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완(중화민국)이 총통(대통령)선거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제14대 중화민국 총통 선거는 2016년 1월 16일에 투표가 시행되며, 세 명의 총통 후보가 출마한 상태입니다. 타이완의 총통 선거는 러닝메이트 시스템으로, 총통 후보와 부총통 후보가 하나의 후보로 함께 출마하게 되어 있습니다(미국 대통령 선거와 동일).


 - 타이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범람연맹'과 민주진보당을 중심으로 한 '범록연맹'입니다. 양대정당의 상징색이 각각 남색과 녹색인 데서 유래한 명칭이죠. 두 세력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타이완의 정체성'으로, 즉 '중화민국'이냐(범람연맹) '타이완'이냐(범록연맹)의 차이입니다. 이외의 정치적 노선 차이가 크지는 않으나, 대체로 범록연맹 쪽이 조금 더 진보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현재 세 후보의 소속 정당은 범람연맹측에서 둘(중국국민당, 친민당), 범록연맹측에서 하나(민주진보당)입니다.



1. 타이완은 어떻게 한족의 땅이 되었는가


 - 타이완의 정치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타이완의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이완이 중국의 영역에 온전히 들어온 것은 17세기로, 그 이전 타이완을 지배한 원주민은 현재 태평양 종족(오스트로네시아)의 조상쯤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17세기 이전에는 몇몇 역사기록에 단편적으로만 등장하던(중국 문명은 몇몇 시기를 빼고는 해양 진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요) 타이완이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은 웃기게도 중국이 아닌 유럽 문명에 의해서입니다.


 - 유럽인이 타이완 섬에 최초로 상륙한 것은 1590년,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들은 타이완에 상륙하였지만 정착하지는 않고, 숲이 우거진 타이완을 '일하 포르모사(아름다운 섬)'이라 명명하고 떠나갔습니다. 이 무렵 대륙의 명 제국이 파탄 상태에 빠지면서 타이완의 주변 해안지역(푸젠 성, 저장 성)의 주민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으니 한족이 타이완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입니다.


 - 1624년 타이완 섬 근처의 펑후 제도를 점유중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명 제국과의 협의를 통하여 펑후 제도와 타이완 남서부를 교환하게 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현재의 타이난 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이 일대의 토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노동자를 대규모로 모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족의 이주가 본격화됩니다. 타이완 섬 북부에서는 에스파냐가 성을 건설하고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는데, 두 세력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고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를 몰아내는 결말을 맞습니다.


 - 다만 네덜란드의 천하도 얼마 가지 못하여, 1661년 남명(南明) 계열의 정성공(1624-1662)이 바다를 건너 타이완 섬을 공격하였고 네덜란드는 1662년 타이완 섬에서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정성공은 그 직후 사망하였는데, 그 일족은 3대에 걸쳐 타이완을 지배하였고 이들의 '정씨 왕조'는 1683년 청 제국에 의하여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 청 제국의 정복 이후에는 한족의 이주가 가속화되어, 이제 타이완 섬의 주역은 완전히 한족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근대 이전까지 타이완 섬에 이주한 한족을 '본성인'이라 하며, 이들은 대부분 푸젠, 저장 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언어('대만어') 또한 이 지역의 언어와 유사합니다. 원주민 중 서부의 평지에 살던 부류는 '평포족'이라 하며 이 시기 대부분 한족과 섞여 존재가 희미해졌고, 동부 산지를 중심으로 거주한 '고산족'은 현재까지 동화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 식민(植民)의 역사


 - 1874년 류큐(오키나와)의 어민들이 타이완 섬 동부에 표류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핑계로 타이완 섬에 출병, 원주민들과 전투를 치릅니다(모란사 사건). 당연히 이곳의 지배자인 청 제국은 강하게 항의하였고, 일본군 또한 풍토병(말라리아) 확산으로 더 이상의 전투가 곤란해져 둘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협상의 결과, 당시 명목상 중국-일본의 이중 속국이었던 류큐는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하에 완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 이후 청불전쟁(1884-1885) 때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파견된 류명전(1836-1896)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타이완 성(省)'이 설치되었는데, 타이완 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청의 시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면서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전쟁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은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였고, 이후 1945년까지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 일본의 타이완 지배는 큰 틀에서는 한반도 식민지배와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 시기 형성된 타이완인의 대일(對日) 감정은 한국인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복잡한 무엇이 있습니다. 타이완의 한족들에게는 이전의 청 제국 역시 사실상의 식민 지배자였고, 이들에게 청과 일본은 '외부의 지배자'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또한 (한족과 원주민을 가리지 않고) 일본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긴 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사건은 1930년 원주민의 일파인 아타얄족이 전개한 '우서 항쟁'.


 - 타이완 주민의 정치운동은 1937년 '지방자치연맹'의 해체와 함께 사실상 막을 내렸고,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타이완 역시 한반도와 비슷한 '황민화' 그리고 전시동원체제 속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연히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식민 지배는 막을 내렸고, 타이완의 주권은 청을 계승한 중화민국에게로 넘어갔는데 이것이 오히려 타이완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3. 외성인(外省人)의 독재, 그리고 민주진보당


 - 타이완이 중화민국 영토로 돌아온 이후에도, 당시 국공내전에 정신이 팔려 있던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 통치에 있어 딱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여 주민들의 불만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기 타이완의 통치는 본성인을 배제한 채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외성인)이 독점하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본성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 1947년 2월 27일,담배를 무단으로 팔던 한 노점상이 단속원에게 구타를 당하자 주변 사람들이 이들에게 항의하였는데,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면서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다음날 시작된 항의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졌고, 이들의 요구가 타이완의 자치와 인권보장으로 발전하자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1887-1975)는 국민혁명군을 파견하여 본성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2.28 사건). 당시 살해당한 본성인은 약 3만여 명에 달하며, 대규모 약탈까지 겹쳐 타이완 전역은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 타이완의 역사는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전하면서 한층 더 꼬이기 시작했는데, 국민당은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겨 목숨을 부지하였고 타이완은 수십 년간 계엄령이 발동된 상태로 장제스의 1인 독재 체제로 전락하였습니다. 당시 타이완의 정당은 오로지 중국국민당 하나뿐(북한에도 있는 관제야당 하나 없이!)이었고, 본성인 중심인 중국국민당 외의 다른 정치 활동은 철저히 탄압받았고 본성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대만어) 사용까지 억압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이러한 분위기는 1975년 장제스의 사후에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1978년 총통에 취임한 장징궈(장제스의 아들)는 정부에 본성인의 기용을 확대하는 등 전향적인 조치들을 시행하였습니다. 1986년 민주화 운동가들이 모여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선언하였는데, 이전과 달리 장징궈는 이들을 탄압하지 않았고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사실상 묵인하였습니다. 이들이 창당한 '민주진보당'은 다음해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후 타이완의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4. 양대정당 체제의 성립


 - 민주진보당은 1991년 <타이완독립강령>을 채택하면서 본격적으로 타이완 독립주의의 기치를 들었고, 이는 기존의 진보적 성격과 함께 민주진보당의 노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민주진보당의 행보는 기존 피지배층이었던 본성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현재까지 민주진보당은 '진보, 본성인, 타이완 독립주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물론 한국만큼이나 타이완의 정치 지형도 노선이 분명하게 나뉘지 않으며, 민주진보당의 '진보' 역시 그다지 좌파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자연히 중국국민당의 노선은 '보수, 외성인, 하나의 중국'으로 대표됩니다. 다만 중국국민당은 중화민국 중심의 중국 통일을 내세우고 있어,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일 노선과는 또 다릅니다. 즉 타이완의 독립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국민당이 함께 반대하지만, 타이완의 중화인민공화국 편입은 중국국민당과 민주진보당이 한 목소리로 반대하는 상당히 묘한 ㅡㅡ;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


 - 타이완 최초의 야당 민주진보당은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1950-)이 당선되면서 드디어 정권교체를 달성하였습니다. 범람연맹의 후보가 둘로 분열되었고(롄잔(1936-), 쑹추위(1942-)) 민주진보당 역시 기존의 타이완 독립주의를 상당부분 후퇴시키며(<타이완전도결의문> 채택) 중도층을 끌어온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천수이볜 정부는 경제 침체, 지지자들에게도 비판받는 반(反) 개혁적 행보 등이 겹치며 정권을 다시 중국국민당에게 넘겨주었고, 퇴임 이후 천수이볜은 희대의 부정부패 스캔들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일단 천수이볜과 지지자들은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합니다).


 - 일단 양측을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가 '국가적 정체성'이라고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력차가 너무 커진 것, 그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의 독립을 결사반대하고 있는 점 등이 겹쳐 있다보니 양당의 주장도 상당히 애매해져가는 경향은 있습니다. 중국국민당은 '본토 수복'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하며, 민주진보당 역시 예전처럼 강경한 타이완 독립주의를 주장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재의 실정입니다.


 - 현재의 타이완 총통은 천수이볜의 후임자인 마잉주(1950-, 중국국민당)가 재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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