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군사적 모험주의와 군사 · 경제 병진노선


 -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북한은 한동안 경제개발에 온 역량을 집중하였고, 군사 부문에는 그다지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는 물론 전쟁으로 북한의 경제 전체가 붕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휴전 이후에도 중국군(중국인민지원군)이 상당 기간 주둔하여 북한의 안보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그리고 이들은 북한의 경제 재건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 하지만 1958년 중국군이 북한에서 모두 철수하고, 중소분쟁 이후 북한이 점차 독자노선을 취하면서 북한 자체의 군사적 수요가 급속히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5% 미만이었던 북한의 국방예산 비율은 1960년대 들어 점차 상승하다가, 1960년대 말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급상승하여 1970년 무렵에는 국가 예산의 31%까지 폭증하게 됩니다.


 - 이를 뒷받침했던 것은 북한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행동을 자제해야 했던 북한은(사실상 북한은 무력 통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강대국의 간섭이 줄어들고 자주노선이 강화되자 말 그대로 날뛰기 시작합니다. 1968년 1월 민족보위성(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31명이 남한으로 침투, 북한산 자락을 거쳐 청와대를 급습하려 시도한 사건이 터졌습니다(통칭 1·21 사건)


["내레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로 유명한 바로 그 사건]


 - 이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1월 23일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임무 수행 중이던 미국 해군 소속 USS 푸에블로함이 북한 해군에게 나포되며 한반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다만 이 사건은 현재는 푸에블로함이 실제로 북한 영해를 침범한 것이라는 게 정설). 사태는 양면전쟁(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수행 중)을 원치 않은 미국 측에서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북한에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지만, 전쟁 직전의 긴장상태에서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과잉투자를 해야 했습니다.


 - 이로 인해 경제개발에 대한 투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1961년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은 기간은 3년이나 늘리고도 1970년까지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군사 · 경제 병진노선'입니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군사 투자를 늘려 경제와 군사력을 동시에 성장시키자는 허무맹랑한 노선이었지만, 이전 북한의 정책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경제를 제쳐두고 군사력에 집중투자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 군사 · 경제 병진노선은 196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제5차 전원회의에 처음 등장하였고, 1966년 북한의 공식적 노선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군사력 증강과 함께 본격화된 북한의 무력 도발은 위의 두 사건 외에도 울진-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미국 공군 EC-121기 격추사건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사건이 1968~69년 사이 발생했습니다.


 - 일각에서는 당시의 북한을 두고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주적 모습을 보였다'며 좋아하십니다만...... 이러한 모습은 북한의 경제, 사회 발전 깊은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이 무렵부터 북한의 경제는 제1경제(민간경제)와 제2경제(군수경제)로 분리되었고, 사실상 대부분의 투자가 제2경제 쪽에 집중되면서 북한 경제의 정체와 쇠퇴가 본격화됩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 여력 감소로 이어지고, 이러한 악순환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8. 김정일의 등장과 후계자 지명


 - 김정일은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출생하였습니다(북한에서는 1942년 백두산 밀영에서 출생하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만, 실제로 김정일은 1941년 출생하였고 당시 김일성 부부는 소련에 있었음). 동복 동생으로 김만일(1944-1947. 수상관저 연못에서 놀다가 익사), 김경희(1946-)가 있습니다.


[김일성 가족의 단란한 한 때]


 - 생모 김정숙은 1949년 출산 도중 태아와 함께 사망하였고(김일성이 바람을 피운 것에 빡쳐서 치료를 거부하였다는 설이 있음 ㅡㅡ;), 김일성은 이후 후처(들?)에게서 여러 자녀를 더 얻었는데 김정일은 자신의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상당히 나빴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정환경(생모는 사망, 계모 및 이복형제와는 사이가 나쁨) 때문에 김정일은 어린 시절에는 상당히 내성적이었고, 이러한 성격은 청소년기 이후에야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 김정일은 1960년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공부는 그닥 잘 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자 김정일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어 김일성이 빡친 나머지 남산고급중학교 러시아어 교사들의 강의력을 일일이 검증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정일은 공부보다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폭주족 음악, 영화, 연극 등의 예술 쪽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훗날 그의 출셋길을 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고급중학교를 졸업한 김정일은 김일성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북한 지도층에게는 소련 유학이 유행이었고, 김정일 역시 소련에 유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조선에도 훌륭한 대학교가 있다"면서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물론 이 시기에도 5만 권의 장서를 읽었다느니 뭐니 선전용 전설들이 난무하지만 그건 생략하고...... 대학 재학 중인 1961년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합니다.


 - 주변인들의 증언을 보면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이미 권력 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67년 갑산파 숙청 당시 영화계에 갑산파의 영향력이 큰 것을 확인한(박금철 찬양 영화가 만들어졌던 것 기억하시나요?) 김일성은, 영화덕후 김정일을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에 임명하여 예술계 정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 때의 활약을 시작으로 김정일은 날아오르게 됩니다.


[남한에도 이름만 유명한 혁명가극 <피바다>]


 - 이 시기 김정일은 자신의 덕력을 십분 활용하여 김일성 신격화의 최선봉에 섰습니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소재로 한 '혁명가극'이라든지,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영화 제작이라든지 등의 문화적 작업을 진두지휘하며, 김정일은 김일성 뿐 아니라 김일성과 항일운동을 함께 한 북한 고위층들의 눈에 들게 됩니다. 1970년대 이후 김일성의 후계 구도가 조금씩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따놓은 점수는 김정일에게 엄청난 무기가 되었습니다.


 - 김정일은 197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1920-), 이복동생 김평일(1954-) 등과 후계구도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습니다. 이 시기 김정일이 자신의 친위대로 만든 게 3대혁명소조입니다. 각계각층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조직은 각 분야의 보수성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사상 투쟁을 벌였는데, 김정일이 모든 권한을 독점한 사실상의 사조직이기도 했습니다.


 - 1972년 김일성의 환갑 잔치에서 "내 아들 중 누가 후계자였으면 좋겠나?"라는 김일성의 말에, 그의 항일유격대 동료였던 최현은 "당연히 장손(김정일)이 맡아야지요"라고 대답했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항일유격대 원로들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밀고 있었던 것. 여기에 김성애(김일성의 후처. 김평일의 생모)의 삽질을 틈타 김정일은 김성애와 이복형제들의 부정행위를 김일성에게 보고했고, 김성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시점에서 사실상 후계구도는 확정되었습니다.


[김평일은 1979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파견된 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후 김정일은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주도했다가 당 내의 거센 반발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김정일을 좌천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오히려 반대파를 숙청하고 김정일을 당 중앙으로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북한의 미래는 김정일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정일은 비로소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후계자임을 확실히 하였고, 1983년에는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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