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ène Ysaÿe (1858-1931)
Sonata for Solo Violin Op.27 No.2

이자이, 1883년

 외젠 이자이는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입니다(한국에서 이름 표기가 중구난방인데, 프랑스식으로 '외젠 이자이'가 맞다고 하므로 일단 이에 따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사이 가장 뛰어난 연주자 중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바이올린곡들을 남긴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음악과 연관이 깊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자이가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것은 5세 때로,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악기를 가르쳤는데 2년 뒤에는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할 만큼 기량이 성장하였습니다. 다만 음악원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였는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자기 아버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거나 거리 연주자로 나서는 등 독자적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역시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거장 앙리 비외탕(1820-1881)이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그의 연주를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브뤼셀 음악원에 입학하도록 추천하였습니다. 음악원에 입학한 이자이는 비외탕과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 등 대가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음악원 졸업 후 이자이는 벤야민 빌제 비어홀 오케스트라(現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연주 경험을 쌓은 그는 안톤 루빈스타인 등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27세 때는 파리 콩세르 콜론에서 솔로 연주자로 데뷔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모교인 브뤼셀 음악원에 교수로 임용되어 교육활동에도 나섰는데 루이스 퍼신저(1887-1966),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등의 거장들이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연주자로도 계속 활동하여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특이점이라면 드뷔시, 프랑크, 생상 등 유럽의 수많은 대작곡가들이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가 작곡자의 의도를 훌륭하게 해석하여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반대로 이자이 자신도 수많은 바이올린곡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들을 동료 연주자들에게 헌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와중에도 건강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는데,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 그는 나중에는 연주보다는 작곡, 지휘, 교육 등의 활동에 더 치중하였고, 말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이 더욱 심해져 1931년 왼쪽 발을 절단하는 수술까지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회복하지 못했고 같은 해 사망한 뒤 브뤼셀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사후 1937부터 그를 기념하여 '이자이 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이름을 바꾸어(영국 여왕과는 무관하며, 벨기에 왕비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경연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자이의 연주 스타일은 뛰어난 연주 테크닉에 기반한 정확한 연주였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위에 언급했듯이 수많은 작곡가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작품들 또한 자기 실력에 바탕해서 그런지 어렵고 난해한 곡들이 많다고 하며,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은 이자이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를 접하고 감명받아 만들었으며, 특히 2번의 첫 두 마디는 무반주 파르티타 3번의 도입부에서 따 왔습니다. 6개의 작품은 각각 당시의 명 연주자 6명에게 헌정하였는데 2번은 자크 티보(1880-1953)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참고자료
 "외젠 이자이",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sound.or.kr/bbs/view.php?id=music3&no=767)
 김미정,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 2번> (1923)에 관한 분석 및 연주법 연구」 (dspace.ewha.ac.kr/handle/2015.oak/213515)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작곡자 의도 완벽 해석… ‘헌정받기의 대가’ 이자이", 동아일보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509/84267346/1)
 "Eugène Ysaÿe", "Violin Sonata No. 2 (Ysaÿe)", 영문 위키피디아
 "외젠 이자이", 나무위키

 

나운영(1922-1993)

String Quartet No.1 <Romantic>

 

 

 나운영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초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5세 무렵 아버지에게 양금을 배우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10대 초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17세 때인 1939년에는 가곡 <가려나>(김안서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에 당선될 만큼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김성태(1910-2012)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이듬해(1940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모로이 사부로(1903-1977)를 사사하였고, 1943년 본과를 졸업한 후 연구과에 진학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였습니다. 나운영은 작곡과 함께 첼로를 전공하였는데 귀국 후에는 채동선 현악사중주단과 경성후생악단에서 첼로 주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이 해방된 1945년에는 중앙중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중앙여자전문학교(現 중앙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후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목원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민족음악문화연구회를 창립하고, 민족음악 진흥을 위한 여러 활동에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선토착화(先土着化) 후현대화(後現代化)'라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음악 진흥에 힘쓰면서, 여기에 12음기법 등 현대음악의 여러 요소를 결합하는 여러 시도를 통하여 독창적인 한국의 현대음악을 정립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작품들은 초기에는 한국적 음악을 지향하다가, 중기 이후에는 현대음악에 한국적 요소를 덧붙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운영은 해방 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가, 몇 년 뒤 개신교로 개종하여 남은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종교음악이 많으며, 교회 성가대를 오래 지휘하거나 찬송가 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대한민국의 기독교 음악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반면 불교계의 위촉을 받고 찬불가(讚佛歌)를 작곡한 적도 있다니 종교적으로 심하게 편협한 자세를 갖지는 않은 듯한데, 이러한 이력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뜻하지 않게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의 작품은 관현악, 실내악, 가곡, 종교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13개의 교향곡, 5개의 오페라 및 칸타타, 18개의 예술가곡을 비롯한 다수의 가곡 및 찬송가, 총 12개의 실내악곡 및 피아노곡 등입니다. 현악사중주 1번은 1942년 작곡하여 제국고등음악학교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1952년 초연되었습니다.

 

 

 

@ 참고 :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http://launyung.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운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417)

법보신문 "찬불가 만든 개신교인 나운영의 시련"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497)

한국어 위키백과 "나운영"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9A%B4%EC%98%81)

 



Kodály Zoltán (1882-1967)

<Háry János> Suite



[코다이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이며, 음악학자이자 음악교육자이기도 합니다. 바르토크와 함께 헝가리의 '진짜' 민속음악을 발굴하여 세계에 알렸으며, '코다이 교수법(Kodály method)'이라는 음악교육이론을 제창하여 음악교육에도 큰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는 1882년 헝가리 중부의 케치케메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철도노동자였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음악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모 모두 취미로 악기와 성악을 즐기는 음악애호가여서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코다이 역시 어릴 적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익혔습니다. 그는 중등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처음으로 작곡을 시도했는데, 16세 때 학교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작곡한 서곡이 처음 세간에 알려지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18세 때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 입학하여 독일어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음악 또한 포기하지 않고 리스트 음악원에 동시 입학하여 한스 쾨슬러(1853-1926)를 사사하였습니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음악애호가였음에도 자신의 아들이 음악 전공자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작곡가는 남자가 할 만한 직업이 아니다"라고 ㅡㅡ; 코다이를 말렸고, 그는 일단 자신의 진로를 교사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1905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때마침 헝가리의 다른 대작곡가인 바르토크를 처음 만났는데, 바르토크는 이미 헝가리 민속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를 거치며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등 집시 음악이 헝가리 음악으로 세계에 알려져 진짜 헝가리 민속음악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축음기를 들고 헝가리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과 서민들의 음악들을 채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1906년 첫 결실인 <헝가리 민요집>을 출판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코다이는 「헝가리 민요의 운율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수십 년간 코다이와 바르토크는 헝가리의 수백 개 마을에서 수천 곡의 민요를 수집하여 진정한 '헝가리 음악'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을 후원하던 샹도르 엠마(1863-1958)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코다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헝가리가 잠시 공산화되자 코다이는 이에 협력하였지만, 이 정권이 얼마 뒤 무너지자 잠시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음악 관련 활동은 지속하여 1923년 <헝가리 시편가>를, 1926년에는 오페라 <하리 야노슈>를 완성하는 등 작곡가로서 그의 대표작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헝가리 민속음악 연구도 꾸준히 진행하고, 음악교육 관련 활동도 지속하였습니다.


 1940년대 들어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나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바르토크와 달리 코다이는 끝까지 헝가리에 남아 음악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종전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그가 음악교육 등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 음악계의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그는 헝가리 국립음악원장, 음악가협회장, 과학기술원 명예회원을 역임하고, 헝가리 정부로부터 많은 훈장과 포상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58년 첫 아내 엠마가 사망하자 다음 해 58세 연하인 셔롤터 피첼리(1940-)와 재혼하였습니다. ㅡㅡ;


 말년에는 작곡가, 음악학자, 음악교육자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제창한 특유의 리듬 및 선율학습, 모국어처럼 어린이에게 친숙한 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한 음악교육 등 '코다이 교수법'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 음악교육학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권위와 명성의 정점에 오른 그는 1967년 사망하였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은 현재까지 생존하여 코다이의 음악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리 야노슈> 모음곡은 동명의 오페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리 야노슈'란 헝가리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 시골 마을에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허풍을 떨곤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곡은 관현악의 '재채기'로 시작하는데 헝가리의 속설에 따르면 이야기를 하다가 듣는 사람이 크게 재채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말이 있다는군요.




참고 : 

http://sound.or.kr/bbs/view.php?id=music3&no=872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vegalaxy1&logNo=60039228809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5071&logNo=120190904187

http://ihsnews.com/11125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Sir Michael Kemp Tippett (1905-1998)

Symphony No.3 Part.2




 마이클 티펫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로, 벤자민 브리튼(1913-1976)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의 집안은 영국 서남부의 콘월 출신이고, 할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아버지는 성공하여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결혼 후 런던 근교에 정착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둘째가 바로 마이클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후 그의 가족은 동부 서포크 주의 웨더덴으로 이사하였는데, 티펫은 이곳에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그 때부터 있었는지 어린 나이에도 나름 즉흥연주 같은 것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후 1914년 그는 남부 스와니지에 있는 기숙학교에 진학하고, 1918년에는 에딘버러의 명문학교인 페테스 스쿨에 진학하여 다른 과목들과 함께 파이프 오르간 등의 음악교육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는데 주변 학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그는 부모에게 자신이 친구 남학생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밝히고, 부모는 그를 학교에서 퇴학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링컨셔의 스탬포드 스쿨로 전학하여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득이 되었는데, 학문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스탬퍼드 스쿨에서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조금씩 음악인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티펫은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기대하는 부모와 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고, 그 무렵 무신론 옹호 등 반항적인 활동으로 학교와 충돌한 끝에 결국 스탬퍼드 스쿨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티펫은 동네 교회의 음악가들 등을 통하여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고, 자신의 가능성과 의지를 인정한 아버지가 그를 지원하면서 왕립음악학교에 정식으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과 지휘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아마추어 합창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 경력도 착실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1928년 학위 시험을 통과하여 학사 학위를 딴 그는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옥스테드에 정착한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전개하면서 생계를 위해 작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때마침 그곳에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프라이(1907-2005)가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훗날 공동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931년에는 옥스테드 합창단과 함께 헨델의 <메시야>를 지휘하였는데 그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원전 연주'를 선보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32년에는 인근 림스필드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이 때의 정치적 교류를 바탕으로 그는 좌파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뒤 그는 런던 카운티 정부가 후원하여 백수실직한 음악가들을 모아 설립한 사우스 런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위촉됩니다. 당시 그는 런던 근교의 광산을 돌며 노동자를 위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티펫은 1935년 영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받아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그는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던 공산당과 노선이 맞지 않아 결국 또다시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회의 혼란상,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관한 정체성 혼란 등(그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분명치 않은데, 한 여성과의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의 문제 때문에 그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심리 치료를 받았고,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를 배경으로 한 오라토리오 <우리 시대의 어린이>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지자 그가 재직하던 몰리 칼리지가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사회는 난장판이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재판 후에 3개월 징역을 선고받습니다(이후 2개월간 복역하고 어찌어찌 출소했다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여 작곡가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을 오가며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음악에 대한 많은 경험을 얻었고 그의 음악에 재즈와 블루스 등 미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BBC에서 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고, 평화주의자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사회정치적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쌓은 업적을 인정받아 티펫은 1966년 기사 작위를 받고 Sir 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병역거부까지 한 사람에게 선선히 작위를 내리다니 한국적 정서에서는 신기하긴 하지만 이후 1970년대를 지나며 그는 시력이 크게 악화되는 등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3년에는 런던 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1998년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세계 각지에서 음악적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티펫은 처음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작곡을 배웠고, 따라서 초기 작품은 비교적 보수적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현대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대담한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교향곡 3번은 1972년 완성되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블루스 요소가 적극적으로 들어가 있으며 특히 2부에는 곳곳에 베토벤 교향곡 <합창>의 부분들이 패러디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Ivo Josipović (1957-)

<Samba da Camera>



 - 요시포비치는 크로아티아의 작곡가, 법학자 겸 정치인ㅡㅡ;입니다. 작곡가나 법학자로서의 업적도 볼만하지만, 특히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의 중요 인물이었고, 현재는 '전진 크로아티아'당을 이끌고 있습니다.


 - 요시포비치는 1957년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現 크로아티아 수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축구선수로 활동한 적도 있다고 하며,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자그레브의 2차 음악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함께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였는데, 그와 함께 자그레브 음악학원에도 등록하여 음악 수업을 계속 받았습니다. 진정한 복수전공


 - 그는 1985년 형법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1994년에는 범죄과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84년부터는 모교에서 강사로 활동을 시작, 이후 법학부 교수로 선임되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ㅡㅡ; 1983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작곡한 <삼바 다 카메라>가 1985년 유럽방송연합 상을 수상하면서 작곡가로서도 인정받게 됩니다.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자그레브 음악학교의 강사 또한 역임하였습니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 당신은


 - 정치 활동은 1980년 크로아티아 공산당(당시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자치공화국'이었음을 감안합시다)에 입당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990년 전후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시기에 요시포비치는 공산당을 '사회민주당'으로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사회민주당의 첫 번째 법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 그는 너무 바빠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작곡가와 법학자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였습니다.


 - 이후 2003년 그는 당시 총리였던 이비차 라찬(1944-2007)의 권유로 정계에 복귀하였고, 국회의원과 사회민주당 부대표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2010년에는 사회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 요시포비치는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사이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사과하였고, 집권 초기에는 지지율 88%를 찍는 등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집권 내내 계속된 경제난 등 악재가 겹쳐 집권 말기에는 인기를 상당히 잃었고, 2014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크로아티아 민주동맹 소속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1968-)에게 근소하게 패배, 대통령 임기를 마쳤습니다. 퇴임 이후에는 '전진 크로아티아'라는 중도좌파 성향의 당을 창당하고, 자유인민당과 연합하여 총선에 후보도 내 봤지만 역시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에 패배하였습니다.이후로는 전진 크로아티아 당 대표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여담으로 그는 대통령 재직 말기인 2014년 태권도 명예9단을 수여받은 적도 있습니다. ㅡㅡ; 이는 요시포비치 자신이 태권도를 잘 해서라기보다, 크로아티아가 동유럽에서 태권도 인기가 가장 높은 편이고 세계랭킹 상위권 선수들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순남 (1917-1983?)

<산유화>



 - 이번에는 한국인 작곡가를 다루어 보겠습니다(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히려 한국인 작곡가들을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순남은 다수의 가곡과 한국 최초의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를 쓴 대작곡가이지만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에 북한을 선택하고, 북한에서도 정치적 숙청과 복권을 거듭하며 그 존재 자체가 묻혀 버린 비운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 김순남은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낙원상가?? 어릴 적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며, 1932년 경성사범학교(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 연주나 취주악단 지휘 등 음악적 활동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졸업 후 몇 년간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3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다음 해 도쿄 고등음악학원 작곡부에 입학하였습니다.


 - 도쿄에서 김순남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하라 타로(1904-1988)가 있는데,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음악가로 김순남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재학 중 그는 일본 현대작곡가연맹의 창작 발표회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출품하였는데, 당시 출품작인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작법을 사용하여 보수적인 일본 음악계에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 1942년 귀국 후 김순남은 '조선음악협회'에 음악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관제 단체였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좌익 성향의 비밀 조직인 '성연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니, 그가 딱히 친일부역자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해방 전까지 그는 버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첨단을 달리는 작곡가들의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꽤 전위적인 곡을 썼습니다.


 -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고 그의 작품도 사회 참여적인 색채를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해방의 노래> <농민가> 등 소위 '해방가요'를 다수 작곡하여 인기를 끌었고, '조선음악건설본부'에 가입하였지만 이 단체가 좌익-우익 및 친일-민족 대립으로 쪼개진 후에는 좌익계와 민족계가 합세한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 이 시기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1번, 합창 교향곡 <태양 없는 땅> 등 본격적인 관현악곡 또한 작곡하였는데, 각각 한국 최초의 작품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보는 전하지 않습니다. 김순남은 좌익 인사였음에도 그의 재능은 미군정 쪽에서 주목할 정도였고, 문화 담당 장교인 엘리 하이모비츠는 그에게 미국 유학을 주선하려고도 했지만 본인과 미군정 양쪽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이 시작되자, 김순남은 아내와 외동딸을 놔둔 채 다른 인사들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작곡 활동도 계속 이어갔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오페라 <인민유격대>는 한반도에서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입니다.


 -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 김순남은 소련으로 유학하여,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을 사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전 직후인 1953년 그는 돌연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고, 주변인들은 여러 유학생 중 그 혼자만 소환되는 것을 의심하였지만 본인은 별 생각 없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옥죄는 고난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 그가 소환된 것은 실제로 그가 남로당 쪽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박헌영과 친분이 두터웠음), 남로당을 숙청하면서 그를 엮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강한 사상 비판을 당하고, 1958년에는 창작에 관한 권한을 모두 박탈당하고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의 주물공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64년이 되어서야 다시 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창작 권리를 회복한 김순남은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뒤 폐결핵이 발병하면서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생활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투병이 길어지면서 그는 북한 사회에서 조금씩 잊혀졌고, 결국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1983년 경 신포에서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는 남한에서는 소위 빨갱이였고, 북한에서는 숙청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커녕 존재 자체가 오랫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1980년대 말 좌익 음악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조금씩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남한에 남은 외동딸 김세원(1945-, 성우로 활동)씨가 자료를 수집하여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김희조(1920-2001), 백남준 등의 거장들도 김순남에게서 음악을 배우거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 하지만 교향곡과 협주곡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면이 있어서 김순남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나마 현재 알려진 것들은 주로 가곡과 해방가요들이며, 그 중에서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산유화>의 경우 조수미 등의 유명 성악가들이 녹음한 바 있어 일반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유명합니다.




Hanns Eisler (1898-1962)

<Deutsche Sinfonie> Op.50



 - 한스 아이슬러는 독일의 작곡가로, 독일민주공화국(동독) 국가인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아이슬러는 1898년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 루돌프 아이슬러(1873-1926)는 칸트 철학을 전공한 명망 있는 지식인이었지만 가족의 생계는 그닥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찍이 급진적 사회운동에 뛰어든 형과 누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도 자연스럽게 급진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종전 직후인 1919년 아이슬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는데, 아이슬러는 이 때에야 비로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4년여간 쇤베르크에게 작곡을 사사한 아이슬러는 피아노 소나타 1번으로 비엔나 예술상을 수상, 전문 작곡가의 길을 화려하게 시작하였습니다.


 - 다만 쇤베르크는 음악에 정치색을 넣는 것을 극도로 배척했기 때문에, 급진주의자이며 매우 '정치적'이었던 아이슬러는 스승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1925년 아이슬러는 베를린 음악원 교수로 초빙되어 독일로 떠났고, 그 무렵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크게 반목하게 되었고 사제관계도 사실상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 독일에서 작곡과 정치 활동을 이어가던 아이슬러는 1930년부터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과의 오랜 관계를 시작하였습니다. 본래 쿠르트 바일(1900-1950)과 함께 작업하며 <서푼짜리 오페라> 등을 작업한 브레히트는, 예술관의 차이로 바일과 결별하고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술적, 정치적 지향점이 비슷한 아이슬러는 최고의 파트너였고 두 사람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부를 수 있는 합창곡과 민중가요를 다수 작업하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 아이슬러는 나치의 집권 이후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로 무장한 나치 독일에게, 공산당원인데다 유대계 혈통이기까지 한 아이슬러는 최우선 척결 대상이었던 것. 1933년 1월 안톤 베베른의 초청으로 비엔나를 방문 중이던 아이슬러는, 자신의 집이 게슈타포에게 수색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유럽 각지를 떠돌며 활동하던 그는,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정착하였습니다.


 - 이 무렵 쇤베르크(이 양반도 유대계)는 이미 미국으로 망명해 있었는데, 같은 망명자 신세였던 사제(師弟)는 미국에서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에서 아이슬러는 주로 영화음악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두 작품 정도가 오스카상 후보작으로 오르기도 했다는군요(수상은 하지 못했다고). 물론 사회주의자인 그에게 자본주의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미국 생활은 우울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의 작품세계도 다분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이 우울한 망명생활조차도 끝장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이 표면화하면서, 미국 내의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그 유명한 '매카시즘'). 1947년에는 '반미 행위 조사위원회' 청문회에 피고발인으로 불려나가기도 했는데, 황당하게도 고발자는 그의 친누나인 루트 피셔(1895-1961)였습니다(루트 피셔는 독일 공산당에서 정치적 논쟁 끝에 제명당했고, 이후 우파로 전향하였습니다).


 - 스트라빈스키, 아인슈타인, 찰리 채플린(이 양반은 자기부터가 매카시즘에 휘말렸는데) 등의 구명운동에도 아이슬러는 1948년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비엔나로 옮겨 활동하던 아이슬러는, 영혼의 단짝 브레히트의 권유를 받아들여 얼마 후 동독에 정착하였습니다. 이후 아이슬러는 동독 국가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작곡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 하지만 동독 정권이 스탈린주의 관료들로 들어차면서 아이슬러의 비판정신은 또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의 작품이 상연 금지되는 일도 벌어집니다. 정치적 압박이 계속되는 와중에 1956년 브레히트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은 아이슬러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결국 이를 회복하지 못하고 1962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독일 교향곡>은 망명 시기인 1935~39년에 걸쳐 작곡되었습니다. 1936년 첫 두 악장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초연하려 했지만 나치 독일의 항의로 무산되고(지휘자는 가사를 빼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작곡가 자신이 거부), 그가 동독에서 활동하던 1959년에야 초연될 수 있었습니다. 브레히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전반적으로 반(反) 파시즘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Iannis Xenakis (1922-2001)

<Metastasis>



 - 크세나키스는 그리스 출신의 건축가, 작곡가입니다(본업은 건축가). 출생지는 루마니아의 브러일라이며, 부모는 그리스계 인텔리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부모가 모두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크세나키스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세상을 떠났고, 이는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 크세나키스는 10세 때 그리스로 보내져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1938년에 그는 아테네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건축을 전공하였는데, 전공 교육을 받는 틈틈이 화성학과 대위법 등 음악 쪽 공부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리스가 이탈리아와 독일의 연이은 침공으로 전쟁에 휘말려들자 그의 인생도 뒤흔들리게 됩니다.


 - 1941~1944년까지 계속된 추축국 점령기동안 크세나키스는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하여 저항군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실명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간 크세나키스는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학위를 받았는데, 이 무렵 좌우파의 대립이 외국의 개입을 등에 업고 내전으로 번지자(그리스 내전) 그는 그리스 민주군(좌파)에 참여하여 다시 전쟁에 나섰습니다.


 - 내전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우파 쪽의 승리로 끝났고, 좌파 계열 인사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와중에 그는 가까스로 몸을 피하고 프랑스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지에서 크세나키스는 대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조수로 들어가 활동하였고, 작곡을 더 배우기 위해 아르튀르 오네게르(1892-1955), 다리우스 미요(1892-1974) 등을 찾아갔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코르뷔지에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 이후 크세나키스는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을 찾아갔고, 메시앙에게서 비로소 가능성을 인정받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메시앙이 특히 높게 평가한 것은 크세나키스가 건축가이며 고급 수학을 배웠다는 것인데, 실제로 크세나키스는 확률론을 비롯한 각종 수학적 이론을 음악에 도입하여 독특한 음악적 세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 크세나키스는 1959년 코르뷔지에 사무실을 떠나 독립하였고, 이후 건축가와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인디애나 대학, 소르본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일하던 1958년에 사무실은 브뤼셀 엑스포의 전시관인 필립스관(館)을 설계하였는데, 크세나키스는 이 건물의 구조와 기술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 <Metastasis(전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가 작곡가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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