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terich Buxtehude (1637?-1707)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비올을 연주하는 북스테후데. 생전의 그를 그린 유일한 그림]


 - 북스테후데는 17세기 북부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특히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의 초년에 대하여는 기록이 부족한데(그래서 출생년도가 불분명) 일단 출생지는 스웨덴(당시에는 덴마크령)의 헬싱보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오르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헬싱보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던 북스테후데는 1668년 뤼베크로 이주하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는 당시 크고 아름다운 대형 오르간과 소형 오르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츠 툰더(1614-1667)의 후임자로 부임한 그는 툰더 시절에 시작된 '저녁 음악회(Abendmusik)'를 발전시켜 큰 인기를 끌었고, 오르간 연주자로도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 그런데 이 자리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으니 전임자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ㅡㅡ; 북스테후데 역시 부임 이후 툰더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7명의 딸을 낳았다니 금슬은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후 북스테후데는 남은 평생을 뤼베크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많은 제자를 두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 음악가들과도 교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요한 파헬벨(1653-1706, 카논 변주곡의 원작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 수십 년이 지나 그가 노년이 되자 후임자 선정이 이슈가 되었는데, 이 무렵 헨델(마테존과 함께)과 바흐가 각각 1703년과 1705년에 그를 방문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특히 바흐는 자신이 일하던 아른슈타트의 교회에서 4주간 휴가를 얻어 400km나 떨어진 뤼베크로 왔는데, 북스테후데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복귀를 늦추고 4달 동안이나 머무르며 그와 교류하였습니다.


 - 북스테후데는 헨델과 바흐의 재능을 알아봤는지 후임자 자리와 함께 자신의 큰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는데, 큰딸을 본 두 사람은 하나같이 제안을 거절하고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ㅡㅡ; 음...... 결국 그는 큰딸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얼마 뒤 요한 쉬페르데커(1679-1732)가 큰딸과 결혼하면서 그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 당시의 음악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북스테후데 역시 다양한 장르에 수많은 곡을 썼는데,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300여 곡 정도가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50곡 정도입니다. 그나마 후대의 작곡가들(바흐 등)이 그의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이 정도라도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종교 음악이며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간결한 형식이 특징입니다. 파사칼리아 d단조는 그가 쓴 유일한 파사칼리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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