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Opera <Le Devin du Village> (1752)

루소, 1750년

 계몽주의 철학의 상징, 자유의지에 기반한 사회계약론과 교육론 등 수많은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시대의 민주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대철학자 루소는 학술활동과 동시에 음악가로도 제법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작가나 철학자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작곡가로도 상당한 명성을 날렸으며, 바로크에서 고전파로 음악 사조가 넘어가는 과도기에 음악에 관한 다양한 논쟁과 이론 정립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역시 정치적 문제로 아들을 떠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소는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간 루소는 엄격한 규율과 복종이 강제되는 작업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6세 때 가출을 하게 되는데, 한동안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바랑(Warens) 남작부인의 후원을 받게 됩니다. 루소의 재능을 알아보았는지 바랑 부인은 그에게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으며, 10여 살 연상의 남작부인을 '엄마'라고 부르던 루소는 이후 그녀의 정부(情夫)가 됩니다.

 바랑 부인의 지원으로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사색할 수 있었던 루소가 가장 열정적으로 빠져든 분야가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적 열정을 알아본 바랑 부인은 그를 성가대 학교의 악장인 르 메트르에게 보내어 음악 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본인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샹베리(Chambéry)에 있었던 남작부인의 저택에서 함께 음악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루소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한 이 시절은 바랑 부인이 애인을 갈아치우면서 파탄났고, 잠시 방황하던 루소는 1740년 파리로 이주하여 당대의 유명 철학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루소는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악보를 고안하여 1742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습니다. 이 악보는 숫자를 사용하여 음높이나 셈여림 등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는데, 정작 아카데미에서는 큰 비판만 받고 그대로 묻혀 버렸습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음악가였던 장 필립 라모(1683-1764)는 "참신한 아이디어이지만 음높이와 길이 등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연주자들이 바로 연주로 옮기기 까다롭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가로서 루소의 도전은 한 번의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루소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작곡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1740년대부터 이런저런 작품을 발표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1752년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루소 본인이 직접 대본과 곡을 모두 쓴 이 작품은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이라는 패러디물이 유럽 곳곳에서 인기를 끌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었습니다(이 패러디물을 기반으로 어린 모차르트가 자신의 초기 오페라 중 하나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에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심하게 긴장한 나머지 그는 사정사정해서 알현을 취소하고 말았다는군요.

 이외에도 디드로 <백과전서>에서 음악 관련 부분 집필을 맡는 등 음악철학이나 이론 쪽에서도 활동하던 그는 1750년대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부퐁 논쟁'의 중심인물로 활약하게 됩니다. 발단은 페르골레시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가 1752년 파리에서 초연된 것이었는데, 장바티스트 륄리(1632-1687)로 대표되는 웅장한 프랑스 오페라와 달리 가벼운 주제와 서정적 멜로디를 특징으로 한 이탈리아식 '오페라 부파(프랑스어로는 '부퐁') 프랑스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에 계몽주의자와 백과전서파 등 새로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프랑스 오페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 선두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계몽사상가이면서 동시에 같은 해 인기 오페라를 발표한 작곡가였던 루소였습니다. 루소의 포문은 당시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라모에게 향했는데,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에 대하여 그는 화성이 너무 거창하다고 혹평하며 "마치 끊어지지 않는 소음 같다"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음악에서 자유로운 선율을 중시했던 루소에게는 근대 화성학의 기초를 세웠을 만큼 화성적인 음악을 중시한 라모와 음악적 측면에서 대척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이 논쟁은 점차 확대되어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 간의 대립, 나아가서는 이를 지지하는 신흥 지식계층과 왕족, 귀족 및 일반 청중간의 대립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양측 지지자간 결투까지 벌어질 정도로 과열된 이 논쟁은 정작 한쪽 중심인물이었던 라모가 1764년 사망하면서 허무하게 생물학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 논쟁의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으며, 그 선두에 있었던 작품이 바로 루소의 <마을의 예언자>였습니다.

 루소의 대표곡 <마을의 예언자>는 서로 연인 관계인 두 양치기가 오해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것을, 마을의 점쟁이가 노력하여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는 내용의 단막극인데, 단촐하며 일상적인 줄거리가 당시 루소의 음악적 입장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 속에는(영상 50:43~)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 및 기독교 찬송가 <주여 복을 비옵나니> 등 여러 노래에 채용된 유명한 멜로디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서울경제 <[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때늦은 음악열정' 귓가에 들리는듯>
경상일보 <[구천의 음악이야기(201)]오페라 작곡가 루소(Jean-Jacques Rousseau)>
아츠앤컬처 <환갑을 앞둔 철학자는 열두 살 신동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블로그 <음악사가 있는 고전 음악 박물관>
한국어 위키백과 "부퐁 논쟁", "장필리프 라모", "장바티스트 륄리", "오페라 코미크(장르)"
영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Le devin du village"
프랑스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나무위키 "장 자크 루소"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84

 

 

Muzio Clementi (1752-1832)
Piano Concerto in C major WoO12

 

무치오 클레멘티. 1794년

 무치오 클레멘티는 우리에게는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소나티네 앨범>에 많은 곡이 수록된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고 높은 실력을 요구하는 다수의 작품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동시대에 활약한 모차르트와 함께 피아노 연주자로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으며 모차르트와 연주 대결을 펼친 적도 있지요. 특히 피아노 연주법 뿐 아니라 악기 개량에도 직접 관여하는 등, 당대 피아노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클레멘티는 이탈리아(당시 교황령)의 로마에서 출생하였고, 은 세공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카펠마이스터(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던 친척 안토니오 바로니(1738-1792)에게 음악 수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9세 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3세 때는 오라토리오와 미사곡을 작곡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습니다. 14세가 되는 1766년 클레멘티는 다마소의 산 로렌초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영국인 귀족 피터 벡포드(1740-1811)가 로마를 방문했다가 클레멘티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국에 있는 자신의 장원에서 연주를 하는 대가로 숙식과 교육비를 후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클레멘티는 약 7년간 벡포드의 장원에 거주하며 음악 수업에 힘썼고, 1770년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첫 대중 연주회를 개최하여 음악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벡포드의 후원 계약이 종료된 이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하프시코드 연주자와 극장 지휘자 등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 그는 1780년 무렵이 되면 영국을 넘어 유럽에 널리 알려진 정상급 음악가가 됩니다.

 클레멘티는 1780년부터 3년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연주 활동을 벌였는데, 빈에 체류하던 1781년 말 그 유명한 연주 배틀(?)이 벌어집니다. 음악가들을 적극 후원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는 빈에서 건반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던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를 초청하여, 각각 자신의 작품을 기반으로 즉흥 연주를 펼치도록 공개 경연을 개최하였습니다(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황제는 현명하게도(?) 무승부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경연 후 클레멘티는 모차르트를 호평하였는데, 모차르트는 클레멘티를 "실력은 뛰어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며 깠다고 하네요. ㅡㅡ; 아마도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중시하던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기교적이며 정형화된 연주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차르트가 클레멘티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오페라 <마술 피리> 서곡에 클레멘티의 피아노 협주곡의 모티브를 차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베토벤은 클레멘티를 매우 존경했고 그의 작품도 자주 연주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연주 여행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간 클레멘티는 음악가로서 활동과 함께 음악교육에도 힘썼으며, 존 밥티스트 크라머(1771-1858), 존 필드(1782-1837) 등 유명 음악가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1798년에는 악보 출판회사를 인수하였고 이후 피아노 제조업에도 진출하여 사업가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출판사는 베토벤 작품의 영국 내 독점계약을 체결하여 다수 작품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베토벤 작품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데 업적을 세웠지만 그의 악보를 일부 수정하는 등 손을 대어 뒷말이 좀 있기도 합니다.

 음악사(史)에서 클레멘티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근대적인 피아노 연주법을 확립한 것으로, 이에 "피아노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피아노를 직접 만들었기도 하고 그는 모차르트 등과 함께 당시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Gradus Ad Parnassum』이라는 피아노 연습곡의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베토벤, 체르니, 쇼팽 등 19세기를 풍미한 수많은 피아노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과 연주기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C장조는 1796년 작곡되었으며, 2년 전 출판한 피아노 소나타 Op.33 No.3을 협주곡으로 개작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영문 위키피디아 "Muzio Clemeti", "List of compositions by Muzio Clementi"
나무위키 "무치오 클레멘티"
https://blog.naver.com/chaos719kr/60048559988
"[클래식&차한잔] 무치오 클레멘티 소나티네", 조세금융신문(https://www.tfmedia.co.kr/), 2021. 10. 8.

 이 시리즈를 통하여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친일파라 묶어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그들을 각각의 '인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친일행위를 한 의도와 목표가 제각각이었으니 이를 면밀히 분석해야 제대로 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이규완(1862-1946)처럼 '진심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함께 고민해 봅시다. 어차피 역사에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이규완, 1930년

 

1. 갑신정변의 행동대원

 이규완은 1862년 서울 한성부 교외(뚝섬)에서 종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친이라고 말은 하지만 왕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수백 년 전 임영대군(세종대왕의 4남)까지 무려 15대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별 의미는 없고, 아버지 이기혁 또한 나무를 파는 행상을 하며 여느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형과 누나, 동생 몇 명이 있다는 정도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9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아버지가 곧 재혼하였지만 계모 또한 그가 10대 중반쯤 되었을 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본적지인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사는 숙부 집에 가서 자랐는데, 나름 큰 뜻이 있었던지 한번은 서울로 올라갔다가 박영효(1861-1939)의 행차를 목격하고는 무턱대고 박영효의 집에 쳐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받아줄 리가 없었지만 그는 하인들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이내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습니다. 면식도 없는 귀족집안에 감히 들이대는 배짱을 높이 평가하였는지, 아니면 그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 박영효는 글조차 모르던 이규완이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게 했고 나중에는 유학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박영효

 이규완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불과 한 살이 많았던 박영효는 왕의 사위였으며 최고 명문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그와 친해진 이규완에게도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1883년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2개월간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으며, 돌아온 직후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관비(官費)유학생에 선발,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과 도야마 하사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택견의 명수였는데 이 시절에 서재필에게 개인적으로 무예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1년 뒤 이규완은 하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병조 소속 무관으로 임용되었습니다. 박영효 등 개화파는 이 시기 이미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개화파가 주축이 된 새로운 군사조직을 창설하였습니다. 총대장은 서재필이었으며 이규완 역시 별동대 대장으로 여기에 참여하였습니다. 나름 갑신정변의 주축 중 하나였지만 이 시기 그는 정변 지도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로 영 미덥지 않아 했다네요.

갑신정변의 진앙지 우정총국

 아무튼 1884년 12월, 거사의 날 이규완은 자신의 별동대를 이끌고 정변에 참여합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별궁 점거 및 방화, 요인 암살 등이었는데 특히 우정총국에서 민영익(1860-1914)을 직접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것이 이규완이었다고 합니다(알려져 있듯이 민영익은 호러스 알렌에게 수술과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집니다). 그렇게 정변의 중요 인물로 활약하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으며, 이규완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향합니다. 피신 당시 그는 부상을 입은 서광범과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달렸다고 전해집니다.

 

2. 망명생활과 귀국, 다시 망명(무한반복)

 이규완은 다른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10여 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망명자들은 자객에게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였다고 합니다. 정변 지도자들은 계속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1894년 김옥균 암살을 주도한 이일직이 일본에서 박영효 등을 암살하려 시도하자 이규완은 이를 알아내고 이일직을 체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일직을 감금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와중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진행되고 이규완을 비롯하여 생존한 정변 지도자들이 사면됩니다. 이에 이규완 역시 박영효 등과 함께 귀국한 뒤 3품 경무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동학군과 연계하여 시도하려 한 쿠데타 계획에 대하여 경무관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흥선대원군이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직접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갑신정변 때 이규완이 민영익의 귀를 벤 일은 유명했던지라, 송병준과 이완용은 이규완만 보면 "X알 간수 잘 해야지" 하는 성희롱농담을 지껄이곤 했다는군요.

 고위 관료로 평탄하게 흐를 것 같던 이규완의 삶은 그의 은인 박영효와 함께 다시 폭풍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는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친러 행보를 우려하여 계획한 암살 미수사건(을미사변 한 달 전 발생한 별개 사건)에 참여하였는데, 이 계획이 누설되어 박영효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변복을 하고 함께 몸을 피하였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다음 해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유길준 일파와 일본의 합작으로 정말로 살해당한(을미사변) 뒤 귀국하였지만, 얼마 뒤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건청궁 옥호루

 1898년 그는 조선(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하여 일시 귀국하였고 이후 한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독립협회의 요청을 받고 지원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부의 탄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승만 등 활동가들을 포섭하여 고종 폐위 운동을 획책합니다. 고종 황제를 쫓아내고 박영효를 추대하려는 시도였는데 이는 얼마 뒤 발각되었고 이규완은 체포당한 이승만, 이상재 등을 뒤로 하고 또 ㅡㅡ;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이런저런 고종 폐위 음모를 추진하며 비밀리에 한국을 오가기도 하였지만, 별 성과는 없었고 그 와중에 궐석재판에서 교수형 선고까지 받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박영효, 이준용, 유길준 등 망명자의 사면을 제안할 때 그의 이름도 있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여 신변을 넘기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당하자 그는 고종에게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연히 별 소용은 없었습니다.

 

3. '진심으로' 청렴했던 친일 관료

 그가 최종 귀국한 것은 1907년으로 그 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비로소 사면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통감부의 추천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취임하는데, 처음 그는 "문맹이 관료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양하려 하였지만 글 배웠다며? 통감부의 거듭된 강권에 결국 관찰사 직책과 중추원 찬의 직책을 수락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1918년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겼으며 직책명이 도지사로 바뀐 1924년까지 직을 수행한 뒤 퇴임하였습니다.

함경남도지사 재직 시기 이규완

 그는 전형적인 '자치론' 지지자였는데, 다른 유명한 자치론자들과 비교하면 3 · 1운동 이후가 아니라, 병합 직후부터 꾸준히 이런 주장을 반복하였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기왕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상 조선의 주민들을 동등한 일본인으로 대우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조선인 역시 일본에 대한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일본과 총독부의 방침과 달랐으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총독부에 건의를 날렸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후 민원식, 박중양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적 자치론으로 이어집니다.

 말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규완의 경우 자기 자신이 그야말로 철저히 검약하며 살았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는 그 맥을 달리 합니다. 평소 집에서 빨래를 하고 남은 땟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말고 텃밭에 거름 등으로 활용하게 했고, 평소 어디로 이동하거나 출장을 갈 때도 비용을 절약하고자 기차 3등칸을 타거나 싸구려 주막을 이용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시기에는 어떤 사람이 진수성찬을 차려 접대를 하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며 뒷간에 똥통(!!!)을 지고 가서 거름을 옮겨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 이후 사람들이 그를 거창하게 대접하는 일이 없어졌고, 그 청렴함으로 세간에 이름을 날리기에 이릅니다.

이규완의 사상이 압축된 '일생역행'

 그의 청렴함은 조금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하겠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밑바닥에서 자기 노력으로 출세하고,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도전과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한 그는 조선이 남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를 '게으름'에서 찾았던 것 으로 보입니다. 나태한 민족성 때문에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결과 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노력하여 민족적 역량을 키워야 그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극단적일 만큼 부지런히 살고 근검절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독립운동 중 실력양성론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목표가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자'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규완의 생각은 우리가 부족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노력하자는 데 머물렀고, 그래서 결국 독립론이 아닌 '자치론'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3·1운동 당시에도 그는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고민을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여기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항일운동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했습니다.

 

4. 퇴임 이후, 말년

 1924년 도지사직을 퇴임한 이후 이규완은 더 이상 중요한 공직에는 나서지 않았고, 함경북도지사나 중추원 참의 등의 자리를 제안받기도 하지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청량리와 춘천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운영하였으며, 여러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現 김천고등학교) 설립 자금을 후원하는 등 이런저런 사회사업을 벌여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동양척식회사 고문 자격으로 황해도 봉산·재령 지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 강령 발표 소식.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

 1927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출범한 조선물산장려회의 회장에 추대되어 1년간 재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는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단체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협력했던 이규완이 항일운동 차원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신간회 활동의 한 축이었던 실력양성론이 자신의 신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기꺼이 참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거기에 어쨌든 신간회는 합법단체였으니 관료 출신인 그가 활동을 꺼릴 필요도 크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그는 일관되게 각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바닷가를 간척하여 농지로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개간한 땅의 일부를 자기 아들들에게 경영하도록 넘겨주기도 했는데, 한번은 삼남 이영일(1903-1984. 화가, 교육자로 활동)이 자기 몫으로 받은 야산을 매각하려 하자 강하게 반대하여 팔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이외에는 조선산림협회 이사로 10년 이상 활동하거나 한성시탄(柴炭)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하는 등, 자기 사업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춘천 농장의 사과나무와 차남 이선길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규완에게도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라는 요구가 들어오는데, 친일 관료 출신으로는 조금 특이하게도 그는 이런 쪽에서 일본에 협력하는 것은 최대한 회피하였습니다. 신문에 전쟁 독려 기사를 기고하는 일은 사회사업이 바쁘다는 핑계와 문맹이라는 핑계로 글 배웠다며?(2) 최대한 거절하였고, 방공호를 건설하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행사에 연사 등으로 참여하기는 했는데, 대부분 조선인 참전 병사를 위한 후원회 등 조선인과 직접 관련된 행사에 치중하였다니 나름 일관성은 있었던 셈입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일본 온천에 요양을 다녀오는 등 활동이 뜸해졌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개간 사업에는 계속 관여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는 "우리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말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일관성 甲 그가 사망한 것은 1946년으로 그와 젊어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승만뿐 아니라 김구 역시 자신의 측근을 조문단으로 보내는 등 사회 각계의 추모를 받았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과 항일의 경계, 그리고 의도와 결과의 문제

 여러모로 평가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가 일제강점기 고위급 관료를 역임한 친일부역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진심으로 조선 민족에 애정을 가지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평생 보여준 삶의 모습은 표리부동한 자의 보여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나름 진실된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열심히 노력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꿔보자"는 그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진심이 실제로 민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상술했듯이 이규완의 주장은 실력양성주의 항일운동과도 상당 부분 통하는 데가 있고, 양쪽은 1920년대 말 신간회에서 만나 함께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가의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위 관료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았는지,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주권을 잃었다'는 데 너무 강박적으로 집착하였는지 그의 생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본 아래에서의 자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며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일까요, 아니면 결과일까요? 이규완의 의도가 선했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어떤 식으로든 협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와 결과, 아마도 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이규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블로거,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각자 선택할 문제이겠지요.

 여담 하나. 항일유공자 중 그와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 이규완(1901-1961)이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안성 원곡면 지역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며, 주재소(파출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니 그 활동이 꽤나 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후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여담 둘. 이규완은 갑신정변으로 첫 부인과 이혼한 뒤 일본 망명 중에 이매자(1880-1961?, 초명 나카무라 우메코)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매자는 일본인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스페인 왕족 출신 캐나다인 마가렛 고츠(1855-1928)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인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딸에게 무려 2억 달러나 되는 유산을 상속하였다는 떡밥이 존재합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거액인데 1920년대 당시에는 지금 돈으로 무려 3조 원이나 된다고 하네요. 나름 유언장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실물이 현재 남아 있지는 않으며, 이야기 자체도 확실한 게 없고 수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냥 그런 전설이 있더라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규완 가문의 상속비화. 일요신문 1963년 7월 7일

 

참고자료 : 
 "땟물까지도 아낀 조선 최고의 자린고비 관리 이규완", 대한기계학회 (링크)
 "근면성실한 친일파 이규완 이야기", DVDPrime 프라임차한잔 게시판 (링크)
 "이규완(李圭完)-3.1운동-애국장", 블로그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링크)
 "日帝 함남지사 이규완 가문의 2억 달러 유산, 과장인가 사실인가", 월간조선 (링크)
 "이규완",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한국어 위키백과
 "이규완(1862)", 나무위키

 

Eugène Ysaÿe (1858-1931)
Sonata for Solo Violin Op.27 No.2

이자이, 1883년

 외젠 이자이는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입니다(한국에서 이름 표기가 중구난방인데, 프랑스식으로 '외젠 이자이'가 맞다고 하므로 일단 이에 따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사이 가장 뛰어난 연주자 중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바이올린곡들을 남긴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음악과 연관이 깊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자이가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것은 5세 때로,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악기를 가르쳤는데 2년 뒤에는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할 만큼 기량이 성장하였습니다. 다만 음악원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였는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자기 아버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거나 거리 연주자로 나서는 등 독자적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역시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거장 앙리 비외탕(1820-1881)이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그의 연주를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브뤼셀 음악원에 입학하도록 추천하였습니다. 음악원에 입학한 이자이는 비외탕과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 등 대가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음악원 졸업 후 이자이는 벤야민 빌제 비어홀 오케스트라(現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연주 경험을 쌓은 그는 안톤 루빈스타인 등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27세 때는 파리 콩세르 콜론에서 솔로 연주자로 데뷔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모교인 브뤼셀 음악원에 교수로 임용되어 교육활동에도 나섰는데 루이스 퍼신저(1887-1966),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등의 거장들이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연주자로도 계속 활동하여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특이점이라면 드뷔시, 프랑크, 생상 등 유럽의 수많은 대작곡가들이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가 작곡자의 의도를 훌륭하게 해석하여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반대로 이자이 자신도 수많은 바이올린곡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들을 동료 연주자들에게 헌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와중에도 건강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는데,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 그는 나중에는 연주보다는 작곡, 지휘, 교육 등의 활동에 더 치중하였고, 말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이 더욱 심해져 1931년 왼쪽 발을 절단하는 수술까지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회복하지 못했고 같은 해 사망한 뒤 브뤼셀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사후 1937부터 그를 기념하여 '이자이 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이름을 바꾸어(영국 여왕과는 무관하며, 벨기에 왕비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경연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자이의 연주 스타일은 뛰어난 연주 테크닉에 기반한 정확한 연주였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위에 언급했듯이 수많은 작곡가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작품들 또한 자기 실력에 바탕해서 그런지 어렵고 난해한 곡들이 많다고 하며,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은 이자이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를 접하고 감명받아 만들었으며, 특히 2번의 첫 두 마디는 무반주 파르티타 3번의 도입부에서 따 왔습니다. 6개의 작품은 각각 당시의 명 연주자 6명에게 헌정하였는데 2번은 자크 티보(1880-1953)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참고자료
 "외젠 이자이",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sound.or.kr/bbs/view.php?id=music3&no=767)
 김미정,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 2번> (1923)에 관한 분석 및 연주법 연구」 (dspace.ewha.ac.kr/handle/2015.oak/213515)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작곡자 의도 완벽 해석… ‘헌정받기의 대가’ 이자이", 동아일보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509/84267346/1)
 "Eugène Ysaÿe", "Violin Sonata No. 2 (Ysaÿe)", 영문 위키피디아
 "외젠 이자이", 나무위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 겸 소설가 유진오(1906-1987)는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그가 한때 사회주의자였고, 이 경험이 그의 학문 및 사상체계의 기반이며 그가 만든 헌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학문과 문학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한 나라의 헌법을 쌓아올렸으면서도 그의 인생은 항상 억압과 고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를 돌아본다면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들의 모순적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유진오

 

1. 명문가의 자식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유진오는 1906년 한성부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치형(1877-1933)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하다가 멸망 후 퇴직하여 한성은행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유치형은 근대 학문을 공부하였지만 일상에서는 구시대적 관습을 고수하였고, 유진오는 이러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억압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결혼 또한 부모에 의하여 14세 때 해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에서 온 근대문학은 하나의 해방구였으며, 근대적 개인주의를 접하는 창구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現 대학로에 위치했던 경성제국대학


 이 시기의 여러 지식인들처럼 유진오 역시 대단한 수재였는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예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한때 철학과로 전과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였고,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 교수 등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이었는데 이 영향을 받아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

 재학 중 유진오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에 참여하고, 정치적 성향 때문에 일본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졸업은 수석으로 무사히 했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은 구시대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사유체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그 역시 개인과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이상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진오와 교류하던 인물 중에는 경성제대 1년 후배이자 오랜 동료로 해방 후 북한 헌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최용달(1904-1953?)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1929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연구소 조수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낙산구락부(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학문을 통한 사회운동을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는 훗날 남로당의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되는 리강국(1906-1956)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일본 당국에게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1933년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유진오는 이를 마지막으로 실천적 사회운동에서 사실상 발을 빼고, 학문연구의 길에 집중하게 됩니다.

 

2. 사상과 행동의 괴리, 그리고 그로부터의 해방

 유진오는 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경성제대 교수를 목표로 학문에도 매진하고, 재학 중이던 1927년 소설가로 등단한 후에는 틈틈이 작품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처참히 실패하고, 목표하던 경성제대 교수직 역시 한국인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에게 스카웃(?)되어 동료 최용달 등과 함께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수로 직을 옮겼습니다.

 학자로서 유진오가 천착한 분야는 서양 법사상, 법률이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추인 제국대학을 나왔지만, 동시에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개인주의와 단체(전체)주의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 시대를 해석하고,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체계의 기초였지만 동시에 실천적 동기로 작용하지는 못하였고, 이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천성과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모순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이에 대한 고민은 그의 소설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

 그런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앙드레 지드(1869-1951)가 소련에 다녀온 후 1936년 <소련 기행>을 써 소련 체제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처음에 소련을 지지했던 지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이 정작 획일성과 비판정신 결여로 물든 전체주의 사회였다고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는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유진오는 지드의 비판을 접하고 마음 속에 남아있던 고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버리지 못하던 사회주의의 현장이 결국 파시즘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 마르크스를 붙잡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다가왔겠지요. 그는 지드의 전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벌여 좌익 문학계와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9년을 기점으로 결국 친일 노선으로 완전히 전향하고 말았습니다. 이 해 그는 법학 교수를 그만두고 작품활동에 집중하였으며, 동시에 친일 성향 논설을 언론에 발표하거나 친일 문학단체에 참여하는 등 전형적인 친일 부역자 행보를 걷게 됩니다.

 

3. 해방 이후 :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그는 1944년 퇴계원으로 낙향하였다가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로 복귀하였습니다. 당시 유진오는 이미 독보적인 헌법학자로 그 위상을 얻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새로 수립할 국가의 헌법 초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는 그가 만든 초안을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논의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헌법(제헌헌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헌법을 매개로 정치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초대 법제처장에 취임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법령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유진오가 직접 쓴 헌법 초안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그의 사상을 이루는 중요한 한 줄기로 남았습니다. 우익과 좌익의 전체주의를 모두 배격한 그가 헌법의 모델로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었습니다. 이 위에서 유진오는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연구해온 모든 법적 지식과 사상을 쏟아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개헌과 많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대한민국 헌법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 없는 헌법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헌법 제정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진오는 헌법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하였지만, 이것이 좌익 용어가 아니냐는 윤치영(1898-1996)의 반발 때문에 모든 단어를 '국민'으로 바꿔야 했고 그는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합니다. 당시 그는 좌익 전력 때문에 이런저런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관철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정부 전횡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헌법에 반영하려 하였으나,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를 원한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채택되었지요.

 

4. 만년과 죽음

 아무튼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1949년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1952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1965년까지 장기간 재임하였습니다. 총장 재직 당시 고려대학교 운영에 수완을 발휘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1960년 4.19 혁명 때는 4월 18일 국회 앞까지 행진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설득하고, 경찰의 안전 귀가 약속까지 받아 시위대를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귀가 도중 시위대가 깡패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며 혁명의 확산에 본의 아니게 중요한 역할을 한 바도 있습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반대농성을 밤새 지휘하는 유진오(오른쪽 아래). 1969년

 총장 퇴임 이후 유진오는 한동안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는데, 196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윤보선과 단일화하며 사퇴한 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에는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여 3선개헌 반대 운동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1969년 뇌졸중이 발병하여 이듬해 총재직을 사임하고, 1971년에는 국회의원에 불출마하면서 오래 활동하지는 못하고 정계은퇴를 하게 됩니다. 이후로는 병석에서도 유신 반대 운동에 이름을 올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80년 돌연 신군부가 만든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민주화 세력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진오는 6월항쟁 이후 개헌 논의가 진행되던 1987년 8월 사망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오랜 기간 재직하며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그의 빈소를 설치하고 추모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보니 일부 학생과 교수진은 친일 부역을 한데다 전두환 정권에도 원로로 참여한 인물을 추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반발하고, 학내에서 이와 관련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5. 정리 : 우리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처럼 유진오 역시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역사적인 법학자로, 혹은 근대문학에 큰 흔적을 남긴 소설가로 기억할 수도 있고, 적극적 친일부역자 내지 변절자, 전두환 군부 협력자로 기억할 수도 있지요. 사실 그 모든 것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에서는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최대한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진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유진오가 기초한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그가 불과 수 년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스피커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고, 이를 볼 때는 또 몇 해 전까지 그가 사회주의를 신봉한 법사상가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지요. 어쩌면 그 모순이야말로 유진오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였을지 모릅니다. 구시대와 근대의 모순 속에서 성장하여,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 가운데 학업을 잇고, 실천적 사상과 실천하지 않는 현실의 모순 속에 갈등하며 삶을 지낸 것이 그의 일생이었지요. 어쩌면 그의 친일행각은 그 모순을 억지로 지워버린 데서 나온 치명적인 오류였을지도 모릅니다.

유진오 빈소 관련 시위를 다룬 뉴스. 경향신문 1987년 9월 2일

 네. 그를 바라보는 블로거의 시선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친일 부역자를 비판하던 사람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애매한 말만 지껄이고 있을까요? 물론 블로거는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친일인명사전 등의 목록에 오르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업적(?)들을 남긴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헌법 초안이나 친일행각 전후의 모습들을 보면 전혀 모순되는 그 모습들 또한 유진오 자신의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순이야말로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은 아닐까요?

 여담으로, 그의 동문이며 오랜 기간 함께 일한 최용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시골 자작농의 아들로 성장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더 실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유진오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친일로 돌아서던 시기 그는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리게 되지요. 해방 후 그는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고 일찌감치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의 법체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헌영과 남로당계가 몰락할 때 그 역시 사라졌고, 아마도 함께 숙청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참고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사, 2008.
한국교육신문, "⑭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 植民기획 부정한 지식인… 미친놈 취급받으며 불행 감내" (www.hangyo.com/news/article.html?no=898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치형"
한국어 위키백과 "유진오", "앙드레 지드"
나무위키 "유진오", "최용달"

 

 대한민국 경제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대기업은 많습니다. 1990년대 재계 1위까지 다투었지만 엄청난 분식회계로 몰락한 대우그룹이나, 자기 한 몸 쓰러져 IMF를 앞당긴 한보와 기아, 분가(分家)들은 여전히 번창하지만 본가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현대그룹, 조금 앞으로 가면 부산의 상징이었지만 전두환의 장난질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도 있지요. 그밖에도 재계에서 한가닥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을 나열하자면 아마 이 지면과 글 쓸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 기업들 가운데 '율산그룹'이라는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은 1970년대 창업하여 불과 3~4년만에 재계 10위권을 넘보는 대기업으로 폭풍 성장하였지만,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너졌지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배경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무튼 잠시나마 대한민국 경제의 '주인공'이었던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간신히 기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했다가 뜬금없이 사라진, 율산그룹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선호 율산그룹 창업자 (출처 에브리뉴스)

 

1. 창업과 폭풍성장 : 겁 없는 20대 청년들의 반란

 창업주 신선호(1947-)씨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중학교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는 서울(경기고등학교)에서 다녔습니다. 아버지 신형식(1901-2003)은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엘리트로, 일제강점기 강원도 평창과 전남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며 농지개혁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녀가 9명(7남2녀)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힘입어 대부분 학자와 기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중 6남인 신선호씨 역시 경기고등학교(평준화 이전)와 서울대학교 응용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엘리트 집안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신형식의 교육방침에 따라 9남매는 모두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선호씨는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고, 처음에는 오퍼상(수출-수입업자를 연결하고 커미션을 받는 일)으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본금 100만 원을 마련한 그는 1975년 6월 자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 몇 명과 함께 '율산실업'을 창업하였습니다. '율산'이라는 이름은 자기 아버지의 호에서 따 왔는데, 이는 동시에 고향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는군요.

율산그룹 경영 당시 신선호 (출처 머니그라운드)

 율산실업의 초기 성장을 이끈 것은 중동지역에 시멘트를 수출하는 무역업이었습니다. 율산은 사업성이 낮아 다른 기업들이 꺼려하는 거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수출 선박을 직접 임대하여 운영하는 식으로 채산성을 높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항만 사정 때문에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헬리콥터와 상륙함까지 동원하여 납기일을 지켰고, 현지 바이어의 신임을 얻은 율산실업은 무역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창업 첫 해, 고작 6개월 남짓 기간 동안 율산실업은 340만 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1975년 대한민국 수출액 총계는 50억 8천만 달러), 같은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수출실적은 해마다 퀀텀(?) 점프를 하여 이듬해(1976년)에는 4,300만 달러, 1977년에는 1억 6,500만 달러를 수출하였으며,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는 율산을 제외하면 현대, 삼성, 대우 등 12개뿐이었으니, 율산은 창업 3년만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이 된 것입니다.

 작은 무역회사로 출발한 율산그룹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업 첫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해운업(금룡해운 인수)과 건설업(동원건설 인수)에도 진출하였고,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중공업, 패션업, 전자, 관광호텔 등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사업분야를 넓혀 나갔습니다. 1979년 당시 율산그룹은 14개의 계열사와 27개 해외지사, 6개의 합작법인을 운영하였으며 직원은 8,000여 명, 자본금은 100억 원에 달했습니다.

 

2. 이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우선 전제할 것은 신선호씨, 그리고 그와 학연으로 이어진 경영진이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율산그룹은 창업 직후부터 다른 기업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이를 성공함으로써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사람들은 초기부터 계속된 성공의 경험이 이들의 사기를 높이고,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무역업'을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출 중심, 아니 수출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경제개발을 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출과 관계된 일을 하는 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퍼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수출라인 하나 잡으면 이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율산그룹

 당시 수출기업이 누리는 금융 차원의 특혜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들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 은행으로 가면 이를 담보로 즉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율은 6% 정도였습니다.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요? 당시 은행 대출금리가 25% 정도였습니다. ㅡㅡ; 심지어 이 대출금은 거의 눈먼 돈에 가까워서 기업들이 실제로 이 돈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든 부동산 투기를 하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특혜지요.

 율산그룹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율산은 1977년 금룡해운을 인수하여 율산해운으로 개편하였는데, 당시 인수자금 10억 원은 서울신탁은행에서 연 9% 이자로 빌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 공식 금리는 25% 이렇게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율산그룹은 단기간에 계열사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대기업들의 사업 확장 방법이기도 했지요.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경영진의 능력이 탁월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중동지역에 시멘트 수출하기'라는 대박 아이템을 잡은 것도 그렇고, 인수한 계열사들을 단기간에 각 분야별로 최상위권 기업으로 성장시킨 업적도 부정하기 어렵지요. 이제 갓 서른이 될까 말까한 율산의 젊은 경영진은 대한민국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율산그룹은 1977년 말 서울종합터미널(現 센트럴시티) 부지를 사들이고 과천 서울대공원 설계도 맡는 등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 율산그룹 공중분해, 왜?

 1978년 여름 발생한 한 사건이 모든 파국의 시작점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해 봄 율산실업이 사우디아라비아 법률상 외국 기업이 할 수 없는 유통업에 관여했다가 적발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에 알려지며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율산그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쫓겨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입니다.

 중동, 그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율산그룹에는 매우 중요한 해외 거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율산그룹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산그룹이 이에 해명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런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기금융회사(단자사)들이 대출자금을 대거 회수하여 그룹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애초에 기업 자체가 은행 빚을 쌓아올려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금융권의 신뢰가 꺾이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거기에 1978년 8월 발표된 부동산 투기 억제조치(8·8조치)가 그룹을 한 번 더 직격하였습니다. 그룹의 주요 돈줄이던 율산건설이 새로 아파트를 분양하였는데, 이 조치 때문에 집이 잘 팔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9월쯤 되면 율산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빠져 주거래은행(서울신탁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만큼 사정이 나빠졌고, 이에 서울신탁은행을 중심으로 시중은행들이 모여 총 70억 원의 구제금융을 퍼주었지만 이 돈은 대부분 단자사 빚을 갚는 데 소진해 버렸습니다.

 해가 바뀌고 1979년 1월에는 실로 괴이한 사건이 터지는데,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을 방문하던 신선호씨가 정부기관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신선호 납치기도사건). 워낙 해괴한 일이라 그 전말을 두고 권력 개입설, 자작극설 ㅡㅡ; 등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후 정부와 금융권의 태도가 율산그룹에 비우호적으로 돌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태도 변화에 납치기도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한데, 혹자는 "신선호씨가 언론에 경위를 설명하면서 괴한들이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하였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이 비서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 추측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서석준(1938-1983)이 재계 인사들에게 "율산은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율산그룹 붕괴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판장의 신선호.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출처 해럴드포토)

 당시 정부와 금융계는 율산그룹에 대해 추가 금융지원(총 90억 원)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납치기도사건 이후 모두 무산되었고, 동앗줄이 끊어진 율산그룹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1979년 4월 3일 신선호씨가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고(율산 사건) 3일 후 율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일괄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해체 당시 율산실업의 부채비율은 2600%, 율산건설은 670%, 율산알미늄은 470%나 되었다니 정치적 개입과 무관하게 기업 자체가 이미 빚 위에 쌓은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4. 후일담

 율산그룹 회장은 공식적으로는 신선호씨가 아니라 그의 장인이자 언론인, 관료, 친일부역자였던 부완혁(1919-1984)이었는데, 그는 <사상계>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오적」 필화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는 등 야당 성향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선호씨의 출신(전남 고흥)이 겹치면서 김대중과의 커넥션 의혹, 호남계 기업에 대한 경계 아니냐는 등 이와 관련한 온갖 의혹과 음모론이 판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 이후 율산그룹의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대기업에 인수되었는데, 이게 그룹 차원의 자금난 때문에 무너진 것이지 계열사들은 나름 알짜기업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이에나 해당 기업들은 인수된 이후에도 나름 잘 나가다가 IMF 전후로 새로운 모기업이 무너지며 함께 사라지거나, 혹은 모기업의 사업 재편으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흡수합병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건설 중인 서울대공원 조감도

 기업 자체는 이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율산그룹이 짧은 기간 동안 벌인 일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공원은 1970년대 말 율산그룹에서 설계 의뢰를 받고 미국 용역회사 PRC와 협력한 계열사를 만들어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건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공원 부지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장막성전'은 해체된 후 2020년 초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모 사이비 종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와도 조금이나마 접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산그룹이 구입한 고속터미널 부지는 그룹 해체 이후로도 오랫동안 신선호씨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각하면서, '터미널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제3자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채권단이 처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ㅡㅡ; 율산그룹이 계획한 20층짜리 복합터미널 계획이 날아가고, 신선호씨 및 그와 함께 남은 직원들은 가건물 상태이던 임시 터미널을 20여 년이나 지킵니다. 우주방어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센트럴시티가 완공되고 신선호씨는 수천억 자산가로 화려하게 재기하였습니다... 몇 년 뒤에 다시 경영권을 넘기기는 하지만요.

센트럴시티는 이후 애경그룹, 통일교를 거쳐 현재는 신세계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센트럴시티 홈페이지)

 

# 참고자료 #
 "102세 율산 신형식 옹 타계", 서울신문(https://www.seoul.co.kr/)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던 율산그룹 신선호, 첫 공판", 해럴드포토(http://photo.heraldcorp.com/)
 "고흥 출신 신선호 前 율산그룹 회장 재기 성공", 아시아뉴스통신(https://www.anewsa.com/)
 "대우 건설 뒤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머니그라운드(http://mground.kr/)
 "[서울 만들기] 43. 과천 서울대공원 조성", 중앙일보(https://news.joins.com/)
 "신선호씨 집안 스토리", 일요신문(https://ilyo.co.kr/)
 "[실록! 한국경제]⑨ “무너진 신화”… 율산(栗山)", 블록미디어(https://www.blockmedia.co.kr/)
 "율산그룹의 드라마틱한 기업 흥망사", KOSME 기업나라(http://nara.kosmes.or.kr/)
 "‘율산 신화’ 신선호 20여년 만의 인터뷰", 일요신문(https://ilyo.co.kr/)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 고교시절 100만원으로 기업 성장", 에브리뉴스(http://www.everynews.co.kr/)
 "[한국경제 비화 ㊶]율산실업 신선호 사건", 조세금융신문(https://tfm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부완혁"
 신세계센트럴시티 홈페이지(http://www.shinsegaecentralcity.com/)
 한국어 위키백과 "율산그룹"
 나무위키 "센트럴시티", "율산그룹"

 

 윤리적 기업가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덕분에 유한양행은 지금도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곳도 흑역사랄 것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일한의 동생 유명한(1908-1950)이 기업을 운영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였습니다. 하필이면 형 유일한이 항일운동에 매진하던 때 이 사람은 기업 차원에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것이지요. 말할 필요도 없는 형 유일한,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긴 동생 유특한(1918-1999)과 비교됩니다. 이번에는 형만 못한 아우, 아우만 못한 형이었던 유명한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명한

 

1. 사전 지식 : 유일한과 유한양행

 

 우선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경영하여 큰 성공을 거둔 유일한은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할 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버드나무 모양의 CI를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유한양행 CI

 

 유일한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당시 한국인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한양행이 주력으로 삼은 분야는 의약품 제조 및 유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산 의약품을 수입 판매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자체적인 생산체제도 갖추었는데, 유한양행이 자체 생산한 의약품 1호는 바르는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었다고 하지요. 거의 약장수 수준의 홍보가 판치던 당시 제약업계에서, 유한양행은 제품의 구체적 효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 의견 등을 광고에 실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만주, 베트남 등 해외로도 진출하였습니다.

 

 유일한은 철저한 윤리경영을 추구하여 당시에는 판매가 합법이었던 메스암페타민(히로뽕) 등 마약성 제품의 판매를 철저히 막고,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종업원 주주제를 실시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경영을 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한반도와 미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1942년에는 재미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미육군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공작원으로 비밀리에 입대하여 50이나 된 나이에 고도의 훈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이는 그의 사후 20년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집니다).

 

말년의 유일한

 

 미국에서 유일한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 당국에도 알려졌는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한의 귀국을 불허하였습니다. 사장이 미국에 발이 묶이자 회사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12월 15일 긴급 이사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사람이 당시 부사장으로 일하던 동생 유명한이었습니다. 유명한은 1936년 유한양행 대주주로 처음 경영에 참여하였고 1938년에는 이사, 1940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형이 부재중일 때 회사 운영을 맡고 있었습니다.

 

 

 

2. 유명한의 '덜 유명한' 친일행적

 

 그런데 형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유명한의 행적은 사장을 맡기 전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1941년 8월 그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일본 육군에 1만 원의 자금을 헌금하는 등, 형의 신념과 정 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는 그가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형의 대리인으로 기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며, 유일한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한은 정식으로 사장직에 오르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를 펼쳐나갔습니다. 그가 사장에 선임되고 며칠 뒤, 유한양행은 본사+사장(유명한)+계열사+직원 명의로 총독부에 소위 '애국기'를 헌납하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당시 유한양행이 헌납한 금액은 총 5만 3천 원으로, 조선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헌납한 3만 원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습니다.

 

유한양행의 애국기 헌납을 다룬 기사.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

 

 유명한의 친일 행적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는 유한양행과 계열사들이 <매일신보>에 신년기념 합동 광고를 실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도 소위 '황군'의 무운장구를 빈다든지 신년 맞이 전승(戰勝)을 기원한다든지 하는, 전형적인 일본 제국주의 찬양 광고였습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유원박)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형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유명한이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까요? 블로거가 추정해 보자면 유일한의 당시 행보 때문에 회사가 일본 당국에 탄압을 받았고,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굳이 변호하자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나 군사정권기에 권력과의 유착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이런저런 탄압과 견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유한양행 명의 친일광고. 매일신보 1943년 1월 1일

 

 

 

3. 말년 : 형제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와 회사의 친일행적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설립자 유일한과 막내동생 유특한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유일한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하였고, 유명한 역시 유한제약 이사장과 한국제약협회 2대 회장을 지내는 등 기업가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반민특위에 끌려가지도 않는 등 잘 살았지요.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적산을 불하받아 '고려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기업은 해방 직후 출판업계에 큰 영향을 준 회사였다고 합니다.

 

 이와 별개로 형과 동생은 민족반역자가 되어 자신들의 신념과 회사 경영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했던 형 유일한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유명한이라는 동생은 알아도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일본인은 모른다"라며 사실상 큰동생과 연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막내동생 유특한이 일본 유학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이것조차 나중에 형에게 깊이 사죄했을 정도라고 하니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나머지 형제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특한은 나중에 일부 계열사를 가지고 독립하여 '유유그룹'을 창업하고,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기업인으로 잘 나갔을지는 몰라도 그는 형제들에게 인간적으로 버림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모두 무시당합니다. 그래도 당시 생존해 있던 삼형제의 어머니는 그가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산 다대포에 정착한 유명한은 배를 타고 부산 중심가에 출퇴근하던 중 침몰사고가 발생하여 허무하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형 유일한은 말년에 막내동생 유특한에게 "친일파만 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라는 내용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듯합니다. 동생 자신뿐 아니라 유한양행이라는 회사 전체의 역사에도 큰 흠집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피를 나눈 형제여서 그랬던지, 형 유일한이 동생의 부고에 깊이 안타까워했다는 뒷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4. 정리 : 흑역사도 역사다

 

 형 유일한이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그런지, 동생들은 나름 사회적인 활동이 많았음에도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블로거의 능력과 노력 부족을 탓하시오 그래서 유명한의 행적은 이름과 달리 그리 유명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언론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친일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일생은 형 유일한과 비교하여 그 그늘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비록 그의 행적이 회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역사가 거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단언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회사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친일분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을 만났고, 이들이 위의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 또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습니다. 자신과 회사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적지 않은 나이에 공작원 훈련까지 받아가며 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이야말로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한양행 연혁. (유한양행 홈페이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유한양행에서 유명한과 그 시대의 행적을 철저히 감추고 언급조차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부터 세무조사 등 정치적 탄압을 버티며 성장한 것이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유명한의 주도로 애국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사실이지요. 블로거는 유한양행이 양심적 경영과 사회공헌을 전통으로 하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비록 일부나마 명백한 흑역사를 감추는 데는 약간의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두운 과거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적 기업이라는 전통에 더 어울리고, 설립자 유일한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참고 : 

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www.yuhan.co.kr/Founder/founder_main.html)

뉴스워커, "[광복절 기획] ‘민족기업’ 유한양행이 친일 행위를?…90년 역사 ‘옥에 티’" (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73)

오마이뉴스, "[한국 기업인 열전 7]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4800)

일요신문, "[8·15 특집 기업과 친일] 유한양행 ‘유명한 악몽’" (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96461)

CNB뉴스, "[임정 100년 - 겨레 기업 (2)] 유일한 박사 독립정신 잇는 유한양행·유한킴벌리" (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7516)

정운현,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친일행적' 있다" (web.archive.org/web/20190109013236/storyfunding.daum.net/episode/4740)

한국어 위키백과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나무위키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유한양행"

 

 

나운영(1922-1993)

String Quartet No.1 <Romantic>

 

 

 나운영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초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5세 무렵 아버지에게 양금을 배우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10대 초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17세 때인 1939년에는 가곡 <가려나>(김안서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에 당선될 만큼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김성태(1910-2012)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이듬해(1940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모로이 사부로(1903-1977)를 사사하였고, 1943년 본과를 졸업한 후 연구과에 진학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였습니다. 나운영은 작곡과 함께 첼로를 전공하였는데 귀국 후에는 채동선 현악사중주단과 경성후생악단에서 첼로 주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이 해방된 1945년에는 중앙중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중앙여자전문학교(現 중앙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후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목원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민족음악문화연구회를 창립하고, 민족음악 진흥을 위한 여러 활동에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선토착화(先土着化) 후현대화(後現代化)'라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음악 진흥에 힘쓰면서, 여기에 12음기법 등 현대음악의 여러 요소를 결합하는 여러 시도를 통하여 독창적인 한국의 현대음악을 정립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작품들은 초기에는 한국적 음악을 지향하다가, 중기 이후에는 현대음악에 한국적 요소를 덧붙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운영은 해방 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가, 몇 년 뒤 개신교로 개종하여 남은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종교음악이 많으며, 교회 성가대를 오래 지휘하거나 찬송가 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대한민국의 기독교 음악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반면 불교계의 위촉을 받고 찬불가(讚佛歌)를 작곡한 적도 있다니 종교적으로 심하게 편협한 자세를 갖지는 않은 듯한데, 이러한 이력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뜻하지 않게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의 작품은 관현악, 실내악, 가곡, 종교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13개의 교향곡, 5개의 오페라 및 칸타타, 18개의 예술가곡을 비롯한 다수의 가곡 및 찬송가, 총 12개의 실내악곡 및 피아노곡 등입니다. 현악사중주 1번은 1942년 작곡하여 제국고등음악학교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1952년 초연되었습니다.

 

 

 

@ 참고 :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http://launyung.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운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417)

법보신문 "찬불가 만든 개신교인 나운영의 시련"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497)

한국어 위키백과 "나운영"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9A%B4%EC%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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