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Скря́бин (1872-1915)

Symphonic Poem(Symphony No. 4) <The Poem of Ecstasy> Op. 54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스크랴빈은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자입니다. 어머니 또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스크랴빈을 낳고 얼마 뒤 사망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숙모에게 양육되었습니다. 숙모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였으며 그는 숙모를 통해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었습니다. 1882년 10대에 접어든 스크랴빈은 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여 1889년까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몸이 작고 약했기 때문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 일단 유년학교 시절에도 스크랴빈은 음악교육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원 연주회에 참여할 정도였다는군요. 결국 그는 군사유년학교를 그만두고 1888년 음악원에 정식 입학하여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 안톤 알렌스키(1861-1906)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 스크랴빈은 피아노 연주자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음악원 시절 라이벌인 요제프 레빈(1874-1944)을 의식한 나머지 과도한 연습을 하다가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합니다(다행히 회복됨). 1892년 피아노과 졸업 학위를 딴 그는 작곡과 학위도 따려고 했지만 작곡 스승인 알렌스키와 작품 스타일 관련 문제로 갈등하였고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졸업하게 됩니다.


 - 1894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얼마 뒤 음악 관련 기획자인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3)을 만나 그의 지원 하에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돌며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897년에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였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 다시 정착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습니다.


 -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스크랴빈은 1904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는데, 하필 이 때 타티아나 슐뢰저라는 사람과 바람이 나서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아내와는 이혼하고 <법열의 시> 뉴욕 초연이 취소되는 등의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작곡 활동에 전념하였고, 19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쇼팽 등의 낭만파 경향을 이어받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급속히 변화하여, 다분히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후기 음악은 불협화음을 과감히 활용하는 등 아주 몽환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후년에는 음악과 색채의 결합을 시도하여 1910년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 초연 때는 아예 '색광(色光) 피아노'라는 특수한 장치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을 돌며 연주와 작곡을 계속하던 스크랴빈은, 1915년 어느 날 윗입술에 생긴 작은 종기(혹은 뾰루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세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번져 ㅡㅡ;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법열의 시>는 1907~1908년 사이 작곡되었고, 간혹 교향곡(4번)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이 신비주의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작곡가는 같은 제목으로 신비주의적 내용의 긴 시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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