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급속한 경제개발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완전히 갈아엎어졌습니다. 이는 전근대적 질서를 해체하고(백정 계층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바로 한국전쟁 때로 여겨집니다. 기존의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백정마을 따위가 사라지면서 누가 백정 출신인지 찾는 게 의미가 없어진 것) 한국을 현대 사회로 이끄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거대 규모의 인구 이동이 이어지면서 엄청난 수의 '이산가족'을 낳게 됩니다.
- 아직 전통적 가족개념이 온존하던 시절, 역사적 질곡으로 인하여 강제로 떨어져 생사조차 모르게 된 사람들이 마음 속에 큰 한(恨)을 안고 살아가는 건 당연했을 겁니다(아니 이건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당시 정부가 파악하고 있었던 이산가족 추정 수는 1050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1983년은 대한민국 인구가 딱 4000만 명을 돌파한 해입니다.
[중1 사회 교과서엔 이런 게 나옵니다. 저 화살표를 학생들은 그렇구나 하고 지나치지만......]
- 당연하게도, 전쟁 직후부터 흩어진 가족을 찾자는 시도는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30여 년에 걸친 시도는 별로 성과가 없었는데, 이는 전국민이 함께 접할 수 있는 이른바 '대중매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70년대까지도 TV는 동네에 한두 대쯤 볼까말까한 사치품이었고, 그나마 많이 활용된 신문 역시 한자투성이에 높은 문맹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라디오 역시 전국민을 모으기에는 부족했던 시절.
- 이러한 한계가 1980년대 들어 해소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컬러TV 방송의 시작과 함께 TV는 전국민에게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이미 1980년대 중반 들어서는 대부분 가정에 들어섭니다(당시 단칸방을 전전하던 갓난아기 시절 블로거의 집에도 TV만큼은 꼭 있었습니다). 아직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라(인터넷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고) 거의 대부분 국민의 주된 매체는 TV였으며, 전국민을 동시에 한 화면에 집중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1. 1983년 6월 30일 : 90분짜리 방송이 270분으로
- 1983년은 6.25전쟁 휴전 3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 해의 6월 25일에 KBS에서는 아침 프로그램인 <스튜디오 830>(現 <아침마당>의 전신)에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라는 제목의 특별 코너를 방송하였습니다. 이전에도 KBS는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당시 적대관계였던) 소련, 중국 등지를 타겟으로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조금씩 진행하고 있었는데, 6.25 특집으로 국내의 이산가족에 주목하는 특집방송을 기획했던 것.
- 이렇게 6월 25일 아침에 나온 특집방송은 생각보다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이에 자극받은 KBS의 제작진은 아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황금시간대에 '이산가족 찾기'를 컨텐츠로 하는 별도의 특집방송을 준비하기에 이릅니다(후일담에 따르면 KBS 사장부터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당시 정권과 KBS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런 걸 프로파간다에 써먹을 생각도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렇게 새로운 방송이 준비되고, 6월 30일 6.25주간 특별 프로그램(역시 시대가 시대였으니 6.25 특집을 일주일씩이나......)의 하나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집생방송이 시작됩니다. 방송 시작 시각은 22시 15분, 대략 1시간 30분 정도 방송으로 계획되었고 (반응이 뜨거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므로) 약 1시간 정도 연장방송에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당시는 12시를 좀 넘으면 방송이 거의 끝나던 시절임을 감안합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타이틀 화면]
- 방송 계기가 계기였던만큼 방송 진행자에는 <스튜디오 830>을 진행하던 이지연 아나운서와 유철종씨(본업은 기업교육훈련 전문가로 전문 방송인은 아니었음)를 선정하고, 전국의 KBS 지국을 연결하여 이원중계를 하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법까지 동원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칩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TV방송의 증가한 파급력과 일천만 이산가족의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 처음에는 약 150여 명의 이산가족을 스튜디오에 모아놓고 전화나 이원중계 등의 방식을 통하여 다른 이산가족과의 연결을 시도하며, 최종적으로는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진행중인 한국적십자사나 치안본부(경찰청) 전자계산소(컴퓨터 데이터를 활용한 찾기 사업을 진행) 등의 사업을 소개하는 구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아니 시작되기도 전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6월 30일 첫 번째 상봉]
- 우선 출연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신청자들이 몰려듭니다. 결국 150명으로 계획된 선정자 수는 늘어나고 또 늘어나 방송 당일에는 무려 820명이나 되는 이산가족이 작은 스튜디오를 가득 메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스튜디오에 마련된 10여 대의 전화뿐 아니라 KBS의 모든 전화는 거의 마비 수준으로 폭주하기 시작했고, 얼마 뒤 첫 번째 상봉이 이루어지면서 생방송은 삽시간에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방송은 최초 예정된 1시간 30분을 훌쩍 넘기고, 추가적으로 계획된 1시간도 뛰어넘어 거의 새벽 3시 가까이까지 계속됩니다. 몇 시간동안 진행을 계속한데다 다음날 아침 방송도 출연해야 했던 두 진행자는 2시 45분에야 가까스로 방송을 끝냈는데, 꽤 많은 상봉이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출연자 중에서조차 극소수에 불과했던지라 "내일도 특집방송을 이어가겠다"라는 다짐을 하고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 당연하게도 당시 정치적으로 욕을 거하게 먹던 KBS는 이를 이미지 전환의 호재로 생각했고, 다음날인 7월 1일 저녁에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긴급히 편성하게 됩니다.
2. 1983년 7월 1일~2일 : 생방송을 끝낼 수가 없어
- 조짐은 이미 전날 밤의 방송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800여 명의 방청객 뿐 아니라, 방청객에 선정되지 못한 사람들과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이산가족들이 방송 시작 직후부터 KBS 본사가 있는 여의도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야간 통행금지가 막 해제되었던 시절이라, 방송 시간은 물론 방송이 끝난 이후에도 밤새도록 이산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자 KBS 본사 앞은
-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이미 1만여 명 이상이 방송국 앞에 운집하였고, KBS가 방송 장소를 더 넓은 공개홀로 옮겼음에도 끝없이 모여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지자, 당시 비어있던 신관 중앙홀을 추가로 열어놓고 방송국 내에서 이원중계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 그렇게 7월 1일 밤에 생방송이 다시 시작되었고, 분위기는 전날을 능가할 정도로 뜨거워서 결국 생방송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이지연, 유철종 두 사람만으로는 당연히 진행이 불가능했고 손석기(손석희와는 다릅니다 손석희와는), 황인우 아나운서 등 KBS 소속의 아나운서들이 긴급히 투입되어 교대로 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방송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보니, 유철종씨의 경우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방송을 이어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ㅡㅡ;
- KBS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 외에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KBS는 아예 모든 역량을 이산가족 방송에 집중하기 시작, 다음날인 2일부터는 아예 모든 정규방송을 (중간중간의 뉴스 시간 외에는) 사실상 중단해버리고 여기에 '올인'하기로 결정합니다. 방송국 입장에서야 이만한 특종도 없으니까요.
- 물론 거의 이틀 밤을 꼬박 새버린 진행자들이 계속 방송을 진행하기는 무리였고, 2일 7시 40분까지 진행된 방송은 약 40~50분 가량을 쉬고(뉴스 등의 다른 프로그램이 나갔다고 합니다) 8시 30분부터 다시 이어집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거의 24시간 방송을 하던 때가 아니었고, 낮 시간대의 방송은 주말과 공휴일에만 가능했는데 때마침 1983년 7월 2일이 토요일이었습니다.
- KBS는 주말 프로그램으로 예정된 편성을 싸그리 갈아엎어버리고, 19시 30분까지 이산가족 방송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시점부터 방송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는데, 진행의 틀이나 큐시트나 정형화된 멘트(정부가 여기에 주목하면서 반공 프로파간다 성격의 내용들이 중간중간 첨가되기는 했습니다. 뭐 그거야 당시 시대가......) 따위는 거의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 여기서 진행자와 카메라가 상봉 장면을 촬영하고 있노라면 등 뒤에서는 또다른 이산가족이 서로를 확인하고 통곡하는 광경이 이어집니다. 방송은 상봉자들의 절규와 다른 이산가족의 절박한 목소리, 그리고 상봉 때마다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방청객의 박수소리가 온통 뒤엉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어떤 출연자는 감정이 북받치다 못해 스튜디오에서 실신하기까지 했는데, 당시 진행자인 김동건(<가요무대> 진행자)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든 채 응급조치를 수행했을 정도.
- 전날 밤부터 따지면 21시간 이상 계속된 생방송의 시청률은 최대 78%에 달했고, 이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이 함께하는 방송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규방송이 올스톱되었지만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3. 1983년 7월 3일 ~ 11월 14일 : 454시간의 각본 없는 드라마
- 이쯤 되면 국가적인 주목을 받게 되지요. 1983년은 문어대가리 29만원 전두환 집권기의 한가운데였고, 국민의 반발을 3S와 프로파간다로 메꾸는 데 혈안이 된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프로파간다의 무대로 적극 활용할 것을 결정합니다. 이산가족 찾기 사업이 새마을운동(!) 급의 국민적 사업으로 지정되고, 각 행정구역의 민원실을 중심으로 공권력의 전폭적 지원이 시작됩니다.
- 가족을 찾고자 하는 이산가족들은 더욱 많이 모여들었고, KBS 앞이 가득 들어차자 바로 근처에 있던 여의도비행장광장(現 여의도공원) 일대가 사람과 포스터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인파는 10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던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워버렸고, 정부에서는 주변에 '만남의 광장'을 따로 조성, 지역별 섹션과 접수자 명부를 비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합니다.
- 폭주하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된 KBS에서는 이미 7월 1일부터 접수자를 따로 받지 않았고,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종이든 뭐든 총동원하여 찾는 가족의 신상정보를 적어 벽이나 바닥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KBS 앞과 여의도광장은 가족찾기 포스터로 거의 도배되다시피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엄청난 수의 포스터가 붙었지만 남의 포스터 위에 덧붙인다거나 하는 노매너 플레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군요.
[포스터로 도배된 여의도광장]
- 이틀간 생방송으로 혼돈의 도가니를 맛본 KBS는 7월 중순 이후 방송을 상시편성으로 돌렸고, 대략 비방송 시간대(평일 낮이라든지 한밤중이라든지)와 주말 종일편성으로 생방송이 이어졌습니다. 이 일이 국외에도 알려지면서 해외 교민 중에도 이산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쇄도했고, 교민이 많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직접 방송을 연결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방송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사건이 되었습니다. NHK, BBC 등 당시 세계 유수의 방송사들이 비중있게 이 사건을 다루었고, 미국 ABC의 경우 미국 교민과의 방송연결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90분짜리 특별방송으로 기획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 아니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11월 14일까지 계속됩니다. 이날까지 중간중간 진행된 생방송의 총 방송 시간은 453시간 45분. '단일 주제 최장시간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됩니다.
4. 기막히고 코막히는 사연들
- 당시 방송을 상징하는 장면 1. 남매지간인 두 사람은 가족이 단체로 월남하였는데, 1·4후퇴 당시 영등포역에서 피난을 위해 기차에 타던 과정에서 헤어졌고 32년간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화면이 다른 가족의 상봉장면을 비추는 사이 뒷쪽에서 갑자기 고함소리와 박수가 터지면서 진행자가 놀라며 달려갔는데, 오빠가 "누이요, 누이!" "아버지 엄마 다 살아있어!" 라며 절규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KBS 만세!!"와 아나운서의 "위험해. 위험해"
- 출연자가 감정이 북받치는 와중에도 상황 설명을 침착하게 했고, KBS 찬양도 있고 여러모로 프로파간다에 좋은 장면이었는지 두 사람의 상봉은 이후 KBS에서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두고두고 활용하게 됩니다.
[52분 25초부터]
- 당시 방송을 상징하는 장면 2. 허현철, 허현옥씨는 전쟁중에 각각 고아원과 이발소 양녀로 들어가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동생 허현옥씨는 자신의 본명도 모른 채 입양 후 이름으로 살다가 방송을 통하여 오빠를 만나 자신의 본명을 알게 된 것(본명을 몰랐기 때문에 이발소에 입양될 당시 상황으로 서로를 확인했는데, 화면상으로 이미 얼굴을 보는 순간 오빠임을 직감했던 모양).
-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본국에서는 남매의 상봉을 중간에 자르고(워낙 많은 사람을 소개해야 했기 때문) 다른 곳의 사연 소개를 진행했는데, 제작진이 무슨 약을 빨았는지 ㅡㅡ; 화면을 다시 강제로 돌려놓고 두 남매의 상봉장면에 비장한 BGM과 6.25전쟁 영상을 오버랩하는 반공소스 듬뿍 끼얹은 무리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두 남매 역시 이산가족 찾기의 상징이 되었고, KBS의 30년 특집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다보니, 방송과 관계없이 광장에서 서로 상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빠르게는 처음 방청 접수를 하러 왔다가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고, 스튜디오에 방청하러 들어와서 서로를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공개홀로 초대되어 사연을 공유하기도 하였습니다.
- 워낙 이산가족 자체가 많았다보니, 이 때 여의도와 각지 방송국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사회 유명인사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산가족 중 많은 수는 고향이 북한 쪽인 실향민이기도 했는데, 당시 교대 진행자였던 김동건 아나운서나 중간에 모습을 비춘 유창순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경우 그들 자신이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이산가족과 시청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5. 감동 아래의 그늘
- 물론 어떤 사건이든 빛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분명 사회 전체를 뒤집은 대사건이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상봉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의도에서, 전국 각지에서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방송에 소개된 53,536명의 사연 중 실제로 가족을 만난 사람은 10,187명에 달했는데, 분명 엄청난 숫자이지만 나머지 4만 명 이상은 끝내 가족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
-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에 대한 전국민의 관심을 십분 활용합니다. 전국민의 관심을 끌고, 더구나 6.25전쟁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주제인지라 정부에서 반공 프로파간다에 써먹기 아주 좋았거든요. 일단 7월 중순부터 국가적 지원을 실시하고 행정력을 상당부분 동원한 것도 그렇고, 방송이 본궤도에 오른 뒤로부터는 진행자의 멘트나 BGM, 편집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공정신 덧씌우기가 자행되었습니다.
- 정부의 프로파간다는 공교롭게도 방송 기간 중 벌어진 두 사건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극도로 높였으니, 하나는 9월 1일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였습니다. 둘 다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치를 떨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사건들이었습니다. 남북대결로 찢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는 감동의 순간에, 그들을 찢어지게 만든 대결구도가 다시 덧씌워졌다는 게 지금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
- 상봉에 성공한 가족들 또한 이후의 스토리가 해피엔딩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수십 년간 떨어져 지내왔고, 그동안 겪은 환경 등의 차이가 극심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죽었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경우도 문제가 되었지요. 결국 30여 년 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고서도 서로간에 불화가 생겨 다시 헤어지거나 연까지 끊어버리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임권택 영화 <길소뜸>이 이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6. 후일담과 소소한 뒷이야기들
- 이산가족 찾기를 중심으로 1983년 벌어진 사건들을 정부는 프로파간다에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것은 의외로 북한 쪽에 대하여도 상당한 효과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해 1984년에는 남한 쪽이 수해를 입자 북한에서 구호물자를 지원하기도 하였고(물론 이건 정황상 북한의 허세에 가깝습니다), 1985년에는 양측 적십자사가 중심이 되어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진행됩니다.
- 방송은 11월 14일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찾아 여의도로 모이곤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가족찾기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만남의 광장'을 다음해 여름까지 1년여 간 계속 운영하였고, KBS에서 라디오를 중심으로 기존에 추진하던 이산가족 관련 사업들도 한층 더 탄력을 받았다고 합니다.
-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상처이지만 묻혀 있던' 이산가족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리는 큰 계기가 됩니다. 1985년 최초의 본격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고, 사회주의권의 중국, 소련 쪽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교민들에 대한 관심도 부쩍 환기되죠. 이러한 분위기는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다시 빛을 보았고, 그 해 8월부터 시작된 정례적인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하여 정점을 찍게 됩니다.
- 당시 출연자들의 발언은 1980년대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당시 출연자들 중에는 "KBS 만세"나 "대한민국 만세"는 기본이요, 심하게는 "전두환 대통령 만세"를 외친다든지 커다란 태극기를 둘러쓰고 나오는 붉은악마?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에야 그게 자연스러웠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북한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김정일, 김정은 만세를 외치는 것만큼이나 위화감이 드는 장면입니다.
- 이 사건은 상술했듯이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아직 냉전이 진행중이던 시대라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이 사건에 대한 담화를 하며 북한을 비판하기도 했을 만큼, 이산가족 찾기는 냉전이 낳은 비극의 상징처럼 여겨져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것입니다.
- 이 방송은 한 명의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2년 전에 방송에 데뷔한 무명 가수였던 설운도는, 자신의 작품을 일부 개작한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노래를 방송 중간중간 부르며 단숨에 주목을 끌게 됩니다(<잃어버린 30년>은 발표 후 최단기간에 히트작이 된 노래라는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운도 뿐 아니라 많은 가수들이 (쉬어가는 시간을 두는 차원에서) 생방송 중간중간에 참여하였고, 이 때의 음악들이 특집 앨범으로도 발매됩니다.
- 2015년 10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기사 정부와 KBS 측에서 꾸준히 등재를 추진하였고, 당시 생방송을 녹화한 녹화자료들과 이산가족의 접수 신청서 등이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방송 자료가 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을 기록한 영상자료가 등재된 이후 두 번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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