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 겸 소설가 유진오(1906-1987)는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그가 한때 사회주의자였고, 이 경험이 그의 학문 및 사상체계의 기반이며 그가 만든 헌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학문과 문학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한 나라의 헌법을 쌓아올렸으면서도 그의 인생은 항상 억압과 고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를 돌아본다면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들의 모순적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유진오

 

1. 명문가의 자식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유진오는 1906년 한성부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치형(1877-1933)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하다가 멸망 후 퇴직하여 한성은행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유치형은 근대 학문을 공부하였지만 일상에서는 구시대적 관습을 고수하였고, 유진오는 이러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억압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결혼 또한 부모에 의하여 14세 때 해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에서 온 근대문학은 하나의 해방구였으며, 근대적 개인주의를 접하는 창구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現 대학로에 위치했던 경성제국대학


 이 시기의 여러 지식인들처럼 유진오 역시 대단한 수재였는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예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한때 철학과로 전과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였고,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 교수 등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이었는데 이 영향을 받아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

 재학 중 유진오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에 참여하고, 정치적 성향 때문에 일본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졸업은 수석으로 무사히 했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은 구시대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사유체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그 역시 개인과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이상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진오와 교류하던 인물 중에는 경성제대 1년 후배이자 오랜 동료로 해방 후 북한 헌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최용달(1904-1953?)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1929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연구소 조수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낙산구락부(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학문을 통한 사회운동을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는 훗날 남로당의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되는 리강국(1906-1956)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일본 당국에게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1933년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유진오는 이를 마지막으로 실천적 사회운동에서 사실상 발을 빼고, 학문연구의 길에 집중하게 됩니다.

 

2. 사상과 행동의 괴리, 그리고 그로부터의 해방

 유진오는 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경성제대 교수를 목표로 학문에도 매진하고, 재학 중이던 1927년 소설가로 등단한 후에는 틈틈이 작품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처참히 실패하고, 목표하던 경성제대 교수직 역시 한국인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에게 스카웃(?)되어 동료 최용달 등과 함께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수로 직을 옮겼습니다.

 학자로서 유진오가 천착한 분야는 서양 법사상, 법률이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추인 제국대학을 나왔지만, 동시에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개인주의와 단체(전체)주의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 시대를 해석하고,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체계의 기초였지만 동시에 실천적 동기로 작용하지는 못하였고, 이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천성과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모순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이에 대한 고민은 그의 소설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

 그런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앙드레 지드(1869-1951)가 소련에 다녀온 후 1936년 <소련 기행>을 써 소련 체제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처음에 소련을 지지했던 지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이 정작 획일성과 비판정신 결여로 물든 전체주의 사회였다고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는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유진오는 지드의 비판을 접하고 마음 속에 남아있던 고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버리지 못하던 사회주의의 현장이 결국 파시즘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 마르크스를 붙잡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다가왔겠지요. 그는 지드의 전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벌여 좌익 문학계와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9년을 기점으로 결국 친일 노선으로 완전히 전향하고 말았습니다. 이 해 그는 법학 교수를 그만두고 작품활동에 집중하였으며, 동시에 친일 성향 논설을 언론에 발표하거나 친일 문학단체에 참여하는 등 전형적인 친일 부역자 행보를 걷게 됩니다.

 

3. 해방 이후 :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그는 1944년 퇴계원으로 낙향하였다가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로 복귀하였습니다. 당시 유진오는 이미 독보적인 헌법학자로 그 위상을 얻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새로 수립할 국가의 헌법 초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는 그가 만든 초안을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논의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헌법(제헌헌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헌법을 매개로 정치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초대 법제처장에 취임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법령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유진오가 직접 쓴 헌법 초안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그의 사상을 이루는 중요한 한 줄기로 남았습니다. 우익과 좌익의 전체주의를 모두 배격한 그가 헌법의 모델로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었습니다. 이 위에서 유진오는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연구해온 모든 법적 지식과 사상을 쏟아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개헌과 많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대한민국 헌법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 없는 헌법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헌법 제정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진오는 헌법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하였지만, 이것이 좌익 용어가 아니냐는 윤치영(1898-1996)의 반발 때문에 모든 단어를 '국민'으로 바꿔야 했고 그는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합니다. 당시 그는 좌익 전력 때문에 이런저런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관철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정부 전횡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헌법에 반영하려 하였으나,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를 원한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채택되었지요.

 

4. 만년과 죽음

 아무튼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1949년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1952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1965년까지 장기간 재임하였습니다. 총장 재직 당시 고려대학교 운영에 수완을 발휘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1960년 4.19 혁명 때는 4월 18일 국회 앞까지 행진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설득하고, 경찰의 안전 귀가 약속까지 받아 시위대를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귀가 도중 시위대가 깡패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며 혁명의 확산에 본의 아니게 중요한 역할을 한 바도 있습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반대농성을 밤새 지휘하는 유진오(오른쪽 아래). 1969년

 총장 퇴임 이후 유진오는 한동안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는데, 196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윤보선과 단일화하며 사퇴한 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에는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여 3선개헌 반대 운동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1969년 뇌졸중이 발병하여 이듬해 총재직을 사임하고, 1971년에는 국회의원에 불출마하면서 오래 활동하지는 못하고 정계은퇴를 하게 됩니다. 이후로는 병석에서도 유신 반대 운동에 이름을 올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80년 돌연 신군부가 만든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민주화 세력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진오는 6월항쟁 이후 개헌 논의가 진행되던 1987년 8월 사망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오랜 기간 재직하며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그의 빈소를 설치하고 추모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보니 일부 학생과 교수진은 친일 부역을 한데다 전두환 정권에도 원로로 참여한 인물을 추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반발하고, 학내에서 이와 관련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5. 정리 : 우리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처럼 유진오 역시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역사적인 법학자로, 혹은 근대문학에 큰 흔적을 남긴 소설가로 기억할 수도 있고, 적극적 친일부역자 내지 변절자, 전두환 군부 협력자로 기억할 수도 있지요. 사실 그 모든 것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에서는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최대한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진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유진오가 기초한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그가 불과 수 년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스피커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고, 이를 볼 때는 또 몇 해 전까지 그가 사회주의를 신봉한 법사상가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지요. 어쩌면 그 모순이야말로 유진오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였을지 모릅니다. 구시대와 근대의 모순 속에서 성장하여,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 가운데 학업을 잇고, 실천적 사상과 실천하지 않는 현실의 모순 속에 갈등하며 삶을 지낸 것이 그의 일생이었지요. 어쩌면 그의 친일행각은 그 모순을 억지로 지워버린 데서 나온 치명적인 오류였을지도 모릅니다.

유진오 빈소 관련 시위를 다룬 뉴스. 경향신문 1987년 9월 2일

 네. 그를 바라보는 블로거의 시선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친일 부역자를 비판하던 사람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애매한 말만 지껄이고 있을까요? 물론 블로거는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친일인명사전 등의 목록에 오르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업적(?)들을 남긴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헌법 초안이나 친일행각 전후의 모습들을 보면 전혀 모순되는 그 모습들 또한 유진오 자신의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순이야말로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은 아닐까요?

 여담으로, 그의 동문이며 오랜 기간 함께 일한 최용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시골 자작농의 아들로 성장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더 실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유진오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친일로 돌아서던 시기 그는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리게 되지요. 해방 후 그는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고 일찌감치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의 법체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헌영과 남로당계가 몰락할 때 그 역시 사라졌고, 아마도 함께 숙청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참고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사, 2008.
한국교육신문, "⑭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 植民기획 부정한 지식인… 미친놈 취급받으며 불행 감내" (www.hangyo.com/news/article.html?no=898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치형"
한국어 위키백과 "유진오", "앙드레 지드"
나무위키 "유진오", "최용달"

 


 - 지금은 거의 사라진 20세기의 직업으로 식자공(植字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직역하면 '글자를 심는 장인'이라는 뜻인데, 인쇄를 위한 활판에 활자를 배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아마 활판에 활자를 심어넣는 것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이 직업은 나름 전문직이었고 꽤 잘 나갔다고도 하는데,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가 대세가 되면서 불과 이삼십 년 사이에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일보의 식자공. 출처]


 - 실제로 식자공이 활약하던 시대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절이었던데다 활자의 특성상 좌우가 뒤집힌 글자를 노상 판독해야 하기 때문에, 식자공으로 일하려면 글을 해독하는 능력은 기본에 고도의 숙련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특히 인쇄 과정이 분초를 다투게 마련인 신문 인쇄에서는 때때로 식자공이 임시 편집자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된 식자공은 비교적 대우가 좋고 인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숙련된 식자공이라도 깨알같이 배열된(심지어 좌우가 뒤바뀐) 수백 수천 자의 한자들을 완벽하게 구별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간간이 오타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 오타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20세기 독재정권 시절 이야기입니다.




1. 대구매일신문의 수난


 - 대구매일신문은 1946년 '남선경제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어 몇 차례의 제호 번경을 거쳐, 현재는 '매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는 대구의 지역신문입니다. 6.25가 발발하여 온 나라가 쑥대밭이던 1950년 8월 29일자 대구매일신문 1면 기사 중, '이(승만)대통령李大統領'이라는 글자가 '이견통령李犬統領'으로 인쇄되는 오타가 나왔습니다. 大(큰 대)와 犬(개 견)의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식자공이 혼동한 것입니다. 설마 의도적인 건 아니었겠지


 - 오타야 아무리 노력해도 간간이 나오기 마련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헷갈린 글자가 '개'를 뜻하는 한자였다는 데서 문제가 커집니다. '대통령'이 '견통령'으로 둔갑했으니, 요즘 말로 표현하면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본의 아니게 욕해버린 겁니다. 요즘이라면야 그냥 짤방 해프닝으로 웃고 넘어가겠지만 당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이 하나의 오타가 추상같은 독재권력의 높으신 분들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 결국 오타 하나 냈다는 이유로 사장이 구속되고 편집주간은 사임했으며, 신문사는 무기정간 조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장 이상조는 2개월 후에야 풀려났지만 신문사 운영을 더 못하고 회사를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후 천주교 쪽에서 신문사를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관련기사. 1955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3면.]


 - 그런데 꼭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대구매일신문은 이승만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55년에는 관제데모 학생 동원을 비판하는 사설이 신문에 실리자, 자유당이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신문사를 때려부수고 여러 직원을 다치게 한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경찰 간부의 망언은 길이 전설이 되었습니다.




2. 후폭풍 : 언론사의 오타 노이로제


 - 이후로도 대통령 오타 사건은 몇 차례나 더 벌어졌습니다. 1953년에는 전북의 삼남일보와 충북의 국민일보(지금의 국민일보가 아님)에서 동일하게 '견통령'이라는 오타를 내서 홍역을 치렀고, 국민일보는 몇 달 뒤 똑같은 오타를 한 번 더 내는 바람에 아예 폐간당하고 말았습니다. ㅡㅡ; 이듬해에는 부산일보에서 '이승만 대령'이라는 오타를 냈는데, 이 때는 욕설은 아니어서인지 주의조치만 받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 다른 오타도 있습니다. 1955년 동아일보는 활자 배치를 실수해서 다른 기사에 들어갈 '괴뢰(꼭두각시)'라는 글자를 '고위층 재가 위해 대기 중'이라는 제목 앞에 붙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괴뢰 고위층'이라는 말이 나온 건데, 괴뢰는 북한에 붙는 수식어였고(흔히 말하는 '북괴') 당시에 고위층이라 하면 이승만의 최측근을 말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역시 난리가 났습니다. 다행히 360부만 발행하고 수정이 됐지만 책임자가 해임되고 신문사는 1개월 정간을 당했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견통령'을 검색하면 이게 의외로 흔한 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ㅡㅡ;]


 - 일이 이렇게 되니 신문사들은 오타, 특히 '대통령' 같은 중요 단어에 대한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실수 한 번에 신문사가 날아가게 생기니 각 신문사들은 아예 '개 견犬' 자를 활자에서 없애버리거나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ㅡㅡ;


 - 이것도 어찌 보면 필화(筆禍), 혹은 문자옥(文字獄)이라 하겠습니다. 글자 하나에 꼬투리를 잡아 지식인을 탄압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인쇄했다면 기분이야 좋지 않겠지만, 이런 사소한 오타에 공권력의 탄압까지 가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일환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오타 하나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마당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대놓고 실을 엄두가 날까요?




3. 요즘에도 오타는 나오지만......


 - 1990년대 이후 인쇄에 컴퓨터가 사용되고 활판이 퇴출되었지만, 요즘의 인쇄물에도 간간이 오타는 나옵니다. 몇 쪽 이상의 긴 글을 써 보았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글 어딘가에 오타가 숨어 있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ㅡㅡ; 어쩌면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일에 대한 인간의 집중도는 떨어뜨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 그래도 요즘에는 그 오타 하나로 누군가가 고초를 치를 일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2012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1면 톱기사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오타(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퇴임)를 냈을 때도 네티즌들의 비웃음과 함께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난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셀프 탄핵 2013년 아시아경제는 '자치단체'를 '자X단체'로 인쇄하는 오타를 내고, 다음날 "19금 바로잡습니다"라는 희대의 정정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ㅡㅡ; [기사보기]


[조선일보의_속내.jpgee 출처]


 - 물론 오타가 자꾸 나온다는 게 언론의 입장에서 바람직할 리는 없습니다.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 차이로 '대통령'이 '개통령'으로 변신하는 식의 의미 전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식자공의 시대에 비해 훨씬 편리해진 작업 환경에서 이런 오타가 나온다는 것, 특히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기사에 툭하면 발견되는 대량의 오타들을 보자면 한국 언론의 최근 수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여담으로 언론의 오타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한국 뿐 아니라 독재정치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나라의 공통된 현상인 것 같습니다. 2011년 인민일보는 당시 총리 원자바오의 이름(溫家寶)을 '溫家室(찜질방이라는 의미가 있음)'으로 찍어 내는 바람에 무려 17명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ㅡㅡ; [로동신문의 오타 검열]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매일신문",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한국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Google 도서검색)

노컷뉴스 "이승만 견통령, 대령… 막 나가는 언론 열전"

머니투데이 "대통령이 '犬통령'..오·탈자 사고 처벌사례 보니"

머니투데이 "사라진 식자공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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