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가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수년 전 큰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애국가의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는 윤치호 역시 민족반역자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를 친일파들이 만들었다는 게 논란의 핵심. 당시에는 국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현재는 흐지부지 넘어가게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국민이 알지만 동시에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안익태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안익태]



1. 숭실학교의 유망주, 유학길에 오르다


 - 안익태는 1906년 12월 평양에서 7형제 중 셋째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객주(위탁판매, 중개 등을 하는 중간상인)업을 하였다고 하며, 그의 바로 앞 형인 안익조(1903-1950)는 일제강점기 의사와 군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안익조 또한 안익태처럼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며, 일본군 장교(군의관)로 복무한 이력 덕분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형제가 사이좋게 친일행위


 - 안익태는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고등보통학교(해방 이전에는 숭실학교가 평양에 소재)에 재학하였는데, 여기서 서양음악을 배우면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음악 외에 특이한 이력으로는 숭실학교 야구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숭실중학의 4번타자로 전조선야구대회까지 출전했다니 운동선수로도 꽤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922년 10월 17일 동아일보에 실린 야구대회 기사. 선수명단에 안익태의 이름이 있습니다]


 - 이후 안익태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흔히 1921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확실한 것은 아닌데 상술했듯이 1922년 야구대회에 숭실학교 대표로 출전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現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 음악특기자 자격으로 입학하였고, 1926년에는 구니타치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하였습니다.


 - 안익태는 구니타치 학교를 졸업한 1930년 미국으로 유학, 신시내티 음악원과 커티스 음악원 등에서 첼로와 지휘를 전공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유명 지휘자인 레오폴드 스토콥스키(1882-1977)와 교류하였고, 스토콥스키의 도움으로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지는 등 음악가로 본격적인 데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인교회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지휘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2. 유럽 진출과 활동


 - 안익태가 처음 유럽 땅을 밟은 것은 1936년이었습니다. 이 때 그는 파울 힌데미트(1895-1963),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 등을 만나 교류하고, 바인가르트너의 도움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아 유럽 무대에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아일랜드에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안익태. 1940년]


 - 이 때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건 빨라도 1941년 이후이고, 그나마도 후술할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연관이 있다는 것. 일단 확실한 것은 1938년부터 3년간 헝가리 리스트 음악원에서 코다이 졸탄(1882-1967) 등에게 작곡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 안익태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경우, 미국과 유럽을 오가던 1936~37년 사이에 작곡되었고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애국가의 그 선율은 그 이전인 1935년 미국에서 구상하였고(애국가 작곡 시기는 표절 논란과도 관련이 있어 중요), 6.25 전쟁 이후 마지막 부분이 추가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한국 환상곡> 전곡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인데, 자세한 논란은 후술합니다.


 - 지금이야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안익태의 주요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휘였고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에 걸쳐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시기의 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3.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


 - 2006년 유럽에 유학하여 음악학을 공부하던 송병욱씨는 1942년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환상곡>을 지휘한 동영상을 소개하며, 안익태의 친일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이미 2000년경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적은 있었는데, 당시 단순히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영상'으로 알려진 게 사실은 만주국 기념 음악회였음을 밝혀낸 것입니다.


[안익태의 <만주국 환상곡> 지휘 장면]


 - 더 나아가서 <만주국 환상곡>의 음악이 <한국 환상곡>과 상당 부분(특히 6.25 이후 추가된 부분) 일치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음악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고, 거센 논란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도 안익태의 해방 전 유럽 활동은 그 세부적인 내용이 잘 밝혀져 있지 않았는데, 이를 파헤쳐 보니 대부분 친일 행적이었다는 것입니다.


 -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게 속속 드러납니다. 일단 안익태는 유럽 활동 내내 일본식 이름인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하였으며, 흔히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면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고 막연히 알려진 것도 대부분 <에텐라쿠>나 <교쿠토(극동)> 등 프로파간다성 작품들을 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심지어 1941년에는 명치절(메이지 덴노 생일) 축하 음악회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연주한 것까지 새로 알려졌습니다. ㅡㅡ;


 - 이 과정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초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유럽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통설과는 달리, 실제 안익태를 도운 것은 주로 '일본-독일협회'의 지원이었고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도 오히려 이 단체의 주선을 통해서였다는 것.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단순히 한두 번 만났을 때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들은 게 크게 부풀려졌을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에하라 고이치의 기고문]


 - 2015년에는 안익태의 후원자로 알려진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의 글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1952년 일본 음악잡지에 기고한 <안익태 군의 편모>라는 글에는 안익태의 이런저런 친일 행적과,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도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안익태 본인이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간판을 이용하여 유럽 각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4. 마요르카에서의 말년


 - 어쨌거나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1944년 파리에서의 지휘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범으로 몰릴 위험을 피하고자(안익태는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독일에서의 친일 활동이란 곧 나치에 협력하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도피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 이후 1946년에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고, 같은 해 스페인인 롤리타 탈라베라(1915-2009)와 결혼, 스페인 국적을 취득합니다. 이후로는 마요르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스위스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객원 지휘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한국 환상곡>의 완성된 버전을 공연한 바 있습니다.


[1960년대 초, 5.16 '혁명' 기념식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 해방 이후 안익태가 처음 한국을 찾은 것은 1955년인데, 하필이면 대통령 이승만의 생일 기념 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후 고국에 뭔가 봉사하고 싶었는지 잠깐, 친일파였잖아 군사정부와의 협조로 1962년부터 3년간 서울 국제음악제를 주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악제는 이후 재정난과 국내 음악계와의 마찰 등의 사유로 이어지지 못했고, 여기에 안익태는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결국 얼마 뒤 안익태는 간경화증 진단을 받았고, 1965년 7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이후 더 이상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달 뒤인 9월, 안익태는 간경화가 악화되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병원에서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5. 정리 : 사후의 논란과 애국가 문제


 - 그의 사후 <한국 환상곡>은 한국의 역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며,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꾸준히 연주되는 레퍼토리였습니다. 애초에 그의 생전인 1940년대에 <한국 환상곡>의 일부인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안익태와 애국가는 심지어 안익태 본인의 생전부터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일단 1960년대 처음 불거진 애국가 표절 논란입니다.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연구로는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안익태의 유럽 방문 전이었고, 유럽 지역의 노래를 일일이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표절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게 유력합니다.


[애국가 표절 논란의 주인공인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정말 비슷하게 들리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 표절 논란은 이렇게 흐지부지됐지만, 2000년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애국가는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친일파의 곡을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쓸 수 있는가'라는 것. 뿐만 아니라 애국가 저작권 문제도 제기되면서 그야말로 '노래 하나에 전국이 들끓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단 저작권 문제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롤리타 안이 쿨하게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되었고, 애국가 교체 논란도 현재는 어느 정도 잦아든 것으로 보입니다.


 - 어쩌면 안익태의 일생은, 왕족이나 엘리트 관료의 삶보다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볼 때, 그의 친일 행적은 유럽에서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적극 이용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물론 그가 서양음악 불모지에서 대단한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음악가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와 함께 그 재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는 교훈을,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ahneaktai.or.kr/?page_id=62 (안익태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osen.mt.co.kr/article/G1109303001 (야구선수 안익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15474 (송병욱씨 인터뷰)

http://weekly.donga.com/List/3/all/11/78800/1 (친일논란 관련 주간동아 기사)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102808201102638&mobile=Y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1)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75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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