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y Balakirev (1837-1910)

Oriental fantasy <Islamey> Op.18


 - 발라키레프는 러시아 5인조의 리더로, 5인조 형성 당시 유일한 전업 음악가였습니다. 다만 발라키레프 역시 처음부터 음악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으며, 대학에서는 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소년기에는 알렉산드르 우루이비셰프(1794-1858, 러시아 최초의 음악평론가)에게 음악을 배웠고, 대학 졸업 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미하일 글린카(1804-1857)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글린카는 발라키레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격려하였습니다.


 - 이후 1856년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발표하며 음악가로 본격 데뷔하였고, 이후 2년 사이 자신의 두 후원자가 세상을 떠났지만 민족주의적인 스타일의 음악으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습니다. 이 무렵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과 만나 교류하였는데, 이들의 모임에 몇 년 후 보로딘이 합류하면서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5인조'가 형성됩니다.


 - 이후 작곡, 지휘, 음악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서유럽식 낭만주의를 지지하는 루빈시테인 형제에 대항하여 무료 음악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870년대 들어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왔으니, 발라키레프는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되었고 음악 활동을 5년 이상 전면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이 시기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그를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초빙하려 하였지만, 자신의 음악이 "지식보다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가르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며 고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1883년 러시아 궁정 성가대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무료 음악학교 활동도 재개하였습니다. 1894년 음악감독직을 사퇴한 이후 말년에는 다시 창작 활동에 집중하여 두 개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소나타들을 발표하였고, 자신의 과거 작품에 대한 개정 작업도 병행하였습니다.


 - <이슬라메이>는 1868년 9월에 완성되었으며, 발라키레프가 캅카스(코카서스) 지방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어 약 한 달여만에 만든 작품입니다. 발라키레프의 대표작이며, 특히 그 엄청난 연주 난이도로 더 유명합니다. 피아노 솔로곡 중 가장 어려운 작품의 하나이며, 웬만한 피아니스트는 연주하기 곤란할 정도라 곡을 조금 쉽게 편곡한 많은 판본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하여 도전하는 작품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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