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문

 

 최근 블로거는 사진에 취미를 들이고 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사진과 그 도구인 카메라의 역사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어떻게 시각을 복제하여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고 지구상 수십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남길 수 있게 한 과정은 무엇일까요? 나의 취미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해 왔는지 탐구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카메라와 사진은 근대의 중요한 발명으로 여겨져 왔고 분명 그것이 맞지만, 사진을 만드는 원리 자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든(실용적으로든, 놀이로든) 이를 활용해 왔습니다. 지금하고 똑같네 사진이라는 도구가 단순히 흥미로운 장난감에서 어떻게 인류 사회의 중요한 도구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한 번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저 중 두 개를 팔아치운 건 안자랑)]

 

 

1. 고대와 중세의 '카메라'

 

 필름도 센서도 없던 먼 옛날, 사람들은 암실 벽면에 작은 구멍을 내면 반대편에 바깥의 상(像)이 그림처럼 맺힌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추측하건대 누군가 어두운 방의 벽이나 칸막이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 원리를 알아냈을 것입니다. 이후 사람들은 상자 등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내부에 상이 맺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 번쯤 만들어 보았을 바늘구멍 사진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이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고 하는데 이러한 원리 자체는 아주 오래 전, 고대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유클리드가 버들가지 바구니의 작은 홈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이 비추이는 것을 관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중국의 묵가(墨家)를 창시하였다는 묵자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뒤집어져 보인다"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림을 그리는 원리]

 이러한 원리를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바늘구멍을 통과한 상을 활용할 수 없을지 고민하였고, 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고안해 내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개념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중세 이슬람 제국의 학자 알하젠(965-1040)이 실질적 도구로서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처음으로 개발하였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또한 자신의 그림 작업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레이싱? 카메라 옵스큐라가 그림에 활용되면서 17세기 무렵에 그림의 사실적 묘사력이 대폭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주전자를 든 여인>과 그 물주전자에 비추인 카메라 옵스큐라의 모습]

 또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몇몇 그림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실제 사례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에는 물주전자의 겉면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추정되는 어떤 장치의 모습이 비추어 보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정약용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는 등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었으며, 조선의 화가들도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지 않았겠느냐는 학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필름이나 센서가 없을 뿐 현대의 카메라와 그 원리가 거의 동일합니다. 필름, 센서가 하던 일을 당시에는 화가의 붓과 캔버스가 대신했을 따름입니다.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이 아닌, 상 그 자체를 그림(?)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18세기 감광 원리의 발견 이후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 감광물질의 개발

 

 많은 물질은 빛, 특히 햇빛을 받으면 색이 변합니다. 당장 옷장에 처박혀(?) 있는 옷 중에는 직사광선 아래에서 건조나 보관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강한 햇볕에 말리면 색이 바랜다든지, 소재가 변질된다든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지속적으로 쪼인 책이나 건물 역시 서서히 색이 바래게 되지요. 이처럼 빛은 물질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라면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노출시간이 못해도 월 단위는 되어야 하겠지요), 특정한 물질들은 빛에 반응하여 변형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빛에 짧은 시간만 노출시켜도 충분한 변형이 일어나지요. 흔히 우리가 감광물질이라고 하면 이러한 물질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감광물질을 넓은 판에 칠해 놓고 바늘구멍이나 렌즈를 통과한 상을 맺히게 하면 각 부위에 노출되는 빛의 양 차이에 따라 물질이 변형되는 정도 역시 달라지게 됩니다(초등학교 때 한 번쯤 써보았을 '청사진' 실험을 생각하면 됩니다).

 

[요한 하인리히 슐츠]

 1724년 독일 출신의 과학자 요한 하인리히 슐츠(1687-1744)는 1724년 염화은(AgCl)이 햇빛에 노출되면 검게 변형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화은은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앙금 생성 반응'을 대표하는 백색 물질인데, 이 녀석이 감광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물론 슐츠는 카메라에 큰 관심은 없었던 듯하며 당시는 아직 화가들이 바늘구멍 사진기에 종이를 대고 그림을 그리는 데 만족하는 시절이었으니, 염화은이 카메라에 활용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체로 감광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물질은 할로겐화은(염화은, 요오드화은, 브롬화은 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 필름이나 인화지에도 이들 물질이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이를테면 브롬화은(AgBr)을 이용하여 만든 인화지의 경우 흔히 '브로마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브로마이드라고 부르는 연예인 화보는 처음에 브로마이드 인화지를 이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도면을 인쇄해 놓은 청사진]

 감광물질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됩니다. 이를테면 도면 등을 복제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청사진' 역시, 특수한 화학물질을 칠해 놓은 종이에 도면을 놓고 빛을 쬐어 가려지지 않은 부위에만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의 인쇄 방법이었습니다(청사진은 근래 대형 프린터와 플로터가 발전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옵스큐라에 화가 대신 감광지를 활용하는 시도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는데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1765-1833)의 '헬리오그라피'가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3. 헬리오그라피 : 최초의 필름카메라

 

 니엡스는 프랑스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는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나폴레옹 군대에 투신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군대에서 퇴역한 이후로는 과학 연구와 발명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1807년에는 형과 함께 내연기관의 일종인 '피레올로포르'를 발명하는 등 나름 이런저런 분야에서 업적이 있는데, 역시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면 최초의 필름(?)카메라를 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엡스는 처음에는 당시 기준 신기술이었던 석판 인쇄에 관심이 있었지만 기술이 부족하여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대신 그림을 그리는 도구였던 카메라 옵스큐라로 관심을 옮겼다고 합니다. 그는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상을 본뜨는 방법을 연구했고, 감광물질을 판에 칠하여 상이 거기에 맺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가 사용한 감광물질은 아스팔트의 일종인 '유대 역청'이었는데, 촬영 후 이를 라벤더 오일로 씻어내면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은 씻겨 내려가고 빛에 노출된 부분만 남는 원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하나. 몇 시간에 걸쳐 촬영했기 때문에 햇빛을 받은 방향이 제각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1826(혹은 25)년 만들어진 이 최초의 필름(?)은 '태양의 그림'이라는 뜻의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로 불렸습니다. 이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지만 최초라는 데 의미가 있을 뿐 아직 실용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사진 한 장을 촬영하기 위하여 노출 시간을 최소 몇 시간이나 잡아야 하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광물질로 사용한 유대 역청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당연히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인물사진이나 활동사진으로는 전혀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다른 하나. 플랑드르의 조각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리오그라피 발명 이후로도 니엡스는 사진 기술의 실용화를 위하여 계속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여기에는 미술가인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1787-1851)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다만 니엡스는 형이 내연기관 개발 등에 가산을 탕진하는 등의 이유로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결국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최초로 실용화된 사진기술'의 명예는 상당 부분 다게르와 그의 '다게레오타입'에 돌아가게 되는데, 다게르가 공로를 가로챘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니엡스의 아들과 공동연구를 계속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1.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1)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 아직까지 전문가들과 학생들의 전유물이던 비디오게임이 일반 대중에게 급속히 전파된 시발점은 1972년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를 피해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주한 전기공학자 랠프 헨리 베어(1922-2014)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군수업체 샌더스 어소시에이츠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던 1966년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던 중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꼭 대형 컴퓨터로만 게임을 즐겨야 하나? 기기를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서 가정용 TV에 연결해서 플레이할 수는 없을까?"


 - 메모광(?)이었던 그는 이를 잊지 않고, 2년 정도 틈틈이 작업하여 그럴 듯한 기계를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이 기계의 겉면은 나무 무늬 테이프로 포장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브라운 박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프로토타입까지 만들어진 이 기계는 그의 직장인 샌더스 사에서는 출시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사정 끝에 TV 제조업체인 마그나복스와 계약을 하여 1972년 10월에야 정식 출시되었습니다. 출시 당시 명칭은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 이 기계는 사실 아주 단순해서, TV 화면에 몇 개의 점을 띄워놓고 이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정도의 기능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해당 게임에 맞는 셀로판지를 TV에 붙이고 그것에 맞추어 점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ㅡㅡ; 그래도 선으로 연결된 조종기라든지, 게임의 종류를 바꾸는 일종의 카트리지(사실 이 때는 단순히 회로의 연결을 조작하는 스위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트리지라기엔 애매하지만) 개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개발자인 베어 본인이 화면에 대고 쏘는 광선총을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는 정작 그렇게 큰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가격이 $100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비싼 편이었기도 하고(1970년대 초입니다), 마그나복스 대리점에서만 판매하는 바람에 많은 소비자들은 이 게임기가 마그나복스 TV 전용 기기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도 첫 해 10만 대, 최종 33만 대가 팔려나가며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제시하였습니다. 한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플레이하는 모습]



2.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2) 최초로 성공한 아케이드 게임기


 - 1편 끝에 잠깐 등장한 놀런 부슈넬, <스페이스워!>를 보고 흥분했던 이 사람은 1971년 이 게임의 아류작인 <컴퓨터 스페이스>를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기)은 그럭저럭 주목을 받아서 2500대 정도가 팔려나갔는데, 개발 및 생산비용이 만만찮게 들어서 최종적으로는 적자를 냈다고 합니다.


 - 그래도 이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판단한 부슈넬은 뛰어난 엔지니어인 앨런 알콘(1948-) 등을 끌어들여 아타리(Atari)를 창업하였습니다. 아타리는 바둑용어 '단수(單手)'의 일본식 용어로, 바둑팬이기도 했던 부슈넬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는군요. 그 부슈넬이 알콘을 부추겨(큰 계약건이라고 구라(?)를 쳤다고 함) 1972년 말 2인용 탁구 게임을 개발하였으니 그 이름은 <(Pong)>입니다.


 - 아직 시작 단계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 부슈넬은 일단 자신과 친분이 있던 어느 선술집에 기기를 설치하고 운영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술집 사장이 "기기가 고장났다"고 알려와서 달려갔더니, 기기가 고장난 게 아니라 동전이 가득 들어차 동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에 확신을 얻은 부슈넬 일당(?)은 이 게임기를 대량생산하여 팔기 시작했고, 공전절후의 히트를 쳤습니다.


[퐁]


 - 이 게임기는 동전을 넣고 플레이하는 형태였고, 그래서 비슷한 형태의 게임기(하지만 비디오게임은 아닌)를 운영하던 '아케이드(오락실)'에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퐁>의 성공에 자극받아 이후 수많은 게임기들이 나왔고, 핀볼 등 컴퓨터 없는 게임기들이 있던 아케이드는 머지않아 비디오게임 일색으로 변신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퐁>을 가정용 게임기로도 출시하여 역시 대히트를 쳤습니다.


 - 그런데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와 부슈넬에게 느닷없이 태클이 날아왔으니, 마그나복스와 베어가 특허 위반으로 소송을 걸어왔습니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에 <퐁>과 비슷한 탁구(?) 게임이 있었고, 나중에 출시된 <퐁>이 자기들 게임을 베꼈다는 거죠. 이 소송전은 결국 아타리가 이들에게 돈을 주는 조건으로 합의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특허 관련 소송으로 오디세이 게임기 판매 수익보다 더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ㅡㅡ;



3. 1970년대 후반 : 게임 '산업'이 열리다


 - 오디세이와 <퐁>은 그 때까지 축적된 가능성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아타리 뿐만 아니라 미드웨이, 콜레코, 마텔 등 많은 기업들이 비디오게임에 돈을 투자하고, 들어오는 돈과 인력에 비례하여 게임 분야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1976년에는 페어차일드 사에서 '채널 F'라는 가정용 게임기를 출시하였는데, 최초로 '프로그램'이 내장된 카트리지(흔히 말하는 게임팩)를 쓰는 게임기였습니다.


 - 한편 1977년에는 아타리에서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 통칭 '아타리 2600(이하 2600)'을 출시하였습니다(2600이란 당시 컴퓨터 해커 사이에서 상징성 있는 숫자인데, 아마 여기서 따온 명칭으로 추정). 8비트급 CPU에 128바이트 RAM을 장착한 위엄 넘치는 물건이었던 2600은 처음에는 흥행이 시원찮았지만, 이후 급성장하여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릅니다.


[(左)아타리 2600, (右)2600용 게임 <핏폴> 플레이 화면]


 - 이렇게 게임들이 잇따라 흥행하고 대자본이 몰려들면서, 비디오게임은 단숨에 거액을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더 많은 자본과 더 많은 인력을 끌어모았고, 시장은 끝없이 커져갔습니다(다만 이것은 거품이었다는 것이 몇 년 후에 밝혀집니다). 1977년에 출시되어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개막한 애플 II 또한 게임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당연히 PC에서도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 미국에서의 열기는 다른 지역으로도 번졌고, 특히 당시 전자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일본에서는 타이토, 닌텐도, 남코 등 많은 기업이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78년에는 타이토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하면서, 일본은 미국에 버금가는 게임 대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일본 내에서 이 게임의 인기는 엄청나서 일본 내에 동전 품귀현상이 발생하고, 동전 수거를 크레인 달린 트럭으로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ㅡㅡ;


 - 이렇게 시장이 급성장하는데, 정작 시장의 선두주자인 아타리는 그에 걸맞는 투자를 받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부슈넬은 자본이 충분한 대기업의 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1976년 회사를 워너브라더스에 28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그 산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앙의 씨앗이 될 줄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몰랐겠지요.



4. 아타리 쇼크 : 초고대문명의 멸망


 - 문제는 워너와 아타리의 분위기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아타리는 설립자인 부슈넬부터가 히피 출신이었고, 히피 아니면 오타쿠(?)가 모인 기업이다보니 회사 내에서 대마초를 피우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심히 화기애매(?)한 가축적(?)인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ㅡㅡ; (당시 아타리의 직원 중에는 히피짓을 하던 때의 스티브 잡스도 있었다고) 당연히 이런 분위기를 새 주인이 된 워너가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 결국 2600의 초기 판매부진을 빌미로, 워너는 1978년 부슈넬을 해고하고 레이 카사르(1928-)를 새로운 CEO로 앉혔습니다. 이 양반은 나름 베테랑 경영인이라 회사의 급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2600 버전으로 출시하는 등의 노력으로, 초기 판매가 부진하던 2600을 시장의 1인자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카사르는 게임 개발자들의 성향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회사의 영광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새기지 못하게 하는 방침에 불만을 품고, 아타리의 한 개발자는 1979년 말 출시된 <어드벤처>라는 게임에 '특정 방식으로 플레이하면' 자기 이름이 나오도록 몰래 만들어 넣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스터 에그'의 시초]


 - 아타리의 분위기는 기껏 개발한 게임이 대히트를 쳐도 보너스는 커녕 크레딧에 개발자 이름 넣는 것 하나 허용되지 않을 만큼 경직되어 버렸고, 이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익숙한 개발자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항의하러 찾아간 개발자들에게 카사르가 '타월 디자이너' 운운하며 엿을 날렸다는 일화는 유명).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개발자들은 하나 둘 회사를 떠나갔고, 이들은 대부분 액티비전과 일렉트로닉 아츠(EA)에 모여 '서드파티'라는 개념의 게임회사를 만들었습니다(설명은 후술).


 - 유능한 개발자들이 사라진 아타리는 저질 게임을 양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들 뿐만 아니라, 1980년을 전후하여 나온 게임들은 몇몇 명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양에 비해 질이 크게 떨어졌고, 심지어는 그 조악한 그래픽에도 불구하고 19금 포르노 게임들이 마구잡이로 출시되기까지 했습니다(2600용으로 나온 포르노 게임을 '아타리 포르노'라 부르기도 합니다). 시장은 초 호황이었지만, 밑둥부터 썩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 거기에 1980년 전후 벌어진 2차 오일쇼크로 경제불황이 찾아오자 그동안 잔뜩 끼어 있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게임계의 최전성기라던 1982년, 아타리는 4분기 실적 예측을 이전보다 낮춰 잡았고 이는 곧바로 워너를 비롯한 게임회사들의 주가 폭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때부터 본격화된 시장의 축소에 위기의식을 느낀 아타리와 워너는 부랴부랴 스티븐 스필버그와 계약, 당시 최고의 영화 <E.T.>를 게임으로 만들어 출시하는데......


[AVGN의 <E.T.> 리뷰. AVGN 영상의 특성상 온갖 욕설이 난무하니 주의]


 - 이런 걸 게임이라고 내놨습니다. ㅡㅡ; 애초에 개발자들에게 주어진 개발 시간은 단 5주. 좋은 게임이 나올리가. ㅡㅡ;; 오죽하면 그 카사르마저도 "이건 무리"라고 반대했다지만, 워너 경영진은 달랑 저 시간을 주고서는 개발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날림으로 나온 게임의 운명이란 뻔했습니다. FXck!! 재고가 엄청나게 남았고, 아타리는 남은 카트리지를 모두 애리조나의 사막 한가운데 묻어버리는 위엄 넘치는 짓을 하였습니다. ㅡㅡ;;;


 - 결국 거품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던 게임 시장은 이 한 방을 맞고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음 해인 1983년에는 판매량에서는 선전했지만, 이는 가격을 거의 1/10까지 떨어뜨리는 무시무시한 덤핑의 결과물로 회사들이 거두는 수익은 크게 줄었습니다. 결국 이를 버티다 못한 대기업들은 잇따라 게임 시장에서 철수해버렸고, 거기에 빌붙어 게임을 만들던 중소 개발사들은 대부분 파산, 액티비전과 EA 등 PC 게임으로 갈아탄 극소수 회사만 살아남았습니다.


[미국 비디오게임 시장 규모를 나타낸 그래프. 출처]


 - 그리고 아타리는 1982년 말 2600의 후속작으로 아타리 5200을 출시하지만 폭망했고(컨트롤러의 감도가 개판이었다고 합니다), 적자가 계속되자 결국 워너마저 아타리를 매각하고 게임 시장에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비디오게임 시장 자체가 붕괴했고, 특히 가정용 게임 시장은 1985년 무렵에는 전성기(그래봤자 1982년)의 2%까지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비디오게임 산업은 한때의 광풍으로 끝났습니다. 아니, 끝난 줄 알았습니다. (계속)



###게임회사 분류에 관한 보충설명###

 1) 퍼스트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직접 만든 게임. 당연히 게임기 제조사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ex. 슈퍼마리오 시리즈)

 2) 세컨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자회사나 다른 게임 개발사에 하청을 주어 만든 게임. 시장에 나올 때는 게임기 제조사의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말 그대로 하청.

 3) 서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와 무관한 게임 개발사가 그 게임기에서 돌아가도록 자체적으로 만든 게임. 게임 개발사의 이름을 붙여 출시됩니다. 다만 게임기 제조사에서 '이 게임기용으로 게임을 출시해도 좋다'는 라이센스를 게임 개발사에 걸어놓을 수는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딴지라디오)> 中 42. "기본교양 게임사의 잉해" / 43. "기본교양 콘솔사의 잉해"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503754 (놀런 부슈넬과 아타리의 일대기)

http://thisisgame.com/webzine/series/nboard/212/?series=113&n=57382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http://vgsales.wikia.com/wiki/Video_game_industry (게임 시장 관련 데이터)

Google 도서 검색 (1) (2)



0. 서문

 - 게임의 역사를 논하기에 앞서, '게임'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게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출처 : 한컴사전]


 - 즉 엄밀히 말하면, 게임은 '누군가와 승패를 겨루거나' '혼자 혹은 여럿이 즐기며' '일정한 규칙을 가진' 놀이를 통칭합니다. 어릴 적 즐기던 팽이치기나 땅따먹기도 게임이요, 혼자서 즐기지만 일정한 규칙이 있는 낱말맞추기 퍼즐이나 직소, 네모로직같은 것도 게임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게임이란 단어는 그러한 넓은 의미보다 소위 '비디오게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화면 등을 통하여 출력되는 정보를 보면서, 프로그램에 설정된 규칙에 따라 플레이를 진행하는 그러한 형태의 게임 말입니다. 최초의 컴퓨터가 발명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류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꾼 컴퓨터는 인류의 놀이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비디오게임의 역사는 컴퓨터의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합니다. 지극히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필요에 따라 발명된 컴퓨터가, 그 자체로는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용도로 쓰인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유희'라는 것 자체가, 자원을 쓸데없이 낭비함으로써 정서적 만족과 쾌락을 얻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게 무의미하다는 건 절대 아니지요. 이러한 행위는 인간에게 상상력을 더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는 훨씬 더 생산적인 자연의 입장에서는 파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때로는 게임을 현실로 구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버티드 헤어핀(와일드 마우스) 롤러코스터'는 본래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게임이 흥행한 이후 실제로 건설되어 중국에 실물이 존재.]


 - 이제 우리는 인류 유희의 역사에 전례없는 대격변을 불러일으킨 비디오게임의 발자취를 짚어나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비디오게임이 인류의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비디오게임을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고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큰 의미 없는) 최초의 게임들 

 - 최초의 컴퓨터는 '컴퓨터'의 정의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콜로서스(1943)와 에니악(1946)을 들고 있습니다(콜로서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에 군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공개가 늦었고, 오랫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들은 일차적으로는 군용(미사일의 탄도 계산이라든지), 나아가서는 과학과 수학 계산용으로 쓰였습니다. 


 - 사용 목적이 그러했고, 크기 자체도 워낙 거대했다보니(에니악의 경우 전원을 올리면 주변 동네들의 가로등이 깜빡거릴 정도로 전력 소모가 심했다고) 컴퓨터는 정부기관이나 국책 연구기관 등에 극소수만 존재했고, 당연히 이를 접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적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이것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아가서는 이를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목적의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최초의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이 출현하게 됩니다.


[OXO]


 - '최초의 게임'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 다양한 게임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음극관 놀이장치(1947)나 튜로챔프(1948, 체스 시뮬레이션) 등이 언급되지만 이들은 실제 프로그램으로 완성된 건 아닙니다. 실제로 완성되어 실행된 게임으로는 '틱택토'를 구현한 <OXO>(1950)과 '님'을 구현한 <님로드>(1952)를 최초로 꼽는데, 이들은 모두 기존의 보드게임을 프로그램화한 것입니다. 둘 다 연구 및 홍보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게임의 역사에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 1958년에는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의 물리학자 윌리엄 히긴보덤(1910-1994)이 <테니스 포 투>라는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연구나 홍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유희'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게임으로 평가됩니다. 오실로스코프(병원에서 심장 박동 표시하는 그런 장치) 화면상에서 일종의 테니스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만들어졌는데, 히긴보덤은 어디까지나 '손님들이 가지고 놀며 즐기는' 목적으로 이를 만들었고 그 존재는 한참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테니스 포 투> 플레이 화면]


 - 지금까지 언급한 최초의 게임들은, '최초'라는 것 이외에 역사에 중요하게 언급될 요소가 딱히 없습니다. 이들은 당시 컴퓨터를 접할 수 있는 극소수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거나 내부적으로만 활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그래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후의 게임들에게도 별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니, 그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면 크게 의미있는 존재라고 보기 어렵겠지요.


 -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의 시작점, 진정한 의미의 '최초'는 과연 무엇일까요? 조금 더 지나서, 1962년으로 가 보겠습니다.




2. 진정한 최초 : <Spacewar!>


 - 1948년 발명된 트랜지스터는 극초기 진공관 컴퓨터보다 훨씬 작은(그래봐야 방 하나에 꽉 차는 수준이었지만)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고, 반대로 성능은 크게 향상되어 좀 더 다양한 용도로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1950년대 말부터는 이보다 더 작은(물론 그래봐야 장롱짝 크기는 되는) 컴퓨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1959년 출시된 PDP(프로그램 데이터 프로세서)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PDP-1]


 - 최초 모델인 PDP-1은 입력을 키보드로 하는 최초(!!)의 컴퓨터였고(이전의 컴퓨터는 천공카드와 종이테이프를 사용), 이것이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들어온 것은 1961년이었습니다. 당시 MIT의 학생들은 이 컴퓨터를 가지고 다양한 일들을 했는데, 그 학생들 중에 스티브 러셀(1937-)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 러셀은 '화면에 그래픽을 띄우고, 이를 보면서 컴퓨터를 가지고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주변 학우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1890-1965)의 우주 SF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우주선끼리 서로 쏘아 맞추는 형태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러셀은 매우 게으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ㅡㅡ; 주변 친구들이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고 의욕을 북돋워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 그렇게 완성된 게임은, 처음에는 그저 우주선 두 대가 미사일(로 간주되는 점)을 발사하여 서로를 맞추는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러셀 일당(?)이 이 게임을 완성하고, 사람들(시대가 시대였으니, 그들 모두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와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게임에 여러 요소가 추가되기 시작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이 "이런 게 있으면 더 재미있겠는데?"라며 직접 프로그램을 수정했던 것.


[<스페이스워!> 플레이]


 - 누군가는 우주공간을 연상케 하는 배경을 추가하여, 게임에 사실성을 더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화면 가운데 별을 놓아서, 거기에 가까이 가면 중력의 영향을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위기를 피하기 위해 우주선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동 위치가 랜덤이라 때로는 별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별에 부딪혀 터질 수도 있었습니다.


 - 게임은 1960~70년대 컴퓨터의 확산과 함께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고, 10년을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살이 붙게 됩니다(개중에는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버전, 동전을 넣고 플레이할 수 있는 버전도 있었습니다!). 이 게임의 이름은 <스페이스워!>. 그저 재미로, 아무 경제적 대가 없이 만들어졌으며 프로그램 코드 역시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오픈소스' 게임이라는 타이틀도 추가로 붙습니다.


 - <스페이스워>는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용도로 쓸 수 있음을 모두에게 알렸고, 이에 컴퓨터 좀 다룬다는 사람들은 컴퓨터의 발전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의 게임을 연구하고 개발하고자 잉여력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유타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놀런 부슈넬(1943-)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계속)




참고 :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딴지라디오)> 中 42. "기본교양 게임사의 잉해"



1. LED가 뭔데?

 

- LED(Light Emitting Diode), 한국어로 '발광 發狂 말고 다이오드'입니다. '다이오드'라는 명칭이 붙은 걸 보니 반도체 소자의 일종이고, 그 중 빛을 내는 성질을 가진 특정 종류의 소자를 의미합니다. 최근 LED 이야기가 사방에서 나오는 것은 이 특이한 소자의 발전이 빛을 다루는 전반적인 분야에 큰 변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LED가 일종의 반도체 소자라고 말했으니 여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 봅시다. 일단 '반도체'란 말을 많이 쓰지만 이게 대체 뭔가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죠. 일단 반도체는 도체(전기가 통함)와 부도체(전기가 거의 통하지 않음) 사이의 물질이라고 흔히 정의됩니다. 이들은 보통 14족 원소들인데, 전자의 개수와 전자가 없는 빈 칸의 개수가 같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죠.

 

- 중고등학교 과학 지식을 가지고 이해를 해 봅시다. 주기율표에서 '족'이란 최외곽 전자 개수와 관계가 있죠. 14족 원소들은 최외곽 전자 개수가 4개이고, 여기엔 전자가 8개까지 찰 수 있으니(물론 큰 원소들은 최외곽 전자가 18개까지 차겠지만 우린 거기까지 가지 않을 겁니다) 전자 4개에 빈 칸 4개가 있는 셈이죠. 이들 빈 칸을 일반적으로 '정공(혹은 양공)'이라 합니다.

 

 - 순수한 14족 원소는 전자와 정공의 수가 같기 때문에 별 일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순물이 섞여 전자와 정공의 개수가 바뀌면 상황이 달라지죠. 전자가 더 많아지면 남는 전자는 정공을 찾아다닐 것이고, 정공이 많아지면(전자가 적어지면) 남는 정공들은 전자가 들어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게 됩니다.


-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두 물질을 붙여놓은 다음 거기에 전류를 흘려보냅니다. 전류가 흐른다는 건 전자가 이동한다는 것과 동의어니까, 이를 이용하여 두 물질 사이에서는 전자가 정공을 찾아다니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전자는 한 쪽에만 많이 있지 않았나요? 그래서 실제로 두 물질 사이에서 전자는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반도체 소자의 기본 원리입니다.

 

- 두 물질 중 전자가 많은 쪽은 전기적으로 음성(-)을 띠기 때문에 N형(Negative), 정공이 많은 쪽은 (+)를 띠므로 P형(Positive) 반도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당연히 전류는 P형→N형으로 흐르죠. N형과 P형을 하나씩 붙여놓은 것을 '다이오드', 번갈아가며 세 개를 붙여놓은 것을 '트랜지스터'라 합니다.

 

- 그런데 전자는 이동하면서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고, 몇몇 종류는 이 에너지가 빛의 형태로 방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LED입니다. 여기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양은 일정한데, 빛에서 에너지의 양은 파장의 길이와 관련이 있고 파장의 길이란 빛에서는 바로 색깔이죠. 특정한 물질로 LED를 만들었을 때 특정한 색의 빛이 나온다는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자세히 설명하려면 Energy Band Gap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어려우니 생략).


[대충 이런 원리]


 

2. LED 개발의 역사

 

- LED의 원리 자체는 상당히 오래 전에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영국의 엔지니어 헨리 조셉 라운드(1881-1966)는 진공관 다이오드의 대체물질을 연구하던 중 특정 재료에 전류를 흘려보낼 때 빛이 방출되는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학술지에 소개하였습니다. 다만 라운드의 전공 분야가 이 쪽이 아니기도 해서 그는 이걸 소개만 하고 끝내 버렸고, 이후 몇몇 학자들의 관련 연구만 진행되었습니다.

 

- 1950년대 이후 반도체 소자가 개발되고 관련 지식이 쌓이면서, 발광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가시광선을 방출하는 소자를 개발하여 실제로 활용하는 데 집중하였고, 마침내 1962년 닉 홀로니악(1928-)이 GaAsP(갈륨+비소+인)을 이용한 적색 LED를 개발하여 최초로 실용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황색, 황록색, 주황색 등의 LED가 속속 개발되어 LED 실용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철역이나 버스정류장 등에서 흔히 보는 단순한 색의 전광판이 바로 초기 LED의 대표적인 활용 사례죠. 그런데 LED의 활용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청색 LED가 실용화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물론 청색 LED의 개발 자체는 초창기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실제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효율적인 소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LED 사용 확대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1994년 나카무라 슈지(1954-), 아마노 히로시(1960-), 아카사키 이사무(1929-) 등이 GaN(질화갈륨)을 이용한 새로운 청색 LED를 개발하며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녹색 LED도 곧 개발되었습니다.

 

- 이게 왜 중요하냐면, 청색-녹색 LED가 개발되면서 드디어 빛의 3원색을 모두 LED로 구현하게 되었고, LED로 백색 빛을 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LED를 조명이나 영상화면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부터죠. 그 중요성이란 이 세 명의 과학자가 함께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3.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

 

- 일단 생각나는 곳은 바로 전광판. 간단한 글자와 그림을 표현할 수 있는 LED 전광판은 꽤 오래 전부터 실용화가 되었고, 일찍부터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황색-적색-황록색을 활용한 전광판이 바로 초창기 LED 기술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물건이죠.


[우리에게 익숙한 LED 전광판]


- LED의 활용도가 폭발하게 된 계기가 바로 청색-녹색 LED 개발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빛의 3원색을 모두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이를 모두 합친 백색 빛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이것은 조명이라든지 디스플레이라든지 등등 빛을 활용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거든요(괜히 다른 색도 아니고 청색 LED 개발자들이 노벨상을 받은 게 아닙니다).


- 이들의 생산이 본격화된 2000년대 이후 LED를 활용한 물건은 우리 주변에서 점차 많아지게 됩니다. 당장 이 글을 보는 분들 중 상당수는 집 전등을 LED 조명으로 쓰고 있을 겁니다. 블로거의 집도 책상 조명은 모두 LED 램프를 쓰죠. 그리고 LED 디스플레이(TV나 모니터)가 상용화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이건 LCD 액정 뒤에 있는 광원을 LED로 바꾼 것을 이야기합니다.


 

[LED TV의 원리. 일반 LCD TV보다 더 얇게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 그 외에 신호등 조명이 LED로 바뀌기 시작한 건 좀 됐고, 가로등이나 공공건물 조명도 LED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LED 조명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일까요? 우선 LED가 기존 전등에 비해 가진 효율성의 우위 때문입니다. 열이 많이 방출되어 에너지 낭비가 심한 다른 조명과 달리 열 방출이 비교적 적습니다(블로거는 이 글을 쓰면서 책상 스탠드 전구에 손을 30초쯤 대고 있었습니다. 다른 조명이면 바로 화상을 입죠).


- 두 번째 이점은 전구의 수명입니다. 주기적인 전등 교체가 필요한 백열등이나 형광등에 비하여 훨씬 긴 수명을 자랑하죠(다만 반영구적인 것까지는 아니고, 특히 LED 소자는 열에 악하기 때문에 제대로 방열을 해주지 못하면 수명이 다른 전등보다도 훨씬 짧아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 다양한 빛을 낼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 물론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들도 있다는군요. 위에서 말한 열 문제도 그렇고,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현재는 전기 종류를 변환(교류→직류)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열 낭비가 적잖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직 백열등-형광등을 압도할 정도의 효율은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 LED의 가능성을 두고 2000년대 이후 수많은 업체가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아직 기술이나 경험이 부족하고 시장이 '생각만큼'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고 있는 등의 이유로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망하는 기업이 많다고 합니다. 과당경쟁이 벌어지면서 가격이 지나치게 빨리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는군요. 관련기사


- LED 조명의 가능성 자체는 분명 거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광합성에 적합한 파장의 빛을 방출하는 LED 조명을 이용한 농작물 재배가 시도되고 있고, 벌레가 특정 파장의 빛을 좋아한다는 특징을 활용한 특수 용도의 조명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분명 새로운 시장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측면은 있지만, 앞으로 계속 성장할 분야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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