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은 대한민국 국군의 건군 6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타깝게도 국군은 출범 단계에서 옛 일본군 출신자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들에 의해 일본군의 흔적이 상당 부분 이식되어 오늘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첩보 및 보안업무의 중심에는 관동군 첩보부대원으로 근무했던 김창룡(1920-1956)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해방 전후에 걸쳐 있는 김창룡의 활약상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김창룡]




1. 국경의 관동군 첩보원


 - 김창룡의 고향은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요덕 수용소의 그 요덕)입니다. 빨갱이 때려잡은 사람의 출신지로 심히 적절하다 집안은 평범한 빈농(貧農)이었고, 그래서 김창룡 역시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하고 2년제 농잠(농업+양잠)학교를 나왔습니다. 졸업 후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신세를 바꾸어 볼 요량이었는지)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철도부(통칭 '만철')에 지원하여 합격, 역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만철 특급열차 '아시아'호. 당시 만철은 만주지역 철도 뿐만 아니라 군대와 행정조직까지 갖춘 거대한 집단이었습니다]


 - 확실히 그는 머리가 좋고, 또 성실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만철에서 일하던 김창룡은 그의 성실성과 명석함을 눈여겨본 일본인 상관의 추천으로 관동군 헌병대에 입대, 헌병보조원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소련과 국경 일대에서의 첩보활동으로, 이 때부터 그의 기나긴 첩보 인생이 시작됩니다.


 - 헌병교습소에서 첩보요원으로 훈련을 마친 김창룡은 주로 소련 · 중국공산당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였습니다. 1943년에는 중국공산당 소속 왕진리(王近禮)와 그가 이끄는 지하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웠는데, 이는 왕진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2년여간 점원으로 위장근무하며 벌인 첩보 활동의 성과였다고 합니다.


 - 이렇듯 김창룡의 장기는 위장 · 침투와 역공작(逆工作)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철도노동자 감독으로 위장취업하여 첩보를 입수, 공산당 지하조직을 50여 개나 적발해내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일반 병사 신분이었던 김창룡은 일련의 공적으로 1945년 1월 오장(伍長, 하사)으로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 이렇게 관동군의 첩보요원(이건 좋게 표현한 것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밀정')으로 맹활약하던 김창룡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으니,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하고 만주 일대가 소련의 영향 하에 들어온 것입니다.




2.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 당연하게도, 공산당 때려잡던 밀정이 소련 치하에서 무사할 거라는 생각을 하긴 어렵겠지요. 해방 직후 김창룡은 황급히 고향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딸과 결혼했습니다(대충 속내가 무엇인지 냄새가 좀 나지요?). 하지만 만주에 이어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소련군은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던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고, 김창룡은 철원과 영흥에서 보안대에 잇따라 체포되어 사형당할 처지에 놓이지만 두 번 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 더 이상 북쪽에 사는 건 불가능하니, 두 번째 탈출 이후 김창룡은 거지꼴이 다 된 채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그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격렬한 좌우 대립 속에서 공산당 때려잡던 김창룡의 경력은 대단한 스펙(?)이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한동안 백수로 지내던 그는 지인이자 만주군 출신인 박기병(당시 3연대 소대장)을 만나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습니다.


 - 김창룡은 처음에는 일반 사병이었지만, 나름 하사관 출신인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박기병에게 부탁하여 3연대 하사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의 장기인 정보 관련 업무를 하던 김창룡은 역시 만주군 출신인 김백일(1917-1951, 당시 3연대장)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에 1947년 1월 입교, 4월(?!)에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당시는 국군 태동기였고, 장교를 일단 충원부터 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김삼룡과 이주하의 검거 소식. 1950년 4월 1일 동아일보]


 - 임관 이후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군 내에 남아 있던 좌익 계열 장교들을 숙청하는 데 활약하게 된 것입니다. 군대 안팎에 있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계열 인사들을 잇따라 체포하였고(그 중에는 김삼룡(1908-1950), 이주하(1905-1950) 등 남로당 최고위급 인사들도 있음), 여순사건 때는 반란의 진압과 사후처리(라고 해봐야 국군 내 좌익인사 숙청)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로 굳어지면서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김창룡은 급속한 출세를 거듭하여 1948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장교, 1949년에는 방첩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는 활약을 바탕으로 대통령 이승만의 신임까지 얻게 되었고, 많지 않은 나이에 권력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3. 김창룡식 빨갱이 관심법


 - 하지만 김창룡의 '빨갱이 때려잡기'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습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잡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좌익인사라고 자백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어떤 식의 강요일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엄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고통에 못 이긴 사람이 기억나는 아무 지인의 이름이나 내뱉으면 그 사람을 또 잡아다 고문하고......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


 - 한번은 창설 준비중인 공군 소속 장교 대부분(약 40여 명)을 한꺼번에 체포한 적이 있었는데, 깜짝 놀라 그들의 체포 경위를 묻는 김정렬(1917-1992,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불림) 대령에게 "증거는 없지만 앞으로 좌익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ㅡㅡ; 당연히 사방에서 욕을 먹었지만 그럼에도 권력에게는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에 출세에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권력이 그에게 원한 건 무엇일까요? 바로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이 있는데, 당시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는 육군 방첩대 소속 장교였기 때문에 방첩대장 김창룡 또한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김구 살해를 지시한 배후로 널리 의심받았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아 안두희와 함께 별 탈 없이 사태를 넘어갔습니다.


 - 1950년 한국전쟁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일단 그는 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추정되며(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후방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휘했다는 것), 서울 수복 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를 색출 · 처벌하는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창룡은 부산 방첩대장, 평양지구 특무대장을 거쳐 1951년 육군 특무부대(現 기무사령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별을 달았습니다.




4.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권력(이승만이죠 뭘)을 위하여 각종 공안 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조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간첩 및 용공분자 사건이 허위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 ㅡㅡ; 물론 그가 처리한 공안 사건들은 권력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습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빌미가 된 소위 '금정산 공비 사건'을 처리한 것이 바로 김창룡의 특무부대였습니다. 


 - 이외에 1953년 국제간첩사건(이범석계 숙청을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음), 1955년 개천절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실제 암살 시도가 있었던 건 사실이나 사건 경위는 크게 과장되었다는 게 정설) 등 권력과 직접 연관된 공안사건에는 김창룡과 특무부대가 끼지 않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중추에 서게 된 김창룡은 그야말로 권력을 '남용'하게 됩니다.


[이승만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김창룡]


 - 1954년 김창룡은 특무부대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헌병사령관 공국진(-2014)을 해임하려 모종의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정일권(1917-1994) 육군참모총장이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경무대(청와대) 빽을 내세우는 김창룡의 공세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후 공국진이 제2군사령부 참모장에 발령되려 하자 이것도 방해하여 무산되게 만들었고, 당시 제2군사령관 강문봉(1923-1988)까지도 빡치게 만들었습니다.


 - 결국 빡치다 못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을 제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김창룡을 중용하였습니다. 이후 김창룡은 두 장군의 비리를 몰래 캐내는 등 쩔어주는 뒤끝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흥미롭게도 이승만은 김창룡에게는 두 장군의 뒷조사를, 정일권에게는 김창룡의 뒷조사를 지시했다는군요). 여하간 이런 식으로 좌충우돌하며 김창룡은 사방에 적을 만들었습니다.


 - 결국 일이 터졌으니, 1956년 1월 30일 특무부대로 출근하던 김창룡은 탑승한 지프가 잠시 정차한 사이에 허태영(1919-1957) 대령, 이유회(1929-1957) 중사 등의 습격을 받아 총알세례를 받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은 소식을 듣자마자 친히 왕림하시어 그의 유해를 확인했고, 전군 장병의 외출 금지령까지 내려가며 범인을 찾았습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葬)이었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파의 반공주의 신분세탁


 - 김창룡은 일본의 충실한 개로 활약하다가, 일본의 후광이 사라진 뒤에는 반공주의의 선봉으로 변신하여 영광의 시절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는 김창룡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친일파, 특히 군과 경찰 분야의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김창룡은 거기에 관동군 시절의 행보, 그리고 해방 직후 공산주의 세력에게 당한 개인적 고난이 더해져 공산주의에 대한 순수한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그 양상이 공산주의 vs. 자본주의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전 행위를 심판받을 기회를 뛰어넘어버렸고, 오히려 공산주의에 앞장서 싸우는 '반공투사'가 되어 새로운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 권력자들은 반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승만 세력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오히려 김창룡처럼 이를 몇 배로 불리기까지 하였습니다.


 - 물론 애초에 제국주의 일본 자체가 극렬 반공주의 사회였으니 그들에 협력한 사람들이 반공주의자인 것을 이상하게 볼 건 없습니다. 그리고 반공주의 자체도 민주사회에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고, 그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반공주의를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위 '과거 세탁'을 위해 반공주의를 이용한 자들이 한국 내에서 반공의 선봉에 섰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땅의 반공주의자들은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자체를 친북행위로 규정해 왔습니다]


 - 이것이 이후의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쳤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뼈아픈 부분은 일제점기 반민족행위를 규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빨갱이들의 준동' 쯤으로 치부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친일파를 비판하는 게 곧 '반공투사'를 욕하는 것으로 치환되어 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 밀정이자 대한민국의 악질 정치군인 김창룡을 구국의 영웅으로 맹목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 네. 물론 김창룡은 유능한 정보군인이었고, 투철한 반공투사였을 수 있습니다. 그걸 공이라고 하면 그 의견은 존중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과오(일본에 대한 협력, 무고한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를 없이하는 건 결코 아니지요. 이런 식의 흑백논리가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는 뒤틀린 역사인식과 해석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heme.archives.go.kr/next/history/kimcy/mean/mean_01.do (김창룡 저격사건과 김창룡 일대기 요약)

http://egloos.zum.com/nasanha/v/10987122 (산하의 오역)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4869 (경남도민일보 기사)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2154 (김창룡에 대한 긍정적 시각의 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