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영화 <밀정>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통칭 '황옥 경부 폭탄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일본 경찰에서 경부로 일하던 황옥(1887-?, <밀정> 이정출의 모티프)이 있었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정말 친일파가 맞았는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의 정체는 소위 '위장 친일파'의 존재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데, 그의 일생을 논하며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지요.


[간신히 찾아낸 황옥의 사진. 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호외]



1. 의열단에 뛰어든 일본 경찰


 - 황옥의 이명(異名)은 황만동(黃晩東)이며, 188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에 특채로 임용, 일본 경찰의 일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대단히 높은 계급인 경부(현재의 경감)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황옥은 고등계에서 근무하였으며, 고등계가 주로 독립운동가 등의 정치범을 다루는 부서였음을 생각하면 그가 일본 권력의 개로 활약하여 출세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그런 그가 독립운동과 연을 맺게 된 것은 1920년,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김시현(1883-1966)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이 때 황옥은 김시현의 설득을 받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황옥은 계속 일본 경찰로 근무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주로 의열단 단원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김시현]


 - 그는 의열단 단원이며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웠던 김상옥(1890-1923)이 경찰의 수사망에 포위당할 처지가 되자, 이를 김상옥에게 몰래 알려 상하이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의열단 단원인 김지섭(1884-1928)이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되자 몸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김시현이 1921년 극동인민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황옥은 50원(현재 환율로 수백만 원)을 여비로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운명의 1923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온 한반도를 발칵 뒤집어 놓자 황옥은 김상옥의 배후 세력을 색출할 임무를 받아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습니다. 1923년 2월 중국 톈진에 도착한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의열단 단장 김원봉(1898-1958?)을 만나고,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동할 것을 서약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는 국내 주요 시설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국내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2.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황옥은 김시현 등의 의열단 단원들과 함께 다른 짐으로 위장한 폭탄들을 들고 경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함께 임무를 맡은 단원 중 김재진이 일본에 매수되어 계획을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황옥과 김시현을 포함한 9명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직접 관련자 중 김원봉과 김지섭 정도만 체포되지 않았는데, 황옥은 이들의 피신을 도운 후 자신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 현직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온 세상이 뒤집어졌고, 이들에 대한 재판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판이 해를 넘겨 진행되는 와중에 피고석에 선 황옥은 충격적인 진술을 하게 됩니다.


 - "나의 처지를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일망타진한다면 상관들도 나의 역량을 인정하고 경시(현재의 경정)로 승진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본래는 폭탄을 경성까지 오도록 한 이후 체포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일찍 발각되는 바람에 나까지 범인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황옥 재판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1923년 8월 9일]


 - 당연히 여론은 난리가 났고, 뒤통수의 대가 황옥은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이후 1925년 황옥은 건강 문제(장결핵, 폐렴 등)로 형집행정지 석방되었으며, 1928년 다시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 출옥하였습니다. 그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하 폭탄사건)'으로 불렀습니다.



3.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요?


 - 출옥 이후 해방 때까지 황옥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김시현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봤을 때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법정에서의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계속 인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4년에는 동료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폭탄을 옮길 수 있었던 것도 체포 전 황옥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하지만 그를 말 그대로 '밀정'으로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데, 일단 자신의 진술이 그러했고 그의 상관이었던 시로가미 유키치(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역시 "나의 재가를 받고 작전의 일환으로 벌인 일"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황옥의 정체성이 일본 밀정 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지섭의 사진과 거사 관련 기사. 1924년 4월 25일 동아일보]


 -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태도를 보면 그게 맞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체포된 김지섭은, 변호를 맡은 후세 다쓰지(1880-1953)와 대화하던 중 "황옥은 결코 밀정이 아니다"라며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옥을 직접 만난 김원봉 역시 그를 "경기도 소속 경찰이었으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불행하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이는 사실인지 불명).


 - 황옥은 해방 이후 <조선독립운동사>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반민특위 활동에서는 증인으로 출석, 동료 친일경찰의 범행을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과거사 정리 관련 활동을 하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당했고, 얼마 뒤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선전방송에 출연한 이후의 삶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4. 정리 : '위장 친일파' 논란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


 - 대체로 학계에서는 친일파로 행세하면서 뒤로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소위 '위장 친일파'들이 다수 실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정체를 절대 밝혀서는 안 되는 특성상 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후세에 알려진 것은 그들이 친일파의 이름으로 가졌던 공식적인 지위, 그리고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주변인의 증언 정도 뿐입니다.


 - 황옥 또한 비슷해서, 그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폭탄사건에 관한 재판기록이나 그 주변인의 단편적인 증언(의열단원들, 동료 경찰 등) 말고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해서, 황옥의 실체를 소상히 밝히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지요. 그나마 황옥 자신이라도 계속 있었다면 언젠가는 진실을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한국전쟁 때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ㅡㅡ;


 - 실상 이는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의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이유가 커 보입니다. 해방 직후 친일분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밝혀내고 심판했다면, 친일파인 척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행적 또한 필연적으로 소상히 밝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는 해방 직후였으니, 이를 검증할 자료 또한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그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 버리는 바람에 이들의 실체를 밝히기 너무나도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아예, 명백한 친일파였던 이들을 '알고보니 위장 친일파였네'라며 호도하는 데 악용되기까지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ㅡㅡ; 요즘에는 이 때문에 위장 친일파에 대한 논의가 더 어려워진 측면도 있습니다. 이게 어떤 쪽으로 악용될 지 모르니까요.


 - 처음으로 돌아가서, 황옥은 정말 친일 밀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위장 독립운동가였을까요? 현재는 여기에 아무도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합니다. 글쎄요, 하늘에 있을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면 혹시나 알 수 있을런지. 이들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사를 제때 정리하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노릇입니다.


 - 여담으로 그와 함께한 독립운동가들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합니다. 김지섭은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복역 중 옥사, 김원봉은 해방 후 왕년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후 빡쳐서 월북했다가 숙청, 김시현은 대한민국에서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이승만의 횡포에 역시 빡쳐서 암살 기도를 했다가 실패, 다시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0977125

http://news.mt.co.kr/newsPrint.html?no=2015081314472814366&type=1&gubn=undefined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2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media.daum.net/m/channel/view/media/20150815060507538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4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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