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은 한국인에게 정치에 대한 권한을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하죠.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문을 열어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수작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실현되기도 전에 끝납니다. 그런데 굳게 닫힌 문을 뚫고 일본 의회에 입성한 한국인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박춘금(1891-1973)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기적적인 출세를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춘금]



1. 물 건너간 조폭, 정치에 맛들이다


 - 박춘금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빈민층이라 학력이랄 건 딱히 없었고,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 정도를 배운 게 학업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나이 14세 때 러일전쟁이 터지자 한반도 전체는 사실상 일본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고, 박춘금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밑으로 들어가 급사(심부름꾼)로 일했습니다. 여기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익힌 그는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 광부 등 육체노동을 전전하게 됩니다.


 - 그런데 이 사람은 폭력배 기질을 타고났는지, 이후 폭력조직에 몸담고 나고야에서 조선인회장에 취임하는 등 거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무렵 박춘금은 그의 인생 길을 활짝 열어 줄 인연을 얻게 되는데, 극우 사상가인 도야마 미츠루(1855-1944)와 교류하게 된 것입니다. 도야마는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비밀결사(사실상 폭력조직) 흑룡희의 막후 실세이기도 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일본 극우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도 평가됩니다.


[도야마 미츠루. 그가 배후조종한 폭력집단은 이후 현대 야쿠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 그와 교류하면서부터 박춘금은 본격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1920년에는 이기동(1885-1952) 등과 함께 도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규합한 상구회(相救會, 이후 상애회(相愛會)로 개편)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는데, 이는 겉으로는 사회사업 단체였지만 실제로는 폭력조직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한국인 노동자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뒤에서는 일본인 자본가를 도와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에 앞장섰습니다.


 - 1923년 관동대지진에 이어 대규모의 한국인 학살이 벌어지자 상애회는 시체 처리와 한국인 색출(!!) 등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하였고(이들이 한국인임을 잊지 맙시다), 이후 당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박춘금은 상애회 조직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1924년에는 한국에도 지부 개념으로 '노동상애회'를 조직한 후 친일조직인 '각파유지연맹'에 동참하였습니다.


 - 이를 두고 동아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극딜을 퍼부었는데, 이에 박춘금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정(요릿집)으로 초대한 후 납치, 폭행 및 협박하는 위엄 넘치는 테러행위로 보답했습니다. ㅡㅡ; (이후 이 사건의 전말을 놓고 동아일보에서 난리가 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생략) 이후 노동상애회는 일본에서 하던 짓 그대로, 하의도 소작쟁의 등 한국인의 저항운동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데 협력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2. 정치깡패, 제국의회 입성!


 - 박춘금을 '정치깡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조직 활동이 철저히 정치적이었으며 일본 정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만드는 등 정치와 밀착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박춘금과 상애회의 맹활약이 일본의 지배층을 꺼뻑 죽게 만들기에 충분했는지,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 정계에 합류하였고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 당선되기에 이릅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한국인 중의원이었습니다.


[당선 확정 후 환호하는 박춘금과 지지자들]


 - 이후 박춘금은 제국의회 중의원으로 4년간 활동하다가 1936년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절치부심(?)하여 1940년과 1942년 선거에서는 다시 당선되었습니다. 중의원 내에서 그가 목소리를 낸 것은 주로 조선인 참정권이나 조선 내 일본군 증원과 같은, '한국에 대한 차별 완화' 쪽이었습니다(이에 대한 비판은 앞 글들에서 많이 언급했으니 생략).


 - 그러니까 그는 제국의회 내 유일한 한국인으로 (딴에는)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한 셈인데, 실상 이것은 한국을 일본에 완전히 편입시키는, 독립운동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제국의회 내에서 유일한 한국인이다보니, 박춘금의 활동과 발언들은 다른 중의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 나름 사회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이 됐으니 예전처럼 대놓고 깡패질은 못 할 테고, 대신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광산 경영 등 이권사업에 손을 대며 자신의 뱃속을 실컷 채워나갔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이 전쟁체제에 들어가자,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국강연을 여는 등 군국주의의 충실한 스피커 노릇을 다하게 됩니다. "학도병이 사오천 명쯤 죽어서 2500만 민중이 잘 된다면 더 좋을 게 없지 않은가" 따위의 망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 1945년 초 박춘금은 친일단체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이사에 취임하고, 얼마 뒤에는 또 다른 친일단체 '대의당'을 조직하였습니다. 해방 직전인 7월 24일 대의당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 조문기(1927-2008), 강윤국(1926-2009), 유만수(1923-1975)가 설치한 폭탄이 터지며 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항일 사건으로 '부민관 폭탄 의거'라 불립니다.


[사건이 발생한 경성부민관(現 서울시의회 건물)]


 - 이 사건을 전후하여 총독부에서는 반일인사 30만여 명을 체포,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박춘금은 데인 게 있으니까 여기에 적극 동조하였습니다. 부민관 사건을 계기로 8월 8일부터 반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고, 이들의 운명은 경각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3. 해방 이후


 - 일주일 후에 덜컥 해방이 되었고, 체포당한 인사들이 일제히 풀려났습니다. 이 와중에 박춘금은 잽싸게 우디르 태세를 전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거액을 헌납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ㅗ" 뿐이었습니다. ㅡㅡ; 한국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눈치챈 박춘금은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가만 놓아 줄 이유가 없지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발족한 반민특위는 해외로 도피한 친일분자들도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GHQ와 맥아더에게 박춘금을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반민특위는 얼마 뒤 와해되었고, 박춘금은 한국으로 끌려가는 일 없이 일본에 그대로 눌러앉게 됩니다.


[박춘금의 일시 귀국을 다룬 기사. 1962년 5월 27일 경향신문]


 - 이후 그는 일본에서 재일교포 유지 노릇을 하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통칭 민단) 창설에 관여하여 고문을 맡기도 했고, 조국통일촉진협의회니 일한문화협회니 하는 사회단체를 조직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놓지 않았습니다. 1962년에는 아세아상사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돌연 한국을 방문하여 며칠간 고향(밀양)에 체류하였는데, 한일회담 문제로 시끄럽던 시기라 악질 친일파인 그의 방문이 큰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 이후 1973년 사망하였고, 그의 유해는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의 아버지 묘소 곁에 묻혔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1992년 일한문화협회에서 그의 무덤에 송덕비(!!!!)를 건립하면서 박춘금의 이름이 다시 세간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고향 밀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쇄도했고, 결국 2002년 송덕비는 철거, 그의 무덤은 파묘하기에 이릅니다.


[박춘금의 무덤과 송덕비 앞에서 벌어진 항의 시위]



4. 정리 : 정치깡패는 답이 없다


 - 블로거의 생각에, 그의 일생을 정리하려면 '친일파'보다는 '정치깡패'에 중점을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의 삶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정치깡패들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박춘금은 자신이 가진 힘을 가지고 기득권층을 위하여 피지배민을 착취하고 억압하였고, 나아가서는 이 활약(?) 바탕으로 자기 자신이 기득권의 일원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 그에게 있어서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은,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일본 정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을 탄압하는 한국인'으로써 일본의 식민 지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니까요. 이를 좀 스케일 크게 벌임으로써 일본인 부럽지 않은 권력자까지 될 수 있었던 셈인데, 그런 그가 해방 후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고향을 찾았던 것이 또 웃기는 노릇입니다.


 - 박춘금이 몸담았던 일본의 암흑세계는 이후 야쿠자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의 큰 사회문제로 각종 이권사업과 정치에 관여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특히 시작이 그랬던지라 이들은 일본 우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해방(일본 입장에서는 패전) 이후 일본의 좌익·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테러에도 앞장서게 됩니다. 이 야쿠자 조직에는 많은 수의 재일교포가 참여해 왔습니다(이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어려웠기 때문).


[민단 중앙본부가 위치한 도쿄 한국중앙회관]

 - 박춘금은 해방 이후 재일교포 사회에도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북분단 이후 재일교포 사회 역시 조총련(좌익, 친북)과 민단(우익, 친남)으로 갈라졌는데, 우익 측 민단에는 박춘금 등 정치깡패 출신자들과 현직 야쿠자까지 대거 참여하여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야쿠자 중요 인물인 양원석(야나가와 지로, 1923-1991)의 경우 민단에서 야쿠자를 몰아내려 노력하던 지부장 김용환을 대놓고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 이들이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 때문에' 폭력배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폭력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더구나 그 폭력을 그 차별의 주체인 강자를 위하여, 약자를 향하여 발산했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들 뿐 아니라, 세계 대부분 지역의 폭력집단이 공통적으로 가진 성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느 사회에서든지 조직폭력배는 척결해야 할 암덩어리 이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협객? 의리? 그딴 거 없습니다. 정말로.]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2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3121 (경남도민일보 특집기사)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iBzz&fldid=EnMW&datanum=30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151 (흑룡회 관련)

https://www.minjok.or.kr/archives/76257 (동아일보 사주 폭행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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