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는 흔히 <내가 고자라니>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존인물 심영(1910-1971?)은 일제강점기 유명 배우우이자 친일 연극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로 전향하여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한반도의 연예인들 중에서는 심영처럼 친일/좌익 콤보를 밟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는 고자라니 말고 '진짜' 심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존인물은 적어도 고자는 아니었다는군요]



1. 조선의 슈퍼스타 심영


 - 심영의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입니다. 일단 심영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견이 나뉘어 있는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 서울로 이주하였다는 주장이 있고, 아예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심영이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분명한데, 의정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現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고 합니다(인터넷에서 찾은 정보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


 - 이 무렵 심영은 무용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데, 단순히 무용만 하러 다닌 게 아니라 이런저런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던지 심영은 사회활동 참여를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심영은 한국 최초의 극단(劇團) 중 하나인 '토월회'와 연을 맺게 되는데, 토월회 연구생 신분으로 몇몇 연극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연기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 심영은 1929년 <간난이의 설움>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연극계에 데뷔하였고, 여기서 호평을 받은 그는 다음해 <남경의 거리>의 1막 주인공으로 깜짝 캐스팅된 것을 계기로 스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심영의 연기력은 바다 건너까지 알려져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가히 1930년대 초 심영은 조선 최고의 인기스타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30년대 심영.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잘 생겨 보이긴 합니다. 1937년 12월 2일 동아일보]


 - 다만 1930년대 후반 들어 새로운 대스타 황철(1912-1961)이 등장하며 심영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두 배우는 <춘향전> <단종애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에서 함께 출연하여 인기 경쟁을 벌였는데, 1936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심영과 황철이 각각 홍도 남편(이쪽이 악역), 홍도 오빠('홍도야 울지 마라' 노래에 등장하는 그 오빠)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둘의 인기는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2. 친일에서 좌익으로


 - 인기를 빼앗겨 삐뚤어진 것인지, 심영은 이 무렵부터 친일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1939년 심영은 극단 고협 대표로 취임하였는데 이 극단은 적극적인 친일 성향 단체로, 주로 한다는 일이 농어촌을 순회하며 일본 프로파간다 공연을 한다든지 만주에서 중일전쟁 참전 중인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한다든지 하는 짓이었습니다.


 - 심영은 극작가 박영호, 연출가 나웅 등과 함께 고협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의 서울 불광동 일대에 '고협촌'이라는 연극인 마을을 만들고 집단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협은 1940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연극문화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심영은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는 와중에 일본 프로파간다를 위한 연기 활동에도 다수 참여하였습니다.


 - 1943년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심영은 일어극(日語劇) 부문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고, <너와 나> 등 친일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여 연기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주도하는 고협에서도 <빙하>니 <해당화 피는 섬>이니 하는 일본 프로파간다 연극을 다수 공연하였고, 거기에 심영이 출연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적극적 친일파로 맹활약하던 도중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 기대고 있던 기둥을 잃어버린 심영의 선택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좌익'이었습니다(이전 글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당연히) 극렬한 반공주의 집단이었습니다). 심영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좌익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일제강점기까지도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광대'였던 연예인들이 (친일을 했든 않았든)만인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3. 고자......는 되지 않았지만


 - 어쨌든 심영은 해방 후 좌익 계열 연극단체인 '연극동맹'에서 활동하면서, 이번에는 친일 대신 좌익 성향의 연극을 다수 공연하고 다녔습니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에 심영은 당연히 우익 쪽의 주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1946년 박영호 작 <님>(<야인시대>에도 등장하지만 실존 작품이기도 합니다)을 공연하고 이동하던 도중 김두한 일파에게 습격을 받고 영 좋지 않은 곳이 아니라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심영 피습사건 기사. 1946년 3월 16일 동아일보]


 - 그 때 김두한은 실제로 심영이 입원한 병원에 쳐들어갔고, 그에게 해코지를 하려다가 그의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누그러져 협박만 하고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김두한 본인의 증언으로 100%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이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 <야인시대>의 해당 부분). 심영은 총상에서 회복한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에는 파업 선동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 아마 이쯤 되자 남쪽에서는 더 이상 좌익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는지, 심영은 1947년 말 월북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좌익 활동을 용인하던 미군정이 점차 좌익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남로당 등 많은 좌익 계열 인사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담으로) 심영의 라이벌이었던 황철 역시 좌익 계열 활동을 하다가 1948년 8월, 즉 분단 막판에 월북하였습니다.


 - 월북 이후에도 황철과 함께 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습니다(황철은 전쟁 중 오른팔을 잃었고, 의수를 끼고도 열연을 거듭하여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연극인 등 여러 연예인들을 강제 납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당시 끌려갔다가 탈출한 최은희(1926-)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군복 차림으로 와서 여러 연예인들을 납치해갔다고).


 - 그렇게 요란하게 북한으로 건너간 심영이지만, 최후는 분명치 않습니다. 남로당 숙청 때는 같이 숙청되었다가 어찌어찌 복권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71년 다시 숙청되어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5. 정리 : 연예인의 친일


 - 우리에게 이상한 쪽으로 잘 알려진 심영을 선택하였는데,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문화예술인(특히 연예인)들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노선을, 해방 직후에는 좌익 노선을 택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블로거는 그들의 선택을 '광대'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 일제강점기 이후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인기 연예인들은 사회적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연예인에 열광하면서도 그들을 조선시대까지 천시당하던 '광대' 취급하곤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으레 복잡한 행보를 거듭하기 마련, 많은 수의 연예인들은 권력에 영합하여 입지를 넓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세상에 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런 그들에게 만인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는 하나의 복음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친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해방 이후 좌익에 경도된 것은 이상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심영 뿐 아니라 황철, 문예봉, 신불출 등 당대 인기 연예인 중 많은 수가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월북하여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북한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 사회는 아니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숙청 등으로 쓸쓸하게 퇴장하였습니다.


 - 그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인기 연예인의 친일 행위는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통치 수단이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능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체제에 영합한 연예인들은 각종 공연과 위문행사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당대 일본의 프로파간다를 심는 데 앞장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 연예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근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의 정치적 행보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들이 정치적으로 가진 영향력과 이를 부당한 권력 유지를 위해 악용해 온 과거 때문일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연예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20233#url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388568 (황철 일대기 1부. 중간에 심영과의 라이벌리가 언급되어 있음)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0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6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른 곳과 설명이 좀 다른데 참고용으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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