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작성일 : 2013. 5. 2. 예전 티스토리 블로그]

 

 - 한 차례의 침체기와 관중 세대교체를 거치며 많이 바뀌었다지만 초창기 프로야구의 응원문화는 때로는 유럽축구의 훌리건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살벌했던 바 있습니다. 경기장에 이물투척은 예사요, 술 취한 관중의 그라운드 난입은 심심하면 벌어졌고, 마산구장에서 있었다는 '투수 새총 저격사건'은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곤 하죠. 30년간의 기술력 상승으로 새총이 레이저로 바뀌었는진 모르겠지만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응원팀의 패배에 분노한 홈팀 팬들이 원정팀 버스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입니다.

 

(사진 1 :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 

 

 - 1990년 8월 26일, 막바지 여름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날 잠실구장에서는 관중난동의 T.O.P라 불릴만한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 이 날 잠실구장에서는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 해까지 4연속 우승을 하였지만 시즌 초반의 부진으로 간신히 4강권에 턱걸이하고 있던 해태, LG그룹의 팀 인수 후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를 달리고 있던 LG의 경기는 당연히 큰 관심을 끌었고, 전통(?)의 강호와 신흥 강호라는 라이벌 구도가 새로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이거즈의 수도권 원정경기에는 홈 팬에 필적할만한 원정 팬이 몰리고, 이 날 역시 경기장을 가득 채운 양 팀 팬들의 분위기는 초반부터 한껏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 초반 양 팀 선발투수인 김용수(LG)와 신동수(해태)의 호투로 경기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의 긴장 속에 이어졌습니다.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7회. 6회에 3점을 내 먼저 앞서간 LG의 공격에서 해태의 투수진은 주자의 도루저지에 실패한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 7회에만 무려 7실점을 허용하고 맙니다. 세븐 갤러리가 털립니다 지고는 있었지만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고 경기를 지켜보던 해태 팬들은 투수진의 멘붕 앞에 덩달아 멘붕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투수진을 아끼기 위해 경기를 사실상 포기하고 2진급 투수들을 기용한 코끼리김응룡 감독의 용병은 해태 팬들의 분노에 불을 지르고 맙니다. 

 

 - 7회 말 LG의 공격이 끝나자 어느 술 취한 해태팬이 그라운드로 난입했고,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곤봉 등으로 구타, 이를 지켜보는 해태팬들은 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8회 초 해태의 공격이 시작된 9시 12분, 원정측 관중석에서 500여 명의 관중이 그라운드로 우르르 밀려들어옵니다. 삽시간에 그라운드를 점거해버린 이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대놓고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베이스와 광고들을 떼어내고 거기에 불까지 지릅니다. 이 혼란 속에서 홈 팀 관중 한 명이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던 관중의 머리를 철제의자로 가격, 체어샷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맙니다. 물론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 이를 시작으로 잠실구장은 거대한 콜로세움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라운드를 점거한 해태팬과 주로 스탠드를 지키던 LG팬 사이에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 혈투가 벌어집니다. 음료수캔이나 소주병은 말할 것도 없고, 관중석의 의자를 뜯어내는 등등 경기장 내의 모든 기물들이 던져지고 휘둘러지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관중들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각목이나 철제의자들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사태를 도무지 수습할 수 없었던 구단측에서는 분위기를 좀 가라앉히려 전광판에 태극기를 띄우고 스피커로 애국가를 틀어대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

 

(사진 2 : 애국심 X까.jpg) 

사진 출처 :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newsid=20130118152706823

 

 - 결국 혼란은 무장경찰 3개 중대가 긴급투입, 그라운드의 관중들을 몰아내며 가까스로 수습됩니다. 앞서 과잉진압 논란을 낳았던 경찰은 이번에는 난동이 벌어진 후 30분이 넘게 지나서 투입, 늑장대응 논란도 함께 낳게 됩니다. 간신히 혼란을 진압하고 그라운드를 대충 정리한 후  경기는 1시간 7분이 지난 10시 19분에 속개, 별다른 이변 없이 LG의 완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진 3 : 청룡언월도?)

 

(사진 4 : 체어샷!) 

 

 - 후폭풍은 거셌습니다. 난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관중들이 대거 연행, 이 중 19명이 구속되고 11명은 집행유예까지 선고받았습니다. 외국 언론에도 오르내리며 대통령이 직접 사태의 해결을 지시할 정도로 큰 이슈가 되었고, 야구팬의 폭력적인 응원문화 또한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죠. KBO에서는 반복되는 관중 난동을 방지하기 위해 지정좌석제 도입을 검토하는 등 묘안을 찾고자 골몰하지만, 90년대 말까지 이러한 사건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 이러한 경기장 내 폭력을 없애지 못했던 것은 한국프로야구의 형성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신군부 독재정권이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자 프로스포츠를 적극 도입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프로야구의 도입은 본질적으로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지역연고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각 지역 대표구단들 사이의 경기는 지역감정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던질 돌을 경기장 내에서 던져대게 만들었으니 독재정권으로서는 꽤 성공한 전략이었을지도? 실제로 이러한 과격성은 당시 어느 팀 팬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5 :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흥분한 빙그레 팬들이 빙그레 선수단 버스를 박살내기도 했다) 

 

 - 이러한 관중 난동은,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대 말 IMF 등의 요인으로 프로야구 관중이 크게 줄어들며 점차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1999년 플레이오프 7 차전에서의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호세 고간 명중사건 등 몇몇 사건들을 마지막으로 대규모의 관중 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2010년대 들어 프로야구의 인기는 예전을 능가할 만큼 높아졌지만 그와 함께 관중의 세대교체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며 응원문화 자체가 전체적으로 예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물론 2011년의 문학구장 소요사태를 보자면, 폭력성 자체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듯도 싶지만...

 

(사진 6 : 대한민국의_흔한_캠프파이어.jpg) 

 

 - 독재정권과 지역감정에 기대어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이제 그러한 요소들과는 별 관계없는 관중들로 경기장을 꽉꽉 채울 수 있을만큼 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합니다. 물론 당시의 극성맞은 응원문화를 그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폭력과 지역감정이 난무하던 시절보다는 응원하는 재미는 좀 덜해도 순수하게 야구를 즐기기에는 더 좋아진 지금이 그나마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게 글쓴이의 생각입니다. 물론 지금도 선수에 대한 욕설이나 관중난입 정도는 존재한다지만, 그라운드가 물병과 맥주캔으로 뒤덮일 일이 별로 없게 됐다는 게 어딥니까. 

 

참고 1 :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newsid=20130118152706823

참고 2 :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E%A0%EC%8B%A4%EA%B5%AC%EC%9E%A5%20%ED%8C%A8%EC%8B%B8%EC%9B%80%20%EC%82%AC%EA%B1%B4 (엔하위키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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