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yk Wieniawski (1835-1880)

Violin Concerto No. 2 in d Op. 22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음악가로, 생전에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유명하였습니다. 파가니니 사후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 앙리 비외탕(1820-1881), 요제프 요하임(1831-1907) 등과 함께 19세기 중후반을 수놓은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하나로, 작곡가로서는 다수의 바이올린 곡을 남겼습니다.


 -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의 루블린에서 출생한 비에니아프스키는 여느 대음악가들이 그렇듯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843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였는데, 그가 프랑스인도 아니었고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그의 재능을 확인한 음악원에서 특별히 입학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졸업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하였는데, 그의 동생이자 피아니스트인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1837-1912)와 함께 하기도 했다는군요.


 - 1847년에는 첫 작품인 <Grand Caprice Fantastique>을 작곡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12세...... 이후로도 그는 연주와 작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활동이 주였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작품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1860년 그는 이사벨라 햄프턴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부모가 그의 결혼을 반대하자 <Légende>(Op. 17)라는 작품을 써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 그 무렵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 1872년까지 10여 년간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러시아 음악 협회의 일원으로 오케스트라와 현악사중주 등의 연주활동과 바이올린 교육 등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1872년부터 2년간은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고, 1875년에는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비외탕의 후임으로 선임되는 등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각지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 하지만 이 때부터 건강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는데, 심할 때는 연주회를 중단해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1879년에는 러시아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진행하던 도중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오데사의 병원에 입원했고, 차이콥스키의 후원자로 유명한 나데주다 폰 메크(1831-1894)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친구들 등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그는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생전 그는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바이올린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떨쳤고, 그에 걸맞(?)게 그의 바이올린 곡들은 대부분 그 난이도로 악명이 높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1856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초연은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루어졌고, 1879년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자 역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헌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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