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기관총이 개발되기까지


 - '기관총(Machine gun)'이란, 다수의 탄을 총 안에 담아두고 총알을 장전, 발사, 탄피 배출, 재장전까지 완전 자동으로 할 수 있는 '기관'이 달려 있는 총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는 요즘 총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기능이기 때문에(흔히 말하는 자동소총이라든지), 이런 총이 일반화된 현대에는 '수백 발 이상의 총알을 지속적으로 발사하고도 총이 무사할 수 있는' 특정한 부류의 총을 일컫는 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 총알을 빠른 속도로 연달아 발사하는 무기는 총기류의 발명 이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왔습니다. 초기의 화승총은 총알과 화약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아직 총알을 자동으로 장전하고 발사하는 기술적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이를테면 '탄피'가 발명되기 이전) 사람들은 산탄포를 쏘거나 여러 개의 총열을 묶어놓는 식으로 문제를 보완하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중국과 조선에서 쓰인 삼안총(三眼銃)이라든지.


[삼안총]


 - 19세기 초중반 발명된 탄피는 기관총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문제를 해결시켜 주었습니다. 총알과 화약이 일체화되면서 총알을 장전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총알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발사하기도 한결 쉬워졌으니까요.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세기 후반에는 기관총의 할아버지 쯤으로 불리는 두 총기가 등장합니다. 미트라예즈(Mitrailleuse)와 개틀링(Gatling)입니다.


[미트라예즈에 총알 장전 중]


 - 미트라예즈는 1851년 벨기에에서 개발되었고, 개틀링은 1862년 미국의 리처드 개틀링(1818-1906)이 발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여러 개의 총열을 사용한다는 기존의 개념을 답습하고 있지만, 기계적인 구조를 채용하여 본격적인 연사(連射)가 가능하도록 한 최초의 무기입니다.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기관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개틀링의 경우 분당 1200발(개량형 기준)까지 발사가 가능할 정도였다니 기관총의 위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1874년식 개틀링의 구조]


 - 마침내 1883년 미국 출신 영국인 하이럼 맥심(1840-1916)이 진정한 의미의 '기관총'을 최초로 발명해냈습니다. 맥심은 '총을 발사할 때의 반동'을 가지고 총알을 재장전해보자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으면 알아서 장전과 발사와 재장전이 반복되는 현대 총의 구조를 최초로 구현했습니다. 이후 그가 만든 개념은 기관총 뿐만 아니라, 소총을 비롯한 개인화기 전체에 적용됩니다.


 - 그런데 기관총에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하나 있었으니, 총알을 연속으로 발사하다보면 자연스레 총열이 너무 뜨거워지고(그야 화약이 계속 '폭발'하는 것이므로), 이는 쿡 오프(사용자의 뜻과 관계없이 총알이 발사되어버리는 것) 문제라든지 총열의 변형이라든지 하는 여러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렇다고 개틀링처럼 총열 자체를 여러 개 달아놓으면 총이 너무 무거워지므로, 뜨거워진 총열을 냉각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됩니다(맥심 기관총의 경우 수냉식 냉각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



2. 제국주의 침략의 치트키(?)가 되다


 - 기관총은 등장하자마자 세계 역사를 뒤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총기류는 빠른 사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칼과 창, 활만으로 총에 대항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좀 많이 죽을 각오를 하고 압도적인 수로 달려들면, 제아무리 훈련된 총병이라도 버틸 수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고, 식민지 경영도 대부분 해안의 항구도시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 그런데 기관총은 (총알을 쏜다는 점만 같고) 전혀 다른 개념의 무기. 좁은 공간에 총을 난사하는 것이니, 그 공간에 사람이 밀집할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유럽인들은 칼이나 창을 들고 밀집대형으로 쳐들어오는 원주민들을 기관총으로 손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밀림과 사바나를 탐험하던 몇 명 혹은 몇십 명의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잡기 위해 몰려오는 수백이나 수천 명의 원주민들을 기관총 한두 정으로 박살내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 남의 이야기 같지요? 1894년 제2차 동학전쟁에서 딱 이런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2만 명을 넘는 동학군은 충청도 공주를 목표로 진격했고, 도중 우금치 고개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기다리던 5천여 명의 관군+일본군 콤보에 말 그대로 학살을 당합니다. 당시 동학군의 전법이란 밀집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으니, 기관총에는 말 그대로 밥이 될 수밖에요.



[ 우금치 전투 기록화. 안타깝지만 이래서는 차라리 전투보다 학살이라고 봐야겠죠]


 - 이제 유럽 열강의 식민지 침략은 해안을 넘어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물론 이에는 밀림의 전염병을 이겨내게 해 준 의학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존의 무역 거점을 넘어 대륙 전체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빨라야 19세기 후반, 완성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누가 더 많이 갈라먹을까'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한판 붙었던 '파쇼다 사건'이 1898년에야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 이렇게 기관총(과 의사와 선교사)을 앞세워 유럽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기관총이 원주민이 아닌 유럽인 자신들을 향해 사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 생각을 충분히 해본 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 제1차 세계대전 : 그리고 스스로를 학살하다


 -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발전한 무기체계가 전쟁의 양상을 바꿀 것이라는 조짐은 있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은 수동식 기관총 등의 연사화기가 최초로 사용된 전쟁이었고, 남북 모두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기존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낳았습니다. 무기의 살상력이 높아지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지고, 이 병력이 더 강력한 무기에 몰살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각국은 전쟁 한 번 이기려고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하게 되었습니다(이를 '총력전'이라 합니다).



[전쟁 양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피켓의 돌격'.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조지 피켓(1825-1875) 지휘하의 남부군은 방어라인이 갖추어진 북부군 진영으로 착검 돌격하였고, 한 시간 남짓만에 약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유럽의 전술 또한 기본적으로 전근대적 밀집대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술했듯이 기관총은 적이 밀집해 있을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데, 적의 (부정확한) 포화에 '쫄지 않고' 밀집대형으로 적진 앞까지 전진하여 백병전을 치르는 19세기 유럽 군대의 전술은 기관총 앞에서는 말 그대로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남북전쟁을 비롯한 몇 차례의 전쟁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유럽인들은, 1914년부터 전개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처참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몇 달 사이에 끝날 것이라 장담하던 전쟁은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고, 동맹측과 협상측 양쪽에서 이 전선을 지키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방어라인을 구축하면서 역사상 유례 없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 길고 복잡하게 뻗은 참호의 최전방 요소에는 어김없이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참호 점령을 위해 돌격하는 적군을 몰살시키는 역할을 지나치게 잘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유럽 군대의 기본전술은 밀집대형으로 착검 돌격이 다였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보다도 멍청한 상황. 결국 협상측과 동맹측은 적군의 기관총에 수없이 많은 생명을 갖다바치는 짓거리를 3년 이상이나 계속하게 됩니다.


[방독면을 쓴 기관총 사수들]


 - 결국 유럽 열강은 천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나서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게 됩니다. 총알을 막고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전차(탱크), 그리고 병사의 전투력을 소리없이 무력화할 수 있는 독가스의 등장으로 비로소 전쟁의 모습은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관총의 효용성은 그 이후에도 죽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에서도 기관총은 다양한 형태로 개량되며 오히려 더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4. 결론 : 진정한 제국주의 무기, 최초의 대량살상무기


 - 기관총은 유럽 제국주의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입니다. 유럽인들은 기관총을 들고 어디로든 쳐들어갔고, 그 각각의 지역에서 수많은 원주민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이후 그 지역을 점령하고 수탈하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인이 원주민에 대해 가진 우월의식은 상당 부분 이 기관총에서 비롯하였고, 이를 풍자한 노래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전진하라 명받은 병정들아 이방인의 땅으로 가자 / 기도서는 네 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총을 쥐어라 / 그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좋은 소식과 / 널리 평화의 복음을 전하라 / 맥심 기관총을 가지고서 // 가련한 원주민들에게 말하라 / 그들이 얼마나 죄지은 모임지 / 그들의 이방 사원을 / 영혼의 장터로 돌려놓자 / 만약 그들이 네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 이방 원주민들에게 맥심 기관총으로 설교하라 // 이방인들이 십계명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 그들의 추장을 꾀어 그 땅을 손에 넣어라 / 혹여 그들이 미혹되어 그대에게 설명을 원한다면 / 다시 산 위에서 맥심 총으로 설교하라" <Onward Chartered Soldiers>. 찬송가 <Onward Christian Soldiers>를 개사


 - 하지만 재미있게도, 혹은 안타깝게도 이방인을 학살하는 데 쓰인 기관총은 나중에는 유럽인 자신을 학살하는 데 더 효율적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에게 '총으로 흥한 자는 총으로 망한다'는 준엄한 교훈을 주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유럽은 20년 후 한 차례의 세계전쟁을 더 치르고 나서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사망자는 대부분 참호전의 전사자 (출처)]


 - 이후에도 기관총은 세계 각지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기술 발전에 따라 활용도는 오히려 증가하여 이제 소형 기관총은 분대급 지원화기로까지 쓰일 정도입니다(대한민국 국군 기준). 유럽에서는 더 이상 기관총이 사람을 죽이고 있지 않지만, 아직 세계 각지의 전장에서 기관총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으며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라는 기관총의 악명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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