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7일 방콕 도심의 에라완 사원 근방에서 폭탄테러로 인해 (18일 현재) 최소 21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태국 총리는 이번 테러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지지세력 쪽에서 태국의 관광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벌인 테러행위라고 주장하였고, 정부에서는 최근 중국으로 추방된 위구르 독립운동세력의 일원일 수도 있다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합니다. 이번 테러는 방콕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테러사건입니다. 관련기사


- 탁신 전 총리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닌데, 최근의 태국 정치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 탁신의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시위와 쿠데타가 빈발하는 등 그야말로 난장판입니다. 군부의 쿠데타는 태국 현대정치사에서 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며, 이것이 푸미폰 아둔야뎃(1927-, 라마 9세) 현 국왕의 권위와 뒤엉켜 현대 태국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1. Round 1 : 군부 vs 국왕

  - 태국은 1932년까지 절대군주제 국가였습니다. 이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는데, 엉뚱하게도 이런 전환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군부 쿠데타입니다. 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쿠데타(?)였던 당시의 쿠데타를 라마 7세 국왕이 받아들이고 입헌군주제 전환을 인정한 이후 태국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입헌군주제로 이어져 왔습니다.


- 얼마 후 라마 8세가 즉위하였지만 1946년 의문의 총기사고로 급사하자, 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이 왕위를 이어받아 라마 9세가 되었습니다. 비록 왕이 되었다지만 권력은 군부가 틀어쥐고 있었으며, 푸미폰 국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서의 권위를 쌓아나가며 권토중래를 노립니다. 푸미폰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1992년 수찐다 크라쁘라윤이 주도한 쿠데타 때입니다.


 - 수찐다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잠롱 스리무앙(1935-)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대시위가 발생하였고, 군부가 진압 과정에서 총기를 발포해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푸미폰은 자신을 알현하러 온 수찐다를 면전에서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 한 방으로 수찐다 내각은 붕괴하였으며 수찐다 본인은 외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총선거를 통해 사실상 최초의 본격적인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푸미폰 국왕은 그야말로 태국 국민들의 숭배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 이후 십수년간 태국은 그럭저럭 민주적인 입헌군주국가로 잘 나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2월 탁신 친나왓(1949-)이 총리로 취임하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2. Round 2 : 탁신 vs (군부+국왕)

  - 탁신은 타이 굴지의 대기업을 창업한 화교 출신의 기업가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총리가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정책은 태국 역사상 가장 친서민적인 것이었고, 주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납니다. 태국은 발전 과정에서 상당히 심한 빈부격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하층민들이 탁신에 지지를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은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보수파의 양대산맥인 왕실과 군부가 힘을 합쳐 탁신을 권좌에서 축출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스라윳 쭐라논 육군참모총장의 주도로 쿠데타가 발생하고, 푸미폰 국왕이 이를 승인한 것입니다. 이후 군부의 관리 하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흥미롭게도 친 탁신 세력이 승리를 거둡니다.


 - 다만 이 무렵부터 타이의 정치구도는 완전히 둘로 쪼개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하층민이 중심이 된 탁신 지지세력과 왕실-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기득권)세력입니다. 2010년에는 친 기득권 성향인 아파싯 웨차치와(1964-) 총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이에 보수세력도 맞불을 놓으며 거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 2011년에는 탁신의 동생인 잉락 친나왓(1967-)이 총리직에 올랐는데(이것 자체가 탁신 세력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주죠), 그는 탁신에 대한 사면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2013년 다시 대규모 시위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탁신이 하층민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상당한 부패혐의를 받는 등 그리 깨끗하다고는 볼 수 없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탁신 반대세력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또다시 찬성-반대측 사이에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이는 푸미폰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 휴전을 선언하며 진정되나 싶었지만 2014년 5월 잉락 총리가 '권력남용'을 이유로 헌법재판소로부터 총리직 상실 판결을 받으며 다시 폭발합니다.


 - 혼란이 커지는 와중에 5월 20일 난데없이 군부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22일 쁘라윳 짠오차(1954-) 육군참모총장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음을 인정합니다. 이 쿠데타는 푸미폰 국왕에게 승인받으며 태국 역사상 12번째 '성공한 쿠데타'로 기록되었습니다. 쁘라윳은 선거 없이 총리직에 올랐으며, 이후 2015년 현재까지 태국에서는 새로운 총선이 실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태국 정치에 봄날은 오는가

  - 태국의 정치는 과연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타이에서는 1932년 이후 12번의 '성공한 쿠데타'와 7번의 '실패한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를 합쳐 평균하면 대략 4년에 한 번 꼴로 쿠데타가 발생한 셈입니다. 애초에 태국 군부는 정치에 깊숙히 개입해왔고,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마치 끝판왕(?)처럼 등장하여 모든 상황을 종결시키곤 하였습니다.


 - 이는 마치 터키의 정치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다만 터키의 쿠데타는 군부가 세속주의를 대표하며 쿠데타 이후 정치권력을 잡지 않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데 비해(이는 현대 터키의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유산) 태국은 쿠데타 세력이 직접 정치권력을 잡는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 왕실이 있지만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태국의 정치 지형에서 군부와 왕실은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1992년의 쿠데타에서 잘 드러납니다. 국왕이 민주화세력과 힘을 합쳐 군부를 억누르는 구도가 되었죠. 이 결과 국왕은 태국의 수호자라는 절대적 권위를, 민주화세력은 민주정부를 얻게 됩니다.


 - 그런데 민주정치 하에서 탁신으로 등장하는 포퓰리스트(블로거는 이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의 시대가 열리자, 이를 원치 않는 왕실은 이번에는 군부와 손을 잡게 됩니다. 2006년과 2014년의 쿠데타는 다 푸미폰 국왕의 승인을 통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국왕의 승인이 없으면 아무리 강력한 쿠데타라도 한 방에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 다만 최근의 난장판을 단순히 왕실과 군부의 잘못으로만 돌리기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탁신은 현재 태국의 하층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그 자신이 기업가 출신이고 이런저런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는 등 지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탁신에 대한 사면 시도가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태국 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2006년 이후 태국의 보수세력을 지탱하는 것은 푸미폰 국왕 개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지지입니다. 국왕에 대한 모독이 과도할 만큼 금지되어 있다거나, 이러한 지지가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은 있지만 어쨌든 국민들이 그를 거의 신급으로 존경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푸미폰은 다시금 절대권력에 가까운 권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지지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푸미폰 국왕은 이미 나이 90을 바라보면서 각종 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와찌랄롱꼰 왕세자(1952-)는 성격과 사생활 문제, 역시 건강이상 의혹까지 겹쳐 있어 국민들에게 매우 평판이 나쁩니다. 따라서 푸미폰 사후 그의 자녀들이 뒤엉켜 권력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도 있죠. 이래저래 태국 정치의 민주적 정상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참고 : 1 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