭격기는 충칭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1939년 초까지 약 1년간은 별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 충칭은 1년 내내 안개가 심하고, 특히 겨울에는 구름이 끼는 날이 많아 폭격기의 공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1939년 봄 들어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충칭 시가지는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1939년 5월 3~4일에 걸쳐 일본군이 충칭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는데, 하필 이 날 월식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힐 겸 월식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일본군의 폭탄을 몸으로 받아냈고, 사망자만 수천 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 충칭은 그 당시 이미 대도시이긴 했지만,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는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기 때문에 방어태세 역시 부실했습니다. 사람들은 폭격을 피하여 열악한 환경의 방공호로 대피했고 일부 시민은 난징에서처럼 외국 공사관으로 몰려들었는데, 영국 대사관은 무차별 폭격에 함께 휘말렸고 독일 대사관은 피난민에게 문조차 열어주지 않아 수백 명이 몰려드는 인파에 깔려 압사하거나 폭격에 휘말려 타죽었습니다.


[일본군의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충칭 시가지]


 - 일본군의 폭격은 대부분 민간시설과 민간인 거주구역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는 민간인들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전쟁 수행 의지를 감소시켜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 폭격에 포함된 소이탄(인화성 물질을 잔뜩 포함하여, 화재를 일으켜 피해를 주는 형태의 폭탄)은 충칭 시가지 곳곳에 화재를 일으켜 막심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때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건물들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져 있었으므로......


 -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창사 일대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일본군이 독가스를 살포하는 등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을 쳤음에도(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대규모로 사용한 건 일본군이 사실상 유일) 결국 창사를 점령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육지에서의 진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와 함께 충칭을 향한 일본군 폭격기의 공습은 한층 더 격렬해졌습니다.


 - 1941년 6월 5일에는 충칭 대공습에서 중요하게 기억되는 또 하나의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날 5시간에 걸쳐 일본군 폭격기 24대가 공격을 벌였는데, 이를 피해 18제대터널(방공호)로 피신한 다수의 민간인은 터널 입구가 폐쇄된 이후 통풍이 되지 않으면서 대부분 산소부족으로 질식사하고 말았습니다(6·5 대터널 참변). 당시 희생자는 1200명, 최대 4000여 명에 달합니다.




3. 그래도 저항은 계속된다


 - 많은 사람들이 폭탄에 맞아죽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압사하고, 소이탄 화재에 타죽거나 질식사하였습니다. 이는 권력이나 돈이 있는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250여 명의 부자들이 충칭 중국은행 지하실에 피신했다가 건물의 붕괴로 모두 압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옷과 소지품은 역시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은 생존자들이 가져다가 써야 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충칭 대공습을 상징하는 사진. 죽은 사람들의 옷은 생존자들이 벗겨 가져갔다.]


 -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폭격이 끝난 이후에는 식당들이 '공후반(공습 후 식사)'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재개했으며, 은행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많은 상점들에서는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가 그려진 계란을 팔았는데, 여기에는 '도쿄 직송 계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 폭격이 시작되면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도시 내의 모든 차량이 징발되었는데, 이 중에는 최고 권력자 장제스의 개인 리무진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폭격과 누적되는 피해에도 중국 정부와 군은 점차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해갔고, 대공 방어체계와 방공호 확충이 이루어지며 희생자는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이에 힘입어 충칭 시의 인구는 다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모여든 충칭 시민]


 - 충칭에 대한 폭격은 1943년 8월 23일까지 약 5년여간 이어졌으며, 이는 단일 지역에 대한 최장기간 공습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11889명,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1만여 채의 가옥이 무너지거나 불타 사라졌습니다. 5년간 일본군의 공습은 218차례 이어졌고 연 9513대의 폭격기가 21593발 가량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4. 폭격 이후


 - 충칭 대공습은 소이탄이 대규모로 사용된 사실상 첫 사례로, 이미 소이탄 자체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개발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도시 공격에 특출난 위력을 보인다는 사실이 이 때 증명됩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교훈은 일본의 적국(敵國)도 똑같이 얻었고, 미국은 이 교훈을 바탕으로 1945년 일본의 도쿄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 난징 대학살 때만 해도 (심지어 자신들의 군함이 공격당했음에도) 일본에 대한 개입을 자제해온 미국은, 1939년 5월의 대폭격 이후 방침을 바꾸어 비행기 부품 수출금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제재에 들어갔습니다. 양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로를 가상적국으로 간주해 왔고, 일본은 미국의 경제제재가 점차 강력해지자 이를 핑계로 1941년 12월 하와이를 급습하며 태평양전쟁의 문을 활짝 열었고,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의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유족의 시위. 충칭 고급인민법원 앞]


 - 당시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2004년부터 소송단을 꾸려 일본정부에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첫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후 다른 지역의 폭격 피해자들도 합세하였습니다. 2015년 2월 도쿄지방법원은 "이 사건에서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당연하게도 원고의 소송을 기각하였습니다. 기사보기



1. 배경 : 일본군의 허난성 침입


 - 중일전쟁의 시작점인 베이핑(베이징)-톈진 방어선은 1937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9월부터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허난성 최북단 안양을 점령하며 허난성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북 방면 총사령관은 군벌 출신 펑위샹(1882-1948)이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4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군벌들의 집합체인 오합지졸에 가까웠기 때문에 3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주력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허난성의 위치]


 - 한푸쥐(1890-1938), 쑹저위안(1885-1940) 등 휘하 군벌들이 잇따라 도망치는 등 졸전 끝에 산둥성 대부분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장제스는 펑위샹을 해임하고 한푸쥐 등 적전도주와 부정부패를 일삼은 군벌들을 싸그리 체포하여 처형하는 강수를 두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황하 북쪽을 대부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보급선을 단절하기 위해, 간선철도의 교차지점인 정저우(허난성)와 쉬저우(장쑤성)를 다음 목표로 잡았습니다.


 - 일본군은 먼저 쉬저우로 진격하였지만, 쉬저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타이얼좡(산둥성 최남단)에서 1938년 3~4월에 걸쳐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고 후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타이얼좡 전투). 흐름을 꺾인 일본군은 이 쪽을 담당한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을 왕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1887-1990)로 교체하였고, 그의 지휘하에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장제스는 쉬저우 일대의 병력에 체계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고, 후퇴하는 중국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 일본군의 작전은 지휘관들이 공적을 놓고 갈등하느라 협조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중국군이 철수한 쉬저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1938년 5월 19일).


 - 한편 정저우 방면으로 진격한 일본군 제14사단은 정저우의 길목이자 과거 북송의 수도이기도 한 카이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중국군에 포위당했고, 인근 제16사단의 지원을 받고서야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제14, 제16사단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카이펑을 다시 공격, 6월 6일 카이펑을 함락시켰습니다. 카이펑을 넘어 정저우로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 위해, 장제스는 인근의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수공(水攻)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2. 대재앙으로 번진 수공


 - 국민혁명군 제53군 1단은 정저우 인근 화위안커우(花園口)의 황하 제방을 파괴하는 작업을 벌여, 6월 9일 제방 일부를 터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황하는 천정천(주변 땅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천)이기 때문에, 뚫린 제방을 넘어선 강물은 걷잡을 수 없이 주변 평야지대로 쏟아집니다. 황하의 물살은 정저우에서 카이펑에 이르는 지역을 침수시켰고, 이 곳에 있던 일본군 제14, 제16사단은 차오르는 홍수에 그대로 휩쓸렸습니다.


[홍수에 휩쓸린 일본군 전차부대]


 - 장제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은 대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6월 10일 황하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불어난 물 때문에 제방 붕괴가 확대되면서,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양의 강물이 평야지대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수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허난성 동부는 물론이고 동남쪽의 안후이성, 장쑤성으로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수천 km에 달하는 평야지대에서 넘치는 물을 막을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 중국은 애초에 작전지역인 화위안커우 인근 지역에만 홍수경보를 내리고, 나머지 지역에는 아무 경보도 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수많은 주민들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물벼락에 그대로 휩쓸려 죽어갔습니다. 이 홍수로 사망자만 최소 9만, 최대 89만 명이 발생하였으며 이재민은 12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은 남쪽으로 바뀌어, 회하와 양쯔강 하구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1947년 제방 복구와 함께 원상복귀).


 -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허난성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피해복구는 꿈도 꾸지 못했고, 이는 4년 후 벌어지는 훨씬 더 큰 재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3. 대기근, 지옥도가 열리다


 - 전쟁과 홍수 피해가 누적되어 허난성 일대의 경지면적은 이전의 1/3 가까이로 줄어든 상태였지만, 전쟁과 부정부패, 행정력 미비라는 복합적인 문제가 피해복구를 계속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1942년 봄부터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정도의 가뭄이 시작되고, 가뜩이나 피폐할대로 피폐한 이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 농민들은 봄과 여름 내내 하늘만 쳐다보았지만 비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빗방울 대신 가을 하늘을 채운 것은 다름아닌 메뚜기떼.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을 메뚜기떼가 죄다 쓸어가면서 허난성은 생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산나물과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고, 산나물이 사라지자 나무껍질을 벗겨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가족]


 - 사람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찾기 시작했고, 기러기 똥이 절찬리에 식용으로 쓰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소화가 덜 된 곡식 종자가 있어 그나마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고). 혹은 땅을 파서 관음토(일종의 백색토)를 파먹기도 했는데, 당장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당연히 열량도 없고 소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흙을 계속 먹는 사람들은 소화기에 장애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이런 참상 속에서 도대체 중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나름 20세기 중반인데, 중국 정부가 이 지역을 구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허난성 주민에 대한 지원을 가로막았습니다. 허난성 정부의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기 바빴고, 상부의 추궁을 피하고자 피해상황을 무시하거나 축소 보고하였습니다.


 - 쉬창(허창) 지역의 경우 5만여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였다고 성 정부에 보고하였는데, 이조차 축소 의혹이 있었음에도 성에서는 "왜 이렇게 많이 보고하였는가"를 이유로 보고서를 반려해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마당에 제대로 된 구휼체계가 돌아갔을 턱이 없습니다. 당시 허난성 일대를 취재한 후 장제스를 만난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화이트(1915-1986)가 허난성의 참상을 전했을 때, 장제스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 그나마 지원되는 부족한 식량마저도, 태반은 부패한 관료들이나 군벌의 손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인육(人肉)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길거리에 널린 시체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죽여서 그 고기를 뜯어먹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극도의 굶주림에 피폐해진 위장은 갑자기 들어오는 고기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게 인육을 뜯어먹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급성 소화질환으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 가뭄은 1943년 초까지 계속되었고, 그 사이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최대 300만 명에 달했습니다.



4. 결말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트라우마


 - 장제스와 중국 정부는 기근의 실태를 파악하고서도, 중일전쟁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한 보도통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정부의 선전 기사 사이에 허난성 재해의 실태를 짧게 보도한 충칭의 지역 신문 <대공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한 사례가 있습니다(그리고 화이트는 이 기사를 목격한 후 허난성 취재를 시작했다고).


 - 자신들의 죽음을 외면한 정부와 군부에 대한 허난성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급기야 1944년 중탸오산 전투에서는 허난성의 농민들이 후퇴하는 중국군 5만 명을 습격하여 무장해제시키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군사령관 탕언보(1900-1954)는 이들을 일제 앞잡이 혹은 반역자로 규정했지만, 그렇게까지 된 사연을 돌이켜보면......


 - 이러한 일련의 실정(失政)으로 장제스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 공산당이었습니다. 비록 중일전쟁 발발 이후 힘을 합쳤다지만(제2차 국공합작) 실질적인 연계는 거의 되지 않았고,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동시에 농민들의 민심을 얻는 대민전략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수탈에 절망한 농민들은 앞다투어 공산당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민심을 완전히 잃은 국민당은 신식 무기를 들고도 공산당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제스는 민중을 외면한 대가를 '중국 대륙의 상실'로 뼈저리게 치렀던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친 이후 강력한 부정부패 처벌과 경제개발그리고 극악의 1인독재을 통하여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고자 하였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대륙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엎질러진 물.


 - 예전 수천년간 중국의 중심이었던 허난성 일대는,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를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채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일전쟁기 덧씌워진 반역자의 이미지,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일하는 허난 출신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겹쳐 중국 내에서는 허난 출신자들에 대한 심한 지역차별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현대 중국의 큰 사회문제 중 하나라고 합니다.



1. 배경 1 : 상하이 전투


 - 1937년 7월 일본군의 한 병사가 똥 싸느라 늦은 것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중일전쟁은, 8월 초까지만 해도 베이핑(베이징)-톈진 등 북동부 지역에 한정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호구이며 우리는 3개월 내에 중국 전체를 털어먹을 수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에 빠져있던 일본군 지도부는, 중국의 수도를 직격할 심산으로 난징(당시 중국의 수도) 코 앞 상하이에 대규모로 상륙하였습니다(상하이 전투, 혹은 제2차 상하이 사변).


 - 하지만 중화민국 지도자 장제스는 상하이를 사수하고자 독일식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를 대규모로 상하이에 때려박았습니다. 또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륙을 시도한 우쑹 해변에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1878-1966)과 한스 폰 젝트(1866-1936) 등의 조언에 따라 건설한 강력한 방어시설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결사항전에 고전을 거듭했고, 중국 대륙을 정복하겠다던 3개월이 되도록 상하이 하나 점령 못하는 촌극을 연출합니다.


[상하이 전투에서 활약한 중국군 방어진지]


 - 결국 일본군은 교착상태를 끝장내고자 파견 병력을 3배(10만)으로 늘렸고, 이에 대항하여 장제스는 화중-화남 지방의 거의 전병력(80만)을 상하이에 집결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좁은 공간에 쏟아부은 게 오히려 패착이 되어, 중국군은 10만을 훨씬 넘는 사상자를 냈고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장제스는 10월 26일 전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 중국군은 3개월간 일본군을 저지하고 큰 피해를 강요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방어라인은 무너졌고 독일식 정예병력도 절반 이상 날려먹는 등 방어력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상하이와 인접한 난징을 방어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별 의미도 없다고 판단한 중국 정부는 내륙의 충칭으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 이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끝까지 남아 난징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군사참의원장 탕셩즈(1889-1970)였습니다.



2. 배경 2 : 난징 전투와 적전도주


[탕셩즈]


 - 중국 정부는 11월 15일 충칭으로 피난하였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탕셩즈는 난징지구 사령관이 되어 남았습니다. 당시 난징은 정부와 함께 피난하려는 난징 시민들과,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도망쳐온 외부 주민들이 뒤엉켜 온통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하이에서의 고전으로 광기분기탱천한 일본군은 11월 들어 상하이와 난징 주변의 지역들을 공격하여 말 그대로 '싹쓸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나마 방어병력이 있는 난징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 11월 19일 쑤저우에서 학살이 발생하여 35만 인구가 5백 명으로 줄어드는 등, 이미 대학살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탕셩즈와 방어군은 일본군의 학살을 피해 몰려든 피난민들까지 지켜야 했지만, 정부가 피난하고 남은 것은 패잔병 수준의 15만 병력과 형편없이 저질인 지휘관들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탕셩즈는 방어병력을 난징 성(城)에 집중시키고 도시 밖으로 이어진 교량과 선박도 파괴하는 등, 고립을 자초하는 뻘짓을 벌였습니다.


 - 지나친 확전을 경계한 대본영의 명령까지 씹어먹은 일본군은 외곽의 방어라인을 쓸어버린 후 난징을 포위하고 방어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날렸는데, 탕셩즈는 이에 "ㅗ"로 화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탕셩즈는 덜컥 겁을 먹었는지 장제스에게 전갈을 보내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장제스가 탕셩즈에게 "ㅗ"를 날려버렸습니다. ㅡㅡ;


 - 일본군의 최후통첩 기한인 12월 10일 오전이 지나자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성곽을 방패삼아 싸우는 중국군은 10만 일본군의 공세를 이틀간 잘 막아냈지만, 12일 오후 일본군이 성문 한 곳을 폭파하는 데 성공하고 독가스까지 사용하면서 중국군을 무력화시켜 최후 방어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난입하는 일본군과 방어하는 중국군의 시가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과 함께 양쯔강을 건너 도망쳐 버렸습니다.


 - 사령관이 사라진 중국군은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15만 명 중 2만 명만 난징을 탈출,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일본군에 잡혀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13일 오전 4시 정부청사 함락을 끝으로 난징은 완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 그리고 난징 시내에 남겨진 50만 명 이상의 패잔병, 시민과 피난민들에게는, 지금부터가 본격 인세지옥(人世地獄)의 시작이었습니다.



3. 대학살과 '국제안전지대'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 그동안 광기와 살기를 풀파워로 충전한 일본군은 약 6주에 걸쳐 난징에서 피의 폭풍을 일으켰습니다(자세한 학살 내용은 다른 곳에도 많고 너무 잔인하니 이곳에는 가급적 올리지 않기로). 강간이나 총살은 기본이고, 사무라이 전통을 이어온 일본군답게(?) 그들은 전도(戰刀)로 민간인과 포로를 마구 베어제꼈는데 심지어 이를 스포츠 혹은 총검술 훈련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학살에 참여한 한 군인의 일기에는 "심심하던 차에 중국인을 죽여 무료함을 달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 당시 난징의 일본군, 아니 일본 전체가 얼마나 미친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100인 참수 경쟁이었는데, 두 명의 일본군 초급장교가 '누가 더 빨리 중국인의 목을 베는가'를 주제로 시합을 벌였고 언론은 이를 중계하여 신문으로 보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 죽이기로 시합을 벌인 놈들도 미친 놈들이거니와, 이를 자랑스럽게 자국 언론에 중계했다는 것으로 당시 일본 사회 전체가 얼마나 미쳐돌아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신문기사. "100인 참수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 거기에 연장전]


 - 물론 당시 난징에는 외국인도 다수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구역에 최대한 많은 중국인을 받아들여 학살의 희생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노력의 중심에는 독일 나치 당원이자 지멘스 중국지부에서 근무하던 욘 라베(1882-1950)가 있었는데, 라베는 자신의 나치 당적(나치 독일은 당시 일본의 동맹이었으므로)을 내세워 자기 집과 그 일대 구역에서 중국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비록 효과적인 보호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백 명의 중국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 그를 따라 많은 외국인 선교사와 기업인, 외교관들이 대사관, 학교 등지를 확보하고 많은 중국인들을 수용하였는데 이 구역을 '국제안전지대'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비무장인 외국인들이 일본군의 발광(發狂)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일본군은 수시로 안전지대를 침범하여 강간과 살육을 자행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난징의 중국인에게는 불완전하나마 국제안전지대만이 살 길이었고, 약 20~30만 명의 중국인이 국제안전지대로 몰려들어 학살을 피했습니다.


 - 그리고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중국인은, 중국 정부 추산 30만여 명에 달합니다.



4. 뒷이야기


 - 당시 일본군은 중국인 학살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자국민을 싣고 양쯔강을 통해 철수하던 미국과 영국 소속 초계함들을 공격하여 한 척을 침몰시켜 버렸습니다(파나이 호 사건). 충칭으로 도망친 장제스는 이 사건으로 미국과 영국이 발끈하여 일본의 발목을 잡아주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여 발을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ㅡㅡ;


 - 전쟁이 끝난 이후 1946~47년에 걸쳐 '난징 전범재판'이 열렸고, 학살의 중심에 있었던 제6사단의 사단장 타니 히사오(1882-1947), 100인 참수 경쟁의 두 주인공 무카이 도시아키(1912-1948)와 노다 츠요시(1912-1948) 등 다수의 전쟁범죄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무카이와 노다는 "그런 일 없었다"고 발뺌하였지만, 위의 신문기사가 증거로 제출되자 "이건 왜곡이다"라고 발악하면서 죽어갔다고.


 - 도망자 탕셩즈는 우한까지 달아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모든 직책과 권력을 빼앗겼고, 종전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국공내전 때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후난 성 부주석을 역임하는 등 잘나갔으나,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어 홍위병에게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81세로 병사(病死)하였습니다.


 - 욘 라베는 학살 직후 히틀러에게 "학살을 멈출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동맹국을 건드리기 싫었던 히틀러와 나치 정부에게 무시당하고 오히려 비밀경찰에게 감금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다만 학살의 증거자료를 보전하는 것은 허가받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지멘스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종전 후 나치 당적 때문에 체포당하였습니다. 비록 재판에서 무죄함을 입증받아 석방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재산을 날리고 건강까지 해친 라베에게 중국인들은 성금을 모아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하는군요.


 - 종전 후 이 사건에 대한 중국(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정부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피해배상 요구를 실질적으로 포기해 버립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총리에게 마오쩌둥 주석이 "우리가 승전국이니 피해배상 따위는 요구하지 않겠다"는 만행소리를 하는 바람에,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ㅡㅡ; 실제로 당시 난징에서는 격렬한 반대시위가 벌어졌고,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 중국 정부가 난징 대학살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마오쩌둥 사후의 일입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이 1985년에야 건립되었을 정도. 최근 들어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일본 관계악화 등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2014년 1월에는 대학살 사건 관련 기밀문서를 공개하였고 이후 사건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여 2015년 10월 마침내 등재되기에 이릅니다. 일본은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지만......


[난징 대학살 기념관]



1. 개요 : 기관총이 개발되기까지


 - '기관총(Machine gun)'이란, 다수의 탄을 총 안에 담아두고 총알을 장전, 발사, 탄피 배출, 재장전까지 완전 자동으로 할 수 있는 '기관'이 달려 있는 총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는 요즘 총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기능이기 때문에(흔히 말하는 자동소총이라든지), 이런 총이 일반화된 현대에는 '수백 발 이상의 총알을 지속적으로 발사하고도 총이 무사할 수 있는' 특정한 부류의 총을 일컫는 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 총알을 빠른 속도로 연달아 발사하는 무기는 총기류의 발명 이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왔습니다. 초기의 화승총은 총알과 화약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아직 총알을 자동으로 장전하고 발사하는 기술적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이를테면 '탄피'가 발명되기 이전) 사람들은 산탄포를 쏘거나 여러 개의 총열을 묶어놓는 식으로 문제를 보완하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중국과 조선에서 쓰인 삼안총(三眼銃)이라든지.


[삼안총]


 - 19세기 초중반 발명된 탄피는 기관총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문제를 해결시켜 주었습니다. 총알과 화약이 일체화되면서 총알을 장전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총알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발사하기도 한결 쉬워졌으니까요.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세기 후반에는 기관총의 할아버지 쯤으로 불리는 두 총기가 등장합니다. 미트라예즈(Mitrailleuse)와 개틀링(Gatling)입니다.


[미트라예즈에 총알 장전 중]


 - 미트라예즈는 1851년 벨기에에서 개발되었고, 개틀링은 1862년 미국의 리처드 개틀링(1818-1906)이 발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여러 개의 총열을 사용한다는 기존의 개념을 답습하고 있지만, 기계적인 구조를 채용하여 본격적인 연사(連射)가 가능하도록 한 최초의 무기입니다.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기관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개틀링의 경우 분당 1200발(개량형 기준)까지 발사가 가능할 정도였다니 기관총의 위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1874년식 개틀링의 구조]


 - 마침내 1883년 미국 출신 영국인 하이럼 맥심(1840-1916)이 진정한 의미의 '기관총'을 최초로 발명해냈습니다. 맥심은 '총을 발사할 때의 반동'을 가지고 총알을 재장전해보자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으면 알아서 장전과 발사와 재장전이 반복되는 현대 총의 구조를 최초로 구현했습니다. 이후 그가 만든 개념은 기관총 뿐만 아니라, 소총을 비롯한 개인화기 전체에 적용됩니다.


 - 그런데 기관총에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하나 있었으니, 총알을 연속으로 발사하다보면 자연스레 총열이 너무 뜨거워지고(그야 화약이 계속 '폭발'하는 것이므로), 이는 쿡 오프(사용자의 뜻과 관계없이 총알이 발사되어버리는 것) 문제라든지 총열의 변형이라든지 하는 여러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렇다고 개틀링처럼 총열 자체를 여러 개 달아놓으면 총이 너무 무거워지므로, 뜨거워진 총열을 냉각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됩니다(맥심 기관총의 경우 수냉식 냉각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



2. 제국주의 침략의 치트키(?)가 되다


 - 기관총은 등장하자마자 세계 역사를 뒤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총기류는 빠른 사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칼과 창, 활만으로 총에 대항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좀 많이 죽을 각오를 하고 압도적인 수로 달려들면, 제아무리 훈련된 총병이라도 버틸 수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고, 식민지 경영도 대부분 해안의 항구도시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 그런데 기관총은 (총알을 쏜다는 점만 같고) 전혀 다른 개념의 무기. 좁은 공간에 총을 난사하는 것이니, 그 공간에 사람이 밀집할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유럽인들은 칼이나 창을 들고 밀집대형으로 쳐들어오는 원주민들을 기관총으로 손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밀림과 사바나를 탐험하던 몇 명 혹은 몇십 명의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잡기 위해 몰려오는 수백이나 수천 명의 원주민들을 기관총 한두 정으로 박살내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 남의 이야기 같지요? 1894년 제2차 동학전쟁에서 딱 이런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2만 명을 넘는 동학군은 충청도 공주를 목표로 진격했고, 도중 우금치 고개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기다리던 5천여 명의 관군+일본군 콤보에 말 그대로 학살을 당합니다. 당시 동학군의 전법이란 밀집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으니, 기관총에는 말 그대로 밥이 될 수밖에요.



[ 우금치 전투 기록화. 안타깝지만 이래서는 차라리 전투보다 학살이라고 봐야겠죠]


 - 이제 유럽 열강의 식민지 침략은 해안을 넘어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물론 이에는 밀림의 전염병을 이겨내게 해 준 의학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존의 무역 거점을 넘어 대륙 전체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빨라야 19세기 후반, 완성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누가 더 많이 갈라먹을까'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한판 붙었던 '파쇼다 사건'이 1898년에야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 이렇게 기관총(과 의사와 선교사)을 앞세워 유럽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기관총이 원주민이 아닌 유럽인 자신들을 향해 사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 생각을 충분히 해본 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 제1차 세계대전 : 그리고 스스로를 학살하다


 -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발전한 무기체계가 전쟁의 양상을 바꿀 것이라는 조짐은 있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은 수동식 기관총 등의 연사화기가 최초로 사용된 전쟁이었고, 남북 모두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기존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낳았습니다. 무기의 살상력이 높아지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지고, 이 병력이 더 강력한 무기에 몰살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각국은 전쟁 한 번 이기려고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하게 되었습니다(이를 '총력전'이라 합니다).



[전쟁 양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피켓의 돌격'.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조지 피켓(1825-1875) 지휘하의 남부군은 방어라인이 갖추어진 북부군 진영으로 착검 돌격하였고, 한 시간 남짓만에 약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유럽의 전술 또한 기본적으로 전근대적 밀집대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술했듯이 기관총은 적이 밀집해 있을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데, 적의 (부정확한) 포화에 '쫄지 않고' 밀집대형으로 적진 앞까지 전진하여 백병전을 치르는 19세기 유럽 군대의 전술은 기관총 앞에서는 말 그대로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남북전쟁을 비롯한 몇 차례의 전쟁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유럽인들은, 1914년부터 전개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처참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몇 달 사이에 끝날 것이라 장담하던 전쟁은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고, 동맹측과 협상측 양쪽에서 이 전선을 지키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방어라인을 구축하면서 역사상 유례 없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 길고 복잡하게 뻗은 참호의 최전방 요소에는 어김없이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참호 점령을 위해 돌격하는 적군을 몰살시키는 역할을 지나치게 잘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유럽 군대의 기본전술은 밀집대형으로 착검 돌격이 다였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보다도 멍청한 상황. 결국 협상측과 동맹측은 적군의 기관총에 수없이 많은 생명을 갖다바치는 짓거리를 3년 이상이나 계속하게 됩니다.


[방독면을 쓴 기관총 사수들]


 - 결국 유럽 열강은 천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나서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게 됩니다. 총알을 막고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전차(탱크), 그리고 병사의 전투력을 소리없이 무력화할 수 있는 독가스의 등장으로 비로소 전쟁의 모습은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관총의 효용성은 그 이후에도 죽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에서도 기관총은 다양한 형태로 개량되며 오히려 더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4. 결론 : 진정한 제국주의 무기, 최초의 대량살상무기


 - 기관총은 유럽 제국주의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입니다. 유럽인들은 기관총을 들고 어디로든 쳐들어갔고, 그 각각의 지역에서 수많은 원주민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이후 그 지역을 점령하고 수탈하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인이 원주민에 대해 가진 우월의식은 상당 부분 이 기관총에서 비롯하였고, 이를 풍자한 노래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전진하라 명받은 병정들아 이방인의 땅으로 가자 / 기도서는 네 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총을 쥐어라 / 그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좋은 소식과 / 널리 평화의 복음을 전하라 / 맥심 기관총을 가지고서 // 가련한 원주민들에게 말하라 / 그들이 얼마나 죄지은 모임지 / 그들의 이방 사원을 / 영혼의 장터로 돌려놓자 / 만약 그들이 네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 이방 원주민들에게 맥심 기관총으로 설교하라 // 이방인들이 십계명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 그들의 추장을 꾀어 그 땅을 손에 넣어라 / 혹여 그들이 미혹되어 그대에게 설명을 원한다면 / 다시 산 위에서 맥심 총으로 설교하라" <Onward Chartered Soldiers>. 찬송가 <Onward Christian Soldiers>를 개사


 - 하지만 재미있게도, 혹은 안타깝게도 이방인을 학살하는 데 쓰인 기관총은 나중에는 유럽인 자신을 학살하는 데 더 효율적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에게 '총으로 흥한 자는 총으로 망한다'는 준엄한 교훈을 주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유럽은 20년 후 한 차례의 세계전쟁을 더 치르고 나서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사망자는 대부분 참호전의 전사자 (출처)]


 - 이후에도 기관총은 세계 각지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기술 발전에 따라 활용도는 오히려 증가하여 이제 소형 기관총은 분대급 지원화기로까지 쓰일 정도입니다(대한민국 국군 기준). 유럽에서는 더 이상 기관총이 사람을 죽이고 있지 않지만, 아직 세계 각지의 전장에서 기관총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으며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라는 기관총의 악명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 타이완(중화민국)이 총통(대통령)선거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제14대 중화민국 총통 선거는 2016년 1월 16일에 투표가 시행되며, 세 명의 총통 후보가 출마한 상태입니다. 타이완의 총통 선거는 러닝메이트 시스템으로, 총통 후보와 부총통 후보가 하나의 후보로 함께 출마하게 되어 있습니다(미국 대통령 선거와 동일).


 - 타이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범람연맹'과 민주진보당을 중심으로 한 '범록연맹'입니다. 양대정당의 상징색이 각각 남색과 녹색인 데서 유래한 명칭이죠. 두 세력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타이완의 정체성'으로, 즉 '중화민국'이냐(범람연맹) '타이완'이냐(범록연맹)의 차이입니다. 이외의 정치적 노선 차이가 크지는 않으나, 대체로 범록연맹 쪽이 조금 더 진보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현재 세 후보의 소속 정당은 범람연맹측에서 둘(중국국민당, 친민당), 범록연맹측에서 하나(민주진보당)입니다.



1. 타이완은 어떻게 한족의 땅이 되었는가


 - 타이완의 정치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타이완의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이완이 중국의 영역에 온전히 들어온 것은 17세기로, 그 이전 타이완을 지배한 원주민은 현재 태평양 종족(오스트로네시아)의 조상쯤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17세기 이전에는 몇몇 역사기록에 단편적으로만 등장하던(중국 문명은 몇몇 시기를 빼고는 해양 진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요) 타이완이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은 웃기게도 중국이 아닌 유럽 문명에 의해서입니다.


 - 유럽인이 타이완 섬에 최초로 상륙한 것은 1590년,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들은 타이완에 상륙하였지만 정착하지는 않고, 숲이 우거진 타이완을 '일하 포르모사(아름다운 섬)'이라 명명하고 떠나갔습니다. 이 무렵 대륙의 명 제국이 파탄 상태에 빠지면서 타이완의 주변 해안지역(푸젠 성, 저장 성)의 주민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으니 한족이 타이완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입니다.


 - 1624년 타이완 섬 근처의 펑후 제도를 점유중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명 제국과의 협의를 통하여 펑후 제도와 타이완 남서부를 교환하게 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현재의 타이난 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이 일대의 토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노동자를 대규모로 모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족의 이주가 본격화됩니다. 타이완 섬 북부에서는 에스파냐가 성을 건설하고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는데, 두 세력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고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를 몰아내는 결말을 맞습니다.


 - 다만 네덜란드의 천하도 얼마 가지 못하여, 1661년 남명(南明) 계열의 정성공(1624-1662)이 바다를 건너 타이완 섬을 공격하였고 네덜란드는 1662년 타이완 섬에서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정성공은 그 직후 사망하였는데, 그 일족은 3대에 걸쳐 타이완을 지배하였고 이들의 '정씨 왕조'는 1683년 청 제국에 의하여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 청 제국의 정복 이후에는 한족의 이주가 가속화되어, 이제 타이완 섬의 주역은 완전히 한족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근대 이전까지 타이완 섬에 이주한 한족을 '본성인'이라 하며, 이들은 대부분 푸젠, 저장 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언어('대만어') 또한 이 지역의 언어와 유사합니다. 원주민 중 서부의 평지에 살던 부류는 '평포족'이라 하며 이 시기 대부분 한족과 섞여 존재가 희미해졌고, 동부 산지를 중심으로 거주한 '고산족'은 현재까지 동화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 식민(植民)의 역사


 - 1874년 류큐(오키나와)의 어민들이 타이완 섬 동부에 표류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핑계로 타이완 섬에 출병, 원주민들과 전투를 치릅니다(모란사 사건). 당연히 이곳의 지배자인 청 제국은 강하게 항의하였고, 일본군 또한 풍토병(말라리아) 확산으로 더 이상의 전투가 곤란해져 둘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협상의 결과, 당시 명목상 중국-일본의 이중 속국이었던 류큐는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하에 완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 이후 청불전쟁(1884-1885) 때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파견된 류명전(1836-1896)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타이완 성(省)'이 설치되었는데, 타이완 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청의 시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면서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전쟁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은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였고, 이후 1945년까지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 일본의 타이완 지배는 큰 틀에서는 한반도 식민지배와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 시기 형성된 타이완인의 대일(對日) 감정은 한국인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복잡한 무엇이 있습니다. 타이완의 한족들에게는 이전의 청 제국 역시 사실상의 식민 지배자였고, 이들에게 청과 일본은 '외부의 지배자'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또한 (한족과 원주민을 가리지 않고) 일본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긴 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사건은 1930년 원주민의 일파인 아타얄족이 전개한 '우서 항쟁'.


 - 타이완 주민의 정치운동은 1937년 '지방자치연맹'의 해체와 함께 사실상 막을 내렸고,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타이완 역시 한반도와 비슷한 '황민화' 그리고 전시동원체제 속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연히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식민 지배는 막을 내렸고, 타이완의 주권은 청을 계승한 중화민국에게로 넘어갔는데 이것이 오히려 타이완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3. 외성인(外省人)의 독재, 그리고 민주진보당


 - 타이완이 중화민국 영토로 돌아온 이후에도, 당시 국공내전에 정신이 팔려 있던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 통치에 있어 딱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여 주민들의 불만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기 타이완의 통치는 본성인을 배제한 채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외성인)이 독점하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본성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 1947년 2월 27일,담배를 무단으로 팔던 한 노점상이 단속원에게 구타를 당하자 주변 사람들이 이들에게 항의하였는데,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면서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다음날 시작된 항의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졌고, 이들의 요구가 타이완의 자치와 인권보장으로 발전하자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1887-1975)는 국민혁명군을 파견하여 본성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2.28 사건). 당시 살해당한 본성인은 약 3만여 명에 달하며, 대규모 약탈까지 겹쳐 타이완 전역은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 타이완의 역사는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전하면서 한층 더 꼬이기 시작했는데, 국민당은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겨 목숨을 부지하였고 타이완은 수십 년간 계엄령이 발동된 상태로 장제스의 1인 독재 체제로 전락하였습니다. 당시 타이완의 정당은 오로지 중국국민당 하나뿐(북한에도 있는 관제야당 하나 없이!)이었고, 본성인 중심인 중국국민당 외의 다른 정치 활동은 철저히 탄압받았고 본성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대만어) 사용까지 억압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이러한 분위기는 1975년 장제스의 사후에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1978년 총통에 취임한 장징궈(장제스의 아들)는 정부에 본성인의 기용을 확대하는 등 전향적인 조치들을 시행하였습니다. 1986년 민주화 운동가들이 모여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선언하였는데, 이전과 달리 장징궈는 이들을 탄압하지 않았고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사실상 묵인하였습니다. 이들이 창당한 '민주진보당'은 다음해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후 타이완의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4. 양대정당 체제의 성립


 - 민주진보당은 1991년 <타이완독립강령>을 채택하면서 본격적으로 타이완 독립주의의 기치를 들었고, 이는 기존의 진보적 성격과 함께 민주진보당의 노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민주진보당의 행보는 기존 피지배층이었던 본성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현재까지 민주진보당은 '진보, 본성인, 타이완 독립주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물론 한국만큼이나 타이완의 정치 지형도 노선이 분명하게 나뉘지 않으며, 민주진보당의 '진보' 역시 그다지 좌파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자연히 중국국민당의 노선은 '보수, 외성인, 하나의 중국'으로 대표됩니다. 다만 중국국민당은 중화민국 중심의 중국 통일을 내세우고 있어,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일 노선과는 또 다릅니다. 즉 타이완의 독립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국민당이 함께 반대하지만, 타이완의 중화인민공화국 편입은 중국국민당과 민주진보당이 한 목소리로 반대하는 상당히 묘한 ㅡㅡ;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


 - 타이완 최초의 야당 민주진보당은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1950-)이 당선되면서 드디어 정권교체를 달성하였습니다. 범람연맹의 후보가 둘로 분열되었고(롄잔(1936-), 쑹추위(1942-)) 민주진보당 역시 기존의 타이완 독립주의를 상당부분 후퇴시키며(<타이완전도결의문> 채택) 중도층을 끌어온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천수이볜 정부는 경제 침체, 지지자들에게도 비판받는 반(反) 개혁적 행보 등이 겹치며 정권을 다시 중국국민당에게 넘겨주었고, 퇴임 이후 천수이볜은 희대의 부정부패 스캔들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일단 천수이볜과 지지자들은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합니다).


 - 일단 양측을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가 '국가적 정체성'이라고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력차가 너무 커진 것, 그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의 독립을 결사반대하고 있는 점 등이 겹쳐 있다보니 양당의 주장도 상당히 애매해져가는 경향은 있습니다. 중국국민당은 '본토 수복'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하며, 민주진보당 역시 예전처럼 강경한 타이완 독립주의를 주장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재의 실정입니다.


 - 현재의 타이완 총통은 천수이볜의 후임자인 마잉주(1950-, 중국국민당)가 재임 중입니다.



- 왕자지(王字之, 1066-1122)는 고려 중기의 문관입니다. 고려 건국 공신이자 해주 왕씨의 시조인 왕유(?-?)의 후손으로, 본래 이름은 소중(紹中)이었고 자지(字之)라는 이름은 나중에 개명한 것입니다. 자는 원장(元長). 무엇으로 불러도 이상하다 일단 그의 부모에 대하여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긴 하지만, 그가 음서를 통하여 관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 또한 고위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왕자지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서리(胥吏)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에 오릅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출세하게 된 계기는 1095년 왕의 외척이자 권신인 이자의(이자겸의 사촌) 암살사건이었는데, 당시 계림공(훗날의 숙종)의 명을 받아 이자의를 제거한 왕국모에게 협력하여 요직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이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자지는 내시(고려시대의 내시는 '환관'이 아닌 일반적인 관직)와 전중시어사 등의 요직을 거쳤고, 예종 때인 1108년에는 병마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바로 이 때 윤관(?-1111) 주도의 동북 9성 침공이 시작되면서 그는 윤관 휘하의 장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고려시대에는 문관이 부대 사령관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문관인 왕자지가 장군으로 출전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총사령관인 윤관 역시 문관이었고, 이전 시대 귀주대첩을 지휘한 강감찬 역시 문관).


 - 이 전쟁에서 왕자지는 실제로 많은 전공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전황은 순조로워서 여진족을 연파하고 순조롭게 9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진족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고려군은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한 번은 왕자지의 부대가 행군 중에 여진족의 기습을 당했는데, 이 때 왕자지는 타던 말을 잃고 화살까지 맞는 등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그를 구원한 인물이 바로 한국사 굴지의 인간흉기 척준경. 그는 여진족 부대를 격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말까지 한 마리 빼앗아 왕자지에게 넘깁니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후 왕자지와 척준경은 절친이 되었다는군요.


 - 이후로도 꾸준히 전투를 치렀지만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기로 하면서 고려군은 다시 천리장성 안쪽으로 철수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왕자지는 꾸준히 승진하여, 1115년에는 이부상서(요즘으로 치면 안전행정부 장관)에 취임하고 같은 해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使)로 송나라에 파견됩니다. 그는 이듬해 고려로 돌아오면서 송나라의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전수받아 돌아오는데,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 그가 전수받은 대성아악은 이후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으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이어집니다.


 - 이후로 그는 동북면 병마사, 호부상서, 이부상서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고, 중서문하성 참지정사를 역임하던 1122년 병으로 개경에서 사망합니다. 예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쉬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예종의 묘정(廟庭)에도 배향(해당 왕의 시대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종묘에 함께 모시는 것)되는 영광을 안......을 뻔했으나 반대 상소가 이어져 결국 배향은 되지 않았습니다. 이름 때문이 아니라 탐욕이 심하고 부정부패했다는 게 이유라고 합니다.


 -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 사람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문묘제례악의 뿌리인 대성아악을 도입한 인물이고, 조선시대엔 문묘 제례가 굉장히 중요했으니 그랬겠죠. 어쨌든 고려시대 정치사나 문화사에서 꽤 무게있는 인물인 데 비해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역시 그 시대가 문학이나 영상으로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었던 게 커 보이는데, 특히 동북 9성 개척은 척준경의 말도 안 되는 무용담도 그렇고 사극 등에서 다룰 만한데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별로 없죠.


 - 거의 유일하게 <푸른바람 척준경>이라는 웹툰이 있었는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스토리가 조금 진행되다가 뜬금없이 연재가 끝나 버렸습니다. ㅡㅡ; 우스갯소리로 척준경의 일대기가 사극화되지 못하는 게 다 왕자지 때문이라고 하기도.




- <ハイサイおじさん(하이사이 오지상)>은 오키나와 출신 싱어송라이터 키나 쇼키치(喜納昌吉)의 데뷔작으로, 1977년 발표 이후 일본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며 '우치나(오키나와) 팝'의 선두주자로 인정받게 된 노래입니다. 오키나와 전통음악 특유의 '류큐 5음계(도-미-파-솔-시)'를 사용하고 있으며, 표제의 의미는 '안녕하세요('하이사이'는 오키나와 어 인사말) 아저씨' 정도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 전체적으로 흥겨운 곡조를 띤 이 노래는 어느 소년과 아저씨가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자는 이 노래에 얽힌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오키나와 출신인 작자의 집 옆에는 오키나와 전투 때 충격을 받고 정신 이상이 된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정신 착란을 일으켜 자신의 어린 딸을 목졸라 죽이고 그 시신을 냄비에 넣어 요리를 하고 있었더랍니다.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면서 마을 전체가 뒤집어졌고, 그 아주머니는 어딘가로 끌려갔으며(아마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아주머니의 남편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정신 이상이 되어버렸다고 하지요.

 - 이후 그 남편은 옆집에 계속 살면서 작자의 집에 술을 얻어먹으러 오곤 했는데, 딱한 사연을 알고 있던 작자의 집안에서 그 남편을 잘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가사는 이 때 소년이었던 작자 자신과 술을 얻어먹으러 온 그 옆집 아저씨와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그저 흥겹고 신나기만 한 이 노래에는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트라우마, 그리고 이를 잊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던 지금까지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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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夜(ゆうび)ぬ三合ビン小(ぐゎ) 残(ぬく)とんな
残(ぬく)とら我(わ)んに 分(わ)きらんな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三合ビンぬあたいし 我(わ)んにんかい
残(ぬく)とんで言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三合ビンし不足(ふずく)やみせぇーら
一升(いっす)ビン我(わ)んに 呉(くぃ)みせー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夕べの三合ビンは残っとるかぁ~?
残っとったらワレに分けてくれんか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三合ビンの量をワシに
残っとるか聞いとんのかい。えィ小僧

小僧:
あのなぁ、おじさん。三合ビンで不足ちゅうなら
一升ビンをワレくれるとでも言うんなぁ~ 

2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とぅしぐる)なたくと 妻(とぅむ)小(ぐゎ)ふさぬ
うんじゅが汝(いやー)ん子(ぐわ)や  呉(くぃ)みそうらに
ありー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童(わらばー)ぬ くさぶっくいて
妻(とぅむ)小(ぐゎ)とめ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二十や余て三十過ぎて
白髪(しらぎ)かみてから 妻(とぅむ)とめゆ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だで女房が欲しいんだけど
おじさんの娘をくれないかい?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小僧の癖しやがって
女房を娶ろうってか、えィ小僧

小僧:
それならおじさん。二十三十過ぎて
白髪になって女房を娶れってか。

3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カンパチ まぎさよい
みーみじカンパチ 台湾はぎ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頭(ちぶる)んはぎとし 出来やーど
我(わ)ったー元祖(ぐゎんすん)ん むる出来やー
あんせおじさん 我(わ)んにん整形しみやーい
あまくまカンパチ 植(い)い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ハゲはデッカイねぇ
ミミズハゲだど 台湾ハゲ~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禿とるもんは出来がええのよ。
うちの先祖もものすごう出来が良い。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ワレも整形してみるわ
あっちこっち、ハゲをこさえてやろうかよ

4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ヒジ小(ぐゎ)ぬ をかさよい
天井(てぃんじょ)ぬいぇんちゅぬ ヒジどやる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ヒジヒジ笑ゆしが
ヒジ小(ぐゎ)ぬあしがる むてゆんど
あんせんおじさん 我(わ)んにん負きらん明日(あちゃー)から
いぇんちゅぬヒジ小(ぐゎ) 立て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の髭っておかしいわ。
天井ネズミの髭みたいやな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前は髭を笑うけど、
髭があるからモテるんよ。

小僧:
あのなおじさん。ワレも負けとれん明日からは
ネズミ髭でも生やしょうわい。

5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日ぬ女郎(じゅり)小(ぐゎ)ぬ 香(か)ばさよい
うんじゅん一度 めんそーれー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辻、中島、渡地とぅ
おじさんやあまぬ 株主ど
あんせんおじさん毎日(めーなち)あまにくまとして
(※)
我(わ)んねー貧乏(ひんすー)や たきちきゆみ 

※我んねちゅらーさよーがりゆさ(わたしゃはきれいに痩せるわね)
 汝やちゅらーくよーがりゆさ  (おまえさんきれーに痩せられるさ)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ゆんべのお女郎はかぐわしかぁ~。
あんたも一度はやっかいになったら?。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じさんは辻、中島、渡地(遊郭地)の大旦那よ。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毎日遊郭にいりびたり
ワレも貧乏なってみようか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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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노래는 오키나와 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시엔 야구 대회에서 오키나와 지역 학교의 응원단이 줄곧 이 노래를 응원가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키나와 지역은 1972년 다시 일본 영토로 바뀌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현재, 오키나와는 순조롭게 일본의 일부로 녹아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 2010년대에 와서도 오키나와 현이 일본의 많은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도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주일미군 문제에 있어서 오키나와 섬이 계속 독박을 쓰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딱히 나아진 것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 오키나와 인의 자기 정체성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본인임을 인정하지만(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오키나와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상당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들은 방송에서 기미가요(일본의 국가(國歌))를 부르지 않으며 간혹 부르는 사람은 오키나와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現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비록 당세는 크지 않지만) '류큐 독립당'이 활동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주민이 오키나와 독립을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일본 반환 이후 오키나와 지역의 핵심 과제는 미군기지의 이전 문제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현 전체 면적의 19%를 차지하는 미군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할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고, 일본 정부는 이를 묵살하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간신히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정권은 다시 자민당에게 넘어갔고, 모든 것은 다시 원위치로......


 - 결국 자민당 소속인 현지사(한국으로 치면 도지사)가 일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지를 현 내부로 이전할 것을 추진하자,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의 지사 선거에서 반대파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후보를 상당히 큰 표차로 선출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이 문제는 현지사에게 그리 큰 권한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중.


 - 미군 기지가 현내로 이전할 경우 후보지는 오키나와 섬 중부의 헤노코 해변인데, 이 곳에서는 기지 이전 반대시위가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위측에서는 아예 반대시위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서, '헤노코 시위현장 방문 코스'라든지 '반대구호 부착을 조건으로 한 무료 카누 체험'이라든지 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고...... 헤노코의 투쟁은 현재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는 뒷이야기 또한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정치적 여론이나 지형에 있어서 오키나와 현 내에서도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섬 지역간의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앞에서 말한 '인두세' 등의 역사적 문제,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본섬 외에는 대량학살이 발생한 곳이 없었다는 사정이 더해져 두 지역간의 정치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섬을 제외한 곳에서는 현재도 자민당이 강세이며, 오키나와 전투에 대하여도 일본 본토에 상당히 우호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새역모>의 극우 성향 교과서를 채택한 곳이 있을 정도.


 - 이것만 해도 오키나와의 사정은 상당히 복잡한데, 최근에는 조어도(센카쿠 열도) 문제와 관련하여 난데없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주장은 오키나와 주민들조차도 철저히 무시할 정도로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중국이 내세우는 이유라는 게 류큐 왕국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번속국(藩屬國)이었다는 것이니 오키나와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오히려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이 논리가 발전하면 과거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던 주변의 모든 국가에 대한 정치적 압력 행사로 이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곳에 사람이 사는 이상 계속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에 주민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라는 두 글자가 새겨질 날은 과연 언제쯤에나 찾아올까요.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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