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Field (1782-1837)
Nocturne No.2 in c H25


 - '녹턴(Nocturne)'이라는 단어는 '밤의 기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Noturnus'에서 유래하였는데, 중세부터 쓰여 왔으며 당시에는 예배 용어로 쓰였습니다. 이후 18세기에 'Notturno'라는 명칭으로, 주로 저녁이나 밤에 연주되는 연회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녹턴은 이후 19세기 들어서는 밤의 고즈넉하고 때로는 고독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주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악곡의 장르가 되었는데, 대중에게는 쇼팽의 녹턴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녹턴'이라는 장르를 창시한 인물은 존 필드입니다.


 - 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얼마 뒤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집안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어릴 적에 이미 재능을 보여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에게 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대단해서 12세 때 이미 웨일스 공(영국의 왕세자) 주최의 음악회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며, 20세 때는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클레멘티와 함께 전 유럽에 순회 공연을 떠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 전 유럽에 걸쳐 진행된 순회 공연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끝났는데, 여기서 필드는 스승과 헤어져 그대로 러시아에 정착하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드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함께 교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중 한 명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최초의 녹턴이 만들어졌고, 필드는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 러시아 내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기반으로 모스크바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821년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주하였습니다. 이 무렵 필드는 상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는데, 그 결과 보드카 알코올 중독이 찾아왔고 자연히 건강도 악화되면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1820년대 후반에는 직장암까지 발병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치료 차원에서 오랜만에 서유럽으로 떠났습니다.


 - 필드는 요양차 서유럽에 와서 겸사겸사 음악 활동도 재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멘델스존 등의 음악가들과도 만나 교류하였습니다.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는 당시 이미 쇼팽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첫 녹턴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드와 쇼팽을 비교하기도 했고, 쇼팽이 필드의 제자 아니었냐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습니다(음악을 들으면 알겠지만 둘의 스타일은 꽤 다름). 쇼팽은 필드의 음악에 관심은 있었지만, 썩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는군요.


 - 서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수술을 받는 등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지만 필드의 건강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폴리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러시아에 있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18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 필드는 마지막 몇몇 작품들을 작곡하고 마지막 음악회를 수행한 후, 1837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피아니스트답게 작품 중 많은 수는 피아노곡이며, 그 중에서도 자신이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 녹턴이 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필드의 음악은 쇼팽이나 리스트와는 달리 간결한 테크닉과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노래'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의 녹턴은 18곡 정도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녹턴으로 보기 애매한 작품이나 번호가 붙지 않은 작품도 있어 작품 수는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1859년 출판된 악보에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